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쟁기와 삽의 개량형 농기구입니다.

땅을 일굴 때, 또는 고구마 같은 걸 캘 때 그 위력을 발휘하네요.


자세한 사항은 다음 주소로 찾아가 보세요. http://cafe.daum.net/nanlo



728x90

'농담 > 농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미난 농생태학 자료를 찾았다   (0) 2016.04.04
최고의 농법은?  (0) 2016.03.22
작물을 잘 키우는 비법  (0) 2016.03.15
농사의 시작은 농사가 끝난 시점부터이다  (0) 2016.03.15
풀과 작물은 다르다  (0) 2016.03.15
728x90

사라지고 있는 직업 대장장이. 

농기구를 사려고 철물점이라도 가면 값싼 중국산 호미와 낫이 차고 넘친다.

좋은 농기구를 구하고자 지방의 장터에 아직 남아 있는 대장간을 찾아가도 썩 마음에 드는 농기구를 만나기란 어렵다.


10년 전쯤인가, 농사짓는 사람들과 함께 일본으로 유람을 간 적이 있다.

모두들 일본 농기구에 뿅가서 몇 개씩 사들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때 사온 농기구는 특별히 벼르는 일이 없어도 아무 문제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저 일본의 쇠를 다루는 기술과 그걸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부러울 뿐이다.


아래 글을 보면 일본 대장간의 사정도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규모의 대장간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울 뿐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라. 한국에서 이런 곳을 찾을 수 있는지... 없다는 데에 500원 건다!


아무튼 글 말미에 나오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농사짓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역시 사람은 바닥을 쳐야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한국도 2008년 광우병 사태 이후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확 높아진 기억이 난다.

또 다른 전환점이 다가오겠지. 그날이 오든 안 오든 난 오늘도 씨앗을 뿌리고 가꿀 뿐이다.

---------





대장장이 사토시 아이다 씨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일본식 낫과 괭이 등으로부터 이 사람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철제 날 괭이의 나무 손잡이를 들고 그는 “이게 보여요? 이건 야마나시현에서 포도나무의 껍질을 긁는 데 쓰려고 만든 겁니다. 옆에 있는 삼지창은 치바현의 땅콩 재배 농민을 위해 만든 것이고요. 그리고 저기 있는 길고 얇은 날의 농기구는 초봄에 교토에서 죽순을 캐는 데 쓰는 겁니다.” 아이다 씨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는 특정한 목적과 지역, 토양,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약 1만 가지의 농기구가 있다. 


51세의 아이다 씨는 푸른 산의 다락논에서 고품질 쌀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니가타현 산조시에 있는 소규모 농기구 대장간인 아이다 합동공장의 대표이다. 이 마을은 17세기 이후부터 대장장이들의 공동체로 유명했는데, 지금도 부엌칼부터 분재가위까지 전문적으로 작은 금속을 가공하는 사업의 중심지이다. 오래된 목조건물에 있는 이 공장은 1930년 타다오 아이다 씨의 할머니의 시숙이 되는 사람이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매년 14만 가지의 농기구와 부품 등을 손으로 제조한다.



모종삽... 그저 아름답다고밖에...



삼지창... 이걸로 땅콩을 캔다고 함. 좋은 농기구를 보면 욕심이 나서 시골 장터에 갈 때마다 대장간을 들르지만, 이런 건 품질은 결코 보지 못했다. 부럽다.



손낫... 이런 거 하나 정말, 꼭 갖고 싶다.



바깥의 조용한 골목을 지나 들어서니, 공장보단 농가처럼 보이는 작업장이 나타난다. 1층짜리 농촌의 민가 양식(전통적으로 농민들이 거주하던 형태)의 기와지붕을 인 높은 천장을 지닌 60평 규모의 이 건물은 약 70년 전에 지어졌다. 작업장 안은 재료와 기계로 정신이 없었다. 


대장간의 일꾼들 —귀마개와 고글을 끼고, 이마에는 땀을 닦는 수건을 묶었다— 은 부지런히 타고 있는 석탄 위에 금속을 녹였다. 40년 된 빛이 바랜 회녹색 기계들, 먼지 낀 시계, 어울리지 않는 의자와 주문을 가득 적어 놓은 칠판이 70년 된 농기구 제조 작업장을 대변하고 있다.


꼼꼼함과 정밀함에 전통 공예를 융합하여, 17명의 직원 —20세부터 77세까지— 이 4천 종의 다양한 농기구를 생산한다. 각각의 농기구는 일본열도의 산악 지형부터 토양, 기후, 작물의 종류에 따라 알맞게 만들어진다. 그들의 모든 작업을 잘 보여주는 것은 약 3500가지의 괭이이다. 봄철 죽순을 캐는 데 쓰는 괭이부터, 남성용 전통의상의 외투인 톰비와 비슷하게 생겨 그 이름으로 불리는 가벼운 종류의 괭이까지 다양하다.


각 농기구는 단순하고 기능적이다. 일본의 나무 손잡이는 카시라 불리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진다. 날카로운 날의 강철과 쇠날은 왜 그 옛날 닌자들이 농기구로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일꾼들은 우뚝 솟은 기계로 가득 찬 비좁은 방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좀 더 넓은 옆방으로 이동하기 전 농기구의 형판을 자르면서 일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집게로 뜨거운 석탄 위에 있던 금속을 집어 커다랗고 시끄러운 자동 망치 기계에 두들겨 멋지게 농기구를 만든다. 


옆방은 더 조용하다. 여기에서 일꾼들은 나무의자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금속을 연마하여 날카롭게 날을 간다. 마지막으로 미리 구입한 나무 손잡이에 농기구를 끼운다. 


이러한 농기구는 평생 쓴다. 공장에서는 해마다 수천 개의 농기구를 수선하기도 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수요가 줄긴 했지만, 새로이 젊은 농부들이 농기구를 찾기 시작했다.



총 17명의 직원 가운데 쇠를 연마하는 3명의 직원.



공장의 설립자이자 현재 사장인 사토시 아이다 씨의 삼촌 타다오 아이다 씨. 




“농기구는 오래 사용할수록 주인의 몸에 맞게 길듭니다”라고 금융 판매원을 하다가 28세부터 이 사업을 시작한 아이다 씨가 설명한다. 


아이다 씨가 채소농사용 괭이를 집어들어 날을 살피자, 그의 근육질 팔뚝이 20년 넘는 대장간 일로 잔뼈가 굵은 그의 경력을 알 수 있게 한다. 


“농기구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연륜과 체력과 기술이 필요해요. 농기구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에 10년 정도 걸리죠.”


최근 공장에서는 새로 작은 공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경제적, 사회적 요구의 변화를 반영해 제품을 다각화하여 정원용 도구를 제조하는 기계를 들일 것이다. 급속한 고령화로 농민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는 한편, 대량으로 생산된 중국산 제품과 경쟁해야 한다. 


거기에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며 농민들의 수요가 급락했다. 한때 농산물로 유명했던 일본 북동부 현의 생산 —과 그에 대한 수요— 가 방사능 오염에 대한 공포로 확 떨어졌다.



공장 입구. 상호는 아이다 합동공장.



타다오 씨의 부인 에미코 아이다 씨.



사무실에 전시되어 있는 괭이, 낫, 쇠스랑 등의 모습.




그러나 재해의 여파 속에서 새로운 유형의 농부가 나타났다. 아이다 씨는 방치된 농지를 개간하여 직접 농사짓는 일본의 젊은이들의 농기구에 대한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바뀌었어요” 그는 말한다. “식품안전에 대해 엄청 신경을 쓰고 있죠. 사람들은 안전한 과일과 채소, 쌀을 먹고자 해서 스스로 자기 먹을거리를 재배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20살짜리 조카에게 대장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아이다 씨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람은 늘 먹어야 살 수 있을 겁니다. 농기구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라고 덧붙인다.




http://modernfarmer.com/2013/09/pitchfork-perfect/?utm_source=rss&utm_medium=rss&utm_campaign=pitchfork-perfect

728x90

'농담 > 농-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22년, 미국의 농업 지도  (0) 2014.06.11
멕시코에서 발굴된 초기 농업의 증거  (0) 2013.12.12
소농이 답이다  (0) 2013.09.19
거제도민의 노력  (0) 2013.09.17
거제도 다포 마을   (0) 2013.09.16
728x90




곡물의 쭉정이나 겨를 가려내는 농기구 '풍구'. 지역에 따라서는 '풍로'나 '풍차'로도 불린다. 


양쪽에 큰 바람구멍이 있고, 큰 북 모양의 통 내부에 넓은 깃이 여러게 달린 바퀴가 있다. 

곡물을 풍구 위 투입구로 넣고 바퀴와 연결된 손잡이를 돌리면 바람이 나오는데 이 바람의 힘으로 낟알과 티끌, 쭉정이, 왕겨 등의 잡물을 가려낸다. 여기서 가려진 쭉정이는 땔감이나 거름이 된다.

지금은 골동품 가게나, 농업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구가 아직도 쌩쌩하게 돌아가는 곳이 있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우복리 서촌마을에서 콩농사를 짓는 김형갑(67), 이금자(63) 씨 부부는 아직도 풍구를 쓴다. 

풍구의 나이를 묻자 이금자 씨는 "시집오기 훨씬 전 시아버지가 이웃 북천면에 있는 공작소에서 가져왔으니, 족히 80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함께 콩농사를 짓는 15가구 중 풍구를 쓰는 집은 이 집 밖에 없다. 

80년 넘은 풍구는 아직도 쌩쌩 잘 돌아간다. 할머니가 풍구 돌리는 모습을 갓 돌이 지난 외손녀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728x90

'곳간 > 사진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업 기계화 현황  (0) 2014.02.04
베트남의 부엌  (0) 2014.01.30
돼지를 도축하는 과정   (0) 2013.09.04
제주의 지하수 이용량  (0) 2013.08.21
카파의 사진 한 장  (0) 2013.07.10
728x90

풀 생태학자 Eric Gallandt 씨느 소규모 유기농업에 이용할 수 있는 물리적 풀 관리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리고 왜 'Weedmaster'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나온다











728x90

'곳간 > 영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흙을 이야기하자  (0) 2012.12.17
흙; 감추어진 자원  (0) 2012.12.07
골타기와 덮개작물  (0) 2012.12.02
농업과 녹색경제  (0) 2012.12.01
공장형 축산을 멈춰요  (0) 2012.11.29
728x90

미국의 농업이 지금처럼 대규모 단작 방식으로 변모하기 전, 그러니까 가족농이 농촌에 살면서 인력과 축력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던 그 시절...

호랑이가 담배 먹던 그 시절의 모습이다.


지금이야 대형 농기계를 타고 다니며 땅을 갈고 수확하며 하늘에선 비행기가 날아다니며 농약을 뿌리는 그런 시대이지만, 과거 미국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농사짓던 그런 날이 있었다. 


그때 탄생한 농기구이다. 제.초.기!

과거 조선에 일제가 가지고 들어왔던 논 제초기가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아니면 동시다발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이런 형태의 농기구가 만들어진 것일까? 

음, 아마도 서양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일본에서 그걸 보고 논농사에 알맞게 개량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럼 제초기를 어디 한 번 보자.



<The Garden Magazine>, 1919년



"혁신적인 농기구의 진화" <The Garden Magzine>, 1919년



"힘든 김매기의 고역을 없앤다." <The Garden Magazine>, 1919년


728x90
728x90

가래는 흙을 뜨고 파는데 쓰는 연장으로 '훈몽자회', '과농소초', '훈민정음해례'에는 '가래(佳래)'로,'천일록'에는 '가레'로 표기했다. 한자음으로는 가내(천일록)로 썼고, 한문으로는 험(훈몽자회), 철험(역어류해)으로 적었다. 또한 끝에 쇠날이 달려 있어 '감(堪)가래', 넓적하다 하여 '넙가래'라고도 했다.


 가래는 소가 들어가지 못하는 진흙 밭과 물이 많이 나는 논을 갈거나, 밭이랑을 일구는데 사용되는 농기구로 도랑을 치고 밭둑이나 논둑을 쌓거나 깎을 때에도 사용한다.


 흙을 떠서 옮기는 일을 '가래질'이라고 하고, 가래로 떠낸 흙덩이를 '가랫밥'이라고 한다. 또한 가래를 세워 흙을 깎는 일을 '칼가래질', 논둑이나 밭둑을 깎는 일을 '후릿가래질'이라고 한다.


 모양은 긴 나무자루인 손잡이와 가래바닥을 한 몸으로 만들고, 넓적한 가래바닥의 끝에 말굽쇠 모양의 쇠날을 끼웠다. 쇠날과 가래바닥은 꺾쇠로 고정하고 가랫바닥 양쪽의 군두구멍에 동아줄로 엮은 가랫줄을 매어 사람이 잡아당길 수 있도록 했다.


 가래질은 셋·다섯·일곱 등 홀수의 사람이, 한사람은 가운데서 손잡이인 장부를 잡고 나머지는 반으로 나누어 양쪽에서 가랫줄을 당기면서 흙을 떠서 던지는데, 세 사람이 한조가 되어 사용하는 '외가래 또는 세목가래'와, 일곱 사람이 한조가 되는 '칠목가래', 그리고 두 개의 가래를 잇댄 뒤 두 사람이 장부를 잡고 양쪽에 네 사람씩 가랫줄을 잡고 하는 가래질은 모두 열 사람이 가래질을 하는 '열목가래' 등이 있다.
 혼자서 삽질을 하면 매우 힘들 뿐 아니라 진흙 밭이나 논에서는 진흙의 점성 때문에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가래는 삼각 구도의 원리에 의하여 힘을 분산시키고 적어도 3명이 협동해 힘을 모아 이용하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어 일의 능률에도 매우 효과적이다.


 가래는 뒤에서 삽자루를 잡는 사람이 삽날에 흙을 파서 밀면 양편에 선 사람이 삽날에 연결되어 있는 끈을 동시에 잡아 당겨서 흙을 퍼낸다. 여러 명이 함께 작업을 하기 때문에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만 작업도 쉽고 능률도 오른다.


 특히 가랫줄을 잡는 사람들의 각도가 매우 중요한데 각이 너무 크면 힘이 적게 들지만 가래의 이동거리가 짧아진다.


 그러나 각이 나무 작으면 힘은 많이 들고 가래의 이동거리가 길어지지만 가래 장부를 잡은 사람이 가래의 힘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작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가래질의 목적과 주변 여건을 감안해 적당한 각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힘과 운동의 원리 가운데 하나인 벡터의 원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래로 세 사람이 하루 600여 평의 무논을 가래로 고를 수 있다. 이렇듯 가래는 우리 선조들의 공동체 삶을 이끌어 온 벼리인 동시에 작업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삼각구도를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과학 슬기가 돋보이는 농기구이다. 

728x90

'농담 > 농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과 관련된 사진들...  (0) 2010.05.18
물을 이용한 선조들  (0) 2010.05.17
효율적인 김매기 연장 '호미'  (0) 2010.05.17
소와 벌이는 한판 놀이 '쟁기질'  (0) 2010.04.26
모 찌는 모습  (0) 2010.04.02
728x90

이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을 마련했습니다. 좀 길지만 재밌게 봐 주세요. 우리의 농기구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비슷한지 보시면 재밌을 겁니다.

 

먼저 아래의 사진은 수확용 농기구입니다.  

 

가장 위의 명찰은 '가루카마', 곧 베는 낫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왜낫이라 부르는 그 종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왜낫보다는 자루가 더 긴 듯합니다.

그 다음은 주걱이란 뜻의 '헤라'입니다. 설명서를 보면 대나무로 만들어 이삭을 자르는 데 쓴다고 합니다. 이삭을 자르는 대나무칼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삭만 자르기도 하는 조나 기장을 수확할 때 쓰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면 적은 양의 벼를 수확할 때도 썼을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야스리'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지요. 무엇을 가는 데 쓰는 줄입니다. 이걸로 앞에 본 대나무 주걱 등의 이삭용 나무칼을 갈았다고 하네요.

맨 아래에 있는 것도 이미 설명한 주걱입니다.

 

다음은 밥그릇과 같은 다양한 공기입니다. 우리랑 발음도 비슷해서 '고키'라고 부릅니다. 혹시 한반도에서 넘어간 문화의 흔적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이 사진은 일본의 지게입니다. 솔직히 이걸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지게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도구인지 알았거든요. 미군이 한국전쟁 때 A프레임이라며 감탄했다느니, 세계에 이런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운반도구가 없다느니 하는 말에 혹~했지 뭡니까. 이제 그런 우월성이랄까 그런 걸 벗어 던져야겠습니다. 세상에는 나만 잘난 건 없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쓰면 저기서는 저기에 맞게 저렇게 쓸 뿐...

 

 다음은 괭이입니다. 왼쪽의 것은 부대밭을 경작할 때 쓴다는 넓은날 괭이입니다. 오른쪽의 것도 부대밭을 갈 때 쓰는데, 날이 좁은 걸로 봐서 돌이 좀 있는 곳에서 쓰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특히 이 구마모토 지역은 화산토로 이루어진 곳이라 흙이 부슬부슬합니다. 그 때문인지 우리의 괭이가 주둥이가 뾰족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 특이합니다.

 

 

다음은 오른쪽부터 쟁기와 '아와마키', '데스키', '츠치이레'라는 농기구입니다.

쟁기는 워낙 유명하니 다들 아실 테지만, 가만히 보면 흙밥을 한쪽으로 넘기는 역할을 하는 볏이 나무로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예 처음 만들 때부터 일체형으로 한 것인지, 다른 나무를 깎아 만들어서 붙인 것인지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못하여 아쉽게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볏을 쇠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형태는 처음 보았습니다.

다음 '아와마키'는 글자 그대로 풀면 '조를 감음'이란 말입니다. 조를 뿌린 다음에 이걸로 흙을 긁어서 덮는 데 쓰는 농기구입니다.

'데스키'는 밀, 보리나 채소를 기를 때 이걸 써서 고랑의 흙을 퍼서 뿌리에 북을 주는 데 씁니다. 우리나라에는 따로 이런 농기구가 있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호미나 괭이, 아니면 후치로 사이를 갈아서 했을 일입니다. 아래 사진으로 조금 더 자세히 보시죠.

 

마지막으로 아래는 '츠치이레', 곧 흙넣기라는 농기구입니다. 이건 제가 번역하고 있는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도 자주 나옵니다. 이것 때문에 뭔지 몰라서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모릅니다. 결국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에 도움을 받아 일본사이트를 뒤지고 헤맨 끝에 찾았지요. 찾고 나서도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습니다. 지금도 정확히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잠깐 쓰이다 사라졌기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이건 밀, 보리 농사를 지을 때 잘 자라도록 고랑의 흙을 퍼올려서 밑동에 북을 주는 데 쓰는 농기구 입니다. 앞의 뾰족한 부분을 통해 흙을 퍼 올린 다음, 망이 있는 부분에 올라온 흙을 밀, 보리 위에서 탁탁 털면 절로 밀, 보리 위로 떨어져 북을 주는 원리가 아닐까 합니다.

 

위의 사진의 농기구는 콩을 심는 파종기입니다. 저 통에 콩을 넣고, 주둥이를 땅에 푹 쑤셔 박은 다음 흔들거나 하여 또로록 콩을 흘려 넣었을 겁니다.

 

다음은 위에서부터 '옹바',  '야마코',  '오코'라고 부르는 농기구입니다. 야마코와 오코는 전체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냥 대충 설명하자면, 짐을 나르는 도구인데 양쪽에 물건을 매달고 등에 지는 도구입니다. 물통 옮기는 모습을 떠올리시면 될 겁니다.

옹바는 곡물을 탈곡할 때 이걸로 두드려서 껍질을 벗기는 농기구라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생김새만 보고 흙덩이를 부수는 데 쓰는 줄 알았는데, 일본의 흙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떠올리고는 그렇구나 했습니다.

 

다음은 망태기입니다. 일본에서는 '후고'라고 부르네요. 

 

키와 씨앗을 담아 놓는 통입니다.  

 

이게 아주 재밌는 농기구입니다. 우리의 도리깨와 똑같은데, 오른쪽에 통나무를 달아 놓은 것은 콩이나 팥을 떨 때 쓰는 것이고, 왼쪽의 것은 일반적으로 쓰는 도리깨입니다. 용도에 따라 도리꺠를 달리 썼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로만 다 하는데 말입니다. 

 

풍구와 매통입니다. 풍구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농기구의 하나입니다. 날려고르기를 하는 데 쓰는 것이죠. 매통은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 데 쓰는 농기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쓰던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홀태 또는 그네라는 농기구입니다. 일본 이름으로는 千齒라고 하여 이가 많다는 뜻으로 불렸습니다. 이게 들어왔을 때 작업효율은 기존에 하던 방식에 비해 훨씬 좋은데, 상하는 벼나 덜 떨리는 것이 많이 생긴다고 하여 꺼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벼를 베는 데 쓰는 낫입니다. 벼베기 전용 낫이라고 할까요. 벼 베는 데 맞게 특화된 것인가 봅니다. 낫의 날을 보면 톱니를 넣어 놓아 줄기를 쉽게 벨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심한 일본인의 특성이 이런 농기구에서도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건 '오테'라고 부르는 농기구입니다. 아래의 사진과 한 묶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벼에 벌레가 생기면 먼저 아래의 도구로 물에 훅훅 석유를 뿌립니다. 그럼 논물 위로 기름막이 형성됩니다. 거기에다 이 오테라는 도구라 벼를 휙 쳐서 거기에 붙은 벌레들을 기름막에 떨어뜨려 죽이는 농기구입니다. 지난 여름 산청에 임봉재 선생님을 만나고 왔을 때, 거제에서도 석유를 이용해 벼에 생기는 벌레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는 그냥 석유를 깡통에 넣어 허리에 차고 숟가락으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더 효과적으로 그 일을 했네요.

 

 

 아래의 사진은 써레입니다. 우리의 써레와 이도 좀 다르고, 형태도 좀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구마모토 특유의 괭이인 거름뒤집는 괭이입니다. 설명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괭이는 사용하는 토지에 따라서 여러 형태를 가집니다. 구마모토의 화산재 토지에서는 특색 있는 거름뒤집는 괭이를 썼습니다. 그 형태는 잛은 자루에 폭이 넓은 날을 붙인, 자루와 날이 이루는 각도도 매우 작습니다. 사람들은 대지에 발을 버티고 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힘껏 괭이질을 합니다. 기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일해서 '기는 괭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뭐라 하든 메마른 '검은 머슴'을 깊이 가는 데에는 가장 쓰기 좋은 괭이입니다."  

아무튼 자루도 짧고 각도 작아서 이걸 쓰려면 허리 한 번 제대로 펴기 힘들었을 듯합니다. 아니면 산비탈에서 썼다면 오히려 편했을 수도 있겠네요.

 

728x90
728x90

 논에서 발이 빠지지 않게 신고 논에 거름이 되는 풀 등을 밟아 넣는 도구.

 

728x90
728x90

일본어로는 강즈메(爪)라고 부르는 농기구입니다. 한자를 그대로 풀자면 기러기 발톱입니다. 생김새가 마치 기러기의 발톱과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농기구는 우리의 논호미와 맞먹는 도구입니다. 모와 모 사이의 흙을 뒤집어엎을 때 씁니다. 우리나라에도 일제시대에 보급되어 잠시 쓰기도 했습니다만, 그 이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박물관에도 이 농기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흙과는 맞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마모토 박물관에서

 

728x90

'곳간 > 사진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농기구 - 다게타  (0) 2009.11.04
일본의 농기구 - 논 제초기  (0) 2009.11.04
담배 말리기  (0) 2009.07.30
제주 1960년대  (0) 2009.07.24
대감신  (0) 2009.05.09
728x90

 

2008년 12월 30일, 날씨는 맑지만 바람이 강해 춥다. 먼저 어제 날이 저물어 보지 못한 성읍 2리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여기도 중산간이니 기대할 만하다. 차를 타고 오르는 길은 좋은 드라이브 코스다. 이 길도 곧 확장공사를 한다고 하니,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참 좋은데...

 

성읍 2리는 올라가보니 목장 지대였다. 농사는 그리 많이 짓지 않고 말을 키우는 곳이 많았다. 경치가 좋아서 그런지 별장 식으로 지은 듯한 집도 꽤 보였다. 그래도 차에서 내려 이 마을을 한참 돌다가 다시 표선 쪽으로 내려갔다. 다음 목적지는 제주민속촌마을을 가보기로 했다. 관광객들이 아침부터 참 많이 왔다.   

제주의 전통 뗏목, 테우.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이런 배가 오히려 뒤집히는 일이 없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빗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이렇게 받아서 썼다.

 

 

눌. 뭍에서 낟가리라 부르는 것과 같다. 바람이 많은 곳답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돌로 매달아 놓았다. 

 

 

제주의 옛 민가. 옥수수를 주루룩 달아놓았는데, 제주에서 옥수수를 이렇게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조 같은 씨앗을 심은 뒤에는 이 섬피를 끌고 다니며 흙으로 덮었다.

 

제주의 장독대. 제주의 장독은 그 색도 독특하다. 흙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제주의 부엌. 역시 굴뚝이 따로 없다. 벽은 그을음으로 검게 그을렸다. 메주를 저렇게 달아놓으면 그건 괜찮았을려나? 

 

 

세간이 참 단촐하다는 느낌이 들어 한 장 찍었다.  

 

 

아이들이 돌릴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맷돌. 

 

 

김칫독을 묻어 놓은 곳도 아닐 테고,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그 옛날 라이터나 성냥이 없을 때 썼다는 불씨를 보관하는 도구.

 

 

이것도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은자의 집, 상여. 

 

 

벼를 훑어서 털던 그네. 

 

제주의 보습. 밭에 돌이 많아서 그런가 뭍의 것보다 좁다. 

 

남태. 씨앗을 심고 흙을 다지는 용도로 쓰던 것.

 

 

표선 민속촌을 구경하고 세화1리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지난 여름 제주에서 토종 조사 사업을 하면서 만났던 고옥화(76) 할머니께서 살고 계신다 한다. 일단 집 앞 담장에 있던 나팔꽃의 씨앗을 채집했다. 고옥화 할머니께는 제주의 옛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지금은 피를 가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는데, 옛날에는 피쌀이라 하여 송당이나 성읍에서 많이 했다. 피쌀은 3번을 방아 찧어서 체로 고르는데, 맛이 좋다. 포근하니 입에 넣으면 보드라운데, 먹고 나면 배가 일찍 꺼진다. '송당 목장'에서 아직도 피를 가는 것 같다. 습기가 많은 데는 피, 어느 정도 있는 데는 산듸, 없는 데는 조나 고구마를 심었다. 여름에는 한 달에 한 번 돗거름(돼지거름)을 냈다. 보리에 돗거름을 섞어서 뿌리고, 말이나 소로 밟는다. 사람이 있냐 없냐, 거름이 있냐 없냐에 따라 씨를 심는 법이 달라졌다. 거름이 없으면 그냥 쫙쫙 뿌리고, 있으면 하나로 섞어서 들고 뿌렸다.

그 아들 분께서 같이 자리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42세인데도 어렸을 적에 하루 두 끼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제사 때나 쌀밥을 먹을 정도였고, 겨울에는 보리범벅이나 메밀범벅을 자주 먹었다. 좋은 메밀쌀은 제사 때 쓰고, 후진 것으로 두 번 세 번 갈아서 고구마범벅에 넣는데, 그러면 색이 거무티티해진다. 고구마절간은 뱃때기라고 불렀다.

따뜻한 커피를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드리고 나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냥 기사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다른 어느 곳보다 인심도 후하고 맛있으며 값도 쌌다. 나중에 제주를 다시 찾으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계속 표선면 일대를 누비고 다녔으나 별로 소득은 없었다. 아니 전혀 없다. 그래서 아까 들은 송당 목장으로 피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송당 목장을 지도에서 찾아 산으로 올랐다. 조금 헤매다가 송당 목장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한다.

 

송당 목장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목장 사무실을 찾아가 관계자 분을 만났다. 피는 사료로 쓰려고 심고 있는데, 현재 반장님이 집에 씨를 보관하고 있어 이곳에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찾아오기는 어렵고 하여, 우리가 피를 찾는 목적을 말씀드리고 주소와 발송비 명목으로 비용을 드리고 왔다. 이 피는 이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틀림없이 배달되었다.

이제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내일은 비행기 시간도 있고 하여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한 달에 걸친 기간이 마지막이라니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참 시간이 빠르기도 하다.

 

 송당 목장은 전체 넓이가 여의도의 몇 배나 된다고 한다. 이 드넓은 초지에서 말과 소가 다니며 한가로이 노닌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