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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에 출국 확인도장이 없다며 사람을 불법체류자로 의심하며 아동수당 못 준다고 그러더니...

도교 재류관리청에 우편으로 직접 출입국기록 서류를 신청해 받아서 제출하니, 다른 담당자가 그제서야 의심을 풀면서도 그럼 작년 10월에 무얼하러 온 거냐고 재차 묻더라.

관광이라 답하니 관광이요? 하던 얼굴.

아무튼 우리는 제대로 대응했고 결국 승리했다. 지난 1월분 아동수당부터 지급한다는 통지가 왔구만.

처음 국민의 세금 외국인 운운하던 그놈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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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사기 애매해서 공유자전거 이용하려고 했건만...

자전거가 포트에 잘 없더니 오늘 보니 지도에서 싹 사라졌다.

충전해놓은 돈이 아직 만원 가까이 있는데... 으으... 이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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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농기구란? 그 역사

 

 

온고지신 - 일본인은 메이지 시기까지는 중국, 메이지 이후는 서양,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의 문화를 도입한 것이 일본의 근대화라고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그때 좁은 일본에서 오래된 도구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선진국의 기술, 도구를 도입하는 데 곤란을 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1957년 池田 내각 시대는 농가의 소득이 도시 급여소득자의 절반쯤입니다. 그래서 농가의 소득도 급여소득자와 마찬가지로 높이려 하여 농가의 소득 배증을 어떻게 할까. 1960년에 농업기본법이 제정되어 이에 기반하여 1962년에 전국에서 제1차 농업구조개선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농작업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농지의 경지정리, 습지의 암거 구축, 두렁의 정비, 용배수로의 정비, 관개시설의 설치, 농기구의 정비 등이 행해졌습니다. 이때까지 동력원으로서 인력과 축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경지정리에 의하여 동력원이 석유발동기나 가솔린엔진을 휴대한 경운기, 트랙터 등을 도입해 작업의 효율화와 하나의 경지당 재배면적이 확대되었습니다.

 

벼농사를 보면 1945년 전반까지는 물못자리에서 온탕소독과 싹틔우기를 행하고 수온이 20도 정도가 되고나서 파종을 행했습니다. 그 뒤 기름종이에 파종한 모판에 왕겨훈탄을 뿌려 그 위를 덮었다. 그에 의하여 서리 피해를 막고, 모의 발육을 촉진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종래보다도 10일에서 20일 모내기를 일찍 할 수 있었습니다.

 

보온 절충 못자리의 최초인(나가노현 카루이자와軽井沢 하기와라 토요지萩原豊次 씨가 1931년에 개시) 기름종이는 1회나 2회밖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 폴리에틸렌 필름이 도입되어 몇 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뒤 1955년 전반에는 농업용 비닐 필름이 도입되어 대나무대를 이용해 비닐 터널 재배로 변했습니다. 보온 절충 못자리가 도입되고나서부터 손모내기 모는 파종 뒤 45일 전후에 모내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약 1달 정도 모내기가 빨라졌습니다. 모든 농작업도 빨라져 태풍이 오는 철을 약간 피할 수 있게 되어 수확량 증대가 예상된 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 뒤 농촌의 생활양식에도 변화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생활개선의 일환으로 정월에 장식용 소나무를 없애고 종이에 소나무 그림을 인쇄해 그걸 대용으로 붙였습니다. 농작업복은 일본식에서 서양식으로 변했습니다. 주거도 서서히 고쳐 지어서 일본식에서 서양식으로 일부는 남았지만 변화했습니다. 

 

주거나 농막의 개조에 의하여 사용하지 않게 된 농기구는 폐품이 되어 철제품은 철 부스러기로 재이용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이를 모아 문방구 등의 구입비로 충당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종래 사용되었던 농기구는 급속히 소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작물 재배, 가축의 사육에서는 그 기본이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변화한 것은 동력원이 인력과 축력에서 동력으로 변화한 것, 또 플라스틱 필름이 개발되어 농업에 도입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농기구 기능은 바야흐로 "옛것을 찾아 새로운 것을 안다." 이것의 기본이 되는 도구가 옛 농기구입니다. 1967년 제2차 농업궂개선사업이 개시되고, 더욱 농촌이 정비되어 잉여노동력은 도시노동자로 이행되었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줄어들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농촌의 자연환경은 서서히 부정적 방향으로 향한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논에서 물이 사라져 마른논이 되어 종래의 겨울 담수 논은 사라졌고, 많은 생물들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농작업의 효율화, 농산물의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한 농업이 지금 재검토되고 있습니다.

 

농기구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 속의 일원으로 공생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크게 통감할 수 있습니다.

 

 

 

우메무로 히데오梅室英夫 

    

 

 

2장   그림에서 보는 땅을 가는 농업기술

 

농서는 근대 농학이 성립하기 이전의 농업기술이나 농민의 생활에 대한 저작물입니다. 근대 이후는 농학서이지 농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농서의 성립은 중국 농서의 영향을 받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과 류큐의 농서가 성립되는 데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남북조 시대인 6세기 전반의 북위北魏에서 성립한 가사협의 <제민요술>은 밭농사 농업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육구몽陸龜蒙의 <뢰사경耒耜經>은 강남의 논에서 사용한 역축 농기구의 해설입니다. 1154년에 남송南宋에서 간행된 진부陳旉의 <농서農書>는 논 농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313년 왕정王禎의 <농서農書>는 화북, 화중의 농법을 비교한 재래 농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639년 간행된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는 고래의 농학자의 설과 당시 유럽의 농업기술을 소개한 농정의 집대성입니다. 이상이 중국의 논과 밭농사에 관한 농기구를 일본에 소개한 농서입니다.

 

한편, 일본에서 농서의 성립은 16세기 후반인 1629년부터 1654년 사이의 전국시대 이요伊予의 무장 도이키 요요시土居淸良가 마츠우라 소우안松浦宗案에게 농업에 대하여 설문하여 그에 답한 것을 마츠우라가 적어 올린 <청량기淸良記> 30권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특히 제7권은 농업에 대하여 기재되어 이를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이라고 별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1682년에는 미카와三河, 엔슈遠州 지방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전15권 작자 미상의 <백성전기百姓伝記>. 1684년에 사세 요지에몬佐瀬与次右衛門이 지은 <아이즈농서会津農書>는 상권은 벼농사, 중권은 밭농사, 하권은 농가경영의 3권으로 구성되어 아이즈의 농업기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697년 미야자키 야수사다宮崎安貞가 지은 <농업전서農業全書>는 키나이畿内를 중심으로 해 산요우도山陽道, 키이紀伊 지방 등을 조사해 농민에게서 듣고 적은 걸 바탕으로 전10권을 저술하여 일본 최초의 종합적 농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농학자 서광계의 영향을 받아 농기구 그림은 그려놓았지만 그 사용법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에도江戶 시대의 3대 농학자(미야자키 야수사다,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의 한 사람인 오쿠라 나가츠네는 미야자키 야수사의 영향을 받아, 1822년에 각지를 여행한 견문에 기반하여 42종류, 110점의 농기구에 대하여 <농구편리론農具便利論>(그림1)을 저술했습니다. 그 내용은 농기구의 각 부분의 치수, 각도 및 무게와 지면에서부터 자루의 끝까지의 길이, 사용처의 토성까지 농기구와의 관계를 농민도 읽기 쉬운 가나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용법이 난해한 농기구에 대해서는 그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없던 획기적인 농서로 메이지明治 30년대까지 복각간행되었습니다. 그 이후도 서양 농기구에 관한 서적이 출판되었는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농구편리론>(그림2)이 인용되어, 명저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1
그림2

 

 

이 이전에 사츠마薩摩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의 의향에 의해 1804년 소한曾槃이 지은 <성형도설成形圖說>은 농업의 백과전서라 불리는데, 그곳의 해설은 만엽집과 농정전서로부터 인용하고, 번의 식산흥업을 위한 서적이기도 하며, 무사의 교양서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농업에 정통한 지방의 독농가, 즉 메이지 시대의 3대 노농의 하나인 <노농만경록老農晩耕錄>의 저자 이시카와 리치노스케石川理紀之助는 아키타현秋田県 센보쿠仙北 지방의 가난한 마을에서 구제 지도를 행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벼농사, 밭농사 등에 대하여 다수의 농서가 간행되어 농업기술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 근대까지, 농민은 풍년만작豊年滿作(그림3)을 염원하고 사계절마다 벼농사의 농경방법을 그린 <사계경작도四季耕作圖>가 그림의 첫머리에 받아들여져 각지의 신사에 봉납되어 그 몇 개인가가 현존해 있습니다. <타와라카사네たわらかさね 경작 두루말이 그림>(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두, 작자 미상)은 성형도설과 마찬가지로 다이묘와 무가의 자제에게 농업의 과정을 가르치기 위하여 농경의 연중행사를 그렸습니다. <광익국산고広益国産考>(1844년 오쿠라 나가츠네 저)는 전7권, 그의 생애의 견문이 집대성된 서적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6년 일본은 4월부터 8월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각 부현에서 박물국에 제출된 출품물의 도설을 박물국  여러 산물의 제조과정을 중심으로 도해한 <교초敎草>(그림 4, 5)가 있습니다. 

 

 

 

메이지 벼농사 농법은 토지개량에 의한 습논의 건논화, 쟁기를 이용하던 우마에 의한 깊이갈이, 시비 기술의 개량, 볍씨의 소금물가리기나 좁고 긴 장방형 물못자리 등이 보급되어 종래에 비해 그 수확량과 노동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이 농법을 교초에 의하여 보급하려고 시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1838-1916)입니다. 또 다나카는 일본에 박물관을 탄생시킨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다나카 요시오(농대의 전신 도쿄 고등농학교의 초대 교장)은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물에 즉한 지식의 개명"으로, 더 상세한 자료정보의 제공방법으로 서적이나 그림(그림 6, 7, 8, 9, 10)이 필요하다고 기술합니다. <교초>는 그에 해당하는 것의 하나입니다. 올바른 정보란 실물과 활자와 그림이 조합되어야 진실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은 농대의 도서관 창설 당시부터 표본(실물자료), 도서, 도해(족자에 탁본, 현재는 사진, 영상)의 세 기둥으로 정보가 성립된다는 점을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학을 최우선으로 삼는 농학, 농업에서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농업의 발전에는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걸 안다"는 이념에 따라 전통의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독창적인 실학이 되는 것입니다(그림 11, 12, 13).

 

 

 

 

 

 

 

제3장   괭이

 

   1.  괭이의 기원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 년 전에 농경 기원의 하나로 뿌리채소 농경문화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얌이나 타로를 재배, 수확하기 위한 도구로 봉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뒤지개掘棒(하라노 코오조原野耕三 씨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의 화전 농경을 행하는 소수민족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음)라 부르고, 현재도 사용하는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현재의 괭이는 이 뒤지개의 끝부분이 넓어지고 현재의 발쟁기(踏鋤) 형태가 된 뒤, 결국은 자루에 날판(刃床) 부분이 덧붙여진 괭이가 되었습니다.  그뒤 뿌리채소 재배는 서남아시아에 도달하고, 맥류 농사와 우마의 가축화가 행해져 말과 소에 의한 쟁기질에 의한 경작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럼 일본에서는 언제쯤부터 괭이가 존재했을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1400년 전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 농경이 존재했습니다. 야요이 시대의 전기에는 목욕통(날판 부분)에 구멍을 뚫고, 곧은 자루를 장착한 괭이가 후쿠오카현의 이타즈케板付 유적, 시즈오카의 토로登呂 유적, 미에현 츠시津市의 노소納所 유적, 비사이시尾西市 오카시마岡島 유적, 토요하시시豊橋市 우리고爪郷 유적, 토요타시豊田市 가와하라川原 유적 등에서 목제 괭이가 출토되었습니다. 아이치현 기요스시淸須市의 아사히朝日 유적(중기 후엽)에서 출토된 괭이에 양끝을 접어 구부린 철날을 장착한 흔적이라 생각되는 목욕통 부분이 보고되었습니다. 이들 출토품의 재질은 북가시나무, 가시나무, 주목 등입니다. 현재도 날판 부분의 철을 제하면 목욕통과 자루의 재질은 야요이 시대와 바뀌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타즈케 유적에서 발굴하다 도랑의 벽면에서도 철날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로 변천했다고 합니다만, 일본에서는 청동기 시대(야요이 후기부터 일본제 청동기가 나타남)가 없이 야요이 시대에 철기문화가 벼농사와 함께 한반도로부터 이입된 것이라 합니다. 

 

그럼 야요이 문화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물으면 오카자키 타카시岡崎敬 씨의 고고학적인 자료에 기반하면 양자강 하류(강남 지방)에서 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산동반도, 조선의 서남해안을 거쳐서 북규슈에 전해졌다는 설이 정설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을 이시게 나오미치石毛直道 씨는 돌칼을 이삭 자르는 데 사용하며 이는 동남아시아에는 없는 도구이고, 세계에서 동아시아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석기라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 야요이 시대에는 목제의 괭이는 갈이용과 진흙을 뒤섞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 것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키노시타 타다시木下忠 씨의 일본의 고고학 3권 <농구農具>에 의하면 경운용 찍는괭이(打鍬)는 자루와 날판 사이 부분의 폭이 좁고 두터우며 자루가 이루는 각도는 60-80도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인 진흙을 뒤섞고 고르는 데 쓰는 건 자루와 날판 사이 부분의 폭이 찍는괭이에 비해 넓고 얇으며, 자루가 이루는 각도는 40도 정도의 당기는쟁기(引鍬)입니다. 이외에 날이 몇 개인 갈래괭이(股鍬)나 흙의 이동, 구멍 파기 등에 쓰는 발쟁기 등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출토품은 모두 목제입니다.

 

그럼 언제쯤부터 철이 괭이나 낫에 쓰였는가 하면 츠데 히로시都出比呂志 씨에 의하면 1세기 말에 한반도에는 그 유사품이 없고 일본 독자의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에서는 철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이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일반에는 보급되지 않고 일부의 계층만이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5세기가 되면 한반도의 삼국시대(신라)의 철제 낫과 같은 것이 일본에도 존재했습니다. 중국 화북의 전국시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이미 존재하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도래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중국의 가래(鋤)는 일본의 괭이에 해당하고, 괭이는 거꾸로 가래로서 의미가 정반대입니다.

 

 

   2.  괭이의 형태

괭이는 용도나 흙의 성질에 의해, 날판 부분의 모양과 자루의 길이, 자루의 각도, 무게 등이 그 형태를 다르게 만든다고 합니다. 기본으로 하는 모양은 괭이 자루의 끝이 지면에서부터 사용자가 직립한 자세로 허리 높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업을 계속해도 쉬이 피곤해지지 않는 자세입니다. 즉 어떤 각도를 가진 괭이라도 이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다만 어떤 일에도 예외가 있듯이, 히고肥後 괭이나 사츠마薩摩 괭이는 날판 부분과 자루의 길이가 동일하든지, 또는 자루의 길이가 조금 깁니다. 자루의 끝은 허리의 위치에 있지만 허리를 구부려 쭈그린 자세의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날판 부분의 재질과 형태에 의한 분류(그림14)

 

 

 

-나무 괭이 ... 목욕통, 자루는 가시나무나 북가시나무, 주목, 참가시나무, 밤나무. 일부 지역에서는 두렁치기용으로 사용(그림15).

 

-목욕통 괭이 ... 날끝은 철로 자루 및 목욕통은 목제. 두둑짓기, 북주기, 사이갈이 김매기, 경운, 수확, 두렁깎기, 두렁치기, 옮겨심기, 흙 다지기 등

 

-삽괭이 ... 자루는 목제이고 날 부분은 철. 또 날 부분에 2-3개의 구멍이 있어 이것을 창문괭이라 한다. 용도는 목욕통 괭이에 준한다(그림16).

 

-빗츄備中 괭이 ... 자루는 목제이고 날 부분은 철로 2-5개의 갈래. 주로 논의 경운, 흙부수기, 두렁치기할 때 진흙을 두렁에 붙인다. 점토질의 밭, 논의 경운

 

 

   3.  특수한 용도

 

-죽순 캐기 ... 삽괭이

-나무 심기, 개간용 괭이 ... 날판 부분은 두텁고 은행잎 모양을 하며, 날끝은 포물선을 그린다(그림17).

 

 

-연근 캐기 ... 목욕통 쟁기로 자루가 짧고 자루의 각도가 예각

-고구마, 토란 캐기 ... 빗츄 괭이를 쓰고, 줄기 부분의 손상을 막습니다. 

-벼 그루 자르기 ... 벼 그루를 한 그루씩 지면으로부터 잘라 해충 등의 월동을 방지하는 삽괭이

-땅 다지기 행사, 나무심기 행사, 건축의 지형 ... 나무 괭이

-점토와 자른 볏짚을 반죽해 흙벽을 만든다 ... 삽괭이

-석회, 마, 종이 등의 여물과 바닷풀을 쪄서 반죽해 회반죽을 만든다 ... 나무 괭이

 

 

 

   4.  자루와 날 부분의 각도에 의한 분류

-찍는괭이 ... 경운, 개간, 모종의 옮겨심기를 목적으로 하고, 그 자루의 각도는 60-70도, 자루 길이는 60-120cm, 자루의 끝은 두꺼워져 미끄러짐을 방지합니다. 삽괭이에 속하고, 중점토나 모래자갈에 적합합니다. 

-당기는괭이 ... 가볍고 다루기 쉬우며, 자루의 각도는 40-45도이고 약간 사질토양에 적합한 괭이입니다. 

-찍고당기는괭이 ... 주로 밭의 두둑짓기를 하고(그림18), 흙 붙이기, 사이갈이 김매기를 목적으로 한 괭이로, 자루의 각도는 50도 정도이고 자루 길이는 40-150cm.

 

 

   5.  특수한 형태의 괭이. 아마쿠사天草 괭이, 사츠마薩摩 괭이

 

특수한 형태의 괭이 아마쿠사 괭이, 사츠마 괭이는 목욕통 괭이에 속하고, 주로 논밭의 경운, 밭의 사이갈이 김매기, 두둑짓기를 목적으로 합니다. 자루의 각도는 20-35도이고 자루 길이는 40-60cm로 날판 부분과 자루의 길이가 동일합니다(그림19).

 

 

 

   6.  토양 성질에 의한 괭이의 형태

토양 알갱이의 조성에 의하여 입자를 아래와 같이 분류합니다.

-거친 모래 : 0.25-2mm ... 목욕통 괭이, 삽괭이의 찍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당기는괭이 모두 사용 가능. 

-가는 모래 : 0.05-0.2mm ... 당기는괭이, 찍는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미세 모래 : 0.01-0.05mm ... 당기는괭이, 찍는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의 사용 가능.

-점토 : 0.01mm 이하 ... 찍는괭이, 빗츄 괭이가 적합합니다.

-가는흙 ... (굵기 2mm 이하의 토양 입자) 내부의 점토 함량에 의한다. 

-모래흙 ... 12.5% 이하 ... 찍는괭이, 당기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목욕통 괭이, 삽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사양토 ... 12.5-25% ... 찍는괭이, 당기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삽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양토 ... 37.5-50% ... 찍는괭이, 빗츄 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7.  괭이의 무게에 의한 분류(총중량)

-찍는괭이 ... 2.8kg 이상 ... 빗츄 괭이, 목욕통 괭이

-당기는괭이 ... 1.3kg 이상 ... 삽괭이, 목욕통 괭이

-찍고당기는괭이 ... 앞 두 가지의 중간 ... 빗츄 괭이, 목욕통 괭이

*남성과 여성이 사용하는 괭이의 중량 차이는 여성이 약 10% 가볍다. 

 

 

   8.  괭이를 사용하는 사람의 진행방향에 의한 분류

-전진 ... 논밭의 경운(그림20), 밭의 김매기, 벼의 포기 자르기, 두렁치기(그림21), 논의 쟁기질한 흙 부수기, 뿌리채소의 수확 등 ... 찍는괭이, 빗츄 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를 사용.

 

-후퇴 ... 두둑짓기(그림22), 북주기, 뿌리채소의 수확, 옮겨심기 등 ... 찍고당기는괭이, 당기는괭이, 목욕통 괭이, 삽괭이, 빗츄 괭이를 사용합니다. 

 

*습논 경운을 할 경우, 진흙이 앞으로 튀어 자루와 사용자에게 걸려 작업효율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빗츄 괭이의 날 부분 끝보다 약간 큰 구멍의 대나무로 짠 판 모양의 것(치바에서는 다테라고 함)을 자루의 아래쪽에 장착하고, 진흙이 튀는 걸 막습니다(그림23). 종려나무의 잎자루를 장착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9.  괭이의 사용법

 

-찍는괭이 ... 오른손잡이 ... 왼손으로 자루의 끝(미끄럼 방지 부분)을 잡고 오른손은 왼손에서 어깨너비 정도 떨어진 부분을 잡으며 괭이를 휘두릅니다. 지면에 괭이가 박히는 동시에 오른손은 왼손의 앞으로 미끄러집니다. 두발은 어깨너비의 1.5배로 벌립니다. ... 빗츄 괭이, 목욕통, 삽괭이

                    왼손잡이 ... 오른손잡이의 반대가 됩니다.

 

-찍고당기는괭이 ... 오른손잡이 ... 왼손으로 자루의 끝을 잡고 오른손은 왼손에서 어깨너비의 위치를 잡으며, 괭이로 흙을 1 또는 2회 정도 파고 날 부분에 흙을 얹어 오른쪽으로 흙을 북돋아 두둑짓기를 행합니다. 발은 두둑 너비로 벌리고 오른발을 앞으로, 왼발을 뒤로 하고서 후퇴하면서 북돋우기를 합니다. ... 목욕통 괭이, 삽괭이, 창문괭이를 사용합니다.

                              왼손잡이 ... 오른손잡이와 반대로 합니다.

 

-당기는괭이 ...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 찍고당기는 괭이에 준합니다. ... 목욕통 괭이, 삽괭이, 창문괭이를 사용.

 

*괭이자루의 잡는 위치와 발의 위치 관계

경운(논밭) ... 주로 쓰는 손은 괭이자루의 끝에서 어깨너비를 잡고, 다른 손은 괭이자루의 끝을 잡아 고정합니다. 괭이의 날 부분이 흙에 꽂히는 시점에는 주로 쓰는 손은 끝을 잡은 손과 가까이 인접해 있습니다. 또 괭이를 휘두르는 시점에는 주로 쓰는 손을 어깨너비의 위치로 되돌려 휘두릅니다. 즉, 주로 쓰는 손은 내리꽂을 때마다 다른 손과의 사이를 왕복하며 움직입니다. 

두발의 위치는 경운 진행방향으로 어깨너비의 1.5배로 벌리고 평행하게 섭니다. 괭이는 순차적으로 120cm 정도의 너비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한 괭이씩 경운합니다.

이외에 오른손잡이는 논의 경운에 빗츄 괭이를 사용하는 경우, 두둑 3개를 기준으로 왼쪽의 4번째 그루를 일으켜 뒤집고, 다음으로 오른쪽의 2번째 그루를 일으켜 뒤집습니다. 이렇게 연속하며 전진하기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옵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와 반대로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전진합니다. 

또한 1년 내내 물이 있는 논의 경운 방법으로, 두둑 4개를 기준으로 왼쪽 그루를 1그루씩 뿌리부터 자르며 2그루를 하나로 겹쳐 앞쪽으로 북돋으면서 전진합니다. 오른쪽 그루도 똑같이 합니다.  이 작업의 그루 북돋우기는 왼쪽과 오른쪽을 교대로 행하기 때문에 주로 쓰는 손의 지점이 바뀌어 양손잡이가 아니면 효율적으로 경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괭이는 목욕통(치바현 도가네시東金市에서는 갑페라カッペラ라고 부름) 괭이입니다. 

갑페라

 

 

두둑짓기, 북돋우기(밭). 주로 쓰는 손은 경운의 자루 쥐는 법과 동일하지만 다른 손과의 사이를 왕복하는 건 별로 없고 거의 고정됩니다. 오른손잡이는 오른발을 두둑짓기가 종료된 고랑의 앞쪽에 놓습니다. 다른 발은 고랑을 교차하는 위치에서 오른발에서의 보폭과 같은 위치에 놓습니다. 즉, 왼발은 괭이 끝보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고, 두둑을 넘은 자세로 후퇴합니다. 

오른손잡이는 흙으로 오른쪽에 북돋우기를 하고, 한 두둑을 마칠 때마다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왼손잡이는 왼쪽으로 북돋우기를 하며 반복해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요령 좋은 양손잡이는 시작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왕복하여 효율적입니다.

 

두렁치기(논두렁치기) ... 물이 새거나 무너진 두렁은 삽괭이, 목욕통 괭이로 풀 등을 깎아내고, 경운하지 않은 두렁 아래의 벼그루와 진흙(단단할 경우에는 발의 측면에서 가닥을 붙이면 블록 모양을 취하기 쉬움)을 빗츄 괭이로 두렁의 측면과 윗면에 놓습니다. 또, 그 뒷면을 사용해 진흙을 평평하게 하며 벼그루는 진흙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그런 다음, 삽괭이 또는 목욕통 괭이의 뒷면을 사용해 진흙을 문질러 평평하게 만듭니다. 맑은 날 작업하면 진흙이 건조해지기 쉬워서 신속해 작업해야 합니다. 만약 마른다면 다리로 물을 끼얹어 수분을 보충해 부드럽게 만든 다음 평평하게 합니다. 

 

 

 

   10.  괭이의 유지

괭이의 수리 ... 괭이의 날 부분은 바탕쇠에 강철을 연결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용 빈도가 높으면 날끝 양단의 마모는 흙과의 마찰로 서서히 둥글어지고 강철이 사라집니다. 날끝 강철 부분의 너비는 약 9cm 정도입니다. 또한 자갈이 섞인 농지를 갈면 날끝이 자갈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을 경우 대장간에서 오래된 날끝을 제거하고 새로운 강철의 날끝으로 교환합니다. 이를 날걸이(先掛け)라고 합니다(그림24, 25).

그림24 원래 날은 점선까지 있었지만 닳아 없어져 날걸이를 한다

 

 

 

괭이는 신품을 한번 구입하면 날걸이로 수리하며 대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괭이를 사용한 뒤에는 녹 방지를 위하여 흙을 털어내고, 수분을 제거합니다. 보관은 땅에 세워두지 않고, 벽에 걸대를 만들어 그곳에 걸어놓는 것이 최선입니다. 장기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철 부분에 기름을 칠하여 녹을 방지합니다. 괭이는 사용하면 사용하는 만큼 번쩍입니다. 녹슨 괭이는 흙일에 나쁘고, 점질 토양에서는 날 부분의 앞뒤, 자루와 날 부분의 연결부 안쪽에 흙이 붙어 작업 효율이 떨어집니다. 달라붙은 흙을 떼어내려면 대나무 주걱 등으로 떼어냅니다. 주걱은 괭이자루의 아랫부분에 철사를 감아서 꽂아놓습니다(그림26). 또 괭이의 사용자가 허리에 끈을 매고 그 끝에 주걱을 묶어 놓습니다.

그림26 흙 제거용 주걱

 

 

 

   11.  갈이용 도구인 발가래(踏鋤)

발가래는 뒤지개에서 발달한 도구입니다. 뒤지개 끝부분의 너비를 넓힌 도구입니다. 뒤지개는 씨뿌리기, 옮겨심기, 수확 등에 사용하는데, 발가래는 뒤지개의 기능 이외에 경운, 흙의 이동, 구멍 파기, 주걱 등으로도 사용합니다. 발가래는 자루와 날판 부분이 일체이고 그 자루의 각도는 180도-160도이며 손잡이가 자루에 접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우슈江州 가래(오우미近江의 나라), 교우京 가래 등이라 불렸습니다(그림27). 발가래는 현재의 가늘고 긴 삽에 해당합니다. 자루와 목욕통이 일체화되어 그 끝에 날을 끼웠습니다. 이 형태의 발가래는 주로 습논의 경운, 배수용 도랑 파기 등에 사용됩니다. 또 나무 심을 때 옮겨심기, 캐기, 구멍 파기 등에도 쓰입니다. 사용법은 가래날의 어깨 부분을 발로 밟으면서 날끝을 흙에 찔러넣고, 자루 끝의 손잡이를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틀며 앞면으로 쟁기를 넘어뜨립니다.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순차적으로 이동하고, 후퇴하면서 사용합니다. 날판 부분은 길이가 40-50cm이고 깊이갈이할 수 있습니다. 시가현滋賀県의 코토湖東에서는 고우슈 가래라 부르며 남자가 논을 경운하는 면적은 하루에 150평이었습니다. 이 지방에서는 경운을 깊이갈이, 거친갈이, 써리기의 3단계로 나누어 각각 발가래, 빗츄 괭이, 고무래(柄ぶり)로 행합니다. 그 뒤 말린풀(마른풀, 풋거름 등)을 갈아 넣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는 평년작으로 300평당 10가마의 수확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림27 발가래

 

 

나막신 빗츄 가래

충적지의 논 경운에 사용합니다. 날판 부분의 길이는 60cm, 날 너비는 24cm, 자루 길이는 60cm, 날판 부분은 44cm. 날판 부분을 흙에 꽂아넣습니다. 

오른발 또는 왼발로 옆의 밟는 부분인 길이 60cm의 끝부분(나막신을 고정)을 밟고, 자루를 앞으로 끌어내리면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틉니다. 즉, 지레의 효과입니다. 여성도 깊이갈이하기가 쉽습니다(그림28).

그림28 나막신 가래

 

 

 

 

발가래

발가래는 밭의 전면을 경운할 때 사용합니다. 자루 각도는 60-20도. 자루 길이는 110-230cm. 날판 부분의 길이는 80-110cm. 날 너비는 15-27cm. 날끝은 주물 또는 강철을 사용합니다. 자루와 날판 부분은 자루와 턱을 괴는 곳, 새끼줄(철사)로 고정합니다(그림29, 30).

그림29 여자아이의 발쟁기

 

그림30 개량 발가래

 

사용방법은 오른손잡이는 오른발로 날판 부분의 오른쪽 어깨를 오른발로 밟고, 오른손은 자루의 앞쪽을, 왼손은 자루의 뒷쪽에서 어깨 위치의 높이로 쥐고 흙에 밟아 넣습니다. 자루를 앞쪽으로 밀어올리고 왼쪽으로 뒤집습니다. 

왼손잡이는 발쟁기의 쥐는 방법, 뒤집는 방법도 오른손잡이와 거꾸로입니다. 작업 자세는 거의 똑바로 서서 하기 때문에 다른 괭이에 비해 피로가 덜합니다. 자루괭이, 큰괭이, 주조 괭이, 손괭이, 삽, 텐가天鍬 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래(타니히키谷引き, 텐가, 두둑짓기畝立て, 겐고헤에源五兵衛<사츠마> 가래, 통자루가래ずんがら鋤, 인걸이二挺掛け)

자루의 길이 150-180cm, 가래판의 길이 40-90cm, 한 줄기의 가래판 너비 9-15cm, 두 줄기의 가래판 너비 35cm, 용도는 사양토, 사토 지대의 밭 경운, 두둑짓기, 사이갈이 등에 손잡이를 쥐고, 후퇴하면서 사용합니다(그림31).

그림31 <농구편리론>에서

 

<참고문헌>
飯沼二郎, 堀尾尚志, <ものと人間の文化史 「農具」 > 1976년 재단법인 法政大学出版局
菊池俊彦, <図譜江戸時代の技術上> 1988년 주식회사 恒和出版
熊本日日新聞社編集局編集, <農魂 熊本の農具> 1977년 熊本日日新聞
東京農業大学図書館標本室 소장, <古農器具類写真目録> 1978년 東京農業大学図書館
埼玉県立歴史資料館, <麦作りとその用具> 1985년
長野県教育委員会 편집, <信州の民俗> 1969년 第一法規

 

 

참고

 

-일본 괭이의 변화상

 

 

-일본의 괭이별 날의 너비와 자루의 각도

 

-일본의 발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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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천도를 결정한 일본국 환무왕.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고 한다. 

그는 광인왕光仁王의 첫째 아들인데 어머니의 뿌리가 백제계로 그 지위가 낮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원래 왕위계승자가 따로 있었는데 아버지인 광인왕의 부인인 井上 內親王(聖武王의 딸)이 왕을 저주했다는 게 밝혀져 그 아들과 함께 유폐되는 바람에 왕세자가 되었다고 한다.

 

781년 왕이 된 환무왕은 이듬해 성무왕의 딸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不破 내친왕과 그 아들을 모반 혐의로 잡아다 죽여버린다. 이처럼 그의 왕권에는 시작부터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수도를 옮길 구상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처음으로 옮긴 곳이 지금의 교토 서남쪽에 자리한 나가오카長岡이다. 이곳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아라시야마의 강이 흘러내려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의 건설을 책임진 藤原種繼가 살해되지를 않나, 환무왕의 동생인 왕세자 早良 親王이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밝혀지지를 않나 하여 10년에 걸친 도시 건설이 물거품이 되고 다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권력층의 사람들이 얼마나 수도 천도에 반대를 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마치 정조의 화성 천도 계획을 막고자 했던 조선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가? 그만큼 수도를 옮긴다는 일은 기존의 권력과 새로운 권력이 크게 충돌하는 일인가 보다. 한국도 행정수도 옮긴다고 할 때 들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라. 아무튼 나가오카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으니, 아라시야마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이 빈번하게 범람했다는 점이다.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도시를 경영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히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래서, 환무왕은 다시 한번 천도를 결정하고, 그렇게 옮긴 곳이 지금의 교토이다. 

이 도시를 건설하는 초기에 크게 힘을 발휘한 것이 신라계인 하타秦 씨라고 한다. 지금의 광륭사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하타 씨는 당시로서는 주조와 목공 등의 첨단 기술을 독점하고 광업 및 상업을 통해 크게 부를 일군 사람이라고 한다. 광륭사는 지금도 미륵반가사유상으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사찰이다. 아무튼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광륭사 부근에는 太秦이란 지명까지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가 물심양면으로 환무왕을 지원해 교토의 건설을 도왔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환무왕의 모친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를 살펴보자. 고구려계였던 것일까 고씨라고 볼 수 있을라나? 아무튼 그녀는 백제 도래인의 후손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 일본왕이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밝힌 일이 있는데, 그 뿌리가 그녀에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환무왕의 조정에서 여러 도래인들이 활약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라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백제의 왕씨였다 한다. 나라 시대의 조정에서 활약했던 백제 王敬福의 딸인 王明信은 환무왕 후궁의 상시로 일하며 환무왕의 아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백제 왕씨는 백촌강 전투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의 후손으로 그 선조는 바로 공주에 남아 있는 무령왕릉의 주인공 무령왕이라 한다. 이들 백제 왕씨의 본거지는 오사카 난바難波 百濟郡과 카외치河內 交野郡인데, 카타노의 북쪽이 나가오카이다. 그래서 환무왕이 처음 나가오카 쪽으로 천도를 결정한 게 다 그런 영향일 것이라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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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교토가 개발된 당시의 모습은 아래의 지도와 같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변했다고 한다. 

교토 건립 초기와 달리 일본왕은 권력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그를 대신해 막부라는 세력이 성장하여 정치를 도맡았다는 사실. 교토 고쇼는 원래의 왕궁을 잃고 이전하게 된 결과물이라는 사실. 교토에는 외부의 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다투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 등등이 흥미롭다. 그래서인지 오래된 건물이 별로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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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환무왕桓武王이 건립했다는 교토. 

 

당시 최첨단 사상이었던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뚜렷하다. 

그나저나 북현무가 있는 후나오카산 밑자락에는 후나오카 온천이 있는데 거기나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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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힌다는 조개 시지미. 한국으로 치면 제첩이겠다. 크기도 딱 그 만하다.

일본의 제첩은 까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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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료를 부어서 염색한다는 “주염”의 전통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저렇게 영세한 규모에, 열악한 환경이라니... 저걸 일본의 장인 정신이라 불러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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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내렸다.

일본이지만 내륙 분지인 이곳 교토에선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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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공개 라는 이벤트를 한번씩 열어 그동안 대중에게 보여주지 않던 걸 개방하며 돈을 버는 방법. 교토에 많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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