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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키라佐々木晃(이야기) /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郎(기록)

 

 

처음에

"만드는" 작업은 인류 고유의 작업이다. 만드는 것은 식재만 잔뜩 있는 게 아니라 도구나 "장소" 같은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술에 관계된 것도 있어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유일한 양조장인 사사키 주조사의 사장인 사사키 아키라 씨에게 "술 만들기"를 들었다. "물건 만들기"란 것에 학문은 어떻게 공헌해야 할까? 그러한 입장에서 읽어 나아가 주시길 바란다. 좌담회에서는 질의응답도 있었는데 그를 포함해 적어 보았다.

 

 

술이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이 술을 따르거나 따라주거나 하면서 친해져 간다. 그러한 "장"을 연출하는 것이다. 단순히 알코올 음료만은 아니다. 그리고 술은 먹을거리와 함께 있다. 일본주는 일정식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술 만들기의 포인트

계절이 중요. 가을에 햅쌀이 수확되어, 겨울에 술 만들기가 행해진다. 혹한 무렵이 가장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을 숙성시켜 여름에는 여름의, 가을에는 가을의 술이 된다. 그러나 여름에 술을 담그는 일은 없고, 좋은 술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조자(술 만드는 장인)는 이전에는 겨울에만 고용했다. 술 만들기가 겨울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방법이 온도 관리가 편하기 때문이다. 작은 양조장에서는 설비투자가 꽤 어렵고, 자칫하면 온도가 오르기 쉬워 술 만들기는 겨울 쪽이 하기 쉽다. 

양조장의 대부분은 중소기업. 그래서 근대 공장의 첨단기술 생산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것이 맥주와 다른점. 중소기업은 기술로 승부한다. 

 

 

술은 기호품 취급인가?

흔히 술은 기호품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 하지만 겨울의 양조자에게는 농한기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업대책의 의미도 있다.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술의 맛이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사키 주조에서는 소비자가 아니라, 상품을 도매하는 술집을 보고 있다. 흔히 영성용 술 등이라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용기로 차별화하거나 하지만 내용물을 바꾸는 일은 하지 않는다. 

 

교토의 양조장으로서 주의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교토에 있다든가, 교토 시내에 있는 양조장이라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는다. 사사키 주조가 첫 울음소리를 냈던 1893년에는 시내에 131곳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뒤 다른 곳은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위에 구애되지 않고, 사사키 주조는 어디까지나 기술로 승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주류 종합연구소의 전국 신주감평회에서 2014년 입상한 것은 그 노력의 결과라 생각한다. 

일본주라고 한 마디로 말하더라도 오랜 기간 생각하자면, 도구와 기술, 지식에 대한 여러 가지. 즉, 말로 표현하자면 "고르지 않음"일 것이다.  양조자의 경험과 감의 세계였다. 

 

 

일본의 식문화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바라는 바

예를 들면, 무엇무엇은 도움이 된다, 뭐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등의 공리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 좁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런저런 것을 널리 배우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로 "만든다"라고 해도 만드는 것도, 만드는 사람도, 그 과정도 여러 가지이다. 사사키 씨는 술을 만드는 작업에 대해 무언가에 거리낌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제조의 배경에 있는 기술이나 경험, 감이라는 '경험지'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만드는"작업에는 이러한 체계화된 기술이나 경험지의 집적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물건'에 어떠한 기술이나 경험지가 있는지를 고려하며 읽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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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에 만연한 '상호불신 문화'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해 분석한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거 한국도 해당하는 것 같아서 찌릿찌릿하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정확히 옮기지는 못하겠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악명 높은 노예 무역이 횡행했다. 그런데 노예 무역 말기가 되면, 유럽인에 의해서만이 같은 마을의 사람이나 이웃, 게다가 친척과 가족에 의해서도 노예가 되어 경매에 부쳐졌다고 한다. 어떤 방법을 통해 노예가 조달되었는지에 대한 체계적 자료는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지만, 1840년 어느 독일인 선교사가 시에라리온에서 거래되는 노예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자료가 있다고 한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144명의 노예 가운데 40%가 납치, 24%가 전쟁, 20%가 친척과 친구에 의해, 16%는 재판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마지막 두 방식으로, 이것이 바로 '지역사회 내부의 사람'에 의해 노예화가 자행된 결과이다. 이러한 가까운 사람에 의한 배신이 시에라리온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노예 공급지에서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나 게임 이론의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신이 최적의 생존전략이 되며, 사회적으로는 상호불신이 이른바 '균형' 상태가 되어 안정화된다. 일단 그러한 균형 상태에 이르면, 거기에 강한 외부 충격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 상태는 변화하지 않으며 지속되어, 그것이 결국 '문화'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는 세대를 넘어 계승되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연구는 이처럼 노예 무역의 결과 지역사회 내부에서도 '노예 사냥'이 행해졌고,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며 경험적으로 정착된 상호불신이 지금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널리 관찰되는 것임을 입증한 것이다.



조선 말기의 극도로 혼란한 상황, 일제강점기의 민족 탄압, 한국전쟁의 동족 상잔, 이후 군부독재 시기라는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는 어떤 크나큰 상처가 남은 것일까?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문다고 하지만 그 흉터까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명목상 문민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부터 조금씩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이제 불과 30년 정도 되었을 뿐이다. 이 상처가 잘 아물 수 있도록 관리를 잘해야겠다. 아직도 상처가 제대로 아물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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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국기행에서는 남해의 갯벌에서 쏙을 잡는 할머니들 이야기가 나왔다. 

http://www.ebs.co.kr/tv/show?prodId=7225&lectId=20113905&fbclid=IwAR0iCw9mJtJpJ8wEHTgQGuEqEO4IP1FSEMDxNxVfOgSmikYVhvMzqWQu1nM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건 그곳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그 안에서 살아온 할머니들의 삶이다. 

산과 들, 바다와 갯벌이 모두 한 곳에서 이어져 있는 정말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할머니들은 어떤 삶의 지식을 쌓고 지혜를 얻어 왔을까? 


시간과 자금의 여유만 있다가 가서 1-2년 살며 엿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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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태학: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의 생태학









25장 먹을거리 체계의 재구성에서 지역사회와 문화


1976년 출간된 급진적 농업Radical Agriculture에서 리차드 메릴Richard Merrill은 "문화를 다시 농업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썼다(Merrill 1976). 그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진행중이던 농업이 농기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부정적 영향에 주의를 환기시킨 초기의 목소리였다. 


메릴은 문화의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장난해, 토양의 경운과 관련된 의미를 우리가 인간의 문화라는 문구를 사용할 때 염두에 두는 의미로 대체했다. 이러한 후자의 의미에서, 문화는 인간의 지식과 신념, 행위가 통합된 체계이다. 그래서 메릴은 근본적으로 농업에서 인간성이 빠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때 농지의 청지기 성향을 지원했던가치와 행위, 사회적 관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40년이 지나, 메릴의 항변은 그 어느 때보다 유의미하다. 먹을거리 생산의 산업화를 추동한 농기업 모델은 많은 조치에 의해 두드러지게 성공적이었지만,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경제적 관계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농민을 농산물의 원천으로, 농업노동자를 노동 비용으로, 먹을거리의 구매자와 섭취자를 소비자가 되게 만들어, 우리의 먹을거리 체계에 거주하는 실재 사람들이 자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게 없이 조직된 체계에서 돈이란 매개를 통해서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보증했다.


메릴의 이야기가 제시한 것처럼, 농업은 인간의 문화에서 그 기반을 상실하지 않았다. 문제는 산업국에서 먹을거리의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생겨난 새로운 신념과 행위, 관계가 지속가능성에 큰 걸림돌이 될 뿐만 아니라 공중 보건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먹는 먹을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들의 선택이 농업생태계와 환경, 농민과 농업노동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한다. 웬델 베리에 의하면 "먹는 것이 농사짓는 일"이지만, 소비자들은 자신의 배고픔에 만족감만 주려고 하는 것처럼 먹는다. 아니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하거나 잘 충족되지 못한 다른 근본적인 필요를 보완하는 것 같다. 생산의 측면에서, 농민은 소비자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키고, 자신에게 선택권을 거의 남기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가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농기업의 규칙을 따르게 하는 체계에 점점 더 휘둘리고 있다.


지속가능하기 위하여, 농업은 자신을 파괴하는 걸 돕기보다는 지속가능한 농법을 촉진하는 "문화"로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문화를 다시 농업에 넣으려면, 우리는 농장과 밥상 사이의 연결을 다시 확립하고, 경제적인 것 이상으로 먹을거리 주위에 인간 관계를 형성하며, 협소한 사리의 추구를 넘어 먹을거리 소비와 관련된 가치를 증진시켜야 한다. 이것이 농업생태학의 사회 변화 측면을 정의하는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재배하는 일과 먹는 일 사이의 격차를 넓히기


수천 년 전 인간 문화가 주로 수렵채집에 의존했을 때, 먹을거리와 사람들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아마 인식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개인적이었을 것이다. 먹는 일은 반드시 지역의 환경에 직접적으로 기초를 두고, 각각의 개인은 모든 먹을거리들이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먹을거리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았다. 실제로 당신이 스스로 먹을거리를 모으거나 덫으로 잡거나 죽이지 않았다면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그렇게 했다. 먹을거리에 포함된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 문화의 근저였다. 


농업의 출현과 함께 먹을거리와 인간의 관계는 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농경사회는 노동의 전문화를 발전시켰다. 인구의 일부는 나머지 사람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먹을거리를 재배할 수 있었고, "자유로운" 일부 사람들은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먹을거리의 생산과 그 소비 사이에 분리가 일어난 첫 단계였는데, 몇 천 년 동안 그러한 분리는 극심하지 않았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먹을거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고, 그걸 생산한 사람에게서 직접 얻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지역의 날씨가 먹을거리의 공급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등을 이해했다. 먹을거리는 반드시 지역적이고, 각 장소의 특수성을 나타냈다.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먹을거리가 길들여졌기에(15장 참조), 식사와 소비 양식, 요리법 등에서 놀랄 만한 다양성이 발생했다(그림25.1).



그림25.1 멕시코 킨타나 로의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ia Morelos에 있는 전통적인 마야의 텃밭. 과일, 채소, 향신료, 약용 식물 및 심지어 닭, 오리와 토종 돼지 같은 작은 가축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류의 자급용 작물이 텃밭에서 재배된다. 자기 가족과 지역사회를 위해 먹을거리를 재배하고 사육하는 일은 전 세계에서 일상적인 일이었다. 현재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농촌 인구는 점점 먼 거리의 시장을 위한 생산에 휘말리며 자급용 농업은 이례적인 일이 되었다. 




농경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져 도시가 되고 더 광범위한 지역들 사이의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재배하는 일과 먹는 일 사이의 지리적, 생태적, 경제적, 사회적 거리가 훨씬 확장되었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대양을 가로지를 수 있을정도로 발전하자, 길들여진 종들은 그 원산지의 경계를 넘어 빠르게 퍼졌다. 옥수수와 감자는 구세계로 왔고, 벼와 밀은 신세계로 갔다. 고구마는 아시아의 따뜻한 지역으로 퍼졌다. 그와 함께 곡물과 콩류, 섬유, 가죽, 설탕, 담배 및 기타 농산물의 무역이 급속히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의 우주가 확장됨에 따라, 문화는그들의 식사와 그들이 소비하는 먹을거리의 양과 질에서 구분이 모호해졌다. 이와 함께 복잡한 분배 기관이 재배자와 섭취자 사이로 점차 비집고 들어갔다. 식료품은 농지부터 밥상까지 길어진 여정을 따라 상인에게서 중개상과 소매상에게 전달되며 그 가격과 사회적 의미는 비인격적인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과정은 이전의 장에서 설명한 기업이 지배하는 세계적 먹을거리 체계를 생산하기 위해 오늘날까지 계속되었다. 차츰 먹을거리는 더욱더 세계적 규모의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그와 함께 먹을거리의 재배자와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 숫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해, 그들 사이의 사회적 거리만이 아니라지리적 거리도 넓어졌다. 이러한 역학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먹는다는 행위가 먹을거리를 재배한다는 기본적인 농업의 행위와 완전히 결별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이 상황은 겉으로는 매력적이다. 세계의 더 풍족한 사람들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놀랄 만큼 풍요로운 식료품을 즐길 수 있다(하지만 그것이 여러 결과를 불러온다). 가장 주목할 만한 건, 그것이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장 커다란 장벽 가운데 하나로 서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슈퍼마켓

먹을거리의 선택과 가용성이란 관점에서, 세계 많은 지역의 소비자들은 결코 더 나아진 적이 없다. 원료는 저렴한 가격에 농부에게 구매되어, 그들을 만든 농산물과 거의 닮지 않고 전 세계에 유통되는 가공, 포장, 보존 식료품 등으로 전환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편리하고 입맛을 만족시키는 먹을거리의 높은 가용성을 게걸스럽게 받아들인다. 세계의 인구가 점점 더 도시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가처분소득을 얻으면서, 육류와 생선을 더 많이 먹고자 하며, 현재 시장에 출시된 다양한 가공식품과 즉석식품 등을 더 많이 먹고 싶어한다. 세계 먹을거리 체계는 특히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먹을거리가 가장 이윤이 많은 것이기에 기꺼이 기뻐한다. 


하지만 다양하고, 입맛을 즐겁게 하며, 편리한 먹을거리에 대한 수요를 수용하고 장려하려고 설계된 세계 먹을거리 체계는 소비자들에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먹을거리가 신선하지 않다. 우리가 먹는 먹을거리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오기까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에, 특별히 신선하지 않다. 비행기나 트럭으로 빠르게 운송되고 냉장보관된 농산물조차 익기 전에 수확된다.  

먹을거리가 영양가가 적다. 운송과 저장을 견디는 일이 주요 고려사항일 때, 종자를 생산하는 육종(또는 유전공학) 과정이 맛과 영양가 함량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장거리 운송과 저장을 견뎌야 하는 먹을거리는 양분을 제거하는 경향이 있는 다양한 가공 -삶기, 건조, 냉동, 진공포장, 저온살균, 방사선- 을 거치게 된다. 

먹을거리가 건강하지 않다. 포장식품과 가공식품은 비만과 암, 기타 건강 문제와 관련된 방부제와 기타 다양한첨가물 -소금, 설탕, 지방 같은- 이 들어간다. 대부분의 농산물은 검출할 수 있는 수준의 농약이 함유되어 있다.

먹을거리가 표준화되고 균질화된다. 요리와 식사의 지역적, 문화적 차이는 먹을거리 공급의 균질화와 함께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패스트푸드 체인은 도쿄에서 구매한 햄버거와 시카고에서 구입한 햄버거가 거의 동일한 걸 보증한다. 이것과 관련된 것은 장소에 기반한 정체성의 상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를 정의하는 지역의 먹을거리는 마케팅 도구로서 상실되거나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먹을거리가 의미를 잃는다. 먹을거리 소비가 우리의 밥상에 그것이 오르는 과정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우리가 우리의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사람 및 먹을거리의 존재에 있는 모든 생물학적, 사회적 사실과의 모든 연결을 잃으면, 먹는 일은 인간 종의 오래된 기원 이후부터 그것이 가지고 있던 많은 맥락과 의미가 벗겨진다.  







격리된 소비자


산업국과 개발도상국의 수많은 소비자들은 모두 별 생각없이 세계적 슈퍼마켓의 절충안을 받아들인다(그들은 상충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먹을거리가 어디에서 오거나 어떻게 재배되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선택이 어떻게 천연자원의 기반을 악화시키는지 아무 이해가 없으며, 자신의 식습관이 어떻게 건강 문제로 이어지고 수명을 단축시키는지에 대한 자각이 거의 없는 채로 먹는다. 


소비자가 이들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들이 부분적으로 단순한 소비자에 머물러 있는 지위에서 기인한다. 생산과 유통 과정으로부터 격리된 소비자들은 먹을거리 체계의 작동 및 자신의 식사와 먹을거리 선택이 환경과 자신의 신체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더 많이 의식할 수 있게 하는 정보와 지식에서도 격리된다. 그런 장소에서 소비자는 생활방식으로 먹는 일에 집착하게 하고, 소비자의 선택을 미화하며, 그들 앞에 식료품을 늘어놓는 데에 관련된 상품화를 덮어 감추는 광고에 둘러싸여 있다. 농기업 회사들은 기름진 음식과 단맛에 대한 타고난 인간의 욕구 및 더 높은 지위와 생활 수준을 쫓는 사람들이 채택하는 부산한 생활방식을 이용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의 미각과 행위를 조작하는 데 막대한 금액을 소비한다. 그 결과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먹을거리 제품과 소비 행위에 집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거리의 기원과 슈퍼마켓 진열대까지의 경로를 체계적으로 지워 버리는 것이다(그림25.2).



그림25.2 전형적인 슈퍼마켓의 손님. 소비자는 여러 먹을거리의 선택권을 갖지만, 상표로 전달되는 유일한 정보는 가격이다. 기원, 생산 조건, 수확일, 이윤에 대한 농민의 몫, 기타 사실들은 알려지지 않는다. 




소비자 격리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영양상의 필요를 만족시켜 먹는 일로부터 변화하는 것이다.  먹는 걸 즐거운 일로 만들고 기름기와 염분, 당도가 높은 미각을 만족시키는 먹을거리를 선사하는 문화적 맥락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칼로리를 섭취한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2형 당뇨병과 심장병, 뇌졸증 등 관련 질환과 함께 비만이 문제가 된 건 놀랍지 않다. 2010년 미국의 20세 이상 인구 가운데 35.7%는 비만이고, 다른6.3%는 초고도비만이며, 적어도 33%는 과체중이다(Fryar et al. 2012). 이 통계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비만율이 거의 2배가 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WHO 2013). 부분적으로는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생활방식이 원인으로 지적되지만, 비만이 증가한 주요 이유는 당분과 지방이 많은 에너지 밀도가 높은 가공식품의 섭취가 증가한 데 있다. 






소외된 농민

먹을거리를 위한 다양하고 역동적 시장 구조의 발달과 식사의 변화에 따라 농민이 충분한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농민 스스로는 농업 부문이 변함에 따라 점점 뒤쳐지며, 그 행운을 같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일부 개별적 농민은 실제로 매우 잘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벅찬 과제에 직면해 있다. 세계적으로 추세는 산업적 먹을거리 체계의 지시에 따라 운영되는 더욱더 대규모의 영농 방식으로 가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대지의 지킴이라 여겨지던 농민의 역할은 줄어들고 있다. 


농사의 소외는 농촌 지역사회에서 심각한 사회적, 인구학적 결과를 가져온다. 1장에서 봤듯이, 농촌의 농장 지역사회는 세계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직업과 생계, 전망에서 예전에 번성하던 사람들의 집단이 오늘날 점점 고령화되고 인구가 줄고 있다. 미국에서는 1% 미만의 인구가 전업농을 구성하고, 그 가운데 65세 이상의 농민이 35세 이하의 농민보다 거의 7배 많다(USDA 2007).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점점 버티기 힘든 상황에 내몰리거나 상상이든 실제이든 도시의 기회에 매료된 엄청난 수의 농민과 그 가족이 농촌 지역과 자신의 농장을 떠나고 있다. 


물론 감소하고 있는 농민의 숫자가 농업 부문의 중요성이 줄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먹어야하며, 매년 부양해야 할 7000만 개 이상의 입이 있다. 현재 세계의 농업에서 농민의 관여가 줄어들면서 더 많은 양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도록 하는 건 농장의 현대화이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사람을 트랙터로 대체하는 것이다. 풍부한 양의 먹을거리를 생산하고자, 산업 규모의 운영은 사업 관리자, 기술자, 농민이 아닌 저임금 농업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개발도상국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가는 사람들의 이주와 그에 수반되는 농사 운영 규모의 증가는 미국과 유럽에서보다 뒤늦게 시작되었다. 이것이 세계의 여러 국가에 아직도 매우 많은 농촌 인구가 있으며, 세계 인구의 절반이 여전히 자신의 생계를 위해 농사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남아시아의 많은 지역 같은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70%이상의 인구가 농민이며, 이 지역에서는 농업이 전체 경제활동의 절반을 차지한다(FAO 2013b). 그들이 수입 식품에 대한 증가하는 의존도를 상쇄할 수 있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의 농촌 인구는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기반 위에서 식량안보의 조건을 개선시킬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을 가지고 있다. 






농업 부문의 집중과 통합

농민은 언제나 불리한 날씨, 게걸스레 먹는 해충, 예상치 못한 작물 시장과 씨름해야 했다. 하지만 산업형 농업의부상으로 극복하기 훨씬 어려운 추가적인 위협이 도입되었다. 농기업에 의한 먹을거리 생산과 농업 자본의 포획은 더욱더 소규모 농민을 분명히 불리한 위치로 몰아넣고 있다. 


소비자의 먹을거리 지출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먹을거리 체계의 가공, 운송, 마케팅 측면으로 가고 농민에게는 먹을거리 지출을 소비할 때마다 16센트 미만이 돌아간다고 한 1장의 논의를 떠올려보라. 이 자체가 농사란 직업이 쇠퇴한 주요 이유이다. 기본적인 경제적 현실에 따라 농민들은 거의 선택의 여지 없이 "더 커지거나 나가야 한다." 하지만 가공, 포장, 운송, 마케팅의 중간 상인에게 가는 소비자의 먹을거리 지출 가운데 84% 이상이 우리의 먹을거리 체계가 얼마나 변화했는지, 그리고 현재 얼마나 철저히 소규모 농민에게 불리하도록 쌓여 있는지를 나타낸다(1917년에는 이 몫이 50% 미만이었음).  


농업의 "마케팅" 부문에 많은 이윤이 가면서 가공, 중개, 운송, 포장, 마케팅 기능의 대부분이 다국적 기업과 그들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회사에 의해 수행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들 대기업은 수직계열화를 최대한 활용했다(종자부터 운송과 가공, 유통,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먹을거리 체계의 사슬의 모든 연결고리에있는 회사를 소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회사의 전반적인 숫자가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수직계열화와 결합된 이러한 경제적 집중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농기업 회사들이 국가 경제의 농업 부문대부분을 지배하게 만든다(표25.1 참조).



제품이나 활동

모든 기업의 비율

이 기업이 통제하는 것

모든 종자

상위 6개 기업

상업적 종자 시장의 60%

채소 종자

5개 기업

세계 시장의 75%

곡식

2개 회사(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 카길)

세계 무역의 75-80%

밀가루

3개 대형 제분업체

미국 시장의 55%

커피

4개 대형 기업

세계 무역의 50%

3개 기업

세계 유통의 80%

코코아와 파인애플

소수의 다국적 기업

세계 무역의 90%

맥주

2개 기업

미국 시장의 75%

포도주

6개 기업

미국 시장의 64%

청량음료

3개 기업 미국 시장의 89% 

바나나

소수의 다국적 기업 세계 무역의 80% 

설탕

소수의 다국적 기업 세계 무역의 60% 

닭고기 

(구이용)

1개 기업

4개 기업 

중앙아메리카 구매의 60%
미국 시장의 59% 

칠면조

4개 기업 미국 시장의 51% 

소고기

4개 기업 

미국 포장육의 85% 

우유

상위 4개 기업 세계 가공의 43% 

동물 사료

3개 기업 세계 생산의 대부분 

식료품 소매

상위 4개 식료품 체인 미국 판매의 36% 

농약

10개 기업 세계 시장의 82% 

표25.1 농업 부문에서 집중의 사례

출처: Halweil, B., Eat Here: Reclaiming Homegrown Pleasures in a Global Supermarket, A WorldWatch Book, Norton, New York, 2004, p. 47; Hendrickson, M. and Heffernan, W., Concentration of Agricultural Markets, 2007, Department of Rural Sociology, University of Missouri, Columbia, MO, http://www. foodcircles.missouri.edu/07contable.pdf (visited February 1, 2014), 2007; Ward, C.E., Choices 25(2), 1–14, 2010; Howard, P.H., Phillip H. Howard homepage, https://www.msu.edu/~howardp/ index.html (visited February 1, 2014), 2014. 에서 고침





그러므로 농민은 사실상 농업의 과점에 직면해 있다. 예를 들어, 내년의 작물을 위해 종자를 구매하는 미국 중서부의 일반적인 옥수수 농민을 고려해보자. 그 농민은 해당 지역의 유일한 옥수수 구매자인 다국적 기업이 협력 관계에 있는 또 다른 대기업에서 제공하는 유일한 옥수수 품종의 종자를 구매하는 체계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어떤 종자를 구매할지, 누구에게 그걸 구매할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생산물 담보대출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는 은행 역시 다국적 기업의 목록 가운데 일부이며, 아마 농민에게 사용할 종자의 품종과 똑같은 요구사항으로 다국적 기업이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기업의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도록 매우 강하게 추천하거나 요구할 것이다. 농민이 일단 옥수수를 재배하여 고정 가격으로 다국적 기업에게 팔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 또는 그녀는 경매에서 판매하기 위해 돼지에게 옥수수를 먹이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다국적 기업은 돼지에도 입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농민이 포기하고 옥수수 말고 다른 작물을 심는다면 그 또는 그녀는 먹을거리 "카르텔"의 체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다른 작물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Halweil 2004). 


농민의 산물이 수직계열화된 다국적 기업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 시장의 상품이 되는 체계에서 소규모 또는 가족농의 농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농민들은 더욱더 팔려 나가게 된다. 그들의 토지는 개발업자나 체계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 대규모 농민들이 열심히 사들인다. 


체계에 "적응하는" 한 가지 공통된 방법은 시장에서 일반적인 인수와 합병으로 형성된 더욱 큰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재배하는 것이다. 2007년의 농업총조사의 자료를 이용한 미국 농무부 경제연구서비스는 돼지 68%와 가금류 90%를 포함하여 미국의 농업 산출 가운데 40% 이상이 계약을 맺고 생산되었음을 밝혔다(O’Donoghue et al. 2011).  여기에는 농민이 유전자변형 종자를 심으려고 서명해야 하는 계약은 포함되지 않았다(15장 참조). 먹을거리 체계의 통제가 중앙집권화되면, 농민은 근본적으로 상품 체인의 고용된 일꾼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산출을 뽑아내는 데 관심이 있는 멀리 있는 기업들이 관리하는 농장과 맞닥뜨린다.  


개발도상국에서 농민들은 원거리 시장으로 수출하여 자신의 산물을 판매할 기회에서 배제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전통적인 지역 시장의 외부에서 온 값싸고 많은 보조금을 받은 수입 먹을거리의 이중 충격에 더욱더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 시장의 체계가 약하고 국가의 농업 연구 또는 진흥사업에서 받는 지원이 거의 없어서, 소농들은 농사로 생존할 수 있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장려책이나 기회가 별로 없다. 이런 상황에 내재된 역설은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인 약 8억5천만 명이 농촌과 농업 지역사회에 있다는 점이다. 가능하다면 시장을 위해 생산하라는 압력이 추가되고 그 노력에 대해 불공정한 보답을 얻는다면, 농민은 더 많은 소득을 가져오고자 시도하기 위하여 더 많은 환금작물을 심도록 압력을 받는다. 지역의 소비와 시장을 위해 사용되던 토지와 작물이 포기되고, 가끔 그러듯이 수출용 작물의 가격이 급락하면 그들에게는 몇 가지 선택권만 남는다(그림25.3). 


그림25.3 한대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던 코스타리카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에서 재배되고 있는 파인애플 대규모 단작지. 과일은 다국적 기업이 농지부터 밥상까지 대부분의 단계를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수직계열화된 상품 체인을 통해 수출될 것이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결과

방금 설명한 먹을거리 체계 -생산 과정에서 완전히 격리된 소비자를 위한 세계 시장의 상품으로서 대규모 농업생태계에서 먹을거리가 재배되는- 지속가능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장에서 기술한 오늘날의 산업형 농업의 모든 지속불가능한 수많은 관행 -대규모 단작, 집중적 경운, 외부 투입재에 대한 의존, 하이브리드 종자와 유전자변형 종자의 파종 등등- 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먹을거리 체계를 잘 이용하고 있기에 존재한다. 먹을거리가 단순한 상품이며 그걸 생산하는 유일한 목표가 이윤의 추출이라면, 지속불가능한 관행이 번창한다. 농장은 더커지고, 생산의 산업적 방식이 지배하며, 더 지속가능한 소규모 전통적이고 농생태학에 기반한 농법은 소외된다. 


그 결과, 태양 에너지를 변형시키고, 양분을 이동시키고, 구성원 개체군의 균형을 이루며, 시간을 통해 동적 평형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조절 체계였던 것이 재생할 수 없는 화석연료 에너지와 합성 화학비료 투입재 및 외부의 개체군 조정 관행에 의존하는 관리 집약적 체계가 되었다. 관행적인 지혜에 의하면, 농업의 현대화와 대규모 농사는 먹을거리 체계의 효율성을 개선한다. 더 큰 농장이 더 낮은 경제적 비용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 생산과 농기계의 비용은 더 넓은 면적에 분산시키고, 투입재는 대량 요금으로 구매하며, 대출은 더 낮은 이자로 협상할 수 있다.  농업이 더 자본 집약적으로 변하면서 그러한 이점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 전체를통해 보았듯이, 규모가 너무 커지면 농장에 있는 지속가능성의 생태학적 요소 대부분은 상실되거나 위태로워진다. 


소규모 농민들은 자신의 농장이 기능하는 천연자원 기반의 훌륭한 지킴이이다. 그들은 토양, 날씨, 토종, 비작물 식물, 수분매개자, 지역의 토양 개량, 생태계 특성, 지역사회의 필요 등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지닌 유일한 존재이다. 산업적 규모의 농사가 발생시키는 생태적 비용이 고려되면,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농장에서 작물이 재배될 때 많은 작물의 경우 실제 생산비가 더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비용 계산은 산업적 체계의 일부가 아니기에 소규모 농민은 손해를 본다. 그들이 자신의 농장을 떠나면, 그들의 지식과 지킴이의 가치는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지속가능성은 소규모 농장과 가족농 농장의 숫자가 단순히 감소하는 데에서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만, 그러한 숫자의 감소는 간접적 영향도 준다. 농촌 지역사회의 경제가 쇠퇴하면, 그들의 사회적 구조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흐트러짐은 많은 저자의 유력한 저술에 기록되어 있다(예, Wendell Berry, Gene Logsdon, Donald Worster, Wes Jackson). 삶의 방식이 단지 생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을 때, 존재하고 행동하는 많은이유가 상실된다. 한 개인이 상품 체인의 연결고리에 지나지 않으며 활기차고 상호작용을 하는 건강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고 느낄 때, 쇠퇴의 지표가 나타난다. 빈곤, 범죄, 고등학교 중퇴율, 여성과 아동 학대, 정신적 스트레스, 약물 남용 -모두 사회 장애의 징후- 등은 곧 붐비는 도시 지역과 유사한 수준에 접근한다. 그 결과는 농민과 그들의 지역사회, 그들이 살고 있는 경관에 영향을 미쳐 사회적이기도 하면서 생태적이다. 농민이 더 이상 자극과 염원, 또는 대지의 좋은 지킴이가 될 능력을 갖지 못하면, 생태적 악화가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지속가능하게 먹기


일반적으로 소비자는 먹을거리의 재배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먹을거리 체계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해 거의 모르며, 광고가 자신의 먹는 일과 먹을거리 구매 선택을 구체화하는 정도를 대개 인식하지 못하지만,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의 불운한 노리개는 아니다. 먹을거리의 섭취자로서 소비자는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에 의해 확립된 거푸집에서 벗어나는 방식을 통해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다르게 먹기 위해 선택할 수 있다. 주류의 식사가 생태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정보가 더 널리 퍼지고,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에 대한 실질적 대안들이 개발되고 확산되면서 더욱더 쉬워지고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우리가 먹는 방법을 바꾸는 일은 먹을거리 체계를 더 지속가능하고 더 공정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핵심 부분이다.이는 두 가지 뚜렷하지만 관련된 방식에서 그러하다. 첫째, 간단히 지구는 90억의 인구가 모두 미국인처럼 먹고자 하는 걸 지원할 수 없다. 사실, 그렇게 하는 데 가까이 갈 수조차 없어 지속가능한 먹기는 생태적으로 필수적이다. 둘째, 지속가능한 먹기는 먹을거리 체계에 피드백 효과를 가져온다. 먹을거리 체계에 변화를 위한 압력을 가하고, 더 지속가능한 대안을 성장시키고 지원하도록 한다. 이른 의미에서, 지속가능하게 먹는 일은 먹을거리 체계의 변화를 유발하는 풀뿌리 방식의 종류이다. 






식사의 추세

수십 년 동안 산업국의 소비자들은 지속불가능한 식사를 했다. 많은 양의 동물성 먹을거리, 가공식품, 농장에서 밥상까지 먼 거리를 이동한 먹을거리를 먹으면서 1장에서 설명된 엄청난 화석연료에 기반한 에너지에 대한 보조금, 가축 사료의 재배를 위한 소중한 토지의 이용, 상품 규모의 생산, 귀중한 수자원의 남용, 환경오염 등을 수반하는 산업형 농업의 여러 관행을 지원했다. 개발도상국의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식사를 바란다는 건 놀랍지 않다. 세계화된 먹을거리 체계의 범위가 넓어지고, 전 세계 소비자들의 시장과 상상을 포획함에 따라,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도시화된 중산층의 소득이 상승함에 따라, 전 세계의 식사 양식은 더욱더 지속불가능해지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육류, 기름, 물고기, 달걀, 유제품의 소비량이 이전에는 제한되었던 곳에서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전체 육류 소비는 1990-2009년 사이 2배 이상(25.7kg/1인당/1년에서 58.3kg/1인당/1년)이 되고, 우유 소비는 같은 기간 6배(5.9kg/1인당/1년에서 29.8kg/1인당/1년) 증가했다(FAOSTAT 2014)(그림25.4). 비록 산업국에서 가장 많은 생태적 비용을 가진 먹을거리의 소비가 더 이상 크게 증가하지는 않았지만(일부는 감소하고 있음), 가까운 미래에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달성할 개발도상국의 엄청난 인구 규모는 그러한 먹을거리의 세계적 소비와 수요가 극적으로 급증할 것을 의미한다.   



그림25.4 1975-2009년, 아시아와 북아메리카에서 먹을거리로 생산되는 육류의 연간 생산량. 1인당 기준으로, 북아메리카에서 육류의 소비는 세계에서 가장 많았고(2009년 117.6kg/1인당/1년) 아시아는 아직 훨씬 뒤쳐져 있지만(30.8kg/1인당/1년) 육류의 생산과 소비의 급증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식사의 경관을 알려준다. (FAOSTAT,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 Statistics database, http://faostat3.fao.org/home/index.html, Dates of access range from January 1, 2014 to March 30, 2014. 의 자료)




전 세계에서 식사의 생태적 비용을 증가시키는 가장 큰 원인은 육류와 유제품이다. 1장에서 설명했듯이, 동물에 기반한 식사는 동물에 기반하는 생산 체계가 필요하다. 동물에게 먹이려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규모 단작으로 생산되는 에너지와 단백질이 풍부한 곡물을 먹이는 밀집사육시설의 산업적 모델은 토양침식, 제초제 사용의증가, 특허 받은 유전자변형 종자의 증가, 농민의 손실과 개별 농장 크기의 증가, 탄소 배출의 증가 및 동물 분뇨관리의 막대한 문제로 이어졌다. 육류와 유제품의 수요가 높아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 다국적 기업은 해당 국가에 수입 사료와 유전적 조성에 의존하는 밀집사육시설을 설치하거나, 예전에는 인간의 직접 소비를 위한 먹을거리 생산에 초점을 맞춘 생산 체계를 동물을 먹이는 데로 초점을 바꿔 그 국가는 기본 곡물과 식물성 기름, 기타농산물 같은 수입 먹을거리에 의존하게 되었다. 개발도상국의 소규모 동물 체계조차 동물성 식사로 전환하며 압력을 받아 19장에서 논의되었던 통합을 희생시켰다. 






1인당 "먹을거리 발자국"을 줄이기

우리의 먹을거리 선택이 미치는 환경적, 사회적 영향을 줄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먹는지가 갖는 먹을거리 체계의 함의에 관하여 생각하고, 지속가능성에 영향을 주는 부정적인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 가장 환경 비용이 많은 -가장 생태적 "먹을거리 발자국"이 큰- 먹을거리는 장거리를 운송되고, 대규모 단작 및 고투입 체계에서 재배되고, 동물이나 동물의 산물로 만들어진 먹을거리이다. 물고기 같은 일부 먹을거리의 경우 남획이나건강하지 않은 양식장 사육 체계 같은 다른 변수가 작동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기본이다. 소비자로서 특정한 식품이 이들 특성을 나타내는 정도를 평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식품 상표는 일반적으로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미국의 "유기농 인증" 같은 여러 인증 프로그램은 상표가 부착된 먹을거리가 관행적으로 재배된 것보다 생태발자국이 훨씬 작은지 보장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기농" 먹을거리는 고투입 대규모 단작으로 재배될 수 있다. 먹을거리 선택은 먹을거리의 생산과 관련된 생태적 요인들을 가로지르는 몇 가지 원리를 따른다면 쉬워진다. 


먹이사슬에서 더 낮은 걸 먹는다. 동물성 먹을거리보다 식물성 먹을거리를 강조한다. 과일, 채소, 씨앗, 견과류, 곡물을 포함한 먹을거리 섭취 비율을 높이면 농경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촉진한다. 추가적인 혜택으로, 건강에 필요한 단백질, 항산화물질, 섬유질, 오메가3 지방산, 비타민을 적절히 섭취하게 된다. 

진짜 먹을거리를 먹는다. 지방과 당분, 그리고 소금을 많이 쓴 영양가는 없고 열량만 높은 고도로 가공된 먹을거리를 피하라. 이 책에 나오는 농생태학에 기반한 농법과 원리를 활용해, 가능하면 농민의 손에서 재배된 먹을거리로 돌아가라. 

지역의 먹을거리를 먹는다. 당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고 사육된 먹을거리를 먹는 일은 토지에 다시 도돌하고, 탄소 배출을 줄이고, 지속가능한 농법을 촉진하며, 이윤을 집중시키기보다는 분배하여 지역 경제에 돈을 다시 순환시키도록 시장의 중개자를 제거하는 사회적 관계에 먹을거리 생산자와 섭취자를 다시 연결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제철 먹을거리를 먹는다. 가열 온실 같은 기후를 통제하는 시설이나 해외의 생산지에서 장거리 운송된 제철이 아닐 때 재배된 먹을거리는 막대한 화석연료 보조금이 필요하고, 그 대부분은 제철에 재배된 똑같은 먹을거리를 먹는 것만큼 건강하지 못하다. 장거리 생산 체계는 보통 기업식 농업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제3세계에 위치하면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농민과 노동자를 너무 착취하곤 한다. 제철이 아닐 때의 소비를 위해 먹을거리 보존술을되살리는 것도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은 그의 책 먹을거리의 옹호: 섭취자 선언(In Defense of Food: An Eater's Manifesto, Pollan 2008)에 잘 요약해 놓았다. 그는 "먹을거리를 먹는다. 너무 많이 먹지 않는다. 주로 식물을 먹는다."라고 조언했다. 지속가능한 먹기는 윤리적이고(삶을 유지하는 체계를 보호하기에), 농생태학적이며(생태학의 원리에 기반하기에), 소비자의 사리 추구적이다(좋은 건강을 증진하기에). 


앞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산업국에서 지속가능한 먹기를 위한 문화적, 경제적 지원이 증가하고 있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 설명하는 대안 먹을거리 네트워크(AFNs)에 참여함으로써, 산업국의 소비자들은 더 윤리적인 동시에자신의 건강과 복지에 더 이로우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일치하는 선택에 눈을 뜬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개발도상국에서 육류와 유제품, 수입되는 고급 식품에 대한 수요의 증가는 더 높은 생활수준에 대한 폭넓은 욕구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브라질, 멕시코 등지에서 중산층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동물에서 유래한 먹을거리를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능력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뚜렷한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생태적으로 더 건전하기에 전통적인 식사로 돌아가자고 권장하는 건 지위가 상승한 그들에게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 상태도 돌아가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다. 아니면 적어도 그 제안을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산업국의 빈곤층, 도시의 하층민은 더 지속가능하게 먹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자신의 먹을거리를 재배할 수 없고, 농민장터에 접근하지 못하며, 그들의 지역사회에서처럼 어쨌든 지속가능하게 재배된 먹을거리의 비싼 가격을 지불할 재원이 부족하여 그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가공되고 포장된 먹을거리를 소비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더 지속가능하게 먹도록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건 상황을 모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듯이 보일 수 있다. 


바로 앞의 분석은 우리가 소비자들이 먹을거리에 대한 그들의 행위를 바꾸도록 지지한다고 간단하게 더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가 창출되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식사 양식은 역사와 사회 계급,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가치, 세계 시장의 역학 및 기타 여러 요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란 복잡한 산물이다. 그것은 또한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와도 엮여 있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선진국 사람들의 식습관 변화를 보는 건 변화에 대한 희망적인 신호 -이며 필요한 부분- 이고, 핵심 과제는 모든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느끼고 모두가 가능하면 경험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먹기라는 어떤 것을 만드는 데 있다. 






먹을거리 시민권 

2장에서 자연 생태계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소비자는 양분과 먹을거리 에너지를 얻기 위해 다른 유기체(또는 그들의 일부나 산물)을 섭취하는 유기체로 정의되었다. 경제학 문헌은 소비자를 상품이나 서비스를 획득하는 사람, 또는 간단히 구매자로 정의한다. 이들 정의 가운데 어느 것도 인간 구매자와 먹을거리 섭취자가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정보를 알고, 책임감 있으며, 관계를 맺는 소비자를 가리키는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 먹을거리 시민food citizen이란 용어는 그에 적합하다. 제니퍼 윌킨스Jennifer Wilkins에 의하면, 먹을거리 시민권은 "민주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공정하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의 발전을 위협하기보다는 지원하는 먹을거리와 관련된 행위에 참여하는 실천"이다(Wilkins 2005).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먹을거리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한 방식으로 누군가 매우 의도적으로 일상식을 구매하는 일 이외에, 먹을거리 시민권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내는 기타 활동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한 활동 가운데 하나는 주류의 시장과 식당에서 지역 또는 지속가능하게 재배된 농산물을 요구하는 것이다. 때로는 간단히 식료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기타중요한 활동은 지속가능성의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현재의 먹을거리 체계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농법과 소비자의 소외, 농업의 쇠퇴를 가져오기 위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교육하는 등 지역 수준부터 세계 수준까지 공공 정책의 개발에 관여하는 일이 포함된다. 


진정으로 좋은 먹을거리 시민이 되기 위해 직면하게 되는 많은 과제가 있다. 첫째, 현행 기업이 통제하는 먹을거리 체계는 지역과 지속가능이란 기준을 충족시키는 먹을거리 선택지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둘째, 현행 연방의정책은 농상품이란 좁은 범위를 조장하여, 이로 인해 그 대지에 연결된 토지 또는 사람들의 건강이나 지속가능성보다는 저렴한 먹을거리란 구성요소가 풍부해졌다. 셋째, 지역부터 연방까지 모든 수준에서 기관의 먹을거리 구매 정책은 지역이나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농산물의 구매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넷째, 우리는 건강과 영양 체계가 현행 먹을거리 시장의 통합과 정책에 의해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아직 제대로 비판적인 분석을 하지못했다. 이들 장벽은 모든 수준에서 변화의 필요성만 강조한다. 






지속가능성과 함께 공중 보건의 개선

가장 생태적 비용이 높은 먹을거리 -육류, 유제품, 당분과 지방이 많이 함유된 가공식품- 는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건강에 가장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먹을거리이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에 기반하여 이들 먹을거리의 소비를억제하려는 어떠한 노력이든 공중 보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될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산업국의 여러 상대적으로 풍족한 소비자들 -스스로를 "먹을거리 시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은 일반적으로 특정 먹을거리가 생태적으로 해롭고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자각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정보에접근할 수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여러 이유로 연결고리를 만들기가 훨씬 더 어렵다. 


개발도상국의 많은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더 높아짐에 따라, 식사가 필연적으로 변하여 전통적인 먹을거리에서 벗어나 육류, 유제품, 기타 건강과 환경 비용이 높은 먹을거리의 양이 늘어나게 된다. 제3세계의 여러 국가에서 이런 전환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이중 양식이 되도록 체중과 두 가지 양식이 되는 기타 인간의 건강에 대한 지표들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식량불안을 겪고 있는 집단은 빈약한 양분으로 체중과 신장 및 기타 지표가 낮아 영양실조의 징후를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은 커피 같은 수출용 먹을거리를 재배하려고 자급용 생산을 포기하곤 하는데, 그들의 현금 소득은 필요한 먹을거리를 구매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또 다른 극단에는 비만과 2형 당뇨병의 발생률이 높은 지표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전형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현금 경제에서 더 성공했으며, 영양은 적고 칼로리가 높은 지방과 염분, 당분이 많은 가공식품과 정크푸드를 구매하기에 충분한 돈이있다. 그 영향은 다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이다. 


세계 먹을거리 체계와 통합되고 있는 여러 개발도상국들은 영양실조와 비만의 형태로 공중 보건에 부정적 결과를불러오고 있어, 전통적 농사 체계 및 전통적 먹을거리와 식사를 함께 재활성화시킴으로써 건강 문제를 완화하는 동시에 지속가능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들 체계는 아직 완전히 포기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연합된 식문화는 여전히 사람들의 유산 가운데 일부이다. 따라서 건강한 먹기와 지역의 요리를 새로이 강조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멕시코는 좋은 사례가 된다. 이곳의 광고와 도시화,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칼로리에 대한 중점은 사람들을 옥수수와 콩, 고추 및 그에 동반되는 지역의 모든 향신료와 조미료를 쓰는 전통적 요리에서 사람들이 떠나게 만들었다. 전통적인 또르띠야조차 산업적으로 생산되고 가공된 옥수수가루의 범람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비만과 2형 당뇨병 같은 식이 관련 질병이 급속히 증가(멕시코는 비만과 과체중인 사람이 미국 다음으로 높음)한 데 대한 멕시코의 자각이 높아지며 이 문제에 지역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Astudillo 2014). 비만 문제에 관하여 대중을 교육하고 건강한 식습관으로 돌아가도록 촉진하기 위한 몇 년에 걸친 국가의 전략이 현재 자리를 잡았으며,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의회에서 승인된 설탕이 첨가된 음료와 정크푸드에 대한 새로운 세금은 이 쟁점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토종 옥수수의 경작과 지역 먹을거리의 일환으로 수제 또르띠야를 보존하기 위한 지역의 운동도 일어났다(그림25.5).




그림25.5 니카라과 북부의 라피타La Pita 지역사회에서 전통적인 나카타말레스nacatamales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방문객. 지역에서 재배된 옥수수 품종은 신선한 채소, 허브, 고추와 함께 특별한 타멜레스를 만드는 데활용된다. 






농민과 소비자를 다시 묶기


우리가 보았듯이, 현장의 농민과 밥상 주변의 섭취자 사이의 공간에 강한 관심이 모아졌다. 이 관계의 해체가 지속가능한 농법과 관계에서 멀어지고,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먹기에서 멀어지는 경향의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농민과 소비자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다시 확립하는 일이 지속가능성으로 향해 돌아가는 길을 구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농민이 농기업의 모델과 먹을거리 체계의 과점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가장 우수하고, 가장 지속가능한 농법을 활용하여 토지에서 수익성 있는 농장을 유지할 수 있다. 소비자가 먹을거리 생산 과정과 계속 접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먹을거리의 재배와 환경, 먹을거리 체계의 작동 및 자신의 건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하게 된다. 먹을거리의 재배는 농사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회적, 생태적관계의 집합이며, 농장에 있는 사람과 밥상에 있는 사람 사이의 중요한 연결을 다시 수립하는 일은 토지로 되돌아가고, 사람들을 밖으로 향하게 하며, 지속가능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걸음이다.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의 요소

소비자와 농민을 다시 묶는 일은 실제로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를 창출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한 체계에서 (1) 먹을거리 생산과 소비는 생물지역의 기반을 가지고, (2) 먹을거리 공급 체인은 연결고리의 수가 최소이고, (3) 농민, 소비자, 소매상, 유통업자 및 기타 행위자는 상호의존적인 지역사회의 맥락에 존재하며 진정한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4) 먹을거리 체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며, (5)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의 혜택과 부담은 모든 참여자들이 공정하게 공유한다. 대안적인 먹을거리체계의 이들 측면이 민접하게 상호관련된다. 비록 그것들이 함께 존재할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가 따로따로 논의할 만큼 뚜렷하게 구분된다. 





농업의 생물지역주의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사람과 그걸 먹는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늘어날수록, 둘 다 착취될 기회도 늘어난다. 이런 착취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하는 중요한 방법은 농업에 "지역성"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지역성은 물리적 가까움에 달려 있다. 먹을거리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그걸 생산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 그 먹을거리 체계는 지역적이다. 지역 먹을거리 체계는 장소로 식별되며, 그곳에 있는 지역사회의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문화적 발전에 기여한다(그림25.6).



그림25.6 비첸하우젠Witzenhausen 근처 독일의 농촌 지역에서 생물지역적 농업을 유지하고 있는 곳. 마을의 주민들은 근처에서 재배한 먹을거리를 먹을 수 있다. 




특정 지역이나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현지에서 재배되거나 사육된 먹을거리를 먹을 때, 그들은 자신의식사에 대한 초점을 전환시킨다. 지역에서 재배할 수 없는 먹을거리가 그들이 먹는 것에서 제거되지는 않지만, 지역의 먹을거리를 더 선호하며 그것의 역할은 축소된다. 온대 기후에서 이것은 또한 제철에 생산되고, 지하저장고 같은 전통적인 식품 저장술만이 아니라 건조와 통조림 같은 식품 보존과 저장 기술에 더 의존한 것을 먹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우리가 세계적 슈퍼마켓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선택과 편의를 일부 "포기한다"는 걸 의미하지만,장소로 새로운 연결을 포함하여 많은 혜택을 가져온다. 


유역(watershed)이란 개념 -개울의 단일하고 상호연결된 연결망에 의해 물이 빠지는 지역- 은 대체로 생물지역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농업 생물지역주의의 맥락에서, 먹을거리 관계로 함께 묶여 있는 토지와 사람, 사업체의 지리적으로 제한된 영역으로 정의할 수 있는 먹을거리 유역이란 개념과 유사하게 쓰이는 것이 이해가 된다. 


많은 혜택이 먹을거리 유역이 주요 기능 단위가 되는 먹을거리 체계에서 유래될 수 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먹을거리를 지역에서 재배하고 소비하는 건 먹을거리를 소비자에게 운송하는 데 필요한 화석연료 에너지의 양을 줄인다. 수확한 다음 먹을거리를 더 빨리 소비할 수 있기 때문에 수확한 먹을거리를 가공하거나 저장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줄일 수 있다. 음식쓰레기는 더 쉽게 농장으로 되돌릴 수 있어, 양분 순환을 증진시키고 외부의 양분투입재에 대한 의존을 줄인다. 농장 수준과 경관(23장) 수준에서 다양성은 더 쉽게 지원되어, 도시화된 지역과 농지가 있는 경관, 자연 생태계의 건강한 통합을 창출한다. 


경제적으로, 지역 경제는 지역 먹을거리 체계를 통해 번성한다. 지역에서 재배된 먹을거리에 소비된 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먹을거리에 소비된 돈과 비교해 지역 경제를 위해 거의 2배의 소득을 생성할 수 있다(Shuman 2006, 2012). 돈이 멀리 떨어져 있는 기업들에 의해 빨려들어가기보다는 지역사회 안에서 재순환된다. 지역사회의 모든 부문은 이러한 지역적 흐름에서 혜택을 받는다. 지역의 농민, 지역의 사업체, 지역의 서비스 기관, 지역의 학교와 병원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생물지역에 기반한 농업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통 받는 농촌 지역사회와 지방을 재건하고 복원하려는 노력에서 핵심 요소이다. 






먹을거리 공급 사슬의 단축 

현재의 세계 먹을거리 체계의 문제가 되는 측면 가운데 하나는 농민과 소비자 사이의 사슬에서 "연결고리"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개자, 가공업자, 유통업자, 운송업자, 포장업자, 도매업자와 소매업자 등이 포함된다. 연결고리의 숫자가 많을수록 농민과 소비자의 연결이 끊어지고, 농민에게서 빼돌려진 소비자의 먹을거리 지출의 양이 많을수록 대규모 먹을거리 생산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전적으로 생산 표준에 의해서만 운영된다. 


더 지속가능한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는 연결고리가 더 적은 먹을거리 공급 사슬을 필요로 한다. 짧은 먹을거리공급 사슬(SFSCs)의 중요성은 농촌 개발 분야에서 인정되어 왔고(Renting et al. 2003), 그 개념은 먹을거리 체계의 지속가능성 가운데 한 구성요소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짧은 먹을거리 공급 사슬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기에 사슬도 아니다. 재배한 사람, 가족 또는 집단이 그 먹을거리를 소비한다. 자신의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일이 비현실적이라며 배격되곤 하지만 놀랍게도 전 세계에서, 심지어 도시의 환경에서도 실행되고 있다. 중국의 도시부터 유럽 전역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뒤뜰이나 옥상의 주방텃밭은 중요한 먹을거리 원천이다. 지역사회 텃밭 -토지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텃밭을 제공- 은 전 세계의 도시에 흔하며, 미국과 서유럽에서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다음으로 가장 짧은 먹을거리 공급 사슬은 물론 농민과 소비자 사이의 직거래에 의해 제공된다. 이러한 마주보는사슬은 농민장터, 꾸러미, 길거리 판매, 농장 상점, 수확농장 등으로 일어난다(그림25.7). 



그림25.7 브라질 포르토알레그래Porto Alegre의 시장에서 유기농산물을 판매하는 농촌 농민협회. 12명 이상의 농민이 트럭을 함께 소유하고, 함께 모은 농산물을 가지고 차례로 시장에 나간다.




전통적인 식품 소매 방식은 특히 지역의 먹을거리 유역에 국한되어 있을 경우, 더욱 짧은 먹을거리 공급 사슬을 포함시킬 수 있다. 슈퍼마켓, 식료품점, 식당과 기관 등은 지역의 재배자에게서 자신의 먹을거리 대부분을 직접 구매할 수 있다. 이는 농민과 소비자 사이에 단 하나의 연결고리를 추가한다. 유통업자 또는 다른 도매업자가 포함되어도, 아직 세계 먹을거리 체계에 존재하는 연결고리보다 더 적은 수의 연결고리가 있어 먹을거리가 이동하는 거리가 크게 줄어든다. 


마지막으로, 직거래 또는 거의 직거래에 가까운 농민-소비자 상거래가 오늘날의 통신 기술과 운송 기반시설에 의해 용이해져 더욱 먼 거리에 걸쳐 발생할 수 있다. 직거래 협동조합, 전자 상거래, 꾸러미 등을 통해 소비자는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농민에게서 커피 같은 고부가가치의 농산물을 직접 구매할 수 있다. 농산물이 비록 먼 거리를이동할 수 있지만, 세계 먹을거리 체계의 긴 먹을거리 공급 사슬은 효과적으로 짧아진다. 






먹을거리에 기반한 지역사회

인격을 갖지 않는 세계 먹을거리 체계는 지역사회의 창설과 유지에 응집력으로 작용하는 먹을거리의 역할을 절망적으로 축소시켰다. 먹을거리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요구이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먹을거리 공급을 보장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우리의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를 거치며 먹을거리의 조달, 생산, 저장, 분배, 보호에 협동해야 해서 인간은 사냥단, 마을, 읍, 도시 및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구성을 함께 유지해 온 종교적 사상, 생활방식, 가치관, 관습은 늘 -최근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먹을거리에 큰 기반을 두고 있었다. 


지역사회를 위한 결속력으로 작용하는 먹을거리의 근본적인 역할을 복원시키는 일은 지역사회만이 아니라, 먹을거리 체계를 위해서도 이롭다. 먹을거리의 생산과 유통, 소비가 사람들 사이에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지역사회의 맥락에서 발생하면, 체계에서 불균형을 야기하는 요인들은 더욱 손쉽게 분명해지고 더 쉽게 조정되거나수리된다. 농지가 개발로 상실되고 있다면, 토양침식이 생산성 감퇴를 가져온다면, 먹을거리와 관련된 너무 많은돈이 지역사회를 떠나고 있다면, 농민이 경제적으로 쥐어짬을 당하고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잠재적인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일- 지역사회의 관심사가 된다.






민주적인 정보 교환

농민과 소비자가 분리되면서, 세계 먹을거리 체계는 체계의 행위자들 사이의 정보 교환과 소통의 본질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현재의 체계를 통하여 흐르는 정보는 주로 소비자 지출의 84%를 받아가는 기업의 관심에 의해통제되고 중재된다. 이러한 관심은 소비자들이 자신이 먹는 먹을거리의 기원, 영양 성분, 가공, 경제 상황에 관하여 가능한 한 적게 알고, 먹을거리 소비에 대해 집착하는 측면 -유행하는 음식에 어떻게 들어맞는지, 어떻게 더 편리한지, 어떻게 누군가의 인상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등- 에 가능한 한 많은 관심을 쏟길 바란다.  따라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먹을거리 공급 과점에 의해 많이 조작되고, 이러한 정보는 농민에게 인격을 갖지 않는 경제적 명령으로 전해진다.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과 공개된 소통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의지"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사람들은 대안에 관한 지식, 가능한 결과, 과거의 교훈 등에 완전히 접근해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강제적인 정치 체계는 항상 정보의 흐름을 제한하고, 진리와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을 형성하는 데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먹을거리 체계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먹을거리를 먹는 대중과 실제로 재배하는 사람들에게 권한을 부여 -먹을거리 민주주의- 하는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는 왜곡되거나 여과되지 않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과 체계의 서로 다른 부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 통로를 필요로 한다. 민주적인 정보 교환은 자신의 선택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소비자를 위한 기초가 된다. 






비용 부담과 혜택의 공유

위에서 설명된 민주적인 먹을거리 체계에서,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를 만드는 일은 먹을거리 체계의 모든 구성원이 공평하게 대우를 받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충분한 인정과 보상을 받는 포괄적인 "먹을거리 윤리"의 개발을 수반한다. 이는 특히 산업국의 소비자에게 보내려고 수출용 작물을 재배하는 개발도상국의 소규모 농민과 그 가족 같은 사람들, 건강한 식사를 유기하기 위한 충분히 적절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획득할 수 있는 재정적 자원이 없는 빈곤한 소비자, 임금과 건강보험 또는 기타 필요한 혜택에 접근할 수 없는 이민자가 너무 많은 유기농이나 지속가능한 농업이라 홍보되는 농장을 포함하여 모든 농장의 저임금 노동자에게 적용된다. 먹을거리 체계의이러한 모든 요소와 부당함이나 공정함이 결여된 게 명백한 다른 모든 요소의 필요을 충족시키는 일을 먹을거리 정의라고 부른다. 


로버트 고틀립Robert Gottlieb과 아나파마 조시Anapama Joshi가 정의했듯이, 먹을거리 정의의 틀은 "먹을거리가 재배, 가공, 운송, 유통, 소비되는 방법의 혜택과 위험은 공정하게 공유되는 것을 보장한다(Gottlieb and Joshi 2010)." 먹을거리 정의는 오늘날 먹을거리 체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해되더라도 너무 오랫동안 당연시되거나 무시되어 온 먹을거리 체계의 목소리와 얼굴을 인식한다(Allen 2004; Gray 2014). 지역 먹을거리 체계, 건강한 식사,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 및 사회적 변화를 촉진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먹을거리 체계에 만연해 있는 부당함에도 관심을가져야 한다. 농기업이 먹을거리 체계를 통제하는 한, 농업노동자는 비용을 낮추기 위하여 줄이거나 제거해야 할생산 비용으로 간주될 것이다. 캄페시노 또는 소농과 그들의 가족은 먹을거리 판매와 이윤이 주요 초점인 세계화된 먹을거리 시장에서 우선순위에 올라 있지 않을 것이다. 대형 슈퍼마켓이 폐쇄되고 "먹을거리 사막"이 만들어지는 도심의 자원이 제한된 섭취자들의 요구도 이 장소의 판매 잠재력이 너무 낮기에 안중에도 없다. 먹을거리 정의의 필요성은 먹을거리 체계가 지속가능성을 위해 변환됨에 따라 4단계 전환 과정에서 지도 원리이다.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의 구축

농민, 소비자, 협동조합, 주민 협회, 지속가능한 개발을 지지하는 단체, 친환경 기업 등이 수십 년 동안 더 지속가능하고 정당한 먹을거리 체계의 토대를 조용히 구축해 왔다. 앞서 설명한 다섯 가지 요소의 다양한 조합을 이용하여, 그들은 농민과 소비자에게 세계 먹을거리 체계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는 농민장터, 농장 상점, 직거래 제도, 먹을거리 허브 및 다양한 유형의 사업체, 프로그램, 기관을 설립했다. 


이들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은 다양하고, 크기와 범위, 의도가 가지각색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건 지속가능성의 많은 잃어버린 요소들을 우리의 먹을거리 체계로 다시 가져오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들은 먹을거리의 생태학과 경제학에 대한 서로 다른 분산된 접근법을 가지는 현실에서 작동하는 모델을 제공해서 지속가능성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삶의 형태처럼,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은 서로 다른 지위를 이용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따라 "진화해" 왔다. 지역이나 지방의 맥락에는 풍부한 지위가 있다. 이들은 농민장터, 지역사회 지원 농업 제도, 기타 유형의 직거래 방식, 지역의 먹을거리에 초점을 맞추는 식당 등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은 일반적으로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의 다섯 요소 모두를 한번에 통합시킬 수 있다. 그들은 엄격하게 지역의 맥락에서 운영되고, 짧은 먹을거리 공급 사슬을 창출하고, 먹을거리에 기반한 지역사회를 구축하며, 민주적인 정보 교환을 허용하고,먹을거리 정의를 증진한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마주보는 접촉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지역성에는 한계가 있다. 전 세계 모든 농장의 산물은 모든 농장 지역사회에서 재배되거나 생산될 수 없다. 기후와 토양, 지형, 지역의 문화는 특정 지역에서 재배되거나 사육될 수 있는 것을 모두 제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커피, 코코아, 바닐라, 망고는 열대에서만 생산될 수 있고, 열대에서도 특정 지역에서만 그러하다. 크랜베리와 올리브유는 온대에서만 생산되고, 온대지역 가운데 특정 지역에서만 그러하다. 소비자들이 "지역적으로 먹기" 위하여 노력하더라도, 소비자는 항상 제철이 아니거나 지역에서 재배할 수 없는 먹을거리를 바란다. 소비자가 현행 세계 먹을거리 체계의 외부에서 그러한 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 다양한 유형의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이 가진 목표였다. 이러한 "확장된 연결망"은 일반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를 더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그렇지 않으면 공급 사슬을 크게 단축시키는 동시에 민주적인 정보의 흐름을 촉진한다. 


표25.2는 다양한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을 열거하고, 각 유형이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의 다섯 요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이들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의 유형 가운데 더 중요한 일부는 다음에 더 상세히 논의된다.




지역성 안에 포함

먹을거리 공급 사슬의단축

먹을거리에 기반한 지역사회의 구축

민주적인 정보의 흐름을 촉

부담과 혜택의 공유를증진

농민장터

농민이 직접 자신의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판매






직접 수확

소비자가 농장에서 직접 수확






농장 상점

연중 무휴인 농장 안의 직거래 상점






지역사회 지원 농업

소비자와 단체에게 정기적 판매






꾸러미

농민이 소비자를 위해꾸러미를 준비






소비자 협동조합

소비자에 의해 먹을거리 구매가 집중화됨






지역 먹을거리 식당

식당에서 지역 먹을거리를 홍보






전용 소매상

지역이나 지방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상점






먹을거리 허브

지역 먹을거리 기관을창출하는 연결망






기관을 위한 음식 공급

급식에 지역과 지방의농산물을 사용

 *

 

택배 주문판매

농민에게 장거리 구매

 

 *

 

전자상거래

온라인을 통해 직접 구매

 

 *

 √

표25.2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의 유형과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의 다섯 요소에 대한 상대적 기여

주: √ 주된 중요성 * 2차 중요성 또는 잠재성








농민장터

농민장터에서, 특정 지역에서 온 농민과 재배자 또는 생산자는 자신의 농산물을 개인적으로 직접 대중에게 판매할 수 있다. 판매되는 모든 농산물은 판매자에 의해 재배, 사육, 포획, 양조, 절임, 구이, 훈제, 채집 또는 가공 등을 한 것으로 인증된다. 소비자에게 자신의 생산물을 직접 판매하여, 농민은 농기업 공급 사슬에 의해 포획되는 이윤의 일부를 회수할 수 있다. 아마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농민과 소비자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가 발전하여 궁극적으로 소비자를 농민과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은 먹을거리의 기원에 믿음을 얻고, 질문을 하며, 생산의 근원에 가까이 머물 수 있다. 생산자는 소비자에게 소중한 반응을 얻는다. 중매인의 부재는 소비자에게 더 낮은 가격을 의미할 수도 있다. 코스타리카, 영국, 미국 등 다양한 장소의 사례 연구에서는 농민장터에서 구입한 농산물 바구니가 상업적으로 구입한 똑같은 농산물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을 밝혔다(Halweil 2004). 


지난 20년 동안 농민장터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미국에 등록된 농민장터의 수가 1970년대 중반 약 300개에서 2013년 말 8144개로 30년 만에 엄청나게 증가했다(USDA 2014). 현재 인구 6만5천 명인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시는 1976년에 처음으로 인증된 농민장터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곳은 도시의 일부에서 적어도 매일 하나의 장터가 열리고 어떤 날은 하나 이상이 열리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1년 단위로 운영된다. 도시 외곽의 대부분의 마을에는 현재 자체 시장이 있다. 영국에서는 전국적 조직이 550개 이상의 시장을 위해 지원, 대의, 교육, 인증을 제공한다(FARMA 2014). 표준화, 대량 유통, 규모의 경제로 정의되는 먹을거리 체계에서 농민장터는 소농과귀농자에게 이상적으로 적합해 보인다. 이들 농민은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적이더라도 상대적으로 소량의 농산물을 시장에서 매매하고, 새로운 작물과 제품을 실험할 기회를 얻는다. 






지역사회 지원 농업

농민이 직접 유통하는 실제로 오래된 형태인 농민장터 모델에 비교하여,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훨씬 새로운 획기적인 것이다. 이름 그대로 지역사회 지원 농업과 연관된 사회적, 경제적 유대는 세계 먹을거리 체계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기본적으로,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농장 운영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개인들의 공동체로 구성되어서, 농지는 재배자와 소비자가 상호 지원을 제공하고 먹을거리 생산의 위험과 혜택을 공유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공동체의 농장이 된다. 일반적으로 농장의 구성원 또는 "주주"는 계절에 따라 정기구독료를 지불하거나, 농장의 운영과 농민의 월급으로 예상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선금으로 지불한다. 그 대가로 구성원들은 농사철 내내 농장의 풍요로움으로 매주 꾸러미나 택배를 받는다(그림25.8).



그림25.8 매주 받는 지역사회 지원 농업의 꾸러미를 든 소비자. 구독자는 농사철 동안 농민에게서 신선한 농산물 꾸러미를 직접 받는다. (사진 제공 Martha Brown) 





모든 사람에게 이롭다. 재배자는 자신의 작물에 더 나은 가격을 받고, 재정적 보증을 얻으며, 마케팅 부담을 훨씬던다. 소비자는 더 신선하고 맛있고 잘 익었을 때 수확했으며, 훈증하고 냉장하거나 포장하지 않은 농산물을 받는다. 

 

고객과 직접 거래하는 명백한 경제적 혜택 이외에도, 지역사회 지원 농업 방식은 농민이 가장 필요할 때 운영 자금을 받을 수 있게 하여 은행 대출의 필요를 줄이고 현금 흐름을 개선한다. 또한 농민은 제철 생산과 혹시 모를 추가 생산을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한다. 게다가 날씨가 안 좋거나 해충으로 인해 수확이 어려워지는 걸 포함하여 농사의 위험을 감수하는 게 농민 혼자가 아니다. 


많은 지역사회 지원 농업 방식이 농민과 소비자가 직접 대면하는 접촉이 기본은 아니지만, 모든 지역사회 농업은민주적인 정보의 흐름을 위한 풍부한 기회를 창출한다. 예를 들어, 농민은 농산물과 함께 교육을 위한 정보지와 요리법을 포함시킬 수 있으며, 회원들은 농산물의 품질과 선호도에 관하여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다. 어떤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실제로 농장에서 일하기과 농업노동자와의 만남을 선택지로 제공한다. 그러나 회원들이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토지와 연결하는 것과 생산 과정은 구체적이고 의미가 있다. 


많은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빈곤한 가정과 무료급식소, 푸드뱅크 등에 지분을 기부하거나 차등 회원제를 제공하여 고객들이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각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참여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조직되어 있어서, 주주들의 재정 투입과 적극적 참여, 자금 조달, 토지 소유, 지불 계획, 먹을거리 분배 체계의 수준이 다양한 많은 유형이 존재한다(Imhoff 2001).


대부분의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제철에 다양한 채소, 과일, 허브 등을 제공한다. 어떤 곳은 계란과 고기, 우유, 구이류, 땔감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농장의 산물을 제공한다. 어떤 농장은 근처의 좀 추운 기후의 농장과 협력하여 회원들이 거의 연중 농산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농장의 설계와 관리에 이러한 다양성을 반영할 훌륭한 기회가 주어져, 이 책 전체에 제시된 농생태학의 개념과 원리를 적용할 기회와 추동력이 제공된다. 


미국에서 지역사회 지원 농업의 숫자는 빠르게 증가했다. 처음 인정된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1985년에 시작되어, 2007년 농업총조사에 의하면 1만2500개가 넘었다(USDA 2014). 영국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지역사회 지원 농업 유형의 방식이 급격히 증가했다(FARMA 2014). 







확장된 연결망

세계 먹을거리 체계에 대한 대안이 지역의 연결망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농업의 생물지역을 넘어 확장된 대안적인 먹을거리 연결망은 여전히 더 짧은 먹을거리 공급 사슬을 창출하고, 민주적인 정보 교환을 가능하게 하며, -가상의 의미로- 먹을거리에 기반한 지역사회를 촉진할 수 있다. 그러한 확장된 연결망은 통신과 유통 기반시설을활용해 소비자와 생산자(또는 생산자의 대리인)가 물리적인 간격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교환을 거래할 수 있게 한다.


확장된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에서는 농산물이 중요하다. 상추 같은 농산물을 다루는 확장된 연결망의 경우, 현실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확장된 연결망을 위한 최고의 농산물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대안이 없고, 빨리 상하지 않으며, 부가가치가 높고 쉽게 운송될 수 있는 것이다. 초콜릿, 향신료, 커피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커피가 그러한 농산물의 대표 사례이다. 커피는 석유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거래되는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다. 세계의 한 지역에서 재배되고, 주로 생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비된다. 이 거리가 가장 착취적이라 알려진 먹을거리 사슬의 하나로 커피 무역이 개발되도록 했다. 몇몇 다국적 기업이 2500만 명 이상의 소규모 재배자가 생산하는 커피의 볶음, 판매, 유통을 통제하고 있다. 지난 10년의 초기는 농민에게 지불된 커피 가격이 역사사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른 반면, 소비자가 지불하는 가격은 더 비싸졌다. 착취는 먹을거리 사슬의 양쪽에서 모두 발생하고 있다(Méndez et al. 2006). 


개발도상국에서 커피 재배자를 착취하는 데 기여하지 않고 산업국의 소비자에게 커피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두 가지 유형의 확장된 연결망이 개발되었다. 한 유형에서는 비영리단체에 의해 거래가 도모되어 소비자가 재배자의 협동조합에서 직접 커피를 구매한다. 그 사례가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Community Agroecology Network)에 의해 채택된 커피 구독 프로그램으로 제공된다.  


두 번째 유형의 확장된 연결망에서는 전통적인 소매 유통 경로가 사용되는데, 연결고리가 유통 사슬에서 제거되고 재배자가 자신의 커피를 주류 상품 시장에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익율을 보장받는다. 한 사례는 여러 미국의 식료품점 및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유기농과 공정무역 상표 커피와 관련된 다양한 인증 프로그램들이다. 


두 유형의 연결망은 모두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 상황에 관한 지식과 세계 먹을거리 체계와 어떻게 대조되는지를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재배자와 그들의 지역사회, 협동조합 및 세계의 커피 경제에 관한 소식, 커피를 사기로 선택한 지역사회의 개발 프로젝트에 관한 정보가 담긴 정기 회보를 구독자에게 보낸다. 이런 방식으로, 소비자는 자신의 선택이 지닌 중요성에 관하여 교육을 받고, 재배자와 그 가족 및 그들의 지역사회와 연결된다. 재배자에게 괜찮은 임금을 제공하는 이외에도,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은 변경된 열대우림의 수관이 드리우는 그늘 아래에서 커피나무를 재배하는 것 같은 지속가능한 저투입 농법을 활용할 수 있도록 재배자에게 권한을 주는 커피 무역에 초점을 맞춘다.  




사례 연구: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중앙아메리카와 멕시코의 농장 지역사회를 북아메리카의 교육자, 학생, 소비자와직접 연결한다. 커피 공급 사슬의 연결고리를 줄임으로써,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관행적 커피 시장에서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익율을 커피를 재배하는 농민에게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더 공정한 경제적수익은 더 생태적인 방식을 활용해 자신의 커피를 재배하려는 농민의 노력을 지원하고, 생산자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생계와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 게다가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라틴아메리카의 협력 조직들과 함께 농민을 위한 대안적인 지역 시장을 조성해서, 농장의 가족들이 자신이 재배하는 걸 다양화하고 연중 소득을 얻을 수 있게 한다(그림25.9)



그림25.9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과 니카라과 마타갈파의 산라몬에 있는 Augusto Cesar Sandino Union 협동조합 사이의 협력의 일환으로 영양과 지역 먹을거리를 연결하는 워크샵에 참여한 청년 지도자들. 그들은 자신의 지역사회와 함께 건강하고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를 위한 지역 시장을 개발하고자 일한다.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라틴아메리카의 지역사회 및 농민단체와 함께 합하여 65년 이상의 경험이 있는 6명의 연구자들 사이의 논의에서 2002년 시작되었다. 악화되는 커피 위기의 환경적, 사회적 충격을 우려하면서, 그들은 장기적으로 관계를 발전시켜 온 커피를 재배하는 지역사회를 지원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오늘날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사람과 건강한 먹을거리 체계, 환경이 가장 먼저인 세계 경제"를 창출하는 걸 목표로 메소아메리카의 8개 지방에서 프로젝트에 협력한다.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이란 이름은 단체의 중요한 특징을 설명하고 있기에 선택되었다.


지역사회. 이 단체는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의 소속 연구자들이 장기간 일하고 있는 지역에서 생산자 지역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건강을 개선시키고자 노력한다.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농민과 그 가족, 농민 협동조합, 여성단체, 비영리단체, 대학과 협력하여 지속가능한 생계와 보존법을 통합하려는 자신들의 전망이 실행되도록 돕는다. 미국에서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대학과 대안적인 무역 단체, 커피 바리스타와 함께더 양심적인 소비와 라틴아메리카의 농사 지역사회와 직접 이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회원제 연결망을 구축한다.  

농생태학. 연구와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커피만이 아니라 농장 가족의 자급용과 지역 시장의 판매용 먹을거리를 농생태학에 기반한 접근법으로 재배하도록 촉진한다. 생산자 지역사회에서 농민들은 유역과 토양, 생물다양성 및 자기 지역사회의 건강을 보호하는 농생태학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개선된 경제적 수익과 환경의 자원 보호 사이의 직접적 연결이 확립되는 한편, 그 지역사회에 식량안보와 식량주권을 제공한다.  

연결망.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대학생과 청년 지도자, 연구자, 소비자 및 생산자 지역사회의 내부와 다른 생산자 지역사회와의 사이에, 그리고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연결망과 동맹 관계를 형성한다. 생산자 지역사회의 지역 연결망은 마주보는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확립된 더 광범위한 연결망은 새로운 소통 매체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교육 기회에 의존한다. 이 후자의 연결망을 통하여,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자신의 커피를 생산하는 개인과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얻고, 농민은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다. 그들이 함께 서로의 관심사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헌신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은 라틴아메리카의 생산자와 미국의 소비자들 사이에 국제적인 인식을 일으키고,  커피 한 잔과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 지역의 먹을거리 생산의 다양화를 통해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으로 그들을 함께 묶음으로써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세계적으로 행동하는" 운동의 일환이다. 지역사회 농생태학 연결망의 작업과 대학생의 참여 방법을 알아보려면 다음을 방문하라. http://www.canunite.org






지역 먹을거리의 촉진

농민장터와 지역사회 지원 농업은 대안적인 지역 먹을거리 체계의 기초를 형성하지만, 그것이 전통적인 유통 및 소매 체계를 대체할 가능성은 없다. 이런 이유로, 이러한 체계를 안에서부터 변화시키고, 가능한 한 지역의 먹을거리에 집중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정 농업 생물지역에서, 많은 식료품 소매업자, 식당 소유자, 기관의 급식 관리자 등은 지역의 농민과 낙농업자, 양조업자, 기타 생산자에게서 그들의 먹을거리를 더 많이 구매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고객의 기반을 확대하며, 지역 경제를 자극할 수 있다. 작지만 늘어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식당 및 소매점의 숫자는 거의 완전히 지역에서 비롯되는 먹을거리를 제공하거나 판매하는 경제적 실행가능성을 입증해 왔다. 

  

지역 먹을거리를 촉진하고 있는 조직화된 운동은 상공회의소, 기업 조직, 상인 연합, 농장 협회 등의 지원을 얻을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될 수 있다. 


•농민들은 상점이나 시장에서 지역 정체성을 창출하기 위한 협동조합을 형성하여, 포도주를 기반으로 하는 프랑스의 떼루아르 개념을 일반적인 먹을거리로 확대할 수 있다. 

•지역 상점이나 식당은 농민의 농법이나 지역의 생산을 반영하는 농산물을 제공하여, 지역 생산 체계의 독특함이나 특별한 초점을 전달한다.

•박람회와 농민장터 같은 특별한 행사에서 지역 생산자와 지방의 먹을거리 정체성을 홍보한다.

•공통의 지역 정체성 상표를 지역의 먹을거리 생산을 위해 개발하여, 소비자의 선택에 정보를 알리는 동시에 지역의 먹을거리 정체성을 홍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식료품점과 슈퍼마켓에서 농산물은 지역의 것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그 원산지가 표기된 상표를 붙인다.

•지역의 농장과 생산자의 주제별 탐방이 지역 주민과 관광객 모두를 위해 마련된다. 

•지역사회에 기반하고, 지역사회의 자금을 지원 받으며, 지역사회에서 관리되는 먹을거리 허브는 앞서 언급한 모든 요소를 통합해 만들어진다(먹을거리 공유재 부분 참조).






소비자가 정보를 가지고 선택하도록 촉진하기

농장 판매대와 농민장터에서 소비자와 농민이 마주보는 건 이해와 농사법, 소비자의 바람, 서로의 필요와 신념 등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자리이다. 일 대 일로 소통할 기회가 없는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에서, 주요 쟁점 -민주적 정보의 흐름이란 측면에서- 은 소비자 교육이다. 소비자는 정보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의 남용과 소비자의 소외에 도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의 외부에서도 똑같이 중요하다.  


소비자가 정보를 가지고 선택하도록 촉진하는 다양한 수단은 소비자 단체, 농민 조직, 확장된 대안적 연결망 및 정부에 의해 개발되어 왔다.  생물지역의 맥락에서, 원산지 표기는 소비자가 지역의 먹을거리가 아닌 것에서 지역의 먹을거리를 구별하고, 그 차이를 더 잘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세계적 먹을거리 시장에서, 인증 표시는 소비자를 교육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미국 정부의 유기농 인증 상표와 앞서 언급했던 공정무역 인증이두 가지 사례이다. 그러한 상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비자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킨다(그림25.10).



그림25.10 시장 판매대의 공정무역 초콜릿. 공정무역 인증은 소비자들에게 카카오를 재배한 농민들이 그들의 노동에 대한 공정한 보상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사진 제공 Eric Engles)





변화를 위한 토대를 다지기


이번 장에서는 먹을거리 체계를 더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이동시킬 때 농업과 먹을거리를 둘러싼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먹을거리 시민이라 부르며 자신의 먹을거리 선택이 미치는 영향에 관해 충분히 의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사람들과 더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할 때, 더 지속가능하게 먹을거리를 재배하고자 모색하는 농민들이 자신의 노력에 지원을 받을 때, 토지의 이용법에 관하여 지역사회가 깊은 관심을 가지는 기반이 있을 때, 우리는 먹을거리 체계를 변환시키고, 더 지속가능하며, 더 공정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토대가 그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해 보일 수 있지만, 단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전 장에서 설명한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는 지속가능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별 의식 없이 구매하는 경제 체계에 의해 지원을 받으며 아직도 지구의 구석구석에 있는 농업 공동체로 확장하면서 힘을 키우고 있다. 싹이 트려 하는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가 어떻게 더 큰 먹을거리 체계의 과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 -먹을거리의 상품화, 투입의 강화, 하향식 기술 의존적 해결책 등에서 벗어나 지속가능성을 향하여- 를 얻기 위하여,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처럼 대형이고 강력하며 추상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대안 먹을거리 체계처럼 더 땅으로 내려온 것이든지, "체계"가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갖는 게 도움이 된다. 


24장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먹을거리와 농업을 둘러싸고 장성한 이념적 체계를 떠올려보자. 이 체계는 전형적인 소비자가 먹을거리와 관련하여 행동하는 방식을 구체화하고, 먹을거리가 어떻게 생기는지에 관한 이해의 범위를 제한하며, 먹을거리 체계 역학의 기초가 되는 토지와 노동자로부터 기업으로 부가 이전되었다는 사실에서 소비자의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기업이 지배하는 이러한 동맹이 이번 장에서 논의된 "격리된 소비자"를 창출하고, 소비자와 농민 사이의 뚜렷한 분리를 추동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먹을거리를 비정치적인 것으로 유지하고 사람들을 먹을거리의 단순한 소비자로 만들어서, 먹을거리 체계의 이념은 농기업의 목적에 봉사하여 이번 장에서 지속가능성의 가장 강력한 장벽의 하나로 확인한 상품화된 문화를 형성한다. 이 관계를 일반화하기 위하여, 세계 먹을거리 체계는 두 가지 보완적인 부분을 가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사적 소유, 자본 축적, 산업적 생산 관행의경제적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와 관점, 사고, 심리, 동기 부여의 문화 체계이다. 두 부분 모두 전체의 존재를 위해 필수적이고, 각각은 다른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작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농민장터, 지역사회 지원 농업, 먹을거리 허브, 농장 상점, 지역 먹을거리 식당 및 기타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의 요소들을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의 경제적 측면으로 볼 수 있고, 그것들을 지원하고 그것들로부터 발전하는 지역사회, 관계, 확장된 의식을 문화적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두 측면은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의 두 부분처럼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를 갖는다. 먹을거리 체계의 변화가 대안적인 먹을거리 체계가 확장되고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를 대체하는 것으로 구성된다면, 대안적인 체계의 문화적, 경제적 측면은 각각이 서로를 강화하고 다른 것이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이번 절의 제목에서 언급한 "변화를 위한 토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식사와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의 형태로 변화하기 위한 토대를 다지는 일은 먹을거리 체계의 변환을 촉진하는 일의 한 가지 과제이다. 더 중요한 다른 하나는 이런 토대를 활용해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의 상당한 권력과 전 세계 사람들에 대한 그것의 강력한 경제적, 문화적 장악에 도전하는 일이다. 이러한 권력 때문에 우리의 먹을거리 체계에 필요한 변화의 규모는 엄청나다. 리치 메릴의 급진적 농업이 1976년에 나온 이후 확실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책의 "자립하는 농업을 향하여"라는 장에 많은 생태학적 개념과 농사에 대한 접근법이 제시되어 있으며, 농민과 연구자들에 의해 널리 실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대부분은 -22장의 구분에 따라- 2단계와 3단계의 전환 과정에 있으며, 농장과 농민에게 너무 제한적이다. 한편, 섭취자와 농민 사이의 간격은 게속 벌어지고, 농업은 더욱 자본집약적이 되고, 합병은 소수의 사람들이 통제하게 되며, 불공정은 그대로 남아 있다. 4단계와 5단계의 전환 과정에 이르기 위하여, 더 급진적인 변화 -전체 먹을거리 체계를 포함하는- 가 필요하다. 이런 초점을 가지고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다. 




사례 연구: 먹을거리 공유재


기존의 현실과 맞서 싸워서는 결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무언가 바꾸려면, 기존 모델을 쓸모없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라. 

버크민스터 풀러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을 창출하고 발전시키려 모색하는 사람들 -농민, 귀농 희망자, 지역의 먹을거리 사업가, 소비자- 은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많은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주류 먹을거리 체계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적절한 재원, 적합한 토지, 기반시설, 사업 지원, 교육 기회 등이 부족하다. 먹을거리 공유재Food Commons(http://www.thefoodcommons.org)는 지역에 기반하는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을 조직하고, 자금을 조달하며, 운영하기 위한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모색하고 있다. 


1. 먹을거리 공유재 트러스트(Food Commons Trust)는 지역의 먹을거리 산물을 생산, 가공, 판매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자산을 소유하고 개발한다. 그 임무는 토지, 건물, 기타 시설을 적당한 가격으로 소규모 농장과 먹을거리 사업체에 임대하여, 착수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충출하는 것이다. 

2. 먹을거리 공유재 파이낸싱 암(Food Commons Financing Arm) 또는 은행은 운영을 개시하거나 확장하고자하는 농민과 소규모 사업체 소유자에게 저리의 대출을 제공한다. 이 구성요소는 소규모 먹을거리 사업체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금융기관이 없는 지역사회에서 특히 중요하다.

3. 지방의 먹을거리 허브는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의 여러 구성요소들과 함께 맞물려 있는 복잡한 물류를 조정한다. 지역의 고유한 필요에 따라, 기본적인 사업 서비스, 마케팅 전문지식, 기술 지원, 직업 훈련 및 기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지역사회에서 교육 및 홍보 활동도 수행해, 소비자에게 정보를 알리고 공동 번영과 먹을거리 체계의 지속가능성이란 연결망의 가치를 홍보한다. 


그 아이디어는 이러한 세 부분의 모델이 미국 전역의 다양한 지역사회에 복제되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주민들이 건강한 먹을거리와 성취감을 주는 일자리, 사업 기회에 더 많이 접근하게 되어 크게 혜택을 누리는 번성하는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프레스노,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조지아의 애틀랜타에서는 개발중인 원형 먹을거리 공유재가 있다. 이 모든 장소에서, 신뢰와 허브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많은 자원이 이미 지방자치단체의 손에 맡겨져 있다. 버려지거나 압류된 도시와 도시 주변의 토지, 건물, 공장, 상점, 가공시설은 먹을거리를 생산, 가공, 집하하고, 지역사회에 먹을거리를 분배하며, 지역의 생산자와 가공업자를 지역사회 전체의 섭취자 연결망에 연결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기반시설을 형성하고자 동원되고 있다. 프레스노 시의회는 도시의 먹을거리 공유재를 지원하기 위해 나서고, 먹을거리 공유재의 이사회와 긴밀히 협력하여 지역의 재배자, 가공업자, 유통업자, 소비자를 새로운 대안적인 먹을거리 연결망에 연결한다. 그러한 기업을 착수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재정적 자원을 하나로 모으는 데 따르는 과제는 만만치 않지만, 지역 먹을거리 유역의 전망은 이 모델이 펼쳐질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이 새로운 먹을거리 유역의 구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정보의 교환과 적절한 무역 관계를 조정하는 협동적인 중앙회에서 지방의 먹을거리 연결망을 서로 연결시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먹을거리 공유재 조직이 산업형 먹을거리 체계를 대체하지 않고 대안을 구축한다는 그 목표가 매우 뚜렷하지만, 지방의 대안적인 체계의 연결망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균질화되고, 두루 적용되도록 만든 세계 먹을거리 체계를 언젠가는 대체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의 시험적이고 막 태어난 형태의 종류로 볼 수 있다. 즉, 전환 과정에서 4단계에 있는 강한 대안 먹을거리 연결망을 확립함으로써, 먹을거리 공유재가 하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는 5단계로 더 광범위하게 변환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생각거리


1. 당신이 지역의 슈퍼마켓에 갈 때, 누가 먹을거리를 재배했는지, 어떻게 재배했는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가?


2. 전 세계의 먹을거리 선호도에서 문화적 차이는 무엇이고, 이들이 광고와 인터넷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3. 먹을거리의 질은 복잡한 주제이다. 영양의 측면을 넘어 확장되고, 먹을거리 체계의 지속가능성이란 구성요소를 더 포함하는 먹을거리 질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4. 날마다 먹는 먹을거리의 어느 부분을 직접 재배할 수 있는가?


5. 당신의 지역사회에 얼마나 많은 농민장터가 있는가?


6. 몇 명의 농민을 알고 있는가?


7. "지속가능성의 문화"를 반영하기 위하여 당신의 식사를 바꾸려면, 지금 먹는 것에서 무엇을 더하거나 뺄 것인가?


8. 왜 유전자변형 작물을 함유한 먹을거리의 표시제가 해결책의 일부에 불과한가?









인터넷 자료


Agricultural Marketing Service, Farmers Market Site 

http://www.ams.usda.gov/farmersmarkets

A valuable source of information about the growing network of farmers' markets in the United States. 


Alternative Farming Systems Information Center, CSA section 

http://www.nal.usda.gov/afsic/csa

A CSA information resource that helps the consumer find a nearby CSA and learn what CSAs are and how they work. Provides links to other alternative farming systems information. 


Community Agroecology Network 

http://www.canunite.org

A source of information about the opportunities for developing sustainable relationships and AFNs that link consumers in the North with producers in the South, while creating opportunities for local food security and opportunity within rural communities in Mexico and Central America. 


Food Routes 

http://www.foodroutes.org 

Information, resources and market opportunities for the food and farming community, community-based nonprofits, the food-concerned public, policy makers and the media. 


Local Harvest 

http://www.localharvest.org 

A remarkable site that links the conscious consumer to a nationwide network of alternative food and farm products, including farmers markets, CSAs, farms, grocery stores, restaurants, and even an online store. 


National Agricultural Statistics Service 

http://www.nass.usde.gov

Access to an extensive database about agriculture. 


Old Dog Documentaries 

http://www.olddogdocumentaries.com

An organization that uses its documentary film skills to provoke grassroots solutions to some of societies most pressing problems, including food and environmental issues. 


The National Farmers' Retail and Markets Association 

http://www.farma.org

A guide to the expanding network of certified farmers markets in the United Kingdom, and the work of the National Farmers' Retail and Markets Association in fostering the link between farmers and consumers.









읽을거리

 

Alkon, A. H. and J. Agyeman. 2011. Cultivating Food Justice: Race, Class, and Sustainability. MIT Press: Cambridge, MA. 

An engaging review of the roots of injustice in food systems and the necessary steps toward food justice for all. 


Cribb, J. 2010. The Coming Famine: The Global Food Crisis and What We Can Do About I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CA. 

A far-ranging view of the impeding food crisis, and an attempt at a balanced view of how to avoid it. 


Elton, S. 2013. Consumed: Food for a Finite Plane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IL. 

An engaging look at the challenges facing food system in the very near future, and examples that provide a hopeful vision for the changes needed to create sustainable alternatives. 


Freyfogle, E. T. (ed.). 2001. The New Agrarianism: Land, Culture, and the Community of Life. Island Press: Washington, DC. 

A gathering of powerful writings by well-known authors in the field of food and the environment that shows how there is a groundswell of change in the direction of strengthening our roots in the land, while bringing greater health to families, neighborhoods, and communities in rural as well as urban places. 


Gottlieb, R. and A. Joshi. 2010. Food Justice. The MIT Press: Cambridge, MA. 

Covers the history of food injustices and describes the movement to change the system, addressing along the way the increasing disconnect between food and culture resulting from the industrialization of the food system. 


Halweil, B. 2004. Eat Here: Reclaiming Homegrown Pleasures in a Global Supermarket. A WorldWatch Book. Norton: New York. 

A highly engaging account of where our food comes from, why food-system change is needed, and what the alternatives are. 


Henderson, E. and R. Van En. 1999. Sharing the Harvest: A Guide to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Chelsea Green Publishing: White River Junction, VT. 

An informative guide to the history, development, implementation, and benefits of CSA. 


Méndez, V. E., C. Bacon, S. R. Gliessman, D. Goodman, and J. Fox (eds.). 2006. Confronting the Coffee Crisis: Sustaining Livelihoods and Ecosystems in Mexico and Central America. MIT Press: Boston, MA. 

A probing look at the impact of commodity chains on rural communities in the global South, and alternative steps that can be taken by consumers and consumer organizations in the global North. 


Menzel, P. and F. D’Aluisio. 2005. Hungry Planet: What the World Eats. Ten Speed Press: Berkeley, CA. 

A beautiful photographic essay of what families eat from around the world, placed in an important context of cultural diversity and the impacts of the global market place on food and diets.


Merrill, R. (ed.). 1976. Radical Agriculture. Harper Colophon Books. Harper & Row Publishers: New York. 

A thought-provoking analysis of the problems as well as a presentation of visionary solutions for moving toward a selfsustaining agriculture, written before most of us were promoting sustainability. 


Pollan, M. 2008. In Defense of Food: An Eater’s Manifesto. The Penguin Press: London, U.K. 

A convincing argument for what to eat in order to promote ecologically sound, nutritionally healthy, and sustainable food systems. 


Riebel, L. 2011. The Green Foodprint. Food Choices for Healthy People and a Healthy Planet. CreateSpace Independent Publishing Platform: Seattle, WA. 

A practical guide that helps readers navigate the new world of sustainable f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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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서 재래종 옥수수로 만든 이 주식은 대량 생산과 근대성에게서 압박을 받고 있지만, 소농들이 저항하고 있다.


Petra Cruz González 씨는 멕시코 틀락시아코Tlaxiaco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매일 400개 남짓 또르띠야를 만든다. , Mexico.CreditCreditLeila Ashtari



페트라 크루즈 곤잘레스 씨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약 400개의 또르띠야를 손으로 만든다. 전기 제분기와 금속 프레스기 같은 몇몇 현대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8살 때 배운 것처럼 장작불에 조리한다.


49세인 곤잘레스 씨는 길거리와 집에서 또르띠야를 판매한다. 오악사카 지역의 도시에 있는 수제 또르띠야 생산자들을 조직하고자 1990년에 시작된 틀락시아코 Palmeadoras 조합의 대표인 그녀는 이것이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조합의 89명의 조합원(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여성)은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경쟁자들과 맞서 이러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그 도시의 25곳의 또르띠야 매장은 매출이 크게 줄었으며, 곤잘레스 씨는 또르띠야를 모두 팔기 위해 오후 10시까지 일해야 하곤 한다. 그녀는 6개에 10페소(약 550원)라는 가격을 매겼는데, 이건 들어가는 경비보다 조금 더 충당하는 정도이다. 그녀는 다른 행상의 먹을거리를 위해 남은 또르띠야를 거래하곤 한다.


"또르띠야 매장은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하지 무얼 파는지에는 관심이 없어요."라고 곤잘레스 씨는 말했다. "우린 양이 아니라 품질을 팝니다."




곤잘레스 씨는 이 도시의 수제 또르띠야 생산자로 이루어진 조직의 대표이다.





CreditLeila Ashtari




가운데에 곤잘레스 씨와 다른 또르띠야 생산자가 시장에 판매하러 가고 있다.Leila Ashtari



도시부터 농촌까지, 멕시코의 또르띠야는 위기에 처해 있다. 메트로폴리탄 소치밀코Xochimilco 자치대학의 영양학자  Julieta Ponce에 의하면,  멕시코 사람들이 빵과 패스트푸드를 더 많이 먹으면서 1인당 소비량이 1982년 약 102kg에서 2016년 약 56kg으로 지난 35년 동안 약 45% 급감했다. 


값싼 또르띠야와의 경주에서 품질은 불리해졌다. 거의 절반 정도의 공급량이 현재 산업적으로 생산된 또르띠야 반죽이나 Maseca 같은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진다.  



멕시코 요리를 연구하는 작가 Cristina Barros 씨는 또르띠야의 위기 상황은 비만과 빈곤, 이민을 포함하는 멕시코의 광범위한 사회적 병폐에 대한 경고라고 이야기했다.  "또르띠야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으면, 좋은 품질만이 아니라" 특히 또르띠야 생산자와 옥수수 농민에게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Barros 씨는 말했다.  “우리가 전통적 음식을 산업의 식품으로 바꾸려고 결심했을 때 이 비만이란 전염병이 나타났어요.” 


워싱턴 대학의 건강 측정 및 평가 연구소에 의하면,  멕시코의 비만율은 1980년 7%에서 2016년 20.3%로 급증했고, 1980년대 멕시코의 자유무역 기조가 이러한 변화에 기여했다.



지난 5월, 75개 이상의 단체와 기업이 옥수수 또르띠야를 홍보하고자 우리 또르띠야를 위한 동맹Alianza por Nuestra Tortilla를 창립했다. 멕시코에는 특히 북부 지역에 밀가루 또르띠야가 있는데, 이 단체의 초점은멕시코 요리의 기반인 옥수수에 있다. 그 연맹은 연구, 교육 행사, 언론 홍보 및 로비활동을 포함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동맹의 견해로는, 좋은 또르띠야는 말린 옥수수(이상적으로는 토종 품종)를 수산화칼슘을 푼 물에 담가 밤새도록 불리는(멕시코에서는 칼cal이라 함) 닉스타밀화라고 알려진 전통적 과정을 통해 처음부터 만들어진다. 이것이 영양분을 풀어서, 또르띠야가 비타민과 미네랄 및 단백질의 귀중한 원천이 되게 만든다. 산업적으로 생산된 옥수수 가루도 닉스타밀화되어 있지만, 또르띠야 순수주의자들에 의하면 추가 가공으로 영양분을 제거함으로써 질이 낮은 또르띠아가 만들어진다.  



생물다양성을 장려하는 농학자 Amado Ramírez Leyva 씨가 오악사카 주에서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reditLeila Ashtari




25년 이상 옥수수 생산자들과 일하고 있는 농학자 Amado Ramírez Leyva 씨는 소비자에게 전통적 또르띠야에 비용과 노력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설득하는 핵심으로 생물다양성을 장려한다. "지난 50년 동안, 도시 사람들은 옥수수 맛이 어떤지 모르고 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토종 옥수수는 산업용 옥수수보다 훨씬 풍미가 다양합니다.


동맹은 또르띠야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 그리고 대규모 생산자에게 그 성분을 표시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법률로 만들고자 연방정부를 압박하고 있다고  교육과 홍보를 통해 옥수수 생산의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멕시코 옥수수 또르띠야 재단Fundación de Tortilla Maíz Mexicana의 창립자이자 동맹의 회원인 Rafael Mier 씨가 이야기했다. 그는 "가짜" 제품을 폭로한다면 멕시코 사람들이 어떤 또르띠야를 먹을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을 가족을 위해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우린 단지 정보를 제공하면 됩니다." 



틀락시아코 옥수수 축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Rafael Mier 씨. 그는 또르띠야를 만드는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고자 일하는 단체를 설립했다. Leila Ashtari




멕시코 시티의 다른 많은 새로운 또르띠야 매장과 마찬가지로, Maizajo는 또르띠야 반죽과 또르띠야를 전통적 방식으로 만든다.  작년에 개장한 이후 사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설립자이자 주방장 산티아고 무노즈Santiago Muñoz 씨는 전통적인 또르띠야 생산자가 원래 하루에 29kg 정도 만드는데 현재 적어도 204kg쯤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멕시코에는 300만 명 정도의 옥수수 농민이 있는데, 많은 농민들이 토종 옥수수의 재배를 그만두었거나 저렴한 가격 때문에 이민을 간 농민이 많다. 비슷한 또르띠야 매장과 마찬가지로,  Maizajo는 이 전통이 살아 있도록 보전하고자 토종 옥수수에 더 공정한 가격을 지불한다.  멕시코 시티의 동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산후안 익스텐코San Juan Ixtenco에 사는 농민 Simon Angoa 씨는 자신의 토종 옥수수 0.45kg의 평균 가격이 2.25페소(약 133원)이고, 때로는 1.35페소(약 77원)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그는 4.5페소(약 267원)가 노동자들이 도시로 가거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일핼 필요가 없는 공정한 가격이라고 생각한다(Angoa 씨는 3년 동안 캘리포니아의 건설 현장에 가서 일할 계획이고, 자신의 가족이 농지를 돌볼 것임). 



불행하게도, 많은 멕시코 사람과 요리사 들은 닉스타밀화와 관련된 작업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요리학교에서는 이 기술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수산화칼슘의 정확한 양과 적절한 조리 시간을 찾기 위해 각각의 옥수수 품종마다 조사해야 한다(예를 들어 너무 지나친 닉스타밀화는 빛깔을 바꾸거나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나게 할 수 있음). 


"또르띠야는 빵이나 피자 반죽과 같아요.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라고 무노즈 씨는 말했다. 




멕시코 시티의 또르띠야 매장 Maizajo에서 일하는 요리사 산티아고 무노즈 씨. Maizajo는 농민들이 토종 옥수수를 지킬 수 있도록 더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CreditLeila Ashtari





산후안 익스텐코에서 사는 농민 Simon Angoa 씨.CreditLeila Ashtari




그 가치는 높은 가격으로 나타난다. 도시에서 대부분의 전통적 또르띠야는 상업용 또르띠야의 약 5배에 달하는 가격인 호화로운 제품으로 팔린다.  농민과 함께 지역 및 세계의 식당에 반죽과 옥수수를 공급하는, Francisco Musi와 Sofia Casarin 씨가 소유주인 멕시코 시티의 한 기업인 Tamoa에서는 유통 비용을 줄이고 근처에서 재배한 토종 옥수수를 사용함으로써 고품질의 또르띠야를 더 많이 만들고 있다. 


잘 만들어진 또르띠야는 이미 도시의 최고 식당에 있기에,  Casarin 씨는 덜 비싼 식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큰 변화를 지켜본다.  "중간 가격의 또르띠야에 적합한 장소를 찾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요리사인 Enrique Olvera 씨와 Ramírez Leyva 씨가 동업하는 한 가게인 Molino El Pujol는 기계류를 사용하여 비용을 줄이는 걸 목표로 한다. 그러나 현대적 장비는 기계의 롤러를 부드럽게 통과하는 Maseca 같은 표준의 농산물을 처리하도록 설계되었다. 다양한 토종 옥수수를 가지고 좋은 또르띠야를 생산하기 위해서 기계를 조정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Ramírez Leyva 씨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많은 기계를 활용할 수 있다면, 확실히 전통적 또르띠야를 대중화할 수 있어요."라고 한다.


옛날 방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멕시코에서는 아직도 자신의 옥수수를 닉스타밀화하는 4만 개의 또르띠야 매장과 집에서 전통적인 또르띠야를 만드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엄청난 지식이 있지만 시장은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라고 Mier 씨는 이야기했다. 

노하우가 존재합니다. 우린 단지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전달할 의지가 필요할 뿐입니다." 


https://www.nytimes.com/2018/12/21/dining/corn-tortilla-mexic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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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제1장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 문화       아리무라 마코토有村誠

 

 

 

 

 

서아시아에 있는 농경 문화의 기원

 

인류는 그 탄생부터 수백만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야생의 동식물을 이용하며 생존해 왔다. 그동안 동식물 이용에 관한 다양한 기술혁신과 지식의 누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동물을 잡지는 못하고 죽은 동물의 고기를 찾아다니던 인류는 마침내 동물을 몰아넣는 기술을 깨우치고, 게다가 창과 화살같은 수렵용구를 마련해 뛰어난 수렵민이 되었다. 시행착오의 마지막, 신변에 자생하는 유용식물의 수를 확장하여 다종다양한 식물을 활용하는 지식을 축적해 나아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을 경계로, 인류는 농경과 목축에 의하여 자신의 식량을 생산하는 생계로 생활의 기반을 바꾸어 나아갔다. 일찍이 G. 차일드가 '신석기혁명'이라 부르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이 식량 획득양식의 변화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활은 온갖 방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고고학에서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목축 사회로 변천한 것을 신석기화(Neolithisation)라고 부르며 그것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갔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최초에 신석기화가 시작된 지역이 서아시아이다. 이 장에서는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신석기화, 즉 농경 문화의 시초에 대하여 개관하려고 한다.

 

 

 

그림1-1 서아시아의 지도

 

 

 

서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중위도 지방에 위치하고, 그 지형은 매우 기복이 많다(그림1-1). 레반트 지방(지중해 연안)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대지구대에 이어진 사해 지구대라고 부르는 깊은 골짜기 지형을 볼 수 있다. 이 지구대를 따라서 레바논 산맥 등의 1000-3000미터급의 산들이 남북으로 이어진다. 북부로 눈을 돌리면 아나톨리아부터 이란에 걸쳐서 3000미터급의 산들을 거느리는 타우로스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이 우뚝 솟는다. 이들 산맥의 앞은 아나톨리아 고원, 아르메니아 고원, 이란 고원 같은 표고 1000미터 안팎의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아나톨리아 남동부를 수원으로 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개의 큰강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간다. 이 두 큰강에 의하여 형성된 충적평야가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서아시아의 내륙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에는 광대한 사막이 펼쳐진다.

 

이러한 기복이 많은 지형은 다양한 기후를 만들어낸다. 레반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적은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이고, 강우량도 연평균 600밀리미터 안팎에 이른다. 이에 반하여 내륙부는 기온의일교차가 크고, 강우량도 매우 적은 사막 기후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경관이 다채로운 동식물상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서아시아에는 사람들이 재배화, 가축화하게 되는 동식물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장에서 다루는 서아시아의 시대 호칭과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겠다(그림1-2, 그림1-3). 여기에서 관련되는 건 고고학의 용어에서 말하는 구석기시대의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친 기간으로, 대략 기원전 12000년부터 기원전 6000년 무렵까지의 기간이다. 이것은 지질학에서 말하는 갱신세의 말부터 완신세의 초 무렵에 상당한다.

 

 

그림1-2 서아시아, 레반트 지방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의 편년

 

 

 

 

그림1-3 본문에서 언급한 신석기시대 유적의 위치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의 서아시아에는 레반트 지방의 나투프 문화로 대표되는 정주하는 수렵채집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수렵채집민보다도 정주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것은 이 문화의 고고학적인 증거, 예를 들면 초석을 사용한 견고한 주거, 식량을 저장하는 구덩이, 주거에 비치된 무거운 석기류의 존재 등으로부터 유추된다.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떡갈나무와피스타치오로 이루어진 레반트 지방의 산림지대에서는 그때까지는 없는 규모(1000평방킬로미터를 넘는다)의 마을이 출현했다.

 

서아시아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1만 년 무렵부터 신석기시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된다. 차일드는 신석기시대의 특징으로, 재배식물과 가축의 출현, 마을의 출현, 직업의 시작, 간석기의 사용, 토기의 사용 등을 드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 문화는 토기를 가지지 않는 문화로 발생했다. 토기가 보급된 건, 신석기시대가 시작하고 수천 년 지난 대략 기원전 7000년 무렵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의 유무를 기준으로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와 토기 신석기시대로 구분된다. 또한 레반트 지방의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는 다시 몇 개의 시기로 세분된다. 오래된 순으로, PPNA기, PPNB전기, PPNB중기, PPNB후기 같은 방식이다(그림1-2).

 

그리고 현재는 신석기시대라고 이야기하면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하여 식량 생산을 시작한 시대라고 하는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언급하듯이, 농경목축이 탄생한 서아시아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곧바로 농경목축에 의존한 사회가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 대부분은 매우 정주적인 마을로 이루어진다. 그 주거는 흙반죽 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신석기시대도 후반이 되면 광장과 도로, 공동시설 등을 갖춘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을의 시설을 만들 때 동네 구획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유적은 구석기시대의 유적보다 훨씬 크다. 그중에서도 3만 평을 넘는 것은 메가 사이트라고 부르고, 후대의 유적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게 크다. 만약 유적 전체에 마을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메가 사이트는 읍이라 할 만한 규모의 마을이었다고 할 수있다. 이러한 유적 규모의 대형화는 인구 증가와 특정 마을로 인구가 집중되었다는 걸 나타낼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제사와 의례, 공예, 교역 등 사회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에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전개가 발견된다. 이들의 고고학 정보에서 신석기시대에 사회의 복잡화가 급격히 진전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재배식물이 나타나다

 

서아시아는 실로 다양한 식물이 재배화된 지역이다. 밀, 보리, 호밀 등의 맥류를 시작으로, 누에콩, 렌즈콩, 병아리콩 등의 콩류, 포도, 올리브, 아몬드 등 우리에게 친근한 채소와 과일이 이 땅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최초로 재배화된 식물로 맥류와 콩류가 있다.

 

농경의 기원을 찾으려면 물론 유적에서 출토되는 식물 유존체(탄화물이 많음)의 연구가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다.이러한 식물 유존체를 대상으로 하는 고고식물학의 연구에 의하여 재배 맥류의 기원지와 맥류 농경의 기원에 대해서 최근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있다. 재배 맥류의 기원지가 서아시아에 있다는 건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언제, 어디에서라는 물음에 대하여 최근의 연구는 더욱 상세하게 답하고 있다(丹野 2008).

 

서아시아에서 맥류의 재배화는 언제쯤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신석기시대의 개시와 함께 농경이 사작되었다고 하여, PPNA기의 유적에서 재배 맥류가 출토된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PPNA기의 맥류를 정성껏 조사해 보면, 재배 맥류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재배 맥류가 출토되기 시작한 건 신석기시대가 되고 1000년 이상 경과한 기원전 8500년 무렵(PPNB 전기)의 유적에서이다.

 

다음으로 맥류가 재배화된 지역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 레반트 지방이 그 유력한 후보지라고 알려져 왔다. 이 지방에서 신석기시대에 재배화된 맥류에는 일립밀, 엠머밀(그림1-4), 보리 등이 있다.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맥류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출토된 맥류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경향이 있으며, 각각의 종류가 각지에서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Willcox 2005). 즉, 재배 맥류의 기원지는 단일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립밀은 레반트 지방에서도 북부(터키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남부(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서 출토된 건 거의 없다. 이것은 이 맥류 본래의 자연분포가 레반트 북부에 있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립밀은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고 있다(그림1-5).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고학적 자료를 증명하듯이, 일립밀의 기원지는 터키 남동부에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림1-4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Kerkh  유적(토기 신석기 시기) 출토의 엠머밀

 

 

 

그림1-5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는 야생 일립밀

 

 

 

 

언제, 어디에서 맥류가 재배화되었는지 하는 기원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맥류 농경이 정착되어 갔는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단노丹野와 윌콕스는 신석기시대의 다른 시기의 유적을 대상으로 출토된 맥류의 야생형과 재배형의 비율을 검토했다(Tanno and Willcox 2006a). 그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의 전반(기원전 8500년 무렵)에 나타난 재배 맥류는 곧바로 야생 맥류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재배형이 야생형보다 우세해지는 데 300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비교적 단기간(수십 년부터 수백 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야생형에서 재배형으로의 치환이 매우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견해는 흥미롭다.

 

콩류의 재배화에 대해서는 맥류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적어도 PPNB전기에는 시리아와 터키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시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케르크 유적에서는 병아리콩과 누에콩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이 종의 콩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의 하나가 되었다(Tanno and Willcox 2006b). 또한 터키 남동부의 네발리 코리Nevalı Çori 유적에서는 출토된 인골에 포함된 탄소와 질소의 안정동위체를 조사한 바, 질소안정동위대비(δ15N)이 매우 낮고, 렌즈콩 등의 콩류를 상당히 소비했다는 것이 추측되다(Lösch 외. 2006).

 

 

 

 

도구에서 본 농경의 시작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맥류의 재배와 가공에 관련된 도구(유물)와 설비(유구)가 자주 발견된다. 이와 같은 맥류 농경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에서도 맥류 농경의 정착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앞에서 기술한 식물 유존체의 연구와 비교함으로써 농경의 시초가 어떠했는지 그 실상에 더욱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로는 토지를 갈아엎는 경기용과 수확용 도구 등이 있다. 경기용 도구에 대해서는 우리가그것을 알 법한 유물은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드물고, 존재했는지 어떤지 불분명하다. 수확용 도구에는 서아시아의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낫날이라 불리는 석기가 있다(그림1-6). 이 석기는 벼과 등의 식물을 베는 데 사용하고, 날 부분에 벼과 식물을 자를 때 붙는 규소 성분에 의한 광택을 볼 수 있다. 통상은 목제와 골제의 자루에 하나 내지 여러 개를 장착해 사용했다. 낫날과 자루의 장착에는 비튜멘(천연 아스팔트)과 나뭇진 등이 접착제로 사용되었다. 

그림1-6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낫날.
① 와디 헤메

Wadi 27호 유적 출토(Edwards 1991: Fig. 12에서)

② 할룰라

Halula 유적 출토(Ferran Borrell 씨 제공)

③ 무레이베트

Mureybet 유적 출토의 석회암제 낫의 자루(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④ 복제된 플린트로 만든 낫날을 장착한 석회암제 자루(

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수확된 맥류 이삭에서 씨앗을 얻을 때는 이삭에서 잔이삭을 분리하는 탈곡과 각각의 잔이삭에서 알곡을 골라내 씨앗을 얻는 매조미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이용된 일립밀과 엠머밀 등 옛 유형의 밀은 탈곡이 어려운 성질이라 씨앗을 골라내기까지 탈곡과 매조미라는 작업에 수고를 들여야 한다. 탈곡과 매조미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도구에 절구가 있다. 절구는 바리 모양의 돌절구와 돌공이의 묶음으로 이루어지고, 공이를 위아래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①, 그림1-7-②).

그림1-7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돌절구① ② 나투프

Natuf 문화의 돌절구와 돌공이(BarYosef 1983: Fig. 5에서)

③ ④ 신석기 문화의 갈판과 갈돌(아부 고쉬Abu Ghosh 유적 출토, Khalaily and Marder 2003: Fig. 6. 1.에서)

⑤ ⑥ 신석기 문화의 안장형 갈판(saddle quern)과 갈돌(케르크 유적 출토, Yoshizawa 2003: Fig. 43에서)

 

 

 

그리고 이러한 씨앗을 골라내 결국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맥류를먹었는지 증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서아시아의 역사시대와 현대의 사례에서 생각하면, 아마 신석기시대에 빵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빵 이외의 먹는 법으로 볶은밀이나 죽으로 먹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지만, 서아시아에서는 증거가 없다. 밀을 가루로 내려면 돌절구가 필요하다. 서아시아에서 사용된 돌절구에는 앞에 기술한 절구에 더하여 맷돌도 있었다. 맷돌은 평평한 면을 가진 갈판과 그 위에 얹는 갈돌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갈돌을 갈판 위에서 전후좌우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③, 그림1-7-④). 이렇게 만든 밀가루에서 빵을 만들 수 있는데,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빵 그것의 출토 사례는 거의 없다. 상상하기에, 현재의 서아시아에서 먹고 있는 것 같은, 얇은 무발효 빵이었지 않을까? 빵을 굽는다고 한다면 달군 돌이나 가마 같은 설비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구와 설비가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래에 그 발달사를 개관해보자.


구석기시대 말기
우선 맥류 농경 관련 도구의 발달사에서 중요하고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가 되는 건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이다.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 매조미와 제분에 사용된 돌절구와 갈판 등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증가한다. 낫날의 대부분은 길이 2-3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돌조각을, 동물의 뼈와 뿔을 이용한 자루에 여러 개, 한 줄 드물게 두 줄로 줄지어 장착했다(그림1-6-①). 나투프 문화의 유적에서는 낫의 자루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고, 그 대부분은 길이 30센티미터 정도의 직선 낫이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에서는 아직 맥류의 재배종은 출토되지 않았기에, 이들 낫은 야생종의 수확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낫날에 남은 사용흔의 분석에서도 추측되고 있다. 
절구(돌절구, 돌공이)도 낫날과 똑같이, 나투프 문화에서 많이 만들어졌다(그림1-7-①, 그림1-7-②). 절구는 나투프 문화에서 제작된 간석기 중에서 주류의 도구이며, 깊이 몇십 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절구가 자주 제작되었다. 이러한 절구는 맥류의 탈곡, 매조미, 제분에 사용된다. 절구에 비하여 수는 많지 않지만, 맷돌(갈판, 갈돌)도 구석기시대 말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 절구와 맷돌은 용도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석기를 제작하여 사용한 실험에 의하면, 절구의 장점은 제분 작업보다 매조미이며 제분 작업에 더 적합한 도구는 맷돌 쪽인 것 같다. 물론 맷돌이 언제나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리는 없고, 콩류를 시작으로 다른 식물의 제분, 그리고 안료의 제작에도 종종 사용되었음은 틀림이 없지만, 구석기시대 말기의 맷돌의 사용흔과 잔재를 분석해 보면,이 시대에 맷돌을 사용한 맥류의 제분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Dubreuil 2004). 구석기시대 말기에 곧바로 맥류의 탈곡, 매조미와 제분 작업이 절구와 맷돌 같은 도구로 분화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석기시대 말기에 나타난 낫날과 돌절구의 존재는 이 시기에 그때까지와 비교하여 훨씬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일은 뒤따르는 신석기시대에 맥류 농경이 시작된 점을 생각하면, 맥류 농경 개시 직전의 모습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그러나 식물 유존체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 걸쳐서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Savard 외. 2006). 오히려 맥류는 이 시기 대부분의 유적에서 양적으로 제한되며, 콩류와 견과류 등 다양한 식물을 이용하는 상태가 일반적인 듯하다. 이처럼 도구와 식물 유존체의 정보를 맞추면 맥류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먹을거리의 한 날개를 담당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중요한 식량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 들어가면 맥류 농경과 관련된 도구에 변화가 보이고, 또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나타난다.
먼저 눈에 띄는 변화로,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의 증가를 들 수 있다(그림1-8). 앞에 기술했듯이,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에는 곧바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석기 가운데 점하는 비율은 약 2-3%로 높지 않다.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는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큰 변화는 아니다. 뚜렷한 변화가 발견되는 건 PPNB중기부터이다.석기 가운데 10-20%를 점하는 데까지 증가한다.

그림1-8 레반트 지방의 유적에서 낫날의 수량 변화와 낫의 형태 변화. Sayej 2004 등에서.


낫의 형태 변화에 대해서 통시적으로 검토해 보면,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와 마찬가지로, 낫날이 여러 개 장착된 직선 낫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큰 돌조각을 한 개체로 활용하여 칼처럼 사용한 것도 있었다. 석기를 그대로 손에 쥐든지, 또는 석기에 손잡이를 붙이든지 하여 사용했던 듯하다. 드문 사례이지만, 유프라테스 강가의 무레이베트 유적에서는 수확 칼의 자루라고 생각되는 석회암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그림1-6-③, 그림1-6-④). PPNB중기가 되면 활처럼 굽은 낫이 사용되기 시작한다(그림1-6-②).
이 직선에서 활처럼 굽은 모양으로 낫의 형태가 변화한 건 중요하며(그림1-8), 아마 수확 작업의 효율화에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직선 낫은 한 손으로 이삭을 모아 이삭 다발을 비벼서 자르는, 또는 낫을 대는 도구로 삼아 꺾어 거두는 식으로 사용한다. 한편, 활처럼 굽은 낫은 이삭을 모아서 베어 거둘 수 있고, 직선 낫에 비하여 수확 속도가 높아 짧은 시간에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 현대의 철제 낫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활처럼 굽은 낫은 베어 거두는 작업에 매우 적당한 형태이다. 또한 활처럼 굽은 낫이 출현한 배경에, 당시의 석기 제작기술의 발달이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원석에서 길이 10센티미터 정도의 규격성이 높은 돌날을 연속하여 벗겨내는 기술이 발달했다. 이리하여 제작된 돌날을 그대로든지, 또는 적당한 길이로 정돈하여 분할한 것(그림1-9)을 장착하여 더 간단하게 칼날의 길이가 긴 활처럼 굽은 낫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림1-9 시리아 케르크 유적(PPNB 후기) 출토의 낫날



그 한쪽에서 탈곡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발달되고 있다. 하나는 염소와 양의견갑골을 이용한 도구이다(그림1-10). 견갑골의 얇고 평평한 부분을 깎아서 두 갈래로 가공하고, 그 안쪽에 몇 개의 홈을 새긴다. 한 다발의 이삭을 두 갈래의 사이에 통과시키면 잔이삭이 홈에 걸려 탈곡되는 구조이다. 이 홈과 그 주변에 광택과 선상흔 등 이삭 다발을 통과시킬 때 닿았다고 생각되는 흔적이 관찰되었다. 유례는 적지만, 재미난 발명품이다.

그림1-10 골제 탈곡 도구. Stordeur and AndersonGerfaud 1985: Fig 2, 4, 8에서.
간즈 다르흐

Ganj Dareh 유적 출토 유물(좌)와 추정되는 그 사용방법(우)

 

 

 

또 하나, 탈곡 썰매라는 도구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지중해 세계의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도구이다. 보통 길이 1.5미터 안팎의 목제 썰매이고, 그 뒷면에 돌과 철제 날이 박혀 있다(그림1-11). 이 썰매를 수확한 맥류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동물에게 끌게 하면, 썰매의 무게(썰매 위에 사람이나 무거운 걸 올림)도 더해져 상당한 마찰이 썰매와 이삭 사이에 일어나 탈곡이 이루어진다. 또 이 방법에서는 탈곡만이 아니라 동시에 맥류의 짚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특별히 적는다. 맥류의 짚은 가축의 먹이와 햇볕에 말리는 벽돌을 만들 때 혼합물 등에 사용된다. 똑같은 도구는 고대의 서아시아에서도 사용되었다. P. 앤더슨Anderson 씨의 일련의 연구에 의하면, 탈곡 썰매의 이용은 확실히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3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Anderson 2000 등).이 시대의 유적에서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가 자주 발견된다. 앤더슨에 의하면, 이런 유의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는 신석기시대의 유적(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7000년대 전반의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탈곡 썰매의 사용은 신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석기시대가 되어 대규모로 탈곡 작업하는 듯한 규모의농경이나, 또는 건축재와 토기의 바탕흙에 끈지게 하는 재료로 섞는 등 맥류 짚의 적극적인 이용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탈곡 썰매가 신석기시대에 곧바로 등장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림1-11 현재 튀니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탈곡 썰매. Patricia Anderson 씨 제공.

 

 

그리고 탈곡, 매조미, 제분의 도구인 돌절구에서 변화는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신석기시대가 되면 절구(돌절구, 돌공이)가 감소하고, 대신에 맷돌(갈판, 갈돌)이 증가한다(그림1-7-③, ④). 맷돌은제분에 적합한 도구이기에, 신석기시대가 되어 맥류의 제분이 활발해졌음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안료의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갈판도 많이 발견되기에, PPNB전기까지의 맷돌은 다목적 제분 도구로 이용된것이 많았을 것이다. 맥류의 제분에 특화된 도구라고 생각되는 건 안장형 갈판이다. 갈판에 비교하여 대형이고, 가늘고 긴 윗돌(갈돌)을 두 손으로 잡고 체중을 실어서 앞뒤로 움직여 효율적인 제분을 행한다. 그 가장 오래된 건 구석기시대 말기에 출현하고, PPNA기에 이미 대부분의 유적에서 발견된다(그림1-12). PPNA기에는 아직 재배 맥류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안장형 갈판은 야생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PPNB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대부분의 유적에서 일반적이게 된다(그림1-7-⑤, 그림1-7-⑥). 이 뒤, 안장형 갈판은 회전 갈판이 출현하기까지 오랫동안 제분 도구의 주역이었다. 신석기시대에 보급된 안장형 갈판이 얼마나 제분 도구로서 완성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림1-12 시리아 와디 툼바크(PPNA기) 출토의 안장형 갈판과 갈돌(화살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빵을 굽는 설비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빵 굽는 가마라고 보이는 유구가 나타난 건 PPNB 중기이며(舟田 1998, 藤本 2007), 유례가 늘어나는 건 토기 신석기시대가 되고 나서로 더욱 늦다. 이들의 대부분은 돔 모양의 상부구조를 가진 가마로서 현대의 서아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며, 아마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마의 내벽에 빵을 붙여서 구웠을 것이다. 또, 빵을 굽는 다른 방법으로 숯불을 이용한 땅을 옴폭 판 화로가 사용되었을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田 1998, 藤本 2006). 이와 같은 땅을 판 화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견도 있다. 빵을 먹는다고 하는 문화 그것은, 오랜 옛날 맥류 이용의 개시와 함께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와 설비의 변천을 좇아 왔다. 낫날과 돌절구는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출현하며, 맥류 이용이 조금씩이지만 이 무렵부터 활발해졌단 것을 보여준다. 
맥류의 재배와 이용에 관한 다양한 도구, 설비가 시대의 추이와 함께 증가, 출현 또는 충실해지는 걸 생각하면, PPNB 중기부터 후기(기원전 8000-7000년) 즈음을 맥류 농경이 정착한 시기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도구와 설비의 발달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견해는 앞에 기술한 야생 맥류에서 재배 맥류로 이행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노와 윌콕스의 설에 긍정적이다.


동물의 가축화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측면에 동물 사육의 시작이 있다. 서아시아 원산의 동물에는 양, 염소, 말, 돼지, 낙타(단봉)이 있다. 낙타를 제외한 다른 4종의 우제류는 모두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되었다.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우리의 생활이 이들 가축이 생산해 내는 자원에 의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들 동물이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된 의의는 크다.
위에 4종의 우제류보다 전에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동물에 개와 고양이가 있다. 개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몇 가지 사례가 알려져 있다. 모두 사람의 매장에 동반하여 발견된 것으로, 사람과 개의 특별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고양이의 사례는 최근 고양이의 기원을 새롭게 하는 발견으로 화제가 되었던, 신석기시대 초 무렵의 키프로스섬에 있다(Vigne 외. 2004). 이 섬의 실로로캄보스

Shillourokambos 유적에서 기원전 8천 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양이의 매장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반려동물 고양이의 사례이며, 고양이의 사육이 신석기시대의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양이의 기원이 서아시아에 있다고 한다.

 

서아시아에서 우제류를 가축화한 기원은 재배식물의 기원에 비교해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우제류에서 최초로 가축화된 것이 염소, 양이며, 그것은 터키와 이라크의 산간지대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조금 뒤늦게 소와 돼지가 가축화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또한 동물의 가축화는 시간적으로 식물의 재배화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석기시대의 후반(기원전 7500-6000년 무렵)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이라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은 최근의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에 의해 재고하게 되었다(Peltenbeurg and Wasse 2004 등). 지중해에 떠 있는 이 섬에서는 기원전 8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실로로캄보스, 미로크티아 등)이 발견되어, 그곳에서 원래부터 섬에 생식하지 않는 소, 염소, 양, 돼지, 사슴 등의 동물뼈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분명히 육지(레반트나 아나톨리아)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며, 가축화된 동물이 일거에 섬으로 데려왔다는 신석기시대판 '노아의 방주'로 평가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동물에 명료한 가축화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점, 사슴 등 끝까지 가축화되지 않았던 동물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에서, 키프로스섬에 데려온 동물은 야생동물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왜 야생동물을 섬에 데려왔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는 건 어렵지만, 섬을 방문한 사람들이 식량원 또는 상징적 의미로 동물을 섬에 풀어놓고, 그것을 수렵했다는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동물군이 야생이었는지 가축이었는지 하는 문제를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들 동물이 육지에서 데려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나타내고도 있다. 기존의 생각과 달리, 신석기시대의 전반에 벌써 동물의 가축화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레반트 북부의 PPNB전기의 동물뼈를 상세하게 분석해 보면, 몇 곳의 유적에서 크기의 축소화, 성별의 편중 등이 확인된다고한다(Peters 외. 1999). 최근에는 터키 남동부에서 양과 염소의 가축화, 시리아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서 소의 가축화 등, 최초로 우제류를 가축화한 것은 PPNB 전기의 레반트 북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가 계속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가축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하려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 조성의 변화를 보는 게 유효하다. 그림1-13은 레반트 남부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PPNB기에 걸친 동물 조성의 변천이다.  이것을 보면, 구석기시대 말기(나투프 시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PPNA기)에 걸쳐서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야생동물인 가젤이다. 그러나 PPNB기가 되면 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양과 염소가 점하는 비율이 급증하는 것이다.
그림1-13 레반트 남부의 나투프 시기부터 PPNB기까지 동물상의 변천. Bar-Yosef 1998: Fig. 8에서


PPNB기에 동물상의 변화는 어떠했을까? 그림1-14는 레반트 북부와 키프로스섬의 PPNB기에 동물상의 변천을 정리한 그래프이다. 이 그래프에 의하면, PPNB전기 10-20% 정도였던 가축이 서서히 증가해, PPNB 후기에는 그 점하는 비율이 80-90%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1-14 PPNB기의 야생종과 가축종의 비율 변천. 

야생; 가젤, 사슴, 야생 염소 등. 가축; 염소, 양, 소, 돼지Machecoul 외 2008: 그림5에서

 

 

 

터키 남동부에 위치하는 차요누

Çayönü 유적에서는 가축화의 과정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本鄕 2002). 이 유적은 PPNA기부터 토기 신석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 거주한 유적으로, 한 유적에서 통시적으로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동물 조성의 변화가 관찰되었다. 가축화되는 염소, 양, 소, 돼지 4종이 거주 기간을 거치며 서서히 증가해 나아가는 경향이 발견되고, 특히 염소와 양은 PPNB 후반부터 PN이 되면 출토되는동물뼈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가축화의 지표가 되는 크기의 축소화, 사망연령 구성의 변화에 대해서는먼저 PPNB 중기 무렵에 그 특징이 보이기 시작해, PPNB기가 끝날 무렵에는 뚜렷해진다. 차요누 유적의 성과로중요한 건 가축화가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서 1천 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레반트 지방의 동물뼈 분석에서는 이하와 같은 가축화의 시나리오가 그려질 것이다. 먼저 PPNB 전기까지 어느 정도 염소와 양, 소 등의 우제류의 관리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몇 곳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뼈크기의 축소화와 성비 편중에서 추측된다. 그러나 가축종은 급속히 늘어나지는 않았다. 출토된 동물뼈의 조성에 나타나듯이(그림1-14), PPNB 중기까지 가젤 등의 야생동물이 점하는 비율은 여전히 높고, 염소와 양을 중심으로 하는 가축의 비율이 높아진 건 PPNB 후기부터이다. 차요누 유적에서 분명해지듯이, 야생종에서 가축종으로 이행한 것도 맥류의 재배화와 똑같이 오랜 시간이 걸린 완만한 변화이며, 가축을 사양하는 일이 주요한 생업이 된 것은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유물이 말하는 가축화
맥류의 재배와 이용이 다양한 도구, 설비를 필요로 하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유물과 유구가 비교적 풍부한 데비하여, 가축 사육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는 거의 없다. 그 때문에 동물뼈 이외에서 가축화의 과정을 탐색하는 건 어렵지만 그 시도를 두 가지 정도 들어보겠다.


찌르개(尖頭器)의 변천


하나는 수렵 도구인 찌르개(창날, 화살촉)의 변천에서 간접적으로 가축화를 검토하는 시도이다.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찌르개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형태와 제작방법에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에 편년을 위한 시기 구분과 지역 문화를 설정할 때 지표가 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찌르개의 중요한 변화로 대형화가 있다. 그림1-15는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 유적의 사례이다. PPNB전기(그림1-15-①)의 것은 길이 5센티미터, 너비 1.5센티미터 정도의 것이 많고, 아마 화살촉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상정된다. 이것이 토기 신석기 시기(그림1-15-②)가 되면 길이 10센티미터, 너비 2센터미터 정도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두께도 1센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것이 많다. 그 크기로부터 창날로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림1-15 시리아 케르크 유적 출토의 찌르개
①PPNB 전기 ②토기 신석기 시기


크기의 변화 이외에도 가공(수정)의 방식에도 변화가 발견된다. PPNB 전기의 찌르개는 끝, 가장자리, 밑 부분으로 한정된 부분에 가공이 이루어진다(그림1-15-①). 끝은 튀어나와 찌르는 부분이기에 날카롭도록 가공한다. 가장자리 부분의 가공은 멀리서 공격하는 무기로서 빼놓을 수 없는 석기의 모양을 좌우대칭으로 모양을 가지런히 할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밑 부분의 가공은 자루 부분과 장착하는 것에 관련된다. 이와 같은 가공의 방식은 찌르개의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토기 신석기 시기의 찌르개는 가공된 부분이 매우 많다. 그림1-15-②에서는 찌르개 하반분의 전면에 가공이 이루어진다. 그림1-16은 거의 같은 시기의 시리아 크데일 유적에서 발견된 찌르개이다. 압압떼기(

押壓剝離)라는 기법으로 행해진 가공은 석기의 한 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가공의 의미가 기능적인 것에서 장식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림1-16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 출토의 찌르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한편 그 수량에 대해서도 변화가 발견된다. 유적에서 제작된 찌르개의 수량이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찌르개가감소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유적(또는 지역)에 따라서 차이를 보인다. 이 현상은 빠른 유적에서는 PPNB 후기부터 시작되지만, 시리아 북서부 등에서는 토기 신석기 시기의 중반부터 후반(기원전 7000년대)으로 상당히 늦다.그 시초에 대해서는 유적에 따라서 시기차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찌르개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기원전 7000년대)에 걸쳐서 레반트 지방 전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일어난 찌르개의 변화는 대형화, 가공도의 증가, 수량의 감소라는 세 가지로 정리할수 있다. 대형화에 대해서는 PPNA기부터 PPNB기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는 경향을 볼 수 있고, PPNB 중기에 돌날 제작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그때까지 없던 너비가 넓고 두꺼운 대형 찌르개가 등장한다. 가공에 대해서는 PPNB 후기 이후 그 정도가 늘어난다. 그리고 수량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상의 찌르개에서 볼 수 있는 변화를 통시적으로 정리하면, PPNB 중기까지 대형화되고 있던 찌르개가 PPNB 후기 이후 차츰 만들지 못하게 됨에 따라 기능적인 이유를 넘어서 과도하게 가공되는 것처럼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찌르개의 변화 상태는 수렵도구인 찌르개의 상징적, 경제적인 사정이 변화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시기적으로 보아도 PPNB 후기 이후의 야생동물의 수렵에서 가축 사육으로 동물 자원의 비중이 이동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물 표현
유물에서 가축화의 추이를 탐색하는 다른 하나의 시도는 조각과 조형에서 보는 동물 표현의 변천에 주목한 연구이다(Helmer 외. 2004). 

그림1-17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동물 표현의 변천. Helmer 외. 2004:tableau 2에서.

 

 

 

 

그림1-17은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표현되어 있는 동물의 변천에 대하여 정리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는 표현되는 동물은 소, 고양이과의 동물, 새, 뱀 등 변화가 풍부하다. 이 시대, 동물 표현으로서 석제의 우상과 돌에 묘사한 선각화 등이 있는데, 그와 같은 조형물이 수없이 발견된 유적에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Göbekli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원형 또는 직사각형의 제사용이라 생각되는 건물이 한데 모여 발견되었는데, 이들 건물에는 몇 개의 T자 모양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기둥은 바위 하나를 가공하여 만들었고, 그 크기는 큰것은 높이 5미터, 무게 10톤이나 된다. 팔레스티나의 예리코에서 발견된 '타와'와 비교되는, 서아시아의 초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거석 기념물이다. 인식된 동물은 10종류에 이르고, 특히 뱀과 여우, 멧돼지 등이빈번하게 묘사된다(Peters and Schmidt 2004). 그림1-18은 T자 모양 돌기둥의 한 예로, 측면에 소, 여우, 학 세마리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다른 면에는 소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표현도 있다. 중요한 건 이와 같은 T자 모양 돌기둥에 표현된 동물종의 대부분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식량 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획득된 동물이 T자 모양 돌기둥에 묘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림1-18 터키 괴베클리 유적에서 발견된 T자 모양 돌기둥. Cauvin 2000: Fig. 70에서.

 

 

 

이처럼 신석기시대 전반에 발견된 동물 표현의 다양성은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사라져 간다. PPNB 중기 이후 염소, 양 등의 가축을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포유동물의 조형이 많아진다. 특히 늘어난 건 이들 동물을 표현한 토우이다. 그림1-19는 터키 아칼차이 테페アカルチャイ・テペ 유적(PPNB 중기)에서 출토된 양 모양 토우인데, 이것에서 볼 수 있듯이 손바닥에 들어갈 듯한 크기로 만들었다.

 

 

그림1-19 터키 아칼차이 테페 유적 출토의 양 모양 토우

 

 

 

이와 같이 통시적으로 보면, PPNB 중기 무렵부터 표현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 사람들이 포획했던 다양한 야생동물에서 가축으로 옮겨가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동물 표현의 변화에서 간파할 수 있는 건 신석기시대 후반이 되면 가축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역시 PPNB 후기 이후에 가축 사육이 본격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경목축 문화의 정착과 그 이후

 


여기까지 최근의 동식물 유존체의 성과와 그에 관련된 고고유물을 다루어서 식물의 재배화와 동물의 가축화 과정에 대하여 생각했다. 재배화와 가축화는 모두, 신석기시대 최초의 무렵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경과한 PPNB 전기에 레반트 북부에서 그 최초의 징후가 발견된다. 그러나 농경목축에 강하게 의존하는 듯한 사회가 탄생한 건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며, 최초의 재배화와 가축화가 일어나고 나서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재배화와 가축화의 실태란, '신석기 혁명'이라는 명칭에서 상상되는 것처럼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완만한 이행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림1-20). 이것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던 수렵채집생활을 그만두고 전례가 없는 생활양식을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며, 신석기화의 과정은 다양한 시행착오의 반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1-20 서아시아의 신석기화 개념도



요동치는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라는 설
재배화와 가축화에 관한 의문 가운데 가장 답하기가 어려운 건 '왜'라는 물음일 것이다. 농경의 기원에 대하여 요새 20년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설은 이 책 제2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영거 드라이아스기(기원전 1만1000-기원전 1만 년 무렵)에 일어났던 기후가 다시 한랭해진 영향을 주요한 요인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설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원래 맥류의 이용을 시작했던 나투프 문화의 사람들이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한랭화가 원인이 되어식물자원의 감소에 직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맥류로 확 기울어져, 그것이 재배화로 이어졌다고 한다.그러나 앞에 언급했듯이 맥류의 재배화는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고, 또 가장 오래된 재배종이 출토된 것도 영거 드라이아스기에 상당하는 구석기시대 말기는 커녕 신석기시대 초반(PPNA기)도 아닌PPNB전기이기 때문이다. 영거 드라이아스기라는 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많다.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서는 동물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가축화된 것이냐는 문제에 직결된다. 적어도 육식만을 목적으로 가축화가 행해졌을 리는 없다고 대부분의 연구자가 지적해 왔다. 그 대신 젖 이용이 그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三宅 1999)과 동물을 소유하는 것에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는 설(本鄕 2002, 

Machecoul 외. 2008) 등이 제안되고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농경목축은 구석기시대(갱신세)가 아니라, 신석기시대(완신세)가 되어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서아시아처럼 독자적으로 농경목축이 시작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있을까? 이 오래되고 새로운 문제는 항상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수수께끼'(

Diamond 2000)이다.

 

 

 

서아시아 초기 농경문화의 그 이후 -기원전 7000년대의 변화
PPNB 후기에 이어진 기원전 7000년대는 마을의 재편기에 해당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PPNB 문화의 붕괴'라고 표현되는 대형 마을의 방기이다. 'PPNB 문화의 붕괴'설에서는 자주 레반트 남부에서 PPNB 후기에 성립된 대형 마을이, 주변 환경의 악화에 의하여 파탄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이 설이 최초로 주장된 건 요르단의 아인 가잘 유적의 사례였다(Rollefson and 

Köhler-Rollefson 1989). 이 유적에서는 PPNB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마을의 대형화가 발견된다. PPNB 후기까지 3만 평을 넘는 규모로까지 확대된다. PPNB 후기에는 양과 염소의 사육과 보리의 재배 등에 중점을 둔 생업이 행해지고, 이에 더하여 주변의 다양한 야생 동식물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음 시기(PPNC기=기원전 7000년대 전반)가 되면 마을 규모가 축소되고, 주거 형태와 석기 제작, 매장 등 여러 방면에서 변화가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요인으로 PPNB 후기의 인구 증가에 수반한 농지 확대, 염소의 방목, 연료 획득을 목적으로 한 산림벌채 등 마을 주변의 환경에 계속 주었던 압박이 불러온 주변 자원의 고갈이 지적되었다. 아인 가잘 유적과 때를 같이하여 레반트 남부에서는 PPNB 후기의 몇몇 대형 마을(메가 사이트)가 방기되는 것으로부터 'PPNB 문화의 붕괴'가 일어났다고 알려졌다.  'PPNB 문화의 붕괴'는 레반트 지방 일대에서 확인되는 현상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일이 적지 않지만,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존속했던 유적은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레반트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대저 신석기시대에 한하지 않고 고대 서아시아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영속되었던 마을과 읍은 대부분이 없다. 다양한 요인으로 수십 년이나 수백 년으로 마을이 방기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마을 방기를 문화 붕괴라고 간주해도 좋을지에도 의문이 남는다. PPNB 후기에 발견되는 마을 방기를 새삼스레 크게 평가할 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기존의 인류사에 없는 규모로 발달한 PPNB기의 몇몇 대형 마을에서는 그때까지의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하여 농경목축을 도입했던 것으로, 마을 주변의 자연환경을 크게 손상시키는 난개발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주변 자원의 고갈에 대응하여 너무 크게 구성된 마을을 해체하고, 더 소규모 마을로 나누는 형태로 마을 재편이 행해졌을 것이다. 이 기원전 7000년대의 마을 재편도 신석기화의 과정에서 겪은 인간의 시행착오, 환경에 적응하기의 하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 기원전 7000년대에 발견되는 중요한 유적 동태의 변화에 농경목축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 있다.
확산의 방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서아시아 내륙부의 반건조지대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 전반에 가축인 양과 염소를 동반한 야영지라고 생각되는 유적이 반건조지대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가축을 동반한 유목민이 등장했던 증거라고 한다. 시리아 내륙부의 크데일 유적은 그러한 최초의 유목민이 남긴 야영지의 하나이다. 동물뼈와 함께 플린트 석기의 제작터가 발견되었다. 건물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석기와 동물뼈의 면적인 확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천막이 설치되었다고 생각되는 장소가 추정되었다(그림1-21). 이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뼈의 분석에 의하면, 크데일의 사람들은 가축 양을 소유하고, 내륙 초원 지대에서 생식하는가젤 등의 야생동물을 수렵하면서 살아갔다. 매우 조금이지만, 낫날과 곡물이 출토되기 때문에, 맥류의 재배도 행했다고 생각한다. 유목민의 출현은 PPNB 후기에 성립한 초기의 농경 마을에서 탄생한 새로운 과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림1-21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에서 유물의 출토 상황도(위)와 크데일 유적에서 사람들의 활동 복원도(아래).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또 하나는 서아시아에 인접한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를 경계로, 맥류 재배와 염소, 양, 소를 사육하는 생업은 동으로는 유럽으로, 서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방면이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퍼져 나갔다. 이 농경목축이 확산되는 실태란 대규모 농민의 이주였거나, 농민과 접촉한 현지의 수렵채집민이 농경목축이란 신기술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등 지역에 따라 다양했을 것이라 생각한다(벨우드 2008). 그것은 또한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가 각지의 풍토에 걸맞게 변용되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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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서장 

벼농사 문화가 나아갈 바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2008년 현재 연간 약 60kg 정도이다.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0g 남짓이다. 예전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이는 딱 한 홉에 해당한다. 1965년의 수치는 114kg이었기에, 이 45년 정도 사이에 소비량은반감한 셈이다. 총생산량도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연간 1200만 톤을 넘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부터 900만톤 이하가 되었다. 논의 면적도 1970년대 초반 300만 헥타르를 넘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토지 가운데 다른 작물로 전환한 토지도 있다면, 농업 그것을 그만둔 곳도 많다. 경작방기지가 경작면적의 20%를 넘은 현도 있다. 일본인은 이대로 쌀을 먹지 않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논은 사라질 것인가? 


이 물음에 '과학적으로' 답을 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은 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일본에서 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서술하려 한다.




쌀과 목숨을 둘러싸고 -생태학적으로 본 쌀의 위치


인류를 포함한 동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식물이 만드는 당분이 사용된다. 전분과 지방은 당분의 대체물로 사용된다.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에는 동식물의 단백질이 사용된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획득되었는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 그들의 생산은 점점 한곳에서 이루어졌다. 계절풍 아시아에서 쌀은 저습지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재배 장소에는 쌀(벼) 이외에 물고기와 패류, 곤충 등이 잡혔다. 이른바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이다(佐藤 편집 2008).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또는 고기)'라는 한묶음이 있었다. 그 무대가 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삼포식 농업'이라 부르는, 여름 작물+겨울 작물과 가축을 활용하는 형식이다. 현대 인도에서는 육식을 금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콩과작물+벼과작물이란 한묶음도 있다(佐藤, 이 시리즈 제1권).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은 근현대 일본 열도에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대강은 아마 이 책의 우네 유타카宇根豊씨와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씨의 논고에서 그리고 있다. 우네 씨도 후지이 씨도 '물고기'에는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은 논의 다양한 존재에 있다. '논 학교'라는 NPO를 운영하고 있는 우네 씨는 벼농사의 실천가의 입장에서 논에 사는 생물들을 보아 왔다. 우네 씨 등에 의하면, 300평의 논 안에는 벼가 2000그루 자라고 있는 외에 올챙이가 2만3000마리, 우렁이(둥근논우렁이)가 300마리, 물방개가 50마리, 거미류가 7000마리 정도서식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어림수이지만, 2001년에 우네 씨 등이 전국 조사를 행한 평균치라고 한다. 


우네 씨의 추론 같이, 필시 구조 개선 사업 이전의 논 경관에 섞여 있었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논과 수로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그리고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 가운데 쌀 이외의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논이란 장치가 오로지 벼만의 장치가 된 건 틀림없이 고도경제성장기 이후의 불과 50년 정도의 일이라 생각한다.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는 다량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농업의 세계에서도 기계화가 이야기됐다. 좁고, 고도차가 있는 논을 부수고는 대규모 논으로 바꾸어 버리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분명히 '노동력 절감'을 가져왔지만, 그 대가가 다량의 석유를 소비하여 행하는 농업의 도입이었다. 




농업의 생태적 의미


우네 씨의 논고는 이 50년 동안의 이후에 생산성만 강조하는 농업에 대한 농사짓는 쪽에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성이야말로 목숨과도 같다고 하는 사회 풍조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산성의 한계, 지구환경문제의 분출 등에 의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환경문제의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고려할때 그 의미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생물다양성이 지닌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 유지'란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의 개체수와 관계성이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너무 많이 변화하는 일 없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제초제와 살균제 등의 사용으로 '잡초'와 '해충'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료와 물 등의 '물질'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거나, 또는 가지고나가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도 더하지 않고, 무엇도 빼지 않는' 것이 생태계의 안정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대 농업에서는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물, 비료와 농약부터 온실재배와 농기계용 석유 등을 포함하여 고려하면 방대한 양이 된다. 가지고 나가는 양도 다량이다. 무엇보다 농산물은 생태계 내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태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즉, 현대 농업의 본질은 '고투입, 고수익'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형식은 고작 50년 된 것이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래서는 '논벼농사'가 가져오는 생태계의 지속성은 기대할 수 없다.


생태계의 유지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의론에 대해 세계의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균형을 고려하는 입장에 선 쪽의 비판이 많다. 분명히 저투입형 농업에서는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저하된다. 선진국이 선진국의 이유만으로 생산성을 저하시켜 세계의 식량 생산에 부하를 더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 하고 있는 일은 다음에 기술하듯이 자국의 토지는 놀리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위력을 발휘해 세계의 식량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 모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이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농업 생산과 생산비


농업은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태양광을 사용해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전분이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모두 석유와 석탄 등의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또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물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여기에서는 농업이란 말을 넓게 해석하여 임업과 수산업, 축산업을 포함하여쓰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농업까지 석유를 사용한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제 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등 석유 제품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수산업은 종래 수렵경제의 연장으로 '잡다'에 무게를 두었는데, 요즘 몇 십 년은 기르는 어업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르는 어업이라 해도 과도하게 집약적인 양식은 협의의 집약농업과 마찬가지로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또 종래부터 자원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강했던대규모 원양어업도 에너지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해 버렸다. 물론 지금 바로 이러한 형식의 농업을 전환할 수는 없지만 농업의 의미를 고려한, 장기적 시각에 입각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교역권이 확장됨에 따라 먹을거리도 장거리를 운송하게 되었다. 교역권의 확대는 원래 그 토지에 없는 자원의 융합과 다른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큰 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량의 먹을거리를 몇 천 킬로미터, 몇 만 킬로미터나 운송되면, 그 수송 에너지도 막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캔의 니기리 초밥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어느 어항 근처의 초밥가게에서 먹었던 '도미의 니기리'와 뉴욕의 '초밥 바'에서 먹은 그것과는 운반에 사용된 에너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생산에 사용된 에너지는 대부분 똑같다. 전자에서는 현지의 농가에서 생산된 쌀과 근해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기에 수송에 들어간 에너지는 매우 적다. 그런데 후자는 쌀도물고기도 천 킬로미터의 단위를 운송된다. 게다가 물고기는 수송되면서 냉동이 빠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량적인 비교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지만, '밭에서 위장까지' 가는 사이에 사용된 에너지를 단순히 비교하면 그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초밥의 가격차는 아마 몇 백 배가 안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수송의 혜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대량생산의 은혜를 입어 온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 먹을거리의 안정화를 불러온다는 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없다.


생산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하를 수치화한 생태학적 발자국의 발상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당분과 단백질의 한 묶음을 어떻게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인류와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큰 요소이다. 계절풍 지대에서 '쌀과 물고기' 및 맥류 지대에서 '맥류와 젖' 같은 한 묶음은 생태학적 발자국의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농업 생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대로 옛날로돌아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거리는 되도록 운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아랍 사회 등이 그렇다. 그러한 지역에서까지 식량을 운송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금 당장 농업을 하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손실이 크다. 그러나 그래도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서 운송할지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잡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계절풍 지대의 농업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잡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세 이전의 논벼농사에서 휴경의 큰 이유는 잡초가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전은 불을 사용하여 밭을 개간하는 농업의 방식인데, 같은 밭은 3년 경작하면 다음 해 이후 몇 년쯤은 휴경한다. 그 이유는 땅심의 저하와 잡초의 피해가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휴경은 적어도 고분 시대에는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증거도 몇 가지 알려져 있다. 그 정도까지 잡초의 해는 막대했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 더 많은 노동력이 제초에 쓰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렵부터 토지의 소유제는 명확해지고, 휴경하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는 여지도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농지로 쓰게 된 논에 달라붙어 쌀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근대에 들어서도 똑같았는데, 도시 노동력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김을 매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초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제초제에 의하여 인류는 잡초를 박멸할 수 있었을까? 후지이藤井 씨의 논고를 보는 한, 그건 단정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가령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어느 잡초를 제거해도 이번엔 그 약제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잡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잡초'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유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작물과 잡초는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관계이다. 일본처럼 비가 많고 식물의 생육이 빠른 장소에서 생태계는 방치하면 천이를 진행해 숲이 되어 간다. 경지는 경작이란 교란에 의하여 천이를 억누르는 장소이고, 또 거름기가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적응할 수 있는 건 작물과 잡초뿐이다. 둘은 비슷한 생태적 특성을 가지지만, 한쪽은 인간의 비호를 받고 다른 한쪽은 배제되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잡초가 세운 전략은 철저하게 작물의 모습을 본따는 것이었다. 이런 본땀으로 인해 잡초의 방제는 곤란해진다. 


또한 잡초라고 인식되는 종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농학 관계자 안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밀밭 안의 보리는 잡초'라는 것이다. 그건 혹은 빵밀(일본에서 보통 재배하고 있는 밀은 보통밀임)은 에머 밀이라 부르고 있는 재배종이 당시 그 밭에서 자라고 있던 잡초인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서 생겼다. 빵밀이 지닌 유전정보의 적어도 1배분은 잡초에서 기원한다. 더욱이 호밀이라 부르는재배종(검은 빵의 원료 등으로 쓰임)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조건이 나쁜 토지 등에서 재배식물로 진화해 온것이라 할 수 있다(辻本 2009).


반대로 이전 재배종이었던 식물이 잡초로 전환된 사례도 많다. 일본에서도 잡초 벼라고 하여 문제가 된 '붉은쌀(赤米)'은 중세에 도입된 품종이 근대에 들어서 잡초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를 통하여 저절로 산출한 존재이다. 잡초는 강하고 몹시 거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강하고 거칠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는 '녹색혁명' 이후 제초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제초제를 개발하여 문자 그대로 '제초 방제'를 얻은 듯하지만,앞에서도 적었듯이 현재 상황에서는 그 시도가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뿐인가, 제초제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희소종을 절멸로 몰았다. 즉, 환경을 악화시켰다. 현대 일본의 논벼농사도 기본은 그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현재 상황 대로 논벼농사의 행방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논벼농사의 우위성


일본 열도의 논벼농사에서는 그래도 아직 다른 작물의 경작에 비하면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점이다. 많은 작물은 같은 토지에서 반복하여 재배하면 '연작 장해' 또는 '그루타기'라 부르는 지장을 발생시킨다. 장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물에 따라 다르지만, 수확이 감소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지는등 몇 가지 공통 사항도 발견된다. 그런데 논벼농사의 경우에는 이 연작 장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벼도 밭에서 재배하면 연작 장해가 일어나기에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원인이라 생각된다. 

논벼농사의 또 한 가지 우위성은 논이 댐으로 기능하는 것이다(富山 1993). 태풍과 장마철의 집중호우 등으로 한번에 많은 비가 내릴 경우, 쏟아진 물을 잠시 머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논에 통상은 물이 잠겨 있기에 여름에는 논에서 일어나는 기화열이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논을 건너오는 바람에서 서늘함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몇몇 자치체에서는 휴경논 등에 물을 담아서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논에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는 작다고 생각한다. 기화열의 효과는 그곳에 식물을 심어 놓아야 한층 뚜렷해진다. 그 식물이 호흡한 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많은 기화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흙을 넣은 양동이에 벼를 심은 것과 아무것도 심지 않은 것을 준비하여 물을 담아, 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날마다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벼를 심은 양동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일찍 물이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을까


그런데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던 것일까?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는 야요이 시대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를 꼼꼼히 조사해, 도토리 등 자연식생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많았다고 기술한다. 즉, 논벼농사가 보급되었다고 하는 야요이 시대조차 '농경'의 요소보다 '채집'의 요소 쪽이 컸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고대에 들어오면 식문화는 시대의 권력자와 서민 사이에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문서 등에 남은 귀족들의 먹을거리는 현대 우리들의 눈에도 상당히 호화로우며, 밥 등 그릇에 수북하게 대접했다. 헤이안 시대의 '왕조 요리'를 재현한 교京 요리 '로쿠세이六盛' 주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에 의하면, 당시 귀족의 공식적인 식사에서 밥은 원통형으로 높여서 대접했다고 한다. 다만 대접한 전부를 한번에 먹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밥이 나왔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또, 후지와라 도장은 당뇨병이었단 이야기는 당시 귀족들의 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라 시대의 야마토 지방에서는 제, 소 등이라 부르는 유제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5세기의 오사카 평야에서는 밀의 씨앗과 말의 골격이 출토되어서 목축의 존재가 엿보이기도 있다. 그리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男(1906-2002)는 '기마민족 도래설'을 전개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사실은 기마민족도래설의 재래를 방불케 한다.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키무라 에미木村栄美 씨가 참고가 된다. 키무라는 회화 자료에 표현된 식사의 풍경을 읽고 해석하는 수법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을 밝히고자 했다. 키무라는 귀족, 승려, 일반 서민 각각에 대하여 그 먹을거리를 해석했는데, 밥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 같아 그 한에서는 '밥'이 주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밥'이 쌀밥인지, 또는 현미인지 흰쌀인지, 찹쌀인지 멥쌀인지등 상세한 건 분명하지 않다. 회화에 한하지 않고, 문서가 어디까지 정확히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 서민'에서도 그것은 당시의 선진지였던 교토 주변의 일반 서민이고, 지방을 포함한 서민의 생활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다만, 키무라도 말하듯이, 묘사된 세계가 화가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세의 기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 근세에 빈발한 '기근'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근세의, 특히 동일본에서는 기근이 빈발하여, 테이메이天明 연간을 포함한 몇 십 년 사이에 인구가 격감할 정도의 재해가 되었다. 이 일련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저온(소빙하기라는 말을 하는 연구자도 있음)에서 원인을 찾는 의론이 많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온이란 기후변화는 일종의 방아쇠였으며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가 고려하고 있듯이, 중세 이전의 동북일본은 근세만큼 벼농사에 특화된 농엽 경영이 진전되지 않았다. 


원래 근세 이전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는 쌀보다 잡곡을 주곡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근세란극단적으로 논하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맞추어서 논벼농사를 인위적 생태계의 중심에 놓고, 쌀을 주곡으로 하며, 쌀을 화폐로 삼고, 벼농사와 쌀 음식에 관한 문화를 정통으로 하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층문화가 송두리째 뽑혔을 리는 없다. 지금도 '산나물 캐기' '버섯 따기' 등의관습은 동(북)이 많고 서는 적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도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오모리시 역사민속전시관(2006년 개관) 계고관에 있는 다나카 츄자부로田中忠三郞 씨는 '숲은 시모키타下北의 백화점'이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즉, 쌀을 재배하지 못한 때에도 숲에 가면 먹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을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농사에 지나친 에너지를 주입한 나머지 숲의 관리가 허술해져 '숲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가설로 기억에 남겨 놓고 싶다. 




쌀과 물고기


논이라 하면 현대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녹색의 융단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즉, 논이란 현대 일본인에게는 쌀을 농사짓는 장소이다. 그러나 앞의 잡초란 소제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에서 벼 이외의 식물이 살지 않는 상황은 다량의 에너지를 그곳에 들이부은 결과이다. 우네宇根 씨가 말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논에는 벼 이외에도 많은 식물이 생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것도 우네 씨가 말하듯이- 논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생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된 생태계이다. 그들은 지금은 '잡초'와 '해충' 등 벼의 생산을 저해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역사를 돌이키면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 에너지로 전분과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 논에 있던 생물들은 전분의 공급원으로, 또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이용되어 왔다. 나는 이러한 생산양식을상징적인 의미로 '쌀과 물고기'라고 표현했다(佐藤 2008). 이것은 쌀과 물고기가 한 묶음으로 먹을거리를 떠받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벼농사 개시 이후의 계절풍 지대에서 널리 인정되는 한 묶음이다. 비슷한 한 묶음은 1권에서 전개한 의론에 쭉 이어서 말하면 '맥류의 풍토'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 인도 아대륙에서는 '잡곡과 콩'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존재한다(佐藤 2008b). 이러한 한 묶음은 그 토지와 그 풍토에 뿌리를 내린, 말하자면 '환경의' 한 묶음이 된다. 


현대 일본인의 먹을거리를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약 50년 전의인 1965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쌀의 소비는 최초에 기록되었듯이 110kg대에서 60kg대 전반으로 반감한다. 물고기의 소비라면 14kg이 12kg쯤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유제품을 포함한 축산품의 소비량은 2배 반으로 증가한다. 채소와 과일 등의 소비에도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다. 이처럼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에 대해서 통계로는 쌀의 감소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전 시대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마땅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데, 나의 어린시절이었던 1955년 무렵을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걸 먹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충 꼽아 보아도 논우렁이, 미꾸라지, 물가의 조개류, 벌의 애벌레 등의 동물질과 쑥, 수영, 여러 산나물 등의 식물질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곤충과 그 유충, 사슴, 토끼, 멧돼지, 오리 등의 동물도 예사로 먹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기'라 하면 소와 돼지, 닭 세 종류밖에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만한지도 모른다. 


중근세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씨의 논고가 상세하다. 그것은 논을 포함한 생태계에 생식하는 동식물이 총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틈으로 살짝 볼 수 있는 건 참으로 다양한 식재료의 존재인데, 그것에서도 한층 더 흥미로운 건 이른바 '주식'이었던 전분 공급원에 대해서도 피 등의 잡곡과 토란 등의 덩이뿌리류가 쓰이고 있었던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坪井 1979).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도 또 언급한다.




쌀과 마음


이처럼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은 쌀뿐이었다. 아니, 쌀은 계속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고 쓰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하라다原田(2005)가 말하듯이, 논벼농사 사회에 귀속됨은 고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일관적으로 취해 온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이 반복하여 채택된 배경에는 생산의 실태로서 논벼농사에만 의지할 수 없는 역사와 다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생산의 갈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보고 있다(網野 1997).


그러나 정치와 권력의 예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벼농사는 그 무대(어떤 장소에서 벼가 재배되고 있는지)의 다양성에 관계 없이 지속적인 생산방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에 찬성한다. '부분적으로'라고 자른 건 특히 고도성장기 이후의 이른바 '고투입 고수익', 즉 다비다수의 벼농사가 전혀 지속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의 광범위함 지역에서 쌀은 계속 생산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편, 예를 들면 유럽에서 맥류는 감자 이전에는 '주식'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맥류라도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다양하다. 같은 밀이라도 보통밀 외에 파스타용 마카로니밀이 있다. 콜럼버스 이후의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를 중심으로 감자가 전분 공급원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종이 무언가 특별한 곡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구조는 생기기 어려울것이다. 


쌀의 우위성을 '신찬神饌', '의례' 등의 측면에서 본 것이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씨의 논고이다. 이들은 지금은 경사스런 자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은 신년의 첫 참배(詣)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떡을 먹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신년을 축하한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라 해도- 일본인과 쌀, 벼농사와의 강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찍이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가 <덩이뿌리와 일본인(イモと日本人)> 안에서 언급한 '떡 없이 정월'의 민속 사례가 보여주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일본과 서일본은 재배되는 작물과 그 품종, 수반된 동식물, 숲의 식생 등에서 이질적이다(靑葉 1980, 佐藤 2009). 아카사카赤坂(1999)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몇 개의 일본'이란 단어를 고안했다. 몇 개의 일본을 기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이 쌀과 벼농사 문화에 수렴했던 과정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지배층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쌀이 가진 영양가를 들 수 있다. 쌀은 인류에게는 주로 전분의 공급원이지만, 약간의 단백질도 포함한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쌀의 단백질은 이 아미노산의 대부분을 모조리 포함한다. 그래서 가령 동물성 단백질 없이 쌀만 먹어도 기아 상태가 되기 어려워진다. 한편 또 다른 곡류의 왕인 밀은 단백질의 총량은 쌀보다 많은데 아미노산의 균형이 나빠, 그것만 먹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성서에도자주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조합은 빵의 그러한 결점을 포도주가 보완하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브랜드 지향과 가짜 고시히카리 소동


쌀을 특별시하는 일본인의 사고 경향은 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는 그 뒤 연속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먹을거리 속임'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로, '속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의 상세한 내막은 이 책에 실려 있는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씨의 기고문에 양보하려 하고, 이 문제의 저류에 있는 것이 '브랜드 지향'이라고도 할 만한 사고 경향에는 없을까 생각한다.


브랜드 지향의 사고 경향은 다양성의 저하, 특히 품종의 다양성의 상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벼 품종의 다양성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이전에 기술한 바이지만, 그렇다면 고시히카리 이후 벼의 품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고시히카리란 품종의 농림등록번호는 '농림 100호'이다(등록년도는 1956년). 2008년 현재 등록번호는 431번에 이르고 있기에, 나라가 관여한 것만 고시히카리 이후 약 50년 동안 3000을 넘는 품종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던 품종의 예비군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벼농사 농가도 소비자도 그 존재의 극소수밖에 모른다. 현실에서 재배된 일이 있는 품종,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도 200가지 정도를 밑돌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의 '브랜드 지향'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시장의 존재도 또한 눈감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느 사회가 뛰어난 기술력(사람)과 에너지(물질)를 투입하여 새로운 부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체계가 없다고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책임은 품종개량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술을 살리지 못했던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성하건데, 일본에는 메이지 초기에 400가지를 넘는 품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200가지 안팎인데, 품종의 수를 다양성의 지표로 삼으면 이 100년 동안에 다양성의 정도는 20분의 1까지 저하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중반의 품종과 지금 품종의 큰 차이는 품종이란 하나의 집단 안의 다양성에도 있다.품종 안의 다양성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 벼의 품종은 어떤 품종도 완전한 클론은 없다. 고시히카리조차 엄밀하게 비교하면 현마다 다른 유전자형을 나타낼 터이다. 그리고 같은 현에서 생산한 고시히카리 안에도 몇 가지 유전자형이 섞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다형성은 옛 시대의 품종에서는 훨씬 크고, 같은 품종의 개체를 많이 심어서 비교하면 키와 개화일, 쌀알의 크기 및 모양 등 다양한 성질에서 차이가 발견되었다. 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행한 품종개량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순계분리'법은 재래종 안에서 우수한 성질을 가진 그루를 골라내어 그 종자를 증식하는 원시적인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유효했을 정도로 당시의 품종은 한 가지 품종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벼의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벼농사 문화와 일본의 장래


일찍이 야나기다柳田의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이며 단일한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과연 이제 없다(赤坂 1999). 농경 문화만 보아도 일본 열도에 건너온 것은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온 것 외에, 북쪽에서 또는 남쪽에서 건너온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그러한 문화 복합의 안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佐藤 2009).


그렇게 하면 쌀을 먹음과 벼농사의 문화가 언제부터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듯이 된 것인지는 역사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인이 상고 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없다. 일본 열도가 그 무렵부터 온통 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쌀농사와 쌀밥은 -적어도 서일본에서는- 사람들의 동경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회화 자료에 나타난 쌀밥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건 그러한 점일 것이다. 


근세에 쌀은 통화의 역할을 짊어질 만큼 중요한 물자로 여겨졌다. '고쿠다카(石高)'라는 일본의 독특한 단어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섬(약 150kg)은 성인 남자가 1년을 사는 데 필요한 쌀의 양이다. 그것은 또한 무사와 한이 몇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실제 수량으로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제력을 보여주는 도량형으로 통용된 것이 쌀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에 사는 일본인에게도 쌀은 특수한 존재이다. 고베神戸  아와지淡路 지진의 부흥에 들어갔던 자원봉사 사람들과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침밥으로 모닝빵을 배포받은 쪽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받은 순간 의기가 올랐다고 한다. 역시 쌀에는 무언가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걸 쓰는 게 연구자로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힘'은 물질만능주의인 현재의 일본인이 돌아볼 만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표명하고 <유라시아 농경사> 제2권의 서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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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1. 벼 재배와 논벼 농경사회 

             -일본 열도의 경우 若林邦彦



벼의 재배가 그대로 논벼 농경사회의 성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농경을 주체로 하는 사회의 성립이나 확산에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벼농사 사회가 많이 형성된 아시아 각지에서 횡단적으로 고찰해야 하지만, 실제로 상세한 인간 집단의 동태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역과 시대는 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고 유적을 농밀하게 조사하여 상세한 사례연구를 제시할 수 있는 일본의 야요이 시대 사회의 성립을 둘러싼 의론부터 논벼 농경사회 확산의 조건을 살피고, 아울러 그 이전의 벼 재배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야요이 문화 확립에 대한 기존 시나리오


최근 중국 대륙 등에서 벼농사의 발생에 대한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양쯔강 유역에서 1만 년 전의 벼가 발견된 것이 이야기되고 있다. 한편 전라산田螺山 유적(Zheng, Sun, Nakamura 2000)의 상세한 발굴조사에서 검출된 벼 재배는 다양한 수렵채집 활동과 함께 있었던 일로 판명되어 반드시 생업의 중심은 아니었다고 한다. 즉, 벼재배 개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여 중국 대륙에서 단순히 농경 문명의 개시기가 소급된다는 의론에는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벼농사 농경사회 그것이 벼 재배 이후에 나와, 동아시아에서 단계적으로 형성되어 왔냐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 대륙에서 농경사회가 확립된 뒤에 그것이 어떻게 동아시아 각지에서 확산되었느냐는 문제를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본격적인 벼농사 중심 사회가 어떻게 하여 확산되었냐는 것이다. 생업의 한 수단으로서 벼 재배의 기원과는 별개로, 고대에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농경사회란 구도의 밑바탕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것도 이미 벼농사 농경을 둘러싼 큰 문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확립된 농경 중심 사회가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선행하여 성립되었단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건 어떻게 하여 확대되어 갔는가? 그에 대해서는 농경 기술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집단이 이주, 이동하여 확산되었다는 모델이 있다. 특히, 일본 열도에서 초기 농경사회, 즉 야요이 문화의 확산과 확립에 대해서는 조선 반도서기원을 하는 농경집단의 이주와 이동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 배경으로 인골 분석의 문제가 있다. 조몬 시대의 인골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 이후의 인골에서는 큰 키와 고안화高顔化라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그러한 변화는 조선 반도의 인간 집단이 갖는 형질이 유입되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여 상이한 신체 특징을 가진 인간 집단이 일본 열도에 건너와, 그 계보가 되는 집단이 열도 각지로 벼농사 농경사회를 확산시켰다는 느낌이 유포되었다. 결과적으로 '조몬인 Vs 야요이인'이란 상황이 존재하여,그 결과 후자가 전자를 석권했을 것 같다는 핵심어가 사회에 뿌려졌다(국립과학박물관 2005).


그러나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그 의론의 발단이 된 큰 키와 고안 형질을 가졌던 야마구치현 토이가하마土井井浜 유적의 인골군은 발굴 당초 야요이 시대 전기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현재는 야요이 중기의 인골 매장을 다수 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山田 1999). 즉, 야요이 문화 확산의 초기부터 앞에 언급한 형질의 인간집단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을리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킨키近畿 지방 야요이 전기의 고베시 니가타新方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군은 형질로는 조몬 인골의 특징과 아무런 변화가 없고(片山 1998), 야요이 문화 정착과 형질 변화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는 예도 적지 않다. 


정말로 이주, 이동으로 벼농사 사회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 문제를 일본 열도에서 가장 이 시기의 야요이 시대 유적의 조사가 진행되어 상세한 자료가 존재하는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검증하고 싶다.



오사카 평야에서 야요이 문화가 전파된 모델


오사카 평야에서 최후의 조몬 토기라고 하는 돌대문 토기와 최초의 야요이 토기라고 하는 온가가와遠賀川식 토기는 제작방식이 크게 다르다. 특히 토기의 형태를 만들 때 기본이 되는 점토띠를 쌓아올리는 방식이 약 1만 년 동안 이어진 조몬 토기의 수법과 달리 조선 반도의 전통적인 수법에 의해 제작되었다. 전자는 토기의 안쪽부터 점토띠를 접착시키는 데 반해, 후자는 바깥쪽부터 접착시킨다(家根 1984). 이것은 토기 제작의 기본에 외래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수법이 도입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에서는 주체가 되는 크기도 달라 용도, 즉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양식도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佐藤 1999, 濱田 2003). 이러한 점에서 두 가지 토기 양식을 제작해 사용했다는 건 서로 다른 인간 집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오사카 평야에서는 각각을 주체로 하는 집단이 평야와 산지 주변에 동시에 존재했다는 설도 제시되었다. 이른바 벼농사 중심 생활의 새로 온 이주자가 저지대에, 기존의 수렵채집 생활자가 산지 주변에 공존했다는 설이다. 이 배경이 되는 건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가 모두 출토된 유적이 많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토기 양식의 공존 기간을 인정함에 따라 '공존론'이 성립하고, 이주집단에 의한 벼농사 사회 전파론이 긍정된다는 순환이 성립했다. 이것은 정말일까? 필자는 이 상황을 상세하게 재검토해 보았다(若林 2002).


그 결과, 오사카 평야 중부의 조몬, 야요이 이행기의 26개 유적 가운데 같은 유구(쓰레기 구멍이나 구조 등)에서두 가지 토기 형식이 함께 발견된 건 온가가와식 토기의 최초 단계뿐이라는 걸 밝혔다. 게다가 그 안에서 돌대문 토기가 주체가 되는 예는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 10개의 사례 이상은 온가가와식 토기 중에서 한두 조각의 돌대문 토기가 섞인 예뿐이었다. 고고 유적에서는 직전 시기의 토기가 작은 조각으로 그보다 새로운 유구가 매장된 흙에 섞여 있는 예가 부지기수이다. '함께 발견된다'는 것만으로는 두 가지 토기 형식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두 종류의 토기가 안정적인 비율로 복수의 유적에서 공존하는 것이 동시존재의 근거이다. 이런 점에서 두 가지 토기 형식이 공존했던 기간은 눈에 띄게 짧아지든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돌대문 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온가가와식 토기로 변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공존'은 아니다. 결국은 새로 온 이주집단이 농경사회를 가져왔다는 모델은 고고학적으로 근거를 잃는 것이다.


하나 더, 이주집단에 의한 사회변화 모델에 대해서 부정적인 예가 있다. 야요이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대륙계 간석기라는 도구류가 있다. 벼 수확을 위한 돌칼, 목기 가공용 외날 돌도끼, 벌채용 양날 돌도끼이다. 이 가운데 킨키 지방에서 돌칼은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안정적으로 출토되는 것이고, 그 이외에는 야요이 전기의 말미가 되기까지 출토수가 뚜렷하게 적어진다. 이것은 벼농사와 목기 가공 등의 기술체계를 지녔던 집단이 그대로 찾아와 사회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요소가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야요이 사회, 즉 일본의 본격적인 농경사회가 확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토기의 변화는 크지만, 그러한 다양한 문화 요소 변화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주집단에 의한 문화의 교대가 아니라, 조몬시대 이후의 인간집단이 중국 대륙과 조선 반도에 있었던 벼농사를 시작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 요소를 서서히 들여와서 형성된 것이 야요이 문화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동아시아 농경사회가 광역화된 건 단순히 집단 이동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지역에서 농경사회로 변화하는 요소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필요성에쫓겼을 때 재래집단이 사회, 문화 변화를 일으켜 여러 변화가 성립된 것은 아닐까?



논벼 농경사회 이전의 벼 재배


그럼 본격적인 농경사회 출현 이전의 벼 재배는 일본 열도에서 어떻게 확인되는 것인가? 2007년 가을에 일본 고고학협회에서 "열도 초기 농경사의 새로운 시점"이란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열도 안의 선사시대 식물 유체 출토 사례를 집성하여 검토한 연구회였다. 그 안에서 식물 유체의 출토 사례를 통해 보는 한 벼와 보리, 기장에 대해서는 조몬시대 후기부터 재배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고 여러 연구자들이 보고했다. 즉, 농경사회 이전에 잡곡복합의 식물 재배가 야요이 시대보다 이전으로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큐슈 지방의 잡곡류 종자의 출토 세트는 최근 조선 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서부로 농경이 전파된 경로의 유력 후보지라는 산둥 반도의 벼, 맥류, 잡곡 복합농경에 유사하다는 것도 지적되었다(小畑 2007).


다만, 조몬 후기의 벼 출토 사례에 대해서는 큐슈 지방이 주체라는 점에서 일본 열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재배가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수많은 조몬시대의 생업 가운데 일부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 기술한 대로, 중국 대륙의 초기 벼 재배 사례에서도 농경 주체 사회 이전의 식물 재배 사회가 존재했다. 열도안에서도 그와 같은 시기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근년의 고고학에서도 일반적으로 되고 있다. 앞으로는 그러한 생업 체계의 상세한 모습과 야요이 시대 이후와의 사회, 문화 구조의 차이를 정의해 가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업 전략이란 다양하여, 광역 교류망을 통하여 여러 가지 수법이 있을 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광역에서 사회변화와 생업 체계 변화가 연동하여 일어난 경우가 있다. 전자가 단순한 벼 재배, 후자가 농경사회 확립(일본의 경우, 야요이 사회의 확립)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변화도 대규모 식민이 없어도 실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보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전후의 문화, 사회, 환경의 여러 요소를 분석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고고학, 인류학, 식물학 등의 여러 분야는 그를 위하여 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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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서장  계절풍 농경권의 사람들과 식물






들어가며



왜 지금 농경인가


인간은 왜, 농경이라 하는 '귀찮은' 일을 시작한 것일까? 그 전의 생업인 '수렵채집'과 어째서 결별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답은, 사실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가설은 있지만 모두 '넘고처지어' 결정적으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물음은, 말하자면 연구자의 놀이 같은 것이라 어떠한 결론을 내려도 일반 사회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농경이라는 생업은 -여기에서는 목축을 포함하여 농경이란 용어를 쓴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다시는 그만둘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금단의 사과에서 '금단'이란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농업을 시작하고 난 뒤 1만 년 사이에 인간 집단은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며 인구의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사회가 큰 혼란에 빠져 생산활동이 마비되어 버리는 '붕괴'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게다가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해 왔다. 예를 들면, 사막의 풍토(와츠지和辻 1935)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왕조(우르 제3왕조) 무렵부터 염해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Maekawa(1974)에 의하면, 인간은 염해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에 필요한 대처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염해를 입어 붕괴한 사회가 잇따랐다. 2000년 전쯤 루란 왕국도 염해로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루란 왕국의 사람들은 우르 제3왕조의 붕괴에 대해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는 잘못을 되풀이한 셈이다. 인류는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역사라는 개념을 갖추어, 과거의 선배들이 저지른 이상한 실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농경의 역사를 아는 것은 단순히 교양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떻게 했을 때 농업생산이 붕괴되었는지를 아는 길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 될지, 혹시 가령 불행하게도 붕괴가 찾아왔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등을 알 수 있다. 


그 뒤쪽 끝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인류는 제2차대전 이후 반 세기 이상 지역적인 재해와 사회적 혼란은 이외에 큰 붕괴를 경험하지 않았다. 반 세기 이상이란 시간은 현재 인류의 평균수명으로 보면 한 세대를 넘는 것이다. 즉,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큰 붕괴 현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붕괴가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되면 붕괴라는 사실은 구전되든지 문서에 기록되든지 하는 것 말고 영원히 잊혀진다.




농경 -그 연구사  


농경과 목축에 관하여 포괄적인 연구를 행한 연구자가 세계에 몇 명 있다. Sauer(1952)와 나카오中尾(1996)은 세계의 농업 체계를 분류하는 작업을 행했다. Harlan(1975)도 유사한 연구를 행했는데, 나카오 등에게 없었던 점은 농업 이전 인류 집단의 생업에대하여 거론한 바이다. 20세기 말쯤부터 농업이 환경의 개변과 문명 발상에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농업의 기원을 종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도가 몇 번이나 행해졌다. 콜린 텃지는 농경의 기원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현생 인류) 사이의 생태적 지위를 둘러싼 불화라고 파악한다(텃지 2002).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문명붕괴>, 피터 벨우드Peter Bellwood의 <농경 기원의 인류사>도 분야를 횡단하는 시각으로 쓰여진 훌륭한 저작이다.


재배식물과 가축의 기원, 전파에 관하여 연구한 연구자는 각론을 포함하면 여러 명이다. 오래된 것은 <재배식물의 기원>(de candolle 1953)을 시작으로, 그 뒤를 이은 같은 이름의 책(바빌로프의 <재배식물의 기원에 관한 연구(1928)>) 등이 고전으로 꼽힌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Food는 인용이 좀 오래된 것이지만 비주류 작물까지 다룬 좋은 책이다. 벼에서는 가토 시게카네加藤茂苞에 이어 岡彦一과 그 공동연구자가 행한 품종의 유전적 분화에 관한 일련의 연구가 있다(Oka 외, 1953). 또 중국에서는 周拾錄(1957), 丁頴(1961) 등이, 특히 중국의 벼 기원에 대하여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1980년대부터 일련의 분자생물학 성과도 벼의 기원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이 책의 石川隆二, 中村郁郞 등의 논문에서 다룬다. 밀에 대해서는 水原均과 그 공동연구자들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다. 보리는 세계에서 생산량이 4위인 작물로서, 高橋隆平과 그 공동연구자가 많은 연구를 남겼다. 먼저 이른바 '맥麥'에 대해서는 2009년 봄 맥류 연구의 전문가들이 직접 <맥의 자연사(麥の自然史)>라는 책을 홋카이도 대학 출판회에서 간행했다. 이외에도 서류에 대해서는 <서류와 인간(イモとヒト)>(吉田, 堀田, 印東 2003)과 Salaman(1949)의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등의 훌륭한 저작이 있다. 


세계를 석권한 가축 종의 수는 아마 주요 곡물 종의 수와 같을 정도로 소수일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소, 양, 염소, 돼지, 말 5종을 '주요 5종'이라 부른다. 이외에도 분포 지역이 제한된 가축(다이아몬드는 남미의 알파카, 라마 2종과 낙타, 순록, 당나귀, 물소 등14종을 들고 있다)이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도 분자유전학의 수법을 이용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에서 기원한 농경의 요소



농경은 녹말과 단백질을 얻기 위한 한 수단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에너지 공급원인 당분과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이다. 당은 보존이 꽤 어렵기 때문에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당의 분자가 중합되어 생성된 '녹말'을 쓴다. 그 때문에 필요한 영양소는 녹말과 단백질이라 바꾸어도된다. 녹말원으로는 쌀, 밀 등 곡류나 타로, 바나나, 백합 등의 뿌리채소류, 밤, 도토리 등의 견과류가 알려져 있다. 단백질원으로는 가축과 그 야생종인 포유류, 어패류, 조류, 곤충 등이 이용되고 있다.


어느 토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을 결정하는 것은 그 토지의 기후와 풍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후와 풍토에 의하여 규정되어 온 생태계이다. 농경 이전의 사회에서는 그 토지에 살고 있던 동식물이 이용되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에는 여기에 가축과 작물이추가되었다. 가축도, 작물도 그 풍토에 살던 야생의 동식물을 인간이 가축화(재배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라시아 각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이 어떻게 조합되는지에 대한 佐藤(2008a)의 작업을 그림 1에 실어 놓았다. 그림에 보이듯이, 녹말원과 단백질원의 조합은 토지마다 뚜렷하게 다르다. 



그림1


흥미로운 점은 그 조합의 지역성이 크게는 和辻(1935)가 주장한 풍토와 매우 합치한다는 것이다. 계절풍 풍토에서 성립된 녹말과단백질의 기본적인 조합은 '쌀+물고기"이다(佐藤 2008a). 인도는 여기에 특수하게 '잡곡+콩'이 조합된다. 다른 곳에서는 단백질원으로 쓰인 동물성 단백질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쓰이지 않고, 대신 고단백질의 콩류가 활용되고 있다. 한편,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고기·젖'의 조합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북쪽에서는 녹말 공급원으로 16세기 이후 감자가 추가되었다.또 북유럽에서는 보리·감자+물고기라는 조합이 등장한다. 유라시아의 북쪽에서는 '잡곡+고기·물고기'라는 조합도 볼 수 있다. 일본 열도의 동북부도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지역에 속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녹말의 공급원은 크게 변천해 왔다. 그 일반적 경향으로는 (1)영양번식하는 것에서 종자번식하는 것으로, (2)목본을 시작으로 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에서 두해살이 초본으로라고 하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녹말의 특성은 그 운반과 보존이 쉬운 성질이 장점이다. 이 두 가지에 뛰어난 것이 옮겨져 결국 세계에 퍼진 것이다. 이 두 특성이 식물의 진화 방향과 비슷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덩이줄기를 이용하는 감자는 유럽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한편 단백질 공급원은 썩기 쉽고(보존성이 떨어짐), 또 운반도 어렵다. 그 때문에 최근까지 그 토지에 고유한 단백질 공급원이 있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영국의 고고학자였던 고든 차일드는 인류사를 고찰하여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환한 시점을 신석기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는 산업혁명에 대비될만한 인류 역사의 대변혁이란 의미이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에는 인간 활동에 확실히 크나큰 차이가 있다. 특히 토기의 등장은 먹을거리의 저장과 조리와도 관련되어, 인류의 식생활을 크게 바꾸었을 것이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먹을거리의 저장이 농업의 발달에 따랐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체계의 변화, 토기의 등장과 보급, 식생활의 변화라고 하는 대변혁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지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다.


일찍이 佐佐木은 인류가 농경을 받아들인 과정을 '프로세스'라고 불렀다(佐佐木 1993). 즉 佐佐木은 농경문화의 수용이 혁명과도같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천천히 진행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중국 장쑤성의 룡큐쩡龍虬莊 유적에서는 7000년 전에서 5200년 전까지 1800년에 걸쳐서 수렵채집 경제로부터 벼농사 경제로 이행한 경향을 살필 수 있다(龍虬莊 1999). 그와 같은 점은 밀의 진화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Tanno와 Willcox(2006)는 서아시아 네 곳의 유적에서 출토된 밀(아마 사배성 밀로 여겨짐) 이삭의 가운데 축에 남아 있던 탈립의 자취를 상세하게 살펴, 주력이 야생형(탈립형)에서 재배형(비탈립형)으로 이행하는 데에 30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발표했다. 그러하다면,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이 '프로세스'라는 佐佐木의 지적은 동아시아 벼에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서아시아의 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된다.


'프로세스'론은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을 일직선으로 점점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과정을 엉성한 그물코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에 일직선의 과정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의 학문에서는 그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를 말할 뿐 정확히는 아직 모른다.


또한, 룡큐쩡 유적의 자료와 그 해석에 대해서는 졸저 <벼의 역사(イネの歴史)>(佐藤 2008b)에 상세하게 기술했기에 거기에서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농경이 기원하기 이전 시기


대저 현생인류가 생겨 그 한 무리가 아프리카를 떠난 것이 1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무렵이다. 아프리카를 떠날 당시 인류에게 농경 문화는 없었다. 그 뒤 그들은 급속하게 온 세계로 퍼졌지만, 그들의 행선지마다 선주민들과 만나 여러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그들의 일파가 서아시아, 곧 레반트 회랑 일대, 투르크 동남부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원류부 일대에 도달한 것은 몇 만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篠田 2007). 텃지에 의하면, 이때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다만 그 시기는 추위와 더위가 자주 오락가락하고, 지금의 페르시아만도 육지였다고 한다. 현생인류는 그 뒤 사방으로 이동해, 동으로 이동한 한 일파는 5만 년 조금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순다랜드라고 불리는 남중국해 일대에도 이르렀다.


텃지는 인류가 최초로 농경과 비슷한 행위를 행한 곳이 네안데르탈인과 만났던 페르시아만부터 서아시아가 아닐까 한다(텃지 2002). 도대체 인류는 왜 이동한 것일까? 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인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을 채택하려고 한다. 보통 생태계 안에서는 거기에 사는 동물과 식물의 수가 엄밀한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선주하던 인류도 또한 순수하게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지금은 '현생인류'라고 불리는 집단이 침입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유사한 생태적 지위에 있던 선주민과 현생인류 사이에 긴장관계가 발생했다. 그러나 두 집단이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것은 아니다. 텃지는 현생인류의 승리는 그들이 더 농경과 목축에 가까운 생업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현생인류는 토지의 한 귀퉁이를 점유하고 그곳을 갈아엎거나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동물의 새끼를 기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밀고 들어간 생태계는 현생인류의 '체취가 풍기는' 생태계가 되었다. 그곳은 어쩌면 야생동물에게도 선주민에게도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 같다. 신인류의 시치미 떼고 대수롭지 않게 하는 행위가 선주민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일이 현생인류가 가는 곳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현생인류가 그와 같은 일, 즉 농경과 목축의 선구와 같은 생업을 확립할 수 있었다면, 그 성공담의 숫자만큼 '농경 기원'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현생인류는 순수한 수렵채집인이었다기보다 유용한 식물에 눈을 돌려 그것을 확보하거나, 또는 길들이기 쉬운 동물을 길들이거나 새끼를 사육하는 일을 통하여 차차 주변의 생태계를 만들어 바꾸어 나갔다고 생각한다. 야생동물과 선주인류의 집단은 점점 현생인류의 영역에서 점점 멀어져 가지 않았을까 한다. 



농경의 완성까지 지난 길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농경이란 작업을 완성했을까? 이에 대해 몇몇 연구자가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하고 있다.


완성된 농경이란 먼저 (1)사람들에게 동식물을 관리한다는 명확한 의도와 지식이 있고, (2)그에 필요한 도구와 장치를 사회적으로 지니며, 또한 생활에 필요한 자재 가운데 적어도 일부를 그 행위에 의하여 획득하고, 더하여 (3)이러한 행위에 적응하는 전용 동물과 식물(곧 가축과 작물)을 지니고 있을 것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아마 인류가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것은 첫 번째 조건, 즉 동식물을 관리하는 의도와 지식이었을 것이다. 농경의 첫 번째 단계는 사람에 의해 동식물이 관리되는 것이다. 다만 이 단계는 이전의 수렵, 채집과 고고학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2)의 도구와 장치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덫이나, 숲과 초원에 불을 놓아서 식물의 발아를 유인하거나 그에 의하여 동물을 꾀어내는 행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새끼를 포획하여 사육하는 일 등도 이 단계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러한 행위는 고고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조몬繩文 시대의 일본과 신석기시대의 중국에서는 멧돼지 새끼의 뼈가 출현하는 빈도가 높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內山 2007, 龍虬莊 1999). 이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의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최초의 두 단계까지는 생태계의 개변이 정주에 의하여 느리지만 착실히 진행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면 인류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가축과 작물이 무게 중심이 되면, 수렵·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은 절망적일 정도로 어렵다. 그것은 가축과 작물은 사람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그 무렵에는 인류의 주변에 수렵·채집의 대상이 되는 식량자원이 바닥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풍토·기후와 농경


풍토와 기후


농경은 이전 시대인 '수렵과 채집'이란 생업을 이어받아 성립했다고 생각한다. 수렵과 채집은 완전히 자연에 의존하는 생업 형태이기에, 그곳에 어떠한 양식의 수렵·채집이 성립하는지는 자연식생과 마찬가지로 그 토지의 기후에 의하여 거의 일차적으로 정해진다. 기후학자 쾨펜Köppen은 이 관계를 기초로 하여 식생 등을 가미하면서 세계를 31개의 기후구분대로 나누는 발상을 발표했다(발견은 1920년 무렵). 이것은 지금도 쓰이는 개념으로, 교과서 등에 종종 등장한다. 또 키라吉良(1949)은 식생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기온)을 들어 '따뜻함의 지수'(온량지수라고도 함)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뒤에는 여기에 추위의 지수도 추가해, 이들을 조합하여 온도의 월 변화라는 자료로 식생을 설명하는 방책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추위의 지수'도 고안된다. 따뜻함(추위)의 지표란 달마다 평균기온이 5도 이상(이하)이 되는 달에 대하여, 각각의 월 평균기온으로부터 5를 뺀 값(5에서 월 평균기온을 감한 값)의 합이라고 정의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도 키라의 온량지수도 모두 식생을 온도와 강수량이라는 간단한 지표로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각각 그에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와츠지가 <풍토>의 집필을 시작한 것이 1928년 무렵으로, 이는 쾨펜보다 약간 늦다. <풍토>는 와츠지가 유럽 유학(1927~1928년) 때 견문한 각지의 모습을 기초로 썼는데, 이 유럽 유학 중에 쾨펜 또는 그의 학설과 접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풍토>에는 구체적인 기후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토>가 규정하는 세 가지 풍토는 쾨펜을 시작으로 하는 기후지리학의 구분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그 정도까지 기후를 구분하는 경계가 명확하고, 또 그것이 자연식생만이 아니라 토지에 살고 있는 인간 집단의 농경과 문화를 규정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풍토는 -그것을 기후 구분이라는 의미로 쓰든지 인간적 고찰과 와츠지 자신이 고안한 '풍토'라는 의미로 쓰든지- 각각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농경이란 요소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와 농경


농경이 성립하고 나서도 기후가 농경의 요소를 규정한다는 골조에 큰 변화는 없었다. 예를 들면 벼는 냉대에서는 최근까지 재배되지 않았고, 또는 보리가 열대 평야에서 재배되는 일도 없다. 


작물의 번식, 즉 개화와 결실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와 함께 일장(낮의 길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야생식물에게도 공통인데, 식물에게는 크게 단일식물과 장일식물의 차이가 있다. 앞의 것은 가을에 해가 짧아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우고, 뒤의 것은 봄에 해가 길어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운다. 낮의 길이는 그 토지의 위도에 따라서 엄밀하게 결정된다. 그 때문에 위도대를 횡단하는 방향(즉 남북 방향으로)으로 식물을 이동시키면 개화하는 시기가 변하여 큰 어려움이 따른다. 식물은 동서 방향으로는 비교적 쉽게 이동하지만 남북 방향으로는 쉬이 이동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작물의 품종개량을 거듭하여 몇몇 작물에서는 위도대를 뛰어넘는 일이 가능해지는 큰 유전적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벼가 기원한 곳은 북위 20도에서 30도 사이의 아열대 지역인데, 현재는 적도 바로 아래에서부터 북위 45도에 이르는 냉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이것은 '일장중위성日長中位性' 또는 '불감광성'이라 하는 단일성(또는 장일성)을 잃은 특수한 유형의 출현에 따르는 바가 크다. 나중에 기술할 '북쪽 회랑'에서는 가을에 심어서 추위를 겪고 나서 꽃을 피우는 것이 본래의 성질이었던 보리의 종류에 '춘파'라고 하여 여름철에 생육하는 특수한 품종군이 분화되어 있다.


인간에 의한 품종개량은 저지대부터 고산지대에까지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곡물이 이에 해당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고산에서 살았던 작물이 산을 내려온 사례도 있다(예를 들면 감자). 원래는 반건조지대에서 기원한 보리인데 습윤에 강한 '동아시아형'이 분화된 것도, 또 원래는 수생식물이었던 벼가 밭벼라고 불리는 밭농사용 품종으로 분화된 것도 인간의 노력으로 품종개량이 된 바이다. 이러하면 어떠한 작물(또는 품종)이 어디에 적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인간 집단의 선호와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동물에도 식물과 비슷하게 일장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일장 시간이 길어지는 시기에 번식 시기가 겹치는 동물을장일동물(말 등)이라 하고, 또 그 반대의 동물을 단일동물(양, 염소 등이 해당됨)이라 부른다. 또한 그들도 위도대를 넘어가는 이동은 번식 시기를 변경시키게 되어, 그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유라시아는 본래 동서로 긴 대륙이라서 동물과 식물도 주로 동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남북으로는 이동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장, 나아가 위도를 넘어가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다.



풍토의 개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풍토란 단순히 기후풍토라는 의미의 풍토(영어로는 climate)가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하면서 기후의 요소에규정되는 각각의 생태적 요소와 나아가서는 그러한 자연의 요소에 의하여 강하게 규제를 받는 인간 사회의 구조와 문화, 그에 더하여 인간 집단의 자연관, 종교 등 사상도 포함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 풍토관은 말할 것도 없이 와츠지 테츠로우和辻哲郎가 말하는 '풍토'를 의식한 것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와츠지의 풍토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풍토>에 '인간적고찰'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풍토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기질까지도 근본적으로 설명하려는 조금은 거칠다고 말할 수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와츠지의 이 사상은 그 이후의 연구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바타 토요노鯖田豊之의 <육식의 사상>, 스즈키 히데오鈴木秀夫의 <삼림의 사고·사막의 사고>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한 인과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와츠지의 풍토론을 참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 세 가지 풍토가 농경과 농경사의 지역성을 논할 경우에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년 강수량 400mm의 선을 넣어 놓았다. 물론 와츠지 본인은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 등은 넣지 않았다. 그러나 편의상 이 선을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으로 놓겠다. 


다음의 '계절풍' '사막' '목장'이란 세 가지 풍토의 농경에 대하여 그 역사와 함께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계절풍 풍토와 농경



계절풍 농경의 중심은 벼농사 


와츠지의 풍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이 계절풍 풍토이다. 이곳은 대략적으로는 일본 열도의 남반부부터 중국의 남반부,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며 인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벼, 그것도 자포니카 벼의 기원지가 있는 곳이자, 또 그 대부분이 벼농사 지대인 곳이다. 벼의 다른 종류 가운데 하나인 인디카의 기원지는 아직 불명확한데 아마도 열대 아시아에 있다고 한다면, 계절풍 풍토는 벼의 벼의 풍토이며, 또한 온대지역과 열대지역 가운데 산간의 화전지대가 자포니카의 풍토이고 열대 평지가 인디카의 풍토라고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열대 도서의 벼는 전통적으로는 자포니카의 지대인데 최근의 개량종에는 인디카에 속하는 것이 많다(盛永, 1959).


화전지에서는 벼 외에 최근에는 옥수수와 율무의 재배가 성행한다. 화전지에서 벼농사는 벼농사라고는 해도 여러 가지 작물을 섞어짓기해 왔다. 섞어짓기하는 것은 조 등의 잡곡, 메론과 호박 등의 박과 작물 외에, 바나나와 참깨 등의 유지작물, 허브 종류 등 다채롭다. 다만 화전은 겉으로 볼 때 생산성이 낮은 데 더하여, '숲 파괴'와 '환경에 나쁘다'는 등의 이유 없는 비판으로 급속히 그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열대 저지대에서는 뜬벼라고 부르는 것을, 수심이 몇 미터나 되는 땅에서 농사짓고 있다. 뜬벼만큼은 아니어도, 우기에는 수심이 1미터 가까이 되는 곳이 많다. 이러한 곳에서는 현재 벼논양어가 행해지고 있다. 


미얀마 중부와 인도의 데칸 고원에는 약간 건조한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잡곡이나 잡곡과 콩의 농사가 전개되고 있다. 



계절풍 풍토의 농경사


온대의 계절풍 풍토는 1만 년에 이르는 벼농사 지역이지만, 자세히 보면 농경의 양식에 큰 지역차가 있다. 일본 열도에서 벼농사를 수용한 것은 조몬시대 후기는 확실시되고 있지만, 열도의 동반부(이세만伊勢湾-와카사만若狹湾을 연결한 선의 동쪽)에서는 더디게 수용했다. 중기 이전의 일본 열도의 조몬문화는 초원의 농경과 수렵·채집을 조합한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도 기술하겠지만, 농경의 요소는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북쪽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 논농사의 수용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잡초 방제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온대 계절풍에 속하는 일본 열도에서는(특히 그 남서부에서는) 농경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잡초이다. 사람들은 잡초 방제에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러나 결국에는 논에 납작 엎드려 뽑는 것 말고는 유효한 수단이 없었다. 땅에 여유가 있던 중세까지는 잡초의 대책으로 아마 지금은 휴경 또는 경작방기라고 하는 일을 행하였을 것이다(宇野 2001, 佐藤 2003). 또 고대 이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벼농사로 회귀하는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대의 왕조는 종종 포고를 통해 육식의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면서도 실은 벼농사의 비중을 높이려는 일종의 경제정책이었다고 한다(原田 2005). 그것은 걸핏하면 이동이 따르는 수렵과 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을 막는 측면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구조를 벼농사로 전환하는 일에는그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장강 유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벼농사가 행해져 온 지역으로, 그 역사는 1만 년을 넘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조차 벼가 사람들의 주요한 전분 공급원이 된 것은 양저문화기 이후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저문화기 무렵에 장강 유역은 중국에서 북쪽의 문명이던 황하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로서, 깊이 파고들어 이야기하자면 이 시기가 되어 처음으로 현재의 논벼농사의 원형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현대의 논을 방불케 하는 장치가 최근에는 장강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많이 발견된다. 이는 논이라는 장치가 나중에 이야기할 황하문명의 강한 영향을 받아 발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 이전의 '벼농사'는 아마 매우 조방한 양식을 띠고 있었다. 논벼농사의 시초에 대하여 후지와라藤原(1998)는 장쑤성의 초혜산草鞋山 유적(약 6400년 전)의 논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논벼농사의 기원을 이 시기에서 찾고 있는데, 여기에는 의론이 있다. 왜냐하면 '논'이란 장치를 오로지 벼농사를 위해 물을 담기 위한 논두렁과 관개를 위한 수로 등을 수반하는 구조물이라고 고려한다면, 그러한 장치는 일본 열도에서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논이 지극히 한정적이며, 벼를 심을 수 있는 논은 다른 수생동식물이 공존하는 다양한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중국이라는 풍토


계절풍의 농경을 생각하면 특필할 만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국'이다. 와츠지 또한 중국을 '계절풍 풍토의 특수 형태'로 취급한다. 중국 농경의 기원과 전파를 고려할 때, 회하 또는 장강을 경계로 남북의 차이가 당연한 문제가 된다. 이 경계의 남북에서는 지금도 '북쪽의 맥류, 남쪽의 벼'라고 할 정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생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남북'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변함이 없었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선의 남쪽은 벼농사 지대이며 계절풍 풍토에 속하고, 북쪽은 밭농사 지대인 데다 그 서쪽은 방목 등을 수반하는 건조, 반건조 지대를 지나 사막의 풍토로 이어진다.


이 밭농사 지대의 작물은 옛날에는 조, 수수 등의 여러 잡곡이었다. 이들은 황하문명의 옛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최근에는 요녕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출토되는 일이 보고되고 있다. 다만 조와 수수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설이 없다.특히 수수는 여전히 불명이다. 또 피도 동북아시아에서 기원한 잡곡이라고 하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사카모토阪本의 '일본 열도기원설' 이외에는 뚜렷한 논고가 없다(佐々木 2007을 참조). 여기에서 열거한 잡곡류는 맥류와 같이 한해살이인데, 여름농사라는점에서 맥류와는 매우 다르다. 


아무튼 황하문명은 그 뒤 차례로 그 주곡을 잡곡에서 밀로 바꾸어 간다. 이 전환은 밀이 생산성에 더 뛰어났다는 사정이 있는지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앞에 서술했듯이, 여기에서 재배되었던 잡곡은 모두 여름작물인데 이 지방에서 밀은 겨울작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의 전환은 인더스 문명기의 하라파Harappa 유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Weber 1991). 관개 체계 또는 물의 수입과 지출을 고려하면, 이 전환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전환을 가져왔을지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밀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서아시아에서 기원한다. 그것은 5000년 전쯤에 육로, 지금의 신장 위구르를 통하여 중국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그곳은 중국 문화가 아직 미치지 않았던 시대이다. 밀이 도래한 당시의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포함하여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더구나 최근 중국에서 행한 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는 민족주의를 시사하는 듯한 '하나의 중국론'에 입각한 논조가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허난성의 가호賈湖 유적(8000년 전)에서 볍씨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이 야생 벼인지 재배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만약 거기에 야생 벼가 있는 동시에 그곳이 벼농사의 기원지 가운데 하나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벼농사의 기원지는장강 유역에서 단숨에 황하 유역에도 이를 만큼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고려하면, 가호 유적 일대에 야생 벼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열대에서 벼농사의 개시


열대 계절풍 풍토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도서 지역의 열대우림으로 이어지는 '우록림雨綠林'의 풍토이다. 이곳은 우기와 건기가 비교적 뚜렷하게 구별되어, 건기에는 상당히 건조하다. 이 강한 건조함이 우록림의 나무들이 건기에 낙엽이 지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버마(미얀마)부터 서부 지역에서는 똑같은 열대 계절풍이라 해도 기후 요소가 꽤 다르다. 왜냐하면 인도차이나 반도는 그 위도가 북위 20도에서 10도에 넓게 걸쳐 있는 데 반하여, 버마부터 서부 지역은 남단이 북위 8도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와 늘어서 있으면서 북으로는 북회귀선(북위 23.5도)을 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벼는 갠지스 유역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남부는 데칸 고원의 반건조지대이다. 


그러나 열대 아시아에서 농경의 시작은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진다고 생각한다. 열대 아시아의 고고학 유적의 발굴이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고 해도, 농경의 증거를 남긴 옛 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간의 집단이 큰강 하구의 삼각주에서 침입했던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는 지금의 수도 방콕이 개발된 것은 겨우 18세기의 일이었고, 그전에는 정치경제의 중심이 70킬로미터 북쪽의 아유타야였다. 아유타야 이전에는 차오프라야강을 더 거슬러올라간 수코타이가 수도였다. 아유타야 왕조 시절에 아유타야는 운하를 통하여 곧바로 바다로 나갔다. 방콕 평원이 지금처럼 된 것은 겨우 200-3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일이 메콩강 삼각주에서도 있었다. 메콩강 삼각주는 현재 개발되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이주한 건 불과 200-300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다. 인도차이나에서 인간 집단은 강의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했을 것이다.


인도차이나 대륙부에서는 전통적으로 화전으로 벼농사를 행해 왔다. 단, 고고학적으로 화전을 증명하기란 어려워서 그것이 어느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에서 농경을 시작한 걸 고고학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앞으로의 큰 과제이다. 


인도차이나부터 열대 도서에서 농경은 아마 4000년 전쯤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파퓨아뉴기니에서는 9000년 전쯤 인간이 활동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어 지금까지의 학설이 확 바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을 출발해 태평양으로 확산된 몽골로이드 이전 인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과 몽골로이드에 의한 원시적 농경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갠지스강 유역의 이른바 강가Gaṅgā 평원 북서부의 유적에서 8600년 전쯤의 볍씨가 출토되어 그것이 재배 벼인지 야생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있다.




사막의 풍토와 농경



사막의 풍토

 

와츠지의 '사막'은 꽤나 개념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았던 '사막'은 아덴 부근(즉, 아라비아 반도의 아주 일부)의 사막이어서, 유라시아 내륙부의 사막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막의 풍토'는 이 책에 끼워 넣은 지도의 연 강수량 400mm 선 안쪽의 건조, 반건조 지대이다. 


이 지대 안에는 예를 들면 다클라마칸 사막 같이 연 강수량이 겨우 몇 밀리미터에서 몇십 밀리미터인 극단의 건조지대가 있어서, 식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사막'의 경관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그곳보다는 강수량이 많은 토지도 있어 약간의 식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른바 사막은 건조만이 문제인 토지가 아니라, 그 강한 염성에 의하여 식생의 생육을 방해받는 토지가 많다. 


사막의 풍토에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경이 유목이다. 이는 약간의 식생을 필요로 하여, 양 등의 무리를 이루는 가축을 이동시키면서 사육한다. 더구나 사막의 풍토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소와 말, 낙타 등 다른 대형 가축이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 강수량이 400mm 이하면 밀을 재배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보리는 300mm 정도인 곳에서는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장과 조 등의 잡곡은 더욱 소량의 강수로도 재배할 수 있다.


사막의 풍토가 지닌 한 특징은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는 지하에 있는 수맥이 지표에 이르는 곳에 생기는 녹지로서, 큰 오아시스에서는 벼농사까지 이루어진다. 


한편, 토양의 염성화를 불러온 이유로 유력한 설의 하나가 염해이다. 그것은 관개수에 포함된 미량의 염분이 농경지에 축적되거나,아니면 태고부터 지하에 괴어 있었던지 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염해가 생기면 그 토지는 염분을 씻어내지 않는 한 농경지로 사용할수 없다.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주변에서는 옛소련이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아무다리야강의 물을 끌어다 대규모 면화밭을 개간했다.그로 인해 아랄해로 흘러들어오는 수량이 줄어 호수의 면적이 뚜렷하게 감소했다. 또 면화밭에서는 토양의 염성화에 의해 광대한 면적이 사막화되었다. 그렇게 하여 사막의 면적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사막의 풍토


다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근처에서 발견된 소하묘小河墓 유적(3000여 년 전)은 묘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미라가 담긴 관이 발견되었다. 그 관은 호양나무(야생 포플러)의 나무판을 짜맞추어 만든 것으로, 그 뚜껑 부분은 살아 있는 소의 생가죽으로 덮어 놓았다. 관 안에는 풀로 엮은 바구니가 있고, 그 바구니 안에 보통 밀과 기장으로 여겨지는 식물의 씨앗이 들어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3000년 전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밀 등과 소, 양 등을 조합한 복합적인 농업+목축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문헌에서도 과거 2000년에 걸쳐서 건조화가 진행되었음이 밝혀졌다. 뒤에 서술하듯이,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어 그 기후와 생태계의 상태는 시간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금 대담한 추측을 더하자면, 사막의 풍토 가운데 적어도 그 일부는 지금과 같은 건조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은 누란왕국의 발굴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누란왕국은 기원전 4000년 전쯤에 기록에 나타나, 그 뒤 약 800년에 걸쳐서 존속했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엄밀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공작강孔雀川의 하류에서 발견된 몇 곳의 유적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른바 뤄부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일찍이 호수의 기슭이었다. 누란왕국은 인구가 1만4천 아니면 1만7천이라고 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에 상당하는 규모의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스웨덴의 탐험가 S. 헤딘이 탐험할 때 카누로 내려갔던 공작강에는 이제 거의 물이 없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의 건조화는 이 100년 사이에도 진행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타클라마칸에서부터 1500킬로미터 동쪽의 헤이허 유역에서는 이 1500년 사이 강물을 이용을 둘러싸고 유목민과 농민의 이해 대립이 있었다(日高, 中尾 2006). 반건조지대에서는 이처럼 수리권을 둘러싼 다툼이 늘 발생한다.  



고대 문명과 염해


그런데 '사막'의 풍토에서 사막화는 어떻게 하여 발생하고, 또 진행되는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부분은 오랜 기간의 기후변동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사막화는 인위적인 요인이 크다는 설도 있다.


Maekawa(1974)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기(우르 제3왕조)에 앞에 언급한 메카니즘에 의해 염해가 발생해 겨우 25년 사이에 그때까지 경작할 수 있었던 밀을 재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염해설을 지지했다. 그와 같은 일은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도 일어났다고 한다. 또 누란왕국이 쇠망한 원인으로 이 염해를 드는 연구자도 있다(山田 2006). 다만, 예를 들면 오사카교육대학의 이토 토시오伊藤敏雄 씨와 같이 이에 이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인더스 문명의 범위에서도 특히 남부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토양의 염성화가 심각하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쇠망처럼 염해가 인더스 문명이 붕괴한 직접적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그것과 인과관계가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장래의 기후변동 등에 의하여 강수량이 늘어났던 곳에서 풍요로운 대지가 회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다.


이러한 과거의 염해가 정말이었다면, 토양의 염화에 의한 사막화는 인위적 색채가 짙은 현상이었던 셈이다. 사막화와 같은 전 지구수준의 환경문제는 지금까지 걸핏하면 기후변동 등의 자연현상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재검토하고 있다. 





목장의 풍토와 농경



목장의 풍토


목장의 풍토는 대개 유럽과 겹친다. 유럽에서 농경의 확산은 벨우드(2008)에 의하면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7600년 전쯤에, 영국에서는 6000년 전쯤에,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2500년 전쯤에 전해졌다. 이러한 시간차와 함께, 재배되었던 작물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지금도 사배체인 듀럼밀이 널리 재배되고 있다. 미국 농무성의 통계에의하면, 지중해 지방에서 가장 마카로니밀을 많이 생산하는 곳은 이탈리아(연간 약 400만 톤), 터키(230만 톤), 스페인(210만 톤), 알제리(200만 톤), 프랑스(140만 톤) 순이다. 이에 대하여 같은 유럽에서도 독일은 겨우 2톤밖에 안 된다. 한편 빵밀 쪽은 전 유럽에서 대개 널리 재배되고 있다.


마카로니밀과 대조되는 것이 감자이다. 감자의 생산량은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독일, 폴란드, 벨라루시, 네덜란드, 프랑스 순으로서 '북고남저'의 경향이 뚜렷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특히 북유럽에 전해진 건남유럽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감자 이전의'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 주곡은 보리와 호밀, 귀리 등 이른바 '맥류'라는 잡곡의 무리였다(벨우드 2008).


그러나 목장의 풍토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목축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그 근간이 되는 생업은 이른바 '무리 가축'이라는 큰 무리를 단위로 이동하는 가축을 이용한 목축이다. 이것은 원래 서아시아에서 발단한 일이다.



목장의 풍토를 바꾼 신대륙의 농경 요소


목장의 풍토는 16세기까지 맥류+젖, 육류가 조합을 이룬 풍토였다. 그러나 그 생산성이 반드시 높은 건 아니고, 특히 북유럽의 식량생산은 비참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16세기에 도입된 감자였다. 감자는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신대륙의 '발견'에 의하여 유럽에 전해진 신참 식량이다. 신참이지만 감자는 유럽의 풍토에 잘 적응했다. 밀레의 '만종'에는 저녁에 교회 종소리에 기도를 드리는 농부들의 발 밑에 감자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자는 생산성이 매우 낮았던 유럽 북부에서는 남부보다 아주 빨리 전파되었다. 다만 감자는 그 덩이줄기에 의하여, 즉 영양번식에 의하여 자손을 늘리게 된다. 물론 씨앗으로 번식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싹 부분을 남기며 자른 씨감자로 늘리게 된다. 씨감자로 늘어난 각 개체는 말하자면 복제물로서,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한 집단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셈이다.


1980년대 감자는 영국부터 아일랜드에서도 주요 작물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감자에 역병이란 질병이 발생했다. 질병은 순식간에 섬 전체로 퍼지고, 감자를 파멸시켰다. 절반이 감자였던 섬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근에 빠졌다. 역병은 이듬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발생하여 혼란이 이어졌다. 이후 몇 년 동안 아일랜드를 빠져나온 난민이 200만을 넘었다고 한다(Zuckerman 2003).


그밖에도 남미 원산으로 세계를 돌아다닌 식량이 있다. 옥수수와 토마토, 고추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감자와 마찬가지로 겨우 400년 사이에 세계를 돌아다녔다.



목장의 풍토와 사막의 풍토가 갖는 일체성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다. 즉 영원히 불변하는 풍토란 없다. 와츠지는 '풍토의 역사성'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썼듯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과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는 건조함이 지금에 비하여 아주 경미했다. 현장 3세의 여행기에서도 그 행보가 이르른 곳에 나라가 있거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長沢 1998). 사막의 풍토의 전역이 그러했는지 어땠는지, 일찍이 그곳은 농업, 목축업이 행해진 풍토였던 것을 살필 수 있다.


그곳에 있었던 작물과 가축이 현재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걸 보면, 사막의 풍토가 예전에는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 그림1에 보이듯이, 중국 북서부에서는 마치 사막의 풍토와 계절풍의 풍토에 끼어 있는 모양으로 목장과 비슷한 풍토를 볼 수 있다. 상상을 마음껏 한다면, 사막의 풍토는 3000년쯤 전에는 현재 목장의 풍토 같은 경관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어떤 이유로 인해 바다에서먼 일부 지역에서 건조함이 진행되어 지금 같은 사막의 풍토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점에 대한 상세한 건 앞으로 연구할 주제의 하나로 남겨두고 싶다. 또 이 시리즈에서는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를 합쳐서 '맥류의 풍토'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계절풍의 풍토와 맥류의 풍토에 있는 농경 요소를 비교해 보자.


먼저 곡류에 대하여. 계절풍 풍토에서 곡물은 먼저 뭐니뭐니 해도 벼이다. 다음 메밀도 중국에서 생겼다고 한다. 백합, 칡 등 일부 뿌리식물도 계절풍에서 생겼을 것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여러 '맥류'이다. 콩과에 대해서는 대두, 팥 종류가 계절풍 풍토에서 생긴 콩임에 대해, 맥류의 풍토에서는 누에콩, 병아리콩 등이 생겼다.


가축으로는 계절풍에서 생긴 건 무리를 이루지 않는 여러 '집 가축'인 돼지나 가금류 외에 물소, 인도 혹소 정도이고, 나머지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는 세계의 주요한 무리 가축의 주축인 소, 말, 양, 염소가 기원하고 있다. 


식품의 보존기술의 하나인 발효에 대해서도 두 풍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계절풍 풍토에서 발효는 대부분 곰팡이 종류인 누룩곰팡이가 쓰인다. 이 지역의 양조주와 증류주(모두 곡물을 원료로 함) 대부분은 이 방법으로 만든다. 또 된장, 간장, 청국장 같은 고유한 발효식품도 대부분이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법으로 만들고 있다. 다만식해나 어간장 같은 식품에서는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발효법은 유산균을 이용하거나 또는 체내의 효소를 이용하는 것이 중심이다. 이집트에서 기원한 맥주는 엠머밀의 빵을 설구워서 그대로 살아남은 아밀라아제의 힘을 이용하여 녹말을 당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맥주를 만든다.




남단과 북단의 풍토



북쪽 회랑


유라시아의 북단은 북극해에 접한 매우 추운 땅이다. 토지는 영구동토이고, 지표에는 지의류 이외의 식물은 거의 없다. 여기는 쾨펜의 기후구분도에 따르면 한대(E 지역)이다. 여기에서는 순록을 사육하는 것 말고는 농경의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남쪽에는 타이가라고 부르는 침엽수를 중심으로 한 숲이 펼쳐진다. 쾨펜의 냉대(D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서는 봄밀, 호밀, 순무, 메밀 등이 재배되어 왔다. 겨울철은 어떠한 경작도 할 수 없고, 여름철도 짧다. 봄밀이란 초봄에 심어서 여름철에 생육하고, 가을에 수확하는 재배방식을 취하는 밀로서, 그 전용 품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계절풍 북부에 농경이 건너오게 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몇 가지 재배식물이 여기를 통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운송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북쪽 회랑'이라 부르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작물의 이름을 들자면, 순무와 보리, 우엉, 메밀 등이다. 이 가운데 보리와 순무는 다른 위도대에서 적응하는 여타의 품종군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여러 경로를 거쳐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세한 건 '일본의 풍토'에서 이야기하자.




인도의 풍토와 농경


인도의 풍토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의 하나이다. 인도는 계절풍 권역이지만, 그 광대함과 기후, 지형의 다양성 때문에 한마디로 '계절풍'이라고 묶을 수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반건조지대에 걸쳐 있는 남인도에서는 이곳 고유의 작물이 옛날부터 재배되어 왔다.  또한 이 지역은 일찍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작물을 유라시아에 최초로 들여온 장소라고 지목되며, 독자의 농경문화를 형성해 왔다. 


와츠지는 인도를 '계절풍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토지'라고 하는데, 그의 풍토론과 마찬가지로 풍토에 주목하여 비교문명론의 논의를 전개한 우메사오 다다오梅棹忠夫는 인도를 동양과 서양에 대비해 '중양中洋'이라고 불러 두 지역과 구별한다.


계절풍 풍토의 벼, 사막과 목장, 즉 맥류 풍토의 맥류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풍토를 특징하는 작물을 들자면 '잡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 피, 기장 등의 종으로 대표되는 'millet' 외에 인도 고유의 잡곡도 있다. 또 콩 종류에서도 인도 고유의 종이 있다(前田, 1987). 특히 다양한 콩 종류는 그 종교적 금지에 의하여 육류(때로는 알까지도)를 입에 대지 않는 많은 인도 사람들에게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콩과작물과 벼과작물을 섞어심는 재배양식이 있다고도 한다. 콩과식물의 대부분이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키는 '질소 고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콩과작물이 지주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질소 성분의 공급을 받아서 자라는 벼과작물을 함께 재배하여 서로 돕는 관계를 구축하는 독특한 농법이다. 벼농사에 대해 말하자면, 인도에서도 벼농사가 행해졌는데 인도의 벼농사는 계절풍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논할 수 없다(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 말미의 대담에 나온다).


인도의 '중양적' 성격은 그 지리적 위치와도 관계가 있다. 우리들의 프로젝트와 같이 지구연에 속한 '인더스 프로젝트'의 오사다 토시키長田俊樹 교수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은 벼와 맥류를 모두 수용한 문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도의 독자적 풍토에 대해서는 농경과의 관련성부터 더 상세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대 도서부의 풍토와 작물의 진화


열대 도서의 농경 풍토는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말할 것이다. 그곳은 토란, 얌 등 덩이줄기 식물, 빵나무와 바나나, 판다누스 등의 보고임과 함께 그것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곳이 원산지이다. 이러한 식물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다. 그것은 계절풍이나 맥류 풍토의 주요 작물, 특히 맥류가 한해살이 작물인 것과 대조적이다. 


한해살이 작물은 1년에 1회, 반드시 번식을 행한다. 종자는 통상 3년쯤 지나면 발아력을 잃기 때문에, 어느 종의 품종이나 종자인 채로 오래 놔둘 수가 없다. 종자를 저온, 건조 등의 조건으로 놔두면 장기간 보존할 수 있다는 건 20세기 후반에 발명된 기술이다. 게다가 한해살이 식물의 종자는 뿌리면 다음 농사철에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그 농사철의 마지막에 파종했던 것에서 다음 세대의 종자를 확보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즉 어느 문화가 한해살이 작물을 가지고 있다는 건 파종과 채종의 주기를 끊임없이 계속 행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한해살이 작물의 농경이 일단 시작되면 이제 원래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동시에 이런 점은 한해살이 작물이 1년에 1회의 유성생식으로 급속히 진화하는 기회를 획득한다는 걸 의미한다. 한해살이 식물 가운데에는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과 딴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이 있다.  이 가운데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은 많은 품종을 만들어내기 쉽고, 그만큼 환경이 상이한 여러 지역에 전파되기 쉽다.


한편 여러해살이 풀은 극단적으로 말해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쳐 유성생식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으로는 몇 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적으로는 이동도 느리고, 높은 토착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풍토



일본의 남북


일본 열도의 문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지적은 이미 상록활엽수림 문화를 둘러싼 논의 안에서 발생했다. 이 지적은 일본의 숲이 동북부의 낙엽활엽수림대와 남서부의 상록활엽수림대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농경 문화에 대해서도 이 지적은 그대로 해당된다. 다만 남북(또는 동서라 하는 것이 적당할지 모름)을 나누는 선은 문화 요소에 따라 조금 다르다. 남북의 다른 농경 요소와 그에 관련된 요소를 그림2에 표시해 놓았다.



그림2


요소

경계

동(북)

서(남)

조몬 벼농사

순무 품종

보리 품종

보리 품종(겉보리)

파 품종

잠재식생(숲의 수종)

생쥐의 계통


매우 드묾

서양종 순무

W형이 있음

겉보리

흰파(카가加賀 파)

낙엽수림

식용(E. crus-galli)

mus 형

있음

일본 순무

E형

쌀보리

청파(9줄 파 등)

상록활엽수림

잡초 피(E. oryzicola)가 많음

castaneus 형


'남북'의 경계가 가장 북쪽에 있는 요소로는 생쥐, 왕대 등이 있다. 왕대 분포의 북방한계는 아키타현 부근이라든지, 쓰가루 해협이라든지, 또는 후쿠시마현 부근이라 일컬어진다. 경계선이 그 다음으로 북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 순무, 파, 보리 등이다. 순무를 예로 들면, 순무에는 아종 수준에서 2가지 품종군이 있다. 이 가운데 서일본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품종은 일본 순무라고 부르며, 잎 등에 가느다란 털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북일본 등에 분포하는 품종은 서양종 순무라고 부른다. 야마가타현의 쇼나이庄内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되는 이른바 '붉은 순무'가 그 전형이다(靑葉, 2000). 파의 분포도 이와 유사하여 북(동)일본에는 이른바 흰파가, 반대로 남(서)일본에는 9줄 파 형의 녹색 부분이 많은 유형이 분포해 있었다. 경계선이 가장 서(남)쪽에 있는 것이 피, 수종 등이다. 조몬 토기의 한 유형인 돌대문 토기의 분포도 이 선과 같다. 또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고 생각되는 사투리의 동서 차이, 간장의 기호성 차이 등도 대체로 이 선이거나, 약간 동쪽 지역에 경계를 가진다고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 열도에서 남북(서동)의 요소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유라시아에서 동서의 요소와 일치하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서양종 순무의 분포역은 시베리아에서 더 서쪽에 이른다. 한편 일본 순무의 분포역은 중국의 강남 지방이 중심이다. 거의 마찬가지로 보리도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러한 재배식물들을 똑같은 순무, 보리라고 하지만, 실은 두 가지 다른 유형이 건너와 적어도 하나는 중국의 강남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각각 따로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 열도의 풍토는 그 남(서)반분은 계절풍 풍토이고 북(동)반분은 훨씬 목장의 풍토와 유사성을 나타낸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은 일면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일본(いくつもの日本)>(赤坂, 2000)이란 발상은 풍토의 입장에서도 정당성을 갖는다.



일본에서 농경의 시작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언제로 잡으면 좋을까? 이전에는 고고학을 중심으로 조몬시대는 수렵채집의 시대, 야요이시대 이후는 논을 수반한 농경의 시대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왔다. '조몬 농경론'도 되풀이하며 나왔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것도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점점 '조몬-야요이'를 재검토하자는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조몬 농경론에 부정적인 견해는 주로 논의 유적이 조몬시대의 만기의 종말기까지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농경이라 하면 벼농사, 게다가 논벼농사라는 견해가 마치 상식인 것처럼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말하자면 '벼농사 지상주의'라고 할 만한 무대에서 조몬 농경에는 의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홋카이도에서 피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지적되는 점, 아오모리현과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서 밤나무의 재배에 대한 연구 등에 의하여 농경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의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서일본(여기에서는 와카사만과 이세만을 잇는 선의 서쪽)에서는 조몬시대 후기에 들어오면 여러 유적에서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벼농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동일본에 언제 벼농사가 전해졌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앞에서 기술했듯이 조몬시대의 일본 열도는 크게 남북(동서)으로 양분할 수 있고, 북쪽 조몬은 훨씬 맥류의 풍토와 상관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풍토와 지구 환경문제



풍토에 적응하기


앞에서 와츠지의 풍토론이 지닌 문제점의 하나로 사람의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기질과 사상이 그 풍토의 기후, 생태계나 농업 등의 영향을 완전히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니,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은 확실히 그 풍토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또 풍토에 적응한 생활이나 농경문화의 생성에도 관여해 왔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착 애니미즘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의 영향이 뿌리 깊었다고 생각하는데, 고대 이후에 건너온 불교는 이 애니미즘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독자적 불교를 형성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일본 특유의 사상이 적어도 중세까지 사람들의 넉넉함, 또는 자연에 따르는 생활방식의 기반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시리즈 5권에서 소개하는 오사카부의 이케시마池島와 후쿠만지福万寺 유적에서 검출된 중세의 '시마바타島畑'는 그 구체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시마바타는 특히 큰 홍수 이후 등에 퇴적된 모래를 쌓아올려 두렁을 만들고 밭작물을 심고, 또 낮은 곳에는 벼를 심을 수 있도록 한 장치이다. 홍수라는 자연의 맹위를 헤어나기 위한 '견딤의 기술'이라 해도 좋다. 현대의 발상으로 홍수의 방지는 오로지 치수사업에 의한 것인데, 실제로 나중에는 이케시마와 후쿠만지 유적의 부근에서도 '자주 넘치는 강'이란 이명을 가지고 있던 야마토강을 바꾸어 놓는 공사가 행해져(1703년) 홍수 피해는 경감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형 공공투자를 할 수 없었던 시대에는 시마바타는 흔히 생각할 수 있던 '견딤의 기술'이었다.



농학적 적응과 공학적 대응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에서도 '견딤의 기술' 같은 방식이 있다. 그 좋은 예가 '뜬벼'이다. 뜬벼는 앞에서도 적었듯이, 동남아시아 평야부에서 우기에 몇 미터나 되는 수심에서도 살아가는 벼이다. 벼는 그 줄기에 생기는 마디와 마디의 사이에 있는 분열조직의 세포를 늘려서, 그로 인해 수심에 따라 키를 변화시킨다. 교토대학 동남아시아 연구센터에 있던 타카야 요시카즈高谷好一 씨는 이러한 벼가 지닌 적응력을 이용한 적응 방법을 '농학적 적응'이라 불렀다. 한편, 이외에도 댐을 만들어서 수량을 조절하거나 배수로를 만들어서 물빠짐을 좋게 하면 일반적인 벼를 농사지을 수 있다. 이것을 농학적 적응에 대비해 '공학적 적응'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방콕 평원에서는 지금까지 광대한 뜬벼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즉 농학적 적응을 하여 사람들은 벼농사를 영위해 왔다. 최근 이곳을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의 상류에 거대한 댐을 만들어 홍수를 일으키지 않고 토지를 '유효하게' 사용한다는 시도가, 곧 공학적 적응이 검토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정말 평원의 광대한 토지는 우기와 건기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고, 계속해서 벼농사도 가능하다. 생산성도 향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학적 적응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의 뜬벼를 심던 논에 성립되어 있던, 사람들의 삶과 이어져 있던 생태계는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뜬벼의 논은 어로의 장으로 사용되어 거기에서는 벼만이 아니라 잉어과나 메기과의 담수어 등을 잡았다. 또 그들의 배설물이나 물에 녹은 영양분이 뜬벼의 논에서는 거름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공급되었다. 뜬벼를 폐지하면 이와 같은 체계를 단숨에 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공학적 적응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우수한 적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투자되는 에너지도 많아지는 데다가 예기치 않은 재해 등에는 적응할 수 없는, 유연성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에 반하여 농학적 적응에서는 생산성은 낮지만 생태계의 안정을 손상시키지 않고, 높은 지속성을 가지고 생산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두 풍토에 적응하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 풍토의 실태에 꼭 맞는 것인지는 명확할 것이다. 


농학적 적응이 계절풍 풍토의 고유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훨씬 예전에 쓸모없어진, 유럽의 중세에 널리 행해졌던 '삼포식 농업'도 일종의 농학적 적응이었다. 그럼 공학적 적응은 단순히 근대화의 산물로 도입된 것뿐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을 비롯한 계절풍 풍토에서는 애니미즘 사상을 현재에 이어받아, 그만큼 농학적 적응을 이어받으려는 행동규범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풍토의 사상적 우열을 이야기할 요량은 아니지만, 풍토와의 관련에서 생긴 사상이 풍토에 적응하기란 방식에 대하여 지닌 의의를 새로이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처음에 적었던 농업 생산의 모순과 붕괴로 가는 길은 풍토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물을 둘러싼 문제를 예로 들자면 계절풍 풍토처럼 남아도는 물이 홍수와 습해를 일으키는 곳도 있다면, 사막의 풍토처럼 물의 절대량이 부족하건, 그것을 완화하기 위한 관개가 가져온 염해로 고생하는 곳도 있다. 또한 같은 계절풍 풍토에서도 홍수의 상습 지대(일본에서는 수향水郷 지대나 키소산센木曾三川 지대)도 있다면, 반대로 여름철의 적은 비로 가뭄의 피해를 받기 쉬운 지대(일본에서는 사누키讃岐 평야나 오사카 평야의 남부)도 있다. 문제는 매우 지역적이다.


기후변화, 특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온난화에 대해서도 어느 작물의 재배 적지가 고위도 지대로 이동해 버린다는 문제가 있는 토지(일본처럼 남북으로 긴 나라는 그렇다)도 있다면, 빙하의 해빙으로 홍수가 빈발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도 있다. 강수의 패턴이 변하여 작부체계에 영향이 나타나는 지역도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지구 환경문제는 그 근본은 동일한 원인에 지배되더라도, 나타나는 바는 풍토에 따라 여러 모습이 된다.


해결을 목표로 방책을 채택하는 법도 또한 풍토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뜬벼의 체계를 채택해 온 열대 계절풍의 사람들은 해마다 홍수에 대해 체념하는 듯한 대응을 채택한다. 2008년 여름, 나는 라오스의 비엔티엔에 있었다. 40년 만에 메콩강의 홍수가 난다 하였는데, 사실 일부에서는 제방이 터져 무너져 침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엔티엔 시당국은 군을 동원하여 제방 위에 모래부대를 쌓는 대책을 채택했는데, 시 안에서는 양동이와 바가지를 사서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위가 예상을 뛰어넘으면 재산의 일부를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강이 범람하면 물고기가 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각하지 않게 고기를 잡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관공서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예전에는 짚신을 신고 통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의 규범의 문제 등이 아니라, 언제 물이 넘을지 모르는 풍토에 사는 사람들이 적응한 모습이었다. 


한편, 공학적으로 적응해 버렸던 일본에서는 일단 홍수가 일어나면 넘친 물도, 고기도, 토사도 모든 것이 재해의 원인이 된다. 물이나 아스팔트 위의 모래는 교통의 장애가 되고, 물고기는 죽어서 부패해 위생 문제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적응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처가 바뀐다는 걸 우리는 깨닫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지구 환경문제의 역사도,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 왔느냐 하는 인간의 역사도 잘 모른 채로 현재에 이르렀는데, 지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풍토에 적응하는 방식 하나만 해도 이미 크게 변용하려고 하고 있어서, 올바르게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앎을 획득하려 한다는 역사적 시점의 의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좋다. 풍토와 그 역사라는 관점(이것을 환경사의 관점이라 해도 좋다)에서 환경문제를 재검토하는 일은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한 중요한 과제이다.




마치며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는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연구 프로젝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일환으로 프로젝트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연속 공개강좌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서적의 형식을 위하여 새롭게 저술을 부탁한 부분도 많다. 프로젝트의 이름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는 조금 역설적인 말이지만, 인간에 의한 농업(목축을 포함)이란 행위와 주위의 환경, 특히 생태계와 관계를 맺어 온 역사를 연구하려고 한 것이다. 근저에 있는 발상은 우리들은 이 관계에 대하여, 특히 그 역사에 대한 긴요함을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역사의 연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역사 연구의 기초에 있는 문서만으로는 이 '관계'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 여러 가지 자연과학의 방법과 조합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문자가 없는 시대의 일은 고고학의 방법이 유력하다. 이와 같이 농업과 환경의 관계사의 해명에는 분야의 제한을 넘어 학문의 융합이 필요하다. 


지구연의 프로젝트는 그 대부분이 이러한 분야를 횡단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도 모두 80명 정도의 연구자가 있는데, 그 전문 분야는 여러 갈래이다. 분야의 제한을 넘는 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보다어려울 때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뛰어넘어 기대한 바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분야의 장벽을 넘은 대화를 시도했다. 이 시리즈도 또한 그러한 대화를 시도한 하나로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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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타이완의 중소기업 문화가 궁금하여 찾았더니 <대만 중소기업의 신화의 오해와 진실>이란 보고서가 나왔다. 
http://saesayon.org/AttachFiles/1289207604063_1.pdf


요약 부분만 보자면 이렇다. 타이완이 처음부터 중소기업을 육성한 게 아니라, 나라에서 국공영 부문만 신경을 쓰다보니 자연스럽게 국가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기업가 기질이 넘치는 사람들이 중소기업을 만들어서 운영하며 자신들만의 협력 체계가 형성된 결과라 한다. 이는 마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숲에서 다양한 동식물이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어떤 분야이든지 건강한 생태계가 형성되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실감한다. 연구 분야이든, 농업 분야이든, 개인의 가정 환경이든 말이다.


아무튼 타이완, 재밌다. 
한국은 민간 기업과 정부의 정경유착으로 대기업 위주로 성장한 나라가 아니던가. 타이완에 갔더니 자국 자동차 제조업체가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일본 차가 참 많이 보이던 기억이 난다. 타이완은 '왜 현대 기아 같은 자국 자동차 제조업체가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 차에 쓰이는 주요 부품들을 잘 생산해서 팔아먹으면 돈을 벌 수 있으니 그걸로도 족하지 않은가?' 하는 상인, 기업가 정신의 소유자가 많은 곳인가 보다. 이런 정신과 문화는 타이완의 농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


보고서 중 "이러한 경향은 농촌 지역의 활발한 창업 흐름에서도 드러난다. 1960년대 대만 전체 농가 가운데 경업농의 비중은 이미 절반이 넘는 52.4%에 달했으며, 1970년대에 는 대만 공장의 60%, 생산총액의 44%, 종업원 수의 48%가 농촌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아직 대만 정부가 이렇다 할 중소기업 정책을 내놓기 전임을 생각하면 이 는 대단히 큰 비중이다."라는 구절에서는 오늘 본 이 기사가 중첩되어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농업 밖에 없는 곳은 사실상 정체상태" http://v.media.daum.net/v/20171121001449893?f=m&rcmd=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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