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서구 농업, 외양간두엄에서 화학비료로
유럽의 평지림과 그 이용
유럽 대륙의 남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알프스 산맥 북쪽에는 구조構造 평야의 유럽 평원이 펼쳐져 있고, 그곳에는 일찍이 평지림이 광범위하게 보였다. 유럽은 5세기 무렵까지 지중해를 따라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푸른 숲으로 덮여 있었다. 너도밤나무나 졸참나무 종류로 이루어진 유럽의 평지림은 일본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4-1의 사진처럼 떨기나무층이 별로 발달하지 않아서 숲 속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4-1 유럽의 너도밤나무숲(위)와 졸참나무숲(아래)의 평지림
지중해 연안에서는 겨울은 온난하고 다소 강우가 내리지만, 여름은 고온이고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이기에 올리브, 코르크참나무, 월계수, 밤 등 여름의 고온건조에 견딜 수 있는 상록경엽수가 주체이고, 키가 작은 떨기나무로 이루어진 식생이었다. 선사 시대부터 양이나 염소의 방목, 그리고 포도, 올리브, 코르크참나무 등 수목 작물의 생산, 조선, 철의 정련에 필요한 제탄을 위한 수목의 벌채 등에 의해 숲이 축소되어 갔다. 또한 방목하는 염소가 어린 나무의 부드러운 싹이나 잎을 먹어치워 버렸기에 숲은 재생하는 일이 어려워져 바위 표면이 노출되는 떨기나무숲이 산재해 있었다.
한편, 유럽 평원의 평지림은 개암, 졸참나무류, 느릅나무, 너도밤나무 등의 낙엽광엽수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졸참나무류가 가장 많았다. 이건 빙하 시대에 대륙 빙하가 북부의 평원까지 덮어, 온난한 기후에 적응한 많은 식물은 사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빙하가 사라진 뒤 온난한 시대가 되어서도, 남쪽에 생존한 이러한 식물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한랭한 북쪽으로 분포역을 다시 확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도밤나무나 졸참나무류의 낙엽광엽수 숲 지대부터 복쪽으로, 또한 동쪽의 내륙부로 나아감에 따라 가문비나무, 소나무 등의 침엽수가 낙엽수와 뒤섞인 숲을 만들고, 결국은 단순한 숲을 이루어 간다. 타이가라고 부르는 상록침엽수 숲 지대는 한랭하고 포드졸이라는 척박한 회색의 산성 토양을 볼 수 있다. 포드졸이란 것은 한대 침엽수숲 지대의 아래에서 볼 수 있는 흙으로, 회백색의 모래질 토양 위에 침엽수의 낙엽 퇴적 부식층이 두텁게 보이며, 회백층 아래에는 적갈색의 녹슨 색과 어두운 색이 뒤섞인 점토분이 많은 층이 있어 매우 대비가 뚜렷한 단면을 가지고 있다. 포드졸이란 러시아 농민의 속어에서 온 이름인 듯하여, '포드'란 '아래에'라는 의미이고 '졸'이란 재를 나타내는 '조라'에서 온 것으로, 아래에 회백색의 토층이 있다는 의미이다. 소나무나 가문비나무 등 침엽수의 뿌리나 매생물이 방출하는 유기산에 의해 점토에 흡찬된 알루미늄이나 철분이 녹아서 규산만 남은 회백색의 산성 모래질 토양이다. 나아가 그 아래층은 용탈된 철이나 알루미늄, 그에 부식이 집적되어 적갈색이 되어 있다. 따라서 포드졸은 강한 산성 위에 양분이 용탈되어 버리기 때문에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흙으로, 대부분은 임업이나 순록의 유목에 이용되며, 오늘날 북구의 핀란드나 스웨덴은 유럽에서 생산되는 목재의 대부분을 산출하고 있다. 평지림의 지역에서는 너도밤나무나 졸참나무류의 낙엽광엽수 숲 바닥은 4-1의 사진처럼 두텁게 퇴적된 낙엽에 의해 부식토가 형성되어 갈색 숲 토양이 발달해 있었다. 이 토양은 부식이 많기에 농경에는 적합하여, 서기 500년 이후에 이르러 한창 개간이 진행되어, 유입 인구나 자연 증가에 의해 인구가 늘어 평지림은 감소해 갔다. 그 최성기는 1100년부터 1300년 무렵으로, 유럽 중세는 대개간의 시대에 들어가 그것이 17세기까지 이어졌다. 14세기가 되면, 유럽은 페스트의 대유행 등이 있어 일시 인구가 감소해 숲이 확대되는 시기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회복과 함께 다시 평지림의 개간이 진전되어 갔다. 유럽의 이 확대된 평지림은 연료용 장작, 주택이나 헛간의 건설용 목재, 감미료가 되는 벌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활물질의 공급원이었다. 또한 사슴이나 멧돼지나 여우나 토끼 등의 수렵, 꿩이나 비둘기나 개똥지빠귀 등의 조렵만이 아니라, 중세의 유럽에서는 농민이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숲에서 돼지를 방목해 졸참나무류의 도토리를 먹여 살을 찌웠다. 어느 지방에서는 오랫동안 숲의 넓이를 표시하는 데에 그곳에서 사육할 수 있는 돼지의 마리수로 나타냈다고 한다. 게르만 민족인 랑고바르드족 등은 그 부족법에서 돼지의 먹이가 되는 도토리 같은 중요한 수목을 보호해서 허가 없이 벌채하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야마모토 미츠루
山本充의 『숲을 알고 숲에서 배우다』에 수록된 "유럽의 숲과 인간들의 생활 -숲의 은혜"(2006)에 의하면, 숲의 크기는 종종 풍년에 사육할 수 있는 돼지의 수로 표시되어 1434년에 나온 슈파이어 주교좌의 "나무 열매 사료 조례"에 의하면 1800만 평의 숲에서 돼지 2만 마리를 사육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서는 입회 검사가 행해져, 방목하는 돼지의 수가 결정되어 있었다. 나아가 숲은 마을을 다른 마을로부터 가로막는 방벽의 역할도 담당했고, 교회의 교구 범위도 나타내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숲은 예로부터 성스러운 장소로 아질(성역)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숲으로 도망쳐 들어간 사람을 추적해 붙잡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숲은 유용함과 동시에 도적이나 무법자, 늑대나 마녀나 온갖 혼령이 마구 날뛰는 세계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4-2 유럽의 농촌에서는 지금도 마당에서 돼지가 자급하는 식육용으로 해체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일본에 비하면, 유럽은 한랭하기에 예전에는 전분질인 곡류나 덩이류의 재배가 어려워서 젖이나 고기를 주로 하는 축산물을 식재료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돼지는 성장이 빠르기에 온통 식육용으로 사육되었다. 그 때문에 감자가 유럽에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은 주로 돼지의 먹이용이었다. 감자가 돼지의 먹이가 됨으로써 도토리를 생산하는 광엽수인 졸참나무숲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나무를 베어 넘겨 평지림을 개척해 경작지로 만들고, 졸참나무숲 대신에 인간이 목재 등으로 이용하기 쉽고 생장이 빠른 침엽수의 숲을 조림했다. 현재, 유럽에서 식용으로 가장 많이 먹고 있는 덩이류인 감자도 16세기 말에 스페인 사람이 잉카 원정을 할 때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지고 돌아왔던 것인데, 앞에 기술했듯이 당초는 식재료가 아니었다. 또한 프랑스의 궁전 등에서는 관상용 꽃으로 재배되었다고 한다. 그 뒤, 기근에 시달리는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2세(1712~1768년)가 잠가는 한랭하고 척박한 토지에서도 잘 자라기에 흉작일 때 굶주려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황 작물로 재배를 장려했다. 따라서 유럽 전토에서 감자 재배가 퍼져 나아간 것은 그 뒤인 18세기 후반 이후에 이르러서이다. 돼지고기나 그것으로 만드는 햄이나 베이컨이 감자와 최고의 조합을 이루어, 식량으로 감자의 소비가 높아졌다.
부식토가 형성되어 있던 갈색 숲 토양이더라도, 개간 이후 경종 농업을 계속해 나아가면 지력이 서서히 떨어지게 된다.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작지를 쉬게 해 영양분을 축적하는 장기의 휴한을 행하든지, 거름을 주든지 해야 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휴한을 행하고 가축의 분뇨를 활용해 지력 유지를 도모했다. 유럽에서는 광대한 낙엽광엽수 숲의 평지림이 존재하는데, 왜 일본처럼 경작지의 비료 공급원으로 풀덮개 등의 풋거름이나 낙엽 퇴비를 이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삼포식 농업에 의한 지력 유지
일본은 고온다우 때문에 경작지에 투입된 풀덮개나 그외의 풋거름이나, 낙엽 퇴비 등 식물의 유체인 유기물의 분해는 빠르지만, 일본에 비하면 냉량하고 비가 적은 북서 유럽에서는 흙 속의 식물분의 분해 속도가 느린 것과 저온이기에 곡물의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경종 작물의 생산만으로 식량을 위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이 중세가 되어 고안한 것이 작물 재배와 가축을 결합시킨 유축 농업인 삼포식 농업이었다. 그건 3가지 밭의 토지 이용을 해마다 돌려짓기해 가는 방식으로, 마을의 모든 경작지(밭)을 겨울 곡물인 밀과 호밀, 여름 곡물인 보리와 귀리를 재배하고 나머지를 농지를 휴한시키기 위한 휴한지의 3개로 구분하고, 휴한지에서 양이나 염소의 작은 가축을 방목했다. 맥류의 수확은 일본처럼 지면 쪽에서 베는 것이 아니라 이삭 부분만을 베는 이삭 베기이고, 남은 밀짚 등을 가축의 먹이로 삼았다. 특히 양은 사육 마리수도 많았기 때문에, 그 분뇨는 소중한 비료가 되었다. 양은 주로 비료용이나 양털용으로 키우고, 양고기가 식용이 된 것은 고기의 품질 개량이 진전된 18세기가 되고 나서였다. 가축은 봄부터 가을에 걸쳐 낮 동안은 휴한지나 곡물 그루터기의 휴한지에 가축을 방목하고, 가축이 배설한 분뇨는 양분으로 흙에 축적되었다. 야간이나 겨울철의 비방목 시기에 축사에서 배설되는 분뇨는 깔깃인 짚과 함께 외양간두엄으로 이용되었다. 중세에 일어난 철제 농기구의 발달과 삼포식 농법의 보급에 의해, 지금까지에 비해 뚜렷하게 생산력이 올라갔기에 이 변혁을 '중세의 농업 혁명'이라 부르는 연구자도 있을 정도이다. 지중해 연안 지방은 관개에 이용할 만한 큰 강이 없었기에, 물은 비가 내릴 때의 빗물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농경은 더욱 불안정했다.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겨울에 비가 내리고 여름에 강한 건기가 찾아오는 '지중해식 기후'라서 당시 겨울 농사밖에 할 수 없었다. 봄에 심는 보리의 파종기는 건조함이 심하여 발아해 자라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가을에 밀을 파종하고, 이듬해 여름의 초에 이삭 베기에 의해 밀의 수확을 한다. 그리고 다음 1년은 휴한을 한다는 '이포식 농업'이었다. 이 휴한은 여름의 건조함에 의해 토양 속의 수분이 철저히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휴한 기간의 흙 속으로 수분을 가둬두고 있었다. 흙으로부터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휴한하면서 표면만을 2~3회 얕이갈이해 토양의 모세관 출구를 파괴하여 모세관 현상에 의해 땅속 깊이에서 상승해 오는 물의 증발을 막았다. 이것이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 여름에 비를 볼 수 있는 기후가 되어 봄 파종 곡물을 농사짓는 일도 곤란하지 않다. 그래서 가을 파종 밀과 봄 파종 보리르 ㄹ조합시킨 삼포식 농업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북쪽이 되면 한랭하기에 밀이나 보리의 생육이 어려운 지방이 많아져, 밀 대신 호밀을, 보리 대신 귀리를 재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중해 지방보다 강우가 많은 알프스 산맥 이북의 서유럽에서도 여름 휴한 기간 동안 땅속에 수분이 저장된다. 동시에 잡초도 자라기 때문에 휴한하고, 자라난 잡초는 종자가 맺히기 전에 갈아엎어 버리면 잡초의 양은 대폭 감소한다. 근세가 되고나서 소나 말 같은 큰 가축이 사육되고, 낮에는 방목을 하지만 밤에는 주로 축사에 들여 키우는 일이 많아짐과 함께, 외양간두엄의 생산량이 증가했다. 나아가 겨울도 축사 사육이 가능해짐에 따라 외양간두엄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나아갔다. 소는 거세시키지 않은 숫소를 제외하고는 성질은 얌전하고 동작도 느릿해서 다루기 쉬우며, 힘도 약하기에 건조하고 단단해진 흙을 가는 쟁기질에 사용되었다. 또한, 소고기나 젖의 가공품은 소중한 식량이 되었다. 가축의 먹이를 얻고, 가축의 똥으로 외양간두엄을 만들어 지력을 증대시켜 작물을 재배한다는 방법이었다. 쟁기를 끌게 하는 가축으로는 말 쪽이 소보다 뛰어나지만, 풀을 소화하는 효소를 위 속에 가지고 있는 반추 동물인 소와 달라 사료로 곡물이 필요하기에 소보다 사육은 꽤나 수고가 들었다. 그러나 귀리의 재배 보급에 따라 농경용 말로 말의 사용도 일반적이 되었다.
삼포식 농업은 파종 시기가 가을과 봄 2회로 나뉘어지기에, 농작업의 균분화와 흉작의 위험 분산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이처럼 지력 유지를 위하여 일정 기간 작물을 농사짓지 않음으로써 공동 방목하는 휴한지를 편입하기에 넓은 면적의 농지가 필요해졌는데, 광대한 농지를 창설하는 데에는 평지림의 개간 이외에는 방책이 없었다. 각 마을은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향상됨에 따라 경작지와 채초지(meadow)나 방목지(pasture)의 확대를 도모했기에, 유럽의 평지림은 점점 감소해 나아갔다. 겨울의 태반, 가축은 축사에 들여 건초를 주었다. 그 이외의 계절에는 휴한지나 방목지나, 마을 주변부에 잔존했던 숲에 방목되었다. 삼포식 농업의 또 하나의 중요한 농작업은 가축을 위한 겨울철 사료용으로 채초지에서 건초용 풀베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철의 사료는 불충분했기 때문에, 늦가을에 되면 가축을 도살해야 했다.

4-3 숲이 개척되어 목장·목초지로 변화된 영국 북동부의 경관
겨울철에 축사에서 사육하는 축사 사육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게 된 것은 16세기 벨기에 서부부터 네덜란드, 프랑스에 이르는 플랑드르 지방이었다. 이 지방의 농민이 근면함과 함께 겨울 사료로 순무를 활용하게 된 것도 컸다. 사료용 순무는 겨울철 사료로는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고, 개량된 목초도 건초로 겨울 동안 사용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겨울철 사료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사일로를 만드는 사일리지인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활용되게 된 것은 핀란드의 농예화학자 아르투리 비르타렌Artturi Ilmari Virtanen(1895~1973)이 1차 세계대전 중에 건초에 산을 첨가해 만든 사일리지가 발명되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이 공적에 의해 비르타넨은 1945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으니, 한랭한 유럽의 겨울철 사료로 사일리지가 얼마나 중요한 발명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1980년대가 되면 트랙터의 후부에 장치한 부속장치로 베어낸 목초를 희거나 검은 스트레치 필름으로 감싼 롤베일 사일리지를 만들었다. 4-4의 사진처럼 만들어진 큰 롤은 목초지에 두고, 필요한 때에 축사로 운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더욱 손쉽게 사일리지를 만들게 되고, 여러 해 낙농이나 목우 지역의 상징이었던 첨탑의 타워 사일로가 적어졌다.

4-4 목초지에 둔 사일리지용 롤베일
중세까지는 이삭 베기였던 곡물은 지면에서 베어내게 되어 축사로 운반해 깔깃으로 활용하고, 분뇨와 섞인 것은 외양간두엄이 되었다. 그 뒤, 휴한지에 사료용 작물을 재배하게 되면, 휴한을 그만두고 경작지 전체를 이용하는 돌려짓기 방식에 도달하게 된다. 18세기 후반에는 사료 가치가 높은 사탕무나 순무 등의 뿌리채소류와 한해살이 콩과인 토끼풀을 돌려짓기 안에 편입해 휴한을 그만두고, 경작지 전체를 이용하는 돌려짓기식이라 부르는 새로운 농법이 선진적인 부농층에 의해 영국 동남부의 노퍽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새로운 품종인 토끼풀이 보급된 결과, 목장과 채초지가 개량되어 순무와 사탕무가 더해짐으로써 가축의 사료가 증가했다. 이에 의해 겨울철 사료 부족으로부터 해방되고, 다수의 가축을 집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외양간두엄의 공급이 윤택해짐과 콩과인 토끼풀의 재배는 뿌리혹박테리아에 의한 질소의 고정에 의해 지력을 높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겨울철 사료의 확보가 가능해짐에 따라 축사에서 월동하는 가축은 많아지고, 외양간두엄의 생산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서구에서 비료의 주역은 외양간두엄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이외에 비료로 중요한 것으로 '떼 비료'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건 방목지의 흙은 가축의 분뇨에 의해 비옥해지기에, 이 표면의 흙을 풀과 함께 떼어내서 밭의 비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건 무거웠고 멀리에서 운반해 와야 했기에, 이걸 시비하기 위해서는 운반하기 위한 말이 중요해졌다. 떼에 의한 시비법에서 중요한 점은 떼를 떼어낸 뒤 풀의 회복에 걸리는 시간이었다. 좋은 떼일수록 회복이 빨랐는데, 보통은 7~10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외에 고사한 수생식물이나 이끼류가 한랭하기에 썩지 않고 퇴적되어 생긴 이탄이나 강에서 준설한 진흙 등도 비료로 이용되었다.
돌려짓기식 농업과 외양간두엄 이용의 증대
중세적인 삼포식 농업으로부터 휴한을 폐지한 근대적인 돌려짓기식 농업은 생산력이 높은 농법을 실현해 나아갔다.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돌려짓기와 농지의 '인클로저'에 의한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그에 수반한 농촌 사회의 구조 변화를 가리켜 '농업 혁명'이라 부른다. 이 신농법을 채용하는 데에 종래의 공동 방목의 관습은 큰 장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모처럼 사료작물을 재배하더라도 그곳에 남의 가축이 침입해 버려서는 의마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휴한의 폐지 → 사료작물의 수확량 증가 → 농장의 가축 증가 → 외양간두엄의 증가 → 농장의 지력 향상 → 사료작물의 수확량 증가라고 하는 것처럼 나선형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부농층은 자신이 경영하는 농지를 생울타리나 돌담으로 에워싸 버리는 '인클로저'를 행하게 되었다. 이건 오래 계속되어 왔던 농촌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함과 함께 농촌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인구는 때마침 발흥한 산업혁명에 의해 도시의 공장 노동자로 흡수되어 갔다. 산업혁명에 의해 시간을 사람이 관리하고, 공장에서 노동자를 모아 효율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시대로 변화해 갔다. 바야흐로 '농업 혁명'과 '산업혁명'의 수행이 연동해 일어났던 시대였다. 각 마을은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향상함에 따라 끝없는 경작지와 방목지의 확대를 했기에 유럽의 평지림은 급속하게 감소해 갔다. 중세의 대개간 시기를 거쳐 각 마을은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향상함에 따라 경작지와 방목지의 확대를 계속해, 평지림을 베어 개간해 왔다. 서기 900년에는 서유럽의 평원 대부분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중세의 대개간 시기를 거쳐 1000년의 사이에 저지의 숲 대부분은 베어 사라져 갔다. 그리고 4-5의 그림처럼 1900년의 상태처럼 목장과 목초지로 변화해 갔다. 숲이 가장 빨리 소실된 것은 이 그림에는 나오지 않은 섬나라 영국이었다. 그때까지 에너지원이었던 목탄이 평지림과 함께 모습을 감춘 영국에서는 석탄을 활용하게 되고, 이윽고 동력원은 석탄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혁명'의 시대로 변화해 갔다. 노퍽의 돌려짓기식 농법이 유럽의 경종 농업과 목축이 결합된 혼합 농업의 기초가 되고, 그와 함께 이윽고 북유럽의 낙농, 육우, 목양, 양돈 등의 기업적 목축업 지역으로 전개해 갔다.

4-5 유럽 중앙부의 평지림 감소. 시카고 대학, 1956에 의함. A. Goudie(1990)의 그림에서 고쳐 실음
즉, 일본에서 밭의 지력 유지 방식이 가축보다 숲 자원에 의한 풀덮개 등의 풋거름이나 낙엽 퇴비에 강하게 의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럽 농촌의 지력 유지 방식은 가축의 분뇨와 그로부터 만들어진 외양간두엄에 강하게 의존해 일본과 달리 숲과 적대적인 농업 사회를 만들어냈다.
알브레히트 테어Albrecht Daniel Thaer의 유기영양설
시장에 내놓는 농작물이 차츰 증가해 가자, 외양간두엄의 생산과 돌려짓기만으로는 농작물에게 빼앗긴 흙의 양분을 보급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근대 과학의 지식이 꽤나 집적되었던 19세기가 되면, 식물의 생장과 지력의 문제에 관하여 2가지 설이 등장했다. 그것이 테어의 '유기(부식)영양설'과 리비히의 '무기(광물)영양설'이었다.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부패는 식물의 어머니'라는 속담이 있었다는데, 이것은 부엌의 쓰레기, 인축의 분뇨, 동물의 유체, 혈액 또는 퇴구비 같은 것을 흙에 넣으면 작물이 잘 자란다는 것이 매우 옛날부터 농민이나 농업경영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이론화한 것이 기원전 350년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식물은 양분을 부식 형태의 기질로부터 얻는다. 뿌리에 의해 흙 속으로부터 흡수한다. 식물은 죽으면 부식이 되고 부식은 비료가 된다" 등이라 생각되었다. 영국의 농학자 J. 툴Tull(1674~1741)은 1731년에 식물은 동물이 먹이를 먹듯이 뿌리에서 물만이 아니라 흙의 입자도 직접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해 '토양영양설'이란 사고방식을 제창한다. 1761년에는 스웨덴의 화학자 발레리우스Wallerius가 흙 속의 검은 물질인 부식이야말로 식물의 양분이라는 부식영양설을 제창했다. 이처럼 당시의 철학자나 농학자들은 직감적으로 토양 유기물인 부식이 식물을 기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식은 불용성으로, 식물의 뿌리가 직접 빨아올려 영양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가 되어서였다. 광합성 작용에 대하여 몰랐던 무렵에, 식물체의 유기물을 만드는 것은 뿌리로부터 흡수되는 액상의 유기물(액상 부식)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건 무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식물의 양분에 관한 사고방식에 새로운 설이 더해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서고 나서의 일이었다. 스위스의 식물생리학자 니콜라스 테오도르 드 소쉬르Nicolas-Théodore de Saussure(1767~1845)는 1804년에 식물이 태양광 아래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는 광합성이란 작용을 정량적 연구에 의해 증명했다.
생명체가 만들어낸 목재나 채소나, 피부나 명주실 등의 물질은 일반적으로 유기화합물 또는 단순히 유기물이라 부른다. 과거 생명이 만들어낸 화합물은 암석이나 금속 등의 무기화합물과는 전혀 달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기화합물도 과학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것이 나중이 되어서 판명되어, 이 구별은 부수어져 버렸다. 현재는 유기물이란 용어는 '탄소를 기본으로 한 화합물'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유기영양설'을 바탕으로, 외양간두엄을 토지로 환원하는 걸 기본으로 해 돌려짓기를 행하는 농업 경영체계를 구조화하고 개선해 나아갔던 것이 독일인인 알브레히트 다니엘 테어(1752~1828)이다. 테어가 활약했던 것은 어떠한 시대였을까? 그가 태어나고 나서 25년이 지난 1770년대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앞에 기술했듯이 노퍽식 농업의 발전에 의해, 비농업종사자인 도시 주민의 증가를 감당하는 데 충분한 식재료 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산업혁명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산업혁명을 달성한 영국에서는 공업이 차츰 공장제 생산이 되어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인구는 폭발하며, 국민의 부가 증대하는 기반이 쌓여 간 시대가 되었다. 동시에 중소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주나 부농이 점점 커지는 구도도 생겼다. 그러나 앞서가는 영국에 비교하면, 독일은 1800년대에 들어서도 40여 연방국가로 나뉘어 서로 관셰 장벽을 설치해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안에서 테어는 독일 농업의 실태를 조사하고, 독일 농업의 향해야 할 방향이나 근대 농업의 방향을 모색했다고 한다. 1798녀부터 1804년까지 6년 동안 테어는 『영국 농업 입문』 전3권을 출판하고, 이 책에서 선진적으로 전개되는 영국 노퍽 농법을 소개하며 영국 농업을 찬미했다. 그는 원래 의사였는데, 스스로 농업에 뜻을 두고 농장을 경영하며 농업 학술원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농학 연구와 교육을 실천했다. 나아가 1809년부터 1812년에 걸쳐서 『합리적 농업의 원리』 전4권을 간행하고, 이에 따라 테어는 근대 농학에서 최초의 체계자라는 입지를 확립했다. 이 책의 제1권은 기초적 원리·농업 경제(Ⅰ), 제2권에서는 농업 경제(Ⅱ)·농학·비료, 제3권은 토양의 기계적 개량, 제4권은 작물·축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타에르는 부식이야말로 작물의 양분이라고 강조하고, 그에 기반한 시비 체계, 작부 체계를 제창했기에 일반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쉬웠고, 테어가 토양 비옥도를 농업 경영에서 물질 순환과의 관련에 대해 명확하게 개념화한 의의가 크다고 평가받고 있다. 테어는 지력 유지를 생산 체계의 구축과 관리 기술이란 구조의 기둥으로 삼았다. 농업 생산 관리의 기술적 측면과 경영 경제적인 측면을 일체의 것으로 연구하려 한 점에서 테어는 '근대 농학의 아버지'라고도 이야기된다. 당시 독일에서는 겨울에 충분한 사료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테어는 겨울에도 사료를 확보할 수 있는 작부 체계를 고안하고, 아울러 축사를 세워 가축을 그 안에서 사육하는 것을 권했다. 이 방법에 의하면 다수확을 얻을 수 있기에, 이 성공에 의해 농업계에서 테어의 지위는 인정되었고 유기영양설은 정당한 것으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때까지는 수확량이 낮은 데다 불안정했기에, 유럽에서는 끊이지 않고 농사 실패나 흉작에 의한 대규모 빈곤이나 기근을 겪었다. 그때마다 농민들은 새로운 토지를 찾아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세까지 하던 삼포식 농법에서는 광대한 공동 방목지, 채초지가 지력 회복의 원천이 되었는데, 테어가 제창한 것은 경작지 안에 토키풀과 순무의 재배를 도입해 사료를 자급함으로써 가축을 늘리고, 외양간두엄의 생산을 증대시켜 그에 의해 지력을 유지하며, 나아가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삼포식, 다포식, 돌려짓기식 농법의 비교를 하면서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은 축사 사육 방식과 결합할 때만 일어나며, 축사 사육식 경영의 이점은 농업에 필수인 농지에 대하여 최고의 발효 상태인 외양간두엄을 필요한 때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각종 농법에서 나오는 지력 증감의 계산 예를 제시하고, 외양간두엄의 공급이 지력 회복에 큰 기여를 한다는 '지력 균형론'을 전개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흙에서 빼앗은 영양을 퇴구비로 흙에 돌려준다"라는 당연한 듯한 사고방식인 지력 균형론에 입각해, 경영 전체로부터 최고의 순수익을 지속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가장 합리적인 농업 경영을 해야 한다는 테어의 이론은 급속히 받아들여졌다. 삼포식 농법이 행해졌던 시대에는 휴한을 하는 해는 곡물의 수확을 희생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년 경작지에 부과되는 세금이나 지대도 영주에게 납부해야 했다. 삼포식 농법으로부터 다양한 작물 선택의 자유를 가진 돌려짓기식 농법으로 전환한 것은 농민이 봉건적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기도 하고,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수반하면서 보급되어 나아갔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쳐서 농업의 신진지인 플랑드르 지방이나 영국 동부의 노퍽 지방에서는 외양간두엄의 사용은 많았지만, 독일에서는 축사 사육은 아직 적어 외양간두엄의 자급은 여전히 곤란했다. 삼포식은 휴한-밀-보리와 3년에 한 바퀴 도는 작부 방식으로 휴한함으로써 밭의 지력 회복을 도모했다. 그에 대해 돌려짓기식은 사료 순무-보리-토끼풀-밀의 작부 순서로 4년 돌려짓기하는 방법이다. 휴한을 하는 대신에 토끼풀에 의해 지력 유지를 도모하고, 보리와 밀의 생산성, 안정성, 지속성을 도모하는 농법이었다. 테어는 '유기영양설'을 제창하고, 외양간두엄을 토지로 환원하는 걸 기본으로 농업 경영 체계를 구조화하고 개선해 가려고 했다. 이 방법은 종래의 방법에 비해 토지의 이용률을 높이고, 또 수확량을 뚜렷하게 증대시켰기에, 당시 농업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러나 시장에 내놓는 농산물이 증가함과 함께, 퇴구비의 생산과 돌려짓기에 의한 돌려짓기식 농업만으로는 흙에서 빼앗은 양분을 보급하는 일은 차츰 어려워졌다. 테어에게 사사한 농업 입지론인 『고립국孤立国』을 지은 경제학자 튀넨Thünen(1783~1850)조차 테어가 모든 장소에서 돌려짓기식 농업을 찬미하는 것에는 손을 들고 비판적이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튀넨은 농업 입지론을 도입해 1826년에 지은 『고립국』에서 도시와의 거리에 따라 자유식, 임업, 돌려짓기식, 곡초식, 삼포식, 목축 같은 농업 경영 방식이 순차적으로 입지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여기의 자유식이 근교 농업의 원형이라고 해도 좋지만, 도시로부터 유기질 비료를 입수할 수 있기에 지력 유지를 위한 돌려짓기나 가축의 사육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또한 농산물의 운반도 쉬우면서 비용이 거의 들지 않기에 돌려짓기를 할 필요없이 작물의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였다.
리비히의 무기영양설
한편, 독일인 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1803~1873)는 '무기영양설'을 세웠다. 리비히 학설의 모든 주장은 온갖 식물의 영양 수단은 무기물질이라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는 이걸 바탕으로 식물 영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농업 경영에서 일어나는 문제에도 연구의 손을 뻗쳤다. 리비히는 소년 시대인 1816~1817년에 '유럽 대기근'을 경험하고, 이것이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그리고 리비히는 1840년에 『농업 및 생리학에 대한 화학의 응용』을 지었다. 당시 식물은 흙에서 탄소를 취하는 것이어서 공기 중의 탄소 가스로부터 채취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을 고집하던 식물생리학자나 테어의 유기영양설을 신봉하는 농학자들 사이의 논쟁을 비롯해 지금까지의 농업의 지식을 모조리 비판하고, 당시 농학계를 지배하던 유기영양설을 차례차례 논파해 나아갔다.
리비히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의 실험 결과에 기반해 온갖 식물의 영양원은 부식 같은 유기물이 아니라 탄소 가스, 암모니아(또는 질산), 물, 인산, 황산, 규산, 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의 무기물질이라는 '무기(광물)영양설'을 제창했다. 리비히에 의하면 토양의 양분, 특히 인이나 칼륨 같은 무기물은 암석의 풍화작용에 의해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다만, 풍화의 속도는 매우 천천히 이루어지기에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상태의 토양 양분은 한정되어 있다. 그 때문에,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곡물이 흡수한 만큼의 무기물을 토양에 제대로 돌려주는 일이 빠질 수 없다 하고, 이걸 '충족률'이라 불렀다. 그는 또한, 식물의 생육에 필수 요소인 빛과 물과 토양 양분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다른 요소가 얼마나 있더라도 식물은 정상적인 생육을 할 수 없다는 이른바 '최소률(Law of the minimum)'의 제창자였다고 이야기되었다. 하지만, 최근 이 '최소율'을 리비히보다 먼저 제창한 것은 슈프렝겔Sprengel이었단 것이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현재는 '슈프렝겔=리비히의 최소율'이라 불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리비히의 새로운 설은 앞에 기술한 테어의 '유기영양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큰 논의를 불렀다. 그에 의하면, 흙에서 식물에 의해 빼앗긴 것을 무기질 비료의 형태로 보충하면, 휴한이라든지 작부 순서라든지는 문제가 안 된다고 했다.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그러한 농법의 원칙은 일종의 속박에 지나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한, 리비히는 농업에서 진정한 진보는 외양간두엄에서 해방됨에 따라서만 가능하며, 돌려짓기 방식은 흙 속의 영양을 약탈하는 것으로 '약탈 농업' 등이라고 비판하고, "농업에서 진정한 진보는 외양간두엄에서 해방됨에 따라서만 가능하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농업과 농업 경영의 문제에서 유기영양설과 무기영양설의 논쟁만큼 화려하고 격렬한 것은 없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농예화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던 리비히조차 오류를 범했다. 식물에게 가장 중요한 원소인 질소에 관하여 "식물은 이산화탄소와 마찬가지로, 공기 중의 암모니아 가스를 흡수해 화학 합성할 수 있다"라 하며 질소 비료는 필요없다고 단언했다. 토양 속의 무기태 질소의 양은 매우 적어 도저히 식물이 충분히 생육할 수 있는 양이 아닌데, 식물이 질소를 많이 흡수하는 것은 왜일까? 이건 분명 식물이 대기 중에서 암모니아 가스를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건 리비히가 각지를 여행하면서 질소 비료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비옥한 토지를 목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 무렵, 토양 속의 뿌리혹박테리아에 의한 질소 고정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에 무리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식물의 질소 영양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논쟁되고 있었는데, 토양 속 질소의 동태는 불분명한 채로 시대가 지나갔다. 19세기의 반쯤이 되자 프랑스의 유명한 미생물학자인 파스퇴르(1822~1895)가 연구 성과를 차례차례 발표해 자연계의 물질대사에 미생물이 크게 관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토양이 방대한 미생물의 서식지라는 점도 차츰 밝혀졌다. 그리고 1877년에는 슐레징Schloesing과 뮝츠Muntz라는 2명의 연구자에 의해 토양 미생물의 작용으로 암모니아가 질산으로 산화되는 산화 작용이 발견되었다. 나아가 이 질화 작용을 추가 시험하던 영국의 농학자 로버트 워링턴Robert Warington(1838~1907)에 의하여, 토양 속의 유기태 질소는 토양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무기화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기질 비료가 토양에 뿌려지면, 유기물은 토양 생물에 의해 분해된다. 유기물이 미생물의 분해를 받으면 탄소, 질소, 수소는 탄소 가스와 물이 되고, 질소나 그 이외의 인이나 유황 등의 영양분은 무기이온이 되어 토양 속에 방출된다. 이 방출된 무기이온을 식물은 뿌리로부터 흡수해 비로소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곧, 유기물로서 비료를 주더라도, 식물은 유기물을 직접 흡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어떤 종의 저분자 단백질 등도 아주 적은 양이지만 뿌리로부터 직접 흡수되는 일도 밝혀졌다. 이리하여 이 워링턴의 발견을 가지고 토양-미생물-식물 사이의 상호관계가 명확해져, 식물의 질소 영양에 관한 기본 개념이 확립되었다.
그 뒤 1860년에는 율리우스 작스Julius Sachs(1832~1897)에 의해 수경 재배의 수법이 개발되어, 무기 양분만으로 식물이 생육되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결과 리비히의 무기영양설이 승리하여 테어의 유기(부식)영양설은 버려져 버렸다. 테어가 농업 경영의 범위 안에 있는 외양간두엄에 의해 영양분의 자급을 고려한 데 반해, 리비히는 경영 바깥에서 가져오는 무기영양분을 비료로 보급하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이걸 '충족률'이라 불렀다. 테어에 의해 제창된 외양간두엄에 의한 지력의 증대는 일정 마리수의 가축 사육을 전제로 비로소 가능했다. 이것은 상품작물을 재배하려 하는 농가에게는 경영 내부에서 발생하는 제약으로, 가축을 사육해야 하는 건 그때까지의 농업 경영에서 큰 '족쇄'가 되었음은 확실했다. 이 외양간두엄이 무기질 비료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가축을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농민에게는 크게 환영받았다.

4-6 토마토의 수경 재배(중국 베이징 교외)
리비히는 뿌리혹박테리아에 의한 질소 고정에 대해서는 식물이 흡수하는 것은 인정했지만, 외양간두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간파하지 못했던 것일까? 무기질 성분만이 식물에게 중요한 양분이라는 것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결과적으로 그 뒤의 무기질 비료, 특히 화학비료의 시용에 크게 힘을 불어넣게 되었다. 상대를 완전히 때려눕히고, 승리와 영예를 혼자 다 차지하려는 듯한 리비히와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과격하기까지 한 언동에 의해, 마치 무기영양설은 '유기질 비료 불필요론'이며 리비히는 '유기농업 부정의 선구자'인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킨 듯하다. 그의 사상이 침투함으로써 칠레 초석의 수입, 칼륨 광상의 발굴 등이 급속히 증가를 하고, 무기질 비료의 시용은 증가해 생산성을 높인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세기 말부터 증대된 신대륙에서 오는 식재료 수입에 의한 유럽 농업의 위기를 무기질(화학)비료의 사용에 의해 생산성을 향상시켜서 맞서게 한 최대의 힘이 되었다. 작물이 토양으로부터 원소를 수탈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보충하는 인조 화학비료를 제조하고, 실천적으로 그 이용을 촉진하며, 기술로서 정착시켰다. 그 뒤의 농업에 가져온 영향과 화학비료의 보급에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뒤에 기술하듯이, 화학비료의 거대한 보급에 의해 밭의 지력이 서서히 떨어져, 토양이나 지하수의 오염 등 환경문제가 출현하고, 식과 농과 환경이 큰 영향을 입게 된다. 한편으로 리비히가 등장하기까지, 지력 향상의 과학적 근거는 명확하지 않은 '신비주의'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그점에서는 리비히의 등장에 의한 거대한 진보가 있었다고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분명하다.
무기질 비료 구아노의 출현
유럽의 농업은 농법의 변화에 따라 휴한지를 없애고 동시에 공예작물이나 원예작물을 도입했기 때문에, 대량의 비료 투입이 필요해졌다. 그 결과, 구아노guano나 칠레 초석(칠레 초석 = 질산나트륨) 등의 새로운 무기질 비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서유럽의 농업은 유축의 혼합농업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1930년대까지 토양에 투입되는 작물 영양분의 대부분은 외양간두엄이 차지하고 있었다.
외양간에서 채취할 수 있는 초석(질산칼륨)은 특히 유효했는데, 이것은 비료로만이 아니라 화약의 원료로도 중요했다. 그 때문에, 군사용으로 초석을 확보하기 위해 ‘초석상(nitre bed)’의 연구도 행해지고 있었다. 흙과 가축의 분뇨, 깔깃 따위를 섞고, 거기에 중화제로 소량의 재를 섞고서 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덮개를 씌우고, 수분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뿌려 몇 개월 쌓아둔다. 그동안에 분뇨의 분해에 의해 생긴 암모니아가 질산화 세균의 작용으로 질산이온으로 변화하고, 소변에 많이 포함되어 있는 칼륨과 결합해 폭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석회석을 구워 분말 형태로 만든 생석회나 석고 따위도 비료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19세기 초에는 남미에서 구아노와 칠레 초석(질산나트륨)의 광상이 발견되어 조금씩 유럽에도 수입되기 시작했다. 구아노는 똥 또는 ‘거름’을 의미하는 잉카의 공용어인 케추아어 Huanu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페루 중부 연안에서 5~20km 떨어진 바다에 떠 있는 작은 군도인 친차 제도는 적도 근처를 날아다니는 펠리컨이나 가마우지의 일종인 과나이, 그리고 얼가니새 같은 바닷새의 배설물이 두껍게 퇴적해 화석화한 구아노로 덮여 있었다. 구아노는 인산칼슘과 요산이나 암모니아 같은 질소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잉카 시대부터 비료로 사용되었다.
구아노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지리학자이자 박물학자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 등이 1799년부터 1804년에 걸쳐 행한 남미 탐험이었다. 훔볼트는 1807년 『신대륙 적도 지방 기행』이라는 제목의 30권에 달하는 탐험기를 파리에서 출판했다. 그는 1802년에 페루 리마 근처의 섬에서 구아노의 비료적 가치에 대해 조사하고 표본으로 소량을 프랑스로 보냈는데, 이것이 1810년 무렵부터 구아노가 유럽이나 북미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자, 잉글랜드에 들어온 구아노 분광糞鉱이나 칠레 초석이 효과를 발휘해, 점차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리비히는 “질소는 공기 중의 암모니아 가스로부터 흡수되므로 비료로서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칠레 초석이나 구아노 분광이 독일에서 사용되는 건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던 사정이 있었던 듯하다.
페루의 구아노를 유럽에 소개한 것은 훔볼트였지만, 이 구아노를 가져다준 것은 그가 페루 연안에서 발견한 남극에서 북상하는 강한 한류였다. 그는 이때 이 한류의 유속과 해수면 수온을 측정했다. 그가 조사한 상세한 관측 기록에 의거해, 페루 해류는 지금도 별명으로 ‘훔볼트 해류’라 불린다. 이 페루 해류는 플랑크톤이 매우 풍부하여 이를 찾아 물고기가 모이고, 특히 안초비(멸치)가 풍부한 어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안초비를 찾아 바닷새들이 떼지어 서식하기 때문에 구아노의 퇴적이 일어난 것이다. 즉, 플랑크톤에 의해 농축된 해수 중의 질소와 인은 멸치, 바닷새의 배를 거쳐 ‘구아노 분광’으로서 작물에 시용되어 온 것이다.
토양생태학자 마츠모토 에이지松本栄次의 『사진은 말한다 남아메리카·브라질·아마존의 매력』(2012)에 의하면, 4-7의 사진처럼 페루의 이카시 근교의 지하수 오아시스를 이용한 밭에서는 사막토에 생성되는 석회(탄산칼슘)가 판 모양이 된 칼리쉬가 자급비료용으로 캐내어져 밭의 옆에 쌓아놓은 것을 보고하고 있다. 이카시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팬아메리칸 하이웨이로 약 300㎞ 남쪽의 태평양 해안을 따라 페루 남부의 사막에 위치하고 있다. 칼리쉬라는 것은 지하수가 얕은 사막에서 흙에 사이펀 현상으로 빨아올려진 지하수가 지표에서 증발할 때 남았던 석회(탄산칼슘)이다. 풍토 안에서 살아남은 자급비료로 칼리쉬는 현재도 이용되고 있다.

4-7 자급비료용으로 캐내 밭 옆에 야적된 석회판(칼리쉬)
이와 똑같은 과정으로 생성되는 것이 칠레 초석이다. 칠레 초석은 비료로만이 아니라 다이나마이트의 원료로도 예전에는 매우 중요해 유럽에 수출을 하고 있었기에, 1930년대까지 칠레의 경제를 크게 윤택하게 했다. 그 때문에 그 산지를 둘러싸고 근접한 볼리비아와 태평양 전쟁(1879~1884)이 발발해 승리한 칠레가 초석을 산출하는 안토파가스타 지방을 볼리비아로부터 획득하는 결과가 되었다. 칠레 초석의 주성분인 질산나트륨은 융해도가 아주 높아, 약간의 강우에도 씻어 없어지기에 칠레의 안타카마 사막 같이 강우가 거의 오지 않는 곳에서만 생긴다. 다만, 칠레 초석의 생성 원인에는 해조의 분해설, 구아노 기원설, 동식물 유체의 박테리아에 의한 분해설, 뿌리혹박테리아 같은 토양 미생물에 의한 대기 중의 질소 고정설 등 다양한 설이 있는 듯하다.
공기로 만드는 꿈의 화학비료 탄생
한편, 인산 성분을 함유한 골분을 경작지에 시용하는 것은 유럽에서는 상당히 옛날부터 행해졌다. 리비히의 논적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던 잉글랜드의 로담스테드Rothamsted 농업시험장의 연구자였던 J. B. 로스Lawes(1814~1900)은 자신의 밭에서 좀처럼 골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걸 보고, 황산을 뿌려 처리한 것을 시험했다. 그러자 황산 처리를 한 골분 쪽은 효과가 좋아서, 1842년에 이 특허를 받아 무기비료로 팔기 시작했다. 한편, 리비히도 황산 처리하여 만든 골분을 '특허 비료'로 이름붙여 팔기 시작했는데, 공업적으로 제조를 개시한 것은 1857년으로 로스보다 상당히 뒤쳐졌다. 과인산석회라는 세계에서 처음인 무기비료 제조도 농업 현장을 아는 로스 쪽이 앞서갔다는 사실도 납득할 수 있는데, 이것이 화학비료인 과인산석회의 기원이다. 작물이 토양에서 원소를 수탈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보충하는 인조 비료를 제조하고, 실천적으로 그 이용을 촉진해 기술로 정착시켰다. 과인산석회의 원료는 당초 동물이나 인간의 뼈를 이용했다. 이 원료 채취를 위하여 유럽 안의 묘지나 전장이 파헤쳐졌다고 하니 놀랄 만한 이야기이다. 이 원재료도 그 뒤 인 광석의 발견에 의해 골분에서 인 광석으로 변하고, 오늘날 같은 과인산석회 공업의 모습이 되었다.
과인산석회의 시용에 자극되어, 암염광 폐광부터 칼륨염의 채굴이 186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윽고 독일 북부와 알자스 지방에서 풍부한 칼륨염상이 발견되어, 칼륨의 대량 사용이 시작되었다. 칠레 초석이나 칼륨염은 무기질 비료로 채굴되었지만 순도를 높이기 위해 정선하는 데 지나지 않았는데, 과인산석회의 제조는 원료에 황산을 작용시켜서 일단 화학 반응을 일으켜서 만든 것이었기에 화학비료의 선구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유안의 제조는 가스 공업의 부제품으로 시작되었다. 1820년 무렵부터 잉글랜드에서 발흥한 가스 공업에서는 암모니아 가스가 연기 속에 포함되어 배출되었는데, 이것은 불쾌한 냄새였기 때문에 황산에 흡수시켜 제거하려 했다. 이렇게 해서 부산물로 황산암모니아가 생겼는데, 그 양은 적어서 일반적으로는 퍼지지 않았다. 카바이드 공업으로부터 생기는 석회질소에서 유안을 제조하는 일도 행해졌는데, 뭐라고 해도 본격화된 것은 20세기를 맞이하고 나서였다. 곧, 1909년에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1868~1934)가 공기 중의 약 80%를 차지하는 질소 가스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 성공에 의해 하버는 1918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그 뒤 하버법의 개량에 도전한 칼 보쉬(1874~1940)는 고압 화학의 기술을 이용해 암모니아의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 그건 바꾸어 말하자면, 지구의 어디에나 있는 공기로부터 질소 비료를 화학적으로 대량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단 것이다. 이 성공에 따라 보쉬도 또한 1931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이 두 사람의 독일 화학자의 이름을 따서 대기 중의 질소로부터 질소 비료를 만드는 기술을 '하버 보쉬법'이라 부른다.
그럼, 화성 비료란 화학적인 방법을 사용해 복수의 원료를 합성해 만든 비료를 말한다. 화학비료가 대부분 단일 성분의 '단비인 데 반해, 화성 비료는 복수의 비료 성분이 사용하기 쉽도록 합성되어 있는 것으로, 효율적으로 시비할 수 있다. 현재는 화학비료끼리 합성한 화성 비료, 또는 화학비료와 유기질 비료를 합성한 화성 비료도 있다. 화성 비료에 대하여 화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혼합만 한 비료를 '배합비료'라고 부른다. 데이비드 그리그David Grigg는 야마모토 쇼우조우山本正三 외 번역 『서양 농업의 변모』(1997)에서 4-8의 그래프처럼 독일에서 발명된 하버 버쉬법에 의하여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도 질소 비료가 급속히 확대되어 갔던 모습을 밝혔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0년대 중엽 이후가 되면, 석유와 가스의 가격이 싸져 질소 비료의 가격이 저하되었기에, 단위면적당 소비량은 급증했다. 농장의 외양간두엄은 여전히 중요하긴 했지만, 화학비료의 사용량 쪽이 차츰 많아졌다. 1970년대에는 화학비료는 영국의 토양에 투입된 질소의 75%, 아메리카에서는 92%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리그는 세계의 화학비료 소비량은 1950년부터 1980년 사이에 7배나 뛰어올랐다는 것을 밝혔다.

4-8 독일과 영국에서 비료 투입량의 변화(1880~1980년). 야마모토 쇼우조우 외 변역(1997)에 의함.
독일(1945년 이후는 서독)과 영국에서 경작지 3000평당 비료 투입량
출전: D.Andrews, M. Mitchell and A. Weber,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e in Germany and the UK:3, Comparative Time Series, 1870-1975, Wye College, Ashford, Kent, 1979
그 뒤, 화학비료와 함께 제초제와 살충제도 급속히 유럽이나 아메리카 등 여러 국가에 보급되어 갔다. 화학비료는 외양간두엄을 보충하고, 또는 외양간두엄을 대신하기까지 하게 되었다. 제초제는 잡초를 방제하기에 뿌리채소 종류의 밭을 쟁기질로 제초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제초를 위한 휴한도 필요없어져, 돌려짓기를 통해 병충해를 방제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그 결과, 혼합농업은 근대의 화학농업에 길을 내주어 버리고, 농민은 많은 종류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을 멈추고 2~3가지 작물의 생산에 특화해 나아갔다. 1850년대 이후 철도가 보급됨과 함께 냉장 기술이 도입되면서 농산물의 수송비는 뚜렷하게 하락했다. 그 결과, 서유럽은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에 있는 저비용 생산자와 경합하게 되고, 국제적인 규모에 노출되어 버렸다.
현대의 농업과 환경
앞에 기술했듯이 서유럽에서 화학비료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42년 과인산석회의 발명으로 거슬러오른다. 이 해 J. B. 로스는 잉글랜드의 켄트주에서 과인산석회의 공장을 설립했다. 그 뒤, 과인산석회의 이용은 서유럽의 대부분에서 광범위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료의 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1920년대가 되어 질소 비료를 하버 보쉬법에 의해 저렴하게 생산하게 되고부터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초기에 육종 기술이 진보하자, 종묘가는 눈에 띄는 활약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농장 밖에서 구입하는 서비스와 농업자재는 서서히 증가해 갔다. 가축의 사료는 19세기 초기부터 농장에서보다 오히려 배합비료 회사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농업의 근대화에 따라 농장 밖에서 구입하는 자재의 비율은 명확하게 높아졌다. 한편, 농장이나 지역 안에서 생산된 자재를 사용하는 것을 멈추고, 공장에서 생산된 자재를 사용하게 되었지만, 과거 농장에서 행해지던 농산물의 가공품 대부분, 예를 들면 햄이나 소시지, 버터나 치즈 등의 제조도 이제 농장이 아니라 공장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1945년 이후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과 함께 서유럽 여러 국가에서 농업은 새로운 농업 기술에 의해 격렬한 변화를 맞이해 갔다. 19세기 후반에 되자 도시로 유출되는 인구가 자연 증가를 넘어서 농업 인구는 감소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계화의 필요성이 급속히 높아졌다. 트랙터는 말을, 농업 기계는 인력을, 그리고 화학비료는 퇴구비를 대신했다. 제초제는 잡초의 방제를 위하여 살포되는데, 과거 제초는 쇄토기인 써레와 괭이에 의해 행해졌다. 작물의 병충해 방제에는 살충제와 살균제를 이용하게 되었다. 제초제와 살충제의 사용은 1950년대가 되고나서 진전되었지만, 그들의 살포 대부분은 병해충 이외의 작물과 식물상에도 광범위하게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살충제는 병해충에 효과가 있었지만, 살충제의 살포와 종자에 약제를 바른 종자 코팅이 그것을 섭취한 작은 조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종자를 먹이로 하는 작은 새는 종자 코팅 때문에 죽음으로, 맹금류인 매는 그 작은 새를 잡아먹고 죽었다. 나비류는 지난 40년 동안 상당히 감소해 버렸는데, 이는 살충제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보다는 그 서식 환경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화학제제에 의존하고 있으면 식물로서 본래 가지고 있는 방위 기구를 저하, 무력화시키고, 그 결과 약해진 작물을 병원체가 공격하는 틈을 만들어 버리게 된다. 농약 사용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익한 토양 생물도 격감시켜 버리고, 작물이 미생물과의 적응적 공생으로 쌓아올린 영양과 방위 체계를 사람의 손으로 붕괴시켜 버리게 된 것이다. 광범위하게 효과가 있는 화학제제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뿌리째 죽여 버리면 가장 먼저 부활하는 것은 잡초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을 방제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제초제를 사용해야 하는 악순환이 초래된다. 농약을 기초로 한 농업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잔류 농약은 지하수와 지표수로 스며들어 지하수나 하천의 오염이 진행되어 경관과 식물상, 동물상, 그리고 사람들의 음료수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하워드를 기점으로 한 유기농업
1920년대에는 대영 제국이나 독일어권 여러 국가에서 농약이나 화학비료, 농업 기계를 사용하는 자본주의적인 근대 농법에 반발하는 의미를 지닌 '유기농업'의 대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는 도시화와 화학비료를 포함한 공업화에 반대하고, 화학비료나 농약 없이 과실이나 채소의 생산을 지향한 시민 조직이 결성되었다. 또한, 화학비료의 투입에 의한 생산성이 높은 농업의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시류에 편승한 농예화학은 머지않아 막다른 곳에 이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 영국인 알버트 하워드였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인도에서 상업 플랜테이션을 위한 대규모 퇴비 제조 방법을 개발한 연구 성과에 기반하여, 1930년대에 유기물을 밭에 돌려주는 것이 토양과 작물의 건강과 풍요로운 수확에 빼놓을 수 없다는 '환원의 법칙'을 제창했다. 1940년대 중엽에 An Agriculuual Tesamen(일본어 번역은 日本『농업성전農業聖典』<2022> 新装版 1쇄)이나 Farming and Gardening for Healh or Disease (일본어 번역은 『하워드의 유기농업』<2002>)를 지어 일본어 번역서가 출판되어 있다. 그리고 영양이 어떻게 식물에 도달하는지, 별로 지식이 없는 시대에 하워드는 균근균이 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흙과 퇴비와 미생물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몽고메리는 카타오카 나츠미片岡夏実 번역 『흙・소・미생물』(2018)에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잘 만들어진 퇴비는 균근균의 생장을 촉진하고, 균근균이 풍부한 농지는 건강한 작물을 안정적이고 풍부하게 만들어냈다. 균근균은 부패하는 유기물을 먹이로 삼고, 식물에게 뺴놓을 수 없는 영양소를 공급하는 뿌리의 연장으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이 하워드의 생각으로는 화학비료는 토양 유기물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원소를 몇 가지 주더라도 균류가 모아 식물에 전하는 토양 속의 모든 무기영양소와 물질을 공급할 수 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워드는 균류나 그외의 미생물이 식물에 영양을 주고 그것이 어떻게 작물에 흡수되는지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시대에, 균근균이 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흙 속의 균류나 그외의 미생물이 식물을 어떻게 돕는지를 당시의 분석 기술로는 증명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하워드의 사고방식은 열화된 농지에 집중적으로 화학비료를 투입해 눈부신 수확량을 올리는 농법 앞에서 세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농민들은 살충제와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 농법은 더 건강하고 더 맛있고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식재료를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기농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 사람은 트랙터와 전력의 형태 같은 구입 에너지의 사용도 그만두고 있다. 아메리카에서는 저투입 농업이 제창되었는데, 이건 농업용 약제의 사용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사용량을 안전 수준까지 크게 감소시켜 이용하는 농업이다. 예를 들면 통합적인 해충의 방제는 작물의 돌려짓기와 해충의 생물 제어를 결합시켜서 농약 살포를 신중하게, 게다가 횟수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처럼 새로운 농업, 또는 부활한 형태의 농업을 도입한 농민은 아직 적기에, 그 성과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수고가 드는 데다 수확량이 일반적으로 낮기에 투입은 적지만 면적당 순이익도 농약이나 화학비료에 의존한 농업의 경우보다 낮다. 오늘날, 이러한 유기농업은 생산 과잉이 계속되어 환경 파괴라는 난제에 직면하는 여러 선진국의 농민에게는 틀림없이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나 식재료 부족이나 기아에 직면한 여러 발전도상국에게는 그러한 것에 그다지 매력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인구의 급증이 계속되고 있어 작물 수확량을 계속 증가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기 때문에, 아프리카·아시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등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전통적인 농업에서는 그것을 달성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무기질 양분만이 식물에게 중요한 양분이다"라는 리비히의 이론을 기점으로, 그 뒤의 화학비료나 농약이나 대형 기계를 집중적으로 투입해 수확을 올리는 혁명적인 농업 앞에서 테어나 하워드의 유기물 시용을 중시하는 이론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 결과, 하워드에 의한 종래의 지식에 대한 도전은 성과를 충분히 올릴 수 없었다. 그 흐름이 크게 변화한 것은 1930년대 중엽에 일어난 아메리카의 '더스트 볼'이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녹색 혁명'의 결말이 밝혀지고 나서이다.
북미 대륙 중앙부는 일찍이 전역에 걸쳐서 습윤하고 너른 숲과 초원으로 덮여 있고 풍부한 물을 가득 채운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변모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유럽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주해 정착하고, 아메리카가 건국된 뒤의 일이다. 19세기에 들어와 개척의 파도는 급속히 퍼져 숲은 벌채되고 초원에는 대량의 가축이 방목되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 숲 벌채는 더욱 가속되어 목장이나 방목지로 변모해 나아갔다. 숲의 파괴는 그 지역의 강수량에 영향을 줌과 함께, 방풍 효과를 격감시켜 버린다. 이리하여 광대한 토지에 토양 침식이 시작되었다. 나아가 대초원에서 행해진 무질서한 방목은 식생을 마구 짓밟고, 조금씩 그 지력을 잃고 황무지가 되며, 나아가서는 반건조지나 건조지로 변모해 나아갔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유럽의 농업 생산이파멸 상태가 되어, 국제 밀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아메리카 남서부의 대평원은 그때까지 있던 목장을 없애고 밀밭으로 급속히 전환되어 갔다. 1930년대에 대평원은 트랙터에 의한 경운으로 초원이 벗겨지고 광대한 초지와 흙 속의 토양 생물을 상실하면서 화학비료의 투입에 과도하게 의존한 광대한 밀밭으로 급속히 변모해 갔다. 그러나 유기물이 부족한 겉흙은 맹렬한 더위와 대규모 가뭄에 습격당하면 강풍에 조금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날아가 버렸다. 1930년대가 되면 대평원은 가뭄과 모래 폭풍에 여러 번 맞닥뜨리게 되고, 4-9의 사진처럼 모래먼지가 휘감겨 오르는 '더스트 볼'이라 부르는 풍식해에 의해 농지도 마을도 삼켜지고 농민은 농지나 집을 잃고 유민화되어 갔다. 유민이 된 농민들은 1939년 간행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묘사되어 있듯이, 또 하나의 은혜로운 땅이라 떠들썩했던 캘리포니아로,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건 자연 재해가 아니라 화학비료나 트랙터의 경운에 과도하게 의지해 유기물을 어느 것 하나 대지로 환원하지 않고 상품작물인 밀 생산을 추진했던 결말이었다. 그 결과, 아메리카 합중국 정부는 앞으로 경운하는 것을 그만두고 피복 식물로 토양의 표면을 덮어 무경운 재배하는 농법으로 전화해 나아가는 방향을 모색하고, 국가의 기관으로 1930년대에 토양보전국을 설립해 범국가적으로 흙과 유기물의 위기에 대처하게 되었다.

4-9 1930년대에 일어난 아메리카의 더스트 볼
아메리카 중서부의 일리노이주 중북부의 대초원 안의 농장에서 태어난 윌리엄 알브레히트William Albrecht(1888~1974)는 오랫동안 일리노이 대학을 중심으로 토양 과학의 연구에 종사했다. 그는 토양의 질, 식품의 질, 그리고 인간의 건강 사이의 직접적 연결을 연구한 토양과학자로, 1939년에는 아메리카 토양협회의 회장으로도 취임한 인물이다. 알브레히트가 특히 우려한 것은 비료의 3요소인 질소, 인, 칼륨의 화학비료를 작물에 준 토양이었다. 식물은 생장함에 따라서 천연에 존재하는 광물 원소, 예를 들면 동, 마그네슘, 아연 등도 받아들여 간다. 그러나 화학비료에 의해 질소, 인, 칼륨만 보충되고 기타 미량 요소는 보충되지 않으면, 식품 안의 영양소가 적어진다고 그는 주장했다. 바꾸어 말하면, 화학비료의 집중적 사용에 의해 생산량은 늘어나지만 거기에서 얻은 작물은 미네랄 성분이 결핍되어 버린다. 그리고 식물에게도 인간에게도 필수 미네랄이 부족하다는 것은 일종의 영양 실조와 같은 상태라고 한다. 알브레히트가 이 생각을 정리한 것은 1940년대 후반으로, 바로 아메리카의 토양 건강과 비옥도를 회복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이 한창일 때였다. 그러나 농예화학자나 화학 제제의 산업계로부터 그가 발표한 논문 안의 몇 가지 오류가 차례로 지적되자, 그의 주장은 정곡을 찔렀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매장되어 버렸다고 카타오카 나츠미 번역 『흙과 내장』(2016)에서 저자 몽고메리 등은 지적하고 있다.
한편,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발전도상국에서는 '녹색 혁명'의 대호령에 따라 기아에 대처하기 위하여 화학비료에 잘 반응하는 쌀이나 밀의 다비다수확 품종이 개량되어 탄생해 증산이 이루어졌다. 근대 농학의 기술에 의한 '녹색 혁명'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에 발전도상국에 퍼져 다수확 품종, 관개, 화학비료, 농약 및 관리 기술의 진보 등을 가져왔다. 그 결과, 곡물 생산은 1961년부터 2000년에 걸쳐 8억 톤에서 22억 톤 이상으로 증가해 기적적인 수확량을 올려, 과거 50년 동안의 인구 증가에 걸맞는 식량 수요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발전도상국의 모든 지역, 또는 모든 농가가 '녹색 혁명'에 의해 가져온 진보로부터 은혜를 받았을 리는 없었다. 나아가 '녹색 혁명'에 의해 자본력이 있는 대규모 농가는 해마다 F1 품종(잡종 1대)의 새로운 다수확 품종의 종자를 구입할 수 있고, 화학비료나 농약을 살포하며, 완비된 관개 시설에 의해 밀이나 벼를 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작농으로부터 소작지를 거두어들이고 자신의 경영 경작지를 확대했기 때문에 대폭으로 수확량이 증가해 갔다. 한편으로 영세 농가에는 고가인 종자나 기계나 화학비료나 농약을 살 방법이 없었기에, 그 혜택을 입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부유한 소수의 지주층과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소작농의 빈부 격차가 확대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농촌도 있었다. 그리고 대량의 화학비료가 쏟아부어져 토양 속의 유기물이 감소함과 함께, 기계력의 도입이나 부적절한 관개에 의하여 도리어 토양이 척박해진다는 결과를 초래해 버렸다.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더스트 볼의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녹색 혁명을 통해 발전도상국에 도입된 근대 농업 기술에 기반한 농법이 경작지의 표면에 염류가 집적되는 염해나, 거꾸로 담수화 현상에 의해 수몰되어 버린 밭 등 토지의 열화나 병해충의 급증과 생물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져 버린 지역도 볼 수 있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토양과학자 라탄 랄Rattan Lal은 2006년에 '발전도상국의 농지에서 토양 유기물 중 탄소의 저류를 통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농지에 유기물을 늘림에 따라 많은 탄소를 흙에 돌려주면, 토양비옥도가 오른다. 그 결과, 식량 생산량이 높아지고 이산화탄소 방출의 상쇄에도 크게 공헌한다. 랄은 논문에서 밀, 쌀, 옥수수 수확량이 뿌리 주변의 토양 유기탄소량에 의해 어떻게 증가하는지를 분석하고, 개개의 작물에 대한 관계를 기초로 토양 유기탄소가 연간 3000평당 1톤 증가하면 발전도상국의 곡물 생산이 연간 2400만 톤에서 3900만 톤 증가한다고 시험 계산했다. 몽고메리는 저서 『흙・소・미생물』(2018)에서 랄의 논문을 소개하고, 앞으로 수십 년 인구 증가로 예측되는 식생활 변화에 대응해, 도상국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연간 3100만 톤의 식재료를 증산할 필요가 있다고 추정하는데, 이것은 그 3/4에서 모든 걸 충족시켜도 아직 여유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토양 유기물, 곧 토양 속의 탄소를 늘리는 농법을 추진하면, 세계에 식재료를 공급하려는 대처를 위해서 큰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지속적 농업과 흙과 화학비료
현재 영국의 농촌에서는 산업화된 농업에서 특히 화학비료의 투입이나 외양간두엄의 과잉 투입에 의한 환경 부하를 줄이고 수복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와 함께 유기적 농업의 전개, 식재료 생산부터 농지 이용에 휴한을 도입하는 것이나 비식재료. 농산물 생산으로의 이행, 숲이나 휴양지, 자연보호 지역 같은 다양한 농촌다운 토지 이용이 모자이크 모양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가 되면 화학비료, 주로 질소의 단일 성분 형태로 사용되는 일이 급증했다. 질소는 작물에 다량으로 흡수되는 양분으로, 질소 양분량이 작물 생육을 결정하는 큰 요인이 되기에, 농민은 질소 농도가 일정 이하가 되지 않도록 했다. 식물이 뿌리로부터 질산염을 흡수하면, 그 대부분은 지상부의 잎이나 줄기까지 물과 함께 운반되어, 그곳에서 아미노산 합성이 이루어진다. 아미노산은 다시 세포를 합성하기 위한 단백질이나 유전자, 엽록소 등으로 합성되며 식물체가 점점 커진다. 질소 양분의 공급량이 많으면, 잎의 색도 진해지고, 겉보기에 훌륭한 채소가 완성된다. 무기태 질소의 흡수는 매우 효율 좋게 이루어지기에, 농가가 화학비료를 다량으로 시용하면 식물은 필요 이상으로 질산을 흡수해 버린다. 작물의 체내에 들어간 다량의 질소염은 아미노산 합성에 최대한 이용되는데, 과잉으로 흡수한 분량은 소화되지 않은 채로 식물 체내에 잔류하고 축적되어 버린다. 1장에서 기술했지만, 질산태 질소를 많이 함유한 채소를 먹거나, 질산태 질소가 들어간 지하수를 음용하거나 하면, 메트헤모글로빈 혈증을 일으켜 버린다는 걸 기억하길 바란다. 구미에서는 영유아의 블루 베이비증으로 알려져 사망자도 나오고 있으며, 성인은 암에 걸릴 위험이 높다고도 알려져 있다.또한 하천이나 호수 등의 지표수로 유망된 질소의 증가는 부영양화를 불러와 하천의 흐름을 방해하는 잡초를 급속히 증가시켜 수면에 조류를 무성하게 해 빛을 차단하고, 그 결과 간접적으로 어류에 대한 산소 공급을 감소시킨다. 질산염은 음료수의 공급원인 지하수에 매우 짙게 녹아 들어가 버린다. 특히 영국 동부와 남부에서 이 경향이 두드러진다. 몇몇 지역에서는 음료수에서 질산염이 EU의 안전기준을 넘어선다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면 영국 동부에서는 농민이 곡물 생산에 전문화됨에 따라 가축의 수가 감소했다. 그건 농민이 곡물의 생산에만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축은 점점 더 서부 지역의 조건 불리 지역에서 사육하게 되고, 곡물은 동부에서 대규모로 재배하게 되었다. 양자의 거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수송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퇴구비는 축산 지역으로부터 작물 지역으로 운송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분뇨 웅덩이나 사일로에서 누출되는 등에 의해 질산염의 수준이 높아졌다. 그 결과, 대량의 가축 분뇨는 사육 지역 안에서 처리가 필요해졌다.
농업의 기계화가 진행된 것도 자연 환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계의 이용은 큰 밭일수록 효율적이어서 특히 잉글랜드 동부에서는 생울타리가 부서지고 대규모 밭으로 바뀌었다. 그 전형은 경작지나 초지의 경계가 되었던 '헷지로'라고 불리는 생울타리와 돌담이 대형 기계화를 위한 대구획화로 인해 사라져 조류와 작은 포유류의 서식 지역이 감소해 버렸다. 생울타리는 산토끼나 고슴도치 등 작은 동물과 산딸기류의 보고로서 농촌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생물다양성을 유지해 왔다. 이 소실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농민에게는 수복을 위한 보조금이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환경보전 지역(Environmentally Sensitive Areas)이나 조건 불리 지역(LFA <Less Favored Areas>) 같은 특정 지역의 농민에게 지불되는 보조금은 환경에 부하를 주지 않고서 농업 생산을 행하고, 과방목이나 질소 비료의 살포량을 삭감하거나, 양호한 농촌 환경을 수복하고 보전하거나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규칙과 수락인 '크로스 컴플라이언스cross-compliance'를 조건으로 하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즉, 크로스 컴플라이언스라는 것은 소득의 직접 보상이라는 '디커플링decoupling'의 권리를 환경보전을 행하는 농민에게만 한정하는 것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자격으로 치환하는 제도이다.
또한, 무거운 농업기계의 사용은 다른 새로운 농법과 연결되어서 토양 침식의 위험을 증대시킨다. 무거운 기계는 토양을 짓밝아 굳히고, 바퀴는 뒤에 자국을 남긴다. 그곳을 지표 유출수가 흘러가 4-10의 사진처럼 작은 고랑을 깎아낸다. 방치하면 머지않아 몇 개의 침식흔이 모여 물길이 되고, 나아가 경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깎여 골이라 부르는 침식 지형으로 진행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4-10 영국의 유기물이 시용되지 않은 대규모 밀밭 안에 생긴 빗물에 의한 침식흔. 머지않아 물길이나, 대규모 골로 발전해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흙을 잘게 부수는 파종판은 풍식의 위험성을 증대시켜, 가을 파종 작물의 증가는 겨울에 민둥땅을 많이 남기게 되어 풍식에 의한 토양 침식의 위험을 증대시켰다. 직접 만든 퇴구비가 화학비료로 대체되면서 토양 속의 유기물이 감소하고 미생물도 적어지면서 흙의 떼알구조가 생성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토양 유기물의 함유량이 많을수록 토양 입자끼리 결합해 침식을 견디는 떼알구조가 발달하므로 침식은 억제된다. 나악 목초와 채소를 포함한 돌려짓기가 감소하여 토양 속 유기물의 양을 줄이고, 그 결과 토양 침식의 잠재적 가능성을 증대시켰다(권두화 11 참조).
경운함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토양 유기물의 분해가 촉진되어 작물의 양분을 늘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토양 양분이 보충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흙의 비옥도 저하를 일으켜 버린다. 강력한 트랙터의 발달에 의해 농장에 목초지나 사료용 작물이 필요없어지고, 사역 동물인 소와 말도 필요없어지며, 축분을 농지에 돌려 활성화하는 일도 감소해 버렸다. 화학비료나 가축의 분뇨를 다량으로 주었던 작물은 영양을 구하기 위해 그만큼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사라져 버렸다. 그 결과, 뿌리를 신장시켜 삼출액을 분비해 뿌리 주변에 유익 미생물을 모으려는 작용을 하지 않게 되어, 병해충이나 돌려짓기 장해가 증가해서 수확량이 저하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토양 속의 유기탄소량은 쟁기질에 의해 분해가 가속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쟁기질은 지표면의 유기물을 파쇄해 토양 속에 혼입하여 토양을 팽연시켜서, 산소를 토양 속에 확산되기 쉽게 한다. 그 결과, 토양 미생물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유기물 분해를 촉진한다. 이건 물론 단기적으로는 쟁기질이 작물의 양분을 늘어나게 한다. 그러나 만약 양분이 보급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토양의 비옥도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토양의 유기물은 경작을 반복함으로써 서서히 감소해 나아가고, 수확 이후의 작물은 경작지로부터 가져가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쟁기질하여 토양에 산소가 들어가서 질화도 활발해지고, 질산이온이 생성되기 쉬워진다. 그러나 강우에 의해 토양 수분이 증가하면, 탈질이 일어나기 쉬워진다. 그것만이 아니라 격심한 강우가 내리면 질산이온의 용탈도 일어난다. 무경운 농업 운동의 초기 지도자였던 미국인 에드워드 폴크너Edward H. Faulkner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 지은 Plowman's Foly(『농부의 우행愚行』)에서 관례적으로 농업에서 기본적인 행위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던 쟁기질은 토양을 파괴하는 것만으로 아무 이익도 없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유기물을 겉흙에 섞어 넣는 것만으로 비옥한 토양은 유지할 수 있다고 기술한다. 또한, 하타노 류스케波多野隆介는 일본 토양비료학회 편찬 『세계의 흙・일본의 흙은 지금』(2015)에서 쟁기질은 토양 열화의 큰 위험이며, 일본에서도 쟁기질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쟁기질을 신중히 하는 것에는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 그건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비교적 곧바로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응의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양을 갈아엎어 공기에 노출시키면, 토양 유기탄소가 산화해 이산화탄소가 방출되기 때문이다. 몽고메리가 짓고 카타오카 나츠미가 번역한 『흙・소・미생물』(2018)에도 자료의 출처는 보이지 않지만, 1980년의 시점에서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손으로 대기 중에 방출된 탄소의 대략 1/3이 주로 미국의 대평원, 그리고 동유럽, 중국에서 토양을 쟁기질했기 때문에 나왔다고 적혀 있다. 일본에서도 전체로 보면, 농지는 이산화탄소의 배출원이 되고 있지만, 퇴비 등 유기물의 시용에 의한 토양 유기탄소의 절규를 추진함과 함께, 쟁기질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 등에 의해 순배출량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 농가의 경영 규모으 ㅣ확대 과정은 소규모로 충분한 경제적 채산을 취할 수 없는 농가의 도태 과정이기도 했다. 곧, 대규모이고 경제적으로 채산을 취할 수 있는 농가가 파산한 소규모 농가가 내놓은 농지를 손에 넣음으로써 진행되었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통되는 일이지만, 총 농가 수와 동시에 농업 취업자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가 뚜렸해졌다. EU에서는 1970년 이후 평균하면 양자는 매년 3%의 감소가 이어져, 대농장으로 집중되는 농지와 평균 경영 규모의 확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대규모 농가에 토지의 집적이 진행되어 중소규모 농가의 농산물 생산량의 감소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과 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 동안의 농작물에 대한 높은 보상 가격이 연결되어서, EU의 농민에게 작물, 특히 곡물의 작부면적 증가를 촉진했다. 이것이 한층 기계화나 화학비료를 수반한 대규모 농업이 진전하게 해서 야생 동물의 특수한 서식 환경을 동반한 토지의 파괴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EU 여러 나라의 산지나 구릉지나 습지에서 야생 동물의 양호한 서식 환경이 차례차례 파괴되어 갔다. 유럽의 EU 여러 나라 농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 동안 계속된 생산을 최대화하려고 하는 농업 생산 확대기 이후, EU의 공동농업정책인 CAP(Common Agricultural Policy)를 바탕으로 1980년대 이후에는 아래의 3가지 점에서 재편을 행했다.
(1)식재료 농산물의 생산량을 감소시킨다.
(2)농촌의 환경보전기능을 유효하게 한다.
(3)장기간에 걸쳐 지속가능한 농촌을 창설하기 위하여 농업의 생산방법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EU 역내에서 이루어지는 식재료의 과잉 생산을 없애는 것이나, 환경보전형 농업으로의 전환, EU 회계에서 농업 보조금의 경비를 삭감하는 것 등이 계기가 되었다. 그 뒤 유럽에서 현대 농업의 불행한 결과는 조금씩 법률로 개선시키게 되었다. 살충제의 안전성을 관리하는 시도가 몇 가지 이루어졌다. 영국을 예로 보면, 환경보전 지역이 설정되어 농민은 환경 파괴의 가능성이 적은 농법의 채용을 지정받아서, 그 소득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몇몇 군데의 귀중한 야생 생물 서식 환경은 특별 과학 감시지점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들 정책만이 아니라, 농법에 대한 결정적 변화를 제창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제창한 새로운 농법은 유기(오가닉) 농업을 비롯하여 지속가능 농업, 저투입 농업, 대안 농업, 급진적 농업 등이라 불렸다. 화학비료나 농약이 사용되기 이전의 농법은 몇 세기에 걸친 경험의 결과로 장기간 환경에 해를 주는 일이 적고 작물의 수확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예를 들면, 1945년 이전에 서유럽의 혼합농업 지역에서는 가축과 여러 종류의 작물이 같은 농장에서 생산되고, 직접 만든 외양간두엄은 작물 영양소와 유기물을 토양에 공급했다. 작물의 일부는 환금작물로 판매되고, 일부는 가축의 사료로 쓰였다. 그리고 곡물의 짚은 직접 외양간두엄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고, 작물은 이어짓기가 아니라 돌려짓기로 재배되었다. 돌려짓기에는 대부분 벼과의 목초와 토끼풀을 포함하고 있었다. 후자는 뿌리혹박테리아에 의해 공중 질소를 고정하여 토양에 질소분을 더하고, 또 벼과의 목초는 토양 구조의 개량에 기여했다. 사탕무나 감자나 사료용 뿌리채소류 등의 뿌리줄기 작물은 생장하면서 제초제가 아니라 괭이에 의한 철저한 제초가 가능했다. 대부분의 병해는 한 가지 작물에 특이한 것이므로, 다종의 작물을 돌려짓기함으로써 토양 속 병해의 발생이 억제되었다. 제초제 사용은 잡초 방제에 필요한 노동량을 크게 감소시킴과 함께 제초를 위한 휴한이 필요없어진다. 그리고 화학비료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비료원으로 외양간두엄을 대체하게 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일 뿐이다. 그 이후 급속히 경종 농가가 가축을 키울 필요성을 저감시켜 혼합농업은 기반을 잃고 무너져 버렸다.
영국의 조건 불리 지역은 기본적으로 북잉글랜드의 페나인 산맥이나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 도서부, 웨일즈의 일부 같은 고지대나 산악지로 이루어져, 영국의 전체 농업용지 면적의 반분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은 가혹한 기후나 황량한 지형 때문에 영농 조건에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자연 환경이나 야생 생물의 존재가 점차 귀중한 관광자원이 되었다. 이리하여 농촌에서는 자연보호나 야생 생물 서식지역의 보호를 통해 환경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농민은 '사회 임업'이나 관광농원(Pick Yourself Own 농업)과 결합시킨 그린 투어리즘이나 에코 투어리즘 같은 관광업이나, 휴양 같은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서 농업 정책과 환경 정책의 일체화는 농촌에서 이러한 다양한 잠재력을 끌어내 가게 되었다(권두화 10 참조).
토지 이용의 다양화에 대해서는 '셋트 어사이드'라고 부르는 생산력이 높은 농지를 식재료용 작물의 생산으로부터 회수하는 조치가 의무화되고, 특히 곡물 생산량을 감산하는 것이 계획되었다. 셋트 어사이드는 4-11의 사진처럼 일본 식으로 말하자면 '돌려짓기와 휴경'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 면적은 일반적으로 각각의 국가나 지역의 경종 농지 면적의 넓고 좁음을 반영하고 있는데, EU 영역 안의 농지에 관한 법률은 다양한 토지 이용에 전용하는 것도 인정된다. 예를 들면, 공예 작물이나 휴양 활동용지, 자연보전이나 용재 생산을 위한 식림, 바이오매스 연료용 단기 벌채 식림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셋트 어사이드에 전용되는 토지는 한계가 있고, 다른 한편 생산 계속지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집약적으로 경작되는 일이 많아져 결과적으로 생산 수준을 내리는 데에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종래의 집약적으로 전문화가 진행된 밀 생산 집중 지역인 잉글랜드 동부 저지의 농촌 지역은 역설적이게도 식재료를 시장에 출하하는 우위성을 점점 확립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유기농업은 EU 여러 나라에서는 아직 큰 확산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4-11 밀밭의 가장자리에 만들어진 아무것도 심지 않은 영국의 셋트 어사이드 용지(권두화 12 참조)
FAOSTAT의 통계에 의하면, 2019년 전 세계의 화학비료 사용량의 평균은 3000평당 122kg이다. EU 여러 국가는 4-12의 그래프처럼 1970년대는 250kg으로 많았지만, 1990년대를 거치며 감소해 현재는 150kg 전후로 세계 평균과 같은 수치가 되었다. 아메리카는 1970년대부터 세계 평균과 거의 동등하며, 현재도 128kg 전후이다. 똥거름이나 가축의 분뇨 등의 유기물 투입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중국은 1970년 당시 화학비료는 70kg으로 적었지만, 이후 증가를 계속해 현재는 400kg 전후로 매우 많아졌다. 또한, 풀덮개나 퇴비, 똥거름 등의 유기물을 거름으로 사용했던 일본을 보면, 1970년대에는 전통적인 유기질 비료를 대신한 화학비료의 사용량이 400kg 전후로 세계 평균의 6배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그 뒤 서서히 감소해, 현재는 유기물의 투입량과 함께 화학비료도 감소해 250kg 전후가 되었다. 그럼에도 세계 평균과 비교하더라도 2배 전후로 많아진 것이 눈길을 끈다.

4-12 세계의 주요 국가와 지역에서 화학비료 사용량의 추이(1961~2018년)
사용량은 3대 영양소인 질소, 인, 칼륨 비료 각각의 합계치. FAOSTAT에서 작성.
미량 요소는 식물의 생육에서 그 필요량은 아주 적지만, 다량 요소와 마찬가지로 미량 요소도 부족하면 결핍증이 발생한다. 특히 미량 요소는 퇴비에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화학비료를 다투입하고 퇴비를 시용하지 않는 농지가 늘어났기 때문에, 결핍증이 잘 방생하는 토양이 증가했다. 결핍증의 채소를 먹는 인간에게도 무언가 영향이 당연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동은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이 올바르게 기능하기 위함과 정상적인 뼈 형성을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다. 마그네슘은 적어도 300개의 효소 반응에 필수 원소로, 부족하면 주의 결여, 다동성 장해(ADHD), 쌍극성 장해, 울병, 조현병 등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데이비드 몽고메리 등이 쓰고 카타오카 나츠미가 번역한 『흙과 내장 -미생물이 만드는 세계』(2018)이나 요시다 타로우吉田太郎의 『흙이 바뀌면 장도 변한다 -토양 미생물과 유기농업』(2022)에서도 지적되었다. 유기농업은 건강한 흙과 다양한 토양 생물을 배양한 다음에 안전하고도 안심되는 식재료를 생산하고, 환경에 대한 부하가 적고 지속성이 높은 농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완전한 유기농업까지는 가지 않았더라도 농업 밖에서 오는 화학비료나 농약 등의 투입을 적정화하려 도모하면서, 농지에 유기물을 투입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고 토양 유기탄소를 저류하며, 쟁기질을 최소한으로 하는 등 토양을 언제까지나 비옥하게 보전하는 일에 중점을 두는 것은 그 농지에서 수확된 작물을 식재료로 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몸의 건강에도, 환경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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