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서쪽으로 요동과 인접하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왜와 통한다. 삼면의 바다 가운데 강토가 2천 리인데, 한강 서쪽은 세 조선의 옛터이다. 기준箕準이 뱃길로 남쪽으로 가서 마한의 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면서부터 삼한三韓이란 호칭이 생겨, 남과 북이 서로 교통하지 않았다. 삼국이 정립해서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어 백성이 편히 산 날이 없었다. 고려가 일어나서 삼국을 통일하고 한강 하류 비옥한 곳에 서울을 정했으나, 물자가 원나라로 들어가고 전쟁의 경보警報가 잦아 미처 번성할 겨를이 없었다.
성조聖朝가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옛날 백제의 땅으로서, 수륙의 길이 사방으로 통하여 운반되지 않는 물화物貨가 없으니, 거의 요충要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황해도와 평안도의 부세賦稅는 대부분이 사신 접대에 소비하고, 그 나머지는 전포錢布로 바꾸어 쓸데없는 곳에 써 버린다. 동남東南의 부세는 태반이 왜국의 구호곡救護穀으로 들어가고, 오직 서남西南(호서·호남·영남)의 부세만 우리가 이용한다. 그러나 운반에 기술이 없어 계속 썩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에는 경비가 부족하고 백성에겐 저축이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사하여 입에 풀칠하지만, 아침에 저녁을 예측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서울 근방은 토지의 소출이 적은데 부역은 많고, 바닷가에는 어염魚鹽의 이利가 있으며, 산중에는 땔나무와 재목을 팔아 이익을 본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어 도둑질하는 자가 많다. 대개 우리나라는 산과 늪이 국토의 7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메마른 곳이 비옥한 곳에 비하여 몇 곱절 정도 뿐이 아니다. 서남西南에 바다를 막아서 농지로 만들어 많은 곡식을 생산하나, 가뭄이 들면 소출이 줄어들고 조수潮水가 넘치면 농사를 망친다.
또 벌열閥閱을 숭상하는 습속이 있어, 한 집안에 높은 벼슬을 한 자가 있으면 온 일가붙이가 농기구를 버리고 일하지 않는다.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법이 있어서, 문관·무관도 아니며 고조高祖·증조曾祖가 벼슬하지 못했는데도, 종을 부리며 편안하게 앉아서 여유있는 생활을 한다. 만일 몸소 농사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단한 수치로 여겨 서로 혼인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놀고 먹는 자가 반이 넘는다.
또 녹을 먹는 집마저도 그 녹이 농사에서 얻는 수입을 대충하기에 부족하며, 아전들은 녹도 없이 공일만 한다. 그러므로 모두 뇌물을 받아 생계를 삼는다. 뇌물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백성의 힘은 이미 고갈되었다.
또 경卿의 아들은 항상 경이 되어, 귀하고 현달한 자가 모두 한미한 집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알지 못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치와 교만을 날로 더해 가는데, 그것을 보고 따르는 자들이 많다.
사치하면 부족해지고, 부족하면 가난해지며, 가난하면 어쩔 수 없이 백성을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살 의욕을 상실하여 농사일에 전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물은 사가私家에도 저축되지 않고 국가에도 저축되지 않아, 천하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나라가 가난하면 백성은 더욱 곤란해지는 것이니, 이는 백성의 산업을 제정하는 이가 알아야 할 것들이다.
경기京畿는 토지가 메마른데도 인구가 밀집했으며, 토지의 소출이 가장 낮은데도 서울로 수송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이 가장 가난하다. 서남은 감이 많이 나고, 동북은 배·밤·땔나무·숯이 많이 난다.
여주驪州와 이천利川 사이는 벼가 다른 고장보다 먼저 익으므로 매우 많은 이利를 본다.
인천仁川과 남양南陽 사이는 그 지질이 붉은 찰흙인데, 기름지지는 않으나 보리가 잘되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개성開城은 고려의 옛 서울로서 한양과 가깝고, 서쪽으로 중국의 물화를 무역하여 화려한 것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으니, 아직도 고려의 유풍이 남아 있다. 성조聖朝가 건국한 뒤 고려의 유민들이 복종하지 않자, 나라에서도 그들은 버려 금고禁錮했다. 그래서 사대부士大夫의 후예들이 문학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여 몸을 숨겼다. 그러므로 손 재주 좋은 백성들이 많아 그곳 물건의 편리함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는 옛 백제의 땅이다. 김제金堤의 벽골제는 신라 때 처음으로 만든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많은 농지에 수리水利의 혜택을 주므로 백성들은 그 혜택으로 먹고 산다. 이 호수 아래쪽을 호남湖南, 오른쪽을 호서湖西라고 하는데, 지금은 조령鳥嶺 이북의 여러 고을까지 합하여 호서라 하고, 조령 이남 경상도를 영남嶺南이라 하여 호서·호남과 함께 삼남三南이라고 한다.
호서·호남의 부세는 바다를 경유하여 한강으로 들어오고, 영남의 부세는 조령을 넘어서 한강으로 들어오며, 영북嶺北 여러 고을의 부세도 한강을 경유하여 서울로 온다. 삼남의 부세는 나라의 여러 가지 수요에 쓰인다.
충청도忠淸道는 서쪽은 바다에 닿고, 남쪽은 호남, 서쪽은 경기와 인접했다. 물산과 인구는 영남·호남과 비슷하나, 풍요함이 미치지 못할 뿐이다,
충주忠州는 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영남과 통하는데, 장사꾼의 화물과 공물, 부세 등이 모두 이곳에 와서 수운水運되므로, 백성 가운데 농업을 버리고 배를 타는 자가 많다. 사대부들이 모여 살므로 약한 백성이 폐해를 입는다. 세속에서는 이곳을 인색한 고장이라 한다.
공주公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인데, 산수가 아름답고, 산농山農(화전민)과 야농野農 모두 누에·모시·삼·목화에 힘써서 사철 내내 일이 있으므로, 부녀들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웅천熊川(금강)을 따라 흘러온 미선米船(곡식을 싣는 작은 배)의 곡식을 이곳에 와서 해박海舶(바다를 운항하는 큰 배)에 옮겨 싣기 때문에, 품삯이 비싸고 일거리도 많아 빈민들은 그것을 의지하여 살아간다.
청산靑山과 보은報恩 사이는 깊은 산중이라서 별다른 산업이 없고, 대추가 잘 되어 벌레먹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방의 장사꾼들이 모여든다. 은진恩津은 웅천熊川 상류에 위치했는데, 상선商船이 모여들고 물화가 많이 축적되어 있어 나라 안에서 이利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임천林川과 한산韓山 사이는 모시로 유명하다.
대진大津 서쪽을 내포內浦라고 하는데, 어염魚鹽으로 유명하다. 섬에는 소나무를 길러 도벌盜伐을 엄중히 금하는데, 전함을 건조하기 위함이다.
전라도全羅道는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이고, 동쪽은 대령大嶺이 경계이다. 사람들은 방술方術(술법)을 좋아하고, 과사夸詐(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 논이 많으므로 물을 가두었다가 때가 되면 모를 내고, 농사일이 끝나면 백성은 모두 쌀밥을 먹어 콩과 보리를 천하게 여긴다. 남쪽으로 제주와 통한다.
제주는 약물藥物과 귤, 단단한 재목, 무늬목 등이 풍부하고, 산에는 사슴이 많다. 대개 사슴은 바다의 고기가 화하여 되는 것인 듯한데, 가죽과 용(茸)이 비싸다. 국가에서 목장을 만들어서 많은 말을 길러, 해마다 허다한 말을 공마貢馬로 바친다. 서민들도 대개 말을 길러 온 나라를 상대로 장사하며, 또 소도 많이 길러 고기를 실컷 먹는다. 이 고장은 토맥土脈(지층의 연속한 맥락)이 부천浮淺(단단하지 못한 것)하여, 반드시 말을 몰아넣어 단단하게 밟힌 뒤에 비로소 씨를 뿌린다. 우황牛黃과 말총이 가장 값이 많이 나간다.
전라도에는 대밭이 많으므로 강죽杠竹(깃발을 다는 장대), 전죽箭竹(화살을 만드는 대), 죽선竹扇 등을 공물로 바친다. 수령들은 죽선을 많이 만들어서 조정의 고관과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는데, 그 비용이 적지 않아서 백성들이 폐혜를 입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반드시 테가 있는 삿갓을 쓴다. 대를 엮어 테를 만드는데, 김제 것이 으뜸이고, 제주 것이 다음이다. 또 빗을 만드는데, 지금 우리나라 집집에서 쓰고 있는 빗은 모두 호남에서 만든 것이다. 행상行商을 좋아하는 풍속이 있기 때문에, 제주 가까이 갈수록 말 값이 도리어 비싸다.
전주全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다. 장사꾼이 더욱 많아 온갖 물화가 모여든다. 생강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데, 지금 우리나라 전역에서 쓰는 생강은 모두 전주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풍속이 사나워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데, 전주가 가장 심하다.
기질氣質이 나약해서 추위와 주림을 참지 못하는 것은 도내道內가 모두 마찬가지다. 곡식이 흔하기 때문에 강호强豪들이 재물 모으기가 쉬워서, 좋은 옷에 좋은 말 탄 호족들이 곳곳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약한 백성을 괴롭히지만, 관官에서도 금할 수 없는 상대가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객호客戶(타향에서 온 사람의 집 또는 사람)를 고용하여 제멋대로 종이라 부르고, 갓 쓰고 도포 입고서 선비인 체하여 점병點兵에도 참여하지 않는 자가 2/3나 된다.
그 나머지 1/3만을 문부文簿에 적어 역사에 조발調發하므로, 그 역사가 과중하여 세민細民(빈천한 백성)들은 제집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삼형제를 둔 집에서는 아들 하나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역사를 피하기 때문에, 도내 곳곳에는 크고 작은 사찰이 널려 있다. 중들은 농사짓지 않고 민가에서 얻어 먹으니, 농사를 해침이 더욱 심하다. 중들이 하는 일은 신을 삼고 종이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종이는 닥나무가 원료인데,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萬馬洞 것이 가장 좋아서 물화 축에 끼인다. 바닷가에 위치한 산에는 소나무를 기르는데, 제주도처럼 사슴이 많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잡아서 돈을 마련한다고 한다.
경상도慶尙道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대령大嶺을 사이에 두고 호남과 인접했다. 낙동강洛東江이 도내道內 한복판으로 흘러가는데, 옛날에는 신라가 이 강의 동쪽, 오가야五伽倻가 이 강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가야는 신라에 통합되었다.
경주慶州는 진한辰韓의 옛터이다. 언어와 풍습이 중국과 흡사하여, 예의를 숭상하고 길쌈을 부지런히 하며, 서울보다 더 많은 명현名賢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농부는 적고 선비가 많으므로 경제가 신장伸長되지 못하여, 사람들이 너무 인색해서 송사訟事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벼슬아치도 탐묵貪墨(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운 것)이 심하다.
남쪽으로 왜인과 교역하는데, 국가에서 하는 공무公貿와 개인이 하는 사역私易이 있다. 공무는 우리의 쌀과 베를 가지고 저들의 동銅과 납鑞을 교역하고, 사무는 우리의 인삼, ·실, 목화로 저들의 은銀, 칼, 거울 등 기묘한 기구와 기이한 물건들을 교역한다. 우리나라 서북 지방의 은광에서 생산한 많은 은을 망그러지기 쉬운 중국 물건 사들이는 데 다 써버리고, 다시 왜인에게서 은을 수입한다. 동銅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된다. 동맥銅脈이 바둑알처럼 널려 있는 산이 왕왕 있으나, 제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할 수 없이 외국에서 수입한다. 만약 천금千金을 들여, 솜을 표백漂白하는 기술을 구한 것처럼 한다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외국에서 수입만 하고 있으니 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누에를 치면서도 중국에서 비단을 수입하고, 철을 생산하면서도 칼과 거울이 왜인의 지혜를 따라가지 못하니, 천하에서 가장 형편 없는 솜씨가 될 뿐이다. 남초南草(담배)도 왜에서 들어와서 1백여 년 만에 온 나라 안에 유포되어 해를 끼친 것이 적지 않은데, 이는 으레 금했어야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주는 진한의 옛터이므로 아직도 방전方田(정전井田으로 구획한 네모 반듯한 밭)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이는 필시 성지聖智(기자箕子)의 남은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천하에 미루어 행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부인들이 여공女功(길쌈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아마 회소會蘇의 유풍遺風일 것이다.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는 감나무를 길러 곶감을 만들어 판다.
밀양密陽은 밤으로 유명하지만, 돈이 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안동安東도 역시 한 도회지인데, 그 풍속이 너무 검박하고 인색하다. 저축이 많아서 흉년에도 유리流離하는 사람이 없다. 고을이 매우 넓어서 여러 군郡과 견아犬牙처럼 물려 있다. 그 부府에 속하여 있는 자는 화성華盛(화려하고 성한 것)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한다.
울산蔚山과 장기長鬐 사이에는 청어靑魚가 난다. 청어는 북도北道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여, 강원도江原道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 11월에 이곳에서 잡힌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서울로 수송하는데, 반드시 동지冬至 전에 서울에 도착시켜야 비싼 값을 받는다. 모든 연해沿海에는 청어가 있다. 청어는 서남해西南海를 경유하여 4월에 해주海州까지 와서는 더 북상하지 않고 멈춘다. 그러므로 어족魚族이 이곳처럼 많은 곳이 없다.
진주晉州는 변한弁韓의 옛터로서, 풍요하고 화려함이 으뜸이다. 대개 해변에는 건어乾魚와 생선이 풍부하고, 육지에는 명주·베·삼이 풍부하다. 우도右道가 더욱 풍요하여 호의호식하는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그러나 문화에서는 좌도左道에 크게 뒤져 있다. 그러므로 군자들이 이 좌도를 선택하여 산다. 실로 동방의 낙토樂土이다.
태백太白과 소백小白 사이는 난리가 들어온 적이 없는 서북의 국경과 가장 먼 곳이므로, 만일 외국의 침입이 있으면 사민士民(사족과 평민)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피난할 것이다.
강원도江原道는 관동關東이라고 하는데, 예맥濊貊의 옛터이다. 한사군 때에는 임둔臨屯이었고, 그 뒤 사군을 통합하여 2부府를 설치할 때는 낙랑樂浪에 소속되었으니, 낙랑은 곧 평안도이다. 이때에는 이곳도 평안도와 함께 낙랑이라 불렀다. 고구려高句麗가 일어나자, 낙랑왕樂浪王이 이곳으로 도망와서 살았다.
이곳의 지세는 대령大嶺이 북에서부터 남으로 뻗쳤는데, 북쪽은 함경咸鏡 요로要路의 관문이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다. 영嶺에 의지하여 고을이 설치되었는데, 영동嶺東의 9군郡이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옛날에 살던 실직悉直이나 압독押督 같은 유는 모두 남옥저南沃沮의 종족이다. 평해平海와 울진蔚珍의 남쪽은 바로 경상도와 통한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嶺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배가 다닐 수 있다.
영동嶺東의 바다에는 조수潮水가 없다. 그 이유는, 대개 왜국은 말갈의 흑룡강黑龍江 밖에서 뻗어나온 한 가닥 지맥支脈이 동쪽으로 뻗쳐가다가 남쪽으로 구부러져 하이蝦夷와 맞닿아서 이룩된 나라인데, 하이는 왜의 북경北境이다. 왜는 지형이 동서로 기다랗다.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馬島가 우리나라와 서로 대치하여 바다의 관문이 되고, 그 중간에 큰 호수가 있어 동남에서 오는 조수가 이 대호大湖에 막혀서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동해에 조수가 없는 것인 듯하다. 그러므로 이 동해는 어족의 소굴이 되어 이곳만큼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 없다.
항상 파도가 일어 조운漕運이 불가능하므로, 어민들은 작은 배를 만들어서 고기잡고 기타 해산물 채취를 이로 삼아, 생선·건어乾魚·창난젓 등을 마소로 실어낸다. 지금 서울 어시장에 있는 별미別味도 대부분 영동에서 수송한 것들이다. 소금을 구울 때 소로 갈고 햇볕을 쏘이고 소금가마 만드는 것 등은 하지 않고, 곧바로 바닷물을 쇠가마에 퍼부어 많은 소금을 구워낸다. 농도濃度 등은 서해의 소금과 다름없으나 다만 맛이 약간 못할 뿐이다. 또 미역도 소중한 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죽은 고래가 자주 표류하여 오는데, 그 고래에서 많은 기름을 채취한다.
울릉도鬱陵島는 곧 삼척부三陟府이다. 대나무가 서까래처럼 굵고 미역이 좋은데, 시기가 되면 채취한다고 한다. 영서嶺西의 소나무 재목이 좋기는 하나 영동 것만은 못하다. 오늘날 온 나라 안에서 쓰고 있는 관재棺材는 모두 영동과 영서에서 뗏목으로 만들어서 띄워 보낸 것들이다.
영동은 토지가 메마르지만 가뭄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 풍속이 호화하여 잔치를 벌여 놓고 놀기를 좋아한다. 영서는 넓은 들이 없고 오직 화전火田만 있으므로, 조밥을 먹을 뿐 쌀밥은 없다. 벌을 길러 꿀을 떠서 돈을 마련하며, 임목林木을 벌채하여 서울로 운반하는 역사役事에서 벌어 먹는 백성이 많다.
황해도黃海道는 서변西邊의 관문으로서 서울과 거리가 가깝다. 동쪽은 산중의 산물이 있고, 서쪽은 해산물의 이익이 많아서, 소금 굽는 사람도 소매가 큰 옷을 입고 가죽신을 끌며 놋그릇을 쓴다. 4월이 되면 청어가 바다를 메워, 사방 1백리 안팎에서는 청어를 먹지 못하는 자가 없다. 해주海州, 연안延安, 배천白川, 안악安岳, 신천信川이 가장 부유하다고 이름이 나 있다. 이곳은 달구지를 사용하여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백성이 많다. 먹을 배합하는 기술이 있어서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먹을 만들고 있다.
황주黃州, 봉산鳳山은 목화로 유명한데, 씨가 잘고 솜이 많아서 남쪽 지방에서 생산된 것에 비하여 우수하므로 장사꾼들이 서로 교역하여 판다.
신계新溪, 곡산谷山은 맛이 좋은 배로 유명한데, 일찍 익고 연하며 맛이 좋아서 조정 대신들이 칭찬한다.
문화文化는 잣[海松子]으로 유명하여, 강원도의 회양淮陽과 맞먹는다. 무력武力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어 무거운 것을 들고 활을 멀리 쏘기를 좋아하는데, 다른 지방은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한다.
평안도平安道는 아직도 고구려와 고조선의 유풍이 남아 있다. 서쪽으로 중국과 교통하여, 복장이 화사하고, 건물이 크고 화려하며, 노래와 춤이 분잡하다. 평양의 부유하고 번성함은 오히려 서울보다 지나칠 정도이다. 여름이면 파리가 수저에까지 모여들어서 거의 밥을 먹을 수 없다. 이 고장에는 은광銀鑛이 많다.
압록강鴨綠江 연안에 사는 백성들은 농사 대신 삼蔘을 캔다.
강계江界의 영역領域인 폐사군廢四郡에는 인삼이 더욱 많이 생산되는데, 세상에서 강계삼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간사한 백성이 압록강을 건너가서 인삼을 캐다가 발각되어 죄를 받기도 하나, 워낙 이런 사람이 많기에 금해도 되지 않는다. 풍속은 누에 치는 것을 힘써, 가는 명주실을 좋은 물화로 여긴다. 옻[漆]이 없어서 남쪽 지방에서 사다가 쓴다. 이곳에 옻나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관부官賦가 두려워서 백성들이 옻나무를 기르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에는 일정한 장부帳簿가 없고, 관장官長이 서도胥徒(아전)에게 맡기므로 잘잘못을 살필 수도 없다. 조정에서는 이 고장을 마치 외국과 같이 취급하여 감사에게 맡기므로 정당한 공물이 올라오지 않으니, 이는 국법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전은 그것을 인연하여 간사를 부리고, 관원은 그 이익을 가로챈다. 그렇기 때문에 속담에 “원이 되면 반드시 서쪽 지방의 원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원이 되어 서쪽으로 나아간 사람치고 재물을 많이 모으지 못한 자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내境內에는 큰 도둑이 많아 지친 백성들이 살 곳을 잃었다. 화전민들은 일정한 거처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에, 관에서 장리長利로 놓은 전곡錢穀을 회수할 수가 없어 거주가 있는 백성에게 대신 내게 한다. 그래서 집을 지니고 사는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는다.
함경도咸鏡道는 북관北關이라 한다. 함흥咸興과 북청北靑 이북은 여러 번 숙신肅愼에게 함락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우리의 군현이 되었다. 1백여 년 동안 국경에 난리가 없어 백성이 편히 살며 자기 일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수령들을 대부분 무신武臣에서 임용한 것만은 잘못이다. 무신은 대개가 염치를 불구하고 조정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영달의 지름길 찾는 데만 힘쓰기 때문에, 재물을 탐하여 지나치게 거두어들인다. 그러므로 백성이 편히 살 수 없다. 이 고장에는 담비·수달·영양각羚羊角·사슴가죽·인삼·통포筒布와 여러 가지의 해산물이 생산된다. 이리의 꼬리털로 만든 붓은 천하에 유명하다. 서예가들이 중히 여기는 북황모北黃毛가 바로 이 고장에서 만든 붓이다.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사이의 물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쌀과 소금이 없는 별개의 구역이다.
육진六鎭은 서울과 2천여 리 떨어져 있는데, 어린아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여자들이 강궁强弓을 당긴다.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서 곰과 범을 사냥한다. 때로 숙신과 서로 물화를 교역하는데, 소와 철기를 가지고 많은 이익을 얻는다.
아교와 저지楮紙(닥나무로 만든 종이)가 없고, 칼처럼 예리한 돌과 화살 만들기에 알맞는 나무가 있기로는 서수라西樹羅가 유명하다. 이것은 옛날에 호시楛矢, 석노石砮라고 부르던 것인 듯하다. 그러나 대나무 살과 쇠로 만든 촉鏃에는 미치지 못한다. 기후가 추우므로 개를 길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데, 어린 개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은 서울의 귀족들이 귀히 여기는 것이다. 남자들은 날마다 머리를 감아가며 머리털을 기르는데, 그 머리가 자라면 깎아서 다리를 만든다. 오늘날 여자들이 쓰고 있는 다리는 모두가 북쪽 지방에서 생산한 것이라고 한다.
대저 우리나라는 지역이 좁은데다가 물길이 사방으로 통하기 때문에 경화輕貨가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돈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했다. 국초國初에는 종포綜布와 저화楮貨를 썼다. 지금 돈을 사용한 지 겨우 70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폐단은 더욱 심하다. 돈은 탐관오리에게 편리하고, 사치하는 풍속에 편리하고, 도둑에 편리하나, 농민에게는 불편하다. 돈꿰미를 차고 저자에 나아가서 무수한 돈을 허비하는 자가 많으므로 인심이 날로 투박해진다. 이 문제는 지식이 있는 자와 함께 논할 일이다.
시골 읍에는 저자가 점점 더 많이 생겨서 사방 수십 리 사이에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으니, 이는 모두 놀고 먹는 자들의 이익이다. 그렇다고 이를 반드시 금지할 것이 아니라 옛날 해시亥市의 예에 따라 온 나라 안의 장을 같은 날에 서게 한다면, 그 중요하지 않은 장은 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것도 백성의 힘을 신장伸長시키는 한 가지 계책이 될 수 있다.
대저 재물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백성의 피와 땀에서 얻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이 부유하면 나라도 따라서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백성을 다스림에는, 백성을 인도하여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하게 되도록 할 뿐이다. 그 인도한다는 것도 말로 이르고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해치거나 겁탈하지 않고 죽음을 피하여 살길을 찾게 하고, 선을 행하고 악은 행하지 않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하면 저 백성들은 제각기 지능智能이 있으므로 산택山澤의 이利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물을 도랑으로 인도하면 물 스스로 웅덩이를 채워가며 멀리 흘러가고, 말을 목장으로 몰아넣으면 말 스스로 풀을 뜯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농토가 모두 권력가의 소유가 되고, 호강豪强들이 강점强占하여 자기 소유로 삼았다. 그래서 백성은 일년 내내 열심히 노력해도 소작료를 주면 소득은 겨우 반밖에 되지 않는다. 또 그 반에서 조용租庸과 잡부雜賦를 내면, 농민 차지는 겨우 1/4에 불과하다. 또 선전羨田(남아도는 전지)을 얻어 경작하지 못하는 잔민殘民(외롭고 가난한 백성)은 노력할 곳마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사방 여러 고을을 지날 적에 촌가村家에서 자며 자세히 살펴보니, 방구석에는 쌓인 곡식이 없고, 횃대에는 걸린 옷이 없으며, 남녀가 팔베개를 베고 주림을 참고 괴로움을 견디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저 보잘것없는 걸인도 동냥을 주지 않으면 노여움을 품는데, 하물며 자기 힘으로 지은 농사를 편히 앉아서 마음도 쓰지 않는 무리들에게 바치는데도, 그자들은 농민의 딱한 처지를 생각지도 않는다면 농민의 원망과 저주가 과연 어떠하랴! 국가에서 관원을 두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두는 것이다. 관원에게 그 직책을 물으면 백성의 부모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행적을 살펴보면 백성의 원수이다. 백성이 지혜와 힘을 다하여 지은 농사와 만든 기물을 가지고 부모와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원수에게 다 바치니, 이것이 다 익은 곡식을 참새가 쪼아먹고 창고의 곡식을 쥐가 파먹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으나 물산이 풍부하여 그 용도를 충당하기에 넉넉하다. 그러나 그 중요한 것은 청렴 결백한 관원을 등용하고 탐관 오리를 제거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상과 형벌을 써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고금에 공통된 법이다. 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 탐관貪官이 법을 잘못 행하면 억울하게 죽는 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므로 제나라 위왕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인 것은 잘한 일이지 잘못한 일이 아니다. 지금 세상에는 위왕 같은 임금이 없으니,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도 호소할 곳이 없다.
이러므로 나는 사방의 물산을 대략 기록하고, 재산을 늘리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되려면 양리良吏를 등용해야 한다는 데로 귀결짓고 이 글을 끝마쳤으니, 이는 곧 "해마害馬를 제거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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