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탐독했다.
개인적으로 갑자기 선조와 광해군 때 조선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궁금해져서 찾다보니, 인조와 효종, 현종, 숙종, 서인, 노론, 소론, 남인, 청남, 탁남, 송시열 등등이 줄줄이 딸려나왔다.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평양에서 의주로 피난을 가는 꼴을 보고 조선 민중들은 엄청난 실망에 빠졌다고 한다.
얼마나 실망했는지 군사를 모집하러 돌아다니는 왕자들을 잡아서 왜군에게 넘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만도 하지, 사회 지도층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 같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그리고 임진왜란은 몰랐는데 장기전이었다고 한다.
왜군이 쫓겨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울산이나 진주 등 경상남도 지역에서 장기 농성전을 했던 전쟁이라 한다.
그렇게 남아있던 왜군들이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은 일본에서 다시 넘어온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주둔군이 핵심이었다고 한다.
또, 명군이 개입한 것은 왜군이 조선을 삼킨 후 중국으로 넘어올까봐 조선땅을 전장으로 국한하여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명군이니 전의가 있을리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강화를 맺어서 적당히 타협하려고 했다.
그런 명나라에게 끝까지 사대를 한 선비들은 정말 시대착오병에 걸린 것일까?
꼭 그렇게만도 볼 수 없을 것 같다.
기득권이라고 해야할까? 사회질서라고 해야할까?
명나라, 황제의 나라, 세계의 중심을 설정하지 않고는 지배논리가 성립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마치 지금의 미국을 섬기는 우리나라처럼 말이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사대주의라든지 성리학적 질서가 성립된 상황은 아니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상속을 받고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으며, 결혼에 있어서도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남편을 '자네' 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만큼 여성의 권리가 높았던 나라였던 것이다.
지배층에서는 성리학적 질서를 마련하고 시행하였지만 아직 인민 한사람 한사람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자신들의 존재기반에 큰 위협을 느낀 사대부들이 서둘러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였다고 한다.
그런 결과 불거진 것이 효종, 현종, 숙종 때로 이어지는 '예송논쟁'이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송시열을 위시로 한 서인들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당파싸움이라고 하면서 조선의 정치체제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다.
물론 그때 그런 권력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그만큼 왕권이 약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왕이 일인지상인 사회가 아닌, 지금 영국의 내각제와 비슷한데 그보다는 왕권이 더 강한 상태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대신 그 부작용으로 당파싸움이 일어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왕권이 더 강했냐, 신권이 더 강했냐의 문제는 서양정치사에서도 자주 보여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그런 것이 사실인데, 당파싸움 때문에 안 된다느니 조선이 문제라느니 유교가 문제라느니 하는 말, 더 나아가 조선놈은 다 그렇다는 말은 정말 심한 자기 비하일 뿐이다.
무엇이 그리 떳떳하지 못하길래 자기 비하에 빠지는지 모르겠다.
당파싸움을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
자기 비하에 빠져서 그래서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그리고 그때 정치는 제도적으로 비밀정치, 공작정치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조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지방에 있는 선비들도 알고 있었고, 어떤 사안이 있을때마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상소라는 형태로 피력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오히려 언로가 더 개방적이었고 자유로웠다고나 할까.
물론 인구수가 지금보다 현저히 적어서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언론의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당파싸움이 대표적인 예송논쟁이라는 형식 싸움으로 빠진 경향이 있지만 좋은 의미로 보면 권력견제기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의 정치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마치 서양 중근세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송시열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리고 있다.
하지만 그가 꼿꼿한 선비였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의 일상생활에서부터 타인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영향력을 얻고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사상이 지배층, 특히 사대부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면으로 작용했고 자신과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으로 무시하고 공격한 것은 문제가 있는 행동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