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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雜다한 글

수리산을 오르다

by 石基 2008.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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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을 오르다

 


지난 한달 동안 운이 좋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 수리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안산에 살면서 언젠가 수리산을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수리산을 타도록 도움을 주셨던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람은 이렇게 우연하지 않은 인연을 통해서 그 바램을 이루게 되나 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안산에 살게 되면서 수리산을 오르고 싶었던 것은 수리산이 안산의 진산이기 때문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좌청룡․우백호, 배산임수의 지형이 안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것을 수리산을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수리산을 올랐던 분들은 이 말이 무엇인지 아실 겁니다. 다들 아시는 얘기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아량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택한 길은 수암동을 통해서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수암동은 예전에 안산관아와 향교가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안산동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그래도 아직도 버스 안내 방송에서는 구 수암동으로 방송이 나오지요. 그만큼 유서 깊은 동네입니다. 예전에 서울 살면서 텃밭을 오고갈 때 그 동네를 지나다녔는데 그때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수암이라는 동네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큰 규모의 동네가 형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관공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 동네인데 길 가에 있는 변두리 동네에 걸맞지 않는 큰 동네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며 그저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동네의 유래를 알게 되니 이해가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아무 동네에나 들어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동학혁명의 발상지로 알고 있는 고부군에는 전라도에서 가장 큰 향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수세니 뭐니 하면서 유명한 학정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고부군의 크기가 지금과는 다르게 어마어마하게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고부군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그것은 일제에 의해서 고부가 행정구역이 부안과 고부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아직도 고부군 관아와 향교가 있던 자리에 가면 조병갑이 자기 부친의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서있다고 하니 우리의 역사청산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수암이라는 동네에는 안산관아와 경기도에서 가장 큰 안산향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안산이 차지하는 역사성과 중요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네 이씨 아저씨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관청은 물론 버스도 수암에서 타고 다녔다고 하니 그 동네가 얼마나 큰 규모였을지 어림잡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수리산을 오르기 위해서 수암동을 거닐다 보니 그 동네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오래된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도시 같은 경우 개발의 광풍으로 사라졌을 나무들이 그래도 수암동에는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느 마을이나 동네 정자나무로 이용되는 300년 넘은 느티나무며, 양반집에서 정원수로 키웠다는 250년 넘은 회화나무가 그 자리에서 아직도 살아남아 옛 정취를 품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를 보면 그 장구함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데 이 나무들을 보고서도 그랬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살면서 사람들의 온갖 생활을 다 보고 버텨왔을 테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동네를 지나면 곧 등산로를 만나게 됩니다. 등산로에는 어디나 그렇듯 음식점부터 노점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다른 산과는 다르게 이곳 등산로에는 텃밭에서 나오는 농작물을 파는 분들이 계셔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분들이 파시는 농작물이 바로 제철 작물이었고, 농약을 쳤던 화학비료를 줬던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에 좋다고 무조건 철에 맞지 않게 나오는 유기농산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제철 작물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즘은 유기농산물이 소위 뜨면서 유기농산물이면 무조건 좋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제철에 맞게 나오는 농산물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유기농산물이라고 외국에서 수입되는 것들도 많은데, 우리 땅․우리 기후에서 제때에 나오는 농산물과 비교해서 더 낫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수암동을 통해서 오르는 길은 참 가파릅니다. 그 길을 통해 오르자니 그동안 각종 오염에 찌든 폐 속 깊숙이 활력이 드는 기분입니다. 이것이 기분뿐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지 몰라도 어쨌든 느낌만은 상쾌합니다. 길을 오르면서 보이는 나무들이며 길옆에 흐르는 계곡 소리도 상쾌함을 더해줍니다. 어느 정도 오르고 보면 작지만 쏟아지는 폭포의 모습이 앙증맞고,  은 관악산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난곡이라는 관악산 자락입니다. 그래서 관악산을 동네 뒷산 가듯이 자주 찾았는데, 이곳에 오니 마치 옛날 동네 뒷산을 찾아온 듯해서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길을 오르고 나니 헬기장이 나왔습니다. 군인들이 진지공사로 만들어 놓았을까요? 이곳에서 헬기장을 보니 예전에 군대에서 진지공사를 했던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는 씩씩대며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이 이렇게 이용될지는 몰라도 널찍한 헬기장을 보니 그곳도 이렇게 이용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 헬기장에서 안산을 바라보면 안산이 그대로 발밑에 보입니다. ‘안산이라는 도시의 모양이 저렇구나. 고잔신도시가 저렇게 생겼구나. 저기는 어디쯤이겠다.’ 하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조금 더 힘을 내서 수암봉에 오릅니다. 수리산이라는 산이름이 응봉이라는 곳에서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수리산이라는 이름이 이치를 닦는 산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독수리바위에서 이두처럼 음차를 해서 수리산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직 독수리 바위가 어느 곳인지 모르는데 언젠가는 알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수암봉은 그리 험하지 않지만 그래도 술 취해서 오른다면 참 위험한 바위입니다. 한 번은 오르는데 위에서 오르던 분이 떨어뜨린 돌이 굴러오는 것을 간신히 발로 세운 적도 있습니다. 그 돌이 그대로 굴렀다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그 바위를 오르고 나면 수암봉 정상에 서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안산은 물론 멀리 군포와 안양, 그리고 관악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동차의 시끄러운 소음이 귀에 닿게 됩니다. 외곽순환도로라고 들었는데 참 보기 흉합니다. 우리는 도로를 편리하게 빠르게 이용하는데, 도대체 산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괜시리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자동차 도로를 이용하면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예전부터 오고 갔을 길이 이제는 자동차만 이용할 수 있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서 구불구불하다는 핑계로 직선도로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발전인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됩니다.


오늘은 수암봉까지 오르기로 하고 수암봉에서 바라본 도로를 보며 예전에 썼던 글을 덧붙이려 합니다. 지지난해 늦가을 수리산 터널을 지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수리산 터널을 지나 강남으로 접어드니 마침 거리에서는 가로수 전지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 것을 보면서 느낀 바를 적었던 글입니다.




산은 길을 내주지 않았다



거세당한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도심의 난잡한 길을 걷는다.

그 길은 어느새

이름 모를 산자락,

그 언저리에 닿아 있다.

 

길은 영원의 샘에서 뿜어져 나온

생명수를 모두 집어 삼키며

고개 넘어 이름 모를 마을 어딘가로 이어진다.

 

그러나 산은 길을 내주지 않았다.

길은 아무런 양해도 없이

산의 부드러운 속살을 후벼파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가 하면

팔다리도 무참히 잘라내어

아무 볼품없이 길바닥 옆에

피가 흐르는 대로 내동댕이 쳐버렸다.

 

내가 오고 감에 길이 생겼지만

그 길은 이런 길이 아니다.

굽이굽이, 고개고개

능선 따라, 계곡 따라

영원의 샘물을 마시며 넘었을

그 옛적 호랑이가 살던 길.

봄에는 들꽃 피고

여름에는 새가 울며

가을에는 추수하던 길.

생명이 숨 쉬며 함께 걷던 길이었다.

 

이제는 죽어버린 시커먼 길

그 길 밑에 살아있을 붉은 흙의 신음소리에

가만히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귀를 대어 본다.



수리산을 오르다. 2


수암봉 정상에서 헬기장 쪽을 쳐다보면 산능선으로 길이 뻗어있는 것을 희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가만히 쳐다보면 사람이 움직이는 것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꾸물꾸물하는 것이 무슨 곤충을 보는 듯합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도로에서 자동차가 움직이는 모습도 장난감 자동차가 움직이는 듯 천천히 달립니다. 도로 바로 옆에서 자동차를 보면 씽하고 눈깜박할 새에 지나가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천히 움직입니다. 사람의 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그 흐름에 말려 있으면 걷잡을 수 없이 흐르지만 한 발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안에 있을 때보다 쉽게 내 호흡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 행보를 바라보면 오히려 내가 왜 그랬는지 후회하는 일도 많습니다. 정말 화나고 슬프고 힘들 때는 한 발 물러나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면 다툼이나 좌절은 적어질지도 모릅니다.


위태롭게 수암봉을 오른 것만큼 내려가는 길도 험난합니다. 온힘을 다 짜내서 올라간 사람이라면 더 위험합니다.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올라갈 때는 어떻게 어떻게 힘을 내서 오르지만 내려가는 길에는 그 힘을 다 썼기도 하지만 내려가는 길이라고 쉽게 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잘 나갈 때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야하고, 어렵게 사는 주변 사람을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산을 타는 일은 꼭 그것과 비슷합니다. 산을 타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차를 타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서 휭하니 왔다가, 먹고 마시고 휭하니 가버린다면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지리산 노고단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으니 좋다면 좋은 세상이고 슬프다면 슬픈 세상입니다. 예전에 지리산을 고생고생하면서 오르셨던 분들의 말을 들으면 이런 현실을 슬퍼하시지는 않아도 씁쓸해하셨는데 그 기분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능선을 타고 길을 따라가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굴곡이 있는 동네 골목길을 걷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길에서 안산 사는 여러 분들도 보지만 이런 저런 나무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 제가 이름을 아는 나무는 붉나무, 밤나무, 산초나무, 떡갈나무가 있습니다. 참, 소나무도 있군요. 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나무가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소나무를 볼 수 있나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기 때문에 소나무가 굴곡 많은 우리 민족의 삶을 대변하는 나무가 됐나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나무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철망이 길 따라 쭉 쳐져 있습니다. 듣기로는 미군 부대 탄약고가 여기에 있어서 철망이 쳐있다고 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미군 부대에서 쳤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산을 망치고 있는 듯해서 그렇습니다. 탄약고라면 창고 주변에만 치면 될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부지를 차지하고 앉아서 등산하는 사람을 침입자로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영문으로 들어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철망을 제거할 수 있다면 어느 단체든 나서서 해결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철망을 따라 걷다보면 갈림길에 접어듭니다.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갈림길에서 선택의 고민을 하게 됩니다. 수리산이 그만큼 깊고 큰 산이라는 반증이지요. 진짜 가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참 넓습니다. 무슨 강원도도 아닌 서해 바닷가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무수한 갈림길이 있었지만 제가 선 갈림길은 수리사와 동막골로 나뉘는 곳입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과 관련 있는 수리사로 가는 길, 얼마 전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웰컴투동막골로 가는 길, 두 길이 놓여있습니다. 어느 길로 갈지는 산을 타는 사람 기분에 따라서 정할 따름입니다. 어느 길로 가는 것이 빠른지,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은지, 따질 바가 아닙니다. 갈림길에 처한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뿐이지요. 우리는 비단 이런 길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갈림길에 마주하게 됩니다. 언제나 정답이 마련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정답이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항상 고민하지만 어쨌든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고, 그래서 언제나 후회라는 감정이 따르는지도 모릅니다. 류시화 씨의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글이 그래서 나왔나 봅니다. 무수한 갈림길 중에서 내가 어느 길을 선택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길로 와줬으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나의 길을 강요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선택한 길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걸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걷노라면 틀림없이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이 맞네 틀리네 하면서 싸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동막골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해서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았구나 하면서 가볍게 길을 가다보면 이정표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는 왼쪽으로는 군포, 오른쪽으로는 동막골, 앞으로는 너구리산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동막골을 보면서 꼭 영화가 아니라 왜 동막골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동막골일까요? 동막골 마을을 생각하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동쪽이 막힌 골짜기라서 동막골인가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산 동막골의 동쪽은 수리산이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아니라면 할 수 없지요. 아무튼 너구리산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이 길로 가면 밭으로도 내려갈 수 있고, 집으로도 갈 수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왔습니다.



수리산을 오르다 3


너구리산의 원래 이름은 부곡산이었을 겁니다. 수암봉에서 안내사진을 봤을 때 분명히 이곳은 부곡산이라고 명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정표에는 너구리산이라 되어 있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군대 작전지도에는 너구리산이라 되어 있는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이 부곡산에 기인하여 부곡동이라는 지명이 나왔을 것입니다.

부곡산의 초입은 상당히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경사가 45도 이상은 될 것 같은데 집사람과 함께 오르면서 항상 거짓말만 한다고 꾸중을 많이 들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면 저는 주로 걸어다니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1시간 정도 걷는 길은 ‘조금만 가면 다 간다.’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요즘은 전부 차로 다니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15분 정도 걷는 거리도 멀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시골에 가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길을 여쭈어보면 1시간 정도의 거리는 금방 간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말들의 차이만큼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 변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익숙해져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하루 정도는 마음놓고 쉴 수 있어도 그 시간이 사흘, 나흘로 길어지면 좌불안석이 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시간의 여유로움에 질식할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적응이 되더군요. 주5일근무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뿌리를 내리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가파른 길을 오른 후 잠시 숨을 고르며 바위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70이 훨씬 넘으신 할아버지 두 분이 뒤따라 올라오셔서 제가 있는 곳에서 함께 쉬십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두 분은 수리산역에서부터 이곳을 지나 상록수역까지 가신다고 합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왕성한 체력에 먼저 놀랐고, 일상적으로 그렇게 산을 타신다는 것에 또 놀랐습니다. 사람은 늙을수록 활동하고 일을 해야될 것 같습니다. 노인을 위하는 길은 집안에 가만히 모시는 것이 아니라 끊이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인문제가 많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가끔 탑골공원이나 종묘공원을 지날 때면 모여 있는 노인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을 보면서 가슴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무기력한 몸동작, 체념한 듯한 눈동자, 시끄럽게 떠들고 모여서 탁주라도 한 잔씩 하시는 분들은 그나마 낫지만 초점 없는 눈동자로 물끄러미 과거를 바라보는 듯한 노인분들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비애감을 느꼈습니다. 그 모습은 저녁 석양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초라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살아있는 시체와 다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천도교 본부 옆에 있는 노인복지센터에 들어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풍기던 퀘퀘한 냄새를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문득 들었던 생각은 노인분들만 모아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곳에 유치원을 함께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의 기운과 아이들의 기운이 서로 잘 어우러져서 둘에게 모두 좋을 것 같고, 옛날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돌보듯 하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았습니다. 요즘 복지가 뜨고 있는데 관계를 다 잘라내고 한 분야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복원이 복지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부곡산을 걸으며 생각해보니 수리산은 전체적으로 바위가 많았습니다. 바위가 많은 산을 풍수에서는 火기운이 강한 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火기운이 강한 산은 이른바 기도발이 잘 받는 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당들이나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수리사로 오르는 길을 걸어보니 이곳 저곳에 기도처가 많았습니다. 다 그런 이유에서 그렇게 모여들었나 봅니다. 산을 다녀보면 내 기운과 맞는 산과 그렇지 않은 산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주로 육질이 풍부한 흙산이 더 좋습니다. 저는 관악산 밑자락에서 태어나 화기운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는지 사주에 화기운이 많은데, 그걸 보완해줄 수 있는 것이 토기운입니다. 그래서 바위산을 가면 왠지 힘이 더 듭니다. 바위산이라도 흙이 있는 부분을 걸을 때와 바위가 있는 부분을 걸을 때 느낌이 확실히 다릅니다.


능선에 올라 한참을 가다보면 빨간색으로 낚시터 몇 미터 하는 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텃밭 입구에 있는 친절한 양어장 주인아저씨가 세워놨나 봅니다. 이런 수까지 생각하셨다니 속으로 새삼 놀랐습니다. 전에 내려가 보니 이 길로 가면 곧 텃밭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집까지 갈 생각으로 앞으로 나섰습니다. 앞으로 나가다 보니 좁은 소로를 따라가게 되는데 누가 손을 써 놨는지 단정하게 길이 닦여 있었습니다. 참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그 분들 덕에 이렇게 편하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부곡동으로 가기 위해서 길을 가다 보면 터널 위를 지나게 됩니다. 이곳부터는 차소리가 좀 심하게 들립니다. 내가 듣기에도 이렇게 거슬리는데 동물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는 길에 동물들을 쉽게 볼 수 없었습니다. 왠지 나무들도 힘들어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렇다고 자동차를 없앨 수도 없고, 안타고 다닐 수도 없고, 자동차는 정말 필요악 같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조용한 길을 천천히 사색을 하며 걷는 맛도 뺏어가고, 그리운 사람을 물어 물어서 어렵게 고생하며 찾아가는 맛도 뺏어가고, 걸어서 동네 시장에 가기보다는 차를 타고 대형마트에 가도록 만들고, 왠지 빼앗긴 것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아서 괜히 억울합니다.


이곳에서 일동까지는 처음 가는 길이라 길을 찾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이 길은 사람이 그리 많이 안 다니는지 마주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참 무서워보였습니다. 골프장에서 누가 침입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길옆으로 쭉 철조망을 쳐놨습니다. 괜히 걷다가 바지라도 걸려서 찢어질까봐 조마조마하고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지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집사람 얘기를 들으니 원래 골프장 있던 곳에 실외수영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여름만 되면 놀러 다녔다고 하더군요. 그랬던 곳이 지금은 어마어마한 땅에 일부 소수만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니 씁쓸합니다. 개인적으로 골프와 스키라는 운동은 우리 땅에 맞는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점점 생활하는 방식이 달라지다 보니 이제는 골프, 스키가 마치 대중운동이 된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골프, 스키이야기가 나오고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겨울이 되면 스키나 보드를 타러 갈 이야기를 하고, 골프이야기를 나눕니다. 스키장과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서 깎이는 산, 잘려지는 나무, 쫓겨나는 동물에 대해서도 한 번씩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미국 같이 땅이 넓은 나라야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만들어도 티도 안 나겠지만 우리 같은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었지만 어떻게어떻게 집 뒷산까지 무사히 찾아왔습니다. 시간을 보니 다섯 시간을 넘게 산을 탔더군요. 익숙해지면 더 빠른 길도 찾고 다르게 올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집 뒤에 이런 엄청난 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 동네가 더 사랑스러워집니다. 앞으로도 서울에서 친구들이 찾아오면 한 번씩 뒷산 구경을 시켜줄 생각입니다. 동네 자랑할 것이 많아서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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