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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반드시 의식衣食을 힘입어 사는 것이다. 옷은 상마桑麻에서 나오나, 상마를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목면木綿만 못하다. 우리나라에 문익점이 있은 것은 마치 광중廣中에 황시黃始가 있은 것과 같다. 누에를 칠 때 선잠先蠶 제사가 있다면, 지금 진주晉州 강성江城에도 문익점의 사당을 세워서 광중에 황시의 사당이 있는 것과 같이 해야 할 것인데, 아직껏 사당을 세우지 않았으니 우리나라 사람의 두서없음이 이와 같다.
어느날 나의 친구 남군南君이 공주公州에서 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목화농사를 오래 하다 보니, 그 묘리를 터득하여 남들보다 배의 수확을 얻는다. 목화의 성질은 습기를 싫어하는 것이므로 물이 잘 빠지는 전지를 택하여 심어야 된다. 《주례周禮》에 ‘밭가의 도랑은 깊이와 너비를 두 자로 한다’ 하였으니, 이 말을 표준하여 도랑을 만들 것이며, 땅은 사질토가 가장 좋다.

봄이 되면 먼저 밭을 세로 갈아[縱耕] 두 고랑을 합쳐 한 두둑을 만드는데, 너비는 도랑과 같이 한다. 그리고 입하立夏가 되면 쟁기로 그 높은 두둑을 없애고 가로 갈아[橫耕] 이랑을 만드는데, 간격을 한 걸음 정도로 한다.

한 사람이 소의 뒤를 따라가며 고랑에다 구덩이를 만드는데, 직경은 포백척布帛尺으로 반 자 정도로 한다. 이렇게 한 다음, 똥재를 구덩이 속에 넣고 양쪽 두둑의 흙으로 두텁게 덮은 뒤 손바닥으로 판판하도록 두드린다. 또 손으로 표지를 해서 씨를 뿌릴 때 알아보기 쉽게 한다. 이렇게 한 뒤에 종자를 뿌리고 흙을 덮는 것은 딴 곡식과 마찬가지로 한다.

솎아줄 때는 아주 드물게 해야 하는데, 토박한 밭에는 한 구덩이에 10포기, 토옥한 밭에는 6~7포기만 남기고, 서로 겹으로 붙은 것은 반드시 없애 버린다.
무릇 한 해에 6~7번의 김을 매는데, 첫 번과 두 번째 맬 때는 양쪽 흙으로 대강 북만 주고, 싹이 점점 자라 세 번째 맬 때는 양쪽 옆 흙을 싹 사이에 두텁게 끌어모아서 가지가 사방으로 벌어지도록 한다. 네 번째 맬 때는 더욱 높게 북을 주어 물이 쉽게 빠지도록 한다. 북을 많이 주어야 뿌리가 깊이 박혀 바람에 흔들려도 열매가 떨어지지 않는다.

똥재는 봄보리 한 마지기를 심는 데 소로 6~7바리를 실어내니, 똥재는 두엄만 못하다. 대개 목화의 성질은 뿌리를 깊이만 박고, 옆으로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에 똥재를 두둑 위에 흩뿌리는 것은 목화의 뿌리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구덩이를 파고 넣어야 그 줄기가 억세져서 곁순이 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뿌리가 흔들리는 까닭에 반드시 두텁게 북을 주고, 장마가 지면 잎이 무성해져서 열매가 썩어 떨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윗 순을 잘라 크지 못하게 하면서 옆으로 퍼지게 하여 햇볕을 받도록 한다. 대개 목화는 열매가 맺지 않음은 걱정할 것 없고 다만 열매가 맺혀도 목화 송이가 잘 피지 않을까 걱정인데, 이와 같이 가꾸기만 하면 맺힌 열매는 제대로 벌어져 목화 송이가 된다.

《시경》에 '삼을 심는데 어떻게 하나? 그 이랑을 가로 하기도 하고 세로 하기도 한다[藝麻如之何 橫縱其畒]’라고 하였는데, 삼 역시 건조한 밭이라야 잘되는 것이므로 이렇게 말했으니 옛사람이 농사의 묘리를 자세히 안 것이 이와 같다.

목화는 그 뿌리를 깊이 박는 것이므로 지기地氣를 가장 많이 손상시킨다. 같은 밭에 3년을 계속하여 목화만 심으면 목화송이도 차츰 작아지고, 목화의 질도 계속 나빠진다. 그러나 이 방법을 잘 이용하면 별로 실패가 없을 줄로 안다” 하였다.
어떤 이는 또 “이와 같이 할 것이 아니라 산 밑 경사진 밭을 비스듬하게 갈고, 오직 이랑에 물만 잘 빠지도록 하며, 싹을 솎을 때는 처음에 아주 드물게 하는 것이 좋다. 조금 큰 뒤 드물게 남기면 꽃이 가지 끝에만 있어 목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도 역시 옳다. 이 두 사람의 말은 산업에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자세히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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