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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라 하면 온주温州 밀감을 가리키는데, 메이지 무렵까지 "밀감"이라 하면 소밀감小蜜柑을 가리켰습니다. 이 소밀감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주 밀감도 소밀감도 모두 똑같은 '밀감'을 부르는 이름인데,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어 적어 봅니다. 먼저, 소밀감은 정식으로는 기주紀州 밀감이라 부르고 학명도 Citrus kinokuni라고 합니다만,  여기에서는 소밀감이라 부르겠습니다.

 

 

밀감은 소밀감

 

에도 시대 초기 무렵, 와카야마의 상인 키노쿠니야 분자에몬紀伊国屋文이 폭풍우를 무릅쓰고 배로 밀감을 에도로 옮겨 에도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폭풍 때문에 운송선이 움직이지 못해 에도에서는 대장장이의 신을 기리는 "풀무 마츠리"에 바칠 귤이 부족하여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카미가타上方에서는 에도로 보낼 밀감 화물이 정체되어 시중에 넘쳐 값을 후려 때려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옮기던 귤이 소밀감으로, 지금의 온주 밀감이 아닙니다.  소밀감은 정월의 공물로 쓰는, 잎이 붙어 있는 작은 밀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씨가 있고, 단맛이 나는 작은 밀감입니다. 크기는 30g 정도, 온주 밀감의 1/4 정도입니다. 혼本 밀감, 신眞 밀감, 3월三月 밀감, 기노쿠니紀の国 밀감, 야츠시로八代 밀감, 사쿠라지마桜島 밀감 등도 모두 소밀감입니다.   

 

소밀감 나무(이마바리시今治市 오미시마大三島)

 

 

온주 밀감은 이부인李夫人

밀감이 소밀감이라면 온주 밀감은 무엇이라 불렀을까 하면, 이것은 이부인이라는 왠지 요염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중국 여성의 이름일지 신경쓰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상세한 기술은 없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부인이라 하면 고대 중국의 한무제가 사랑했던 여성에 그 이름이 있고,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절세의 미녀였던 것 같습니다. 온주 밀감이 뛰어나게 좋은 성품을 지녀서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작물에 여성의 이름을 붙인 건 귤에 상수부인이 있고, 밀감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있듯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부인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부인(=온주 밀감)이란 이름 때문에 중국에서 전해진 과일 같지만, 사실은 일본 원산 감귤입니다. 가고시마현 이즈미군出水郡에 있는 나가시마長島라는 야마쿠사天草 섬에 면한 섬이 발상지로, 씨앗에서 태어난 변이종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에서는 온주 밀감을 이부인이라 부르고, 에히메愛媛현에서도 온주 밀감이 최초로 다치마立間에 들어왔을 때 역시 이부인이라 불렀습니다.

 

 

귤 연구소에 있는 이부인(온주 밀감) 기념비와 다치마에 전해진 원목의 후계 나무(오른쪽 구석)

  

이밖에 이부인李婦人, 쥬쿠진じゅくじん, 용신 등의 호칭도 있고,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가 저술한 <広益国産考>(1859)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이부인이란, 서쪽 지방에서 씨 없는 밀감이라 부르는 것과 약간의 차이도 없는데, 씨 없는 밀감 쪽이 이부인보다 맛이 좋고 전혀 씨가 없다. 이부인도 맛있지만, 약간 신맛이 있고, 씨가 하나나 둘 들어 있다."

 

씨 없는 밀감은 이부인에서 생긴 것처럼 생각되는데, 소밀감에도 씨 없는 게 있어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부인, 즉 온주 밀감은 영어로 사츠마 만다린(satsuma mandarin)이라 부릅니다. 메이지 9년(1876), 미국 플로리다로 도입되었을 때 묘목이 원산지인 가고시마현에서 운반되었기 때문에 사츠마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한 그 뒤 묘목의 대부분이 오와리尾張의 종묘 산지에서 미국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오와리 사츠마(Owari satsuma)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의 탄생

<규원귤보桂園橘譜>(1828)에는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에 귤이 있는데, 타이코우太閤(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시 야나가와 후柳川候가 가져온 것으로, 이부인 귤이라 한다."라고 나옵니다.  또, <본초도보本草図譜>(1830)에도 똑같은 기술이 있어, 조선에서 가져왔는지 어떤지는 별개로 치쿠고에는 임진왜란이 있었던 1600년 전후에 온주 밀감이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1936년 가고시마현 이즈미군, 나가시마의 타카노스鷹巣에서 발견된 이부인의 고목은 발견 당시 나무 나이 300년 정도로, 그 내력은 1600년 무렵. 게다가 고목은 접목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부모 나무는 앞서 야나가와에 전래된 시기보다 오래되어, 야나가와의 이부인 귤은 나가시마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는 무역선이 왕래하던 야츠시로해八代海에 면한 섬으로 전에는 아마쿠사 영역이었던 나카지마仲島의 것. 히고肥後와 히젠肥前에서는 온주 밀감을 "오오나카지마大仲島"나 "나카지마中島"라고도 부르고 있었다고 하여(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은 전국시대인 1500년대에는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후쿠오카번福岡藩의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崎安貞가  저술한 <농업전서農業全書>(1697)에는 귤橘과 감柑이란 이름은 있어도 이부인이란 이름은 없습니다. 메이지 무렵까지 귤은 주로 선물이나 증답용 물품으로서, 맛있는 과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씨가 없거나 적은 것이 선호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부인이 확산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보입니다. 

 

 

온주 밀감으로 개명하다

이부인이 일본 원산의 귤인데 왜 온주 밀감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온주라고 하면 중국 저장성 원저우부温州府를 가리킵니다. 남송의 한언직韓彦直이 저술한 <귤록橘録>(1178)에는 "감귤은 소주蘇州, 태주台州에서 나지 않는다. 서쪽으로는 형주荊州에서 나오고, 남쪽으로는 민閩・광広・무주撫州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두 온주의 것이 으뜸으로 그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밀감은 온주부의 것을 최상이라 칭찬했습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서도 "온주 귤은 밀감이다. 온주란 절강의 남쪽에 있어 감귤의 명산지이다"라 하고, <규원귤보>(1848)에서도 감귤의 종류로 온주귤을 들며 그 맛좋음이 밀감 중에서 뛰어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주라는 이름은 맛있는 밀감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메이지가 되어 국가에서는 통계상 이름이 제각각인 귤을 정리해야 했지요. 소밀감을 보통 밀감으로 하고, 이부인을 온주 밀감으로 했습니다. 전고에 뛰어난 사람이 있어 온주부의 밀감에 뒤지지 않는 맛이기 때문에 온주 밀감이라 이름을 붙였겠지만, 온주부에서 전해진 밀감은 아닌 것입니다.

 

온주 밀감

 

 

소밀감의 전래

그럼, 소밀감으로 이야기를 돌려 그 발상을 더듬어 봅시다.

 

소밀감에는 게이코景行 천황이 구마모토로 행차했을 때 씨앗을 하사해 오아마小天 마을 미즈시마水島에 심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게이코 천황의 1대 전에 해당하는 스이닌垂仁 천황의 명을 받은 다지마모리田道間守라는 사람이  불로불사의 나라에서 토키지쿠노카구노미非時香菓를 구하러 떠나서 10년의 세월이 걸려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겨울에도 과실이 달리는 감귤 또는 엄동설한에도 바로 옆에 있는 과실이란 의미일까요? 돌아온 다지마모리는 바로 전에 스이닌 천황이 붕어한 것을 알고 황제의 신령에 의지해 무사히 돌아왔는데 만날 수 없게 되자 비탄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다음 황제인 게이코 천황은 다지마모리의 충성을 어여삐 여겨 스이닌 천황의 능묘 옆에 매장하도록 명했다 하고, 가지고 돌아온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지마모리 초상화(귤 연구소 소장)

 

 

귤은 일본 원산의 감귤이고, 일부러 다지마모리가 해외까지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귤을 감귤류의 통칭이라 하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일본으로 전래된 시기를 알 수 없는 소밀감이나 등자(橙)가 아니었을까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전승처럼 게이코 천황이 다지마모리가 귀국한 뒤 소밀감의 씨를 구마모토에 심도록 했다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소밀감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소밀감이 그 당시에 전해졌다면, 그 달콤한 맛 때문에 각지에서 재배가 확산되었을 테고 쿠카이空海가 812년에 사가嵯峨 천황에게 헌상한 과실은 감자柑子가 아니라 소밀감이어도 괜찮았을 터. 소밀감 설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감자는 일본에 오래전부터 있던 추위에 강한 감귤로서 과실은 짙은 황색의 얇은 껍질, 크기는 40g 정도의 작은 열매이다. 쇼무聖武 천황 시대(725)에 당나라에서 전해진 것이 <속일본서기続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에는 그밖에 등자나 귤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근거가 없습니다. 덧붙여서, 소밀감이 심어진 장소도 구마모투현 이외에 다지마모리를 신사에 신으로 모시는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키츠모토橘本 신사와 사가현佐賀県에도 전승이 있는데 토키지쿠노카구노미의 씨를 하사했던 게이코 천황이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 아버지라는 신화에 가까운 시대의 이야기인 만큼 전승을 뒷받침할 방법은 없을 겁니다.

 

 

에히메의 소밀감 점묘点描

에히메의 소밀감에 대해서는 오미시마大三島에 있는 오야마즈미大山祇 신사의 大祝오호오리 직職인 미시마三島 씨가 음력 11월에 소밀감을 영주의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게 헌상해 미치나오에게서 "밀감(みつかん) 매우 매우 경사스럽다"라고 감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밀감은 "みつかん"이라고 부르고 그 가운데 "つ"가 생략되어 "みかん"이 되는데, 미시마 씨에게는 또 한 통의 고노 미치나오에게 온 감사 편지가 있으니 거기에는 "みかん"이라 적혀 있습니다. 이 문서는 마침 "みつかん"에서 "みかん"으로 변하는 과도기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밀감은 환자의 입에 맞는 귀중한 과실인 듯하여, "아이들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고맙습니다"라고 나옵니다. 문서가 작성된 시대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1540년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만, 특별한 과일이라 하는 만큼 소밀감이 재배되기 시작한지 그다지 긴 세월이 지나지 않은 듯합니다.

 

에히메현 이마바리시今治市 카미우라쵸上浦町의 소밀감 
위 설명의 소밀감

 

세토우치瀬戸内의 오미지마나 오시마大島에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기 하는 소밀감의 고목이 남아 있어, 항해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세토우치의 섬들을 거점으로 한 왜구와 수군이 가지고 돌아갔거나, 교역선이 순풍을 기다리며 들르는 등을 통해 소밀감 등의 감귤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도서 지역에는 자연히 교배되어 생긴 감귤이 많고,  안세이감安政柑이나 핫사쿠八朔 등도 그 종류입니다. 인노시마因島에 들어간 여러  종류가 자연교잡으로 생긴 것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핫사쿠의 실물

 

미시마 씨의 문서로부터 50년 정도 뒤인 키타우와군北宇和郡 미마三間 지방에서 저술된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1564)에는 감귤의 종류로 "감자柑子, 구년보九年甫, 밀감樒柑, 유柚, 등橙" 등 8종을 들고, 그밖에도 종류가 많다고 적혀 있습니다. 밀감은 소밀감이며, 호칭도 "미츠캉みつかん"이 아니라 "미캉みかん"으로 되어 있습니다. 

 

"감귤류는 무가와 사원 등에서 심어도 좋지만, 농가는 유자와 등자 외에는 재배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다만, 판매하여 팔린다면 이야기는 다르다"라고도 합니다. 유자와 등자는 식초용으로 삼고, 집 주변에 자가용으로 심어도 괜찮았던 겁니다. 이외의 감귤은 유통하면 상품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도 시대에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타군喜多郡이나 이요군伊予郡의 일부를 영역으로 한 오즈大洲 번주에게 촌장(庄屋)들이 소밀감을 헌상했습니다. 시모카라카와下唐川나 시모스카이下須戒, 마츠오松尾, 지세이知清가 있던 산간 지역에서 소밀감이 헌상된 것입니다. 밀감 재배는 해안선의 따뜻한 지역이 적합한데, 내륙부에서도 남향의 해가 잘 드는 좋은 토지를 선택해 재배했던 것이죠.

 

메이지 21년(1888)에 작성된 에히메현의 감귤 통계에서는 현 내의 밀감 생산량 3504섬 가운데 기타우와군北宇和郡이 1930섬, 기타군이 1097섬으로 두 군에서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오스 번 영역의 기타군은 현 내에서도 유수의 소밀감 산지였던 겁니다.

 

에도 시대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는 밀감의 산지로 "기주紀州 아리타有田, 살주薩州 사쿠리지마桜島, 예주豫州 마츠야마松山, 준주駿州,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를 들고, 예주 마츠야마 산물은 준주 산물보다 맛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에히메의 밀감이 유명해진 건 메이지 17년(1884)에 다치마立間의 이부인(온주 밀감)이 도쿄의 전국 중요 물산 공진회에서 1등상을 받고, 이듬해 1885년에도 대일본 농회의 전국 농산물 품평회에서 1등상을 받아 호평을 받기 이전 이미 에도 시대부터 맛있는 밀감 산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소밀감은 구마모토부터 가고시마, 오이타, 에히메, 히로시마, 와카야마, 시즈오카로 항로를 따라 확산되고, 게다가 대부분이 현재의 온주 밀감    산지와 겹쳐 있어 소밀감의 역사가 현재를 떠받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등장한 소밀감

메이지 중반 무렵까지 소밀감은 밀감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도대체 밀감이란 단어는 언제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요? 꿀에 절인 듯한 달콤한 것으로부터 밀감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만, 밀귤蜜橘이나 밀감樒柑 등 다양한 글자가 충당되어 최초로 사료에 나타난 것은 1418년, 고스코우잉後崇光院이 상황의 거처로 밀감 2홉을 바친 기술입니다. 이어지는 사료에는 "병중인 무로마치室町 도노殿가 밀감을 바라시어 조우코우잉蔵光院의 밀감을 100개 받아 헌상하고, 부족분은 감자柑子를 더했다."라고 해, 밀감은 무로마치 도노(장군)가 바라는 귀중한 과일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대명 무역을 활발히 하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다음 장군 시대이고, 소밀감 같은 달달한 과실이 재배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동안 밀감이란 글자는 사료에서 사라지고, 앞에 기술한 미지마 씨의 문서가 쓰여진 1540년 무럽까지 공백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미지마 문서의 다음, 즉 1500년대 중기부터 빈번하게 사료에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소밀감이 밀감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쇠퇴하고, 이요국伊予国에서는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1509년 영주)가 활약하며, 인노시마因島와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의 무라카미村上 씨 등의 미지마 수군이 큐슈와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대와 부합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500년 이상 전이라 생각됩니다. .

 

 

 

참고자료

安部熊之輔(1904): 日本の蜜柑. 明治農学全集 果樹

愛媛県果樹園芸史(1968): 愛媛県青果農業協同組合連合会

村上節太郎(1967): 柑橘栽培地域の研究
岩政正男
(1979): 作物品種名雑考・柑橘. 農業技術 34(9)409-413 

古事類苑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 大

蔵永常(1859): 広益国産考.日本農学全集,()農山漁村文化協会

宮崎安貞(1697): 農業全書卷六~巻十一日本農学全集, ()農山漁村文化協会 郷土誌資料第 1 集の 1 産業編 吉田町立間公民館

菅 菊太郎(大正 4 ): 伊予における古き蜜柑の栽培地伊予史談第 1  4 

大洲藩領史料要録村々庄屋旧家献上物覚:伊予史談会
親民鑑月集 和名類聚楽抄 和漢三才図会 魏志倭人伝 古事記 日本書紀

 

 

 

 

 

 

원문 https://www.pref.ehime.jp/h35118/1707/siteas/11_chishiki/documents/kankiturekisi.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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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밀 소비자로서, 국수와 만두, 빵 및 여러 반죽을 만드는 데 밀을 이용한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다.

밀은 신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인 약 4600년 전 중국 북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의 연구에 의하면그 당시에는 맛이 별로 없었다. 초기에 밀은 기아를 막기 위해 재배한 작물로서, 요리의 기쁨보단 절망의 작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중국 북부의 최초 농민들은 주로 조를 재배했다. 가뭄에 강한 이 작은 씨앗의 곡물은 1만1500년 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해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며, 미국에선 새의 모이로 이용되었다. 역사 기록과 초기 요리법에 기반하여, 연구자들은 수천 년 뒤인 당나라(618-907년) 시대에 밀이 조를 대체하여 이 지역의 주요 작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러한 변화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밀의 장점은 명백하다. 요리의 다양성 말고도, 밀은 더 빨리 자라며 조보다 꾸준히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린다. 하지만 고대의 농민들은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면, 적어도 당나라 때까지 밀은 일반적으로 조와 똑같은 방식인 죽으로 소비되었다. 그 곡물은 찌거나 통밀로 조리되어 거칠고 입맛에 안 맞는 요리로 만들어졌다. 여러 초기의 저술가들이 밀죽은 "야만인과 농민을 위한" 음식이라고 언급했는데, 아마 극단적인 시기에만 소비되었을 것이다. 


중국 북부의 농민들은 왜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을까? 

그 답을 추적하기 위하여, 나는 2014년 박사 학위논문을 쓰면서 중국 북부의 여러 지역에서 이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여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고고학자는 발굴현장에서 곡물의 유물을 찾아 이를 추론했는데,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소비할 수 있었는지만을 밝혀냈다. 최근 연구자들은 이를 해결하는 더 직접적인 방법을 알아냈다.인간 유골의 동위원소를 조사하는 것이다. (동위원소는 탄소처럼 원자량이 약간 다른 요소이다. 어떤 동위원소는 방사성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붕괴되지만, 다른 동위원소는 안정적이다.) 뼈부터 치아의 발견되는 모든 탄소와 질소의 여러 안정된 동위원소의 비율은 고대인의 식단에 대한  강력한 정보를 전달한다.  

조와 밀 같은 다양한 식물은 서로 다른 화학 경로를 이용해 자라기에, 토양에서 독특한 비율의 안정적인 탄소 동위원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이른바 C3와 C4 식물로 구별된다.) 우리가 먹는 것이기에, 그것들의 특정한 비율의 탄소가 인간의 유골에 통합되어 몇 세기가 지난 뒤에도 검파될 수 있다.

 특히 조는 중국 북부에서 재배된 유일한 주요 C4 작물이라서, 사람들이 주로 조를 먹다가 C3 작물인 밀 같은 다른 걸로 주식을 바꾸면 상대적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발표된 보고서들을 조사하여 나는 약 9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 중반부터 서기 220년 동한 왕조가 망한 뒤까지 약 1200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수집했다. 장소는 북서부인 간쑤성부터 동부인 산둥성에 이르는 현대의 8개의 성에 흩어져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이 거대한 데이터 세트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이들 광대한 연구 지역에 걸쳐 있는 집단이 모두 동시에 독점적이던 조 기반의 식단에서 더 혼합된 식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처럼 광대한 지리적 구역에서 요리법이 갑자기,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뀌려면 단순히 새로운 음식을 갈망했다는 것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영상은 고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작물화된 곡식이 7000년에서 3500년 전 어떤 경로로 확산되었는지 보여준다. Javier Ventura/Washington University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약 4200년 전 발생했던 완신세 사건 3이라 부르는 주요한 기후변화이다. 당시 대륙들의 기후는 춥고 건조해졌다. 예를 들어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강우량이 1/3에서 절반으로 감소하여 사해의 수위가 45m 감소했다. 이러한 "대가뭄"이 전 세계 작물 생산에 혼란을 야기해 메소포타미아부터 인더스 계곡까지 정치적 격변을 불러왔고, 중국의 중앙 평원에서는 신석기 문화가 붕괴되었다. 

이에 더해, 신석기 말기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시기였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작물 수확량이 변동됨에 따라, 중국 북부의 신석기 농민들은 어려움에 빠졌을 것이라 가정하는 건 합리적이다.

밀은 실제로는 조보다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에 역사의 건조한 시기에는 좋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밀은 조와 다른 계절에 교대로 파종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밀은 조를 수확한 뒤에 파종할 수있다. 그해에 조 농사가 망해도 농민들은 아직 구황을 위해 밀을 재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북부의 사람들이 밀을 재배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교훈이 있다. 기후변화는 극단적 날씨부터 해안선 변화까지 항상 예기치 않은 사회의 변화를 불러왔다. 이 사례에서, 중국 북부에서 일어난 완신세 사건 3의 여파는 결국 맛이었다. 오늘날 중국 북부의 사람들은 국수와 만두, 빵 등을 즐긴다. 하지만 그리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늘 그런 건 아니다. 

단 하나의 작물에만 주로 의존하는 대규모 단작은 늘 끔찍한 발상이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생각해보라. 19세기 중반 감자의 치명적 역병이 발생해, 감자에만 의존하던 이 나라에서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 



1840년대 감자 기근 시기의 아일랜드처럼 먹을거리 공급 문제는 기아와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British Library/Flickr


그러나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과 세계 여러 지역의 많은 대규모 농장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작물의 숫자가 위험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식물 종 -아마 수십에서 수백만 종- 을 식용할 수 있지만, 오늘날에는 약 200종만 재배되며 단 3가지(옥수수, 밀, 벼)가 인류의 열량 대부분을 구성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100년 전에 재배되던 작물의 75%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일부 지역에서는 조를 포함한 토종 작물을 되살려 지역의 농업을 더 지속가능하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농민들은 더 다양한 농업 체계로 나아가고자 했으며, 이것이 파괴적이었던 사건을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고고학과 역사 자료에 의하면, 밀과 벼, 콩, 귀리, 메밀 및 보리도 재배했는데 밀이 더 선호되었다. 

한 가지 완벽한 작물은 없다. 다양성을 높이는 일이 기후가 요동치는 시기에 살아남기 위한 열쇠이다. 우리는 여전히 인위적인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한편, 실용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게 현명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장래의 먹을거리 스트레스를 막기 위하여, 더 많은 농민들이 편안한곳을 벗어나 요리의 기반을 확장해 갈 수 있는 좋은 시기이다. 


https://www.sapiens.org/archaeology/chinese-farm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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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은 기원전 5000년 전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섬에 가득했는데, 1600년대부터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건너오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전체 인구의 2% 미만만 오스트로네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단다. 중국 대륙에 가까이 있었어도 그쪽 사람들이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구나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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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hetomorrow.kr/archives/10107?fbclid=IwAR2xc7LvgT6PWCusQEonXOy0gd-yCQFti8kENt2Ts0YKVe6nDQnXY6L8BN0



역자 주:

사회생태농업이라는 표현은 신향촌건설운동 진영이 근년에 쓰기 시작한 용어이다. 10여년전 안전한 먹거리를 찾는 도시 소비자와 유기농 생산자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채소꾸러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일본과 서구의 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커뮤니티 지원 농업) 실천방법을 중국에 소개할 때, 社區支持農業이라는 직역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보통 특정한 관행을 지칭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되는 영문 CSA를 차용하면서도 마치 ‘빅텐트’처럼 하나의 용어안에서 다양한 실천과 이론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켜 나갔는데,  소비자와 생산자가 일방의 수혜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社區互助農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초 협의의 CSA가 신향촌건설 운동의 내용을 담기에 무리가 있었기에, 사회생태농업社會生態農業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자의 기억으로는, 2015년 연말 세계CSA대회를 베이징에서 개최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엄밀히 확인된 주장은 아니다. 사회생태농업에서 사회라는 표현은, 당초 원톄쥔 교수가 강조하듯, 삼농의 문제가 단지 농민이라는 특정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사회 전체와, 문명 차원의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채택되고 있다. 즉, 이 주제에 대해서 그 참여대상과, 활동의 폭이 전체 사회를 아울러야 한다는 뜻이다. 생태농업은 당연히, 환경과 먹거리 안전, 그리고 지속가능한 문화 차원에서의 방법적 선택지가 유기농 혹은 보다 광의의 생태농업이기 때문이다.

이 소논문에서, 저자들은 市民下鄉 즉, ‘귀농귀촌’ 흐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귀농귀촌이 시작된 것은 사실 이미 10년도 더 됐고, 어찌보면 신향촌건설운동 15년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전에 흔히 사용되던 표현은 返鄉青年 즉 고향에 돌아온 청년이라는 단어이다. 당초 신향촌건설 운동에 참여하거나 관여했던 농촌 출신의 대학생/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유기농업에 종사한다든가, 일종의 마을만들기 사업 (우리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보는 시민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보다는, 이전 세대의 농촌이나 지역 사업, 즉 초기 새마을 운동이라든가 빈곤구제적 성격도 있는)을 벌여 온 것을 일컫는다. 이후, 도시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던 30대 이상의 중산층과 가족들이 이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新農民이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2017년경부터는 이를 보다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정책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市民下鄉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다 정확히 이 하향 下鄉의 흐름을 분류하자면, 이 논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우선 도시 중산층, 혹은 대졸 이상 청년들의 귀농귀촌이 있다. 둘째로는 경기하락으로 도시에서 일자리를 잃은 농민공들의 귀향 흐름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세대의 농민공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교육 수준도 꽤 높고, 스마트폰/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문화, 시사 등을 늘 접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큰 조망은 없을지 몰라도, 밑바닥 세상 물정은 누구보다 잘알고 있다. 사실 중국도 교육 인플레이션으로 직업학교, 전문대학, 혹은 지명도가 떨어지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중산층 진입의 전제가 되는 선호직종 보다는, 공장 노동자 등의 육체 노동 혹은 콜센터와 같은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농민공과 농촌 출신 도시 엘리트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측면도 있다. 그리고, 확실히 이들은 도시의 생활문화를 선호한다. 回不去的農村,留不住的城市 (돌아갈 수 없는 농촌, 남아있을 수 없는 도시)라는 표현은 도시와 농촌 어느 곳에도 제대로 귀속감을 느끼기 힘들게 된, 이들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자본의 하향이 있다. 더 이상 도시에서 특히 부동산 개발에 의한 막대한 투자 이윤을 챙기기 힘들어진 다양한 자본들이 ‘일대일로一帶一路’와 같은 정책에 힘입은 해외가 아니면 ‘향촌진흥鄉村振興’ 정책 대상이 되는 농촌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결국 정부의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농촌이 그들에게 새로운 엘도라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중국 사회와 정부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친자본적이다. 중국인들의 전통적으로 상업에 대한 실용적 관점이 정서적인 거부감을 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본을 혐오하는 소위 구좌파는 중국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자는 며칠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돼 매우 충격을 받았다. 역자가 거주하는 城邊村 (도시에 속하는 교외지역) 에 속하는 광저우廣州의 션징深井마을은 농촌과 도시 풍광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그런데, 중국의 대도시에는 농촌대상의 향촌진흥 못지않게 城市更新 즉,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지방정부의 대규모 재정하에 수행되고 있다. 션징마을에도 수백억대의 재정이 투자된 프로젝트가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데, 션징 마이크로 스튜디오 深井微工作坊라는 단체가 소위 도시재생/ 마을만들기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광저우 시정부와, 중산中山대학교 도시계획학과, 그리고 기업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당연히 이 단체는 일종의 NGO나 사회적 기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활동의 수준이 많이 떨어지고 열정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중산대학교의 교원들을 삐딱하게 평가하게 되는 나름, 나의 편견의 근거가 됐다.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활동 주체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며칠전에는 아예 광저우 부동산협회라는 사람들을 끌어 들여서 워크숍을 벌이기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미 남의 일이 아닌, 중국 대도시의 현실에 비추어 제정신이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며칠전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실은 이 단체가 기업, 그것도 20년 역사의 제법 규모가 있는, 소재벌급(중국에서는 흔히 集團이라고 부른다) 혹은 중견 부동산 평가 기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한국에서도 농촌이든 도시이든, 이런 정부 사업에 ‘업자’들이 들어 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학교원이든 기업이든, 선을 긋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역할과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대자본형 ‘업자’가 주체가 돼서 이런 커뮤니티형 정부 재정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중국 지방정부의, 이 사업에 대한 시각의 수준이나 업계와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로 중국 정부가 향촌진흥 정책을 펼치기 이전부터 이미 부동산 기업들이 농촌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년이 경과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파괴한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다시 보게 돼, 공익적인 목적으로 이런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하며 자선사업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실제 관련된 공익재단을 만들어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놓고 장삿속인 경우도 있는데, 역시 명확하게 선을 긋기 힘든데다, 중국인들의 상인/ 기업가에 대한 중립적인 감수성 때문에, 일도양단해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신향촌건설 운동 진영의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은 이들을 매우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독점한 자본과 인재, 다양한 자원에 불가불 기대지 않을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 원톄쥔은 자본을 컨트롤하기 위해, 시민하향이 빠르게 이루어지길 원한다. 시민과 농민이 대등한 관계로 이니시어티브를 쥐게 하는 것이, 자본의 약탈적 개입을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논문의 마지막 제안중 하나인 소위 민간조직의 활성화 주장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조직중에는 신향촌건설 운동에서 파생한, 사회적 기업이나 NGO등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경험이나 가용자원 측면에서 보건데 여전히 중국 사회에서 너무나 미약한 존재들이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과의 연대 없이, 자본과의 경쟁에서 이들이 주도권을 쥘 확률은 매우 낮다라는 현실적 전망을 내놓으며 해설을 마무리한다.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키면, 농민의 생산과 생활에 내재된 본래의 다양성을 활용하게 되고, 농촌의 자연과 인문 요소에 의탁하여, 도시민을 대상으로한 휴한休閒농업 (역자 주 – 레저와 휴식을 제공하는 농업 서비스, 중국에서는 용어와 사례 모두, 대만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농작업 체험과 과일 수확, 숙박 및 요식, 리조트 및 요양/ 힐링 등의 사업이 이에 해당한다. 농촌에서 이전에 생산요소 범주에 들어가지 않던 생태환경및 인문, 경관 등의 다양한 자원을 살리게 된다. 이것이 농업공급측개혁의 주요한 방향이 되고, 또한 신농촌건설과 도시와 농촌의 공진화, 즉 서로 도우며 발전하는 좋은 순환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방법이 된다.

 

1. 사회생태농업 발전의 필요성과 긴급성

(1) 산업화된 농업의 효율저하 및 외부효과 극대화

전통적인 관행 농업 생산방식은 단순히 규모의 확대를 통해, 생산량을 증가시킬뿐 아니라 단일한 상품의 생산을 추구한다. 농민은 오로지 경작 규모의 확대를 통해서만, 끊임없이 기계화율을 높이고, 농약 사용량을 늘리고, 비료와 항생제 등을 사용해서 증산을 달성한다.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품의 부가가치는 떨어진다. 농업은 본래 시장 리스크와 자연재해의 리스크를 안고 가는 산업이다. 단순히 규모와 생산량을 추구하는 행위는 농민에게 있어 시장 리스크를 증가시킬뿐 아니라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생산상의 큰 손실도 떠안게 만든다. 또, 각종 화학제품의 남용에 의해 농업이 환경오염원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식품안전 문제도 초래한다. 관행농업의 저효율, 외부효과 극대화라는 결과는 농업이 공급측 개혁을 긴급히 추진하고,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사진: 관행농업의 하우스 재배 (원문)

 

(2) 도시중산층이 느끼는 전체적 불안감이 완화되어야 한다

도시생활의 빠른 리듬과 많은 업무, 경제적 부담이 도시의 화이트 컬러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 주고, 심지어 건강을 해치게 하기도 한다. 그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할만한 환경과 장소가 절박하게 필요하다. 그외에도, 도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이 발생하고, 교통체증과 같은 도시문제와 식품안전문제가 발생한다. 종합적으로 도시 중산층 생활의 질이 낮아지고 있고 그래서 중국의 일부 중산층들은 이민을 선택한다. 다른 한편, 중국 경제의 구조적 개혁에 의해, 금융과 부동산 시장의 등락으로 도시 중산층은 재테크의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안정적 투자처를 모색하고 있다. 도시 중산층들의 전체적인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심신의 건강과 안정을 찾을 수 있고, 또 소비 생활수준을 제고하고, 자산 가치 보전과 증식이 가능한 새로운 투자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3) 경제 하강이 농민공의 귀향을 급증시키고 있다

국제경기의 침체로 외수가 부진해져서, 연해지역의 노동집약형 산업과 수출가공업이 이미 생산을 중단하거나, 크게 감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국내에서 공급구조개혁을 실시하면서, 광산업, 철강산업등은 생산 능력을 줄이고, 부동산, 건설업은 거품을 억제하고 있다. 내외경기 부진요인이 더해지는 가운데, 농민공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은 고향에서 새로운 취업기회를 찾아야 한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많은 80년대, 90년대생 농민공들에게 출구를 제공해야 한다. 그들중 상당수는 교육수준이 높아, 단순한 농업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도시에 남아 있을 방법도 없다. 그러므로,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키고, 6차산업을 전개해서 다업종, 신업태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만이, 귀향하는 농민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특히, 상당 수준의 학식과 자질을 겸비한 청년 농민공들의 취창업을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해결 수단이다.

 

2. 사회생태농업발전의 주요방법 – 시민하향市民下鄉 (귀농귀촌)

사회생태농업의 주요한 발전 방법은 ‘농산물을 도시로 올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시골로 내려오게’(귀농귀촌)하는 것이다.

 

(1) ‘도시민의 귀농귀촌’이 농촌의 가격 요소를 높일 수 있다. 

귀농귀촌을 추진함에 따라, 농촌의 토지와 노동력이 모두 도시소득 수준을 참고하여 새롭게 가격을 결정할 기회를 갖게 된다. 도시민들이 농민의 토지를 임대하면서, 비교, 참고하는 것은 도시의 레저문화산업 용지에서 얻을 수 있는 비즈니스 기회와 이에 상응하는 가격 수준이 된다: 농민이 도시민의 토지경영을 도우면서, 비교하게 되는 것은 역시 도시민의 소득수준이다. 도시와 농촌간의 요소가격 차이가 크기 때문에, 농민의 요소 수익이 도시의 산업화 경영에 비하여 크게 성장할 상당한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2) 귀농귀촌이 농촌의 6차산업발전을 촉진한다

도시민의 귀농귀촌이 농업에 대해서 파생시키는 수요는 다종다양하다. 사회생태농업의 전문성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자신만의 특성을 갖춘 서비스도 늘리게 된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거리를 좁힐 뿐 아니라, 농산품의 중간 유통 단계를 줄여서, 유통원가를 낮추고, 식품안전 리스크도 감소시킨다. 또 과거에 생산요소에 포함되지 못하던, 생태자원, 인문자원을 활성화시켜서, 농업의 6차산업 (역자주 – 농업의 1차, 2차, 3차 산업을 곱셈과 같은 방식으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는 표현,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발전의 의미와 가치를 증가시킨다. 즉, 6차산업 발전을 촉진한다.

 

(3) 귀농귀촌은 식품안전문제와 농촌환경오염문제를 개선하는데 유리하다. 

생태효익 차원에서 보건데, 중등수입수준의 도시민이라면, 식품안전과 품질에 대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요구를 가지게 된다. 그들이 귀농귀촌하여 농민과 농산물의 품질 수준에 대하여 합의를 하게 되면, 천연식품, 친환경제품일수록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농업생산이 품질과 안전이 기본이 되는 방향을 취하게 된다. 농축산물 생산에 있어, 농약, 항생제, 비료 등의 화학제품 사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이는 산업화된 방식으로 농산물을 과도하게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식과는 다르다. 사회생태농업은 안전성을 부가가치 제고의 요소로 삼는다. 농업의 환경파괴 효과를 줄이는 동시에,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생태문명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성취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4) 귀농귀촌은 생산 요소가 농촌으로 회귀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사회효익 측면에서, 중국 농촌의 노동력, 자본, 토지는 농촌에서 도시로 단방향으로 움직이는 장기적 흐름을 보여왔다. 결과적으로 농업은 효율이 저하됐고, 농민은 가난해졌고, 농촌은 쇠락해 갔다. 귀농귀촌은 소비와 투자를 촉진한다. 농촌의 인기를 높일뿐 아니라, 도시 자본이 농촌으로 향하도록 한다. 그래서 고정적인 수익도 만들어 낸다. 귀농귀촌은 사회생태농업이 강조하는 6차산업의 발전방법이기도 하다. 생산위주의 단조로운 농업에서 현지화된 종합농업으로 발전해나가게 된다. 경기가 하강하는 가운데 귀농귀촌하는 농민공에게 수많은 취업기회를 제공한다. 또, 일반 대중의 창업 열기가 높은 가운데, 매우 우수한 창업영역을 개척하도록 돕는다. 사회생태농업에 참여한 농민공은 비교적 높은 수입을 얻을 뿐 아니라 도시에 일하러 가면서 남겨 놓은 노인과, 아이들 문제 (역자주 – 留守兒童,留守老人 농촌에 노인과 아이만 남아서 제대로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생긴 심각한 사회문제)가 불러 온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된다.

 

(5) 귀농귀촌은 도시 중산층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유효한 방법이다

귀농귀촌을 통해서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킴으로써 도시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도 있다. 귀농귀촌을 하는 화이트 컬러와 중간소득 계층은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하고, 노동을 경험하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인 사회의 압력도 감소시킬 수 있다. 스스로 논밭을 일구고, 경영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식품 안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농촌에 투자하고 경영하는 것은, 도시 중산층이 도시 경제의 호황-불황사이클을 겪는 상황에서 재산을 보호하거나 혹은 자산을 증대시킬 수도 있는, 새로운 수단이 된다. 귀농귀촌을 통해, 전체적으로 도시 중산층의 불안감을 완화시킬 수 있다. 사회의 압력과 불안정 요소를 줄일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도 외국 이민을 희망하는 이들이 대신에 귀농귀촌을 선택함으로써, 인력과 자본의 해외 유출을 줄일 수 있다.

사진: 논일 체험에 참여하는 중국 시민들 (원문)

 

3. 사회생태농업 발전의 현실 조건

사회생태농업의 발전은 그 자체로 필요성과 긴급성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10여년간 국가가 ‘삼농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입한 막대한 자본에 의해 그 발전의 기초도 이미 확보돼 있다. 도시의 중등소득계층그룹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서, 사회생태농업 시장은 이미 기초적인 수준으로 성장돼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각종 서비스 등 신경영 모델도 이미 실현되어 있기에, 사회생태농업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아이디어와 업태를 제공받는다.

 

(1) 신농촌건설은 농촌의 인프라 설비를 개선했다

중국 공산당의 16대 전당대회 이래, 중국은 지속적으로 전면 소강사회 건설을 추진해왔다. “공업이 농업에 은혜를 값고, 도시는 농촌을 지지한다”라는 전략이다. 특히 2005년 중앙정부는 신농촌건설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산업의 과잉생산능력 압력을 완화시키는 동시에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 이후, 중앙정부의 삼농관련 재정투입액은 매년 평균 1조위안을 상회해왔다. 이러한 투자는 근본적으로 농촌의 기초설비와 기본 복지 서비스를 개선해왔고, 전국 대부분의 농촌지역이 전화/전기, 상수도, 인터넷, 포장 도로의 혜택을 보게 됐다. 이렇게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농민들이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숙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농촌관광 비즈니스를 경영하기 위한 기본조건을 갖추게 됐다. 한편으로는 귀농귀촌을 원하는 시민들을 위한 편의가 제공되기도 한 것이다.

 

(2) 중등소득계층의 사회생태농업 발전 지원의 지속적 확대

2016년 10월 사회과학원 보고서에 의하면, 중국은 이미 중상층 등급의 고소득 국가 대열에 들어섰다. 중국의 중등소득계층 인구수는 계산방법에 따라서 차이가 크게 나긴 하지만,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주로, 도시에 모여 있고, 소득수준,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추구하는 생활수준도 높은 편이고, 특히 다양한 소비를 원한다. 2015년 중국의 휴한농업과 농촌관광의 이용객은 연인원 기준 22억명을 넘어섰고, 영업수입만해도 4천4백억 위안에 이르렀다. 대부분은 도시의 중등수입계층이 기여한 결과이다.

 

(3) 인터넷 연계산업의 발전은 사회생태농업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업태를 제공한다

인터넷 연계산업의 빠른 발전은 이미 도시와 공업영역에서 새로운 경영 아이디어와 업태를 형성했다. 수많은 일반 대중의 창업과 혁신을 가져왔다. 사회생태농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가치있는 새로운 경험이 된다. ‘인터넷+관광’, ‘인터넷+대중문화’와 같은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와 입소문에 의한 마케팅 등이 효과를 거두면서, 지역에서 이목을 끄는 소재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 지역에 맞는 다양한 업종과 업태의 비즈니스가 늘어나고 있으며, 지역의 농특산품, 자연경관과 인문풍속의 개발과 영업을 촉진하고 있다. 지역 특색의 재배와 목축/ 양식, 레저와 힐링, 재배와 수확, 자연교육, 지역문화 체험, 수공업 및 숙식을 결합하여, 6차산업을 발전시키고 있고, 현지자원의 활성화와 자원수익의 내부화를 촉진하고 있다.

 

4. 사회생태농업발전을 위한 제안

(1) 생태문명이념으로 신농촌건설을 추진을 향도한다

생태문명이념이 신농촌건설 추진의 향도가 되어 전체영역을 정의하고 그 발전 개념을 수립해야 한다. 오랜 기간동안 나뉘어 있던 부문별, 산업별 구분에 의한 지원방식을 바꿔야 한다. 전역적 사회생태농업의 개념을 만들어 나간다. 하드웨어 건설에 있어, 중앙정부의 재정적 지지를 강화해야 하고 지방정부 재정의 비율을 감소시켜야 하고, 농촌 네트워크를 개선하고, 농촌의 전력공급망을 강화하고, 인터넷을 설치하고, 이를 통해 도농교류를 추진한다. 농촌교육과 의료를 개선하고, 문턱을 낮춘 보편적 금융 등 기본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도시와 농촌의 공공복리 격차가 농민들을 도시로 유인하는 결과를 만들지 않도록 한다. 소프트웨어적으로는 농촌의 전통생활문화와 유적을 보호하고, 우수한 향토의 문화를 부흥하며, 사회화농업발전을 위해 독특한 소재를 제공하게 한다. 농촌생태환경보호와 환경오염 관리를 강화한다.

 

(2) 시민과 농민이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하고, 평등하게 거래하도록 한다

한편으로, ‘사회지원농업 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이념과 사업의 발전을 고무한다. 농가와 도시 커뮤니티가 직접 대면하여 거래하고,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안정된 시장관계를 형성하도록 한다. 그리하면 농가소득이 안정되고 반대급부로 도시가구는 안전한 식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다. 또 한편으로, 도시거주민과 사회자본이 농촌으로 진입하도록 유도, 고무하고, 농촌에서 다양한 형식의 비즈니스가 생겨나게 한다. 예를 들면 도시가구가 농민으로부터 농지를 임대해서, 자급용 텃밭을 가꾼다든가, 농민이 가진 남는 농가주택을 임대해서 레저 비즈니스에 이용하거나, 민박,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을 경영하게 한다. 전문가들은 이미 대자본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약탈적 경영을 하는 현상에 대해서 경고하기 시작하고 있다. 자본의 농촌진입에 앞서, 시민들의 귀농귀촌을 통해 도시민과 농민이 직접 평등하게 협상하고 거래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이상적이다. 이런 조건에서 농민은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경영할 수 있다. 자본이 농촌에 진입해서 농촌간부와 야합을 벌일 경우, 이익을 농단함으로써, 농촌을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발하고, 약탈성 경영을 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마이크로 거래’에 대해서, 정부는 정책, 법률, 법규와 정부 서비스를 통해 지원함으로써, 농민과 시민 모두 리스크를 줄이고, 거래 원가를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민간조직이 사회생태농업영역에서 건전하게 적극적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전문가의 지적대로 중국은 4천년의 지속가능한 농업경작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 화학농업은 40여년, 산업화된 농업의 역사는 20여년에 불과하다. 대다수 농민은 스스로 사회생태농업으로 전환을 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러한 민간조직들이 모델을 만들어 제시할 필요가 있다. 도시민과 농민사이에 교량역할을 해야 한다. 현재, 이러한 민간조직들이 사회생태농업의 실천과 탐색을 통해서, 귀중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이들을 정책으로 지원하고, 세제상의 혜택을 줘야 한다. 민간조직이 앞장서서 실험한 경험을 정책과 법률에 녹여야 한다. 이들에게 적절한 정부의 프로젝트를 위탁해야 하고, 좋은 경험을 가진 민간조직이 농민들에게 사회생태농업 이념과, 기능 교육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사진: 교육에 참가하고 있는 농민과 대학생들 (원문)

 

(4) 관련된 법률, 법규, 정책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

농촌에서 다양한 업태의 경영이 가능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이를테면, 농가 민박, 펜션, 식당업 등의 세제 혜택이라든가 신용대출 조건의 완화, 행정수속의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사회생태농업및 유기농 식품에 대해서 입법이 이루어져야 하고, 유기식품인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동시에 농촌기본 경제제도를 유지하고, 마을집체가 토지의 소유권을 지속하고, 마찬가지로 농가가 토지의 사용권을 계속 갖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안전선으로써, 농촌의 다양한 업태 경영중 발생할 수 있는 농지의 불법적인 대규모 전용, 농민의 권리를 헐값에 침탈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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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돼지고기 소비국인 중국에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유행하며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는데, 트럼프의 무역분쟁 때문에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기 어려워져 애가 타는 미국의 양돈업자들인가.

재밌네. 세계 먹을거리 체계의 한 단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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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이 무역분쟁을 한다.
돼지 사육을 위해 중국이 수입선 다각화하며 브라질산 대두의 수입량을 늘린다.
브라질 농민들이 이를 신호로 여겨 더 많은 대두를 심고자 아마존의 열대우림을 개간한다.


열대우림이 사라져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인류의 짐이 된다. 세계 먹을거리 체계가 이렇게 작동하여 영향을 미친다. 먹을거리 체계를 지속가능하게 바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겠다.




한겨레에서는 똑같은 내용을 "브라질의 트럼프" 때문이라 이야기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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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쇼유 라멘



일본이 2차대전에서 항복했을 때 폐허가 되었다. 미국의 폭격으로 200만 채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부수어지며 굶주린 일본인들은 식량을 점점 암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도시의 암시장에서 라멘은 일본 요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떠올랐다.  

Japan Quarterly에 의하면 라멘은 중국 이민자들이 19세기 들어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원래는 중국식으로 구운 돼지고기를 얹은 국수였다. 1945년 12월, 일본은 42년 만에 최악의 벼 수확량을 기록했다. 조선(원문엔 중국인데, 중국은 일본의 식량생산기지의 역할을 한 적이 없기에 글쓴이의 오류라 생각하여 조선으로 고쳤음)과 타이완의 전시 식민지에서 발생한 농업 손실로 인해 쌀 생산량이 급감했다. 이는 일본의 쌀에 기반한 식문화에서 밀 국수가 중요해진 요인이었다.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뒤, 미군은 1945-1952년까지 이곳을 점령했따. 식량난에 직면하여 미국인들은 엄청난 양의 밀을 일본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1948-1951년까지 일본에서 빵 소비는 26만2121톤에서 61만1784톤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밀은 대부분의 일본인이 암거래 음식 노점상에게서 먹었던 라멘으로 흘러갔다. 일본에서 암시장은 전쟁통에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전쟁의 마지막 몇 년 동안과 점령 기간 동안 점차 매우 중요해졌다. 정부의 식량배급 체계가 예정보다 20일 늦게 운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암시장에 의존했다. 


도쿄 신바시의 암시장, 1946년


1945년 10월까지, 도쿄에는 약 4만5천 개의 암시장 매대가 존재했다고 추산된다. 또한 도쿄는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암시장인 아메요코쵸Ameyokocho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도시 중심의 철로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사탕부터 라멘과 옷까지 모든 걸 파는 노천의 진열대로 가득 찼다. 이런번잡한 환경에서 노점상은 특유의 차르멜라라는 피리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국물과 물을 끓이는 냄비와 함께 국수가 담긴 서랍을 지닌 바퀴 달린 음식 카트인 야타이에서 라멘을 팔았다. 미국산 밀과 돼지기름이 풍부하여 가격도 저렴했다. 

그 당시, 점령 기간 동안 식당에서 음식을 사고파는 건 불법이었다. 이는 배급을 통제하려고 일본 정부가 전시에 시행하던 야외의 음식 노점 금지를 미국인들이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멘을 만드는 밀가루는 제분업체에서부터  노점상에게서 보호비를 강탈하던 야쿠자가 길거리 매대의 약 90%를 통제하던 암시장으로 비밀리에 보내졌다. 점령 기간 동안 수천 명의 라멘 노점상이 체포되었다. 


상품을 몰수하는 경찰, 1949년.


하지만 1950년, 정부는 음식 노점상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밀가루의 거래에 대한 통제를 없애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라멘 노점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기업들은 국수와 고명, 그릇, 젓가락까지 갖추어진 야타이 완점품을 노점상에게 임대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팔리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라멘과 달리, 당시의 라면은 간단했다.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오사카나Osakana에서 라멘 요리를 강습하는 Jonathan Garcia에 의하면, 이 시기에 라멘은 쇼유(간장)에 기반한 국물에 돼지고기, 닭고기, 니보시niboshi (말린 정어리)를 조합하여 만들었다.  양념을 하는 건 국물 냄비에 섞었고, 노점상은 하루종일 그걸 보충했다. 요즘 라멘은 국물을 붓기 전에 쇼유나 다른 재료와 함께 개별적으로 양념을 한다. 

지방과 강한 풍미가 풍부한 음식은 “보양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라멘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역사(Untold History of Ramen)>의 저자인 교수 George Solt 씨는 말한다. 라멘은 전통적인 일본 요리인 해초에 기반한 자극적이지 않은 국수 국물과 아주 달랐다.  코베 야마테 대학에서 일본의 전통 식문화 교수이자 일본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오쿠무라 아야오Okumura Ayao 씨는 예전 1953년 처음으로 라면을 먹고 충격을 받았는데,  “이 국물을 먹고는 더 커지고 강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라면을 파는 야타이


미국인들도 밀과 동물성 단백질의 영양학적 우수성을 적극 홍보했고, 라멘은 영양가가 높다는 신망을 얻으며, 배급에 지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불경기에 라멘 야타이를 운영하는 일은 소규모 창업이 아직 가능했던 몇 안 되는 기회 가운데 하나였다. 폭격을 당한 도시에서 노동자 계급이 야타이 주변에 모여 라멘을 먹으면서, 점차 라멘은 도시의 생활과 연관이 되었다. 

라멘은 아마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일 것이다. 도쿄에만 약 5천 곳의 라멘 가게가 있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성, 미국의 밀, 중국 요리의 영향이란 과거의 조합이 라멘을 주류로 나아가게 했으며, 이후 일본이 먹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https://www.atlasobscura.com/articles/how-did-ramen-become-pop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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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은 농도農道라고 할 정도로 농업의 비중이 크다.

특히나 보리 농사는 전국에서 최고라고 할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축산업도 상당히 활발하다.

 

그러나 이걸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미세먼지 문제 때문이다.

농축산업으로 인한 미세먼지 문제는 최근의 연구결과에서도 다음과 같이 입증이 되었다.  

http://news.joins.com/article/22482446


자 그럼, 오늘 전국의 미세먼지 현황을 보라. 전북 쪽만 유별나게 심하다.



그런데, 주변의 이야기에 의하면 탄 냄새도 엄청 심하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바로 이맘때 이루어지는 보리 수확, 그리고 밭 태우기이다.

단순히 냄새만 나는 게 아니라 미세먼지도 유발하는 행위이다.

농민들은 습관적으로 이 시기만 되면 보리밭을 태우고 또 태운다.

요즘 같은 때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인도에서는 이런 행위 때문에 심각한 대기오염이 유발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는다.




전북이 한국 최대의 보리 주산지라는 사실이 하나도 반갑지 않다.






이외에도 전북의 미세먼지가 심한 원인을 몇 가지 더 짚을 수 있다.


먼저, 전북의 개발론자들이 그토록 고대하는 새만금 개발사업으로 인해 날아오는 먼지이다. 지금이야 공사하면서 발생하는 흙먼지일 뿐이지만, 나중에 어떤 공장들이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더 심한 대기오염이 발생할 수 있겠다. 새만금을 미래의 식량안보를 위해 개발해야 한다고 한 게 처음 주장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공장 만들고 개발하고 싶어서 그러지. 발빠른 사람들은 이미 그쪽에 땅 많이사놓았다고 하더라.


그리고 둘, 서해안에 집중되어 있는 석탄 관련 발전시설과 공장 들에서 날아오는 것이다. 왜 전북은 공장도 별로 없고 낙후되어 있는데 도대체 어디서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주원인은 수도권과 해당 지역의 공장시설에 전기를 공급하려고 있는 발전소에 있었다. 


 

셋, 전북도청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전북 특유의 지형과 농경지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산맥으로 동쪽이 가로막히고, 농경지가 많으니 상대적으로 습도가 높아 바람이 강하지 않고, 서해안 쪽에서 미세먼지와 함께 불어온 대기가 빠져나가기 어려우며, 습도가 높아 대기의 아래쪽으로 잘 가라앉기에 측정수치가 높다는 것이겠다.


빅데이터 활용 전북 미세먼지 원인분석 연구 최종보고서.pdf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를 들 수 있는데 이건 한국이라면 대부분 해당되는 이야기이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 미세먼지의 60% 이상은 중국발이라고 하자. 그런데 왜 전북만 유독 높은 것이냐? 그 요인을 빼고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지금은 할 수 없이 여기 살지만, 돈벌이가 끝나고 나면 다른 데로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그냥 수도권으로 다시 갈까, 아니면 외갓댁이 있던 묵호로 갈까나?



빅데이터 활용 전북 미세먼지 원인분석 연구 최종보고서.pdf
2.4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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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과 중국의 무역을 둘러싼 힘겨루기로 불안불안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중국은 미국을 아직은 절대 이길 수 없다.

결국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은데, 중국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으니 최대한 자존심 상하지 않게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게 만들고자 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겠지.


이런 상황에서, 아주 미묘한 시점에 미국 부통령이 브라질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713151


명목은 요즘 위기에 빠진 베네수엘라를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한다는데, 기사에도 나오듯이 가장 큰 목적은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하려는 것인 듯하다.

중국이 미국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수입선이 남아메리카인데, 여기에서 열리는 정상회의에 참석한단다.


마침 대두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를 다룬 기사도 떴다.

http://v.media.daum.net/v/20180414140226288


과거 미국이 소련을 무너뜨린 건 주식으로 쓰이는 밀 덕이었다는 이야기도 나도는데, 중국에게 콩이란 바로 그런 존재감을 지닌 곡물이다.

단순히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중국이 농업에 전폭적인 투자를 해서 미국만큼 옥수수와 대두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해도, 13억이 넘는 인구를 먹여살릴 절대적인 양이 모자란다. 미국은 그 정도 생산량으로 3억을 먹이면 되는데, 그래서 남아돌아서 수출을 그렇게나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의 생산량과 같아도 모자랄 판에, 그보다 훨씬 적은 생산량으로 13억을 먹여야 한다. 인구가 큰 무기이면서, 인구가 엄청난 약점인 중국이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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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1장  벼농사와 벼농사 문화의 시작  中村愼一




들어가며


2008년 1월, 중국에서 벼농사 고고학 연구의 전문가 4명을 일본에 초청해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벼농사 기원론이 이미 "언제, 어디에서?"의 단계에서 빠져나가 "왜, 어떻게?"의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야생 벼가 자생하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것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벼 자료의 출토=벼의 인공 재배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연구자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야생인지 재배인지를 분간하는 판단기준을 딱 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배종이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때로는 연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림1-1 중국의 초기 벼 자료 출토 유적

1. 하남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

2. 호남성 풍현澧縣 팽두산彭頭山 유적, 팔십당八十 유적

3. 강서성 만년현萬年縣 조통환桶環 유적, 선인동仙人洞 유적  

4. 절강성 포강浦江 상산上山 유적

5. 절강성 승주嵊州 소황산小黃山 유적

6. 절강성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 유적

7. 절강성 여도 하모도河姆渡 유적

8. 절강성 여도 전라산田螺山 유적

9. 절강성 동향桐鄕 라가각羅家角 유적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확실한 판단기준을 어떻게든지 수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야생, 여기서부터는 재배라고 딱 잘라 버리지 않고 양자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계에도 꽤나 퍼졌다고 느낀다. 


아시아 벼농사 기원의 문제는 완신세完新世의 환경변화에 야생 벼가 어떤 대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문화적 적응으로 그에 응했느냐는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터이다. 그를 위하여 고정도高精度의 옛 환경 복원과 동식물 유존체의 정성, 정량 분석 등 자연과학 여러 분야와 고고학의 협동이 필수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접근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 밝혀졌는지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공동 연구의 성과 등도 나누면서 개관하겠다.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벼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계에서 아시아 벼농사 기원 연구를 주도한 건 농학과 민족식물학이었다. 거기에서는 '운남-아삼 기원설'이 제창되어(渡部 1977), 한때는 정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의 증거는 그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축적된 고고학 자료는 그것이 동시대의 자료인 만큼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가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그 구체적인 연대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재배종인지 어떤지 판단하는 지표가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여유는 없다.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졸저(中村 2002)를 보시라 권하고, 여기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자 한다.


1만 년을 넘는 오래된 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던 유적은 장강 중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강서성의 조통환, 선인동 유적(모두 잎의 세포화석), 호남성의 옥섬암玉蟾岩 유적(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등이다(그림1-1). 잎의 세포화석이란 벼잎의 기동세포라는 특수한 세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유리이다. 생리적, 화학적으로 강하고, 장기간 토양 속에서 보존된다. 토양 속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에 벼가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곧 재배 벼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여러 유적은 모두 동굴 유적이고, 그곳에서 벼가 살았을 리는 만무하나, 조통환 동굴처럼 주위의 평지에서 수십 미터나 위로 솟아 있다면, 마른풀이 바람에 날려 들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신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전에 사람에 의해 무언인가 형성된 벼의 이용 -땔감이나 깔개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 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장강 하류로 눈을 돌리면,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진 절강성의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소황산 유적(약 9천 년 전)에서는 토기의 바탕흙 안에 대량의 알곡이 섞여 있었다(그림1-2). 식물규산체가 발견된 것만으로 벼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벼의 열매=알곡을 이용했다는 건 아닌데, 이쪽은 틀림없는 알곡이다. 그것이 속의 쌀을 꺼낸 뒤의 왕겨인지 쌀이 들어 있던 채로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혼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만 알곡을 모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먹을거리로 쌀을 이용하고 나머지 왕겨를 유효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리가 있다.


토기 바탕흙의 혼합재로 왕겨를 이용하는 일은 조금 늦게 장강 중류에서도 시작된다. 호남성 풍현에 있는 팽두산 유적과 팔십당 유적 같은 팽두산 문화(8000-7000년 전)의 토기가 그것이다. 토기 종류의 구성을 보아도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분화가 진행된 데다가, 명확하게 요리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솥'의 수량이 많아진다. 식물질 먹을거리 의존도가 증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1-2 상산 유적 출토 토기. 단면에 검게 보이는 것이 혼합재의 왕겨.



거의 동시대에 놓인 하남성의 가호 유적과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에서는 왕겨가 토기의 혼합재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적에서는 탄화미, 붉게 탄 흙(紅燒土)에 알곡 압흔, 그리고 잎의 세포 화석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벼 자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현재 있는 고고자료로 미루어 보는 한, 지금으로부터 8000년쯤 전에 벼 이용이 강화된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 7000년 전쯤 되면, 장강 하류에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가 전개된다. 토기의 종류 분화는 더욱 진행되고, 쌀 조리에 특화된 종류인 '시루(=찜기)'가 출현한다. 또한 농기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뼈삽날(骨耜)도 다수 출토되고, 이외에도 벼농사 의례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물도 적지 않다. 논의 검출 사례는 현재로서는 약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후기까지로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으로 오래된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즉, 여러 가지 상황증거로 미루어 보는 한, 하모도/마가빈 문화기에는 그 이전부터의 채집에 더해 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 7000년 전이란 연대를 중국 벼농사 개시의 하한년대로 잡는다(나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신중론'이라 친다. 벼농사의 시작을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학계의 추세라는 점을 굳이 덧붙여 놓는다). 그에 대하여 일찍이 아시아 벼농사의 원향이라 여겨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연대는 그보다도 몇 천 년 늦다. 구체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는 5000년 전쯤,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는 4000년 전쯤이다.


중국으로부터 일원적으로 이들 지역에 벼농사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벼농사 보급의 파도가 운남과 광서 같은 화남의 주변부에 도달한 연대는 오래되었다고 어림잡아도 5000년 전이다. 특히 인도의 경우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부에 도달하는 연대와 거의 동시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동심원적인 파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인도, 그리고 가능성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시기를 달리 하여 저마다 벼의 재배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전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이다. 그곳에서 중국의 대지를 무대로 전개된 인간과 벼의 관계의 역사를, 환경고고학과 식물고고학의 시점을 섞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빙하기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빙상에 덮힌 한랭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빙하기라 해도끊임없이 추위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한랭한 시기와 온난한 시기가 반복하여 미세하게 변동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빙기는 뷔름 빙기(아메리카에서는 위스콘신 빙기)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약 1만5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바닷물에서 증발된 수분이 눈이 되어 육지에 내려 쌓이는데, 그것이 녹지 않고 곧바로 빙하로 발달한다. 증발한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해수면은 낮아진다. 뷔름 빙기의 가장 한랭기(1만6천 년 전쯤)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미터나 낮았다고 여겨진다.


이 최종 빙기가 종언을 고한 뒤 기온이 단숨에 상승했는데, 그 뒤 재차 '영거 드리아스기'라고 부르는 추위가 1300년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추위도 1만1600년 전을 경계로 급격한 온난화로 뒤바뀐다. 지질시대라 말하는 완신세의 시작이다. 그 뒤 기온은 상승의 한 길을 걸어, 6000년 전쯤에 최고온기('힙시서멀기' 또는 '기후적기'라 부른다)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예를 들어 중국의 장강 하류에서는 기온이 현재보다 2-3도 높고, 강수량은 500-600mm 많았다고 복원되어 있다(王, 張 1981).


중국 장강 유역에서 벼의 채집이 시작되어, 이윽고 재배로 진전된 건 영거 드리아스기와 힙시서멀기 사이의 기후격변기의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옛 환경과 지리에 관한 정밀한 복원 연구는 매우 부족하기에 여기서부터는 상상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는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완신세 전반의 급격한 온난화는 비가 자주 오도록 만들었다. 최종빙기에는 낙엽수의 숲과 건조한 초원이 탁월하던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가 광대한 늪과 호수와 습원으로 순식간에 그 모습이 변했다. 기온이 높은 비가 많이 오면, 야생 벼에게는 절호의 생식환경이다. 최종빙기에는 추위로부터 도망와 화남과 동남아시아에 후퇴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야생 벼가 나갈 차례가 도래했다.


재배 벼의 선조에 해당하는 Oryza rufipogon이란 야생 벼, 그중에서도 특히 자포니카형인 것은 여러해살이의 경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폭넓은 변이가 존재하여 한해살이에 강하게 기운 그룹도 있다. 아마 그러한 그룹이 그 탁월한 이주능력을 무기로 재빨리 북상을 시작해 곧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에 대규모 군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쌀알만큼'이라 하면 작은 것의 예이다. 한 알, 두 알 먹는 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벼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때 해수면의 급속한 상승으로 육지면적이 맹속력으로 감소했다. 동중국해에 면한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에서는 6000년 정도 사이에 해안선이 500-700킬로미터나 내륙으로 후퇴했다. 즉, 해마다 100미터씩 육지가 수몰되어 사라졌다고 계산된다.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 좁아지면 야생 먹을거리 자원에 대한 인구압이 높아진다. 그때까지는 먹지 않던 야생 벼의 종자가 수렵채집민의 눈에 매력적인 먹을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단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장강 중하류의 대습원지대, 예를 들면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 부르던 양호 평야(호북성의 강한江漢 평야와 호남성의 동정호 평야)의 중심부 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위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정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홍수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또 습지와 산야의 양쪽에 접근할 수 있는 저지/구릉의 이행지대나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강서성 조통환과 선인동, 호남성 옥섬암, 절강성 상산과 소황산 등의 여러 유적은 바로 그러한 입지에 있다.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직 매우 한정적인 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8000년-7000년 전쯤이 되면 물 환경이 불안정한 저지로 진출하는 선구자가 나타난다.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과 하모도 유적(모두 해발고도는 약 4m)이 그 대표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일본의 연구진이 베이징 대학,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와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절강성 전라산 유적에 대하여 소개하려 한다.


영소寧紹 평야의 동단 근처에 위치한 이 유적은 하모도 문화에 속하여, 중심적인 문화층의 연대는 약 7000-6500년 전으로 짐작된다(그림1-3). 유명한 하모도 유적에서 7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하모도 유적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저지대 유적이고, 인골과 동물뼈, 목재, 식물 종자 등의 유기질 유물의 보존상황은 꽤나 양호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 교육대학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가 행한 규조 분석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金原 최근 출간).



그림1-3 전라산 유적 원경(가운데 돔이 유적 박물관)




규조란 단세포의 조류로, 바닷물과 민물, 그리고 일부는 토양에서도 생식한다. 그 이름은 규산질의 단단한 껍질을 가진 데에서 유래하는데, 규조 본체가 죽어도 그 껍질만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남아 있는다. 또 똑같이 바닷물이어도 난바다, 내만, 개펄 등에 생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껍질의 크기나 형태, 표면의 모양 등을 조사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와 비율에 따라 규조의 껍질이 퇴적된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유적에 사람이 거주하기 직전의 시기, 그곳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1미터 정도 낮았다고 추정된다. 그 뒤 해수준은 마이너스 2.0미터 이하까지 낮아진 걸로 보이고, 이 땅은 육지화되어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다. 당시 유적은 해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가 습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해수면이 다시 상승을 시작해 최고기에는 현재보다 약 2미터 높아졌다(힙시서멀기의 최고 해수준). 토지는 해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을은 방기되었다. 즉 이 유적은 완신세의 해진기에 영위된 유적인데, 해진기에도 해수면이 변동하여 끊임없이 계속 상승하던 해수면이 일단 조금만 물러난 시기에 출현했던 육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유기라 하더라도 그곳은 민물 유역의 가장자리여서, 습지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전라산 유적에서도 하모도 유적에서도 주거는 고상식(역주; 마루를 높게 쌓은 형태)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저습지에 거주하기 위한 하나의 적응 수단이었다. 고상식 주거의 주변에는 수많은 목제품이 남아 있다. 건조한 지면 위에 남아 있던 목제품은 거의 곤충, 균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어 버려서 몇 년만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많은 목제품이 양호한 보존상태였던 건 마을 자체가 저습지 안에 있어 버려진 목제품이 늘 물에 잠긴 상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덧붙여서, 고상식 주거의 근처에서 목제 노가 8점 출토된 것은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통나무배가 애용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적에서는 통나무배 자체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 유적보다도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 통나무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하모도 문화기에 통나무배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고상식 주거와 통나무배라는 두 가지 물품, 그것은 저습지에 정주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호교 유적에서 검출된 집터는 흙벽을 세운 평지식 주거였는데(절강성 문물고고학연구 외 2004), 이 유적에서는 나무 하나로 만든 사다리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거 부분은 2층이었거나 또는 적어도 먹을거리 창고는 고상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저습지로 진출하는 데에는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벼도 도토리도 종이 한 장 차이


앞에 기술했듯이, 벼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저습/구릉의 이행지대와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절강성의 유적을 예로 들면, 상산 유적과 소황산 유적은 전라산과 하모도 등의 하모도 문화기의 유적과 그보다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 비하여 훨씬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표고도 50미터 안팎으로 상당히 높다. 과호교 문화와 하모도 문화의 시기, 사람들은 산간의 분지를 떠나 해안 근처의 평야부로 진출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1만 년 전의 해안선은 현재의 그것보다 몇 백 킬로미터나 난바다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근처에 사람의 거주가 있었더라도 그 유적은 깊은 해저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건, 어느 시기부터 '물가'라는 경관이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일본과 중국 공동 프로젝트에서는 출토 종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傳, 趙 최근 출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전라산 유적에서는 확실히 벼의 종자도 수없이 출토되지만, 마름의 알곡과 도토리(대부분은 개가시나무) 쪽이 수량에서는 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출토 종자의 수에서는 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종자의 크기를 고려하면 가시연 알곡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출토된 종자의 숫자 비율이 각 식물이 당시의 식생활에서 점했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더라도, 벼가 출토되었다는 걸 곧바로 날마다 쌀만 먹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어서 그러한 선험적 발상은 확실히 위험하다. 장강 유역에서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모도 문화기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벼는 아직 '보물의 하나'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벼농사의 기원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장기에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는 걸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결과에 눈을 돌려 보자. 꽃가루도 또 산과 알칼리에도 침범되기 어려운 단단한 외막으로 덮여 있어, 흙속에서 장기간 보존된다. 토양 표본 안에 포함된 꽃가루의 식물종 수량비를 통해 당시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 꽃가루 분석의 원리이다.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사람이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이다. 유적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의지층에서는 부들과와 벼과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벼과 식물은 꽃가루의 형태만으로는 종까지 특정하기 어려운데, 잎의 세포 화석 분석 결과 등을 감안하면 그 대부분은 갈대와 벼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부들도 갈대도 벼도 습지의 식물이며, 규조 분석의 결과와도 부합한다. 이러한 물가 식물과 함께 많이 산출된 것이 북가시나무 아속을 주로 하는 조엽수의 꽃가루이다. 습지를 에둘러싼 높이 100미터 정도의 좀 높은 산들은 조엽수가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걸 말한다. 그곳에서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개가시나무도 북가시나무 아속인 식물이다).


갈대와 부들이 습지의 가장자리에 군락을 형성하는 데 반해, 조금 수심이 잎은 곳에는 마름과 가시연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적에서는 잉어와 붕어 같은 민물고기, 거북과 자라 같은 파충류, 오리와 기러기 같은 조류의 뼈도 무수히 출토되었는데,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늪과 못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렵의 대상이었던 포유류로는 물소와 각종 사슴 종류가 주체를 점하였는데, 이들도 물가에 모이는 습성을지닌다. 이미 벼의 재배도 시작되고 돼지도 사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물가의 환경에서 수렵, 어로,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하며 도토리 같은 산야의 산물이 그것을 보충하는 생업경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생업경제의 상태를 고고학,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다각적 경제(broad-spectrum economy)'라고 부른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최후의 빙하기를 극복한 뒤에 비로소 이 다각적 경제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 독자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통해 탄수화물을 얻고 물고기와 물새의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는 식생활은 기껏해야 1만 년 정도의 역사밖에안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신기원이었다.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이 시작된 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일어난 물질문화의 커다란 변혁이 토기의 발명이며, 사회적인 크나큰 변혁이 정주생활의 개시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아울러 가장 일찍 농경이 시작되었던 서아시아에서 토기는 출현 당초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취사의 도구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반부에서는 벼, 북반부에서는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이 우선 재배되었는데, 그 이전 단계인 채집단계에서도 녹말을 알파화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토기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이다. 도토리의 경우 생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모밀잣밤나무와 개가시나무) 가열하면 맛이 좋아지고 해충이 구제되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며, 탄닌을 많이 포함해서 떫어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도토리에서 떫은맛 제거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기 제작의 개시는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용되는 식물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일본에서 도토리 종류에 더해 밤, 칠엽수 같은 견과류와 좀처럼 증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근경류가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견과류와근경류가 존재했는데, 거기에 벼와 조, 기장 등의 벼과 초본과 대두(중국 동북지방부터 화중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높음)가 더해져 있었다. 그 뒤의 두 가지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식물질 먹을거리에 대한 의존이 강해진 결과 정주화가 촉진되고, 인구는 증가한다.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전에상세히 서술했기 때문에(中村 2002),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특히 정주 마을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선행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구는 변동을 반복하면서도 서서히 우상향으로 계속 증가해 머지않아 국가의 형성과 도시의 발생 -문명의 탄생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은- 으로 우여곡절 끝에이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원전 4천년대의 후반부터 3천년대의 후반까지 1천 년 사이에 각지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다. 일본의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 확실히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에는 수많은 마을이 경영되어 이 시기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고 추정된다(今村 1997). 환경조건에 혜택을 입었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affluent forager)'의 한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기에 정점에 이르른 조몬인의 번영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면 적어도 동일본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이 출토 주거터 수의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명확한 건 아니지만, 힙시서멀기 이후 기후의 한랭화, 건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은혜에 전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렵채집민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완신세 당초부터 식물질원의 이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벼, 조, 기장, 대두 같은 한해살이 초본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견과류와 근경류였다. 견과를 다는 목본류는 종자번식이라 하여 생장이 느리고, 근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본류는 영양번식이었다. 인간이 활용하기 좋은 형질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배종으로 고정시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오래 채집 단계에 멈출 수 없었다. 도토리를 먹든지 벼를 먹든지 출발점에서 차이는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재배화가 가능한 야생의 한해살이 초본의 유무가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쳐 일본과 중국 두 곳의 사회 진화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벼의 재배화에 성공했던 중국에서는 관개논의 창출에 의하여 기후의 악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인구가 급감한 조몬시대 후기의 일본 열도에서는 주술에 관한 각종 기물이 성행한다. 거기에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주술에 침잠하여 자연의 은혜에 매달리려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일본 열도의 주민이 자연의 위력이 지닌 주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는 데에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열도의 밖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주를 기다려야 했다. 



① 야생 벼의 채집 -토기, 석제 갈판, 목제 절구

② 야생 벼 종자의 인위적 파종


③ 재배 벼 형질(비탈립성)의 출현


④ 재배 벼 형질의 확립(=야생 벼와 유전적 격리) -논


⑤ '벼농사 문화'의 성립 -벼농사 제사 관련 유물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

그림1-4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로




벼농사 사회 성립까지 지나는 길


채집에서 재배로


벼가 출토되면, 당시 사람들이 벼(쌀)를 주식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의 위험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벼가 재배된다고 하면 그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고, 그 사회는 '벼농사 사회'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난폭하고 안이한 의론이다.


그림1-4는 벼 이용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화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인간에 의하여 식용이된 야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벼과 식물처럼 종자가 작고, 또 먹기 위해 전처리가 귀찮은(왕겨를 벗기고, 게다가 가열해야 함) 경우는 대량으로 채집하기가 쉬워야 한다. 광대한 초원에서 여기 한 포기, 저기 또 한 포기 식으로 자라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완신세 전반의 온난화 시기에 장강 유역에서 대규모 야생 벼의 군락이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야생 벼를 채집하는 데에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야생 벼는 탈립성을 지니고 있다. 탈립성이란 익은 알곡이 자연스럽게 훌훌 이삭에서 떨어지는 성질이다. 알곡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벼 포기를 밀어 헤치면서 익은 알곡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모으는 게 좋다. 그럼 효율이 나쁘다고 하면, 큰 소쿠리라든지 천을 마련하여 이삭을 쳐서 그 안에 알곡을 모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돌칼이나 돌낫 같은 도구는 필요 없다고 하기보다 쓸데가 없기 때문에 유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야생 벼의 채집 단계는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꽤나 성가시다. 다만, 상황증거가 되는 것이 탈부脫稃(왕겨를 제거하는 일)를 위한 목제 절구나석제 갈판 같은 도구류와 쌀을 가열하는 데 쓰인 토기의 존재이다. 토기와 갈판은 완신세의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강 유역에도 출현한다. 지금으로서는 쌀을 끓이고, 알곡을 찧는 도구 등의 유물 자체를 직접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모순은 없다. 


대저 야생 벼가 탈립성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은 알곡이 언제나 이삭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물에게 먹혀 버려 자손을 남길 수 없다. 운 좋게 동물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알곡이 그대로 달린 이삭이 지면에 이르면 한곳에서 많은 종자의 싹이 나게 되어 이후 생장에 불리해진다. 그러므로 익은 알곡은 저절로 지면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야생 벼가 탈립되는 장치는 벼알가지와 붙어 있는 알곡의 아랫부분에 떨켜라는 조직이 생김으로써 작동한다. 알곡이 익으면 그곳에서 맥없이 떨어진다. 그때 알곡의 아랫부분에는 표면의 매끄럽고 얕은 우묵한 곳이 남는다. 그에 반하여 탈립성을 잃은 재배 벼는 이삭에서 알곡을 억지로 잡아당겨 뗄 경우에 알곡의 아랫부분에 작은 혹 모양의 돌기가 남는다. 


이런 알곡 아랫부분 형상의 차이에서 야생 벼와 재배 벼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책의 감수자인 사토 요이치佐藤洋一 씨였다(佐藤 1996). 사토 씨는 하모도 유적에서 출토된 벼 알곡을 전자현미경으로 공들여 관찰하고, 그곳에 야생형과 재배형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걸 밝혔다. 이 판별법은 그뒤 중국인과 미국인 연구자에게 이어져, 절강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을 대상으로 활발한 연구가 행해지게 된다.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정위엔페이鄭雲飛 씨 등은 전라산 유적과 그와 거의 동시기의 동향라가각 유적(마가빈 문화)에서는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며, 이 두 유적보다 1000년쯤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는 약6대4의 비율이라고 보고한다(鄭, 孫, 陳 2007). 정씨 등에 의하면,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은 현재의 자포니카형 재배 벼의 그에 합치한다고 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의 재배 벼는 각각 독립하여 재배화되었을 것이고, 중국 장강 유역에서 가장 일찍 재배화된 것은 자포니카형이라는 상정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또 정위엔페이 씨는 다른 논문에서 상산 유적의 출토품을 다루어, 그곳에서도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을 지닌 알곡이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鄭, 孫 2007).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데, 표본의 수가 지극히 적은 것 같아 결론을 내기에는 조금 더 비슷한 사례의 증가를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으로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일하는 D. 풀러(중국 이름 博稻鎌) 씨 등도 전라산 유적 출토 알곡의 분석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들은 1185알의 알곡을 조사해, 그 가운데 39%가 야생형, 24%가 재배형, 그리고 나머지대부분(25%)은 야생형인지 재배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미성숙 알곡이라고 한다.


미성숙 알곡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풀러 씨 등의 생각은 이러하다. 야생 벼의 등숙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알곡이 완전히 익는 것을 기다려 채집하려고 하면 이미 그때에는 대부분의 알곡이 떨어지게 된다. 효율 좋게 대량으로 모으려면 일부는 거의 익었지만, 미성숙인 것도 꽤 남아 있는 단계에 채집하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채집한 알곡 안에는 미성숙인 것이 일정량 섞이게 된다. 


미성숙인 알곡까지 함께 훑어 버린 듯한 야생 벼의 수확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진화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벼가 아닌 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힐먼 등의 외알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등숙 시기 직전의 외알밀을 계속 베어 그 가운데 일부를 파종하면 몇 십 년이란 단기간에 탈립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배종'이 출현하는 일이 나타난다(Hilman and Davies 1992). 이것이 벼에도 해당된다고 하면, 야생 벼를 채집하는 선사인의 평범한 욕심쟁이가 우연히 야생 벼에서 비탈립성이란 형질의 진화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게다가 그것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야생 벼 채집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재배종'이 출현했다고 적어도 겉보기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암시한다. 즉, 그럼1-4의 ①-③의 여러 단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 순서로 연달아 일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빠른 연쇄반응으로 단기간에 연속하여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고자료로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탈립성을 잃은 재배형이 출현해도 그주변에 아직 많은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면, 선사인들은 변함없이 그 두 가지를 계속 수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유적에서도 두 유형이 남아 있다. 전라산 유적과 하모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알곡이 이삭에 달린 채로 남아 있는 포기 쪽이 더 많은 종자를 회수할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재배형의 비율은 서서히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재배형이 늘어나더라도 야생종과 혼재하는 상태에 있는 한 수확된 알곡에 야생종의 그것이 일정량 포함되는 일은피할 수 없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고 기본적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만, 약간은 자연교잡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벼의 탈립성 형질은 재배 벼의 비탈립성 형질에 대하여 우성이기 때문에, 둘이 교잡할 경우 다음세대의 포기는 탈립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배종과 야생종이 같은 장소에서 자라고 있으면, 재배종의 종자만 수확하는 일이 곤란하고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장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를 다녀도 실제로 보이는 건 논에 심는 재배종뿐이다. 논 안은 물론, 농수로의 주변과 늪과 호수 주위에도 야생 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모도 문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7000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6000년 전쯤을 정점으로하는 온난기, 힙시서멀기 이후 기온이 서서히 냉량, 건조해지면서 야생 벼의 군락은 완신세 초기에 북상했던 것과 반대로 서서히 남하하여, 이윽고 장강 유역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원래 야생 벼가 번성했던 토지가 논과 양어장으로 조성되어 간신히 남아 있던 군락도 '잡초'로 여겨져 구제되어 버렸다는 인위적 영향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야생 벼의 소멸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적에 남아 있던 알곡의 형상을 조사하여 이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있는 고고자료는 아직 그것을 허락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의 경우에는 또 다른 선입관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 선입관이란 마을 주변의 자연습지에는 아직 야생 벼가 생육하고 있더라도 이미 그것을 채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직 인공 논에서 재배된 재배종만 수확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유적에서는 재배종의 알곡밖에 출토되지 않는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다. 꽃가루의 수명은 몇 분 정도로 짧아 멀리까지 날아가서 다른 꽃을 수분시킬 수는 없다. 이삭 패는 시기가 같은 품종이어도 20미터 떨어져 있으면 교잡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배형의 포기를 야생종이 자생하는 자연습지가 아닌 그것과는 별도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농지 -이곳을 '논'이라 불러도 좋다- 에 재배하게 되면, 탈립성이란 형질도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또한 인공 농지가 있으면 물높이도 조절할 수 있고, 벼와 경합하는 잡초도 제거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연습지에 야생 벼와 섞어 심는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안정적으로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사람의 쪽에서 바라보면,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투하하는 노동력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수확한 알곡을 봄에 습지에 파종한 다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뿐과 같은 정도라면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익은 알곡을 수확하는 것도, 마름과 가시연의 열매를 모으거나 산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야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감상이지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는 의식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그에 반하여 인공 농지=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걸 생각하면, 먼저 그 조성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차이이다. 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수로와 논두렁을 수복하거나, 물높이를 조절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자연히 쌀은 다른 채집 식물 먹을거리와는 별개로 특별해지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의식이 싹텄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벼농사 문화란 '벼농사를 영위하는 민족 사이에서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되는 벼농사와 복합된 문화 요소, 즉 생산기술과 사회양식, 신앙과 의례, 생활양식 등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渡部 1987). '벼농사 문화'란 단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논에서 인공 재배를 개시한 이후가 되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베어 거둘 뿐, 그것을 벼농사의 '생산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과 의례'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뜬다. 벼농사 농경민은 1년을 통틀어 벼농사에 관한 제사를 집행한다. 정원의 예축의례를 시작으로 파종과 모내기, 벌레 쫓기, 베어 거두기와 절일마다 그를 행한다. 이와 같이 하나로 이어진 의례의 배경에는 벼의 풍양을 관장하는 신들의 체계가 있고, 그 유래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있다. 그래야 벼농사에 관한 '신앙과 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생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단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문화'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 단계가 되어도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을 벼(쌀)에만 의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야의 식물을 모으고, 동물을 잡고, 물고기를 붙잡는 일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다른 생업이 점하는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더욱더 급해져 갔다.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급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한 가지는 농지의 확대이다. 마을 주변은 이윽고 벼이삭이 파도를 치는 논으로 가득해졌다. 그 이상으로 경작 적지를 얻을 수 없게 되거나, 구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거리가너무 멀거나 하면 마을사람 가운데 일부가 신천지를 구하러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전파'라든지 '확산'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새로 마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집약화이다.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논 면적도 2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같은 면적에서 지금까지보다 2배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다면 따로 농지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단숨에 2배라고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벼는 그러한 인간의 방자함에 답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하여 생긴 다수성의 계통을 찾아내, 그것을 보호하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다른 채집식물과 수렵동물에게도 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주변의 나무 가운데 2배의 열매를 다는 도토리 나무가 때마침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뽑아 버리고 대신에 그 도토리를 심는 일 등을 누가 시도할까?아무튼 산이 그 도토리의 숲으로 덮이는 데에는 10년이나 2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수렵과 어로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의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2배로 사슴을 얻고 싶다고 염원해도 도대체 어떤 방책이 있을까? 다른 일을 팽개치고 날마다 사슴 사냥에 몰두하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슴의 수는 해마다 감소 일로를 걸을 것이다. 


집약화가 가능하다는 이 특성이야말로 벼를 비롯한 한해살이 초본 작물의 최대 이점인 동시에, 두려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와 작물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미지옥'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머지않아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태를 '벼농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림1-4로 되돌아가 정리하도록 하자. ③의 단게에서 재배 벼의 형질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논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쌀만 먹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획기적이라 부르는 건 다음 ④의 단계이다. 출토 알곡의 형상이 재배형으로 거의 통일된 건 벼의 재배가 야생 벼의 생식지에서 공간적으로 격리된 결과 생식적인 격리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 전용 농지, 이른바 논은 기술문화사의 큰 혁신이며, 문화 전반의 양상도 차례로 벼농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나아간다. 그것을 일러 ⑤'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라 한다. 벼농사라는 생업은 자기증식적으로 비대화되어, 어느 사이에 벼농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이다. 이 ④의 단계부터 ⑥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도 자연계의 여러 변동과 이변에 따른 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아닌 한 비교적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①부터 ③까지와 ④부터 ⑥까지가 각각 하나의 결말이 되어 그 둘의 사이에는 몇 천 년이란 상당히 오랜 시간적 동떨어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벼농사 문명으로 가는 길


여기에서는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실제 고고자료에 대조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절강성에서 최근 들어 점점 구석기시대 유적의 탐색이 시작된 참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태호 서남의 구릉과 저산지대에 몇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시대적 자리매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토기와 간석기를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 신석기 문화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포강浦江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승주嵊州 소황산 유적(약 9000년 전)이 있다. 모두 토기 바탕흙에 대량의 벼 알곡이 섞여 있으며 유적 토양에서도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먹을거리로 벼를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재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나뉘고 있다. 대량으로 출토된 석제 갈판과 갈돌이 벼의 알곡을 가는 데 쓰였는지, 또는 견과 등을 갈아 으깨기 위하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다수를 점하는 건 입구가 크고 밖으로 벌어지는 세면기 같은 모양으로, 표면에는 붉은색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끓이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적에서 주먹 크기의냇돌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그것을 달구어 '세면기'에 넣어 끓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의 농촌 요리 등에도 있는 이른바 스톤 보일링이란 방법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국을 끓이는 데에는 적합하더라도 밥을 짓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산과 소황산 두 유적이 표고 50미터 정도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것에 대하여, 약 8000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된 소산蕭山 과호교 유적의 현재 지표면의 높이는 불과 표고 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당연히 당시 거주면의 높이는 가장 낮아진다. 이 유적은 가을의 사리일 때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전당강의 바로 옆에 있다. 8000년 전이라면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유적은 7000년 전쯤까지는 바다 속에 잠겨 버렸다. 그것을 굳이 저지대에 마을을 이룬 건 '물가'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생업양식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출토된 동물뼈를 보아도 포유류로는 사슴류와 물소(야생이라 생각됨), 파충류로는 거북류와 양자강 악어, 조류로는 기러기와 오리류 및 두루미가 주체를 점하고 있어, 그 상정을 뒷받침한다. 출토된 식물의 씨앗을 보아도, 남방멧대추, 복숭아, 각종 견과류 같은 산의 산물과 함께 마름과 가시연이 출토된다.


벼도 마름이나 가시연과 마찬가지로 '물가'의 채집 식물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정위엔페이 씨 등은 알곡의 형상에 대하여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약 6대4라고 보고한다. 재배형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탈립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채집을 계속하면서 자연히 출현할 수 있는 형질이다. 기본적으로는 벼도 모두 채집된 것이라 생각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상산과 소황산을 비교하면, 토기의 기종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명확하게 끓이는 용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기종인 '솥'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식생활에서 식물질 먹을거리 중에서도 쌀의 비중이 꽤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가능성도버리지 못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7000-5500년 전이라 연대를 부여하는 하모도 문화이다. 하모도와 전라산 같은 유적이 늘 물에 잠길 듯한 저습지에서 경영되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과호교 문화와 마찬가지로 '물가'의 생업 전략을 취했다. 벼잎의 세포 화석 밀도가 높은 토층이 몇 층이나 발견된다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야생 벼의 생식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된 '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에 대해 말하면 '솥'이 주체를 점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지만 쌀을 찌기 위한 전용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시루가 출현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로서 쌀의 중요성이 다른 채집 식물에 비해 한 등급 위의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것이 물소와 사슴의 견갑골로 만든 '뼈보습'이다. 이것은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의 굴삭, 물가의 둑 등의 토목작업에도 쓰인 도구로서 일괄적으로 농기구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는데, 흙을 쌓아 올려 간단한 두둑을 만드는 농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모도 문화가 그것 이전의 여러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정신생활에 관한 기물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토제와 골제 상 또는 토기 표면의 선각화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형태의 동식물과 인물의 묘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그림1-5). 토제 동물상에는 돼지(멧돼지), 양(?), 물소, 코끼리, 새, 물고기 등이 있다. 토기 표면에 선각된 사례와 함께 그들 동물이 가축 또는 수렵 대상으로 많이 구할 수 있기를 기구하는 유감주술에 관한 주물이라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발의 외면에 묘사된 '벼이삭 문양'(그림1-5의 7)은 벼의 풍년 기원에 관련된다. 이른바 '오엽 문양'(그림1-5의 8)에 대해서는 제사용 길상물인 '만년청 분재' 또는 어떠한 약초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삭 패는 시기의 벼이삭이라 하는 설이 있다. '물고기와 물풀 문양'(그림1-5의 9)에 대해서는 짝을 이루는 동물이 새인지 물고기인지 견해가 나뉘는데, 적어도 오른쪽 그림에 대해서는 물고기와 벼를 같은 화면에 묘사해 둘 모두 풍부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란 설이 옮게 여겨진다. 식물 중에는 특히 벼가 중시되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1-5. 하모도/ 마가빈 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3, 6 라가각 유적, 기타는 하모도 유적)




하모도 문화가 항주만 남쪽 기슭의 영소寧紹 평야에 전개된 데 비해, 항주만 북쪽 기슭의 항가호杭嘉湖 평야는 마가빈 문화의 분포 구역이다. 연대로 보면 7000-5800년 전으로 둘 수 있다. 이 지역은 영소 평야와는 달리, 산과 구릉이 거의 없는 낮은 평지이다. 한번 홍수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는 한, 생업경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하모도 문화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물가' 그리고 벼로 기울어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실한 '논'이 이 마가빈 문화의 후기(6000년 전쯤)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초혜산草鞋山과 곤산시昆山市의 작돈綽墩 유적이다. 상세한 건 이 책에 실린 우다 노츠宇田津 논문을 보시길 바란다. 물론 이 연대는 늦어도 그 시기까지에 '논'이 출현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이 1000년 또는 2000년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마가빈 문화 전기의 유적인 동향 라가각 유적에서는 토제 남성 전신상이 출토되었다(그림1-5의 6). 그 과장된 남성기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농지를 여성, 경운도구를 남성이라 보는 성적 상징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Eliade 1968).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는 특이한 목제품으로 '남경형'이란 기물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남근을 본뜬 것인데, 이것도 똑같은 상징주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村 1999). 그러한 점에서 마가빈 문화 전기까지로 논의 창시가 거슬러 올라가 수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송택崧澤 문화로 5800-5300년 전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동물 유존체에수렵대상 짐승이 점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가축인 돼지의 비율이 증가한다. 저습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물질 유물이 남기가 나쁜 데에도 기인할 것인데, 벼 이외의 채집 식물의 검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생업형태가 다각적 경제에서 벼농사 전업 경제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에 보조를 맞추듯 쌀 조리 전용 도구인 시루와 세발솥이 끓이는 용도의 토기를 주로 점하게 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징호澄湖 유적에서는 논터가 검출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데, 논 한 배미당 면적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신생활면으로 눈을 돌리면,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에서 성행하던 토제상과 토기 회화가 거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함께, 형상 토기(그 일부에 동물과 인물을 본뜬 토기)와 채색 토기, 그리고 토기 표면의 추상부호가 눈에띈다. 채색과 조소, 선각이 장신된 것은 이질泥質 회도灰陶(불순물을 제거한 점토를 써서 환원염소성한 회색 토기)또는 흑피도(이질 회도의 표면에 탄소를 부착한 흑색 토기)의 두, 호, 관 같은 저장, 공헌供献 토기류이다. 아마 벼의 풍작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에 관련된 기물이라 생각한다.


이들 특이한 토기류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그러한 무덤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같은 초현기初現期의 연옥 제품이 동반되는 일이 많고, 또 그와 같은 무덤이 공동묘지 안의 한 구획에 집중되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즉, 이 시기에는 제사의 복잡화와 제사집행자가 되는 특정집단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동묘지는 하모도 문화, 마가빈 문화의 시기부터 존재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무덤의 배열, 부장품의 종류, 많고 적음, 정교함과 조잡함 등으로 집단의 차이를 유추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송택 문화의 물질문화를 계승하여 5300년 전쯤에 시작되고, 그로부터 800년 정도 이어진 것이 양저良渚 문화이다. 무덤에 대량의 옥기(=연옥 제품)를 부장한 집단은 자신들만의 묘지를 영위하게 된다. 그것은 종종 대규모 봉분(흙을 쌓아 올린 흙더미)과 대상묘(산비탈을 깎아낸 테라스)의 형태를 취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집단이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지위를 손에 넣고 묘지의 조성에 대량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옥기에는 매우 정세한 문양이 새겨진다(그림1-6). 아직 금속기가 없던 시대이다. 석영 같은 단단한 돌조각이라든지 상어의 이빨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 점의 옥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그것을 수십 점이나 넣기도 했기에, 전문 공인이 언제나 그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도의 전업생산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옥기만이 아니다. 복잡, 정치한 음각선 문양을 장식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공인에 의한 수공업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벼농사 농업의 집약화였다. 돌쟁기는 송택 문화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양저 문화기에는 대형화되어 그중에는 길이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축(아마 물소)이 견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쟁기를 끌고 다니려면 작은 면적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 논에서는 사정이 나쁘다. 현대의 논과 그만큼 차이가 없는 논이 이 시기쯤에는 출현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확 도구인 돌낫이 널리 분포하게 된 점의 의미도 크다. 논 안에는 이미 탈립성의 그루는 존재하지 않고 품종개량의 진전에 의하여 벼의 익음때도 균일화되어 벼 그루를 묶음으로 잡아서 밑동을 벨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돌쟁기와 돌낫 등의 석기에 대해서도 특정 생산지에서 전업생산이 이루어졌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데, 석제 농기구의 생산과 분배를 정치적 지배자가 좌지우지하고, 공납품으로 받는 벼의 증산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 보상으로 지방의 지배층에게 하사한 것이 각종 옥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Nakamura 2005).


이 시기의 제사, 종교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신인수면문神人獸面紋(신의 체구와 괴수의 안면을 본뜬 문양)'이다(그림1-6의 2). 주로 옥기에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상아기와 토기에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것은 흉악한 짐승 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천공을 비약할 수 있는 신성神聖 왕=현인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신인수면문 옥기의 분포는 양저 문화 분포지역의 전체에 퍼져 있다. 물론 시대적 변천은 있지만, 옥기의 형태, 문양의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성은 일관되게 계속 유지된다. 양저 문화기에 신 관념이 통일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즈 메리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면(메리엄 1973), 신인수면문은 지배를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종의 미란다 원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림1-6. 양저 문화의 옥기(모두 절강성 여항 반산 유적 출토)





옥기와 석기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거주한 곳이 절강성 항주시의 서교에 전개된 양저 유적군이다. 동서 약 10킬로미터, 남북 약 6킬로미터의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면적 약 30평방미터의 막각산莫角山 토대,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산塘山 토루, 거기에 반산反山 봉분, 요산瑤山대상묘 등의 옥기 후장묘는 특히 유명하다. 


이 양저 유적군에서 최근 큰 발견이 있었다. 막각산 토대와 반산 봉분을 둘러싼 위치에 동서 1500m, 남북 1800m, 면적 270헥타르의 흙을 쌓은 위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규모는 산서성의 도사陶寺 유적과 견줄 신석기시대 중국 최대의 위벽 마을이다.(연대로는 도사 유적보다 몇 백 년 빠를 가능성이 높다). 양저 유적군의 경우 위벽 밖에도 유적이 농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실제 거주 구역은 더욱 넓을 것이 확실하다. 그 넓이는'하왕조'의 왕도로 보이는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유적(기원전 1750-1520년쯤)의 300헥타르를 능가한다. 이것을 도시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civilis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엇보다 도시(civitas)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伊東 1985). 그 도시란 농업이 집약화되어 어느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잉여'(=도시민)이 생겨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양저 문화의 돌쟁기와 돌낫 같은 농기구를 그냥 단순히 농업기술사의 관점으로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사회, 정치사적인 검토 과제라 할 수 있다. 


금속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옥기가 최고의 예기로 기능했다. 그 제작과 사용을 전단하는 자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옥기 분배를 통하여 정치적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 그와 같은 정권의 상태를 나는 '옥의 왕권'이라 부른다(中村 2003). 장강 하류에서 꽃이 핀 그 신석기시대 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벼농사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다. 그것은 결국 장강 유역의 다른 지역만이 아니라 황하 유역으로도 파급되어 나아갔다. 그곳은 원래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의 재배지대이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는 힙시서멀기 이후의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는 북상하고 있었다. 벼농사 인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이주라고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마 벼(쌀)는 종교의례에 필수 요소로서, 바꾸어 말하면 문명의 한 요소로서 전해졌던 것이다(中村 2006). 여기에서 우리는 벼농사의 전파와 확산이라고 하는 현상에는 인구학적인 메카니즘과는 또 다른 정치, 종교적 메카니즘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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