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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안개가 자욱하다.

바다의 안개 때문이라고 한다.

아래에서는 장마전선이 올라오고 있고, 그 영향인지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그 안개가 내륙까지 올라와 뿌옇다.

덥고 습하고 뿌옇기까지... 불쾌지수 만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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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역 앞에 있는 다문화거리를 찾아 음식점을 들락거릴 때 늘 아쉬웠던 것이...

왜 음식점을 소개하는 안내책자가 하나도 없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러다 발견한 보물! 만남의 광장이란 공원에 안내 지도가 하나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단 생각에 사진을 박았다.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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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역 앞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국제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에서도 다문화거리로 이름을 붙였는데, 뭔가 눈에 띄는 홍보 활동이나 거시기한 것이 없어 아쉽다.

이곳에 사는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는 역시나 중국이다.

인천의 차이나타운과는 다른 이곳만의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주로 중국 본토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식료품점도 많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중국의 술을 싸게 살 수 있다.

 

 

전기자전거를 배달용으로 개조했다. '돈방석'이란 중국 음식집의 배달 자전거.

 

 

보라! 식료품점 안에는 다양한 중국 술이 한가득이다. 하루에 하나씩 맛을 본다고 해도 1년은 넘게 걸리겠다.

 

 

 

날이 후덥지근하여 시원한 캔맥주가 없냐고 하니, 맥주는 창고에 상자 채로 있단다.

주로 상자 채 사가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대신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하나 사서 먹었다. 1500원.

칭다오맥주의 역사와 맛이야 워낙 유명하여 우리나라 사람들도 자주 마신다.

칭다오맥주가 유명해진 것은 청나라 말기 독일 제국주의 세력이 그 지역으로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독일 놈들은 어디를 가나 맥주를 마셔야 해서 자신들의 조계지에서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칭다오맥주의 뿌리이다.

독일 맥주야 먹어 보면 역시 독일 맥주가 왜 원조이고 전통이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칭다오맥주는 먹어본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하얼빈맥주를 사서 마셨다.

하얼빈맥주는 칭다오만 못하다. 다음부터는 그냥 칭다오맥주를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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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다문화거리를 찾았다.

말 그대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가는 거리.

그 사람들만큼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그 가운데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농산물.

처음 보는 특이한 것들 위주로 사진을 박았다.

 

 

이건 주인아저씨께 물어보니 오이 종류라고 하는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혹시 누구 아시는 분? 

 

 

 

 

과일의 왕자라 불리는 두리안. 썩은 내가 난다고 하는데 껍질을 벗겨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다음은 바나나. 노란 바나나가 아니라 푸른 바나나다. 한 번 사올 걸 그랬다. 나중에 가면 사서 먹어 봐야지.

 

 

 

 

 

아! 고수다. 이게 바로 고수다. 씨만 보았는데, 그리고 음식에 넣을 때 잘라 놓은 모습만 보았는데, 온전한 형태가 이렇게 생겼구나. 이건 동남아시아인들이 주로 먹는다. 

 

 

 

 

청완두. 꼬투리 채로 먹는다는 완두. 중국인들이 좋아한다. 

 

 

 

 

동부. 딱 보니 갓끈동부처럼 꼬투리 채로 볶아 먹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콩. 달달해서 단콩인지, 짧아서 단콩인지는 모르겠다. 장사하시는 분들은 살 게 아니면 친절히 대답해 주지 않는다.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만 생각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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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 살면서 5년 만에 오늘 처음으로 청룡사에 갔습니다.

성태산 밑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현재 안산1대학의 뒷편입니다. 이곳까지는 자가용으로 갈 수도, 걸어갈 수도, 301번을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헌데 301번을 타려면 요금이 1500원(카드로)이나 하니 조금 아깝군요. 멀리서 오신다면 상록수역에서 슬슬 걸어가셔도 됩니다. 15분이면 충분합니다.

 

안산1대학 옆쪽의 안골길이란 곳으로 쭉 들어가면 청룡사 표지판이 나옵니다. 

 

이 절이 생긴 지는 50년 정도일 거라 추정합니다. 그걸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절 주변에 서 있는 송덕비에 있습니다. 그 송덕비에 따르면, 의림이공진환선생송덕비義林李公鎭煥先生頌德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당연히 이진환이란 분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지요. 그 뒷면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원래 이곳 일동一洞 안산1대학을 둘러싼 일대는 인근의 수리산에서 산세가 시작하여 명당 자리로 알려져 왔겄다. 그래서 예전에는 구룡九龍골이라 불리었으니, 아홉 용이 여의주 하나를 둘러싸고 꿈툴거리는 형상의 지세地勢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조선 말기쯔음 이곳에 타성붙이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디! 아마 철종 때부터 안동 김씨들이 여그를 장악하면서 오랫동안 여그의 대성大姓인 이씨 집안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 송덕비의 주인공 의림 이진환 선상이 외지에 나가 사업에 크게 성공해부렸지. 아마 건축가로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의 국가발전계획과 대규모 건설사업에서 엄청난 실적을 쌓았지. 그래서 이 선생이 자기가 번 큰돈으로 안동 김씨에게 빼앗겼던 땅을 다시 사들이고, 청룡사라는 절까지 지어서 부처님께 바쳤다고 하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헌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로는 안동 김씨의 묘지를 이장해 가라고 공고를 냈는데도 옮기지 않은 무덤은 그냥 파서 골짜기 어느 한곳에 모다서 화장했다고 하네요. 또한 안동 김씨 세력을 약하게 하려고 마약을 풀기도 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돕니다. 그런 걸로 봐서 뭔가 평탄하게 일이 추진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아무튼 안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절이니 한 번 찾아볼 만합니다.

 

청룡사에 오르면 안산이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바로 앞의 큰 건물이 안산1대학, 앞산이 구룡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구룡산입니다. 그러니 거기부터 여기까지 구룡골이라 불린 것이지요. 왼쪽으로 보이는 아파트의 물결은 원래 바다였을 것입니다. 맑은 날 오르면 산세까지 훤히 볼 수 있을 테니 더 좋겠네요.

 

 

이곳에는 2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도 서 있습니다. 일동에 있는 보호수가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여기에도 한 그루 자리잡고 있었네요. 그 옆으로는 잘 어울리게도 산신각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성태산의 산신께서 굽어살피시고 계십니다.

성태산은 한자로는 城台山이라고 합니다. 성이란 뜻과 별이란 뜻이지요. 왜 그런지 몰라도 일동 쪽에는 별과 관련된 한자 지명이 많습니다. 제가 사는 점성占星골도 그렇고 이곳의 태台도 그렇습니다. 점성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여러 의견이 많습니다. 이곳이 바닷가였던 만큼 큰 무당이 많았고, 그래서 점을 치는 사람이 많다는 뜻에서 점섬(占島)이라고도 하고, 별을 보고 점을 치던 곳이라고 점성占星이라 하기도 하고, 저는 한때 점심을 먹는 곳이라 점섬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이상 제대로 기록된 문헌자료도 없어 알기 힘듭니다. 원래 부르던 지명도 한자로 옮겨적으면서 본뜻이 흐려진 경우도 많구요. 지명을 제대로 추적하려면 고어도 많이 알아야 하기에 어렵기만 합니다. 어쨌든 일동에는 별과 관련된 지명이 참 많습니다. 제가 이 동네 사는 것도 다 그런 뜻이 맞물린 것은 아닐지...

 

150년된 느티나무. 안산의 보호수는 대부분 이 정도 나이입니다. 수암 쪽은 역사가 깊은 만큼 더 오래된 나무가 몇 그루 있지요. 하지만 철저한 개발 도시 안산의 다른 곳에서는 100~200년 정도 된 나무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그런 나무가 서 있는 곳은 개발에서 소외된 곳, 옛 마을이 있던 자리들뿐이지요. 그래서 더더욱 노거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는 20그루 정도인데 더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저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나무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어울려 그늘도 주고 푸르름과 단풍도 안겨 주는 나무로요.

 

나무 뒤편으로는 산신각 바로 옆에 조그만 제각이 또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서 무슨 제사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시간에 쫓겨 무엇 때문에 준비하고 있는지 물을 새도 없이 후다닥 산으로 올랐습니다. 

 

 

처음 오르막길이 가팔라서 그렇지 그 길만 올라서면 오르기 쉬운 길이 이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태산은 150m 정도의 작은 산이기 때문이지요. 보통으로 걸을 수 있기만 하다면 산책길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옛 산성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전에 안산문화원장을 했던 분께서 성태란 이름에서 성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이곳을 뒤져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돌이 많구나'라고 생각하고 지나갔을 곳인데, 아는 사람에게는 그런 게 보이나 봅니다. 

 

성태산 정산 부근에 굴러다니는 성벽의 돌들. 그냥 돌이 많은 곳 아니야? 라고 생각하신다면 오산. 이 돌들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이 산성은 그 축성 양식으로 보아 신라의 축성 기술이라고 합니다. 신라가 중국과 교역하는 통로를 확보했을 무렵 쌓은 것인가 봅니다. 허나 그 규모로 보아 전투를 위한 성이라기보다는 감시초소 정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서해를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저기 현재 열병합발전소가 서 있는 곳의 별망성이 그렇고, 잿머리 성황당이 그렇고, 모두 서해를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의 장소였습니다. 이곳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군포의 봉수골과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안산이 중요한 해안 방어 기지이자 수산물 생산 기지였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게 몇 장의 사진을 볼까요.

 

아래는 노적봉에서 본 고잔동 쪽의 모습입니다. 아파트가 가득 들어선 곳 모두 물이 들고나는 바다였습니다.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롯데마트를 중심으로 시선을 조금 더 왼쪽으로 옮겼습니다. 군데군데 불쑥불쑥 솟은 산 말고 바닥은 모두 바닷물이 들고나는 곳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그대로 일동까지도 이어졌겠지요.

 

 

아래는 잿머리성황당에서 바라본 시화공단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곳도 모두 바다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일동, 성포동 쪽보다는 더 드넓은 바다였지요. 이곳에서 지나다니는 배를 감시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제일골프장 뒷산에 올라 찍은 것입니다. 높은 건물이 들어선 곳은 원래 다 바다였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럼 대략 지형이, 그리고 바다가 머릿속에 그려지시지 않나요?

 

아마도 아래와 같은 모습이었을 겁니다. 물론 산세가 더 이어져 있었을 테고, 그래서 바다가 이만큼 넓지는 않았겠지요. 이 사진은 탄도에서 바라본 누에섬입니다. 지금은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다고 하네요.

 

 

성벽이었던 돌무더기를 보고 살살 걸어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반월저수지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택해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점성고개가 나옵니다. 그곳에는 아래와 같은 표지판이 서 있지요.

 

 

네, 이곳에서 수암봉까지 걸어갈 수도 있고, 바람들이 농장까지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중앙병원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반월저수지로 가도 괜찮지요. 선택은 자유,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십시오.

 

 

 위 사진을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한 1km 정도 15분 거리라고 나옵니다. 길게 잡아도 20분이면 청룡사에서 점성고개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가까운 쉬는 날, 날이 좋으면 한 번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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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문화원 앞에 있는 석양. 빙긋 웃고 있는 표정이 참 재밌다.

이 석양의 유래는 이렇다. 이건 원래 목내동에 있던 소릉昭陵을 발굴하면서 나왔다고 한다.  소릉은 조선시대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의 무덤인데, 그녀가 낳은 아들이 단종이 되었다. 설화에 따르면, 세조가 단종을 죽이자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퉤 뱉었다고 한다. 그 침에 맞은 세조는 그 뒤 피부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바다에 관을 내버렸단다. 비주류가 많이 살던 고장 안산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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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2일. 안산의제21에서 기획한 대부도 생태투어 일정에 참여했다. 그 일정의 하나인 동주염전을 방문했는데, 그전부터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던지라 더욱 좋았다. 특히나 지금 보고 있는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가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여 더 뜻깊었다. 염전과 관련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벗(소금 굽는 가마)은 이 섬에는 100군데 있다. 그것들의 권리를 가진 10명 정도의 자본가가 사는데, 이들이 자본을 제공한다. 대부분 마을마다 있다. 1벗은 2칼반이 보통이다. 1칼반의 넓이는 1000평 정도다. 1칼반은 5명이 경영하고, 한 달에 20섬 정도의 소금을 만든다. 소금은 거간꾼이 사모아서 마포에 보낸다. 마포에는 소금 창고가 있다(소금과 물고기 거간꾼을 중상仲商이라 함). 가장 왕성할 때는 20년 전이었는데, 그 뒤 점점 쇠락했다. 간척의 장려와 노동력, 땔나무가 비싸졌기 때문에 빠르게 쇠락했다. 지금은 다섯 염막 10칼반 정도 있다. 현재 동리東里에 남아 있다. 그곳은 매립지로서 염분의 농도가 문제된다. 동리의 웃동네 앞에 남아 있다.

벗은 모두 국유지여서, 간척할 경우에는 나라에서 국유지를 돌려받기 위하여 벗을 가진 사람에게 권리금으로 1칼반에 200원을 주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벗은 빠르게 쇠퇴했다.

섬의 농사땅은 1호에 3600평(1町2反) 정도다. 벗이 폐지되어도 다른 곳으로 나간 사람은 적었다. 그리고 그때는 일반적으로 소금밭에서 열심히 일하여 농사는 오히려 부업 정도로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때 농사는 아주 엉성했다. 그 뒤 화학비료를 쓰고 벗이 사라지면서 노동력이 많아져 농사가 그런 요인들 때문에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얼마쯤 떨어졌을 것이다. 요컨대 벗의 폐지에 따른 과잉 인구는 섬의 농사에 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그 시절부터 대부도의 소금은 유명했다. 그때는 가마에 굽는 소금이었는데 지금은 그 생산방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부도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동주염전. 주안염전, 대부염전, 소래염전이 옛날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이곳들을 서로 이으면 수인선 협궤열차의 선로와 일치한다. 일제는 철저히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조선을 발전시켰다. 

 

동주염전의 대표이신 백승근 님의 말에 따르면, 소금의 생산방식으로는 현재 장판식과 토판식, 타일식이 있다고 한다. 장판식은 장판을 깔아서 소금을 만드는 방식인데, 생산량은 많아지나 맛은 물론 인체에 해로운 요소가 생긴다. 그래서 그런 장판을 걷어내고 요즘 토판염이라는 새로운 소금이 유행하고 있는데, 염도도 그렇고 맛도 타일식에 비해 떨어진다. 그래서 동주염전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은 타일식인데, 이 방법이야말로 펄을 살린 좋은 소금 생산방식이라고 한다.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는 것으로 강한 자부심을 가지신 백승근 님. 

 

염전 옆에 있는 수로. 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들었다. 염전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대대로 쌓여 있는 공간이다. 소금이 짠 것은 그들의 땀이 서려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타일식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밑에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 타일을 붙인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펄흙을 잘 다진 다음 옹기를 만들 듯 구운 타일을 펄에 하나하나 붙인 것이 바로 타일식 염전이었다.

 

이런 타일을 바닥에 하나하나 붙인다. 그렇게 붙이면 어지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펄흙이 시멘트보다 단단하게 굳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펄흙을 단단히 다지는 데 쓰는 도구. 테니스장을 다지는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직접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이건 돌덩어리 같다. 염전의 둑은 말할 것도 없고 돌을 쌓을 때도 모두 이 펄흙을 쓴 것을 볼 수 있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염전의 생김새는 잘 정리해 놓은 논과 비슷한데 그 안에 담긴 물도 그 형태를 만드는 흙도 판이하게 다르다.

 

시멘트를 발라 놓은 듯한 염전의 둑. 언제 둑을 칠 때 한 번 와서 봐도 재밌겠다.

 

소금은 4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렇게 5월 중순부터 7월까지가 가장 소금의 생산량이 많은 철이고, 8월이 되면 오히려 소금을 만들기 좋지 않다고 한다. 요즘은 아예 손을 놓고 지내는 때인데, 염전에 물을 받아 놓은 것은 내년에 다시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부러 받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논처럼 벼를 수확한 다음 말려 놓는 게 좋지 않은가 보다.

 

내년에 좋은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묵히고 있는 소금밭.

 

소금을 만들려면 먼저 바닷물을 끌어와야 한다. 바닷가에 둑을 만들어 저류지라는 곳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모아 놓는다. 그걸 펄흙을 이용하여 낸 물길을 통해 소금밭 사이에 있는 둠벙 같은 곳에 모아야 그걸 이용해서 소금을 만들 수 있다. 소금밭의 둠벙에서는 무자위나 용두레를 이용하여 소금밭으로 물을 옮긴다.

 

소금밭에 들어가는 물을 책임지는 둠벙 같은 곳. 지금은 무자위나 용두레 대신에 경운기 엔진을 활용한 양수기를 쓴다.

 

꼼꼼하게 잘 연결되어 있는 소금밭의 물길.

 

그렇게 1차 증발지로 들어간 바닷물은 쨍쨍한 햇빛을 받은 다음, 다시 2차 증발지를 거치면 마침내 소금이 오는 그날을 맞는다.

 

소금을 만드는 것은 강렬한 햇빛과 염부들의 굵은 땀방울, 그리고 위처럼 고무래와 같은 도구이다.

 

 

소금이 오면 소금 창고에 잘 쟁여 놓고 간수를 뺀다. 직접 찍어 먹어 보니 그리 짜지 않고 달달한 맛이 느껴진다. 백승근 님의 말을 들으니 동주염전의 소금은 염도가 74% 정도라고 한다. 중국산은 90%가 넘어 그 소금은 짠맛밖에 나지 않는다며, 동주염전의 소금을 자랑하신다. 확실히 이 소금은 다르다.  

 

염전 바로 옆에 소금창고를 두어 손쉽게 운반해 저장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염전에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제 염전 일도 다른 힘든 일처럼 젊은 사람은 하지 않으려고 한단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할아버지들이었다. 그 맥이 끊기는 것은 이제 곧 다가올지도 모른다. 또한 기상 이변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폭우가 자주 쏟아져 생산량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고부가가치의 일로 만드는 것이 요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하신다.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이곳에 찾아와 소금을 취재했을 만큼 대부도에서는 소금이 참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걸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하나 이곳에 서 있다.   

 

일제시대에 지은 염전 관리사무소. 우리나라에 천일염을 전파한 것이 일본이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마에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이 전부였는데, 그건 품질이나 맛이 지금의 방식보다 떨어진다고 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되어 곧 쓰러질 것 같다. 이런 건물을 잘 살려서 현장학습이나 체험학습 때 이용하면 좋지 않을까?  

 

1층 내부의 모습. 

 

 

 

소금기 가득한 땅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소금밭 주변에서는 함초를 자주 볼 수 있다. 빨간 함초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은 단풍 못지않게 예뻤다.

 

 

 

 





지난 2013년 4월 27일, 아내와 함께 대부도를 지나는 길에 동주염전에 들렀다. 

봄의 염전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더욱 황량했던 것은 염전 관리사무소 건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흔하지 않은 역사적 유산이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또 하나 사라져 버렸다.

그저 안타깝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더 무어라고 할 말이 없다.


염전 관리사무소가 있던 자리는 철거된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이걸 잘 살리면 좋은 소재가 되었을 법한데 거기에까지는 여력이 미치지 못하였나 보다. 동주염전은 이렇게 경쟁력을 잃고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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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은 원래 유명한 포구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유명했는지 왕실에서는 안산어소라는 곳을 설치하여 어물과 소금을 안산에서 가져다 먹었습니다. 지금 그런 흔적을 찾으라고 한다면, 성포동의 성포가 포구의 이름이라는 것과 안산에 오래 사신 분들의 머릿속에나 남은 사리포구의 기억과 얼마 전 수자원공사에 항의해 농성하신 별망성 포구의 분들 ... 등등입니다. 이제는 간척 사업과 공단이 들어서면서 모두 싸그리 사라졌지만 말이죠.

그래도 그나마 남은 문헌자료와 그림이나 사진으로 그때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주 유명한 것으로는 단원 김홍도의 '매해파행'이란 아래의 그림이 있습니다. 매해파행은 한글로 풀면 젓갈 팔러 가는 여인네들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항아리를 이고 가는 여인도 있는가 하면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도 있고, 태반은 뭔가 다른 걸 이고 갑니다. 아무튼 이로 미루어 매해파행은 꼭 젓갈만 팔러 가는 여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선이나 소금도 팔러 가는 여인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보면 모두 바다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걸 콕 집어서 소금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네들이 다니던 길을 '소금길'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럼 그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당시 장사꾼들이 여러 곳으로 여러 길을 따라 갔겠지만, 저는 군포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귀농운동본부의 본부장이신 정용수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렸을 적 안산에서 소금장수나 어물장수가 고개를 넘어 본인의 집에도 많이 왔다고 합니다. 군포나 안양으로 나가 장사하다가 다 팔지 못하고 안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종가집에 들러 짐을 부리고 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아예 처음부터 종가집을 목표로 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그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지 않고 다 받아주셨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레 고개 넘어 군포 쪽으로 가는 길을 생각하다가, 특히나 전국귀농운동본부가 군포로 이사까지 와서 겸사겸사 한 번 걸어가자고 했습니다. 마침 오늘 그런 기회가 되어 개를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참, 여러 길 가운데 선택한 곳은 집에서 가까운 점성고개입니다. 이곳 말고 제가 아는 곳은 바람고개가 있는데, 바람고개는 텃밭과 수암 사이에 있는 고개입니다.

 

 

점성고개로 가려면 먼저 중앙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중앙병원 뒷산이 바로 점성고개입니다. 

 

 

중앙병원 정문을 바라보며 왼쪽을 보면 월강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월강사를 왼쪽에 놓고 조금 오르면 오른쪽으로 중앙병원을 끼고 도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로 접어들면 점성고갯길로 들어섭니다.

 

 

길을 따라 가다보면 조금 가파른 언덕길을 만납니다. 이 길은 중앙병원에 입원하신 분들도 자주 산책을 하고, 등산객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어쩌다가 만날 수 있지요. 아, 그리고 산속에 만들어 놓은 텃밭도 볼 수 있지요.

 

 

가파른 언덕을 헉헉 대며 몇 분 오르면 그것도 끝이 납니다. 그럼 곧 정상에 다다르게 되지요.

 

 

사진에 환자분들이 걸어 올라오는 길이 중앙병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분이 내려가는 길로 올라가면 정상 쪽이지요. 고갯길 정상에는 이정표가 하나 서 있습니다. 상록수역 근처 가스공사로 가는 길과 텃밭과 너구리산을 지나 수암봉으로 가는 길, 그리고 반월저수지로 넘어가는 길, 사방으로 갈 수 있는 점성고개 정상입니다.

 

 

오늘은 반월저수지로 넘어가는 길로 갑니다. 가파르다고는 하나 쉬엄쉬엄 10분이면 오를 수 있습니다. 중앙병원에서 오르는 길은 안산시에서 콘크리트로 포장도 하고 이래저래 관리하여 아무렇지도 않으나 고개를 넘어 반월저수지 쪽으로 가는 길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여름 폭우에 푹 패인 길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면 산골짜기에 만들어 놓은 두 배미의 논이 보입니다. 그 아래로는 한우를 키우는 축사가 있지요. 그래도 생각보다는 냄새가 많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참, 유럽과 FTA가 체결되었다고 하네요. 이번에는 축산을 하는 분들에게 큰 피해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핸드폰과 자동차를 팔아서 먹고 사는 나라의 운명일까요?

 

 

걷다보면 금방 축사까지 이릅니다. 그런데 축사 옆에는 열대 식물이 하나 자라고 있어 이채롭습니다. 저게 겨울을 날까요? 어떻게 여기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축사를 지나면 위로 고속도로가 지나갑니다. 그 아래로 난 굴다리 아닌 굴다리를 지나야 합니다.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기독교 계통에서 하는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시끄럽고 차가 쌩쌩 달리는 곳에 묘지라... 죽어서도 편히 쉴 것 같지 않은 곳이지만 도로가 거미줄처럼 뻗고 있는 실정이니 어딘들 편안한 곳이 있을까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옆으로 무덤이 참 많이 보입니다. 풍수가 다른 게 아니라 산맥과 수맥이 제대로 뻗는 것이라고 본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명당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조금 내려가면 착한고기라는 상호의 고깃집이 하나 보입니다. 그 아래에는 한옥 형식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있는데 그곳도 고깃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구석에 고깃집이 있네요. 축사에서 소를 잡아 바로 여기에 낼까요? 이제는 어디를 가든 고깃집 천지입니다. 이 고기들이 다 어디서 오나 모르겠습니다. 제가 나이는 많이 먹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 생각하면 삼겹살은 언감생심이고 명절이나 생일날 고깃국에 뜬 고기 조각 몇 점이나 먹었지 지금처럼 고기를 먹은 적이 없습니다. 촌에 살아서 그럴까요? 산 하나 넘어 양계장에 가서 죽은 닭을 싸게 사오거나 양동이를 들고 가 조심스레 낑낑 대며 달걀을 가지고 오던 기억, 아니면 닭발을 사다가 집에서 양념해서 먹은 기억, 도랑에서 메기나 미꾸라지를 잡아 먹거나 붕어나 빠가사리, 모래무지 같은 걸 잡아 먹은 기억, 벌집을 갖다가 애벌레를 볶아 먹은 기억, 가재를 잡아다 아궁이에 구워먹던 기억, 겨울이면 꿩이나 토끼를 올무와 농약 묻힌 콩으로 잡아다 먹은 기억, 둠벙에서 개구리를 잡아 먹은 기억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고기가 넘치는 세상이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계속 길을 갑니다.

 

 

고깃집을 지나 내려가면 왼쪽으로 군포시 대야동이란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반월저수지의 수문이 보입니다.

 

 

반월저수지를 끼고 쭉쭉쭉 걸어갑니다. 저 멀리 태을봉의 레이다 기지가 보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길의 굴다리 아래로 지나면 수리사 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리로 가도 귀농본부까지 갈 수 있고, 그냥 반월저수지를 끼고 쭉 걸어가도 귀농본부까지 갈 수 있습니다. 시간 여유가 많거나 더 좋은 경치를 바라시거나 먹을거리를 바라시는 분은 굴다리 아래쪽을 지나 가시면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 없어 그냥 반월저수지를 끼고 쭉 걸어갔습니다. 참, 이 길은 자전거로 가셔도 정말 좋습니다. 예전에 흙먼지 풀풀 날리는 2차선 길에서는 느낄 수 없는 편리함 같은 거시기가 있지만, 그때는 이곳에 포장마차도 많고 그랬던 기억이 나서 꼭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래도 아직 반월저수지 주변이 이런저런 음식점이 많이 있으니 지나가다 목이 마르시면 들러서 한 잔 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렇게 걸어걸어 갈치저수지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 귀농본부로 가는 길을 만납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작은 로타리 건너편은 군포 개울건너밭입니다. 오른쪽의 기찬오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가시면 종갓집 바깥채에 자리 잡은 전국귀농운동본부를 찾으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소금길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아직 가보지는 않았는데 이곳에서 고개를 또 넘으면 군포 시내로도 나가고 안양으로도 나가고 한답니다. 그곳은 여기 살지 않아서 따로 시간을 내지 못했지요. 언제 기회가 되면 안산에서 함께 모여 점성고개 넘어 속달로, 속달을 지나 안양으로, 안양을 지나 수리산을 넘어 안산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떠나볼까요?

 

 

월강사-반월저수지 30분

반월저수지-귀농운동본부 40분(수리사 쪽으로 갈 경우 40분 정도 더 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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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이상한 이름의 행사. 그것도 벌써 3회나 진행이 됐다고 한다.

모범외국인근로자... 갑자기 박영준의 소설 "모범경작생"이 생각나는 것은 나만 그럴까?

사람을 모범과 불량으로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게다가 내국인과 외국인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또한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순한 현수막 하나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에서 열린 요상한 행사,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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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연두농장에 체육대회하러 가다가 본 현수막입니다.

시흥에서는 안산에 통합될까 결사반대네요. 근데 통합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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