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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독자의 밥짓기 방법

 

밥을 지을 때의 요령으로서 "시작은 홀홀, 중간은 활활, 부모가 죽어도 뚜껑을 열지 마라"라는 표현을 들은 적 없습니까? 이건 쌀로 밥할 때의 불 조절을 표현한 말입니다. 비슷한 것으로 에도 시대에 출판된 요리서 <名飯部類>에도 "밥할 때 처음은 홀홀, 중간은 쭉쭉, 끓은 뒤에는 조금 줄여요"라는 말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어느 집에나 밥솥이 있습니다만, 밥솥이 보급되기 전에 밥은 가마솥으로 짓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물론 가마솥에는 스위치 하나로 밥을 지을 수 있는 편리한 기능이 없기 때문에 불 조절이 필요했습니다.

앞에 소개한 두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처음에는 가마솥 전체를 데우기 위해 약불로 하고, 따뜻해지면 강불로 가열합니다. 그 뒤 끓어오르면 불을 약하게 하고, 불을 끈 뒤는 뚜껑을 열지 않고 잔열로 뜸을 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다 지어졌나?" 하고 뚜껑을 열어 안을 보면 뜸이 잘 들지 않을 수 있기에, 최초에 소개한 표현에서는 '부모가 죽어도'라는 과격한 표현이 쓰인 것입니다. 

이것은 '끓이고 뜸들인다'는 자포니카 쌀에 적절한 취사법으로, 일본의 독특한 방법입니다. '끓이고 뜸들인다'란 처음 물의 양이 많을 때는 삶다가 물이 적어지면 찐다는 '삶다' '뜸들인다'란 두 가지 조리방법을 조합시킨 것입니다. 이 2가지 조리법에 의해 물에 녹았던 쌀의 전분이 쌀알 안에 갇혀 통통하고 윤기나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끓여 찜'라는 방법으로 조리합니다. 대량의 물로 쌀을 살짝 삶은 뒤 일단 쌀 표면의 끈기를 씻고, 그 뒤 찌는 겁니다. 이 조리법은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되는 인디카 쌀에 적절합니다. 

일찍이 일본에서도 '끓여 찜'로 쌀을 밥으로 지었습니다. '끓이고 뜸들인다'가 보급된 것은 쌀의 생산량이 올라간 에도 시대부터입니다. "밥을 맛있게 먹고 싶다"라는 강한 집착으로부터 연구를 거듭해 이 취사법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쓰이고 있는 밥솥도 이 '끓이고 말림'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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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준이치上田純一

 

 

 

시작하며

 

"보존식"이었던 절임

 

절임이란 무엇인가? 가까이 있는 사전류에 의하면, 그것은 채소나 과일, 어패류, 조수의 고기 등을 소금이나 된장, 간장 등으로 절인 식품이며, 또 흉작일 때에 대비하기 위한 식재료 보존방법으로 안출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물론 외국에도 절임은 있다. 중국의 짜사이, 유럽의 피클이나 사워크라우트 등은 잘 알려져 있다(Davison 2018). 또한 절임을 '식재료 보존방법'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경우, 채소 이외에도 예를 들어 비와코琵琶湖의 붕어식해(ずし) 등도 절임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견해에 대해서는 필자도 의견을 같이하지만, 본고에서는 이러한 광의의 절임에까지 화제를 넓히는 걸 삼가고, '일본식 안의 절임'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들을 '보존식'의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1 고대의 절임

중국의 절임

일본식의 성립을 생각할 경우, 중국의 영향이란 요소를 고려하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작업인데, 이 점은 절임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선 꽤 오래전부터 소금에 절인 절임(염장)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가령 기원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에는 염장을 가리키는 말이 있으므로, 이미 염장법에 의한 절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제조법 등이 밝혀진 건 그 뒤 6세기 중엽에 나온 농업 전문서 <제민요술>즈음부터이다. <제민요술>에는 절임을 전문으로 해설한 항목이 있어서 아욱, 순무, 갓의 소금절임법 등 30여 종의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건 이미 매실장아찌 절이는 법이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즉 '식경' 인용으로 "매실의 매우 큰 알을 골라 껍질을 벗기고 그늘에 말린다. 바람을 쐬지 말 것, 이틀 밤낮으로 소금물을 빼고 꿀 속에 담갔다가 한 달 정도 지나면 다시 꿀을 갈아준다. 1년이 지나도 갓 딴 것처럼 신선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임의 대표격인 매실장아찌가 뜻밖에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 놀랍다. 

또 7세기 초에 성립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라는 책이 있다. 중국 남주의 형초 지방(현재의 후베이성, 후난성 일대)의 연중행사나 먹을거리 등에 대해 기록한 것인데, 이 책의 11월 조에도 채소의 절임으로 순무나 아욱 등의 채소를 따서 말리고, 소금절임을 하여 겨울에 대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중국에서도 절임이란 겨울철 채소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고안된 식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절임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일본에서도 절임은 옛시대부터 제조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발굴에 의한 확인은 불가능하기에 문헌 등에 의존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 경우, 특히 주의해야 할 건 식문화 관계사료로서 지금까지 거의 이용되지 않았던 한방 의학서를 두루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한방의 '약식동원'이란 사고방식과 먹을거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上田 2018).

'약식동원'이란 "공복을 채울 때는 먹을거리라 하고, 병을 치료할 때는 약이라 한다"(<황제내경>)라는 중국 고대 이래의 사상인데, 일본의 의학(한방의학)도 그 생각을 계승해 성립되었다. 따라서 한방 의학서는 먹을거리 연구에서도 제1급 사료가 되는 것이다. 최초로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절임 이야기로 돌아가자. 절임에 관계된 사료로서 이른 시기의 것은 8세기 전반의 이른바 <長屋王家木簡>(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이나 <正倉院文書>(도쿄대 출판회 1968) 등에 보이는 '장'으로 절인 양하, 박, 가지 등이다. 

덧붙여서 헤이안 시대에 찬술된 현존 최고의 의학서 <醫心方>에는 가지의 의학적 효능으로 "피부를 충실하게 하고, 기력을 더한다. 각기脚氣인 사람이 그 국물에 다리를 담그면 효과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각기'란 현재의 각기를 포함한 다리의 병 전체를 말한다. 

그 뒤 헤이안 시기 무렵이 되면 식재료는 물론, 절이는 방법도 한층 더 다양해진다. 지금까지의 소금 절임, 장 절임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지게미 절임, 식초 절임, 아마츠케甘漬(소금을 적게 쓴 절임), 菹(니라기)漬, 스즈호리須須保利, 裏(에즈츠미)漬 등이다. 순서대로 설명해 보겠다. 

지게미 절임과 식초 절임은 술지게미나 식초를 썼을 것이다. 아마츠케의 상세함은 분명하진 않지만 소금의 양을 적게 한 것이나, 또는 술지게미로 절인 것이었을까? 에도 시대의 <본조식감本朝食鑑>에는 '아마츠케'의 설명으로 무를 쌀, 누룩, 소금 등과 함께 절인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단맛을 끌어내기 위해 멥쌀과 누룩을 조합시킨 것일지도 모르는데,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니라기 절임은 절임의 총칭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느릅나무의 껍질 가루를 조미료로 쓴 절임이었다고 생각된다. <만엽집> 권16에는 "게를 위해 아픔을 이야기해 만든다"(3886수)라는 제목의 장가長歌가 있고, "난바강難波江에서 잡은 게를 느릅나무의 껍질 가루와 함께 갈아서 소금을 치고 병에 넣어 만들었다"라고 읊고 있다. 다만 게를 식재료로 이용하는 일은 일반적으로는 드물고, 보통은 유채, 순무 등의 채소류가 많았다. 10세기의 <연희식延喜式>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느릅나무 껍질의 규격을 정해(길이 약 43cm, 너비 약 10cm), 각지에 느릅나무 껍질의 공출을 명한다. 중국에서도 '장' 제조에 느릅나무 껍질을 쓰는 일이 있었던 것 같고(篠田 1976), 또 전술했던 <의심방>에는 느릅나무 껍질의 효능으로 대소변이 나오지 않는 걸 낫게 하고 위장 속의 열기를 없어며 붓기를 제거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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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애기 구덕. 그리고 일본의 그것.

정말 둘은 놀랍도록 닮아 있네. 한국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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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郎

 

시작하며

 

갈다라는 행위는 초기 인류의 식량 생산, 식량 확보의 과정에 없었던 행위이다. 수백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하는데, 이 대부분의 시간 인류는 '수렵'과 '채집'이란 방법으로 식량을 얻어 왔다. 수렵이란 활이나 덫 등의 도구를 써서 야생 동물을 잡는 행위이다. 채집이란 야생 식물이나 이동성이 부족한 소동물 등을 채취하는(또는 잡는) 행위이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깔려 있는 건 대략적인 계절성을 별도로 한다면 언제 무엇을 입수할 수 있을지가 예견하기 곤란하다는 점, 또 자원이 고갈되면 거주지를 떠나 집단별로 이동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까?

이것에 갈다라는 행위(농경)이 더해진 것은 오래된 것을 어림잡으면 수만년 전, 새로운 걸 어림잡으면 1만년 전의 일로 여기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다만, 수만년-1만년이란 폭이 있는 이유는 나중에 기술하겠다.

인류는 언제 갈다라는 일을 떠올렸던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하는 분야를 "농경기원론"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등장한 가설은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농경이 시작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정도 전의 '신석기시대'의 시작 무렵으로 상정했다. 특히 고든 차일드가 제창한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혁명'이란 개념은 농경기원을 하나의 '이벤트'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농경기원을 느린 변화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최근엔 꽤 유력하다. 영국 저널리스트 콜린 텃지Colin Tudge는 Neanderthals, Bandis and Farmers: How Aqriculture Really Began이란 팜플렛을 내고 거기에서 농경의 기원을 좀 더 오랜 시기부터 서서히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것은 "농업은 인간의 원죄"라는 번역서로 출판되었다. 

두 가지 사고방식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하나는 '농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크게 관계되어 있다.  차일드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이란 사회의 발전에 의하여 인간집단이 갈다라는 복잡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진화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한편 텃지는 인간의 집단이 어느 장소에 정주해 생태계에 교란을 가한 것이 넓은 의미로 보면 농경기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차일드의 설이 고전적인 고고학의 학설인데 반해, 텃지가 현대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학문 분야와 교섭하고 있다는 학문적 배경의 차이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농경이라고 하면 논 벼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농경기원론은 오랫동안 벼농사 기원론, 그것도 논 벼농사 기원론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벼농사는 외래의 문화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농경기원론은 오로지 벼농사가 언제 도입되었는지를 논해 왔다. 1990년대에 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의 재발견 등을 계기로 조문시대 사람들의 삶이 관심을 끈 무렵부터 상황이 변했다. 논의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일본에서는 고고학의 독무대였던 이 분야에 환경고고학, 식생사학, 농학 등 자연과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학제가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 크다.

일본에서도 농경의 기원을 이벤트가 아닌 천천히 변화한 것이라 생각하는 연구자가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사키 다카아키佐々木高明는 이 변화를 '과정(Process)'이라 부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농경기원론에서 특기할 만한 건 "씨앗을 심는 조몬인"을 저술한 오바타 히로키小畑弘己의 업적일 것이다. 오바타는 고고학자이지만 다른 학문 분야의 성과에도 밝아, 그것을 흡수하여 조문시대의 일본열도에서는 원시적인 대두 재배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명해 보였다.

 

 

1. 인간은 왜 갈게 되었을까?  

 

갈다라는 행위

그런데 갈다라는 행위는 어떠한 행위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갈다라는 건, 협의로는 도구를 써서 초목을 베어내고 나아가서는 불을 지르거나 물을 넣는 등으로 밭을 만들고, 그곳에서 종자나 모종 등을 심어 밭에 침입하는 방해되는 식물이나 심어놓은 모종에 붙는 곤충 등을 제거해 최대한으로 수확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다만 이 행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이나 그것을 뒷받침할 도구가 필요하다. 우선 초목을 베어내는 도구가 있다. 유물로 출토된 도구류를 연구하는 고고학은 출토된 농경도구 등을 유형화하여 그 옛것과 새것으로부터 도구의 기원이나 전파를 연구해 왔다. 또한 현재도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농기구류를 유형화하는 수법도 사용해 왔다. 이 방법은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세계적인 성과의 집적도 인정된다(예를 들면, 벨트 1968).

불을 놓더라도 그에 곁들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정확한 지식 없이 산림이나 초지에 불을 놓으면 제어할 수 없어 큰 산불을 일으키게 된다. 안 좋으면 인명을 잃기도 한다. 갈게 된 토지가 경작지인데, 경작지나 그 주변의 환경은 생태학적으로는 교란 환경이다. 교란의 요인은 물론 인간 행위이다. 즉, 인간에 의한 교란 환경의 출현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생태학의 수법이 쓰여 왔다. 

심는 대상, 즉 재배되는 식물은 야생 식물이 아닌 작물(재배식물)이다. 재배식물의 기원을 농경의 기원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 농학의 분야이다. 이 분야에서는 러시아의 유전학자 바빌로프 이래 고고학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농학과 고고학의 수법을 합친 식물고고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연구방법도 등장했다. 이는 출토 유물에 자연과학의 분석기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필자가 1996년 제창한 'DNA 고고학'도 또한 그 하나이다. 

간다는 행위에는 제사 등의 행사가 수반된다. 이들 여러 행사 등을 유형화하고 상호비교하는 것으로 농경의 기원이나 전파를 좇는다는 연구도 옛날부터 행해져 왔다. 이들은 주로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연구방법으로, 특히 일본에서는 방대한 성과의 축적이 인정된다. 

 

 

농경의 시작

그런데 인류는 왜 농경을 시작했을까? 즉, 갈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어 있는데, 모두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시된 것은 아니다. '왜'라고 하는 질문은 그 사람 개인이나 사회의 이상이나 기호를 묻는 것이지, 만일 그것이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묻는 것일지라도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기록조차 없던 시대의 행위이다. 아무래도 유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왜 갈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크게 구분하면 내인설과 외인설로 나눌 수 있다. 내인설은 인간 사회의 내부에 원인이 있다는 견해로, 예를 들면 차일드도 그 하나이다. 예를 들면, 큰 종교시설에 인간이 정기적으로 모일 때 그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외적인 요인을 고려한 설도 있다. 1980년대 이후 부활을 보인 환경결정론은 그 대표이다. 이전에는 농경의 개시 요인으로 1만3700년 정도 전의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짧지만 급격한 한랭기를 드는 견해가 있었다. 그 뒤 농경의 시작이 이 시기보다 늦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농경이 천천히 진전되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다. 

어느 설이나 배경에 인구 증가와 식량난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 동일하다. 식량의 압박이 사회를 농경으로 몰고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과론은 종교적 사고와도 관계되어 어느 시대에나 받아들여지기 쉬운 사고방식이다. 불교는 현세의 사건을 전생의 결과(업)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구성하는 것도 일종의 인과론이다. 더욱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뒷받침한 사상적 배경인 서양의 근대 합리주의 또한 기독교 사상이 뒷받침하는 인과론 위에 성립되어 있다. 인과론은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바탕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무엇인가를 반드시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농경의 시작을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브라이언 사이크스Bryan Sykes의 소설 <이브의 일곱 딸>에서는 현생 인류의 근원이 된 일곱 여인을 가정하고, 그들의 일생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수만년 전의 이름 없는 여성의 삶을 증거로 복원하는 등은 현 단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그건 '이야기'로, 사이크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이나 이야기를 사실무근으로 치부해도 될까? 현대 학문은 상상이나 이야기를 부당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가? 확실히 상상에 근거는 없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 100년 동안 정당한 설로 믿어졌던 설 등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근거 없는 이야기가 거짓말인가 하면, 그리 생각할 근거도 또한 없다. 상상의 산물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가설로 취급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이브의 일곱 딸>에 등장하는 일곱번째 여성 자스민은 자기 근처의 꽃이나 식물에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이 이야기가 진짜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증거는 없지만- 갈다라는 행위의 시작은 이 여성의 일시적 기분이 시작이었다는 것이 된다. 즉 "우연히" 시작되었다는 설, "우연의 가설"이다. 나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인과론을 근대 합리주의에 따른 생각이라 한다면, "우연의 가설"은 양자론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경작한 것일까?

갈다라는 행위는 그 뒤 꽤 일반화된 것 같다. 어느 토지에 있던 집단이 주변에서 식재료를 입수할 수 없게 된 때, 그때까지의 해결법은 그 집단 전부 또는 집단의 일부가 그 장소를 떠나 신천지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세계 거의 모든 땅은 1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 집단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자원 고갈에 대응하는 방법은 갈다라는 것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덕스러운 농경이 인류의 생존에 필수 행위가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갈다라는 행위가 다음의 전기를 맞이한 것은 도시가 탄생했을 때이다. 그때까지 갈다라는 행위는 자기 자신, 자기의 가족 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위한 행위였다. 모든 개인이 자신과 그 집단의 먹을거리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도시민, 즉 특정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경작하지 않는다. 물론 그때까지 겸업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 먹을거리를 스스로 완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부양하는 생업이 새로 생겼다. 그것이 농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농업이란 다른 사람의 식재료를 생산하는 생업이다(佐藤 2016).

그 뒤 도시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었다. 일본에는 이미 고대에 최초의 본격적인 도시인 헤이조쿄平城京가 출현한 이후, 중세까지 교토, 가마쿠라 등의 도시가 탄생했다. 그리고 주로 그 근교에 농업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이 생겨났다. 지방에는 조세로 농산물 등을 납부할 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똑같은 힘이 작용했다. 즉, 지방의 농업은 조세 때문에 식료품 생산을 위한 것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세계로 눈을 돌리자. 농업은 대륙마다, 또 같은 대륙 안에서도 지역마다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농경 도구나 작물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면, 작물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면 유라시아 동부에서는 벼, 대두나 토란 등이, 서부에서는 맥류와 십자화과의 작물 등이 우점했다. 반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옥수수, 감자, 토마토, 고추 등이 재배되었다. 

농경 기술에서도 큰 지역차가 인정된다. 유라시아 중앙부부터 서부에 걸친 반건조지대에서는 관개기술을 발달시켜 물을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동부의 몬순지대에서는 홍수 대책 등 '너무 많은 물'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연간 강수량이 400mm가 되지 않는 "갈" 수 없는 토지에서는 무리지어 사는 대형 초식 포유류를 길들여 그 젖이나 고기 등을 이용하는 유목이 발생했다. 이 생업은 그 뒤 수천년을 거쳐 농업과 융합해 목축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생업을 낳았다. 

유라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사이에 작물의 교환이 일어난 건 콜럼버스 등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이다. 그리고 대륙을 넘나드는 교역은 세계적인 대도시를 낳았다. 일본에도 히라도平戸, 나가사키長崎, 사카이堺 등의 도시가 융성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들을 이동하는 교역자들의 먹을거리 또한 주변 지역의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2010년 세계의 도시 인구가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고 보도되었다. 즉,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자신이 먹는 식재료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가축을 위해 갈다

그런데 농업생산물은 인간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농업의 성격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농업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가축의 사료가 된다. 농림수산성 자료에 의하면, 유럽연합 28개국의 1억8150만 헥타르의 농지 중 4%인 7만6100헥타르가 사료작물을 생산하는 경작지나 방목지로 사용되고 있다. 작물별 생산성이 다르기에 토지면적과 생산량이 완전히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유럽의 농업생산물 가운데 40% 정도가 가축을 위해 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수치가 불과 6.5%에 불과해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유럽의 목축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중앙아시아부터 서아시아에 기원한다고 생각되는 유목에서 발단하고 있다. 유목은 가축의 무리를 무리마다 관리하는 형태로, 원래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초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유럽에 전개된 뒤, 그 먹이(사료)는 점차 농업으로 조달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중 안정적으로 가축을 사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축은 일본 열도에도 있었는데, 그 절대적 수가 적었던 것 등이 관계되어 농경지의 대부분이 인간을 위한 작물 생산에 이용되어 왔다. 특히 쌀은 일본인에게는 특별한 작물이란 것이 오랜 기간에 걸친 '진리'였다. 1970년대 무렵, '초다수확 쌀'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에 반대하는 이유의 하나가 '인간의 식량인 쌀을 가축에게 먹이는 것'에 있었다. 결국 이때의 초다수확 쌀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 무렵부터 가축 사육을 위한 쌀을 개발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급속히 확산되려 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쌀 기피현상이 심화되면서 쌀을 신성한 음식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희미해졌음을 보여준다. 

 

 

 

먹을거리 패키지

 

당질과 단백질

동물로서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 영양소가 있다. 그중에서도 당질, 지질, 단백질은 3대 영양소라고 이야기되어 왔다. 인간은 이들을 균형있게 섭취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당질은 식물성 식품에서, 지질과 단백질은 동물성 식품에서 섭취해 왔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도 있어 당질을 젖 등 동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하고, 지질이나 단백질을 콩이나 밀 등 식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예외가 생긴 이유의 하나가 동식물 분포의 불균일함이다. 극지나 고산지대, 사막 주변의 건조지대에서는 식생이 부족해 안정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식재료는 동물성으로 한정된다. 젖 등의 동물성 식재료에서 당질을 섭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는 극지에는 지질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의 이유 등으로 특정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이른바 '금기'에 의해 동물성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동물 종을 기피하는지는 종교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매우 강하게 기피한다. 힌두교도 대부분이 동물성 식재료를 섭취하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은 단백질을 콩과 같은 식물성 식사를 통해 섭취하게 된다.  

3대 영양소를 무엇을 통해 섭취할지는 토지에 따라 다양하다. 왜냐하면 동물상과 식물상은 그 토지에 고유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대륙의 중앙부에 바다의 물고기는 없으며 19세기에 들어서기까지 홋카이도에는 벼가 없었다. 식재료의 토지 고유성은 프랑스에선 테루아terroir 등으로 불린다. 일ㄹ본어로 고치자면 "풍토風土"일까?

 

 

당질과 단백질의 패키지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당질과 단백질(그리고 지질도)을 같은 곳에서 생산해 왔다. 이 현상을 당질과 단백질의 동질성이라 부르기로 하자. 일례로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논이라는 생산의 장에서 벼(쌀)와 물고기(민물고기)를 생산하던 "벼논양어"가 그것이다. 그것을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게다가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장에서도 동일성이 유지되어 온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는 밥상 위에서, 예를 들어 '초밥'이란 요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초밥은 물론 지금 같은 초밥이 아니라 식해 같은 초밥 형태이다. 이와 같은 패키지는 일본 열도만이 아니라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중국 남부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는 세계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넓은 지역에서는 쌀 대신 서류(고구마, 토란, 빵나무, 마, 바나나 등)이 쓰였다. 또 동북아시아에서는 쌀을 대신해 잡곡이 사용되었다.

유럽에선 '보리와 젖'이란 패키지가 생겼다. 중세 이후에 등장한 삼포식 농업은 여름작물, 겨울작물, 휴한(휴경)이란 작부방식을 차례로 반복하는 농법으로, 이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한다. 이렇게 하여 2회 경작하고 지력을 잃은 토지에 가축의 배설물을 비료로 주어 지력의 회복을 도모한다. 

반면, 식탁에서 단백질은 가축에서 유래하는데 그 중심은 젖과 유제품이고, 고기는 그 다음의 식재료였다. 유럽의 북부에서는 귀리와 젖을 조화시킨 '오트밀'로 요리되었다. 신대륙에서 감자가 도래하고부터는 '감자와 젖'의 패키지도 생겼다. 

중부 이남의 유럽에서는 맬과 젖을 조화시킨 여러 요리가 생겼다. 밀은 가루로 빻아 빵이나 파스타로 가공되었다. 덧붙여 파스타의 원료는 빵을 만드는 밀(학명 Triticum aestivum)과는 다른 마카로니 밀(Triticum durum)이라 부르는 밀이다. 

'쌀과 물고기' 등 단백질을 물고기에 의존하는 패키지와 '맥류와 젖'처럼 그것을 가축에게 의존하는 패키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을까? 전자에서 물고기는 천연자원이다. 그리고 후자에서 가축은 '인간이 만든 동물'이다. 이 차이는 사회의 구조나 그곳에서 거주하는 인간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따른다'는 사상이, 그리고 가축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는 사상이 뿌리를 내렸다. 

 

 

 

식물 소재의 패키지 

앞에서도 적었듯이, 단백질 공급원이 되는 식물성 식재료가 있다. 대두 등 일부의 두류나 밀이 그 대표일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제약으로 동물성 식재료를 생산, 소비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당질만이 아니라 지질, 단백질도 그러한 식물성 소재를 통해 섭취하고 있다. 마에다 카즈미前田和美에 의하면, 인도의 데칸 고원에서는 잡곡과 두류의 섞어짓기가 흔히 관찰된다. 인도는 잡곡의 세계적인 중심 가운데 하나로 아시아에서 기원하는 잡곡 등이 재배된다. 그리고 쌀 또한 이러한 잡곡과 함께 재배되는 경우가 많다(이러한 재배 시스템을 농학 분야에서는 섞어짓기라 함).

두류의 식물, 특히 덩굴성 종은 지주를 따라 위로 자라면서 생육하는데 잡곡이 그 지주 역할을 한다. 두류의 많은 종이 대기 중의 질소를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질소 고정균'과 공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질소거름의 일부는 지주가 되는 잡곡에게 제공된다. 즉, 잡곡과 콩은 질소 고정균을 통해 공생하고 있다. 

밥상 위에서도 곡류와 두류는 동소성이 있다. 달 카레(콩 카레)나 프라오라 부르는 콩이나 채소를 섞어 지은 밥(프라오의 어원은 필라프인가 싶음) 등 곡류와 콩을 조화시킨 요리는 매우 많다. 

일본에서도 곡류와 두류의 패키지가 있다. 인절미는 쌀과 대두의, 팥떡은 쌀과 팥의 패키지이다. 세금도 그 일본식의 기본형이라 하는 '국 하나 채소반찬 셋'의 스타일인 '밥과 된장국'은 쌀과 콩의 패키지가 구현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형 가축의 전래가 늦고, 또 원시종교 및 밀교와 절충된 일본 불교는 일본 요리의 한 형태인 정진요리 스타일이 되기도 했다. 

 

 

 

변화하는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

이와 같은 먹을거리의 패키지는 그 토지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는데, 사회나 경제의 세계화에 수반해 그 형태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이후에 일반화된 육식(특히 가축의 고기를 먹는 식문화)가 '쌀과 고기'라는 패키지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양식'의 메뉴인 '돈카츠 정식'이나 덮밥인 '소고기덮밥', 거기에 해군이 발명한 카레라이스 등이 그것이다. 싸과 고기의 패키지는 중앙아시아 기원이라 생각되는 양고기 스프로 섞어 만든 '필라프', 또는 '쌀과 젖'의 패키지아고도 할 수 있는 리조또 등을 들 수 있다. 

남아메리카 태생의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최초에 감자는 유럽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에 유럽 북부에서 당질 공급원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독일은 감자 요리의 메카처럼 불리고, 영국의 '피시앤칩스' 같은 '감자와 생선'이란 패키지도 낳았다. 

이처럼 먹을거리의 세계에 초래된 세계화는 일면에서는 조합(패키지)을 다양화시켰다. 요리인의 창의력으로 새로운 요리가 점점 등장했다. 그동안 한정된 땅에만 있던 식재료와 그 조합이 이제 전세계의 식재료를 자유롭게 조합시키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이란 시대는 매우 풍요로운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식재료가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식재료 운반에 많은 에너지가 쓰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공업화하는 경작

 

관개와 화학비료

갈다라는 행위는 인간 행위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연 영위의 범위 안이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즉 관개하지 않고), 거름도 식물의 부식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배설물, 사체였다. 지금 말하는 '유기비료'이다. 관개 기술이 없으면, 경지는 제한된다. 거름이 제한되면 단위면적당 생산은 늘지 않는다. 

인류가 관개를 발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정도 전, 중앙아시아부터 지금의 이란에 걸친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종합지구환경학 연구소 2012). 일본에선 카와치河内 평야에 큰 고분이 조영된 뒤에 팠던 '고시대구古市大溝'가 최고의 본격적인 수로가 아닐까 이야기되는 것 같다. 오사카 평야의 남부에 있는 사야마이케狭山池는 일본 최고의 댐식 저수지라고도 하며, 그 건조 시기는 7세기 초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일본에서 관개는 15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것이 된다(사토佐藤 2020).

비료를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단초가 된 것이 1906년에 하버와 보슈에 의하여 발명된 하버-보슈법이다. 이에 의하여 인류는 대기 중의 질소를 인공적으로 비료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작물의 단위면적당 생산을 극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화학비료의 다용은 환경에 부하를 주어 지구환경의 지속성을 해쳐 왔다. 비료의 제조에 다량의 석유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비료 반응성이 좋은 작물이나 품종만이 남아서 대량 생산되고, 기타 작물, 품종은 차례로 배제되어 갔다. 이것이 작물종이나 품종의 다양성을 빼앗고, 식문화의 균일화, 세계화를 일으켰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갈다라는 작업 그것도 변화시켰다. 이전까지는 갈다라는 작업은 문자 그대로 흙을 갈고, 그 흙과 물과 태양광으로 작물을 키우는 작업이었는데, 비닐을 쓴 비닐하우스에서의 촉성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윽과 비닐하우스는 대형화되고, 또 유리온실이 등장한다. 온실이라고는 하지만, 가랭하면 저온 온실도 된다. 이윽고 흙은 수경액으로 대체되어 지금은 LED를 사용한 밀폐형 '식물공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재배의 3요소로 꼽히던 흙, 물, 태양광 가운데 흙과 태양광은 사용되지 않는다. 농업은 대지와 자연으로 뒷받침되던 산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동물성 식재료의 생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축산업은 원래 유목 문화가 발명한 착유나 거세 등의 기술을 이어받은 산업이었는데, 주로 유럽에서 가축의 먹이를 농업이 지원하는 산업으로 전환된다. 그 뒤에도 사육 기간의 단축이나, 또 많은 개체를 더 좁은 사육사에서 사육하는 밀식 사육이 점점 진행되었다. 

축산업도 또 동물의 생명을 먹는 산업에서 공장에서의 식육이나 우유 생산이란 산업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 윤리적인 과제에 대해서는 한층 더 검토되어야 한다. 

 

 

갈다에서 가공하다, 운반하다

대량 생산된 식재료는 멀리 떨어진 대소비지 주변에 대량으로 운반되어 그것에서 가공하게 되었다. 공업화가 경작부터 요리하는 작업에까지 이른 것이다. 대량으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규격인 것을 한번에 생산해야 한다. 휘어진 오이나 크기가 제각각인 사과는 환영받지 못한다. 또 대량 생산은 생산되는 작물의 수와 품종의 수를 줄였다. 다양성이 줄어든 것이다. 

가공기술의 진보는 보존기술의 진보였다. 인류가 태고부터 알고 있던 가공기술은 가열, 건조, 소금이나 설탕 절임, 발효 등이었다. 공업화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하는 동시에, 통조림과 병조림, 플라스틱 용기나 식품보존료의 개발을 가져왔다. 일본에서는 발효를 이용한 가공기술은 무로마치 시대에 이미 확립되었고, 특히 술이나 간장 등의 조리료엣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된장은 지금도 약간은 자가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술이나 간장은 거의 외부화되었다(양조는 면허와 신고가 필요). 병조림이나 통조림은 19세기 초의 발명품인데, 플라스틱 용기나 보존료는 석유화학공업의 융성 이후, 즉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급격히 보급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저장성이나 수송거리를 뚜렷하게 향상시켰다. 

또한 병조림과 통조림은 전쟁터에서 식량을 확보한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군대는 식량의 생산, 가공, 수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현대 일본인의 음식은 이러한 기술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공은 더욱 중첩되고, 가공과 다음 가공 사이에는 수송이라는 과정이 끼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건 이렇게 여러 겹으로 가공되고 운반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 먹을거리는 이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식재료의 장거리 이동에는 배나 항공기가 이용되지만, 수송을 맡고 있는 건 석유 등의 화석연료이다. 배로 이동될 때 식재료는 냉장 또는 냉동되어 운반된다. 냉장과 냉동에 쓰이는 전기도 현대사회에서는 화석연료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전기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라는 표현은 표면적인 시각이다. 내침 김에 쓰자면, 원자력 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온난화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원자로를 냉각하는 데에는 공기나 해수가 사용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원자로가 발하는 열은 대기나 해수를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략 인간의 활동 중에서 열을 발하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이와 같은 먹을거리 시스템이 과연 지속가능한지 아닌지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경작하는 인간과 먹는 인간을 연결하다

인류가 '갈다'라는 작업을 익혔을 때, 함께 먹는 집단(사람수)는 몇 십에서 많게는 몇 백까지였다. 갈다라는 작업이 나라를 만들게 되자, 그 수는 단숨에 늘어났다. 고분시대에 조영된 다이센大仙 고분(오사카시 사카이시)에서는 본체 공사에 2000명 이상이 종사했다고 한다. 그 주변에서 일했던 사람의 수는 아마 만 명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경작하는 사람들은 만 명 단위의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지원하게 된다. 당연히 먹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또 먹는 사람도 경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둘 사이를 잇는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식자재의 집하, 운반, 판매나 가공, 보존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형태로, 현대에는 이러한 형태가 극단적으로 비대해지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의 일이었던 요리 부분을 '가공'의 영역이 점점 대신하고 있다. 큰 역할을 한 것이 전자렌지 등의 가전제품이다. 손질한 재료를 냉동한 것을 전자렌지로 가열하면 요리가 완성된다. 전기와 가스 밥솥의 보급은 밭솥의 간편화를 가져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완성된 반찬을 사오는 점심이 크게 늘고 있다. 또 점심의 대구어처럼 쓰이는 외식도 현대인의 먹을거리에서 빠질 수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장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기에 여기에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최후의 경작 -맺음말을 대신하여

인류가 갈다라는 행위를 익힌 지 만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이후 인류는 지상의 미개척지를 차례로 개척해 농지로 바꾸어왔다. 그때까지 미개척지였던 곳은 차례차례 개척되어 마을땅, 마을바다가 되어 갔다. 이 시점에서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은 자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작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바다이다.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는 지금까지 대부분 천연자원이었는데, 최근 반세기 정도 사이에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양식의 확대이다. 양식기술 자체는 300년에 이르는 역사가 있다고 하는데,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50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뒤의 성장은 급속해, 현재는 총 어획고의 20%를 넘을 정도까지 되었다. 자원의 고갈이 알려진 가운데 양식은 앞으로도 그 어종과 생산량을 늘릴 것이다. 자원 관리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육지에 사는 사람들의 이치만으로 바다를 경작할 수는 없다. 이 공간에서 계속 살아간 해양 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삶이라고 해도 바닷물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대양에 산재한 섬들이 삶의 무대였다. 이런 사람들의 사람을 살피지 않는다는 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수탈의 장소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해안지대에는 반드시 이러한 해양 민족과의 접촉이 있고 교역을 통해 삶을 지탱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의 일본 식문화가 이렇게 성립되어 온 것도 생각하면서 바다를 경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Colin Tudge(竹内久美子 번역), 2002, 『農業は人類の原罪である』, 新潮社
小畑弘己, 2016, 『タネをまく縄文人』, 吉川弘文館
総合地球環境学研究所(편집), 2012, 『地球環境学辞典』, 弘文堂
Emil Werth(藪内芳彦・飯沼二郎 번역), 1968, 『農業文化の起源 -堀棒と鍬と犂』, 岩波書店
佐藤洋一郎, 2016, 『食の人類史』, 中公新書、中央公論新社。
Bryan Sykes(野晶子 번역), 2006, 『イヴの七人の娘たち』, ヴィレッジブック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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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키라佐々木晃(이야기) /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郎(기록)

 

 

처음에

"만드는" 작업은 인류 고유의 작업이다. 만드는 것은 식재만 잔뜩 있는 게 아니라 도구나 "장소" 같은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술에 관계된 것도 있어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유일한 양조장인 사사키 주조사의 사장인 사사키 아키라 씨에게 "술 만들기"를 들었다. "물건 만들기"란 것에 학문은 어떻게 공헌해야 할까? 그러한 입장에서 읽어 나아가 주시길 바란다. 좌담회에서는 질의응답도 있었는데 그를 포함해 적어 보았다.

 

 

술이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이 술을 따르거나 따라주거나 하면서 친해져 간다. 그러한 "장"을 연출하는 것이다. 단순히 알코올 음료만은 아니다. 그리고 술은 먹을거리와 함께 있다. 일본주는 일정식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술 만들기의 포인트

계절이 중요. 가을에 햅쌀이 수확되어, 겨울에 술 만들기가 행해진다. 혹한 무렵이 가장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을 숙성시켜 여름에는 여름의, 가을에는 가을의 술이 된다. 그러나 여름에 술을 담그는 일은 없고, 좋은 술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조자(술 만드는 장인)는 이전에는 겨울에만 고용했다. 술 만들기가 겨울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방법이 온도 관리가 편하기 때문이다. 작은 양조장에서는 설비투자가 꽤 어렵고, 자칫하면 온도가 오르기 쉬워 술 만들기는 겨울 쪽이 하기 쉽다. 

양조장의 대부분은 중소기업. 그래서 근대 공장의 첨단기술 생산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것이 맥주와 다른점. 중소기업은 기술로 승부한다. 

 

 

술은 기호품 취급인가?

흔히 술은 기호품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 하지만 겨울의 양조자에게는 농한기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업대책의 의미도 있다.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술의 맛이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사키 주조에서는 소비자가 아니라, 상품을 도매하는 술집을 보고 있다. 흔히 영성용 술 등이라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용기로 차별화하거나 하지만 내용물을 바꾸는 일은 하지 않는다. 

 

교토의 양조장으로서 주의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교토에 있다든가, 교토 시내에 있는 양조장이라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는다. 사사키 주조가 첫 울음소리를 냈던 1893년에는 시내에 131곳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뒤 다른 곳은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위에 구애되지 않고, 사사키 주조는 어디까지나 기술로 승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주류 종합연구소의 전국 신주감평회에서 2014년 입상한 것은 그 노력의 결과라 생각한다. 

일본주라고 한 마디로 말하더라도 오랜 기간 생각하자면, 도구와 기술, 지식에 대한 여러 가지. 즉, 말로 표현하자면 "고르지 않음"일 것이다.  양조자의 경험과 감의 세계였다. 

 

 

일본의 식문화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바라는 바

예를 들면, 무엇무엇은 도움이 된다, 뭐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등의 공리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 좁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런저런 것을 널리 배우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로 "만든다"라고 해도 만드는 것도, 만드는 사람도, 그 과정도 여러 가지이다. 사사키 씨는 술을 만드는 작업에 대해 무언가에 거리낌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제조의 배경에 있는 기술이나 경험, 감이라는 '경험지'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만드는"작업에는 이러한 체계화된 기술이나 경험지의 집적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물건'에 어떠한 기술이나 경험지가 있는지를 고려하며 읽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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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말쟁기질 교사가 남긴 것

 

 

시작하며

 

에도시대의 농경도 말이나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찍은 농사 풍경에는 종종 '코잡이'나 '입잡이'를 하는 2인 말쟁기질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쟁기를 누르는 '쟁기꾼' 역할 외에 입 근처의 재갈에 대나무 장대를 묶어 말을 유도하는 '코잡이' 역할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말을 똑바로 걸어가게 하거나, 방향 전환을 시키거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코잡이'는 써레질이나 흙덩이 부수는 작업에도 많이 행해졌는데, 이는 말이 얼마나 쟁기나 말괭이 등의 견인식 농기구에 대한 길들여지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농기구 사용은 사람에게도 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고, 나름의 수련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쇼와 중기 무렵까지에는 2인 말쟁기질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쟁기를 짊어지고 온 일본을 돌아다녔던 '말쟁기질 교사'라는 이름의 사람들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농업의 근대화를 모색하던 와중에, 더 풍토에 적합한 개량을 추진하기 위해 재래 농법의 역사를 답습하는 게 중요시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란 메이지 16년 농업기술의 개량, 보급을 목표로 했던 노농의 한 사람, 하야시 엔리林遠里의 사설 권농사가 후쿠오카에 설립되었던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볍씨의 저장법이나 제초 기술, 그중에서도 습논의 건논화에 따라 일어나는 수확고의 증수가 명확한 목표였습니다. 건논에서는 뿌리를 깊게 내려 비료를 주기 위한 깊이갈이가 필수이고, 그 때문에 쟁기질과 암거배수 기술을 보급, 지도하기 위한 사설, 군, 현, 시험장, 나아가서는 쟁기 제작소 등에서 파견된 말쟁기질(소쟁기질)의 기술전문가들의 모습은 1950년대 전후의 무렵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후쿠오카현 권업시험장의 장이었던 무렵의 요코이 토키타카横井時敬 등도 각지에서 오는 요청에 응하여 말쟁기질 교사 또는 벼농사 개량 실업교사를 추천하고 파견했습니다.

 

사진1 큰괭이를 끄는, 입잡이식 2인 말쟁기질 풍경(Le Japon Illustre 1915년에서)

 

사진2 말을 '코'에서 코잡이하고, 써레질 작업을 한다. 1957년(촬영:菊池俊吉)

 

 

사진3 말 그림 <말쟁기질>. 1887년 야마가타현山形県 츠루오카시鶴岡市 구마오카熊岡 신사 소장(사진: 이타바시구板橋区 향토자료관 제공). 메이지 시대에 들어 후코오카에서 적극적으로 말쟁기질 교사(또는 개량 실업교사)를 초빙한 쇼나이 평야를 중심으로 한 곳에서는 건논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들의 공헌에 감사한 마을사람들이 봉납한 말 그림에는 모두 소소하게 후쿠오카 쟁기(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쥐고 있는 말쟁기 교사가 그려져 있다.

 

 

일찍부터 건논화가 진행되고, 좋은 말의 산지이기도 했던 규슈에서는 후쿠오카, 구마모토, 사가의 평야 일대가 말쟁기질의 선진지였습니다. 한편, 칸토우에서는 말괭이를 사용한 써레질을 말로 행하는 지방도 있었는데, 논이 많고 깊이갈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대한 쟁기는 일부 밭농사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매우 불안정하고 깊이갈이는 어려워 칸토우 명물 2인 말쟁기질이 나쁜 관례로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서쪽 소 동쪽 말'이라 이야기되듯이, 칸사이에서는 말보다 습논 작업에 안정감이 있는 소를 써레질 작업에 이용할 수 있었기에, 1인이 부리는 기술이 일찍부터 정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큐슈 고향의 경려회競犁會에서 솜씨를 연마한 말쟁기질 교사들은 건논화가 늦어지고 있던 도호쿠, 칸토우 지방에 파견되는 일이 많았는데, 후쿠오카의 재래 쟁기(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서부터 다이쇼 시기에 만들어진 근대 짧은바닥쟁기로의 획기적인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그것의 보급이나 농기구의 변화에 따른 쟁기질 방법을 가르칠 필요성도 생겨, 칸토우에 한정하지 않고 칸사이도 포함해 전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의 경려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3회 거두면 군의 말쟁기질 교사에 추천되고, 한층 실적을 쌓으면 현에서 인정된 말쟁기질 교사가 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는 지역의 학교장보다 명사 대접을 받는 등 사람들이 동경하는 새로운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측이었던 마을 사람에게도 처음에는 "어려운 말(성질이 사나운 말)"을 순식간에 제압해 낯선 쟁기질의 시연을 실시하는 신기한 기술을 구사하는 "말꾼"이기도 했습니다. 

 

사진4 시즈오카의 여자 말쟁기질 강습회에서, 산 모양의 모자와 조끼 차림으로 지도하는 후지노 토쿠오藤野徳雄씨. 나라의 명을 받아 최신 기술을 전하는 지도자의 풍격과 기개가 감돈다. 쇼와 초기 (사진: 말 박물관 제공)

 

 

말쟁기질 교사 중에는 전국을 쟁기 1대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면, 모범논을 만들어 그 성과를 보여주면서 오랜 세월 자리잡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도호쿠 지방에 남은 봉납 말 그림에는 근대 농법 보급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씩씩하게 말과 쟁기를 조종하는 말쟁기질 교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 그림은 성과를 얻은 마을사람들의 감사의 증표였습니다. 

"최후의 말쟁기질 교사"라고 이야기되었던 후지노 토쿠오藤野徳雄 씨는 1900년 말쟁기질 선진 현인 후쿠오카현의 가스야군粕屋郡 시메마치志免町에서 태어나 사이타마현에서 죽었습니다. 1971년에는 축력 이용의 개선지도와 농기구의 개량에 전력을 다 한 것에 대하여 공훈 5등 서보장瑞宝章을 서훈했습니다. 당시의 가스야군은 말 육성이 성행해 망아지를 3-4세가 되기까지 기른 뒤, 야마구치 지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이 군에서는 후지노 씨 이외에도 많은 말쟁기질 교사가 배출되었습니다.

후쿠오카 번사였던 할아버지도, 농민이었던 아버지도 말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도 취학 전부터 말괭이를 손에 들고 경작을 시작했습니다. 1915년 농학교 3년(중학교 3학년) 때에는 시멘무라志免村에서 말쟁기질 경려회에 뛰어들어 참가해 줄을 선 청년들을 누르고 우승합니다. 후쿠오카 농학교를 졸업한 뒤, 시즈오카현 농림기술시험장에서 근무하고, 그 뒤 사이타마현 시험장으로 옮깁니다. 대일본 농회農會, 일본 마사회 및 각 현 주최의 말쟁기질 강습회나 연성회, 경려회 등을 통하여 말의 길들이기나 쟁기의 경운방법을 계속 지도했습니다. 실제로 약 20만 마리의 말을 길들이고, 50만 명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카와사키, 후나바시船橋, 우라와浦和, 오오이大井의 경마장에서도 근무했습니다.

그림1 도도부현별 말 경작면적의 추이. 농림성 통계표를 바탕으로 작성. 다이쇼 14년: 우마 경작면적, 쇼와 17년: 말 경작면적

 

 

1931년 연성회에서 국립 종마 육성소장 사와라 케이지佐原敬二 씨(전 육군 기병 대좌)와 함께 길들이기 솜씨를 선보인 것이 큰 자신감이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했습니다.

 

후지노 씨의 일은 크게 구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건논화와 깊이갈이를 목적으로 하는 쟁기질 보급 지도. 특히 2인 말쟁기질의 관행을 개선해 1인 말쟁기질로 만든 점.

2. 농기구, 특히 멍에의 개량에 의한 효율 좋은 말쟁기질 지도.

3. 두둑짓기의 개선 등을 수반한 사이갈이 제초의 지도.

4. 시험장에서 쟁기, 괭이, 고무래, 사이갈이 도구, 멍에 등의 비교시험을 개선.

 

말쟁기질 교사가 활약했던 시대는 일본 말의 대변혁기이기도 했습니다. 메이지 시기에 일본에 주재하던 서구인들이 놀라며 기록했듯이, 일본 말의 대부분은 서양의 시점에서는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였습니다. 무사가 전장에서 타는 준마는 '성질'이 강한, 거친 말이었습니다. 메이지 초두 관리들의 승마조차도 말과 함께 좆아 달리는 마부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말도, 국가의 마필 개량사업에 의해 양상이 달라져 갑니다.

메이지부터 종전까지는 군용마의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 '말 정책 1차 및 제2차 계획(1906-1945년)'이 시행되었습니다. '일본 말의 개량' 즉 재래종의 잡종화는 심상치 않은 속도로 진행되어 쇼와 시대 초기에는 국내 말의 90%가 교잡종이 되었습니다. 세계 표준에서 보면 조랑말 유형의 일본 재래 말(체고 약 100-135cm)를 서양종과 교배해 대형화(체고 약 145-165cm)하는 것이 우선 희구되고, 다음으로 승용, 수레용, 짐용으로 그 개량 방침도 용도별로 세분화했습니다. 그리고 종전 뒤에는 범용성이 높은 중간종의 농사용 말이 일반적으로 선호되었습니다. 

당연히 말쟁기질 교사들이 다루는 말도 재래종에서 교잡종으로 변해 갔습니다. 앵글로 노르만종, 헤크니종, 브르통종 등의 서양 품종의 피가 섞여 기질면에서도 온순해졌습니다. 또, '마필 거세법(1901년)' '종마 통제법(1939년)'의 집행에 의해 수말의 거세술이 널리 보급된 점도 다루기 쉬움을 조장한 것입니다.  

'말 길들이기'의 단계부터 시작해야했던 초기의 말쟁기질 교사들과 대개 사람에게 익숙해진 말에게 쟁기를 연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던 후기의 말쟁기질 교사들 사이에는 노고가 달랐음을 상상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태우는 것과 쟁기나 말괭이를 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일로 새로운 일에 말은 저항을 나타냅니다. 특히 바로 뒤의 사각지대에 연결된 불안정한 쟁기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이 공포를 없애도록 길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길들이기가 부족한 말이 작업중에 놀라서 쟁기를 끌고 다니면서 논에서 논으로 달려 도망치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던 듯합니다.

 

표1. 소쟁기질, 말쟁기질의 경작면적, 능력 비교

 

                          쟁기질 시간(시간)    /   평균속도(cm/초)

습논 :      소                3.8                           59.94

               말                4                              89.91 

 

건논 :      소               2.3                            73.26 

               말               1.6                          145.32

 

습논 경작면적 : 약 1,180㎡

건논 경작면적 : 약  992㎡

「牛耕ト馬耕比較試験」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 大日本農会(昭和9年)을 바탕으로 작성

 

 

길들이기의 비법

후지노 씨는 자신이 실시하는 말 길들이기의 방법은 오직 자신의 경험과 공부에 의지한 자기류이기에, 기본(뼈대)만 배우는 것이 좋고 결코 모양 등에 구애되지 않도록 아래와 같이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1. 최초의 첫걸음이 중요하기에 신중히 행한다. 최초에 실패하면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

   2. 음성과 태도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온화한 음성으로 말에게 안심감을 주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격려 또는 꾸짖음. 친숙하면서도 의연한 태도로 임한다. (당시 음성에 의한 신호가 장려되어 널리 보급되고 있었습니다.)

   3. 어루만지기와 위엄의 길들이기. 엄연한 태도로 어루만지기도 징벌도 행한다. 채찍의 사용 등 육체적 고통은 공포감을 심어주기 때문에 행하지 않고 음성으로 꾸짖는다. 

   4. 길들이기는 말에게 적당한 운동을 시킨 뒤, 말의 기분이 가라앉고나서 행한다.

그리고 불요불굴의 정신, 책임감, 자기의 기술을 믿는 것, 동물 애호의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질 있는 말에게는 각설탕이나 당근으로 길들이는 것도 좋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쇼와 초기 무렵에는 목소리, 이른바 음성에 의한 신호나 구호를 중앙마사회 등이 체계화해 농사용 소와 말이나 마차용 말의 길들이기나 사역 용어로 전국에 보급시켰습니다. 원래는 농사용 말의 길들이기에 거간꾼이나 농민이 옛날부터 이용하던 언어였다고 생각되는데, 지역에 따라 약간의 사투리가 있었던 듯합니다. 발진 "마헤", 가속 "하이하이", 오른쪽 직진 "세에", 왼쪽 직진 "사시", 정지 "도오", 후퇴 "아또", 진정이나 어루만지기 "호오라" "오오라", 발 들기 "아시" 등입니다. 경작 작업이나 마차 등은 승마와 같이 직접 몸에 닿지 않고 말을 다루기 때문에 고삐의 유도 이외의 언어 신호가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후지노 씨도 이러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직접 물리적인 힘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성립하는 관계보다 다른 차원의 상호이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닐까요. 

말쟁기질 교사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강습회에는 여러 성질 나쁜 말이 끌려 왔습니다. 그가 남긴 자료에서도 역시 성질 나쁜 말을 길들이는 도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기업 비밀이라 할 수 있는 도구로부터 현장에서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말쟁기질 교사들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말의 급소에 대한 효과가 계산된 얼핏 단순해 보이는 도구는 성질 있는 말을 순식간에 다스리는 오오츠보류大坪流 등의 옛날식 마술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질 있는 말을 교정하는 도구로는 아래와 같은 걸 들 수 있습니다. 

 

1. 입 벌리기 끈 : 재갈의 위에서 입속으로 넣고 당겨서 제어했다. (주머니에 이 끈을 숨겨둔 말쟁기질 교사는 많았던 듯합니다.)

2. 입 벌리기 새끼줄(굵은줄) : 1과 똑같은 목적의 새끼줄.

3. 혀 결속끈 : 아마 혀가 재갈을 넘는 버릇이 있는 말에게 사용했던 끈.

4. 입 벌리기 쇠고리 : 목을 드는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의 입에 끼우고, 복대에 매는 끈으로 연결했다. 주로 마차용 말에 썼다.  

5. 재갈 : 가느다란 것이나 결이 있는 것은 제어작용이 강해 교정 재갈로 이용되었다.

6. 코끝 결속끈 : 말의 급소 가운데 하나이다. 코끝(윗입술)을 묶어 말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코 나사 등으로 윗입술을 비트는 것으로, 뇌속 엔돌핀이 분비되어 심박수가 내려가고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것으로 해명되었다.)

7. 귀덮개 : 소리를 무서워하는 공포벽이나 광분벽이 있는 말에게 사용하는 천. 심하게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에게는 귀 고막을 찢어 외부의 소리를 단절시키는 교정법을 쓰는 경우도 있다.

8. 귀 결속끈 : 귀를 묶어 비틀면 말이 얌전해지기 때문에 성질 있는 말의 제어에 사용했다. (귀 나사와 똑같이 억제신경이 움직인다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사진5 굵은줄과 입 벌리기 끈. 후지노 씨가 사용한 교정도구 길이(왼쪽): 172cm. 말 박물관 소장

 

사진6 연결시킨 혀 결속끈과 재갈. 말 박물관 소장

 

사진7 광분하는 말에게 쓰는 입 벌리기 쇠고리. 말 박물관 소장

 

 

 

말의 힘을 쟁기에 효율 좋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견인 저항과 견인점이 고려된 적절한 멍에와 쟁기의 연결도구에 장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울러 적절한 멍에 깔개를 써서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면 말의 피로는 줄어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지노 씨는 멍에나 멍에 깔개의 개량과 보급에도 시행착오를 계속했습니다. 

실제로 멍에는 길마(짐 안장)→산 모양 가로목 1단→산 모양 가로목 2단→후방 별도 분리로 개량을 거듭해 나아갑니다. 멍에 뼈대의 전방과 후방 사이에 있는 연결목이 2단이 되는 것으로 하단에 복대, 흉대, 당김줄을 연결하고, 상단에 고삐 걸이나무(고삐류의 길이 조정 도구)를 매달 수 있어 멍에 자체도 튼튼해집니다. 후방 멍에 뼈대의 상방이 별도 분리된 모양은 말 몸통의 굵기가 앞쪽과 뒤쪽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 말 몸에 부하를 줄이며 멍에가 장착되도록 합니다. 멍에로 인한 상처를 방지하기 위한 멍에 깔개는 볏짚부터 차차 보리짚으로 변하고, 보리짚을 묶어서 짠 것 등이 이용되었는데, 그 크기도 말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길이 등이 개량되어 나아갑니다. 멍에 만들기에 능한 후지노 씨는 멍에 깔개용으로는 간수나 소금물을 사용해 보리짚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농업 개량을 위한 범국가적 지식과 힘의 집결이 "말쟁기질 교사"라는 모습으로 구현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림2 멍에의 개량(후지노 토쿠오 씨가 지은 <農耕馬の利用は終>에서).

 

그림3 멍에 깔개 만드는 법(후지노 토쿠오 씨가 지은 <農耕馬の利用は終>에서).

 

 

<참고문헌>

馬の畜力利用, 岡部利雄, 養賢堂, 1959

絵馬と農具にみる近代, 板橋区立郷土資料館, 1990

大絵馬ものがたり1, 稲作の四季, 須藤功, 農村漁村文化協会 2009

写真でみる日本生活図引1, たがやす, 須藤功編, 弘文堂, 1988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大日本農会, 1934

畜産発達史, 農林省畜産局, 中央公論事業出版, 1966

農耕馬の利用は終る(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および馬耕鞍の製作法(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教師群像」, 香月洋子, 『宮本常一とあるいた昭和の日本3 九州2』, あるくみるきく双書

田村善次郎・宮本千春 편찬, 農山漁村文化協会 2011

馬耕教師の旅 - 「耕す」ことの近代, 香月洋一郎, 法政大学出版会, 2011

働く馬, 財団法人馬事文化財団, 2002

Lagelweij E, Nelis PC, Wiegant VM and Van Ree JM. The twitch in Horses: a variant of acupuncture, Science, 225 (4667) :1172-4,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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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수목민속.pdf
12.60MB

 

 

최명환, 이영식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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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자료의 원문을 볼 수 있음

 

https://memory.library.kr/items/show/210028400

 

김포의 농기구와 생활도구 | 경기도메모리 디지털 아카이브

2009년 11월부터 12월까지 시행한 김포지역 근.현대 역사자료 조사 및 수집사업의 결과물로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중심으로 함

memory.libr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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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전래 농기구 연구.pdf
3.92MB

 

 

 

2002년 김동섭 씨의 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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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쟁기를 끄는 소 길들이기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되기까지 말을 써레질에 이용하는 경우는 있어도 소를 농경에 이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로, 간토우 지방의 무사 집단이 말을 중요시했던 데다가 모내기의 적기가 짧아서 발이 빠른 말이 필요했다는 점, 말의 두엄 발효온도가 소의 그것과 비교해 6℃ 높고 저온의 토양에서는 거름원으로 뛰어났다는 점, 말괭이보다 늦게 일본에 전래된 쟁기가 도호쿠 지방까지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메이지 시기에 들어와 근대 농업이 깊이갈이를 지향하면서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고 부르는 바닥없는쟁기가 전국에 눈부시게 보급되며 이윽고 짧은바닥쟁기로 발전해 나아갔는데, 동일본에서는 역시 소가 아니라 말에 의한 쟁기질이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은 "말갈이(馬耕)"라는 동일본의 쟁기 호칭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동일본에서 말을 대신해 소가 논 쟁기질의 주역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정을 지키는 여성이 다룰 수 있는 짐승으로 도입되고나서입니다. 전쟁 이후 군마 수요가 없어진 말을 대신해 최종적으로 고기로 비싸게 팔 수 있는 소의 도입을 정부가 지원한 것도 있고, 농업이 기계화되는 쇼와 30년대(1960년 전후) 중엽까지 전국에서 소를 농경에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근무한 소 박물관이 자리잡은 이와테현岩手県은 한세이藩政 시대에는 남부의 소 산지로 알려진 도호쿠 지방의 유일한 소의 산지로, 예로부터 소를 부려 강철이나 소금의 운송이 이루어졌는데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농경에 소를 이용하게 된 것은 쇼와 시대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이와테현에 일본소(와규和牛)를 도입한 계기가 된 것은 쇼와 공황에 의해 피폐해진 농촌을 구제하기 위하여 실행한 농수성農水省의 농산어촌경제農山漁村経済 갱생운동입니다. 이와테현에서는 4개 마을이 지정되어 쇼와 13년(1938년)에 사쿠라가와무라佐倉河村(현 오슈시奥州市)에 검은소 종이 도입되었습니다. 일본소의 도입에 즈음하여 이와테현은 당초 거부의 자세를 취했는데, 거세우뿐이라는 조건으로 간신히 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더욱이, 쇼와 14년(1939년)에 시가현에서 이와테현으로 부임했던 농수성 직원인 사사키 시게오佐々木成夫가 일본수의 3가지 이점으로 살이 잘 찜, 힘이 셈, 송아지(판매)를 설파했습니다. 당시를 잘 아는 히라이즈미쵸平泉町의 오가와 츠네오尾川恒夫(메이지 42년생)에 의하면, 쇼와 16년(1941년)의 일본소 도입과 함께 길들이기 기술도 도입되어서 급속히 퍼졌다고 합니다. 오가와를 포함한 5명이 이바라키현茨城県의 축산시험장에서 길들이기 기술지도를 받았는데, 그때 바둑판 위에 소를 올려놓는 기술을 선보여 경악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5명 가운데 2명은 20세의 여성이었습니다. 젊은이에게 연수를 받게 하고 싶었는데 남자는 전쟁에 징용되었기에 여성을 데려와 행한 것으로, 소 쟁기질의 전국적인 보급에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림1>.

그림1 여성의 소 쟁기질. 1957년 10월 촬영(현 오슈시). 도호쿠 6현 축력 이용기술 교환경진대회에서(소 박물관 소장).

 

 

1944년에는 오카야마현에서 미하라 사쿠노하루三原作之治를 초빙해 다이토우마치大東町(현 이치노세키시一関市)에서 도호쿠 6현의 축산 담당기사를 대상으로 한 강습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미하라는 지금까지 지역에서 경험적으로 제각각 행해졌던 소 길들이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미하라식 길들이기의 창시자입니다. 미하라식 길들이기는 소를 부리기 위하여 필요한 '기초 길들이기'로 정자세, 앞으로, 뒤로, 좌우로 돌아, 빠른 걸음, 보통 걸음, 멈춤 등이었습니다. 한편, 오가와 등이 이바라키의 축산시험장에서 본 소의 바둑판 오르기는 오카야마현 아테츠군阿哲郡 치아무라千屋村(현 니이미시新見市)의 센야千屋 종축목장에서 근무하던 소샤시総社市의 타노 사미사부로佐野民三郎가 고안한 '고등 길들이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외에 선회(한 다리를 중심으로 180도 선회시키는 것으로, 전후좌우 모든 다리로 할 수 있도록 함), 횡족(소가 서 있는 위치에서 바로 옆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좌우로 움직이게 함), 다리 건너기, 경례 등이 있었습니다<그림2>. 소를 부리기만 한다면 보통은 기초 길들이기로 충분하지만, 좁은 논에서 쟁기질 등 축력 이용의 고도화에 수반해 선회나 횡족의 기술이 필요해집니다. 또한, 이와테현과 같은 말에 대한 애착이 강한 지역에서 소로 쟁기질하는 걸 보급하기 위해서는 고등 길들이기를 습득한 축산기사들이 농가의 마당에서 바둑판 오르기 등의 곡예를 선보여 소의 유용성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은 기초 길들이기를 마치면 '일소 길들이기'로 들어갑니다. 

그림2-1 소의 고등 길들이기(바둑판 서기)
그림2-2 소의 고등 길들이기(다리 건너기)
그림2-3 소의 고등 길들이기(경례). 1960년 촬영. 이와테현 에사시시江刺市(현 오슈시奥州市)

 

 

소를 부리는 경우, 길들이기에 앞서 코뚜레를 꿰어야 합니다. 코뚜레는 말의 재갈 역할을 하고, 고삐의 움직임을 소의 코로 전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수컷은 생후 10개월, 암컷은 10-13개월 무렵 나무송곳으로 코에 구멍을 뚫고 장치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중격의 가장 살이 얇은 곳을 뚫는데, 위치가 너무 깊어 연골에 걸리면 소에게 심한 통증을 주게 되고, 너무 아래라 살이 두터운 곳을 뚫으면 지각이 둔해져 고삐의 효과가 나빠집니다. 상처에는 요오드팅크 등의 약품이나 된장을 발라줍니다. 코뚜레를 단 당초에는 상처를 아파하기 때문에 코뚜레에 굴레를 달아 가볍게 매달아 두었다가 1개월 정도 지나 아프지 않게 된 다음 고삐를 달아 길들이기를 시작합니다.

기본 길들이기의 요령으로 미하라는 몇 가지 주의점을 1950년 8월 오카야마현 축산 소식지에 기록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선 기본 길들이기를 행하는 장소는 평탄하고 너르며 발밑에 돌이 없는 장소를 선택합니다. 여름철 한낮이나 벌레가 덤빌 때는 소의 안정을 위하여 식후 1시간 정도 지나고나서 아침저녁 시원할 때 포만감을 가늠하여 실시하고, 휴식은 길들이기의 형태가 무엇이든 하나라도 생긴 다음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10분에서 30분 정도 취하게 합니다. 조련자와 소의 위치는 최초는 코에서 60-90cm 정도에서 고삐를 쥐고 가볍게 치고, 순차적으로 쳐져 소의 오른쪽 뒷다리의 비스듬한 곳에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소의 등선이 보일 정도가 정위치가 됩니다.

소는 코에 닿는 고삐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부릴 때 고삐의 사용법을 확실히 분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삐를 쥐는 법은 오른손 손등에 한바퀴 감은 뒤 꽉 쥡니다. 1m 정도 고삐의 뒷쪽을 남겨두고 왼손으로 가볍게 쥡니다. 고삐 치는 법의 습득은 두 사람이 고삐의 끝을 팽팽히 잡고 한쪽이 고삐를 치고 그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손에 느끼는지 가르쳐주며 연습합니다. 혼자서 연습할 경우는 한쪽 끝을 나무 등에 묶어두고 행합니다. 고삐 치는 법은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손으로 일으킨 고삐의 파동이 정확히 앞쪽으로 전해지도록 합니다.

소를 다스리는 데에는 고삐의 도움과 함께 명령어가 쓰입니다. 이 명령어는 표1에 나와 있는 대로 전국적으로 협정되어 있고, 충분히 철저하게 하면 소는 목소리만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표1  소를 부리는 용어

 

동작   /   용어   /   적요

전진   / 싯   / '시'에 힘을 주고 조금 짧게 발음한다

가속   / 하이하이 / '하'에 힘을 주고 연속해 발음한다

오른쪽 돌기 또는 오른쪽으로 가기   / 세에 /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데에도 쓴다

왼쪽 돌기 또는 왼쪽으로 가기   / 사시 / '사'에 약간 힘을 주어 발음한다. 왼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데에도 쓴다. 왼쪽 돌기를 할 때는 2-3번 연달아서 발음한다

차차 멈추기   / 바아 / 온화하게 발음한다

정지   / 바 / 힘을 주어 짧게 발음한다

후퇴   / 아토 / '아'에 힘을 주어 발음한다

다리 들기   / 아시

주의   / 오오라 / 온화하게 발음한다

진정   / 바아바 / 온화하게 발음한다

어루만지기   / 오오라 / 온화하게 발음한다

혼내기   / 코라 / 짧고 강하게 발음한다

 

 

전진은 소의 코를 앞으로 당기는 듯한 파동을 치는 동시에 "싯"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전진하기 시작하면 고삐의 긴장을 풀어 똑바로 걷게 하고, 속도가 느릴 때는 왼손의 고삐를 흔들거나 사람의 무릎을 두드리는 등을 하며 "하이하이"라고 구호를 외쳐 가속시킵니다. 천천히 걷게 하려면 코 밑을 똑바로 아래로 당기는 듯한 고삐의 파동을 쳐 머리를 위로 들게 합니다.

정지시키려면 후방으로 약간 꽉 누르듯이 고삐를 당기는 동시에 "밧"하고 구호를 외칩니다. 팔을 움직여 크게 당기거나, 서서히 당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왼쪽으로 돌기는 소의 코를 왼쪽으로 밀듯이 파동을 보내는 동시에 "사시"라고 명령하고, 오른쪽으로 돌기는 고삐를 오른쪽으로 당기며 "세에"라고 명령합니다. 소가 돌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사람도 위치를 바꾸면서 고삐를 칩니다. 후퇴는 소의 코를 바로 뒤로 당기는 듯한 파동을 보내고, 소의 머리와 몸을 똑바로 해놓은 다음 "아토, 아토"라고 연호하면서 바로 뒤로 짧게 당깁니다.   

정지한 경우 앞다리는 모아져 있지만 뒷다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왼쪽 뒷다리를 뒤로 당기게 할 경우, 오른쪽으로 돌게 하는 고삐를 내는 동시에 후퇴의 고삐를 가볍게 칩니다. 오른쪽 뒷다리를 당기게 할 경우에는 왼쪽으로 돌기와 함께 후퇴의 고삐를 합쳐서 치며 "아시, 아시"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행합니다.

기본 길들이기가 마무리되면 쟁기꾼은 비교적 간단히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멍에를 소의 등에 얹어서 익숙해지도록 하는 일부터 시작해, 다음으로 뱃대끈을 채웁니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조이고 걷게 하는데, 한태를 함께 사용해 멍에가 어긋나지 않게 합니다. 소가 멍에에 충분히 익숙해지면 봇줄을 달아 가벼운 것부터 서서히 끌게 합니다. 최초는 똑바로 끌며 걷게 하고, 가능해진다면 좌우 돌기를 연습하며, 정지와 후퇴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갑자기 무거운 걸 끌게 하면 소가 일을 싫어하고 나쁜 버릇이 생기기 쉬워져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본 동작을 할 수 있게 되면 논밭으로 데리고 나와 쟁기를 달아봅니다. 최초는 얕게 쟁기질하고, 점점 쟁기를 깊게 넣어 봅니다. 

실제로 일을 시킬 때는 길들이기할 때의 줄보다 좀 굵을 걸 쓰고, 길이는 5m 정도로 합니다. 

소를 부리는 일은 농경과 운반이 있는데, 짐 싣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견인이고 그 방법은 ①몸통 끌기(뱃대끈 없음), ②몸통 끌기(뱃대끈 착용), ③어깨 끌기, ④머리 끌기, ⑤몸통과 어깨 병용해 끌기<그림3>, ⑥몸통과 머리 병용해 끌기가 있습니다<그림4>. 쟁기를 끄는 것 같은 논의 작업에서는 디딜 곳이 나쁘고 앞다리를 뽑아드는 것 같은 움직임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조롭게 당기고 다리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는 몸통 끌기가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져 색인력의 측면에서도 ②몸통 끌기(뱃대끈 착용)이 전국적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그림3 몸통과 어깨 병용해 끌기. 1950년 무렵 촬영. 미야기현宮城県 가리타군刈田郡 시라이시쵸白石町(현 시라이시시白石市). 소 박물관 소장.

 

그림4 몸통과 머리 병용해 끌기. 1960년 10월 촬영. 이와테현岩手県 에사시시江刺市(현 오슈시奥州市). 소 박물관 소장.

 

 

더구나 머리 끌기를 행하는 경우, 멍에가 뒤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머리를 숙이고 끄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머리 끌기는 힘을 내기 쉽고, 탄력을 이용할 수 있어 평탄한 길에서 무거운 짐을 끌게 하는 경우 등에 쓰입니다. 머리를 숙이게 하려면 소에게 굴레를 착용시키고 아래쪽에 고삐를 걸어 두 다리 사이를 통과시켜 뱃대끈에 묶습니다. 최초는 위에 기록한 방법으로 멍에만을 연결해 걷게 하고, 가벼운 것부터 끌게 해 차차 무거운 것을 끌고 가게 합니다. 그러면서 소가 머리를 숙이는 것이 편하다는 걸 학습하기 때문에, 고삐를 차츰 느슨하게 하면서 멍에로 견인하고 있을 때 항상 고삐가 느슨해지면 고삐를 끄릅니다. 

또한 소의 축력 이용에 대해서는 당시 일소와 고기소였던 일본소의 품종별로 그 능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해 놓았습니다. 오카모토岡本(1958)에 의하면, 표2와 같습니다. 

 

표2 일본소 품종별 사역능력

품종                /         능력

검은 일본소     / 동작 경쾌하고 성질 온순, 길들이기도 용이하여 부리기에 적합, 힘은 조금 부족하지만 농경지가 좁고 힘든일을 할 기회가 적은 일본의 일반적 농가에서는 필요로 하는 충분한 능력을 가짐. 육질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음.

갈색 일본소    / 동작 경쾌함과 길들이기 용이함은 검은소와 큰 차이가 없지만, 성질은 한층 온순하여 부리기 쉬움. 힘과 내구력, 작업능률의 측면에서 약간 앞서지만 육질의 측면에선 좀 떨어짐.

뿔 없는 일본소 / 걸음걸이가 좀 경쾌함이 부족하고, 힘은 그렇게 쳐지지 않지만 지구력에서는 검은소와 갈색소보다 좀 떨어짐. 육질에서는 정평이 나 있지만 사역능력은 낮다고 평가됨.

짧은뿔 일본소 / 길들이기는 좀 어렵지만 견인력이나 걸음속도의 측면에선 그닥 다른 품종에 떨어지지 않음. 육질은 불고기용으로는 떨어지지만 빛깔이 좋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좋아함.

 

이와테현 남쪽 지방에 1930년 전후로 도입된 일본소는 확린된 길들이기의 기술을 동시에 도입함으로써 급속히 보급되어 나아갔습니다. 일부에서는 짧은뿔 계통의 소도 혼재해 있었지만 차차 당시부터 일소 겸 고기소 용도의 소로 주류를 점했던 검은소로 통일되고, 논을 갈아엎는 역축, 나아가서는 거름용으로도 빼놓을 수 없는 가축으로 정착되어 나아갑니다. 그러나 일소의 이용은 경운기와 트랙터의 보급에 의해 1960년 전후로 돌연 종언을 맞이합니다. 일소라는 큰 용도가 사라진 검은소였지만, 논농사 지대에서 거름용 가축이란 중요성과 송아지의 판매에 의한 현금 수입에 더해 길들이기에 의해 생긴 소와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 계속 사육하게 하는 동기가 되어, 이와테현 남쪽 지방은 타지마但馬 지방에서 씨수소를  구입하는 등 검은소 송아지의 산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현지의 송아지를 바탕으로 해서 비육에 나선 이사와군胆沢郡 마에사와쵸前沢町(현 오슈시)에서 출하된 소의 육질이 시장에서 고평가를 받고 '마에사와 소'라는 상표화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소의 길들이기에 대해 미하라는 "소의 마음을 잘 알아 휴식과 어루만지기를 게을리하지 말 것"이란 말을 남겼는데, 마에사화 소의 비육 농가에서 농림수산대신상을 수상한 오이카와 우메오及川梅男도 소 사육의 비결은 "소의 말을 알아듣는 비육"이라 합니다. 길들이기에 의하여 생긴 소와 인간 사이의 유대감이 현재의 브랜드 소의 비육기술로 살아나고 있는 겁니다. 일본소의 고기는 다른 축산물과 차별화되어 '예술품'에 비견되는 일이 있는데, 그 요인의 하나가 두 사례의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일소 부리기는 행해지지 않지만, 길들이기는 가축 공진회 등에서 소에게 정자세를 취하게 하는 등 지금도 필요한 기술입니다. 최근에는 2012년 10월에 개최된 제10회 전국 일본소 능력 공진회 나가사키현 대회에서 오카야마현의 신미 고등학교와 기후현의 가모 농림고등학교의 학생들에 의해 소의 바둑판 오르기가 선보여져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그림5>. 

 

그림5 소의 바둑판 오르기. 제10회 전국 일본소 능력 공진회 나가사키현 대회. 오카야마현립 신미新見 고등학교(좌), 기후현립 가모加茂 농림고등학교(우).

 

 

소의 고등 길들이기는 검은소를 단순히 고기용 가축으로 취급하지 않고 애정을 들여 사육하는 일본의 소와 인간 사이의 유대감을 상징하는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진귀한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본 길들이기와 함께 고등 길들이기 기술이 전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참고문헌〉

赤木廸朗, 牛調教のあらまし、岡山畜産便り 第二巻 第五号(おかやま畜産ひろば ホームページ), 1951

岡本正幹, 畜産体系 第十九編 役肉牛、養賢堂(東京), 1958

川田啓介, 「調査記録」, 1994

河野通明, 近代農業と長床犁 「中世名主=犁、近世小農=鍬」説の再検討(下 - 二), 商経論業 第四六巻 第

一号, 75〜118p, 神奈川大学 経済学会 (http://hdl.handle.net/10487/9402), 2010

三原作之治, 和牛調教のコツ, 岡山畜産便り 第九号(おかやま畜産ひろば ホームページ), 1950

吉田武紀, 牛の調教から使役まで (1)畜産の研究 第九巻 第一号, 19~22p, 1955

吉田武紀, 牛の調教から使役まで (2)畜産の研究 第九巻 第二号, 27~30p, 1955

吉田武紀, 牛の調教から使役まで (3)畜産の研究 第九巻 第三号, 41~42p, 1955

吉田武紀, 畜産体系 第二十八編 牛の畜力利用, 養賢堂(東京), 1960

 

 

글쓴이 카와다 케이스케川田啓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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