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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1


중세에서 보는 쌀과 고기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중세라는 시대

일본의 중세는 국가 지배가 성립을 보았던 고대와 그 체계가 완성을 보았던 근세의 사이에 끼어 있던 시대이며, 고대와 근세가 통일집권적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지방분권적인 성격이 짙은 사회였다. 즉 중세 전기에는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라는 율령제의 토지 소유와 사적 대토지 소유인 장원제가 병존하여, 율령법 이외에도 장원법이란 이중 규범이 존재했다. 또한, 그 이후 시기에는 수호守護 다이묘1와 전국戰國 다이묘2가 이른바 다이묘 영국제領國制3를 시행하여, 그것이 이윽고 분국법分國法을 가지는 데에 이르는 등 통일적인 확고한 정치체계가 존속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지극히 대략적인 개념 규정에 따라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는 권문체제라는 지배양식이 채택되고, 경제적으로는 장원공령제莊園公領制라는 사회 체계가 중세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즉 쿠게公家, 부케武家, 지샤케寺社家가 각각 국가 의식儀式, 군사경찰, 종교행사를 담당하여 분담하는 것과 동시에 각각이 상호보완적으로 정치체제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케가 돌출해 나온 시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상급 부케를 지배하는 사무라이들이 장원과 국아령國衙領4 등의 단위에서 재지영주제라는 지역 지배를 행하는 것과 함께, 그들을 통할하는 형태로 쿠게, 부케, 지샤케가 정점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중세란 각지에 독자적 정권이 존재할 수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했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적이라고 하여 중세 일본에서 국가 그것이 분열되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또몇 가지 우여곡절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적 가치관의 방향성이라는 점에서는 일관성을 찾을 수 있다. 즉 쌀에 대한 고집과 고기의 배제였는데, 그것은 꽤나 오랜 시간을 거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오히려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대항관계가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와 일본의 특수성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쌀과 고기는 모순 없이 공존한다. 쌀은 습윤온난한 기후를 좋아하기 때문에, 상당한 물을 필요로 한다. 논에는 물을 담을 수 있는 외에, 비탈의 화전 벼농사 지대에서도 우기에 내리는 방대한 비가 중요하여, 골짜기의 저지에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하천과 호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물고기가 있어, 이들은 쌀과 한 묶음이 되어 벼농사 지대에서 식생활의 기본을 이루어 왔다.

게다가 한 시기에 대량으로 확보된 어류는 이것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 어장이란 맛있는 조미료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사용하여 맛을 내는 것이 조리의 주류를 이룬다. 이 어장이 대두의 발상지라고 생각되는 중국의 강남을 통과할 때 어쩌면 물고기 대신에 대두를 사용한 곡장을 만들어내, 이것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어장과 함께 널리쓰이는 조미료가 되었다. 중국 및 조선반도에서는 곡장, 어장은 활발히 사용되어, 예를 들면 조선반도의 김치 담그기에서는 젓갈이란 어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고대에 어장에서 곡장으로 전환이 진행되었는데, 그래도 노토 반도의 이시루아키타의 숏츠루 등으로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즉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쌀과 물고기가 주요한 식량인데, 그밖에도 중요한 동물성 단백질원이 존재했다. 그것은 돼지로, 논벼농사와 함께 쉽게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중국 등의 희생 공물에는 돼지가 쓰이는 일이 적지 않아, 돼지고기를 함께 섞어 지은 밥은 중요한 의례 음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이 돼지가 빠지는 매우 진귀한 현상이 발견된다. 이 의미에서 일본의 쌀 문화는 상당히 색다른 모양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최근 동물고고학의 성과에 의하면,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도 돼지가 사육되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야요이 유적에서는 멧돼지가 아닌 돼지의 유골이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다. 즉 논벼농사의 수용에 따라, 틀림없이 돼지의 사육법도 이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요이 사람들은 논벼농사를 행하며, 물고기와 함께 돼지도 식용으로 제공했다고 생각되는데, 어느 시대부터인가 육식의 금기가 재앙을 피하기 위한 조건이 되었다. <위지魏志 왜인전>에는 왜인은 금기와 재계 등을 할 때 고기를 멀리한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분 시대 이후에 더욱 일반으로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돼지뼈의 출토 사례가 감소하는 일이지적된다. 어쨌든 논벼농사를 행하면서 간단하게 사육할 수 있는 돼지의 식용이 서서히 감소했던 걸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다이카大化 전대의 관제에는 저사부猪飼部 같은 부민제도가 보이며, 저사야猪飼野라는 지명 등이 남아 있는 바로부터 정치 체계의 일부에서나 돼지의 사육이 여전히 행해졌다는 데에는 주목할 만하다.


고대에 이루어진 쌀의 추진과 고기의 부정

문헌 사료에서 육식의 부정이 명확해진 건 고대 율령국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덴무天武 천황 4년(675) 이른바 육식금지의 조칙이 나와 소, 말, 개, 닭, 원숭이에 대해서는 4월부터 9월까지 죽이거나 먹거나 하지 말라는 성지가 명령으로 내려진다. 그러나 일본인이 가장 먹어 왔던 동물은 사슴과 멧돼지였다. 니쿠는 육肉의 음독이며 그 뜻은 고기인 점에 유의하면, 이것은 그 자리에서 납득되는 듯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 이 법령을 엄밀하게는 육식금지령이라 부르는 데에 무리가 있다.

소와 말은 물자의 운반과 노동력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개와 닭은 가까운 가축이다. 또 원숭이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로, 사냥꾼들도 원숭이를 공격하는 일에는 저항감이 있다고 한다. 모두 식용과는 관계가 먼 동물들이다. 게다가 금지 기간이 4-9월이란 것도 주목해야 할 점으로, 이것은 논벼농사의 농경 기간에 해당한다. 또한 이 조칙과 동시에 덴무 천황은 앞으로 풍해로부터 벼를 지키기 위한 타츠타龍田 풍신風神과 농업용수를 관장하는 히로세広瀬 수신水神의 제사를 매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더욱이 이 조칙의 2년 전에는 농사지을 때는 논농사에 열심히 일하고 '미물美物'(고기를 포함한 요리)과 술을 삼가하도록 하며, 그 16년 뒤에도 장마가 이어졌기 때문에 관리에게 '술과 고기(酒宍)'를 끊게 하고 승려에게 경을 읽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하여 비가 그치고 벼가 열매를 맺는다고 믿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덴무 천황 4년의 조칙은 육식금지령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살생금단령이라 할 만한 것으로, 동물의 살생을 경계함으로써 논벼농사가 원활히 추진되는 걸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고대 율령국가는 반전수수법班田收受法을 채용하고 밭을 고려하지 않고 논만 조세의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채택해,쌀을 그 사회적 생산기반으로 자리잡도록 했다. 그 때문에 100만 헥타르의 논 개간 계획을 세우거나, 삼세일신三世一身5의 법과 개간한 농지의 영세사재법永世私財法을 정하여 쌀 중심의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국가의 정점에 선 천황은 최고의 벼농사 제사자로서 쌀을 천계에서 지상계로 전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황조신으로 삼고 그 신에게 감사하며 쌀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한 신상제新嘗祭를 해마다 집행하는 존재가 되어, 쌀은 신성한 먹을거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고기는 벼농사의 장해가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불결한 존재로 차츰 부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물론 육식 그것을 부정하는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에도 실제로는 육식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육식이 불결함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진 것도 사실로서, 관리라면 궁중으로 입궐할 때는 육식을 금하고, 일반 사람들도 신사에 참배할 경우에는 일정 기간만 육식을 행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관청에서도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연희식延喜式>6부터는 육장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대 율령국가는 겉으로는 고기를 금지했는데, 그 배경에는 논벼농사의 추진이란 사정이 있어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도식이 성립한 것이다.


중세의 쌀과 고기의 상극

신성한 쌀에 의한 불결한 고기의 부정은 중세라는 오랜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명월기明月記>에는 사무라이들이 열심히 육식을 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외에, 귀족에서도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천하게 간주되고 있다. 물론 에외는 있는데, 장원 영주인 귀족과 승려는 연공으로 쌀을 입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쌀을 좋아하고 고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상층계급 정도는 쌀을 먹고, 하층계급 정도는 고기를 식용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세를 거치며 논 개간은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흉작과 기근도 드물지 않았다. 쌀의 생산을 위해서는 한해와 수해에 강하고 일찍 익으며 거름이 적게 필요했던 적미赤米(점성미, 대당미, 당법사)가 도입되어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연공미가 되지는 않았고, 흰쌀만을 상납하고 적미는 농민의 식용으로 쓰였다. 또한 장원 영주와 재지 영주들은 장거리 용수로를 뚫거나 하여 농업생산력의 확대를 도모했는데, 농민들 대부분은 밭작물에 의지하거나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동식물 등을 식재료로 구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카마쿠라 시기에는 쌀을 수탈하는 입장에 있는 장원 영주들은 남도불교南都仏教와 천태·진언의 옛 불교에 의지했는데, 반대의 입장에 있는 농민은 법연法然과 신란親鸞 등이 주도했던 새로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법연은 신자가 고기를 먹는 일은 나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방법이 없는 일이라고 답한다. 또 신란의 정토진종 문도에는 장사꾼과 사냥꾼 등 논벼농사 이외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고, 제자인 유이엔唯円이 이야기했던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은 어쩔 수 없는 살생을 계속하는 사냥꾼들조차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는 그대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식생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기에 의한 불결함 의식은 중세에 뚜렷하게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물론 불결함은 육식만이 아니라 죽음과 태어남 등에도 관계되는 것인데, 고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꺼리고 혐오하게 되었다. 중세에는 신사 등에서 물기령物忌令이라 부르는 규정이 정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육식의 경우에는 사슴고기를 먹으면 100일 동안 불결하다고 하여, 그동안은 신사에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구나 이 불결함은 전염되는 것이라 생각해 A가 사슴고기를 먹으면 물론 100일 동안 불결한데, 그 지인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불로 조리한 것을 먹는다고 하면 B는 21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게다가 A와는 전혀 관계 없는 C가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함께 식사하게 되면 C까지 7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고대에도 불결함은 의식되었지만, <연희식>에서 사슴고기의 육식은 3일 동안 불결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중세에는 100일까지 확대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불결함이 전염된다고 간주된 건 육식에 대한 기피가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이 불결한 고기를 쫓아낸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논의 양적 확대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벼농사 기술도 진보하여 질적 향상이 뚜렷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고기를 얻기 위한 수렵은 점점 쇠퇴의 길을 가고, 사회적인 규모에서 육식의 금기의식이 높아졌다. 


근세의 쌀 사회의 성립

고대 율령국가가 지향했던 쌀을 사회의 생산적 기반으로 삼는 이상은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했던 중세 사회를 빠져 나가서 근세 막번幕藩 체제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서 천하통일을 실현했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이른바 타이코우太閤 검지檢地 정책을 실시하여 병농분리에 의한 사무라이와 농민의 거주지 분리에 성공했다. 즉 정치의 지배거점인 도시=성시에는 사무라이가 살고, 농업생산의 현장인 각지의 마을들에는 농민만 거주하는 정치적 행정촌이 되었다. 검지 실시에 의하여 마을마다 생산력을 파악하고, 논만이 아니라 밭도 대지도쌀을 기준으로 한 수확량으로 표시하도록 하며, 모든 것을 쌀의 견적생산력으로 치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원칙을 세워 쌀로 연공을 납입하도록 의무화되었다. 마을의 수확량만이 아니라, 다이묘의 경제력도 모두 쌀의 계량 단위인 섬으로 환산하게 되었다. 이른바 석고제石高制라는 경제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고대 국가의 이상 실현이라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히데요시 사후, 패권을 장악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치적으로는 막번 체제라는 막부와 번에 의한 지배 체계를 구축하여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쌓아 올렸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 바로 신성한 쌀이었다. 

막부는 강대한 권력을 배경으로 새로운 논 개발 정책을 실시하고, 대규모 개발사업을 실행했다. 논과 밭이 맞버티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중세와는 달리, 근세 중기에는 논이 밭을 상회하게 되었다. 중세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적미는 17세기 무렵에는 어지간히 쫓겨나고, 논 생산력은 중세에도 증가하여 향상했다. 근세의 말기에는 일찍이 벼농사를 전해 주었던 조선반도보다 재배기술이 뛰어나 파종량은 동시기의 조선보다 훨씬 적어도 완료되는 상황이었다. 그 배경에는 마을마다 농민들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기술의 향상에 노력하고, 그 토지마다 적합한 농업생산의 이상적 방식을 연구하여 방대한 농서를 남기는 등, 마을 수준에서 열심히 쌀농사에 힘쓴 사실이 있다. 

이 때문에 육식에 대한 금기는 최고조에 이르러, 마을마다 고기를 먹으면 눈이 보이지 않고 입이 돌아간다는 등 미신이 퍼졌다. 또한 동물의 처리에 관련된 사람들을 백정으로 차별하는 불합리한 신분제도가 엄격해졌다. 그 대신 쌀은 불사리에 비유될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중시되어, 쌀밥이 무엇보다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중세란 이러한 쌀 사회를 준비하는 오랜 기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의 직책 이름인 수호는 원래 각 지방의 치안과 경비 등을 담당했으나, 이후 강대해지며 영주화되었다. [본문으로]
  2. 100년 동안 전국시대가 계속되면서 수호 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스스로 다이묘가 되어 새로운 영국의 지배자가 된 전국시대의 다이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제후가 영토를 소유하는 제도. [본문으로]
  4. 장원이 아닌 정부 소유의 땅. [본문으로]
  5. 새로 관개 시설을 만들어 경지를 개척한 자에게는 본인·아들·손자의 3대 동안, 기존의 관개 시설을 이용한 자에게는 본인 1대에 한하여 그 경지의 보유(사유)를 인정한 것. 이는 한정된 기간이기는 하였으나 공지공민제의 원칙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헤이안(平安) 시대의 율령 시행 세칙.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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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잠; 조선시대에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며 사람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알리던 의식 

일본에서는 천황이 아직 있어 그 황후가 지금도 친잠 의식을 행하고 있답니다. 올해가 임기의 마지막이라 내년부터는 누가 누에를 치나 걱정이라네요.

http://news.tbs.co.jp/newseye/tbs_newseye335723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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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생물다양성은 인간과 환경의 건강에 중요하다. 이용할 수 있는 음식과 생태학의 지표는 먹을거리 생물다양성과 식단의 품질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음식 섭취량 자료에 생물다양성 지표를 적용하고, 여성과 아동의 식단의 품질에 대한 연관성을 평가했다. 7개의 저소득 및 중위소득 국가 농촌지역의 n = 6,226명의 참가자(34% 여성)의 24시간 식단 기억(우기에 55%)에서 얻은 자료를 분석했다. 비타민A, 비타민C, 엽산, 칼슘, 철분, 아연 및 식단 다양성 지수(DDS)를 활용하여 식단의 품질을 평가했다. 적절한 영양분과 관련된 생물다양성 지표의 연관성은 다층모형, 수신자 조작 특성 곡선(receiver operating characteristic curve), 감수성 및 특이성 시험을 활용해 계량화했다. 총 234개의 종이 소비되었는데, 이 가운데 30% 미만이 하나의 나라 이상에서 소비되었다. 9개의 종은 모든 나라에서 소비되었는데, 평균적으로 전체 에너지 섭취량의 61%를 제공했으며, 우기에 미량영양분을 제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Simpson의 다양성 및 기능적 다양성 지수와 비교할 때, 종의 풍부함(SR)은 미량영양분 적절성과 더 강한 연관성이 있으며 더 나은 판단의 근거가 되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소비된 모든 추가 종에 대해서, 음식의 양분 적절성은 0.03(P < 0.001) 정도 증가했다. 양분 적절성이 더 높은 식단은 주로 종의 풍부함과 식단 다양성 지수가 최대일 때 얻을 수 있었다. 최소 식단 다양성을 최소로 차단하기 위하여 종의 풍부함을 추가하면 여성에게서는 미량영양분 적절성이 더 높지만 아동에게서는 그렇지 않은 식단을 탐지하는 능력이 향상되었다. 음식 종의 풍부함은 식단에서 먹을거리 생물다양성의 가장 적절한 척도로 권장할 만하다.  



https://www.bioversityinternational.org/fileadmin/user_upload/Dietary_Raneri_201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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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년 사이에 일본에서 거주했다는 한 미국인이 찍은 사진으로,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 쟁기의 모양이 흥미롭다. 쟁기의 술(보습이 달리는 대)과 성에(한마루와 성에를 부착하는 대)의 각도가 매우 작다. 이는 아마 논에서 쓰는 쟁기여서 그럴 것이다. 논흙이 찐덕찐덕하기에 술의 각도가 컸다가는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힘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설계했을 것이다.

한국의 밭호미와 논호미가 보여주는 날과 슴베의 각도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푸석푸석한 밭흙에서 일하는 호미와 찐덕찐덕한 논흙에서 일하는 호미는 서로 다르게 생겼다.

왼쪽 두 개는 밭호미, 오른쪽 세 개는 논호미이다.




마지막으로 모내기를 마친 논의 모습도 흥미롭다. 그루당 간격이 듬성듬성하고, 모의 길이가 긴 모습이다. 옛날 농법은 대개 그러했던 걸까? 이 논에 심은 품종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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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Junglefowl (Gallus gallus) in Kaziranga National park in Assam, India. Getty Images / Hira Punjabi / Lonely Planet Images

The history of chickens (Gallus domesticus) is still a bit of a puzzle. Scholars agree that they were first domesticated from a wild form called red junglefowl (Gallus gallus), a bird that still runs wild in most of southeast Asia, most likely hybridized with the gray junglefowl (G. sonneratii). That occurred probably about 8,000 years ago. Recent research suggests, however, there may have been multiple other domestication events in distinct areas of South and Southeast Asia, southern China, Thailand, Burma, and India.


Since the wild progenitor of chickens is still living, several studies have been able to examine the behaviors of wild and domestic animals. Domesticated chickens are less active, have fewer social interactions with other chickens, are less aggressive to would-be predators, and are less likely to go looking for foreign food sources than their wild counterparts. Domestic chickens have increased adult body weight and simplified plumage; domestic chicken egg production starts earlier, is more frequent, and produces larger eggs.

Chicken Dispersals

The earliest possible domestic chicken remains are from the Cishan site (~5400 BCE) in northern China, but whether they are domesticated is controversial. Firm evidence of domesticated chickens isn't found in China until 3600 BCE. Domesticated chickens appear at Mohenjo-Daro in the Indus Valley by about 2000 BCE and from there the chicken spread into Europe and Africa.

Chickens arrived in the Middle East starting with Iran at 3900 BCE, followed by Turkey and Syria (2400-2000 BCE) and into Jordan by 1200 BCE.

The earliest firm evidence for chickens in east Africa are illustrations from several sites in New Kingdom Egypt. Chickens were introduced into western Africa multiple times, arriving at Iron Age sites such as Jenne-Jeno in Mali, Kirikongo in Burkina Faso and Daboya in Ghana by the mid-first millennium AD.

Chickens arrived in the southern Levant about 2500 BCE and in Iberia about 2000 BCE.

Chickens were brought to the Polynesian islands from Southeast Asia by Pacific Ocean sailors during the Lapita expansion, about 3,300 years ago. While it was long assumed that chickens had been brought to the Americas by the Spanish conquistadors,presumably pre-Columbian chickens have been identified at several sites throughout the Americas, most notably at the site of El Arenal-1 in Chile, ca 1350 AD.

Chicken Origins: China?

Two long-standing debates in chicken history still remain at least partially unresolved. The first is the possible early presence of domesticated chickens in China, prior to dates from southeast Asia; the second is whether or not there are pre-Columbian chickens in the Americas.

Genetic studies in the early 21st century first hinted at multiple origins of domestication. The earliest archaeological evidence to date is from China about 5400 BCE, in geographically widespread sites such as Cishan (Hebei province, ca 5300 BCE), Beixin (Shandong province, ca 5000 BCE), and Xian (Shaanxi province, ca 4300 BCE). In 2014, a few studies were published supporting the identification of early chicken domestication in northern and central China (Xiang et al.

). However, their results remain controversial.

A 2016 study (Eda et al., cited below) of 280 bird bones reported as chicken from Neolithic and Bronze age sites in northern and central China found that only a handful could securely be identified as chicken. Peters and colleagues (2016) looked at environmental proxies in addition to other research and concluded that the habitats conducive to jungle fowl were not present early enough. These researchers suggest that chickens were a rare occurrence in northern and Central China, and thus probably an import from southern China or Southeast Asia where evidence of domestication is stronger. 

Based on those findings, and despite the fact that southeast Asian progenitor sites have not as yet been identified, a separate Chinese domestication event does not seem likely.

Chickens in America

In 2007, American archaeologist Alice Storey and colleagues identified what appeared to be chicken bones at the site of El-Arenal 1 on Chile's coast, in a context dated before the 16th century medieval Spanish colonization, 1321–1407 cal C.E. The discovery was evidence of pre-Columbian contact of South America by Polynesian sailors, still a somewhat controversial notion in American archaeology.

However, DNA studies have provided genetic support, in that chicken bones from el-Arenal contain a haplogroup which has been identified at Easter Island, which was founded by Polynesians around 1200 C.E. The founding mitochondrial DNA cluster identified as Polynesian chickens includes A, B, E, and D. Tracing sub=haplogroups, Luzuriaga-Neira and colleagues (cited below) have identified one found only in in eastern Asia and one from Easter Island. The presence of the sub-haplotype E1a(b) in both Easter Island and el-Arenal chickens is a key piece of genetic evidence supporting the pre-Columbian presence of Polynesian chickens on the coast of South America.

Additional evidence suggesting precolumbian contact between South Americans and Polynesians has been identified, in the form of ancient and modern DNA of human skeletons in both locations. Currently, it seems likely that the chickens at el-Arenal were brought by Polynesian sailors.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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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쌀”의 어원을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크게 세 가지 설이 나왔다.

(1) 쌀은 씨+알이라는 설.
(2) 벼의 원산지인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 Sari에서 왔다는 설.
(3) 쌀을 먹어 살을 붙인다는 데에서 왔다는 설.

내 생각에는 (1)번이 가장 유력한 것 같다. (3)번 같은 경우는 그냥 우스개로 보아 넘겨도 될 것 같고, (2)번은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그래도 (1)번이 더 설득력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벼 이외의 곡물로 밥을 지어 먹을 때에도 모두 쌀이라 한다는 점 때문이다. 보리밥은 보리쌀로 짓고, 조밥은 좁쌀로 짓고, 기장밥은 기장쌀로 짓고, 수수밥은 수수쌀로 짓고, 율무밥은 율무쌀로 짓는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곡물들은 도정하지 않은 상태 그 자체가 바로 씨이다. 그러니 쌀은 씨+알이 가장 그럴 듯한 설명 같다.

더군다나 씨의 옛 표현법이 "ㅂ시"였고, 쌀도 마찬가지로 "ㅂ살"이었다고 한다. 음운학에 의하면,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에는 된소리가 되게 하는 "ㅂ" 발음이 없어서 "ㅂ살"이 그 언어에서 왔다는 설은 설명이 힘들다고 한다.

처음 쌀의 어원을 찾아볼 생각을 한 건 "강철비"라는 영화를 보다가 이밥이 나와서였다. 이밥, 이팝은 도대체 어떤 말인가? 사전을 뒤지니 입쌀밥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입쌀밥은 입쌀로 지은 밥이란 뜻이고, 입쌀은 찹쌀이 아니라 멥쌀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밥이라 하면 멥쌀로 지은 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입쌀은 그럼 무슨 뜻일까? 쌀은 앞에서 보았듯이 씨+알이라 한다면, '입'은 무슨 뜻인가? 옛말에서는 '입'을 '니'라 썼다고 한다. 니밥이니 니쌀이 이밥과 입쌀과 같은 뜻이라 한다. 그런데 도대체 니, 니는 무슨 말인가? 그것은 아직도 모르겠다. "니"가 흰색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또 있는 것인지 더 찾아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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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정치적 폭동 사이의 역사적 관계는 문서로 잘 정리되어 있다. 

역사가들은 1788년 프랑스에 가뭄이 찾아와 널리 흉년이 들고 식량 가격이 폭등하여 이듬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시리아에 2006-2010년 4년 동안 가뭄이 발생하며 일어난 대규모 실업 사태로 지금까지도 격렬한 내전을 겪고 있다.  

자극적인 새로운 보고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조직이 탄생했다는 사례를 제시한다. 

마피아는 시칠리아에서 처음 1860년 무렵에 나타났는데, 섬의 취약한 지방정부와 로마에서 먼 거리를 이용해 지역에서 갈취행위를 벌였다. 몇 십 년 동안 그 조직은 하찮은 범죄자들로 구성되어, 지방의 수도인 팔레르모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1893년 그 지역에 심각한 가뭄이 들면서 엄청나게 변화했다고 MIT의 경제학자 Daron Acemoglu 씨와 요크 대학의 공동연구원 Giacomo De Luca 씨 및 글래스고의 스트래스클라이드 경영대학원의 Giuseppe De Feo 씨가 논문에서 이야기한다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아직 다른 학자들이 검토하지 않았다는 뜻)의 연구보고서로 발표된 이 연구는 시칠리아의 농민들이 가뭄 이전에도 이미 취약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대규모 농지를 소유한 지배층의 자비로 작은 농지를 임대하거나 노동하는 날품팔이로 살았다. 1년 전 흉년을 겪은 뒤 찾아온 가뭄으로, 섬의 밀 수확은 절반으로 떨어지고 올리브유와 포도주, 보리의 생산도 비슷하게 감소했다. 논문에 의하면, 어떤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이 1893년에 비해  65% 이상 떨어졌다. 

가뭄과 그로 인한 실업이 사회주의 운동에 불을 지폈고, 도시에서 시작되었지만 농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Fasci Siciliani dei Lavoratori가 농촌에서도 퍼졌다. (Fasci의 이름은 “파시스트”와 똑같은 어원이다. —둘 다 이탈리아어로 “무리”라는 뜻— 하지만 후기의 정치 운동과는 무관하다.) 파쇼 운동은 곧 수십 만에 이르러 시칠리아 전역에서 177개의 지부로 조직되었고, 지배층에 항의하며 임금 인상과 장기의 토지 임대 계약 및 지주에게 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세금 부담을 줄여 달라고 요구했다. 

지주들은 이탈리아 정부에게 파쇼를 해산시키기 위한 파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좌파 성향의 이탈리아 총리Giovanni Giolitti 씨는 농민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래서 지배층은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돌아서기 시작했다. 바로 마피아에게로.  1893년 내내 파쇼의 집회는 마피아 선동자들에 의해 난폭하게 붕괴되었고, 나중에 군대에 의해 진압될 더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논문은 몇 가지 전형적인 사건을 서술한다. 

1893년 12월 25일 유황 광산이 있는 팔레르모 지방의 큰 마을인 레까라Lercara에서, 그리고 1894년 1월 2일 트라파니 지방의 지벨리나Gibellina에서 지방 행정부와 세금에 항의하는 집회가 농촌의 경비요원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두 사례 모두 종탑에 숨은 무장 경비요원이 중앙 광장의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군대가 계속 개입하여 사망자가 증가했다.  비슷한 사건이 벨몬떼 메짜뇨Belmonte Mezzagno에서도 보고되었는데, 농민 두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연구진은 1885년과 1900년의 정부와 경찰 보고서를 인용해, 시칠리아 357개 자치체에서확산된 마피아를 지도에 표기했다. 그 결과, 가뭄으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지역과 그에 이어 일어난 파쇼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이 연구는 시칠리아의 도시와 마을에서 마피아의 활동을 측정하기 위하여 0 (낮음)부터 3 (높음)까지의 척도를 활용했는데, 자치제에 파쇼가 존재하면 마피아의 활동이 1.5 포인트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보고서에서는 “1900년 시칠리아 전역에서 마피아의 강도 가운데 37%는 농민 파쇼에 대항하여 배치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몇 달 동안의 소요와 폭력 사태 이후 1894년 새로운 총리는 파쇼가 불법이라 선언하고,  대량 체포와 즉결 처형 같은 가혹한 단속으로 결국 운동을 종결시켰다.  지주들은 마피아를 사병으로 편입시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결과 시칠리아에는 대담하고 막대하게 확대된 범죄의 요소가 남게 되었다.   

연구진은 이로 인하여 시칠리아의 경제와 공공기관의 효율성에 심각하고 장기적인 부정적 결과가 초래되어 지방 정부가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예를 들어, 1885년부터 1900년까지 마피아의 존재가 1에서 2로 증가한 지역에서 1921년 문해력이 약 10% 떨어지고, 1961년에는 고등학교 졸업률이 33% 감소했다. 또한 연구진은 마피아의 부상이 유아사망률의 증가와 상수도 같은 기반시설에 대한 지출의 감소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밝혔다.  저자들은 약한 자치제는 공공재를 제공할 수 없으며, “지방 정부의 역량 발전을 저해하는 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는 여러 범죄 조직의 영향이다. 아마 아무도 시칠리아의 마피아만큼 유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시칠리아의 마피아와 그 미국의 후손은 대부와 좋은 친구들,  소프라노스 같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Acemoglu, De Luca, De Feo 씨가 시사한 바와 같이, 시칠리아의 부유층을 위해 사설 경비력으로 부상하여 약 100년 동안 섬을 파멸로 이끈 이들은 아무 매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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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도가 손막걸리의 홈페이지는 참 깔끔하고 예쁘다.

http://www.boksoon.com

건축을 전공한 맏아들이 양조장 건물을 짓고, 수학을 전공한 둘째아들이 발효를 연구하고 담당한단다.

울산 쪽에 있다는데 언제 한번 가볼까나.

http://koreasool.co.kr/막기자의-양조장-탐방기-복순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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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신라 왕실의 수세식 화장실 유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저는 그 구조와 청결함보다 똥에 남아 있는 흔적들이 더 궁금하네요.

당시 신라의 왕족은 무얼 먹고 살고, 어떤 기생충과 질병이 있었는지 말이어요. 


http://news.joins.com/article/21974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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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동기간으로, 아마도 쌍둥이로, 줄기의 일부( “과학, 기술, 공학, 수학”)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 세계의 가장 빛나는 경이로움에 관해서라면 —주머니 속의 슈퍼컴퓨터가 위성과 통신하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은 긴밀히 결탁해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과학과 기술은 아무 관련이 없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발명품이 과학적 방법과는 무관한 순수한 도구이다. 바퀴와 우물, 크랭크와 방아, 기어와 배의 돛대, 시계와  방향타 및 작물의 돌려짓기 등은 모두 인류와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 생각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물건의 일부는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기 오래전부터 발명되었다. 나는 컴퓨터와 아이폰, 에코,  G.P.S.를 좋아하지만,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고 처음 사용할 때부터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으며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늘 의지하고 있는 지금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도 의지하는 13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안경이 있다. 비누는 페니실린보다 더 많은 죽음을 예방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다.


“정상이 아니다(Against the Grain): 초기 국가의 내밀한 역사”에서 예일대학 정치학 교수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 씨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인 기술에 대하여 그럴듯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그 기술은 호모 사피엔스에 선행하며 우리의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에게 속하니 매우 오래되었다. 그 기술은 불이다.  우린 두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불을 사용했다. 첫 번째로 가장 확실한 건 요리이다. Richard Wrangham 씨가 그의 책 “점화(Catching Fire)”에서 주장했듯이 우리가 요리를 하게 된 능력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게 해주고, 훨씬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근연종의 동물인 침팬지는 우리보다 3배나 큰 결장이 있다. 소화시키기 더 어려운 생식을 할 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리한 음식에서 얻는 여분의 열량은 우리가 소비하는 에너지의 약 1/5을 흡수하는 커다란 두뇌를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대부분의 포유 동물의 두뇌는 이의 1/10에 불과하다. 그 차이가 인간을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만들었다. 

불이 인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현대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경관을 우리의 목적에 맞게 변경하고자 불을 사용했다. 수렵채집인들은 이동하면서 불을 놓아 토지를 정리하고, 빨리 자라면서 먹이를 유인하는 새로운 식물이 자리를 잡도록 했다.  또 그들은 불로 동물들도 몰아냈다. 스콧 씨는 우리의 조상이 이 새로운 도구에 숙달된 시기부터 이러한 기술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는 인간이 지배하는 시기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스콧 씨는 우리가 불이란 기술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고 제시한다. 인류 역사의 95%를 차지하는 수렵채집인의 기간을 보낸 우리 조상의 독창성을 그리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콧 씨는 “인간의 불이 경관 건축의 수단으로 역사적인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결과가 ‘야만인’이라고 알려진 ‘문명화 이전’의 사람들이 수천 년에 걸쳐 퍼뜨리며 성취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불의 중요성을 입증하고자, 그는 아프리카 남부의 특정 동굴에서 발견된 걸 지적한다. 동굴의 가장 초기의, 가장 오래된 지층에는 육식동물의 뼈 전체와 인간을 포함해 그들이 씹어 먹었던 여러 뼛조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불을 발견하고 동굴의 소유권이 이전된 층이 나타난다. 인간의 뼈가 전체가 되고, 육식동물이 뼛조각이 된다. 불은 점심으로 먹느냐 점심거리가 되느냐의 차이를 만든다.


해부학적으로 현대 인류는 대략 20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다. 그 뒤 약 1만2천 년 전, 지구를 지배하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일반적으로 합의된 신석기혁명(Neolithic Revolution)이 일어난다. 스콧 씨의 말을 인용하자면, 소와 돼지 같은 동물을 가축화하고 수렵채집에서 작물의 파종과 재배로 전환하는 농업 혁신의 “꾸러미”를 채용한 것이다. 이러한 작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지금도 인류의 주식이 되는 밀, 보리, 벼, 옥수수 같은 곡식이었다.곡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의 탄생을 이끌었고, 그에 따라 국가가 발전하고 복잡한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정상이 아니다”에서는 널리 퍼진 이 이야기를 확 뒤집고 있다.  스콧 씨의 전공은 초기 인류의 역사가 아니다. 그의 작업은 국가의 형성에 대하여 회의적이며 농민의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관심사가 그리는 궤적은 “농민의 도덕경제(The Moral Economy of the Peasant)”부터 “지배 당하지 않는 기술(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같은 그의 저서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는 정치학자들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가의 중심에 있는 관료들이 자신들이 관리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식의 중앙집권적 계획과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스콧 씨는 국가의 관심사와 주체의 관심사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정반대라고 주장한다. 스탈린의 집단농장 프로젝트는 “국가가 농법을 결정하고, 농촌의 실제 임금을 결정하며, 생산된 어떤 곡물이라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걸 타당화시키고, 정치적으로 농촌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또한 수백만의 농민을 학살했다.

스콧 씨의 새 책은 이러한 생각을 오래된 과거로 확장시키고, 우리의 역사가 일직선으로 진보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존 연구를 끌어온다. 우리의 연대표는 훨씬 더 복잡하며, 표준적인 설명의 인과관계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순박한 상태’의 국가 중의 국가이기에, 오늘날 이라크 지역이기도 한 메소포타미아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순박한 상태”라는 단어는 초기의 정착으로부터 오염되는 일 없이 이러한 국가가 탄생하고, 어떠한 사회 조직이 처음으로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기록을 작성한 최초의 국가였고, 이후의 역사에 이중으로 관련이 있는 근동과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다른 국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최근 고고학 연구에서 들리는 중요한 소식은 “정착문화권” 또는 정착한 공동체에서 사는 일과 농업을 채택한 일 사이의 시간차에 관한 것이다.  예전 연구에서는 농업이 발명되면서 정착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여러 증거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동물과 곡식에 기반한 최초의 농경 경제에서 “두 가지 주요한 요소의 길들임 -가축화와 작물화-” 사이에는 4천 년이란 엄청난 격차가 있다.우리의 조상은 이 새로운 생활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농업의 가능성을 심사숙고하며 살펴보았다. 그들이 살아왔던 생활이 놀랄만큼 풍요로웠기에 오랫동안 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중국 황하의 초기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이름들이 암시하듯 습지대였다. 신석기 시대에 메소포타미아는 바다가 현재의 해안보다 더 내륙 쪽으로 들어오는 삼각주의 습지대였다.

이곳은 인간에게 관대한 경관이었다. 물고기와 그를 먹이로 삼는 동물, 주기적인 홍수 이후에 남는 비옥한 흙, 철새와 강가를 돌아다니는 이동성 먹이 등을 제공했다.  초기의 정착 공동체는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 대지가 다양한 먹을거리의 원천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어떤 해에 어느 먹을거리의 원천이 부족해도 다른 원천이 존재했다. 고고학은 길들임과 농업이란 “신석기 시대의 꾸러미”가 우리의 현대 마을과 도시 및 국가의 조상인 정착 공동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한 공동체는 인류가 집약적 농업을 행하기 이전에 습지대의 풍족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수천 년 동안 이어졌다. 하나만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곡식 작물에 의존하는 게 훨씬 위험했으니,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 수천 년이 걸린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조상은 이러한 복잡한 식량 공급의 그물망에서 한 가지 작물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했을까? 스콧 씨는 기후의 압박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우린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는 명확하다. 첫째는 수천 년 동안 농업 혁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었다는 점이다. 화석의 기록에 의하면 농경민의 생활은 수렵채집인의 그것보다 더 힘들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들의 뼈는 먹을거리의 압박이 있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그들은 더 작고, 자주 아팠으며, 사망률은 더 높았다. 가축과 가까이에서 살아가면서 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질병이 발생하여 인구밀도가 높은 정착 공동체에 혼란이 야기되었다. 스콧 씨는 그걸 마을이 아니라 “후기 신선기 시대의 다종 재정착 야영지(late-Neolithic multispecies resettlement camps)”라고 부른다. 누가 그곳 중 한 곳에 살기를 선택했을까? 제러드 다이아몬드 씨는 신석기 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에 관하여 놀랄만한 사실은, 이 시대의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스콧 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증거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또 다른 결론은 곡식 작물의 경작과 초기 국가의 탄생 사이에는 중요하고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곡식이 인류의 유일한 주식이었던 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형성을 장려한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역사는 카사바 국가와 사고, 얌, 토란, 플랜틴 바나나, 빵나무 열매 또는 고구마 국가를 기록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곡식의 무엇이 특별했을까? 연말정산서를 작성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작물과달리 곡식은 과세하기 쉬웠다. 어떤 작물(감자, 고구마, 카사바)은 땅속에 달려서 세금징수원에게서 숨길 수 있으며, 발견되더라도 하나하나 캐서 보아야 한다. 다른 작물(특히 콩과)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익거나, 덜 익은 것이 익기까지 고정된 궤적을 따르기보다는 성장기를 살펴서 수확량을 산출해야 한다. 즉, 세금징수원이 한 번 와서는 안 되며 적당한 세금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스콧의 말에 의하면, 오직 곡식만이 “볼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과세할 수 있고, 저장할 수 있으며, 운반할 수 있고, ‘배급할 수 있다.’ ” 다른 작물이 이런 장점의 일부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곡식만이 그 전부를 가지고 있기에 곡식이 “주요한 식용 전분이자, 현물 과세의 단위이며, 지배권을 지닌 농경 달력의 기초”가 되었다. 세금징수원이 와서 농지를 평가하고 과세의 수준을 정한 뒤, 다음에 돌아와 제대로 수확량이 나왔는지 확인했다.

스콧 씨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이 농산물에 과세를 하고 잉여를 추출하는 능력으로서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계급제와 분업, 전문직(군인, 사제, 하인, 관료 등) 및 그들을 통할하는 엘리트를 지닌 복잡한 사회를 만들었다. 새로운 국가는 곡식 작물에 관개를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예제를 포함한 강제노동의 형태를 요구했다. 노예를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을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었기에, 국가는 전쟁을 벌이는 새로운 경향을 나타냈다. 메소포타미아의 최초 국가들에서 보이는 인류 역사의 가장 초기의 이미지 중 일부는 목에 쇠고랑을 차고 행진하는 노예들이다. 여기에 초기의 정착 공동체에 빈번했던 전염병과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건강 상태를 더하면, 왜 신석기 혁명이 그 당시 살아오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재앙이었다는 최근의 합의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전쟁, 노예제, 엘리트에 의한 통치—모두가 또 다른 새로운 통제술인 글쓰기를 통해 더 쉬워졌다. 스콧 씨는 “수치 기록을 관리하는 체계적인 기술 없이는 초기 국가를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글쓰기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모든 좋은 것들 —그걸 문화와 오락과 소통과 집단의 기억을 위해 사용하는— 은 현재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그것이 발명된 지 반세기 동안, 글쓰기는 전적으로 부기에 사용되었다.  “사회와 그 인적자원 및 생산물을 통치자와 신전 관리인들이 판독하기 쉽게 만들고, 그로부터 곡식과 노동력을 끌어내기 위한 표기 체계를 만들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스콧 씨는 초기의 점토판은 “목록과 목록, 그리고 또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빈도 순으로 기록의 주제를 보면 “보리(배급과 세금으로), 전쟁 포로, 남성과 여성 노예”였다고 한다.  나치가 지배하는 유럽을 탈출하고자 자살한 독일의 위대한 유대인 문화평론가 Walter Benjamin 씨는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말을 남겼다. 인류가 만든 복잡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에는 충분히 오래 바라보면 억압의 역사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뜻이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의 문제로서, 그것은 옳은 듯하다. 글쓰기의 발명부터 여러분의 독서모임까지 오래되고 충격적인 여행이었다.  

고대의 “암흑시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스콧 씨의 질문은 날카롭다. “누구에게, 어떤 점에서 ‘암흑’이었는가?” 역사의 기록에서는 초기 도시와 국가가 갑자기 파열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스콧 씨는 “국가 이전의 약 5천 년에 걸친 산발적인 정착문화권에서(일본과 우크라이나의 농경 이전 정착문화권까지 포함시킨다면 7천 년), 고고학자들은 정착했다가 버려지고 다시 정착했다가 또 버려진 수백 곳의 위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을 보통 “붕괴”라 일컫지만,  스콧 씨는 그 용어를 면밀히 검토하자고 요구한다. 국가가 붕괴하면 멋진 건축물은 건설이 중단되고, 엘리트가 더 이상 운영하지 않고, 쓰여진 기록은 보관되지 않으며,  대중은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이동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활수준이란 측면에서 붕괴일까? 인간이란 존재는 스콧 씨가 계산한 바에 의하면 약 1600년 무렵까지 주로 국가의 범위를 벗어나 살았다.  인류 정치 생활의 0.2%라 표시되는 그때까지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국가의 특징인 세금징수원을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착문화 외부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인류 역사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토마스 홉스가 말했듯이 만약 그 삶이 “괴롭고 잔인하며 짧다”면, 이는 우리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작성하는 데 중요한 정보의 조각이다.  본질적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를 향한 이야기라 될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 시기에 가장 비참했으며, 우리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모든 것이 나아졌을 것이다. 만약 그 시기에 우리 대부분이 가장 비참하지 않았다면, 문명의 도래는 더욱 모호한 사건이 된다. 회계원부의 한 세로행에서, 우리는 현대 과학과 의학의 영광 및 축적된 예술의 경이로움을 허용하는 복잡한 물질문화의 발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또 다른 세로행에서는 전염병과 전쟁, 노예제, 사회의 계급화 및 무자비하게 전용하는 엘리트에 의한 지배와 사이몬 코웰(Simon Cowell) 같은 좋지 않은 것들을 가져왔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살았던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전통적인 수렵채집의 방식이 여전히 살아 있는 장소의 하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단편적인 모습만 보지 않고 살아 있는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수렵채집인과 매우 유사하지만 다르게 살았던 사람들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과학적인  “통제”를 통하여 환경의 지역적 우연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인류학자 James Suzman 씨가 정확히 그 일을 행했다. 그는 20년 넘게 아프리카 서남부의 칼라하리에 사는 부시맨들을 방문하여 그들 사이에서 살아가며 연구를 수행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저서 “풍요로움 없는 풍부함(Affluence Without Abundance): 부시맨의 사라지고 있는 세계(The Disappearing World of the Bushmen)”에서 자세히 서술한 이야기이다.

부시맨은 오랫동안 인류학자와 과학자 들의 관심대상이었다. 약 15만 년 전, 최초의 해부학적 현대 인류가 출현한 지 5만 년 뒤호모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아프리카 남부에 살고 있었다. 부시맨, 또는 코이산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인간의 가계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the oldest growth on the human family tree. (Suzman 씨는 한때 경멸적으로 사용된 “부시맨”이란 단어는 현재 그들 스스로와 비영리단체에 의해 사용되며, 낭만적인 뜻으로 긍정적 측면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일부의 코이산은 “산San”이란 단어를 쓰는 걸 선호한다고 지적한다.) 유전적 증거에 의하면, 15만 년의 대부분 동안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현대 인류의 가장 큰 개체군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구개음의 혀를 차는 소리를 이용한다. 부드럽게 공기를 흡입하면서 앞니의 뒤쪽에 혀를 대고, 입천장에 혀를 밀면서 찬 다음 갑자기 아래쪽으로 보내는 식이다.  이는 혀를 차는 소리의 언어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언어 능력이라는 놀라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Suzman 씨가 처음 부시맨을 방문한 건 1992년이다. 2년 동안 박사 과정의 연구로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가 가장 잘 아는 무리는 나미비아와 보츠와나 사이의 국경지대에 거주하며 8천에서 1만 명이 살고 있는  Ju/’hoansi이다.  (표음 기호 /’은 tsk를 나타냄)  Ju/’hoansi는 아프리카 남부에 사는 전체 부시맨 인구의 약 10%를 차지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토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여 여전히 수렵채집을 실천할 능력이 있는 북부의 무리와 자신들의 땅을 빼앗겨 현대의 생활방식으로 재정착한 남부의 무리로 나뉜다. 

주목할 만한 범위에서, Suzman 씨의 부시맨 연구는 “정상이 아니다(Against the Grain)”의 생각을 지지한다.  근대성과 만난 부시맨들은 비참해졌다. Suzman 씨는 비참한 재정착 야영지에서 쫓겨나고 소외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Ju/’hoansi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책에서는 글쓰기라 불리는 사악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고 있다. Suzman 씨의 부시맨 멘토인  !A/ae 씨는 “어떤 새로운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이 농장의 Ju/’hoansi  사이에서 수십 년에 걸쳐 위대하고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추정되는 고용 원부와 문서에 기입되었다고 언급했다. 이 원부가 지닌 비밀은 급여를 주거나 보류하고, 배급량을 지급하며, 어떤 특정 농장에 머물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결정할 권한을 지녔다.

수렵채집이 좋은 생활방식임이 밝혀졌다. 1966년의 연구에 의하면, Ju/’hoansi가 충분한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일주일에 평균 17시간만 소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19시간은 가정의 활동과 잡일을 하며 보냈다. 수렵채집인의 평균 칼로리 섭취량은 하루에 2300으로, 권장량에 가깝다. 이 수치가 처음 확립된 당시, 미국에서는 일주일에 40시간의 노동과 36시간의 가사노동에 종사했다.  Ju/’hoansi 는 잉여를 축적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한 먹을거리를 모두 취하면 그만둔다. 그들은  그들의 환경이 자신들의 필요를 제공할 것이란, Suzman 씨가 “단호한 신뢰라 부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렵채집을 하는 Ju/’hoansi가 먹을거리 공급의 그물망으로 활용하는 것은 스콧 씨가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다양한 동물성 단백질과 함께 복잡한 먹을거리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거기에는  계절별 주기와 생태학적 적소, 기상 변화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다른 호저, 쿠두, 영양, 코끼리 및 125종의 식용 식물이 포함된다. 수렵채집인은 먹을거리의 지식에 관한 기록되지 않은 달력뿐만 아니라, 스콧 씨가 “달력의 도서관”이라 부르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가 제안하듯이,수렵과 채집과 길들여진 농업 사이의 복잡성 감소는 길들여진 농업과 생산라인의 판에 박힌 조립 작업 사이의 감소만큼 크다. 

여기의 뉴스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가 너무 무섭고, 우리의 현대적이고 문명화된 생활이 상대적으로 훨씬 위대하다고 믿음으로써 우쭐대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고 있으며, 수렵채집을 하던 조상에 관하여 해명하는 지식이 우리에게 유용한지 궁금해 할 수 있다. Suzman 씨도 똑같은 걸 궁금해 한다. 그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유명한 1930년의 에세이 “우리 후대의 경제적 가능성(The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에 대해 논의한다. 케인스는 세계가 계속해서 더욱 부유해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높은 생활수준을 즐기면서 노동은더 적게 할 것이라 추측했다. 그는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도록“경제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부의 축적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때, 도덕률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년 동안 우리를 괴롭힌 많은 사이비 도덕률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가장 높은 미덕의 지위에 인간의 특성 가운데 가장 싫은 어떤 것을 높이게 된다.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가치로 화폐의 동기를 감히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물로 돈을 사랑하는 것 -생활의 즐거움과 현실에 대한 수단으로 돈을 사랑하는 것과 구별되는- 은 반쯤은 범죄이며 반쯤은 병에 걸린 다소 구역질나는 병적 상태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실제로 더 부유해졌지만, 도덕과 가치관에서 그러한 변화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것의 획득을 둘러싼 돈과 가치의 체계는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다. 탐욕이 여전히 정당하다. 

그날을 위해 살며 잉여를 축적하지 않는 수렵채집인에 대한 연구는 케인스의 제안처럼, 인간성이 더 많이 또는 더 조금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하지 않기로 결정할 뿐이다. Suzman 씨는 잃어버린, 또는 그만둔 능력에 대한 열쇠는 수렵채집인의 맹렬한 평등주의에 있다고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냥꾼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고기와 함께 돌아오는 것이다. 수익이“공유에 대한 엄격한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채집된 식물과는 달리 사냥한 고기는 의례에 따라 매우 신중하게 분배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무례하게 굴면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의식을“고기를 모욕하기”라 부르며, 사냥꾼이 거만하게 굴고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한 부시맨이 인류학자 Richard B. Lee 씨에게“젋은이가 고기를 많이 죽이면, 그는 자신을 우두머리나 큰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자기의 하인이나 열등한 사람으로 여긴다. . . . 우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모욕은 “그의 마음을 식히고 그를 부드럽게 만들기”위해 설계되었다.  Suzman 씨는 이러한 수렵채집인에 대하여“이익이 되는 교환과 계급제, 뚜렷한 물질적 불평등이 용인되지 않는 그곳은 치열한 평등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개인의 이기심과 경계심의 총합”이라고 적는다. 


Suzman 씨는 이러한 평등주의에 대한 충동이 부유함과 과잉과 경쟁적인 획득은 없지만 자신의 조건에 맞게 풍족한 삶을 사는 수렵채집인의 능력 가운데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비밀 재료는 부러워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충동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듯이, “만약 이런 종류의 평등주의가 노동의 세계 이후를 포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면, 나는 그것이 깨지기 매우 어려운 너트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일족에게서 배울 점이 많지만, 우리가 그 지식을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부러움을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활용하면 불만큼 유용한 기술이 될 것이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7/09/18/the-case-against-civilization/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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