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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바로 위쪽은 안산읍성과 관아가 있던 곳이다. 수암봉으로 오르는 길 쪽으로 해서 관아터에 들어섰다. 별 관리도 없어 풀이 어지러이 자라 황량하기만 하다. 이런 데 뭐가 있었으리라고는 그저 지나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정도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의 상태가 아닐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옛것보다는 새것, 정신과 문화보다는 물질과 돈에 휩쓸려 다니고 있는 상태이니 말이다.

 
 

 

 

저 멀리 안산이라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김정경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같은 것이 서 있다. 한 650년이 가까이 되었으니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한다. 김정경이 1345년 태어났으니, 20살쯤에 심었다면 얼추 비슷비슷하다. 뭐, 누가 심은 것이 크게 중요하랴. 여기 이렇게 아직도 은행나무가 살아 숨 쉰다는 게 더 중요하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금수나 식물에도 못하는 면이 많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질 일이다.

 

 

 

 

발길을 기단 쪽으로 돌렸다. 이곳에는 정자나무로 자주 쓰이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옆에는 향나무도 보이는데, 이건 일제강점기 관아 자리에 면사무소를 지으면서 심은 것이란다. 역사는 끊이지 않고 흘러왔지만, 우리가 배우고 느끼는 역사는 군데군데 마디가 잘려 있다. 그것은 근현대사로 오면 더 심해진다. 학교 다닐 때는 역사 교과서의 마지막 부분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머리가 굵은 뒤에는 그건 다른 데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요즘 시에서는 돔구장에 올인하고 있는 듯한데, 돔구장에 앞서 돈이 안 되더라도 이곳부터 잘 정비했으면 좋겠다. 안산은 이렇게 흘러와 지금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잘 알려주시길 바란다. 돈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게 아니라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건강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제 수암에서 볼 마지막 노거수를 찾기에 앞서 안산초등학교를 먼저 들렀다. 안산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안산 공립보통학교로 시작한 무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학교다. 그래서 혹시나 이곳을 찾아가면 그때 그 시절의 파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찾았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모처럼 휴일을 맞은 아이들이 공도 차고, 연애도 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2층짜리와 오른쪽으로 1층 건물이 보인다. 2층은 아무래도 새로 지은 것일 테고, 저 위에 있는 1층짜리가 옛날 교사가 아닐까 추측했다. 학교 관계자에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교육감 선거로 한산하기만 해서 그냥 이 정도로 그쳤다.

 

 

 

 

건물을 돌아보는데 재밌는 비석이 2개 서 있다. 안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새겨 놓은 비석인데, 하나는 옛날 교가이고 다른 하나는 요즘 만든 교가이다. 옛 교가는 1912~1973년까지 썼다고 하는데, 전문을 옮겨 보겠다.

“옛 고을 안산읍 한복판에
넓고 넓은 황해를 앞에다 두고
장엄하게 서 있는 우리 배움터
길이 길이 빛내자 우리 안산교”

노래에 많은 게 나온다. 먼저 이곳이 안산 읍의 한복판이었다는 점, 수암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듯한 암시가 그것이다. 음까지 알면 더 재밌겠지만, 오늘은 누가 이 노래를 기억하고 계신지 찾을 길이 없다. 아쉽지만 여기서 발길을 돌린다.

 

 

 

 

이제 수암의 마지막 노거수를 찾는 일만 남았다. 몇 번 지나다니며 본 적이 있는데 막상 찾으려고 하니 헷갈린다. 골목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마지막 느티나무를 찾았다. 느티나무 앞에 자리한 이발소가 정겹다. 요즘은 남자들도 다 미장원에 다닌다. 외국영화를 보면서 이발소의 모습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느낀 건 여자들이 미장원에서 수다를 떨듯, 남자들은 이발소를 중심으로 삶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우리네 이발소도 그랬지 않을까? 어린 시절 한두 달에 한 번씩 머리를 자르러 가면 그런 분위기를 느낀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요즘 남성의 여성화를 환영하기도 하고, 우려하기도 하는 목소리가 있다. 청소년이나 20대 초반을 보면, 참 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유니섹스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구별은 하되 차별은 하지 말라고 했다. 헌데 지금은 차별은 하되 구별은 하지 않는 시대가 된 듯하다.

동네 한복판에 이런 느티나무가 자리하면 시골에서는 자연스레 마을회관이나 정자나 평상을 가져다 놓고 여름 한낮의 땡볕을 피하기는 휴식이 장이 되기도 하고, 서로 만나 대소사를 이야기하는 사교의 장이 되기도 하고, 풍년을 기리거나 마을의 안녕을 비는 종교의 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안산 수암의 느티나무는 그런 모든 기능을 잃었다. 그저 이제는 이곳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전부가 된, 박제가 되어 버린 모습에 씁쓸할 뿐이다. 그래도 그 앞에 이발소가 그 전통을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이 동네에 오래오래 사신 토박이가 되어 가는 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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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 회화나무, ‘큰 인물이 나온다’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⑦ 양반집서 심었다는 회화나무

 

 

수암에는 전에 몇 번 온 적이 있지만, 이 길로는 처음이라 조금 헤맸다. 마침 놀이터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놀러 나와 계셔서 뭐 주워들은 것 좀 없을까 다가가 인사를 여쭈었다.

“할머니, 여기 큰 나무가 어디에 있어요?”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하시는데 벌집을 건드린 것 같다. 지난 겨울 토종을 수집하러 다녔을 때도 그랬다. 할머니 한 분을 붙들고 말을 붙이다 보면 이런 씨앗도 나오고 저런 씨앗도 나오는데, 경로당 같은 곳에 가서 여러 할머니들께 여쭈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대강 나무의 위치만 파악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럼 다들 여기서 오래 사신 건가요?”

이 물음에는 어째 대답이 영 시원치 않다. 다들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단다. 안산을 다니다 보면 토박이를 만나기가 참 힘들다. 참빗으로 훑듯이 다녀야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는 더더욱 그렇다.

어쨌든 할머니들이 알려주신 대로 따라가니 마침내 큰 나무 한 그루를 찾았다. 그건 바로 회화나무다. 회화나무는 옛날부터 양반집에서 심기로 유명한 나무다. 잎사귀를 본 분은 잘 알겠지만 아카시처럼 전형적인 콩과인데, 원산지인 중국 북부에서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중국에서는 집에 회화나무를 심어야 큰 학자나 인물이 나온다고 여기고, 출세한 사람이 나오면 그 상징으로 뜰에 심기도 했다. 그래서 영어로는 Chinese Scolar Tree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그 영향을 받아 양반집에서 주로 이 나무를 심은 것이다.

처음 이 나무를 만난 것은 서울에서였다. 정독도서관 입구에 보면 큰 나무가 하나 서 있는데, 그 나무가 회화나무였다. 그에 얽힌 추억은 없어 더 이상 떠오르는 건 없지만, 아무튼 그 나무 덕에 회화나무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여기 수암에 서 있는 회화나무는 다른 어느 곳의 나무 못지않게 멋들어진 모습을 뽐내고 있다.

 

 

밑동은 어른 너댓이 둘러 안아야 품에 담을 정도로 굵다. 다행히 주변에 집이 없어 마음껏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을 수 있어 이렇게 잘 크고 있다. 장상동에서 보았던 은행나무의 초라한 모습에 비하면 정말 떳떳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원줄기에서 자라고 있는 새끼 나무다. 등산객들이 오가며 재밌다고 다들 쳐다보고 한마디씩 나누는 걸 보았는데, 확실히 여느 나무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나무의 생리를 잘 모르니 그것이 왜 그런지는 전문가에게 물어봐야겠다.

 

마침 나무 밑에는 갓을 뜯고 계신 두 아주머니가 계셨다. 차림으로 보아 등산객은 아니신 듯하고, 혹시 이 나무와 관련하여 뭔가 재미난 이야기가 없을까 말을 건넸다.

나무를 찍는 내 모습이 특이하다고 여기셨는지 이건 사진을 찍어 뭐하냐고 그러신다.

그냥 멋있어서 남기려고 한다며 받아넘기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원래 살기는 저 아랫동네 그러니까 장하동 쪽에 산다며 오늘은 나물이나 캐러 나왔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 동네는 잘 모르신다고. 그러면서 저기에도 큰 나무들이 많으니 거기도 가서 사진을 찍으라고 일러주신다.

말씀하신 곳은 관아터라는 직감이 왔다. 모르고 지나다닐 때는 ‘큰 나무가 있구나’ 하며 다니던 길인데, 이렇게 의식을 하며 다니니 또 새롭다. 정말 누구의 말마따나 아는 만큼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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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봉 본래 이름 ‘매봉재’, 아시나요?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⑥ 꼭대기 바위 ‘매’ 닮은 모습

 

매화농장을 나와 마을 입구로 나아갔다. 들어오면서 본 멋들어진 소나무 앞에서 잠시 멈췄다. 아직 보호수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홀히 할 나무가 아니다.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그럴싸한 직함이나 외양을 보고 무엇을 판단하는 건 우리 사람만의 일일 것이다. 이 나무의 내력이 궁금해 하던 찰라, 밑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오시고 계셨다.

 

인사부터 드리고, 먼저 나무의 내력을 여쭈었다. 100년도 더 된 나무라고 하시는데, 정확하게는 마을 어른들도 모른단다. 아무튼 그 모양도 예쁘고 참 좋은 나무다. 나무는 어찌 그렇게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헌데 이 일대는 이 나무만이 아니라 원래 소나무가 참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작은 공장들이 들어선 안산고등학교 건너편이 다 솔밭이었단다. 아마 바닷가에 가면 방풍림이 있듯이 그런 숲이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안산고등학교 앞에 있는 육교 있는 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육교가 딱 갯다리 자리라고 한다. 그때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저 멀리 바다를 한 번 내다보면 속이 시원허니 좋았단다.

지금은 물론 아파트의 물결만 넘실거리고 있지만 말이다. 가만히 보니 안산에선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 원래 바다이거나 뻘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 어르신의 성함은 어윤석(丙子生)이라고 하는데, 6.25 지나 충청도 병천에서 안산으로 온 지 30년이 되었다고 하신다.

원래 태어나 자란 곳은 안성인데 왜정 때 병천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안산으로 온 것이란다. 지금은 논 2마지기에 밭 3000평 농사를 지으신다. 하지만 모두 소작이지 본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다.

땅도 모았을 법하신데 왜 아무것도 없냐고 여쭈니, 그렇게 부지런히 일해 다 자식들 가르치고 시집장가 보냈다고 하신다. 부모님의 마음이 다 그런가 보다. 평생 남의 땅만 부쳤어도 후회는 없으시단다.

이 어르신께 재미난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지금은 수암봉이라 부르는 곳이 원래 매봉재라고 했다고 한다. 꼭대기에 있는 암석이 꼭 매를 닮아서 그렇게 불렀는데, 6.25 때 폭격을 맞아 부리 부분이 사라졌다고 한다.

수인산업도로를 따라 지나다니면서 멀리서도 한눈에 띄기에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떻게 매를 닮았는지는 몰랐다. 그런 가슴 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었구나. 하늘을 향해 도도하게 앉은 형상의 바위가 이제는 아픈 역사의 흉터를 안은 부리를 잘린 매가 되었다.

평생 배운 것이 농사라서 아직도 일을 손에서 못 떼고 있지만, 요즘은 농사지어 먹고 살기가 더 팍팍해졌다며 걱정이시다.

비료 값은 예전보다 5배 가까이 마구 오르고, 마땅한 판로가 있어 안심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산에 무슨 시장이 있어 내다팔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며 말이다. 이곳의 땅도 이제는 지역 사람들의 것이 아니란다.

개발이 되면서부터 값싸게 팔고 다들 외지로 나가, 땅은 다 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단다. 원주민은 싸게 팔았지만 그네들이 사서는 엄청 비싸게 거래가 된다며 이곳의 농사도 자기 대에서 끝일 거라고 씁쓸하게 말씀하신다.

  

한창 어르신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에서 어떤 사람이 누구를 모르냐며 묻는다. 이유인즉 아무개가 식당에서 밥만 먹고 도망가서 찾으러 다닌단다. 참 살기 어려운 시절이기는 한가 보다. 나도 어서 발걸음을 옮기며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암으로 들어가 노거수를 살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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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인의 살 내음이 매화 향에 비견하리’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⑤ 노리울 매화농원과 농막

 

동막골에서 나와 다시 수암 쪽으로 나아간다. 수인산업도로, 곧 42번 도로는 정말 위협적이다. 어찌나 차들이 쌩쌩 달리는지 갓길로 가지만 늘 두렵다. 졸음운전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로 이 세상과 안녕을 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따른다. 길은 사람과 문물을 가져온다.

그래서 길은 사람 몸의 혈관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얼마나 길이 잘 뚫려 있느냐에 따라 문명의 발전이 좌우될 정도다. 경제개발을 시작하던 무렵, 가장 처음 한 일이 고속도로를 뚫은 일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으랴!

하지만 길이 너무 지나치게 뚫리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점점 사라진다. 인심이나 가치, 문화 등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다양성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저마다 개성을 지니며 어울리는 통일이 아니라 획일이 판을 치고, 그에 따르지 않으면 틀렸다고 뭇매를 맞고 쫓겨난다.

요즘 사람들이 잘 구분해서 쓰지 않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다르다”와 “틀리다”이다. 우린 이제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왜 누군가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고도 하지 않았는가?

 

수암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언덕 옆에 노리울이란 마을이 있다. 전부터 한 번 들러서 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잘되었다. 저 깊숙한 곳부터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둘러보자.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며 안쪽으로 다시 안쪽으로 찾아가니 멀리서도 대번에 매화임을 알 수 있는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온다. 엄청난 매화 군락지가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매실이 유행하면서 매화를 참 많이도 심었다.

가장 유명한 곳은 아무래도 섬진강 주변일 것이다. 그러나 섬진강 매화도 좋지만 거기까지 가느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 무엇보다 에너지와 돈 대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즐기는 건 어떨까? 매화를 즐기곤 바로 뒷산으로 올라 수리산까지 한 번에 품을 수 있다.

마이 카(My Car) 시대가 오면서 쉬는 날이면 다들 머리 싸매고 어디를 갈까 고심한다. 왜 내가 사는 동네 골목을 느긋하게 거닐며 사람을 만나고 묘미를 즐기려고는 하지 않을까? 너무 당연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찾았던 4월 초, 이 농원에는 매화가 한창이었다. 멀리서도 매화 향기에 취해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달콤함이란 어느 여인의 살 냄새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짜릿하다. 꽃냄새에 취해 저절로 발길이 매화를 향해 나아간다. 벌들도 꿀을 모으느라 분주하기만 하다. 주인아저씨를 찾으려고 한참을 돌아다니니 한쪽 구석에는 맑은 샘도 있다. 물맛이 좋구나. 이곳도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의 샘이구나.

마침 물을 뜨고 있는 아저씨가 있어 이 농원의 주인인지 물었다. 자신은 주인이 아니라 이 아랫밭에 가끔 오면서 농사를 짓는단다. 농사로는 수입이 안 되고 땅은 놀리기가 뭐해서 조금 있는 땅에 먹을거리나 조금 심고 돈은 다른 일로 벌고 있다며, 물맛이 좋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럼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행방을 묻고 다시 찾아 나섰다.

혹시 들어오는 입구에서 본 할아버지가 아닐까? 닭장을 고치고 있던 할아버지가 생각나 찾아가 조심스레 이 농원의 주인이냐고 여쭈니, 맞다고 하신다. 매화가 참 좋다고 언제부터 여기서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사시는지 은근히 기대하며 여쭈었다.

하지만 자신은 7년 전 여기에 들어오면서 매화를 심은 것이란 조금은 실망스런 답을 하신다. 오래 사신 토박이이시길 기대했는데 아쉽다. 정말 토박이를 만나기 어려운 곳이 여기 안산이다. 다들 어디로 어떻게 흩어지셨는지 모르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조금 더 농원을 둘러보았다. 모두 2000평의 넓이인데, 말했듯이 한쪽에는 매화나무가 자리하고 그 바로 옆에는 샘이 하나 있다. 반대쪽에는 멋있는 연못과 이 모든 경치를 즐길 수 있는 2층 농막이 하나 서 있다. 농막에는 현판이 세 개 걸려 있다.

 

이 현판은 모두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고 새기신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四海之內皆爲兄弟(세상의 모든 것이 다 형제다)”, “桃李不言下自成跡(복숭아와 자두는 말하지 않고 스스로 이룬 것을 내려놓는다)”, “待人春風持己秋霜(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하고 자신을 다잡을 때는 가을서리처럼 하라)” 논어, 사기, 채근담에 나오는 글귀들로서, 하나하나 모두 마음에 깊이 새길 만하다.

7년 전 이곳에 들어오실 생각을 하신 것이나, 농원을 꾸미신 손길로 보거니와 보통 분이 아니신 듯하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다. 또 난데없이 불쑥 찾아온 객이니 더욱 그렇다. 언제 다시 한 번 찾아와 찬찬히 즐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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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To’ 먹고 살기 좋은 곳, ‘동막골’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④ 450살 된 장상동 ‘은행나무’
영화 덕분에 유명해진 땅이름이 있다. 바로 안산에도 있는 동막골이 그곳이다. 동막골이란 이름은 참 특이하다. 동쪽이 막힌 곳인가? 아니면 동막(東幕)이란 한자로 미루어 주막이라도 있던 곳인가? 그 이름의 유래며 뜻을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지명을 연구한 논문을 읽다가 그 뜻을 알았다.

 

동막(東幕)이란, 원래 있는 우리말을 표기하려고 한자음을 빌려 적으면서 나온 것인데, 그 본디 우리말은 “두모”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모란 배산임수의 지형을 지칭하는 말로서, 뒤에는 산을 두르고 앞에는 시내와 너른 들을 낀 곳을 뜻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먹고 살기 좋은 곳을 가리킨다.

그러니 안산에 있는 동막골은 예부터 사람들에게 먹고 살기 좋은 곳으로 인정받은 유서 깊은 곳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지나온 벌터의 뜻 역시 농사지을 수 있는 들이 넓다는 것이니 더욱 그렇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두모란 땅이름은 주로 중부지방에 흔하다고 한다. 두모는 두무, 두모, 두미, 도마, 동막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니 어디 여행을 다니면서 보이면 정말 사람이 살 만한 좋은 곳인지 확인해 볼 일이다.

 

영화 때문에 유명세를 떨며 이 사람 저 사람이 들락거렸는지, 마을 입구에서는 영화 동막골에 나온 곳이 아니라는 푯말까지 볼 수 있다. 아무튼 요즘은 너도 나도 차를 끌고 다니면서 못 가는 곳 없이 구석구석까지 잘 다닌다.

빠르고 편하고 자유로운 이 운송 수단을 축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운전면허증이 없는 난, 어지간하면 이대로 늙어 죽고 싶다. 차에게 나의 시간과 공간을 할애하기에는 느리게 다니며 보고 즐길거리가 너무 많다.

동막골의 법정동명은 장상동이다. 앞에서 말한 적 있는 노리울을 42번 국도를 중심으로 위와 아래로 나누어 장상동과 장하동으로 정했다. 지도가 있는 분은 펴서 보면 알겠지만, 안산분기점에서 조남분기점까지 길쭉한 평지를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루목처럼 중요한 길목이라 고구려 때부터 장항구(獐項口)라 부르며 중시한 것이다. 이곳이 밀리면 백제가 밀고 올라올 수 있을지 모를 위험이 생기니 말이다. 물론 굳이 이곳 말고도 다른 길목도 있지만,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동막골, 곧 장상동에 들어가면 바로 마을의 광장을 만난다. 예전이었다면 뜨거운 땡볕을 가려주는 커다란 정자나무라도 하나 서 있었을 만한 곳이다. 지금은 예전 주민들도 많이 떠나 사람도 별로 살지 않고, 집보다 공장이 더 많은 듯하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난 뒤로 마을은 황폐해졌겠지.

 

아니 이걸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황폐라는 말로 설명하면 안 되겠다. 인간은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며 농업에서 공업으로 다시 서비스업으로 전이해 왔으니 말이다. 서비스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내친 김에 지난번 새로 알게 된 ‘비움’이란 곳까지 갈까 하다가 관두었다. 대신 물을 찾아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 각종 묘목을 판다는 간판을 걸어 놓은 집에 들렀다. 마침 한 할아버지께서 낙엽을 치우고 계셔 인사를 드리고 지나가다 들렀는데 물 좀 얻어 마실 수 없겠냐고 여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이곳 물이 참 좋다면서 집 앞에 있는 약수를 사람들이 많이 떠가기도 하고, 자신도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자랑하신다. 물을 얻어 마시면서 맛을 보니 정말 자랑할 만하시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시설은 형편없지만 물맛만큼은 마셔본 안산의 다른 어느 곳보다 뛰어나다.

김홍규 할아버지(75)께서는 이곳에 들어온 지 3년이 되셨는데, 7만 5000평이 되는 산을 관리하며 이곳에서 살고 계신다. 혼자 그 넓은 산을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놀랐는데, 아직도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다. 다만 홀로 사시는 듯해 적적해 보이셨다. 할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집도 작지만 꽤 잘 지은 집임을 알 수 있었는데, 본인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100년은 된 집이라고 하신다.

 

 

장상동은 그래도 옛 마을의 모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할까? 본인의 의지로 새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을 낙오자라고 느끼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농민과 농촌은 이용 가치가 있을 때만 쥐꼬리만한 대우 좀 받다가 쓸모를 잃자 내침을 당하고 있다.

시골에 가도 그런 마당에 안산이란 도시의 이곳에서는 더 심하지 않을까? 옛날부터 살던 마을 주민은 만나지 못했지만, 길가에 늘어선 작은 공장과 쓰러져 가는 옛 집이나 새로 번듯하게 지은 집들에서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 나오는 길에 우연치 않게 장상동의 보호수를 만났다. 수암에서 만나 노거수만 생각했지 이곳에서 만나리라고 털끝만큼도 예상치 못했기에 정말 뜻밖이었다.

역시, 이곳도 노거수가 대변하고 있듯이 오랜 전통을 지닌 동네였구나. 여기에 버티고 선 나무는 은행나무로서,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표지판에 수령이 420년으로 나와 있는 걸로 계산하면 현재 450살 정도는 되었겠다.

 

이 은행나무는 450년이란 시간 동안 한자리에 서서 무엇을 보았을까? 450년이란 세월을 보냈음에도 겉으로 보기에 굵기나 크기는 초라하기만 하다. 꼭 이 동네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 안타깝다.

450년이면 더 굵고 힘차게 뻗어 있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하천 정비 공사니, 뿌리를 뻗을 만한 흙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나무는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가 클 수 있을 만큼만 알아서 크지 않던가!

날개의 깃털을 상한 새는 새 깃털이 밀고 나올 때까지 푸른 하늘을 날지 못한다. 자연의 섭리가 그러할진대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동막골의 오늘을 보면서, 뿌리 없는 나무가 살 수 없듯이 뿌리 잃은 인간은 외롭고 불안할 뿐이란 생각이 든다.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런 모습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기 부흥이란 미명으로 쓸데없는 데 돈을 쓰며 몇몇 개인의 배만 불리기보다는, 이 땅의 한 울타리 안에서 사는 이웃의 삶을 살필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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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시랑’을 돌려주세요”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③ 흐드러지게 핀 ‘목련나무’
수암으로 가는 길에 그동안 계속 맘에 걸렸던 시랑초등학교를 둘러보려고 한다. 안산 부곡동에 자리한 시랑초등학교의 이름은 정정옹주의 남편이었던 유적이 이부시랑이란 벼슬까지 오른 걸 기념하려고 부르던 동네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시랑초등학교를 빼고는 모조리 다 시낭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로마자로 Sinang이라 표기하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밑도 끝도 없이 시낭이란 이름을 쓸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일이다.

교통표지 판부터 시작하여 시낭운동장(옛 양궁경기장)의 이름이며 각종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이름까지 하면 만만한 작업은 아닐 테다.

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이름은 큰 의미를 지닌다.

양궁경기장은 지나만 다녔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이번 기회에 어떤 곳인지 들어가 보았다.

운동장에서는 경기도 교육감 선거를 하면서 졸지에 쉬는 날을 맞은 학생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인가! 인조잔디를 깔은 듯한 운동장 바닥은 다 닳아서 반들반들하고, 더구나 그 위에는 모래까지 쫙 깔려 있다.

한 학생을 붙들고 이야기하니 여기서 넘어지면 죽음이란다. 오랜만에 노는 날이지만 놀 만한 곳이 없는 우리나라의 청소년의 모습에, 새로 짓는 것만 좋아하지 정작 원래부터 있는 건 잘 관리하고 활용할 줄 모르는 이 나라 어른의 행태에 슬프다. 저런 데서 놀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아플까?

 

씁쓸한 마음을 털어내며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수암까지 가는 길에 들를 곳이 많으니 서둘러야겠다.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벌터를 거쳐 서해안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지났다.

바로 이곳, 가끔 신도림으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멀리 보이는 버드나무의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한 곳이다. 이런 나무가 아직은 보호수로 지정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보호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나이테를 이루면 보호수가 되겠지.

 

지난 가을에 심어 놓은 밀이 퍼렇게 올라와 눈을 시원하게 닦아준다. 처음 들어선 길을 조심히 걸었다. 입구에서 사유지이니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입간판을 보았기 때문이다. 밀을 심어 놓은 것은 소를 키우려고 그런 것인데, 축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공장도 몇 개 있다. 아무튼 근교에는 작은 공장들이 즐비하다. 도시가 발전(?)하는 전형적인 수순인가 보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여기 사신다는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여기서 일하지는 않고 그냥 오가며 돈벌이하며 산다고 하시는 말씀에 자세한 건 여쭈어 보지 않았다. 그저 여기 자리 잡은 집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만 여쭈었다. 1960년대부터 있던 집이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미루어, 흐드러지게 핀 목련나무도 벚나무 길도 입구의 버드나무도 40~50년 정도 살았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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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동→일동, 구룡동→이동, 시곡동→사동?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② 안산의 ‘옛 모습’ 아세요?

 

한동안 안산의 옛 모습은 어떠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시화방조제를 쌓아 개막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시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래서 안산에서 오래 살았다는 어르신을 만나면 꼭 이와 관련해 물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암만 들어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또 안산에서 10년 이상 산 사람은 꼭 ‘사리 포구’를 이야기하며 좋았다고들 하는데, 거기도 가본 적이 없으니 무엇을 떠올릴 수 있으랴! 그래서 자연히 옛 지도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충 머릿속에 안산의 옛 모습을 그릴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지도가 자세하지 않아 여전히 목이 말랐다. 그러다가 우연히 일본이 1915년 무렵 작성했다는 첩보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이 지도를 찾으려고 몇 주일 동안 사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라는 제목으로 영진문화사에서 나온 지도책이 서울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고생 끝에 지도책을 펼친 순간, 확실히 조선에서 만든 지도와는 다르게 정확하게 지형이 표현된 지도를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동은 점성동, 이동은 구룡동, 사동은 시곡동으로 바꾸면 안 될까?

 

그러니까 현재 가장 번화한 중앙동이라는 곳이 바닷가였고, 고잔동 일대는 모두 개펄이었겠구나. 주변부에 자리한 상대적으로 덜 번화한 곳들이 원래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는 걸 알았다. 참,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점성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일동이라고 부르지? 어디다가 일동에 산다고 하면 숫자 1인지 일인지 다들 헷갈려 한다. 그럴 때마다 뭔가 찜찜해 죽겄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도 그렇고 일본이 만든 지도에서도 점성이라고 하니, 일동은 점성동으로, 이동은 구룡동으로, 사동은 시곡동으로 바꾸면 안 될까? 동네 이름을 바꾸려면 연판장이라도 돌려야 하려나 모르겠다. 누가 방법 좀 알려주면 좋겠다.

동네 이름과 관련해서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하나 있다. 4호선을 타고 오다 보면, 평촌이라는 곳이 그렇다. 내 기억에 처음에는 벌말이었는데, 왜 그 좋은 벌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한자로 평촌(平村)이라 바꿨는지 모르겠다. 그게 더 부동산 가치를 올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쁘고 뜻 깊은 자기 이름을 버린 동네라는 오명은 떨칠 수 없을 게다.

 

 

 

 

 

 

내 사는 곳 점성(占星), 이익선생 호 성호의 星은 점성에 땄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인 점성占星이란 이름은 참 별나다. 별을 보고 점을 치던 곳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여기서 특별히 별이 더 잘 보였을 리는 없다.

성호(星湖) 이익 선생님의 호는 점성의 성과 송호의 호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하는데, 이 동네가 별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누군가는 이익 선생님이 별을 보면서 천문을 공부한 곳이라 첨성이 맞다고도 하지만, 그게 맞는 얘긴지 확인할 길은 없다. 또 우리나라의 무당은 별점을 치지는 않았으니 분명 다른 뜻이 있을 터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소금장수나 새우젓장수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군포 속달에 사시는 동래 정씨 집안 어르신께 이야기를 들었는데, 옛날부터 안산의 생선장수와 소금장수 같은 봇짐장수가 중앙병원 뒤쪽에 있는 점성고개를 넘어(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반월저수지가 나온다) 장사하러 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야 새벽부터 짐을 지고 나가 오전에 장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테니, 이 고개를 넘을 때쯤이면 점섬(점심) 먹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점섬, 점섬 하다가 그걸 한자로 표기하면서 점성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지금도 점성인지, 첨성인지, 아니면 점섬인지 확실하지 않아 옛 지도를 보면 점성이라 하고, 이익 선생님 관련해서 찾아보면 첨성리에 살았다 하고, 현재 이곳에 있는 공원은 점섬공원이라 한다.

 

 

 

 

노거수 만나러 떠나는 길, 귀한 인연을 고대하는 길

 

이렇듯 땅이름은 그 유래가 명확하지 않다. 이 사람한테 물으면 이렇게, 저 사람한테 물으면 저렇게 이야기해 준다.

젊은 날 가슴 시리게 사랑한 첫사랑 그나 그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웃는 얼굴은 어땠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지만 그 이름 석 자만큼은 기억에 남듯이, 땅이름도 그러하다. 덕분에 뒤에 남은 사람은 그 이름 석 자만 가지고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재미도 있지만.

아무튼 안산의 옛 모습도 살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노거수를 보러 떠나야겠다. 첫 목적지는 안산의 옛 1번지, 수리산 밑자락에 자리한 수암(현 안산동)이다.
 
여기는 관아와 읍성이 있던 군사, 정치, 행정,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교통편도 불편하고 중심부와 너무 동떨어진 한적하다 못해 낙후된 곳으로 인식되지만 말이다. 그나마 안산동이란 이름이 옛 흔적을 남기고 있어 다행이다.

이 일대가 중심지였다는 것은 이곳에 남아 있는 노거수의 수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수암에 무려 4그루, 장하동과 장상동에 1그루씩 모두 6그루가 이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노거수는 그냥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나오는 뜻은 노거수(老巨樹)라 하여 단지 “나이가 많고 커다란 나무”라고만 한다.

하지만 그 나무와 얽힌 추억과 기억들, 잎이 피고 지듯 피고 져간 주변 사람들의 삶, 시간과 공간의 흐름과 떨림, 흥망성쇠와 상전벽해는 오직 그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기억에서 기억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뿐이다.

오늘 노거수를 만나러 길을 떠나지만, 그와 함께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단순히 풍경을 그리는 데 그칠 수 있다. 그런 귀한 분을 만날 인연이 있을까?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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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18그루’ 나무와의 만남, 그 첫 걸음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① 선사시대부터 산 안산역사

 

 

노거수를 찾아서

 

2009년 새해 벽두부터 안산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각종 언론에 안산이 오르내렸고, 들을 때마다 밀려오는 짜증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어느덧 안산에 와서 산 지가 4년이 넘었다. 그동안 살아본 안산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안산에 왔을 때를 기억하면 그렇지도 않다. 서울에서 멀다는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시골은 아닌지, 공장만 있는 건 아닌지, 도대체 어떤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결혼과 함께 안산에 왔고, 그렇게 자리를 잡은 곳이 일동이다.

 

일동에 자리를 잡아 살고, 또 부곡동으로 텃밭을 오가며 안산의 이러저러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안산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이런 궁금증은 텃밭에 계신 안산의 토박이 어르신께 이야기도 듣고, 도서관에서 향토지도 찾아보고, 직접 다니며 보고 들은 내용으로 해결해 나갔다.

 

그 결과, 지금이야 안산이 뜨내기들의 도시이지만 원래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재미난 곳이란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주변 상황을 보면 점점 더 뜨내기의 도시로 전락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안산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안산이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걸 얘기할 수는 없을까?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우연히 나무에 눈이 갔다. 그래, 백 년도 못 사는 게 인간이라지만 나무는 몇 백 년을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나무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 나무가 버티고 서서 보아 온 동네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며 안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위해 먼저 안산시청 푸른녹지과에 전화를 걸어 이경주 님의 도움으로 안산의 보호수 목록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도서관에 찾아가 향토지를 꼼꼼히 읽고 사전 지식을 쌓았다. 마지막으로는 답사할 곳을 지도로 찾으며 머릿속에 넣었다. 이제 안산의 노거수를 찾아 길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 자, 이제 가자!

 


뱀다리 하나.

노거수란? 나이가 많고 커다란 나무를 말한다. 현재 안산에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는 모두 20그루. 그 가운데 풍도에 있는 2그루를 제외하면 모두 18그루가 있다. 풍도의 나무는 2003년에 새로 지정된 것으로서, 그곳에 가려면 인천에서 아침 9시 배를 탈 수밖에 없는데 비용도 시간도 만만치 않아 빼기로 마음먹었다.

 

뱀다리 둘.

안산의 역사는? 안산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물론 지금과는 지형이 많이 달랐지만. 안산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식 고인돌이 있고, 인간보다 더 이전에 살았던 공룡의 발자국도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남하했을 때 안산을 차지하고 장항구현(獐項口縣)이라 했단다.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직도 수암에 가다 보면 노리울을 볼 수 있다. 장항, 곧 노루목이 아닌가. 고구려 장수왕이 5세기 때 인물이니 적어도 1500년 전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말씀.

그것만이 아니다. 가장 최근인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안산에 살던 호구와 인구부터 특산물까지 볼 수 있다. 대략 평균을 내면, 2000호 안팎에 1만 명 남짓의 사람이 안산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현 안산의 인구 70만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니지만, 조선시대에 인구가 최대 1500만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1/1500이 안산에서 살았으니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그리고 안산의 특산물은 기록에 남은 걸 보면 대부분 수산물이다. 시화방조제가 생기기 전 안산은 농어업이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업화 정책에 따라 새로운 공업도시가 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 혜택인지 아니면 재앙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 한결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옛날에는 먹을거리도 많고 참 좋았다고…. 지금은? 상상에 맡기겠다. 풍요로운 삶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솔직히 내가 느끼는 지금의 안산은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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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안산의 답사 모임을 따라 잿머리성황당에 갔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화려하거나 옛모습 그대로이지는 않았지만,

안산에 아직 이런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고려의 서희가 사신으로 가는 길에 풍랑이 심해 잠시 안산에 머물 때 꿈에 나타난 신라 경순왕의 한을 풀고자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동기야 어떻든, 이곳에 오르면 한눈에 서해를 조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전략적 가치와 바다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안녕과 풍요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색 천에 묶어 놓은 명태가 아직도 그 염원을 풀지 못하고 바다를 향하고 있습니다. 

 

잿머리성황당에서 내려다본 시화공단. 지금은 대규모 공장부지이지만, 원래는 고깃배며 조운선 들이 바삐 오가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안산의 초지동은 원래 초지진이 있던 곳으로서, 이후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강화도로 옮기었다. 안산 공과대학 근처의 둔배미는 그 초지진을 지키던 수군이 농사짓던 둔전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그 길을 지나다보면 너른 들을 볼 수 있다.

 

 

반야 님의 말씀에 따라 그날 사진 몇 장을 더 보여 드리겠습니다.

먼저 아래는 별망성지입니다. 간척 이전의 귀한 사진이지요.

별망성은 잿머리성황당이 있는 곳과 함께 바닷길의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열병합발전소인가 하는 건물이 현재 저 볼록 솟은 곳에 서 있습니다.

지반이 약한 곳에는 세울 수 없기에 원래 있던 땅을 밀어 버리고 세웠습니다.

요즘 성포동 홈플러스 옆에 있는 수자원공사 앞에서는 옛 별망성 포구의 어부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시 안산이 개발되면서 돈 한 푼 보상받지 못하고 밀려나서 항의하고 있답니다.

 

 

 

다음은 사리포구입니다.

저는 안산에 2005년에 들어와 어디인지, 어떤 곳이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간척으로 사라지기 전 사리포구에 들락거린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횟집이 많았다는 이야기, 새우젓이 좋았다는 이야기 ......

저 멀리 오른쪽에 보이는 봉우리가 별망성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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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의 가옥

 

 

(1) 서민가옥


그림 1-5는 안산시의 서민가옥인 강남호 씨 집이다(사진 1-24). 기역자형 안채와 일자형 대문채로 구성 되었으며 이것들 오른쪽에 뒷간이 있는데, 이것들의 지붕은 함석으로 되어 있다.

 


그림 1-5 안산시의 서민가옥인 강남호 씨 집의 평면도

 

 

각 한 칸씩의 문간방과 대문, 그리고 외양간으로 이루어진 대문채는 매우 퇴락해 문간방 쪽은 수년 전에 흙벽돌을 이용해 다시 세웠다. 따라서 건물의 오른쪽은 본디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왼쪽은 새로 세운 것이어서 불균형을 보인다. 이 집은 강씨의 어머니(84살)가 10여년 전부터 혼자 기거하게 되면서 소 키우던 일을 중단해 지금은 외양간을 헛간으로 쓰고 있다.
안채는 각 한 칸씩의 안방·마루·건넌방과 한 칸 반 크기의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루의 전면은 개방되었으며, 뒷벽에 외짝문(60×90cm)을 붙이기는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살림살이들을 문 앞에 쌓아 둔 것으로 보아 자주 여닫지는 않는 듯하다.
이 집은 들보를 쓰지 않고 같은 간격으로 나란히 걸어놓은 두 개의 종도리가 서까래를 떠받치고 있다. 이처럼 들보를 걸지 않은 가옥은 대부도와 영흥도 등지의 경기 서해도서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은 들보를 외지에서 사 들여오는 경비가 만만치 않은 것이 첫째 원인이겠지만, 규모가 작아서 들보가 반드시 필요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루가 매우 좁음에도 대형 냉장고와 큰 찬장이 놓여 있고, 안방에서는 외짝여닫이를 통해 마루로 드나들며 서벽에는 채광을 위한 창(50×115cm)을 달았다.
이 집 부엌은 재래식과 현대식이 공존하고 있다. 현대식의 대표격은 가스 테이블이며 싱크대(수도가 설치되었다)와 전기밥솥도 눈에 띈다. 재래식으로는 부뚜막에 걸린 솥을 첫손에 꼽을 수 있으며, 난방을 위한 연탄 보일러도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하겠다.
부엌 남쪽의 반 칸은 본디 나뭇간으로 섶나무를 쌓아 두는 공간이었다. 이 나뭇간은 경기 서해도서 및 연안지역 가옥들이 지닌 특징의 하나이다. 앞에서 든 대부도의 백복현 씨 집(상류가옥)에서는 대문채의 한 칸에 마련하였지만, 중류 내지 서민가옥에서는 부엌 한귀퉁이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또 중류가옥의 경우에는 벽을 따로 쳐서 반 칸 규모의 공간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나뭇광’이라 부른다. 이러한 나뭇광은 경기도의 옹진군을 비롯하여 이천군·고양군 등지와 충청남도의 서해안지역에도 분포하여 127)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보인다. 강씨 집은 현재 나뭇간 자리에 찬장과 독 따위의 부엌 세간을 들여놓았다.
한편 건넌방 전면 좌우 양쪽 벽을 내어 쌓아서 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 연기가 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효과가 없어 아궁이를 건넌방 측면으로 옮겨놓았다. 아궁이로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배려는 문간방 뒤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궁이 주위에 비닐 장막을 치고 문을 따로 붙여놓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덧집 한 칸을 달아 이어 연탄을 쌓아 두었다. 아궁이 상부에는 채광을 위한 창(56×116cm)이 있다. 부엌 측면에 시멘트 블록으로 마련한 공간(240×200cm)에는 세탁기를 비롯해 세면대도 설치되어 있어 서민가옥에까지 밀어닥친 현대화의 물결을 실감케 한다.

 


사진 1-24 강남호 씨 집의 앞모습.
기역자형 안채와 일자형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1-6 김종근 씨 집의 평면도.
평면이 디귿자형으로 구성되어 잇는 전형적인 중류가옥이다.

 

 

(2) 중류가옥

그림 1-6은 안산시 사사동(48-1)에 위치한 김종근 씨 집이다. 이 집은 평면이 디귿자형으로 이루어져 전형적인 중류가옥의 양태를 보인다. 이 같은 디귿자형 집(사진 1-25)은 역시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도 옹진군 일대와 연안지역인 인천시 소래면과 김포군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평면을 디귿자형으로 꾸미는 가장 큰 이유는 겨울철 서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서이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김씨의 집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4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디귿자집 평면을 보이고는 있으나 내부는 모두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겉모습만 예전 형태를 지니고 있다.

 


사진 1-25 김종근 씨 집 안채의 모습. 디귿자형 안채는 겨울철 찬바람을 막는 데 매우 유리하다

 

 

이 집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안방과 부엌, 그리고 건넌방과 광을 각기 터서 한 공간으로 만든 점이다. 이에 따라 싱크대를 비롯한 주방시설과 화장실도 이들 공간에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개는 안채의 왼쪽 절반(안방 쪽)을 남에게 세를 내준 데서 비롯되었다. 세입자와 주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보기 드문 타협을 하였다. 즉 세입자는 내부를 생활에 편리하도록 뜯어고치되, 이사를 할 때에는 주인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종근 씨로서는 집을 헐고 새로 지을 생각이었으므로 보상금 지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입자는 2년여를 살다가 떠났고 약속은 지켜졌다.
세입자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옛 부엌과 광을 한 공간으로 터 놓는 한편, 각 공간의 바닥을 한 평면으로 만들었으며 남쪽 끝에 좌변기를 설치하였다. 방을 새로 도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각 공간 바닥에는 비닐 장판을 깔았다. 그리고 방에는 침대를 들여놓고 옛 부엌 자리 한 귀퉁이에도 싱크대를 놓았다. 이로써 완전한 ‘서양식 입식 생활’이 이루어졌다.
낡은 집을 이렇게 개조하는 데에는 수백만 원이 들었을 것이다. 주인에 따르면 세입자는 안산공단에 근무하는 근로자였다고 한다. 불과 2년여의 거주를 위해서 수백만 원을 쓴 이 사람을 통해서 오늘날 젊은이들의 과소비적 성향을 짐작케 된다. 더구나 그는 침대를 비롯한 가재도구까지 그대로 두고 떠났다.
이 집의 오른쪽(건넌방 쪽)의 변화는 외지에서 살던 30대 중반의 김씨가 고향의 옛집으로 돌아온 1994년에 일어났다. 김종근 씨 자신도 ‘헐어서 다시 지을 집’에 많은 경비(약 5백만 원)를 들여 개조한 것이 사실이지만, 앞의 경우처럼 이를 단순히 과소비적인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김씨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인 데다가 실생활의 편리를 추구하는 심리 자체를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편의 위주로 개축을 한 나머지 한 채의 집이 지니는 품격이나 분위기가 산산이 부서진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건넌방에서 남쪽으로 3칸을 모두 터서 한 공간이 되게 하고 그 끝에 좌변기를 설치한 화장실을 둔 것은 세입자의 개조방식 그대로이다. 그러나 마루 한쪽에 방을 들인 것은 새로운 면모이다. 세 자녀를 둔 김씨 내외는 별도의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방을 들이면서 한쪽에 붙박이장을 설치한 점은 매우 돋보인다. 이 방에 침대는 물론이고 책상과 탁자도 놓였으며 창틀도 알미늄 새시로 바꾸었다.

 


사진 1-26 강종근씨 집의 건넌방. 현대식으로 편리하게 개조하였다.

 

 

건넌방에는 침대와 옷장 외에 소파도 들여놓았고(사진 1-26), 화장실과의 사이에는 싱크대를 비롯한 주방기구와 대형 냉장고 등을 배치했다. 또한 김씨는 동쪽의 3칸을 개조하기 위해 벽을 헐고 다시 쌓았으며, 이때 반 칸을 내어 각 공간이 그만큼 넓어졌다.
건물의 양쪽 날개 끝에서 대문을 좌우에 낀 벽 사이에도 간이벽을 세워 창고로 썼고 보일러도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문 우측에 2칸의 시멘트 블록집을 이어 달아 한 칸은 창고, 다른 한 칸은 바깥변소(재래식)로 이용하였다. 김씨의 집은 우리네 전통가옥이 서양식의 이른바 양옥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양태를 보이는 전형적 예라고 할 수 있다.

 

 

 

(3) 상류가옥

1) 청문당
그림 1-7은 부곡동釜谷洞에 위치한 유씨네 집(현재는 성산공파星山公派 종친회의 소유이다)으로 예부터 ‘청문당淸聞堂’이라 불려 왔다.


사진 1-27 일명 청문당이라 불리는 유씨네집 전경.
진주 유씨의 16세손인 유시회가 지었다 한다.

 

 

 



그림 1-7 안산시 부곡동에 위치한 청문당 평면도


 

 

이 집은 진주 유씨네의 16세 손인 유시회柳時會(1562~1635)가 지었다고 한다. 본디 충청북도 괴산에서 살아오던 유씨네가 이곳으로 옮아온 것은 시회의 조카인 적Z(1595~1619)이 선조의 아홉째 딸인 정정貞正 옹주의 부마로 뽑힌 것이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이 정혼을 하고 혼인에 이르기 전, 적의 아버지인 시행時行이 사망하자, 어린 사위가 300리가 넘는 길을 오갈 것을 걱정한 선조가 한양에서 100리 안쪽에 묘를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묘지를 부곡동 새터에 잡게 되었고, 선조로부터 넓은 사패지賜牌地를 받기에 이르러 그 뒤부터 유씨네가 세거해 온 것이다.
이곳의 유씨네는 많은 인물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 또한 번성하여 조선 시대 중기에는 명문거족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고, 청문당은 당시 학자 및 예술가들의 교유交遊에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이에 대해서는 ‘주거생활’에서 따로 설명한다).
청문당은 디귿자형의 안채 및 사랑채 우측에 일자형의 아래채가 들어서서 미음자형을 이루었다. 사랑채와 아래채 사이에는 중문을 세우고 안채와 아래채는 샛문으로 연결시켰다. 중문(118×166cm)은 안채로 드나드는 여인들이 이용하였고 샛문은 사당과 뒤란의 출입문이다. 안채는 팔작지붕에 기와를 덮었다.
안방은 근년에 입식으로 개조하여 옛모습을 찾기 어렵다. 오른쪽으로 한 칸을 넓혔고 윗방 자리에 수세식 화장실과 안방 윗목에 싱크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부엌 자리를 방으로 꾸몄고, 나뭇광 자리에는 보일러를 놓았다. 이에 따라 안방 왼쪽 담도 밖으로 물려 쌓는 외에 철문까지 새로 달았다. 이것을 보면 세를 들이기 위해 안채 왼쪽 날개를 개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의 안방은 장지문을 달아 아랫간·윗간으로 나누었으며, 골방에는 몸종이 기거하였다. 그리고 부엌의 안마당 위쪽에는 찬방이 있었다. 안방의 옛 모습 지닌 것은 마루로 드나드는 네짝세살문과 툇마루로 통하는 두짝세살문(110×123cm)뿐이다.
대청의 가구架構 형식을 보면, 들보 위에 매우 짧은 동자주를 세우고 이 위에 종보를 얹은 다음 사다리꼴 대공을 세워 종마루를 받게 하였다. 대청은 6칸으로 중앙부 뒤쪽으로 반 칸을 내어 벽장을 달고, 좌우 양쪽에는 세살문을 붙였다. 그리고 전면과 툇마루 사이의 문은 네짝세살문으로 필요한 경우 접어 들쇠에 얹을 수 있게 하였다.
대청에서 건넌방으로 드나드는 문은 두짝세살문(108×183cm)이며 방 앞의 툇마루 사이에도 같은 문(108×122cm)을 달았다. 툇마루는 누마루로 꾸몄으며, 이 방과 샛문 쪽 벽 사이에는 창(65×56cm)이 있다.
사랑채의 지붕도 팔작지붕이며 기와를 덮었다. 이 건물은 각 한 칸씩의 대문(본디는 나뭇광에 이어달렸었다)·일꾼방·부엌과 각 2칸의 사랑방과 서고로 구성되었다. 부엌에는 큰사랑과 일꾼방의 아궁이가 있었고, 전면에는 사랑방과 같은 크기의 툇마루가 놓였었다.
큰사랑방은 장지로 위아랫간을 나누었고, 안채외 서고로는 외짝여닫이로 드나든다. 한편 큰사랑방 전면에는 두짝여닫이와 미닫이가 시설되었으나 서고 쪽에는 네짝세살문을 달아 여름철에는 들어올릴 수가 있다. 2칸 규모의 서고에는 만 권의 서적이 들어차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귀중본이어서 경상도 일대의 학자들에게도 ‘안산 유대감 댁 서책’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800권 남짓만 남아 있다.
아래채 또한 변개가 심하다. 북으로부터 2칸 규모의 광과 반 칸의 마루, 그리고 칸반의 뜰아랫방이 들어서 있었고 양기와를 덮었다.
뒤란의 북쪽 오른편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이 있고, 왼쪽에는 거대한 모과나무(높이 14m, 둘레 3.4m)가 솟아 있어 청문당의 오랜 역사외 옛 영화를 말해 준다. 이 나무는 안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번호 5-9-2-2).


사진 1-28 청문당의 마루와 안방.

사진 1-29 청문당 대청의 가구 형식.

사진 1-30 청문당의 안채

 

 


2) 경성당
그림 1-8은 진주 유씨네 21세손이자 차종손인 유신(1748~1790)의 아들인 중서重序(1779~1846)가 둘째아들 방(1823~1887)이 살림을 날 때 지은 집으로 인근에서는 경성당竟成堂이라 불린다.


사진 1-31 김가진이 쓴 경성당의 현판.

 

 


사진 1-32 경성당의 사랑채.
안채는 2백여년, 사랑채는 170여년이나 되었다.

 

 



그림 1-8 경성당의 평면도. 당주는 안산문화원 상임위원으로 있는 유문형 씨이다.

 

 

당주인 유문형柳文馨(65세) 씨에 따르면 안채는 200여 년 전에, 그리고 사랑채는 그보다 30여 년 뒤에 세워졌다고 한다. 집터에 대해서는 따로 전해지는 말은 없으나, 지난 봄 고조부(1823~1887)의 산소를 옮길 때 (안산-수원간 고속도로 건설로 혈맥이 끊겼기 때문에) 공주에서 초빙해 온 풍수가 오 아무개가 “수십 대를 이어가면서 보전해야 할 자리입니다. 재벌 정 아무개의 재산과 바꾸어도 아까울 만큼 좋은 자리입니다”라는 극찬을 남겼다고 한다. 또 유씨는 안채 뒤에 파 놓았던 방공호가 뒷산에서 흘러내린 정기를 끊어놓았다는 그의 말에 따라 이것을 메웠다고 한다.
경성당 사랑채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서쪽 끝에 한 칸의 누마루를 내어 지었다(사진 1-32 왼쪽). 누마루 뒤쪽에 각 한 칸씩의 방(작은사랑)과 마루가 있었으나, 몇 해 전 마루를 반으로 줄이는 대신 방을 그만큼 넓혔다. 이 방은 유씨의 막내아들(대학생)이 공부방으로 쓰는데, 서쪽 끝에 채광을 위해 세살문여닫이(94×108cm)를 달았다.


 

사진 1-33 경성당의 큰사랑 내부.
선비의 방다운 분위기가 감돈다.
사진 1-34 경성당의 안채.
전통 한옥의 옛스런 향기가 가득하다.

 


큰사랑과 툇마루 사이에는 두짝여닫이(57×130cm)와 미닫이가 설치되었고 동쪽 끝에는 벽장을 붙였는데, 벽장문은 네 짝으로(각각 69×133cm) 매화·난초·죽 등의 그림을 붙여 선비의 방다운 고졸한 분위기가 풍긴다(사진 1-33). 큰사랑 다음 칸은 본디 부엌이었으나 이곳에 보일러실을 꾸미고 전면의 툇마루에는 화장실을 두었다.
큰사랑 전면 상부에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의 현판(사진 1-31)과 유씨의 증조부(遠聲)가 썼다는 경성당기竟成堂記가 걸려 있다. 이 밖에 사랑채 기둥마다 걸려 있는 22개에 이르는 주련柱聯도 흥미롭다. 이 가운데 누마루에 걸린 3개의 주련만 소개한다(왼쪽부터).
“山高華帽峰下居簪纓之族村深覆釜谷中有鐘鼎之家(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 마을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
이것은 원성이 73세에 쓴 것으로 화모봉은 사랑채 건너편의 봉우리이다.
“宣廟賜牌之局寸土勿輿於他人(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성조<14대조의 아호가 星山이다>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해 나가라.)”
대문 옆의 방은 일꾼방으로 본디 전면에 큰사랑처럼 툇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방의 일부로 꾸몄다. 이 방 북쪽의 공간은 마루방으로 벼 4~5가마들이의 뒤주와 여러 연장들을 갈무리하였다.
마루방에서 북으로 1칸씩의 작은 광과 외양간, 그리고 2칸의 광으로 구성된 아래채가 이어달려 있어, 경성당의 안채·사랑채·아래채는 완전한 미음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채는 13년 전 안채와 함께 철거되고, 그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물러난 자리에 시멘트 건물 한 채가 들어섰다(2년 전). 이 건물의 아래칸(320×290cm)은 유씨의 작업실(그는 전각예술인으로, 대청의 주련도 선친의 글씨를 그가 새긴 것이다.)이고 윗간(295×290)은 창고이다. 안채는 13년 전에 새로 지었다. 초가였던 안채 부엌 서쪽으로 각 한 칸씩의 헛간과 뒷광이 이어달려 있고, 이에서 북으로 꺾여 역시 한 칸씩의 뒷방·뒷대문·안뒷간이 이어져 있다. 뒷광에는 김치·짠지 등이 담긴 독을 두었고, 뒷대문은 행랑 출입을 위한 것이다.
안채를 짓는 데 쓰인 재목은 서울 미아리와 종로구 당주동에 있던 헌 한옥의 것을 많이 썼고, 들보는 인천에서 수입목(미송)을 사서 대신하였다. 미아리의 헌 한옥은 37평 크기로 당시 600만 원에 사들였다. 공사를 맡은 목수가 이 집 외에도 평택 및 김포에도 공사를 벌여 놓은 까닭에 공기가 1년 8개월이나 걸렸고, 건축비도 평당 130만 원이나 들었다(현재의 안채는 30평이다). 이때 기와는 앞의 두 집 것을 그대로 썼으나 겨울에 터지는 등의 부작용이 많아 암키와·수키와를 한 장으로 구운 현대식 시멘트 기와로 바꾸어 덮었다.
대청 지붕틀은 무고주칠량無高柱七樑 형식으로 걸었으며, 전면에는 6짝의 분합문을 달았다. 새로 지은 안채와 재래식과의 다른 점은 건넌방 옆에 수세식 화장실을 붙인 점과 부엌을 입식으로 바꾼 점, 그리고 안방의 난방을 보일러식으로 개량한 점 등이다. 이 밖에 건넌방의 붙박이장도 종래의 한옥에는 없던 것이다. 안방 서측에는 툇마루가 달렸고 대청과의 사이에는 4짝의 미닫이를 붙였다(한 짝 크기 63×179cm). 부엌 천장에는 안방 쪽에서 드나드는 다락을 시설하였다. 건넌방 출입문도 안방 쪽처럼 4짝의 미닫이이지만, 가운데의 두 짝에는 띄살을 먹였다. 한편 부엌 남쪽에 부엌방을 들이고 그 뒤쪽에는 광을 만들었다.

 


사진 1-35 경성당 대청의 지붕틀.
무고주칠량 형식이다.
사진 1-36 경성당의 대청.
대청에서 안방 쪽을 바라본 것이다.

 


경성당에는 사랑채 동남쪽에 각 1칸씩의 잿간과 뒷간, 그리고 3칸의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따로 있었고, 노비들이 기거하던 4채의 행랑채가 있었다. 또 사랑마당 남쪽에 1백여 평에 이르는 넓은 연못이 있었으나 사랑채 누마루 곁에 있는 우물물이 줄어들어 급수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30여 년 전에 밭으로 만들었다.
이 집에서는 안채 뒤란에 터주와 업을 함께 모셔놓았는데, 해마다 음력 시월 초하루에서 사흘 사이의 하루를 골라 떡시루를 바친다. 떡 위에는 쌀이 담긴 주발을 놓고 가운데에 촛불을 박아 둔다. 이때 유씨는 재배만 올리고 비손은 하지 않는다. 집안 식구들은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나 이들 집지킴에 관심이 없어서 유씨 혼자 받든다고 한다. 왼쪽의 터줏가리에는 해마다 단지에 햅쌀을 갈아 넣으며, 업에는 이엉을 틀어 덧씌운다.


사진 1-
37 경성당의 터주와 업.

 

 

 

3) 명안공주 묘막
그림 1-9는 조선왕조 현종縣宗(1659~1674)의 셋째따님이자 숙종의 누이 동생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묘막墓幕으로 지은 집이다.
명안공주는 해주 오씨 가문의 17세손인 두인斗寅(1624~1689)의 셋째아들 태주泰周(1668~1716)와 1679년에 혼인하였으며, 그녀의 무덤을 안산시 사사동沙士洞에 쓰게 되자 그 부근에 이 집을 지은 것이다.

 

 


그림 1-9 명안공주 묘막의 평면도. 명안공주는 조선왕조 현종의 셋째 따님이자 숙종의 누이동생이다.

 

 

12살 때 부마로 뽑힌 태주는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조지서제조造紙暑提調를 지냈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나 왕실의 옥책玉冊·신판神板·유지幽誌 중에는 그가 쓴 것이 적잖다. 또한 시문에도 능해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태주의 부친인 두인은 공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로, 파주의 풍계사豊溪祠와 광주의 의열사義列祠, 안성의 덕봉서원德鳳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그리고 태주의 조부인 숙(1592~1634) 또한 문장이 뛰어났으며 경상도 및 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이 밖에 태주의 아들인 원瑗(1700~1740)은 승지와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명석하고 문장 또한 간결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태주의 손자 재순載純(1727~1792)과 5대 후손인 준영俊泳(생몰년 모름)과 6세손인 정근正根(1868~?) 등도 큰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이 같은 오씨 가문은 안산에서 대를 이어 살아오지 않은 듯하며, 현재 묘막은 다른 성씨(최씨)의 관리인이 돌보고 있으나 퇴락의 정도가 매우 심하다.
이 건물은 묘직이를 위해 지은 까닭에 기역자형 안채와 일자형 대문채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주추나 기둥, 마루의 가구架構 등의 형식을 보면 격식을 갖춰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기둥은 굵기가 22cm(가로×세로)에 이르며, 주춧돌 또한 사다리꼴로 반듯하게 다듬었다. 크기도 일반 주택의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어서 높이 46cm, 바닥 47×`42cm, 윗부분 39×40cm에 이른다. 그리고 댓돌 또한 일매지게 정성껏 다듬어 놓았다. 대청의 가구架構 형식도 들보 위에 짧은 동자주를 세우고 이 위에 다시 종보를 얹은 다음, 사다리꼴 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들 부재 가운데 들보와 종보가 상류가옥의 그것보다 크고 굵은 것은 물론이고, 치목治木 또한 빈틈없이 마감되었다. 안채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사진 1-38 명안공주 묘막의 주춧돌과 기둥.
지금은 퇴락했으나 당시는 제대로 격식을 갖춘 집이다.
대문채는 각 한 칸씩의 대문과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대문의 하인방은 무지개처럼 굽은 나무를 놓아서 드나들기 쉽도록 하였다. 대문채는 높이 1m쯤 되는 축대 위에 세워졌다. 좌우 양쪽의 방바닥에 마루를 깔고 두짝열개의 널문을 붙인 것을 보면, 이들 공간은 제기 따위의 기물을 보관하는 수납공간으로 이용한 것이 분명하다.
안채는 2칸의 안방과 4칸의 대청, 칸반의 건넌방, 2칸의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방과 마루 사이에는 세 짝의 세살문을 달고 뒤란 쪽으로는 같은 형식의 두짝문을 붙였다. 안방 북쪽의 반 칸은 벽을 치고 골방으로 썼을 것이다. 그리고 부엌 위쪽에 다락을 들였다.
대청 북벽 상부에 각 두 짝씩의 널창을 붙인 것은 매우 특이하다. 이들 창은 매우 작아서 채광이나 통풍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건넌방의 뒤창문이 이들보다 더 큰 점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부엌에서 마당 쪽으로는 두짝널문을, 뒤란 쪽에는 외여닫이를 달았다. 부엌 아래칸 서쪽에는 찬장을 놓았으며 오른쪽은 나뭇광으로 썼는데, 나뭇광의 안마당 쪽 벽에 네 짝의 세살창을 붙인 점도 눈을 끈다.
건넌방과 마루 사이에는 안방과 달리 두 짝의 세살문을 달았고, 전면의 누마루 사이에도 같은 형식의 문이 있다. 누마루 아래에는 일반 상류가옥처럼 부뚜막을 놓았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집은 대문채와 안채만으로 구성된 소규모 가옥이지만, 왕가 공주의 묘막으로 지었던 만큼 좋은 재목과 부재를 써서 격식을 갖추어 지었다는 점에서 18세기 상류가옥의 건축양식을 살피는 데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현재 폐가 상태에 있어 주거생활 등을 알 수 없으므로 매우 아쉽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묘막에는 명안공주 자신과 그의 아버지 현종, 그리고 오라버니이자 뒤에 임금이 된 숙종과 관련된 전적과 서화, 고문서, 생활용품 등 당시의 궁중생활을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유품들이 적잖이 보존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들은 1979년 애석하게도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 일부가 강릉시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이 유물들이 귀중한 것임은 이 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45점이 1995년에 보물 1220호로 지정된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되는 터이다.
이러한 귀중품들이 안산시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아쉬운 일이지만, 그나마 한 박물관에 적잖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보물이 45점에 이른다면 이것만으로도 한 박물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에 충분한 양이다. 실제로 궁궐의 유물을, 그것도 한 시대의 일괄 유물을 갖춘 박물관은 강릉시립박물관 한 곳뿐이다(문화체육부에 딸린 궁중유물전시관의 유품은 여러 시대의 것을 모은 것이다).

사진 1-39 묘막대청의 가구.
부재가 상류가옥보다 우수하다.

강릉시립박물관에서는 1996년 7월에 개관 4주년을 맞아 ‘명안공주 관련 유물 특별전’을 마련하는 한편 도록을 내었는데, 이들 유품들이 지닌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들은 조선 시대 초기 후반에서 중기에 이르는 여섯 임금의 유품들, 즉 선조로부터 시작해서 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 등 6대를 이어 내려왔다(광해군 제외)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큰 불행을 겪었고, 그 이후 점차 힘이 되살아나 숙종과 영조 대에는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민문학과 예술이 꽃피는, 문자 그대로 조선 시대 문화의 발흥기를 맞았다. 따라서 앞의 여섯 임금이 재위한 시기는 격동기와 번영기가 이어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들 유품이 지니는 가치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들 임금의 편지들 가운데는 현종과 그의 비인 명성왕후明成王后, 숙종, 그리고 명안공주의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인간적인 성품을 드러내는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현종이 남긴 한글 편지 6점 가운데 3점은 효자로 이름난 그가 눈병 치료를 위해 온천에서 휴양 중에 문안편지를 올린 것이고, 나머지 3점은 딸(명안공주)에 대한 애정이 듬뿍 실린 편지로서 임금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딸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이 절절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명성왕후의 한글 편지 3점도 몸이 약한 딸을 걱정하는 애틋한 내용이 전부이다. 어린 딸 둘(명선·명혜)을 일찍 잃었던 임금 내외는 고명딸인 명안공주에게 각별한 관심과 걱정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숙종과 명안공주의 각 1점씩의 한글 편지는 오라비와 누이가 주고받은 편지이다. 위에 소개한 전체 11점의 한글 편지에는 한 가족이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매우 큰 흥미를 자아낸다.
셋째, 이들 11점의 한글 편지는 조선 시대 한글의 변화·발전을 연구함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는 점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 시대 한 가족이 남긴 이만한 양의 한글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에 더욱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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