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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雜다한 글

화창한 주말

by 石基 2008.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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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1주 만에 찾아온 화창한 주말이다. 이런 날씨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올 여름 잦은 비와 태풍으로 큰 피해를 당한 농민분들에게 그나마 오늘 같은 날씨가 계속 되어준다면 남은 가을 농사가 괜찮을텐데...


텃밭은 지난 주보다 가을색이 더 짙어졌다. 밤이나 도토리를 주우러 다니시는 아주머니들까지 텃밭 근처 산에 등장하셨다. 말이 아주머니지 할머니에 더 가깝다고 할까? 그 나이대 위로는 정말 부지런한 삶을 사시는 것 같다. 그 어른들이 보기에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게을러 보일까. 다들 자기가 제일 바쁘고 부지런하다고 하는데, 일에 치여 부지런한 삶을 사는 것보다 스스로가 즐겁게 부지런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적당히 게으를 때는 게으르면서...


지난 주에 와 보았을때 배추들이 비실거려서 걱정이 많았었다. 벌레에 먹히고, 누렇게 잎이 뜨고 ... 그 모습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듯 아픈 것이 꼭 내 발가락마냥 그렇다. 어디 어떤지 가장 먼저 눈이 간다. '아니 세상에 이럴수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엄청 건강하게 잘 자라 있었다. 벌레에게 융단 폭격을 맞은 놈들과 많이 비실대던 놈들은 여전히 작은 몸집이었지만 2/3 넘게는 크고 건강하게 자라 있었다. 더욱 기뻤던 것은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목요일 논어 공부모임 때 안철환 선생님께서,

"석기씨, 배추 꼭 거름줘야해. 배추는 거름을 많이 먹고 특히 올해는 더더욱 거름 안 주면 힘들거야."

라고 하셨기에 '지난 주에 거름을 주고 갔어야 하는데...'라며 절절히 후회하고 있었던 차라 건강하게 잘 자라 있는 모습에 정말 뛸듯이 기뻤다. 한가지 더 자랑하자면 거름 많이 준 안철환 선생님 밭에 있는 배추들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는 것이다. 내가 심고 기르는 놈들이라 그런지 내 눈에는 그렇게만 보였다.


이렇게 잘 된 것이 왜 일까 나름대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왜 일까?' 혹시... 내가 배추를 심은 밭이 봄에 감독님이란 분이 쓰던 곳인데 그 분이 정성들여서 밭을 잘 살려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라는 결론이 났다. 그 분이 산에서 낙엽이며 뭐며, 정말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듯이 가꾸신 것이 나에게 이런 혜택으로 돌아온 것 같다. 정말 고맙고도 고마울 뿐이다. 감독님에게도 고맙고,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쏟으면 거짓없이 그대로 아니 그보다 몇 배로 돌려주는 땅에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앞으로 해코지하는 일 없이 소중하게 가꾸고 돌봐서 받은 만큼이라도 돌려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무들도 저마다 고개를 길게 내빼고 땅 위로 솟아올랐다. 봄에만 해도 뭐가 무순이고 뭐가 잡초인지 몰라서 순풍순풍 다 뽑아버리는 무지함을 드러낸 내가 이제는 뭐가 무순이고 뭐가 잡초인지 구별하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무순이 다치지 않게 주변에 난 풀들을 뽑아내면서 잘 자라라고 마음속으로 이야기 해 주었다. 어느 책에선가 봤는데 일본에서 한 소녀가 식물과 대화하면서 키우니 불모지나 다름 없는 땅에서 놀랄만한 수확을 거뒀다고 한다. 그걸 읽고 나서 나도 땅과 생명과 만날때에는 기쁘고 좋은 맘으로 즐겁고 밝은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왔던 차라 씨를 심을 때부터 말도 걸고 인사도 나누고 덕담과 격려의 말도 해주었다. 그 덕분인지 아닌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런 마음으로 만나니 더 애정이 가고 예쁘다. 봄에는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곤 했는데 카세트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오히려 잡음이 많아 스트레스만 될 것 같아 포기했다. 나중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게 되면 내다버린 전축과 스피커를 줏어다가 전기를 연결해서 음악도 틀어줄 것이다. 식물도 식물이지만 일하는 나도 들으면 좋으니 일석 몇조가 될 것이다.


처음으로 열매를 맺었던 호박은 아쉽게도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버렸다. 땅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데 거기에 직접 맞닿은 채로 놔둔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다른 호박들은 그나마 괜찮도록 풀을 깔고 그 위에 놔주었다. 누런 늙은 호박 한 번 따보자.


내년에도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면 어디에 무엇을 심을지 머릿 속에 대충 그려진다. 땅과 주변 환경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머릿 속에 새로운 생각들이 뭉실뭉실 떠오른다. 옆에 놀고 있는 논도 빌려서 논농사도 지어보고 싶고, 쭉 둘러쳐진 철망을 이용해서 오이와 호박과 옥수수와 토마토와 해바라기를 심으면 좋겠고, 질퍽질퍽한 밭에 배수로를 확실하게 파서 물기 좋아하는 토란, 고구마 같은 놈들을 심어주고, 적당하게 보습이 잘 되는 곳은 이번과 겹치지만 않게 계획을 짜서 작물을 심어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시간가는 줄도 모르겠다. 참, 뭐니뭐니 해도 내 손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일은 거름 만들기와 씨종자 받기 이다. 왠만해서는 그런 욕심이 없는데 이 두가지는 꼭 이뤄내고 싶은 일이다.


밭으로 가는 길에 심어놓은 농사꾼 아저씨들의 토란은 왠만한 사람키 만큼 멋들어지게 자라있는데 내 밭의 토란은 아주아주 작다. 그래서 내가 무릎토란 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무릎토란들은 지금 무릎보다 좀 높게 자라 있는데 먹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콩쥐팥쥐에서 콩쥐는 착한아이이고 팥쥐는 나쁜 아이로 나오는데, 노오랗고 앙증맞은 팥꽃이 얼마나 이쁜지 모른다. 콩쥐 팥쥐는 꽃보고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쓰임새나 열매 생김새를 보고 이름을 지었나보다. 콩도 팥도 예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수확하는 날만 고대하고 있다.


길다란 수수들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고 꿋꿋하게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이제는 왠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든든하다. 수수는 어떻게 먹는지 모르는데...절구에 껍질을 벗겨서 밥에 넣어 먹으면 될까?


들깨수확이 멀지 않았다. 이제 꽃은 다 졌고 열매가 튼실히 맺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조금 건들라치면 풍기는 들깨 향이 얼마나 강하고 좋은지. 색이 강한 식물보다 향이 강한 식물은 정말 매력있다.

나는 스스로 후각이 좀 예민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나랑 잘 맞는가 보다.


오래간만에 화창한 날씨 아래에서 일을 하자니 땀이 송글송글 맺혀서 뚝뚝 떨어지는 것이 정말 개운하니 기분이 좋았다. 태음인의 체질인 나는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 건강함의 신호라 했으니 일부러라도 땀을 내야겠는데, 이렇게 저절로 땀까지 쭉 내니 정말 나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비록 주말에 한 번씩 찾아가서 땀을 내어 그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내가 흘린 땀과 노력만큼 거둘 날이 다가온 다는 사실에 마음은 벌써 가득차기만 한다.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땅, 하지만 거기서 거둬들이는 것은 풍성한 먹거리만이 아니라 풍요롭고 평화로운 마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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