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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다문화의 국제도시 안산에 사는 덕에 태국 음식을 즐기게 되었다.


원곡동 다문화거리에 있는 '수왈'이라는 식당에 도착.

자리에 앉았는데 상 위에는 한국 식당에 두부과자가 있듯이 돼지껍질 튀김과자가...




내부에는 태국 국왕과 수상의 사진 등이 걸려 있다.

베트남도 그렇고 동남아시아 국가는 예전 한국이 대통령 사진을 걸어 놓듯이 그런가 보다.




전채요리. 매콤한 해산물 요리. 그런데 식당 측의 실수로 태국식 당면이 빠졌다.

일단은 먹었지만, 나중에 주인에게 이야기했고. 주인은 한국말이 서툰지 한참 사전을 찾더니 미안하다고...

그러면 가격을 빼주든지 해야지, 이거 원. 다 좋았는데 이것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가게가 더 번창하려면 한국말을 조금 더 갈고 닦으셔야겠어요. 좀 불편했어요. 




이건 돼지고기와 쌀국수를 볶은 요리. 아주 맛있다. 입에 딱 맞음.

베트남 쌀국수와는 국수부터 다른 모양과 맛이 있다.




닭고기 볶음밥. 이것도 아주 입에 맞는다. 계란후라이까지 얹어주니 더 좋다.



그런데 역시 쌀은 알랑미다. 가벼워서 막 날아다닌다. 

그래도 인도 음식점에서 먹었던 가늘고 길쭉한 그 바스타미인지 하는 쌀보다는 훨씬 입에 맞았다.

인도 쌀은 나도 도저히 못 먹겠더라는...




밥이 되는 요리는 보통 7000~8000원 선.

특별한 요리는 12000~15000원이면 충분하다.

태국 맥주 같은 술도 파니 함께 곁들이는 것도 좋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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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도 언론에서 떠들어서 도시농업이라는 말은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겁니다. 도시농업은 무엇일까요? 네, 말 그대로 도시에서 농사짓자는 것이지요. 먼저 그 역사를 돌아볼까요. 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있어야 하죠. 부모를 보면 그 자식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일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역사를 돌아보면 좋습니다.


도시농업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널리 퍼진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10년이 안 되는 나이를 가지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그 이전에도 도시에서 농사짓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집 근처 골목을 지나다니면서 유심히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화분이나 화단 등에 이런저런 작물을 심어서 가꾸어 먹는 분들이 있지요. 그것도 일종의 도시농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농업이 지금처럼 퍼지기 전에는 주말농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주5일 근무제 등이 조금씩 시작되면서 주말의 여가를 보낼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주말에만 가서 농사짓고 돌아오는 주말농장이 도시농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 안산의 바람들이 농장도 처음에는 주말농장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요. 처음 농촌으로 농사지으러 가려는 사람들의 교육 등을 하는 귀농운동본부라는 단체의 실습농장으로 역할을 하다가, 도시농업 운동을 펼치는 텃밭보급소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도시농업의 실현지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2000여 평의 규모에 100여 명의 회원들이 함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바람들이 농장의 다른 주말농장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로 농사지을 때 농약, 화학비료, 비닐을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나요? 모두 농사를 더 잘 짓기 위해서, 아니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농자재들입니다. 작물에 찾아오는 병해충은 작물의 수확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병해충을 죽이고 쫓아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농약입니다. 그리고 식물이 성장하는 데에는 필수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그걸 공급해 주는 것이 화학비료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농약과 화학비료는 참 필요한 물질이고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문제는 농약을 뿌리게 되면 우리가 의도하는 병해충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농사에 유용한 익충과 지렁이, 그리고 미생물들까지 죽는다는 점입니다.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흙을 잡아서 들어올리는 걸 자밤이라고 합니다. 그 흙 한 자밤 속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억 마리의 미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 미생물들이 식물과 함께 공생하면서 식물이 살아가는 데 이로운 물질과 영양을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지렁이는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관심을 가지고 책을 썼을 정도인데, 땅속의 농부라고도 불립니다. 지렁이가 흙을 먹고 싸는 똥인 분변토는 최고의 거름이라고 하지요. 또 지렁이가 꿈틀꿈틀거리며 흙속을 뚫고 다니는 굴은 흙에 공기와 물이 잘 통하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식물이 더 잘 자랄 수 있지요. 익충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해충을 잡아먹어서 식물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농사에 도움이 되는 지렁이나 미생물, 익충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네, 식물들은 더욱 살기 어려운 환경에 처합니다. 자신들을 도와주는 생물들이 없으니 위험에 그대로 노출이 된 상태이지요. 그런 상태의 식물들은 더욱더 병해충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더욱더 많은 양의, 더욱더 독한 농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화학비료는 식물에게 꼭 필요한 질소, 인, 칼륨을 주요 성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걸 흙에다 주면 화학비료가 물기에 녹으면서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이온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그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비료를 주고 나면 금방 식물들이 쑥쑥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농사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많은 양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너무 많은 양의 화학비료가 흙속에 들어가면 흙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기 힘든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지렁이의 경우 화학비료 성분이 몸에 닿으면 따가워서 견딜 수 없어 몸부림을 친다고 합니다. 덩치 큰 지렁이가 이 정도인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흙에는 생물들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 흙을 우리는 척박하다고 표현합니다. 심할 경우 흙이 죽어버려 사막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비닐은, 그걸 사용하면 풀이 덜 자라고 작물이 더 잘 자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닐을 자꾸 쓰면 그걸 만드는 데 들어가는 석유가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석유는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는 자원이지요. 지금은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나 필기도구, 책상 등등 석유로 만들지 않은 물건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석유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세계의 강대국들은 그래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도 일으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닐은 환경에도 좋지 않습니다. 흙속을 한증막처럼 만들어서 흙에 사는 생물들을 쫓아내곤 하지요. 당장은 작물이 잘 자라는 것 같아도 결국은 흙을 나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러면 농약과 비료 등이 없이 농사지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그걸 유기농업이라고 합니다. 농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보기는 했을 겁니다. 유기농업에서는 농약도 쓰지 않고, 화학비료도 없이 농사를 짓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화학물질로 만드는 농약 대신 미생물이나 은행잎, 담배 등과 같은 천연물질을 이용한 농약을 만들어서 병해충을 쫓아내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화학비료 대신 직접 퇴비를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화학비료에는 식물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만 들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비타민 영양제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사람이 영양제만 먹고 살 수 있나요? 밥과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지요. 그런데 화학비료만 주는 건 식물에게 영양제만 먹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식물이 건강하게 잘 살려면 흙을 건강하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흙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퇴비입니다.





퇴비를 만드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간단하고 어떻게 보면 어렵습니다. 낙엽이나 풀과 같은 재료에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와 오줌, 그리고 똥이 섞이면 최고로 좋습니다. 우리가 집이나 학교에서 사용하는 양변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한 번 누는 오줌의 양은 대략 1리터 정도가 됩니다. 그 1리터의 오줌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린 10리터가 넘는 물을 그냥 변기에 버리고 있습니다. 물 부족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겠지요. 물이 부족하다면서 물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또 똥은 어떤가요? 냄새나고 더럽다고만 생각하는 똥은 똥차가 와서 퍼가지요. 그렇게 퍼간 똥은 처리를 거쳐 바다에 버려집니다. 바다가 워낙 넓어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그렇게 버리면 바다라고 오염이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버려지는 똥오줌을 모아서 거름을 만들면, 물과 같은 자원도 절약하고 작물도 건강하게 잘 키우며 돈도 아낄 수 있는 여러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정직하게 제대로 짓는 농사야말로 가장 환경에 유익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농사가 그렇게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여전히 농약과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해서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일이 존재하니까 잘 구분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도시에서 농사를 지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네, 건강한 먹을거리를 직접 재배하여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요즘은 대형마트나 시장에 가면 먹을거리가 넘쳐나서 사람들이 농사짓는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지요. 그런데 마트에 있는 농산물들은 어디에서 온 것들일까요? 저 멀리 제주도에서부터 올라온 것도 있는가 하면, 강원도에서 온 것들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바다 건너 필리핀이나 미국 등지에서 온 것들도 있지요. 이렇게 멀리서 오는 것들은 배나 비행기, 자동차를 이용해서 운송된 것입니다. 그러한 교통수단은 무엇을 사용해서 움직이나요? 바로 석유를 사용합니다. 석유는 참으로 놀라운 연료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편리함에는 대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실가스입니다.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온실가스의 배출이 많아지고, 그로 인해서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지요. 기후변화 문제는 이제 전 세계가 함께 노력해서 해결해야 될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면 그러한 운송거리를 줄일 수 있습니다. 즉 온실가스의 배출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좋은 농사 방법으로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도 먹으면서 지구의 환경도 지킬 수 있는 일이 바로 도시농업인 것이지요.


바람들이 농장은 1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농사짓는 회원들 모두 환경과 먹을거리, 농업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도시농업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러한 점일지 모릅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려는 노력 말이죠.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도시를 버리고 떠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손을 놓고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도시농업의 바람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점점 환경문제, 에너지 문제 등이 심각해지면 심각해질수록 도시에서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일은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혹시 농사를 짓고 싶은 사람이 있으신가요? 손에 흙을 묻히고 퇴비를 만지는 일이 더럽고 힘들어서 싫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앞으로 가장 소중한 일로 대우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 바로 농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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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안산 한양대 앞에 있는 아이모리 빵집을 찾았다. 

이런 곳은 어떻게 귀신 같이 찾아내는지... 


입구에는 '아이모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옆집은 짜장집이다. 뭔가 부조화의 조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귀여운 거북인지 뭔지가 알을 품은 새와 함께 환영해준다. "또 왔네~"



맘씨 좋게 생긴 제빵사 아저씨가 "어서옵쇼~" 하며 인사도 하고... 



가게 문을 열고 정면을 바라보면 저 안쪽으로 제빵실이 보이고, 

그 앞으로 카운터와 커피 파는 공간,

그리고 그 앞에는 빵이 진열되어 있다.



빵은 뭔가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 

오늘 이른 시간(10시 조금 지나)에 찾아가서 그런지 많은 종류가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뭔가 자세한 해석도가 줄줄이...



이것 말고도 다양한 빵이 있으나, 빵 사진은 여기까지...



아무튼 화분 너머 저기 보이는 저곳이 모두 여러 가지 빵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 빵집, 잡지에도 소개된 적이 있구나.

안산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그저 놀랄 뿐이다.



제빵사가 직접 일본에 가서 빵 만드는 법을 배워 왔나보다. 

벽면 한쪽에는 수료증도 떡 하니 걸려 있다.

아래 사진은 일본에서 찍은 건가? 

"이 3명 나란히 무얼하는지... 재밌네."



난 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먹을 줄만 안다)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자신들이 만드는 빵이 어떤 원료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곳곳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역시 난 농사를 짓기에 '유기농 밀가루'가 무언지 궁금하여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그렇게 찾은 밀가루 푸대... 오호, 호주산 밀가루였구나!

국산 밀가루로는 이와 맞먹는 질을 만들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우리밀로는 불가능할까?



빵집 안에는 빵과 커피를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제빵실 옆으로는 컴퓨터도 사용할 수 있고, 무선인터넷까지 구비 완료...

앉아서 빵 먹는 곳의 벽면에는 귀여운 설인이...



아이모리 빵집의 영업시간은요?

일요일에는 쉬고, 평일에는 아침 8시 반부터 밤 11시까지랍니다. (힘들겠다)



빵을 먹고 나가는 길에 맛이 어땠는지 불만은 없었는지 좋은 점은 무엇이었는지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의견 하나하나가 모여 더 맛난 빵을 만들겠지요.



이상 안산 한양대 앞에 있는 아이모리라는 빵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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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물이 물씬 오른 밭으로 가는 길. 


개울가에도,


버드나무에도, 


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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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이와 산책길에 화림선원에 들어가 보았다.

지리산 밑에 사는 사람이 지리산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리 가까운 데 있는데 5년 만에 처음 들어가 보았다.

 

 

 

 

들어가는 길은 이렇다.

 

 

 

작은 탑이 소담하니 서 있고,

 

 

 

탑의 한쪽에는 이런 불교 관련 작은 인형들이 잔뜩 있다.

 

 

 

길가에는 꽃들이 가지각색이다. 

 

 

 

 

 

탑이 있는 곳에서 돌아서서 조금만 오르면 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보살님. 무슨 기원을 하는 것일까?

 

 

 

화림선원의 연혁이 적힌 푯말도 서 있다.

 

 

 

기도하는 보살님 뒤로 연풍이가 휭 하고 지나간다.

 

 

 

화림선원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장독대. 구수한 된장 냄새가 허기진 배를 찌른다.

 

 

 

요사채 앞 작은 물동이에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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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의 첩보기관에서 작성한 조선 지도.

그 가운데 안산 지역만 따로 이어 보았다.

 

 

이 지도를 보면 현재 내가 사는 일동은 점성(占星)이라 불렀다.

영동고속도로가 있는 부곡동 쪽이 신골(新村)이라 한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성포동은 성머리(城頭), 그 바로 아래 송호(松湖)가 자리하고, 현재 한양대 앞 역의 화원이 있는 곳은 양평(陽坪)이라 했다.

또 상록수역 일대를 구룡동(九龍洞)이라 불렀다.

월피동 쪽은 그대로 월피(月陂), 그 아래 현재 다농마트 쪽을 부로리(富老里)라 했다.

마지막으로 안산시청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좌우를 월입피, 고잔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자료를 100% 믿을 수 없다는 점이 발견된다.

현재 둔대라고 불리는 곳의 위치가 잘못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적당히 비교할 것이지, 이게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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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선생 묘 맞은편에는 성호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2002년에 개관했으니 어느덧 8년이 되었네요.

저는 안산에 사는 5년 동안 오늘을 포함해 2번 가보았습니다.

 

 

 

입장료는 아주 쌉니다. 볼거리에 비하면 좀 비쌀 수도 있지만, 안산에 살면서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입니다.

어른은 500원, 아이는 200원이고, 장애인이나 국가유공자는 무료지요.

 

 

 

1층에 들어서니 선비들이 쓰던 물건을 간단히 전시해 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복숭아 모양의 연적입니다.  

 

 

다음은 '고비'라고 하는 물건입니다. 편지나 간찰을 사진처럼 모아 놓는 것이라 합니다. 예쁘네요.

 

 

붓을 걸어 놓는 붓걸이도 참 보기에 좋습니다. 은은한 먹향이 나는 듯하지요.

 

2층은 전시실입니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고 전시물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안산과 조선 후기의 실학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제가 사는 동네인 일동(옛 첨성리 또는 점성리)와 성호 선생의 관계를 해설한 안내판입니다.

 

 

전시실에는 없지만 계곡 장유 선생의 시 한 수가 눈에 띄어 적어 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재밌는 내용입니다.

 

남정네는 하얀 대오리갓 머리에 쓰고

여인네는 푸른 무명치마

삶은 박에 오이 썰어 생새우도 듬뿍 얹고

이 빠진 옹배기엔 막걸리가 찰랑찰랑

풀 덮인 언덕 위 뽕나무 그늘 아래

앉자마자 사방에서 꽃피우는 농사 이야기

저쪽은 이쪽보다 김매기가 늦었다느니

아랫배미가 윗배미보다 더 잘 됐다느니

잔 돌리는 소년들에 노인들은 거나해져

짧은 옷소매, 일어나서 춤도 절도 덩실덩실

일 년 내내 고된 농사 이 날 하루 즐거움

농촌 들녘 모든 근심 이 날만은 잊고 사네

                   <이하 생략>

 

 

성호 이익 선생의 반숙가도 재밌는 내용입니다. 안내판이 있으니 그걸 보시죠.

 

 

그밖에 귀한 자료로는 성호 선생과 그 학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친필 서찰 등입니다.

 

먼저 이익 선생의 친필입니다. 솔직히 뭐라고 썼는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이런 암호문 같으니라고...

 

 

 

다음은 성호의 큰 제자이면서 "동사강목"의 저자인 순암 안정복 선생의 친필 편지입니다.

이때는 종이가 귀한지라 쭉 쓰다가 칸이 모자라면 빈곳에다가 빽빽하게 다 채웠답니다.

요즘은 종이 아까운지 모르고 막 쓰지요. 뭐든 풍족하면 소중함을 잊게 마련입니다.

 

 

다음은 성호 이익의 제자이면서 조카이기도 한 이용휴의 친필입니다.

글씨를 참 예쁘게 잘 쓰지요. 이 정도만 되어도 알아보겠는데 말이죠.

내용은 조카의 자字를 지어주면서 쓴 글입니다. 

 

 

 

다음은 마찬가지로 여주 이씨 집안의 사람인 이가환의 편지입니다.

여주 이씨 집안에 학자들이 많네요. 제가 아는 분도 한학자셨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성호기념관은 규모가 크지 않아 이렇게 구경하는 데 30분이면 충분합니다.

지나는 길에 잠시 숨 좀 돌리며 느긋하게 둘러보기에 적당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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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에는 조선 후기에 만 권의 서책을 지닌 집이 2곳이나 있었다. 하나는 청문당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경성당이라 불렸다. 두 집 사이의 거리는 50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만 권의 서책을 지닌 곳이 전국에 4곳뿐이었다는데, 그 가운데 2곳이나, 그것도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안산에서 실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책은 양식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실제로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선 실학의 큰 별인 성호 이익 선생이 살았다. 아마 성호 이익 선생은 청문당과 경성당에서 서책을 빌려다 보며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실제로 순암 안정복은 이곳에서 서책을 빌릴 수 없겠냐는 내용의 정중한 서찰을 보내기도 하였다.

 

청문당은 텃밭을 오가며 늘상 지나다니는 곳이기도 하고, 안산시에서 새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집으로 만들어 놓아 영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경성당이나 한번 갈까 하는 맘으로 텃밭에 갔다가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이곳을 지나다닌 지 5년도 넘었건만 가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그곳으로 갈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 오늘 이렇게 막상 찾아가려고 하니 웬지 설렌다.

 

굴다리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축사가 자리하고 있다. 순간 갑자기 뭐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의심이 일어났지만 그냥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러자, 눈 앞으로 오래된 집 한 채가 보인다.

 

  
▲ 나무에 가려 있는 경성당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
ⓒ 김석기
경성당

 

가까이 다가가니 반듯하게 잘 지어진 한옥이 우렁차게 서 있다. 비록 집 앞쪽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때문에 옛 풍광은 잃었지만, 그 풍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더 반가운 것은 청문당과 달리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어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집을 구경하고 싶으면 주인에게 청하면 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 멋진 누마루가 돋보이는 사랑채 가까이 다가가니 멋스러운 전통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 저 누마루에 앉아 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난 양반하곤 거리가 멀다. 공부하는 방에서 낮잠 잘 생각이나 하다니... 누마루 앞쪽으로 연못이 있을 만한데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 김석기
경성당

 

 

누마루에 걸린 주련柱聯을 보니 내용이 재밌다. 3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山高華帽峰下居簪纓之族村深覆釜谷中有鐘鼎之家(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

宣廟賜牌之局寸土勿輿於他人(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성조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하라)

 

  
▲ 경성당 앞마당 연못이 있을 만한 자리이나 그냥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저 멀리 고속도로만 아니면 정말 천하의 명당이 아닐까. 청문당보다 오히려 위치가 더 좋은 듯하다. 주련에 나오는 화모봉은 사진 왼쪽에 서 있다.
ⓒ 김석기
경성당

 

툇마루 위쪽을 보니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이 집을 지으면서 기록한 경성당기竟成堂記, 하나는 경성당이란 이름을 쓴 것이다. 경성당이란 현판에는 동농이란 호가 적혀 있다. 찾아보니 그 호는 김가진金嘉鎭이란 사람의 호라고 한다. 그는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상해에서 죽었는데, 안동 김씨 집안의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인 1910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가 반납하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분이 쓴 글씨니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게다. 그래도 그 필체가 정말 멋지다.

 

  
▲ 경성당 현판 동농 김가진의 글씨. 웬지 굳은 절개가 느껴지는 듯하다.
ⓒ 김석기
경성당

 

  
▲ 경성당기 이 집을 짓게 된 내력을 밝힌 내용.
ⓒ 김석기
경성당

 

내친 김에 이 집의 유래를 알아보니 柳重序(1779~1846)라는 사람이 둘째아들인 방(1823~1887)의 살림을 내주면서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김가진과는 그 둘째아들과 친분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역사 공부하는 분들이 어렵겠지만 둘의 관계를 캐서 알려주면 좋겠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따지면 200년 가까이 된 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시멘트 건물은 몇 십 년이라도 서 있으면 대단한 거지만, 나무로 지은 한옥은 어떻게 그리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김가진이란 인물과 연결이 될 정도면 조선 말기까지도 이 집안의 세력이 대단했나 보다. 

 

  
▲ 연자방아에 새긴 글씨 집 앞마당에는 만수동천이라고 새긴 연자방아를 불 수 있다. 그 크기로 보아, 만약 이 동네에서 썼던 것이라면 이 일대에서 농사를 엄청난 규모로 지었다고 할 수 있다.
ⓒ 김석기
경성당

 

  
▲ 만수동천 비석 나무가 엄청나게 우거져 있다고 하여 만수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나의 텃밭이 있는 곳은 능처럼 큰 무덤이 있다고 하여 능안골이라 불린다.
ⓒ 김석기
경성당

 

  
▲ 우거진 숲 정말 만수동이란 이름에 걸맞게 아직도 나무들이 엄청 우거져 있다. 이 집을 지나 안쪽으로 쭉 걸어 들어가도 멋진 숲을 만날 수 있다.
ⓒ 김석기
경성당

 

경성당을 보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거다. 사람이 살면서 자꾸 쓸고 닦고 손길을 줘야 제대로 집다운 집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지척에 있는 청문당과 경성당을 계속 비교하게 된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어도 예전에 청문당에 사람이 살았을 때가 더 좋았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박물관이나 문화재를 가면 늘 드는 생각이, 그런 곳들은 아무 생명력 없이 죽어 있다는 점이다. 보존을 위한 보존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쉬며 공존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지거나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 경성당 사랑채의 기단 기단으로 쌓은 돌들의 질서정연함. 잘 지은 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김석기
경성당

 

마지막으로 이 집을 찾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채 누마루 바로 옆에 있는 그 좋다는 옻나무 우물이다. 정말 소문대로 여러 효능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수동의 울창한 숲이 내뱉는 맑은 물이 예전부터 끊임없이 퐁퐁 샘솟고 있다. 물맛은 사 마시는 생수는 여기에 비할 수 없다.

 

  
▲ 옻나무 우물 우물 옆에 선 옻나무는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니 자유롭게 오가며 물을 떠 갈 수 있다. 여기서 물 한 병 떠서 그대로 산으로 오르는 것도 좋겠다.
ⓒ 김석기
경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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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수인선 협궤열차의 사진을 모았습니다.

혹시라도 저작권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면 말씀해 주시는대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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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궤열차 철로를 걷고 있는 부녀입니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침목을 건너뛰며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고잔역 앞에서 찍은 사진. 

 

 

 

군자역과 그 앞 대한염업의 소금창고입니다.

 

 

 

 

 

 

소래 철교인가요? 아님 다른 곳?

 

 

 

수인선 협궤열차가 마지막 운행하는 날 찍은 사진입니다. 저기에 찍힌 저 사람은 이 날을 기억하겠죠?

 

 

이 사진도 마지막 날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네요.

 

 

원곡역입니다. 뒤로 보이는 풍경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네요. ㅋ

 

 

 

한대 앞 역에 서 있는 협궤열차입니다.

 

 

 

 

 

 

협궤열차와 그 옆으로 소금을 나르는 가시렁차입니다.

 

 

 이건 확실히 소래철교를 지나는 열차의 모습이네요.

 

 

 이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릎과 무릎이 서로 맞닿을 정도는 아니네요. 제가 앉으면 혹시 모르죠..^^

 

 

 참 생활에 유용했을 듯합니다.

 

 

시흥 쪽의 달월역을 떠나는 모습이라네요.

 

 

 기찻길 주변에 살면 저런 장난 한번씩 해보지요. 제가 어릴 때는 동전이나 병뚜껑이었는데 이 시절에는 무엇이었을지 모르겠네요.

 

 

 회집이 많은 걸 보니 어느 포구 근처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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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바람들이 농장에 설치된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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