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논과 풀덮개의 힘
벼농사에 대한 고정관념
일본의 고대 율령국가를 아름답게 부르는 말로 알려진 '갈대가 풍성하고 벼이삭이 싱싱하게 자라는 나라(豊葦原瑞穂の国)'라는 표현은 갈대밭을 맞대면서도 논에 벼이삭이 줄기가 휘도록 여물어 있는 하천의 중류역이나 하류역의 평야 모습을 잘 알아 맞히고 있다. 일본에 논벼가 전파되어 논벼농사 문화가 시작된 것은 2500년이나 3000년 정도 전의 일이라고 이야기된다. 이 논벼농사 문화의 전파는 일본 열도를 서쪽부터 죠몬縄文 문화에서 야요이弥生 문화로 바꾸어 나아갔다.
종래의 역사관에 의하면, 죠몬 시대는 기본적으로 수렵과 채집의 시대이고 벼농사는 물론 농경의 요소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토우 요우이치로우佐藤洋一郎는 유적에 남은 벼의 DNA 해석 등으로부터 죠몬 시대에도 벼농사가 있었단 점, 야요이 시대에는 죠몬 벼농사의 영향을 기반으로 논벼농사가 도입되었다는 가설을 세워, 벼농사 연구에 식물유전학의 입장에서 2018년에 카도카와角川 문고의 『벼의 일본사(稲の日本史)』를 써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에 의하면, 죠몬 시대에 벼농사가 확실히 행해지고 있었단 점이 밝혀져, 그것은 동남아시아로부터 온 찹쌀의 벼인 열대 자포니카를 부대밭에서 재배하던 것이라고 한다.
논벼가 일본으로 도래된 경로도 조선반도 경유, 대륙으로부터 직접 전래, 쌍방이 있었을 가능성 등을 지적한다. 현대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일반 상식에 의하면 "벼라고 하면 논벼", "벼농사라고 하면 논벼농사"이기 때문에, 벼의 도래라고 하면 역시 논벼의 도래를 의미한다. 따라서 벼농사의 도래라고 하면, 논벼농사의 도래를 의미해 버리게 된다. 그런데 죠몬의 벼와 벼농사는 이 상식 밖에 있는 벼와 벼농사라고 사토우는 말한다. 밭에서 밭벼를 농사짓는 것도, 논에서 벼농사를 행하는 것도 '벼농사'의 일부라고 고려한다면, 벼농사는 죠몬 시대부터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논벼농사의 기술을 일본으로 가지고 들어온 당초부터 1-1의 사진처럼 관개 체계가 정비된 드넓은 낮고 평평한 무논 지대가 형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수생식물인 벼에게는 충분한 물이 필요하기에, 큰강 유역의 너른 평야나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논을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곳은 홍수에 휩쓸릴 위험성이 컸다. 당초는 물을 대거나 떼거나 하기 쉬운 주변보다 높고 넓은 평탄지나, 구릉 끝의 작은 골짜기나 산골의 작은 논에서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에 모내기나 김매기, 거름주기, 병충해 방제, 수확 등을 고려하면, 대면적의 논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토우는 "당시의 무논은 숲이나 습한 평원 등의 사이에, 키메라 상태로 이쪽저쪽 전전하며 분포하고 있었지 않을까?"라고 상정한다. 키메라 상태란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자의 머리와 몸, 등에 염소의 머리를 붙이고 뱀의 꼬리를 지니며, 입에서는 화염을 토한다는 전설의 생물인 키마이라(chimaira) 같이 다양한 요소로부터 성립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1-1 멀리 펼쳐진 벼이삭이 물결치는 아키타현 오오가타무라大潟村의 무논 지대
논벼농사의 전파와 토양
일본에서 처음으로 논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00년 무렵의 기타큐슈가 아닐까 이야기된다. 이것이 야요이 시대의 시작 무렵이었다. 그 후 2000년 동안 논벼농사는 일본 열도를 동진하고, 다시 북진해 나아갔다. 그 전파 시기를 지리학자인 타바야시 아키라田林明는 이치카와 타케오市川健夫・야마모토 쇼우죠우山本正三・사이토 이사오斎藤功 편저 『일본의 너도밤나무 지대 문화(日本のブナ帯文化)』(1984)에 수록되어 있는 논문에서, 일본 지도 위에 1-2처럼 알기 쉽게 구성하여 설명한다. 타바야시는 고고학자 등의 식견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논벼농사의 전파 경로와 그 시기를 주로 기후 조건으로부터 설명한다.

1-2 일본에서 벼농사의 전파
벼농사의 개시는 후쿠오카현 이타즈케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에 수반된 탄화미나 토기에 남겨진 나락의 압흔 등으로 뒷받침된다. 기원전 300년 무렵에 큐슈 북부에 상륙한 논벼농사의 기술은 그곳에서 세토瀬戸 내해의 평야를 경유해 키나이畿内에 도착했다고 이야기된다. 야요이 시대의 전기 전반, 기원전 200년 무렵에는 산인山陰을 따라서 교토부京都府까지, 세토 내해 연안을 동진한 계통은 나라현에 도달했다. 그리고 야요이 시대의 전기 후반, 키나이에서 번창한 논벼농사 문화는 이세만伊勢湾 연안과 후쿠이현福井県에까지 이르고, 여기에서 잠시 걸음이 멈추었다. 타바야시는 기후 조건을 고려하면, 큐슈로부터 전파된 서쪽의 벼라도 도우카이東海 지방부터 도쿄만 주변의 지역에서도 충분히 생육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도우카이 지방의 동쪽에서는 자연의 식료품이 아직 풍부해 지금까지 하던 채집·수렵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쉬워 이 점이 벼농사의 동진 속도를 늦추었던 원인의 하나라 생각된다고 한다. 이 시기 벼농사의 동쪽 한계는 조엽수림 지대와 너도밤나무 지대의 경계에 대략적으로 대응하고, 발상지로부터 조엽수림 지대를 따라서 확대되었던 벼농사가 여기까지 비교적 쉽게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요이 시대 전기를 지나 중기에 들어서면, 논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문화가 동일본으로 전파를 개시했다. 큐슈의 오랜 재배종 가운데 감습성이 풍부한 것이 동진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야요이 중기의 전반에 태평양 연안을 나아간 벼농사는 칸토우 서부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중앙 고지에 들어간 벼농사의 하나는 야마나시현 중앙부에, 또 하나는 이나다니伊那谷부터 나가노현 중부에 도달하고, 다시 아사마浅間 산기슭부터 군마현 중앙부, 그리고 토치기栃木・이바라키茨城를 거쳐 후쿠시마현 남부에 이르렀다. 중앙 고지부터 호쿠리쿠北陸 지방으로도 야요이 문화가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야요이 시대 중기의 중엽에 논벼농사는 도우호쿠東北 지방 중부에까지 도달했다. 기원후 300년 전후에는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거의 전역에 논벼농사가 확산되었다.
이처럼 지리학자인 타바야시는 조엽수립 지대가 원산이라 여겨지는 벼가 너도밤나무 지대로 전파된 경로와 시기에 대해서, 주로 기후 조건으로부터 해석을 더했다. 이에 반해 토양비료학자인 후지와라 아키오藤原彰夫는 검은 화산회토와의 관련에서 벼의 전파 경로와 그 시기에 대해서 『흙과 일본 고대 문화』(1991) 안에서 아래와 같은 설을 제창한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논 유적은 큐슈 북부 현해탄 연안의 평야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은 토양 성질과의 관계가 매우 깊다. 곧, 큐슈 북부의 이 지역은 대륙에 근접해 있다는 점도 있지만, 이 지대의 토양은 화산재의 영향이 적은 현무암이나 화강암의 풍화물로 이루어져, 논벼를 농사짓기 쉬운 규산질의 토양이다. 이와 같은 토양은 큐슈 북부를 돌아 오이타현의 쿠니사키国東 반도 근처까지 이어진다. 쿠니사키 반도 북쪽에는 2세기 무렵이 되면 우사宇佐의 호족이 이 땅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넓혀 갔다. 큐슈 북동부의 이 땅이 왜 그와 같은 요지로 번성했던 걸까? 그것은 후지와라 설에 근거하면 토양에 있다고 한다.곧, 쿠니사키 반도부터 남쪽은 화산재의 퇴적이 많아져 농경지로 적합하지 않은 검은 화산회토의 존재라는 큰 벽이 있었다. 우사 지방까지 도착한 논벼농사는 그곳에서 남하하는 것을 꺼렸기에 바다를 건너 세토 내해로 진출했다.
후지와라 설에 의하면, 세토 내해 양안의 평야는 화강암이나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규산질의 토양으로 되어 있어 검은 화산회토가 없고, 초기 논벼농사의 정착을 위한 절호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세토 내해의 평야부에서는 차츰차츰 논 개간이 진행되어 벼농사는 신속히 동진해 현재의 오사카부나 나라현 부근까지 단기간에 도착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 키나이 지방도 또한, 검은 화산회토는 없고 규산질의 토양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기에, 논벼농사는 이 땅에 정착해 야마토大和 조정이 성립하기 위한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1-3 일본 국내의 벼농사 전파 추정도. 후지와라(1991)에서 일부 더함.
또한, 서쪽부터 진행되어 온 논벼농사가 시즈오카 부근의 토로登呂 유적 근처에서 장기간에 걸쳐 정체된 것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도 후지와라는 토양과의 관련으로 설명한다. 곧, 시즈오카 동부의 평야부터 북쪽에는 일본 열도에 가로놓인 큰 건음 화산회토란 벽이 존재한다. 이 벽에 가로막혀 논벼농사의 확대는 여기에서 정체되고, 칸토우 지방이나 그 이북으로 전파되는 것이 늦춰졌던 건 아닐까 한다.
요즘, 호쿠리쿠 지방이나 토우호쿠東北의 한국 동해 쪽에도 오래된 논의 유적이 몇 곳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곳에서 출토된 토기의 형상 등으로부터 큐슈 북부부터 츠시마 해류를 타고 직접 북쪽으로 전파된 논벼농사일 것이라 추정된다. 그리고 이 지방도 또한, 벼농사에 적합한 규산질의 토양으로 이루어진 평야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벼농사는 신속히 정착하면서 한국 동해 쪽을 북상해 나아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기후 조건과 검은 화산회토의 관련을 맞추어 해석해 나아가면, 논벼농사의 전파 경로나 전파가 정체된 지역의 이유가 더욱 명확히 보이지는 않을까? 농경지로서 부적합한 불량 흙인 검은 화산회토 지대가 개척된 것은 토양비료학 연구가 진전된 근대가 되고나서이다. 검은 화산회토에 대해서는 3장에서 상세히 기술하겠다.
벼베기 시기가 되면, 광대한 평야의 전면이 황금빛 일색으로 뒤덮인 듯한 논의 경관은 중세가 되어서도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같은 논에서 매년 벼를 계속 농사짓는 논벼농사는 고작 500년 정도의 역사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토가 반복해 기술한다. 우리는 논벼농사가 일본 열도에 전해진 야요이 시대 이후, 일본의 풍토에 적합해 맹렬한 속도로 일본 열도를 진행해 현재와 같은 논 경관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끝없이 펼쳐진 논이라는 경관이 등장한 것은 아마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논밭을 측량한 이후, 또는 근세에 이르러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앞서 소개한 사토는 말한다. 전국적으로 논밭의 측량이 실시된 것은 16세기 말로, 지금은 21세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는 고작 500년의 역사인 셈이다.
벼의 이어짓기를 지탱하는 논 토양
지금 논은 저지대 평야부를 중심으로 일본 전토에서 볼 수 있다. 논으로 이용되고 있는 약 75억 6250만 평에 이르는 토양은 회색 저지토와 글레이토gley soil가 7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논 지대 중에서도 연중 물이 있을 것 같은 습전이나 배수 불량 습지 등을 파면, 산소가 부족하여 토양이 환원된 결과 이가철이나 망간 등이 생성되어 거무스름한 청록색으로 '시궁창 흙' 같은 상태를 하고 있는 흙이 있다. 이런 흙은 글레이 흙이라 부른다. gley의 유래는 러시아의 속어인 '진창의 흙덩어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논에서는 작토층의 아래를 다져서 '쟁기바닥'을 만들어, 물이 새는 걸 줄여 장기간 담수한다. 산소는 용수에 녹아서 공급되지만, 토양 표면으로부터 몇 mm인 곳까지는 산소가 도달해 적색을 띤 산화층을 형성하고, 그곳에 있는 미생물이 산소를 소비한다. 산화층의 바로 아래부터는 산소 부족의 환원층으로 변화해 나아간다. 논은 여름철에 되면 관개수가 채워진다. 이처럼 물을 담음으로써 환원 상태가 되지만, 겨울철은 물을 떼기 때문에 대기에 닿는 산화 상태가 되어, 그것이 매년 되풀이되기에 유기물이나 미네랄의 분해가 진행되어 벼에 필요한 양분으로 공급된다. 또한, 유기물이 얕은 산화층에서 무기화되어 암모니아가 되는데, 그것이 호기성 질산으로 변하고, 더욱 깊은 환원층에 들어간 질산은 환원되어 질소가스로 변해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탈질' 작용이 이루어진다. 옛날부터 '벼는 흙에서 거두고' '맥류는 거름으로 거둔다'라고 이야기되었듯이, 논벼를 재배하는 논 토양은 맥류나 채소를 재배하는 밭 토양에 비하면 거름 의존도는 낮다. 왜냐하면, 토양 안에서 철과 결합해 불용성 형태가 되어 버린 인산은 물을 담은 논에서는 녹아서 벼에 흡수되기 쉬워진다. 나아가 칼륨이나 그밖의 미량 요소도 논 토양 안에 다량으로 축적되어 있고, 관개수에서도 공급된다. 게다가 물속에 서식하는 일찍이 남조류라 불리던 광합성 질소 고정 미생물인 시아노 박테리아에 의해 대기 중의 질소 고정이 활발히 일어나, 이것도 논의 비옥도를 유지하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논은 영양분의 천연 공급력이 높으므로, 밭만큼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작물이 생육할 수 있다. 논 토양의 산화 환원의 반복에 의해서 미생물이 교체되기 때문에, 논에는 병원균이 집적하는 일도 적다. 또한 이어짓기 장애를 가져오는 원인 중 하나인 토양 동물 왕벼시스트 선충(Heterodera oryzae)는 호기성이기에 논의 혐기라는 조건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물을 담고 있기 때문에 뿌리에 유해한 물질도 분해되고, 과도한 양분도 흘러가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어짓기해도 그 장애가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처럼 논벼농사에서는 원래 이어짓기가 가능했기 때문에 유럽의 밭농사처럼 돌려짓기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논벼농사에서 특히 빼놓을 수 없는 흙의 영양분이란 주로 질소·인·칼륨·마그네슘·칼슘의 다섯 가지이다. 작물은 질소, 인, 칼륨을 흡수해 생장함에 따라 천연에 존재하는 광물 원소, 예를 들면 동, 마그네슘, 아연 등도 받아들여 간다. 다만 서장에서 기술했듯이, 어떤 영양소라도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미생물의 힘이 없으면 식물 뿌리의 주위에 그저 쓸모없이 놓여져 버린다. 식물 뿌리를 둘러싼 뿌리 범위는 식물과 토양 미생물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교섭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균류와 세균은 식물의 뿌리에서 나오는 탄소가 주성분인 삼출액을 소비하고, 그 대가로 식물의 생장과 건강에 필요한 영양 및 대사물질을 주고 있다는 등 최근 토양 과학 분야의 잇따른 발견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하천이 만든 충적 저지의 토양은 유기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지력이 풍부하다. 나아가 논벼농사는 관개수 자체와 상류역에서 운반되어 온 미사에는 미네랄인 철, 마그네슘, 아연, 동, 붕소, 규소 등이 자연의 은혜로 끊이지 않고 운반되어 들어온다. 그 때문에 거름으로 굳이 줄 필요가 없다. 그에 더해, 논에 담은 논물과 농사 흙의 최표층부에는 시아노 박테리아가 서식하고 있어 질소 고정이 이루어져, 논 토양의 질소 비옥성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건 경작지 토양에서 질소 고정균의 분포나 생태의 측면에서 볼 경우, 논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물을 댄 논의 토양은 산소 부족의 환원 상태이기에 벼의 필수 원소의 하나인 토양 속의 인이 철이나 알루미늄과의 결함을 풀고 물에 녹아서 벼가 흡수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인산 비료는 작물의 꽃이나 열매 달림에 관계하기에, '꽃거름'이나 '열매거름' 등이라 불리는 중요한 영양소이다. 쌀은 벼의 열매이기에 인산은 특히 중요하고, 부족하면 잎마름병이나, 쌀이 익지 않는 '생육 불량'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 논벼농사에서는 300평당 수확량 1섬(150kg) 정도의 수준이면 무비료로 수확할 수 있다. 참고로, 쌀 1섬은 하위 단위인 10말에 해당하며, 마찬가지로 100되, 1000홉에 상당한다. 일본에서는 1끼에 쌀 1홉, 1일 3홉이 대체로 성인 1명의 소비량으로 여겨졌기에, 1섬은 성인 1명이 1년 동안 소비하는 양 1,000홉(= 1섬) ÷ 3홉 / 일=333일분과 거의 같다고 간주되어 왔다고 한다. 또한, 면적을 나타내는 일본 도량형의 단위인 반(反)은 쌀 1섬의 수확을 올릴 수 있는 논의 면적으로 정의된 것이다. 따라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의 비교에도 반수反收(300평당 수확량)가 아직도 기준으로 이용된다.쌀을 수확한 뒤에는 왕겨나 볏짚 같은 유기질의 부산물도 다량으로 얻을 수 있기에, 밭농사 만큼 비료 공급원으로 숲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논에 들어가는 질소원으로는 똥거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16세기까지는 음식 찌꺼기나 임야에서 얻을 수 있는 풀덮개나 퇴비가 거름의 주체였다. 풀덮개라든지 야마나시 지방의 사투리로는 '캇치키'라고 부르는 것은 마을 산이나 입회지
入会地(역주: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권리를 지닌 특정 토지)에서 채취하는 봄에 싹이 튼 수목의 나뭇잎이나 잔가지로서, 논이나 밭에 갈아 넣어 유기질 비료로 삼는 것이다.
유기질 비료의 주요 역할에 대해서는 서장에서도 기술했듯이, 흙에 영양 보급과 토양 개량이란 2가지 역할이 있다. 유기질 비료는 무기질 화학비료와는 달리, 흙 속의 미생물에 의해 분해됨으로써 식물이 흡수할 수 있는 무기 양분으로 바뀐다. 유기질 비료는 흙 속 미생물의 '먹이'가 되어 미생물의 번식을 돕기에, 작물을 기르는 데 적합한 흙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거름이 된다. 속효성은 없는 대신, 그만큼 효과가 오래 계속된다. 그리고, 물을 대기 전 논의 흙을 잘 말려 두면 둘수록, 물을 댄 뒤 유기물 분해와 암모니아 생성이나 인산의 무기화도 축진된다고 한다. 이것을 '마른흙 효과'라고 부르고, 비료가 모자란 시대에 농민은 이 효과를 최대한 활용해 벼의 초기 생육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물을 댄 담수기 논에서는 탈질균脱窒菌이 활발해, 거름으로 준 질소의 무려 절반 정도가 탈질에 의해 손실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벼의 일생은 종자인 볍씨의 발아로 시작해, 잎과 줄기의 형성·발달, 이삭의 분화·발달, 개화와 수정, 그리고 종자가 성숙하고 쌀이 되어 일생이 끝난다. 비료는 써레질 전의 '밑거름' 또는 '기비'라고 하는 것이 기본이고, 어린 이삭 분화기의 '이삭 거름', 그리고 발육하여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이 집적되는 여뭄때(등숙기)를 기준으로 시용되는 '열매 거름' 등이 있다. 이러한 밑거름 이외의 이삭 거름이나 열매 거름 같은 웃거름 기술은 19세기 메이지 시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확립되어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밑거름만 주었던 시비법을 대신해 일부를 작물의 생육 기간 후기에 시용하는 웃거름 방법이 메이지 후반에 퍼졌다. 단, 웃거름은 습논에선 별로 효과가 없고, 또 풀덮개나 퇴구비 같은 지효성이 아니라 속효성 비료를 필요로 한다. 그를 위한 기반을 준비한 것이 에도 시대에 진전된 습논의 건답화와 대도시의 성립으로 입수하기 쉬워진 인분뇨의 똥거름, 그리고 상품작물용 금비로서 출회되기 시작한 건조된 정어리(비료용 말린 정어리)나 청어(청어 깻묵)이었다. 웃거름 기술 그것도 대도시 근교에서 성행했던 채소, 면화, 차, 담배 등의 상품작물에서 최초로 행해져, 그것이 벼농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콩깻묵도 등장해 시비량을 더욱 높여 생산량의 증대에 공헌하게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 이후 과인산석회나 유안(황산암모늄) 등 속효성 화학비료의 보급은 그때까지 거름의 주력이었던 퇴구비나 똥거름을 배제해 나아갔다.
풀덮개나 퇴비는 콩의 깻묵이나 말린 정어리 등의 금비, 그리고 타이쇼우大正 시대가 되면 더욱 속효성이고 수고가 들지 않는 화학비료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논에는 생풀이나 풀덮개 등 비료 공급원으로서 숲이 딸려 있을 필요가 차츰 사라졌다. 나아가, 논에서는 비록 화학비료에만 의존하더라도 밭농사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이어짓기 장해, 농민이 말하는 '그루타기'는 발생하지 않는다. 논벼에서는 이어짓기 장해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같은 벼라도 밭벼로 밭에서 재배하면 이어짓기 장해가 일어나 버린다. 밭벼의 이어짓기 장해가 일어나는 한 원인은 앞서 기술했듯이 주로 왕벼시스트 선충에 의한 것인데, 밭벼를 이어짓기해도 그 장해가 일어나지 않는 밭도 있다. 그러한 밭은 퇴비의 투입량이 많고, 유기물이 풍부한 밭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논이든 밭이든, 작물 재배 장소가 똑같은 곳으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주위의 토지에서는 교란이 점점 진행되어 교란 환경에 강한 잡초나 해충, 병원균이 모이게 되어 버린다. 또한 토지의 유기질은 점점 상실되어 흙이 척박해진다. 그러면 벼농사를 계속하며 나름의 수확을 올리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비료분을 보충하면서 제초, 병해충의 방제, 제균 등의 새로운 조작을 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논이란 생산의 장이 정착됨과 함께, 생활의 장도 정착이 진행된다. 정착성이 높다는 것은 지배자에 의한 관리란 점에서는 상당히 편리하다. 어느 마을의 인구는 얼마인지, 어느 정도의 생산량이 있는지 등의 기본적인 통계 조사가 손쉽게 행해진다. 또한 안정된 관리 기구를 만들 수 있기에 권력 자체가 안정된다. 이러한 점도 있어서, 논벼농사의 확대는 중앙집권 국가의 형성에 적지 않게 공헌했다고 생각된다. 야마토 조정은 바로 논벼농사에 힘입은 국가였다. 또한 벼는 '생명의 뿌리'에서 유래했다고 토미야마 가즈코富山和子는 『일본의 쌀 - 환경과 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1993)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참으로 벼야말로 일본 민족의 생명의 뿌리, 일본이라는 나라의 생명의 뿌리, 그리고 앞으로 기술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일본 문화와 녹색 국토라는 두 가지의 생명의 뿌리였다.
풀덮개 등의 풋거름
야츠谷津(골짜기 습지)란 주변보다 높은 대지나 구릉지에서 사람의 손이나 나뭇가지처럼 촘촘하게 뒤엉킨 골짜기를 말한다. 장소에 따라서는 야토谷戸(역주: 평지가 산으로 파고든 곳을 뜻하는데, 일본 칸토우 지방의 구릉 지대를 중심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지명) 또는 야치谷地라고도 불린다. 죠몬 시대 말기부터 야요이 시대에 걸친 대략 2000~3000년 전에, 바다가 물러나 육지로 스며드는 해퇴기海退期가 되어서 야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대지와 구릉이 약 80%를 차지하는 일본 최대의 칸토우 평야에는 대지나 구릉지의 가장자리에서 골짜기 습지 지형을 많이 볼 수 있다. 바로 이 무렵, 일본에 논벼와 그 농사 문화가 들어왔다.
골짜기 습지의 가장 안쪽의 나무들로 둘러싸인 습지 기원부(코쿠토우谷頭)에는 '네다레根垂水'라 부르는 샘이 솟는 터가 있다. 산지나 구릉이나 주변보다 높은 평탄지의 가장자리에서 짜내는 듯한 이 샘물은 겨울철에도 15C정도에 이르러 얼어붙지 않고, 몇 개의 새로 생긴 시내를 모아 골짜기 밑을 파헤치는 작은 시내가 되어 나아간다. 이러한 몇 개의 시내가 더 집합해서 물빠짐이 나쁜, 축축한 습지를 만들어 나아간다. 그러한 장소를 논으로 만들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골짝 습논(야츠다谷津田)이라 부른다. 앞서 기술했듯이, 산에서 끌어오는 물에는 낙엽이 분해되면서 생긴 철, 망간, 아연, 구리, 붕소, 규소 등의 미네랄 성분이 자연의 은혜로 포함되어 있다. 환원이 진행돼 황화수소가 발생해도, 흙 속에 철분이 있으면 불용성 황화철(Fes)이 되어 무독화할 수 있다. 철분 없이 황화수소가 발생하면 벼의 뿌리가 뿌리썩음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이 현상을 '추수 줄남'이라 부른다. 초기 벼 생육은 정상인데 중간부터 뿌리썩음이 생겨 '깨씨무늬병'이 발생하는 등으로 수확기인 가을 무렵이 되면 생육 불량에 빠져 버리는 현상이다. 화강암이 풍화된 듯한 사질로 투수성이 좋아 철분이 흘러 나가기 쉬운 논에서는 '추수 줄남'이 생기기 쉬워진다. 이 추수 줄남을 일으키는 논의 흙은 철이 적은 것만이 아니라, 칼륨과 마그네슘, 규산 등 많은 양분에 대해서도 결핍되어 있는 일이 많기에, 과거 '노후화 논 토양'이라 불렀다. 이들 노후화 논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의 보조금에 의한 산화철 함유량이 높은 토양 개량제의 객토가 실시된 결과, 오늘날 일본은 '추수 줄남'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다.

1-4 나무들에 둘러싸인 골짝 습논(谷津田)의 경관. 아래는 참고도.

담수 상태의 논에서는 온실효과 가스인 메탄 가스도 발생한다. 메탄은 담수 상태가 계속되어 산소 공급이 제한된 환원 상태의 토양 안에서 생성된다. 논 토양 안에는 산소가 적은 혐기적인 조건에서 메탄을 만드는 미생물(메탄 생성균)이 서식해, 논물이 담기면 토양 안의 산소가 적어져 메탄이 만들어진다. 논벼의 줄기나 뿌리는 공기를 통하게 하기 위한 빨대 상태가 되어서, 토양 안에서 만들어진 메탄의 대부분은 이 공극을 통해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 그 때문에 논은 강력한 온실효과 가스인 메탄의 배출원도 된다.
골짝 습논에서는 미네랄류를 듬뿍 함유한 물이 관개수로 사용되기에 미네랄이 풍부한 쌀을 기를 수 있다. 벼과식물은 다른 식물과 달라서 규소 흡수력이 질소, 인, 칼륨보다 매우 많은 것이 큰 특징이며, 그 때문에 벼과식물은 자주 '규산 식물'이라 불릴 정도로 규산질 토양이 재배에 적합하다. 통상 농업 분야에서 규산이라 부르는 것은 이산화규소로, 실리카silica라고도 불린다. 규산이 가지고 있는 광합성 촉진, 뿌리의 활력 증대, 내병성 향상 같은 다양한 생리 기능이 벼가 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한다. 식물에 흡수된 규산은 식물이 시든 뒤에도 그 일부가 플랜트 오팔이라 부르는 투명한 유리질의 미세 파편이 되어 토양 속에 반영구적으로 남아 있다. 특히 벼과식물은 세포에 쌓인 규산 덩어리인 미화석의 플랜트 오팔이 잎에 남기 쉽기에 벼농사의 기원을 탐구하는 고고학 연구에서는 중요한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
골짝 습논 같은 장소는 수해의 위험성이 낮은 것만이 아니라, 골짝 습논 근처에는 숲이나 채초지가 있어 논이나 밭에 넣을 풀덮개나 풋거름이 되는 생풀이나 지붕 재료인 새, 논밭을 갈아엎기 위한 우마의 사료인 꼴(말풀) 등을 채취하는 데에 매우 편리했다. 이러한 점에서 가장 일찍부터 논이 만들어져 논벼농사가 계속되어 온 곳은 마을 산의 골짝 습논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풋거름이라는 것은 녹색인 채의 생풀을 그대로 경작지에 넣고, 흙 속에서 서서히 분해시켜 가는 방식의 거름이다.
골짝 습논과 마찬가지로, 옛날부터 만들어진 논으로 산간지의 다락논이 있는데, 일본의 다락논은 니이가타현의 히가시쿠비키東頭城 구릉으로 대표되는 땅의 일부가 차츰 미끄러지는 지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산지의 땅 미끄러짐에 의해 조성된 보수성이 풍부한 경사면이 계단 모양의 논을 만드는 데 편리해서, 작은 못이나 산허리의 샘에서 논에 물을 댔다. 골짝 습논에 비하면 급경사지에 조성된 다락논은 평야가 적고 개발의 역사가 오랜 서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에 증가했다고 『일본의 다락논』(1999) 저자 나카지마 미네히로中島峰広가 밝혔다.
논에는 1년 내내 물을 담은 습논과 가을에 물을 뺼 수 있는 건논이 있다. 골짝 습논은 골짜기에서 1년 내내 솟아 오는 샘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논에서 완전히 물을 뺄 수 없었기에 습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골짝 습논은 골짜기가 가늘고 길게 뒤얽혀 있는 곳에 있어서, 논의 배수나 수로의 정비가 진전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도 습논이 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습논은 1년 내내 물을 담고 있기에 가을에 물떼기해서 토지를 쉬게 하는 건논보다 생산력이 떨어져 버린다.

1-5 노토能登의 세계 농업유산. 이시카와현 흰쌀 천배미 논(白米千枚田)의 다락논
물빠짐이 좋은 좀 높은 평탄지는 밭으로, 골짜기의 사면은 수원 함양의 역할도 수행하는 낙엽광엽수의 숲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골짜기 습지의 지형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에도 매우 편리한 장소였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마을을 만들고, 골짜기 습지의 기원부에 있는 샘물이 샘솟는 근처에 가뭄이 계속되는 떄라도 물을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고, 수원을 지키고 있는 숲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보살피거나 하는 등 자연을 관리해 왔다. 저수지의 옆에는 반드시 물의 신을 위한 작은 사당이 있었다.
골짝 습논은 완만하게 경사진 골짜기를 조성하기 떄문에 두렁은 평지의 논보다 단차가 있고, 구불구불하기에 튼튼히 만들어야 한다. 모내기 전에 손질을 끝낸 두렁에는 곧 풀의 씨가 날아와 여러 풀이 자라기에 한결 튼튼해진다. 두렁의 풀은 풀덮개와 함께 논에 갈아 넣는 풋거름으로 하거나, 농작업에 사용되었던 우마의 사료나 깔짚으로도 사용되거나 하기에, 소중한 자원이었다. 골짝 습논을 가지고 있는 농가의 사람들은 두러으이 풀베기와 논에 그림자가 지지 않도록 논에 접한 사면에 자라는 떨기나무 손질을 빈번하게 행했다.
토우호쿠 지방에서는 봄이 늦었기에, 숲의 어린잎이 충분히 생장하지 않아 풀덮개를 사용하는 것이 어려워서 여름 동안 부지런히 풀을 베어서 우마에게 밟게 해 외양간두엄으로 해서 논밭에 넣었다. 이치카와 타케오市川健夫는 『일본의 말과 소』(1981)에서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서 소와 말의 분포를 보면 동일본의 말 지역과 서일본의 소 지역으로 이분되어 있었다고 아래와 같이 분석한다.
소는 농민의 가축이고, 말은 무사의 가축이라고 말한다. 소가 서일본에 탁월한 것은 일본의 선진지로 달구지나 쟁기가 보급되어 있었던 것과 관계있다. 키나이畿内에서는 도로 정비가 진행되었기에 달구지의 이용이 가능했고, 또한 조리제条里制(역주: 고대 일본의 토지 구획제도. 토지를 일정한 크기의 정사각형 구획으로 나누고, 각 구획에 번호를 매겨 관리 및 조세 징수의 효율성을 추구했음) 논이 널리 분포했던 서일본에서는 소 쟁기질이 일찍부터 발전해 있었다. 한편 동일본에 말이 많았던 것은, 중세를 통틀어 동국(東国)의 무사단이 기마를 중시한 것에도 한 요인이 있었다.
나아가 이치카와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동일본에 많은 추운 지역이나 고랭지에서는 말 쪽이 '똥 가축'으로는 뛰어나다. 말의 외양간두엄은 발효 온도가 소보다 6도나 높아서 온상에 이용하기에 좋고, 저온의 토양에는 거름 효과가 높다고 여겨졌다.
말똥 쪽이 소똥보다 발효 온도가 6도나 높아서 똥을 이용하는 가축, 곧 똥 가축으로서는 뛰어났다고 한다. 지리학자인 이치카와의 박식함에는 새삼 감탄하게 되는데, 한랭한 토오호쿠 지방이나 고랭한 중앙 고지의 농촌에서는 소똥보다 말똥 쪽이 발효 온도가 높아서 말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랭지나 고랭지에서는 어떻게 우마의 채초지를 확보할 수 있을지가 큰 문제였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일본 농촌의 대부분은 경운이나 운반은 축력에 의지했기에, 대개의 농가는 소나 말을 키우고 있었다. 우마 1마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3000평 전후의 초지가 필요하다. 그 때문에 가을이 되기까지, 풀베기가 날마다 필요했다. 이 작업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침 풀베기'라 하여 이른 아침에 행해졌고, 농민에게는 참으로 '아침밥 전'에 끝마쳐야 할 일이었다. 마을 전체에서 사용하는 넓은 공동 꼴밭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풀을 베어서 풀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골짝 습논의 두렁도 숲도 농도도 농민에게는 중요한 채초지가 되었다. 숲 속도 여름철에 풀베기가 이루어졌기에, 겨울에 낙엽을 쓸 때, 숲의 바닥에는 방해되는 풀이 몽땅 사라졌던 곳도 있었다고 한다.
두렁은 만주와 조선 요소의 초원
50년 정도 전까지는 숲 가장자리나 논두렁에는 도라지나 오이풀 등을 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볼 수 있었다. 「마을 산의 자연(里山の自然)』(1997)을 지은 생태학자 타바타 히데오田端英雄는 이들 식물은 그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중국 동북 지구, 곧 옛 만주나 조선반도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식물로 이루어진 초원은 만주의 '만'과 조선반도의 '선'에서 딴 '만선 요소의 초원'에 다다른다고 한다. 논과 논을 구분하는 두렁은 얼핏 보면 폭이 좁지만, 두렁은 두렁으로 이어져 상당한 면적의 초원이 된다. 만선 요소의 식물은 빙하 시대에 일본 열도가 지금보다 훨씬 건조했던 시기에 낙엽광엽수림을 통해 일본 열도에 정착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타바타는 추정한다. 최종 빙하기에는 북아메리카나 유럽 북부에는 대륙 빙하가 생겨 그만큼 해수면이 낮아져 있었다. 현재보다 해안선, 전문용어로는 정선汀線이라 하는데, 그것이 현재보다 130cm 정도 낮았다고 생각되며, 홋카이도는 사할린과 연결되어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 같이 되어 버렸다. 세토 내해나 도쿄만은 사라져 야쿠시마屋久島와 타네가시마種子島, 츠시마는 큐슈에 연결되고 오키노시마隠岐島도 혼슈에 연결되어, 일본 열도가 지금보다 꽤 규모가 커져 있었다. 그리고 츠시마 해협이 닫히고 조선 해협이 겨우 열려 있는 상황이었다. 즉, 동해는 큰 호수처럼 되어 있고, 난류인 츠시마 해류도 동해로는 들어가지 못했기에 일본 열도의 적설량도 현재보다 대략 40% 적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일본 열도는 전체가 건조하고, 츄우고쿠中国 지방부터 노토 반도 부근까지가 현재의 중국이나 조선반도와 똑같은 정도로 건조해 있었을 것이다.
빙하 시대 일본의 고식생을 조사해 보면, 홋카이도는 빙하 및 고산의 민둥땅과 눈잣나무가 있는 듯한 초지 또는 나무가 듬성듬성한 숲으로 되어 있었다. 홋카이도 서부부터 토우호쿠의 북부·혼슈의 중부 정도까지 아한대 침엽수림이고, 칸토우나 호쿠리쿠부터 츄우고쿠 지방·세토까지가 낙엽광엽수림으로 서어나무 종류나 상수리나무·물참나무 종류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보다 남쪽이 조엽수림대였다. 따라서 츄우고쿠 동북 지구의 옛 만주부터 조선반도를 경유해 낙엽광엽수림을 통해 건조 기후에 적합한 여러 동식물이 일본으로 들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최종 빙하기 이후 만선 요소의 초원을 일본에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죠몬 시대의 조금 전으로 일본 열도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죠몬 시대가 되면 사람이 숲에 불 놓기를 하거나, 부대밭을 일구거나 해서 자연의 식생을 교란하고 파괴하기 시작해, 그 결과 초원이 넓어져 갔다. 그리고 야요이 시대가 되면 사람이 골짝 습논 같은 곳에서 논벼농사를 시작하고, 그에 따라서 두렁이나 제방 등이 생긴다. 1-6의 사진처럼 두렁의 만선 요소의 풀은 사람에게 베어지거나 하기에 억새나 칡 등의 생장이 빠른 여러해살이 식물 등으로 덮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1-6 일본 마을 산에서 보통으로 볼 수 있던 마타리나 오이풀 등이 핀 만선 요소의 초원, 사람이 초목을 베어 없애서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초본은 도라지, 오이풀, 마타리, 용담, 탱알, 고삼, 할미꽃, 초롱꽃, 참취, 솔나물, 삼지구엽초, 모시대, 이질풀, 쑥 종류 등이다. 조선반도나 중국 동북 지구의 초원 같은 식물들이 일본의 두렁이나 제방에서 새로운 서식 지역을 찾아낸 것이라고 타바타는 지적한다.
그런데 두렁이 채초지로 사용되지 않게 되자 제초제로 구제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두렁을 콘크리트로 발라 제초나 두렁치기의 수고를 줄인 곳이 많아졌다. 골짝 습논이 휴경논이 되자 두렁의 풀베기도 행해지지 않게 되고, 두렁은 칡이나 억새에 순식간에 덮여 버린다. 이와 같은 논두렁은 매우 어둡고 습도도 높은 상태가 되어, 만선 요소의 식물 대부분은 살아남기 어려워진다. 일찍이 마을 산에는 초지성 식물을 먹이로 하는 나비가 있었다. 고삼이란 풀을 먹는 큰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나, 제비꽃을 먹이로 하는 왕은점표범나비 등이 그와 같은 나비이다. 논두렁의 만선 요소 초지가 사라짐에 따라 이러한 나비들도 절멸되어 버린다. 즉, 도라지나 용담을 비롯한 만선 요소의 식물은 풀베기가 필수이며, '풀베기에 의해 재배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을 숲 지역의 농작업이나 농촌 생활에 의존해 온 종이다(삽화 ⑧ 참조). 마을 산 지역의 동식물 보전은 자연의 흐름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오랜 역사 속에서 농작업이나 벼와의 공존에 적응한 다양한 생물은 이러한 인위적 환경에서만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골짜기 습지(谷津)의 환경은 자연의 보고
주위보다 높은 평탄지나 구릉의 가장자리에서 짜듯이 나온 샘과 하늘의 빗물에 의지하여 골짝 습논에서는 쌀을 농사지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의 경사면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일 년 내내 비슷한 수온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지지만 벼를 농사짓기에는 너무 차갑다. 그래서 농가는 샘물이 직접 논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위에 도랑을 파고, 솟아난 물이 그 수로를 한 바퀴 돌아 따뜻해진 다음 물꼬로 들어가게 했다. 기타칸토우의 골짝 습논 지역에서는 이를 '히요세陽寄せ'라고 부른다. 중앙 고지인 신슈信州에서는 '누르메温め', 사도佐渡에서는 '에江 등으로 불린 이 수로도 동식물의 보고가 된다. 송사리, 미꾸라지, 붉은개구리, 영원 등이 서식한다. 뱀이나 소리개도 먹이를 찾아서 온다. 물속에는 검정말, 올챙이풀, 물질경이 등의 물풀이 자라고, 제방 부근에는 부처꽃, 보풀, 오이풀, 낙지다리 등이 자란다. 산나물이 되는 고비나 개옥잠화, 잔대, 풀명자, 으름덩굴 등의 생육지이기도 하다.

1-7 논 옆에 판 누르메(나가노현 신슈 아키야마고우秋山郷)
논벼농사에서 중요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흙에 고랑을 파서 만든 진흙 용수로는 매년 논에 물을 넣기 전에 정비해야 했다. 샘물로부터 늘 흘러오는 물은 꽤나 흙을 깎아 운반해, 수로 바닥에 퇴적된다. 논에 물을 담기 전에 이 흙을 긁어 물이 흐르기 쉽게 해준다. 수로의 도중에 흙이 무너져 내려 있는 곳이 있으면, 조릿대나 나무의 잔가지 단을 사용해 흙 붕괴가 일어나지 않도록 보수해야 한다.
진흙 그대로의 수로는 물풀이나 미나리 등의 수생식물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식물이 자라고 있는 곳은 물의 흐름이 완만해져, 물고기나 가재의 은신처나 작은 물고기의 산란 장소가 되거나 한다. 논과 논 사이를 구석구석 통하는 수로는 수생식물에게는 중요한 생활의 장이거나, 수생 곤충이나 물고기나 개구리에게 안전한 장소를 찾아 생활하거나 하기 위한 중요한 회랑의 역할을 담당한다.
비가 적은 지방에서는 샘과 논을 수로에 의해 연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저수지도 만들어 놓은 곳이 많이 보인다. 저수지의 집수역에는 수원을 지키기 위한 나무가 자라고, 저수지에는 마름이나 순채를 비롯한 물풀이 생육한다. 저수지에서 번식한 붕어나 잉어는 농민의 귀중한 단백질원이 되었다. 제방에는 수신의 사당이 모셔지고, 마을 사람들이 공동 부역을 해서 저수지를 관리했다.
대규모 논 지대에서는 농업용 숲을 거의 볼 수 없지만, 대지나 구릉지에 있는 골짝 습논에서는 논과 마을 산의 관계에 대한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생산성이 낮은 골짝 습논은 최근 경작 방기되거나, 주택지나 골프장 개발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또한 논에서 이루어지는 화학비료나 농약의 살포, 양안과 개천 바닥 삼면을 콘크리트로 포장한 용수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숲 등 골짝 습논 주변의 양상이 크게 변한 곳도 많아졌다.
골짝 습논을 안쪽으로 나아가면 나무들로 뒤덮인 산과 맞닥뜨린다. 골짝 습논을 둘러싼 산은 가뭄이 계속될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도록 농민들이 유지 관리해 온 2차림이다. 그리고 산의 수목은 풀덮개나 생풀이나 낙엽 등 농업의 재생산에 쓰이는 자재가 되고, 장작과 숯 재료나 건자재 등 농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자재로 알맞은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 등의 낙엽광엽수나 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초봄의 이 산 속에서는 나무들이 잎을 무성히 하기 전 잠시 얼레지나 백양꽃, 외대바람꽃, 남방바람꽃 등이 잎을 펼치고 꽃을 피운다. 이들 식물은 초봄에만 모습을 나타내기에, '봄 식물' 또는 '스프링 이페머럴spring ephemeral'이라 부른다. 낙엽광엽수의 나무들이 잎을 펼치는 5월이 되면, 잎을 떨구고 이듬해 봄까지 흙 속에서 잠잔다.
얼레지는 산 속의 나무들이 잎을 펼치기 전의 기간에만 지면에 닿는 빛으로 1년분의 영양을 광합성으로 얻는 식물이다. 얼레지를 비롯한 봄 식물들도 두렁의 초원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빙하 시대에 낙엽광엽수림 안에서 분포 지역을 넓히고 있었다. 빙하 시대가 끝나고 따뜻해지자, 일본 서남부는 조엽수림대로 변했기에, 상록수가 우거진 연중 어두운 숲 속에서 얼레지는 살 수 없게 되었다. 5000년 정도 전에 낙엽광엽수림이 칸토우 지방부터 칸사이 지방에 걸쳐 아직 평야를 뒤덮고 있던 무렵에, 죠몬인이 부대밭 농업을 시작했다. 부대밭 이후에 천이에 의해 2차림인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의 낙엽광엽수림이 생겼다. 골짝 습논에서 논벼농사를 시작하고, 주변보다 높은 평탄지에서 밭농사를 하게 되자, 풀덮개를 사용하거나 낙엽이나 생풀을 거두어 풋거름으로 쓰거나 나무를 베어서 장작과 숯으로 만들기 위해 2차림을 유지해 왔다. 이렇게 하여 얼레지는 낙엽광엽수림의 북쪽 사면에서 빙하 시대의 유존종으로 아직도 계속 살고 있다.
골짝 습논의 벼농사는 산기슭의 풀이나 떨기나무를 베어 없애는 '싹 베기(刈り上げ)'라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그 뒤, 차가운 샘이 직접 논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고랑을 논의 주변에 파 놓아야 했다. 그리고, 집에서 가깝고 물 형편이 좋은 논에 못자리를 만들어 4월 15일 무렵에 볍씨를 심는다. 그 위에 모아 놓은 전년의 왕겨를 태워 만든 훈탄 상태의 새카만 왕겨재를 빽빽하게 뿌리고 기름종이로 덮어 놓는다. 못자리의 모가 커져 기름종이를 벗길 시기가 되면, 논이나 수로에는 미꾸라지나 우렁이가 가득했다. 미꾸라지나 우렁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논이란 환경에 적응한 것으로, 농민의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으로도 중요했다. 물론 논 흙의 교란이나 배설물이 논물의 양분 농도를 높여 주기에, 식물의 생육이나 수확량을 높여 주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화학비료나 농약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미꾸라지나 우렁이도 모습을 감추어 갔다.
옛날엔 논의 쟁기질은 소와 말을 부려서 2번 실시했다. 4월 중순이 되면 '벽논 갈이(カベタ起こし)'라고 하여 베어낸 벼의 밑동을 뒤짚어엎는 '거친 갈이(荒起とし)'를 한다. 그 뒤 2번째인 '갈아 엎기(うないかえし)'를 해서 밑거름으로 물을 댄 논에 마을 산에서 채취한 잔가지를 깔고, 생풀을 밟아 넣었다. 봄에 싹이 튼 산의 나무들의 새로운 잔가지나 잎을 분해시키지 않고 녹색인 채로 '풋거름'으로 직접 논에 투입하는 것이 풀덮개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1950년대 중엽인 쇼와 시대 중반까지 전국에서 행해졌다.
상수리나무의 부드러운 새잎은 논에 넣으면 곧 분해를 시작해, 흙 속에 차분하게 녹아들어 간다. 밟아 넣은 어린 가지나 나무껍질은 상승하는 수온에 의해 서서히 분해되어 벼는 그들의 비료분을 흡수하고, 풀덮개가 분해될 때에 내는 발효열에 의해 데워져서 생육되었다. 1년 안에는 썩지 않는 큰 가지는 이듬해 봄 쟁기질할 때 파 내서, 버리지 않고 말려서 소중히 두고 땔감으로 사용했다. 졸참나무나 팽나무 등도 사용되었지만, 가장 많이 쓰였던 상수리나무의 잎은 부드럽고 나무껍질이 졸참나무보다 두터우며 가지 수도 많이 채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낙엽은 그대로 논밭에는 넣을 수 없다고 한다. 그건 잎이 분해되어 부숙할 때 열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낙엽을 이용할 때에는 장소를 정해 쌓아 올리고, 또는 소와 말의 분뇨와 섞어서 발효 숙성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작물에 이용할 수 있는 '퇴비'가 된다. 풀덮개는 이러한 수고나 자재가 없더라도, 논밭의 토질을 개량하고 영양분을 보급하는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한 농민의 지혜였다.
인분뇨도 넣으면서 흙덩어리를 더욱 작게 만들고 부드럽게 했다. 풀덮개는 물고기 거름이나 해초가 풍부한 해안 지역을 제외하면, 고대부터 전국적으로 논의 거름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칸토우의 골짝 습논이 있는 마을 산 지역에서는 풀덮개는 2차 세계대전 전부터 비료 가게에서 팔았던 콩깻묵이나 물고기 거름인 말린 정어리 등의 금비, 화학비료인 유안(황산암모늄)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으로도 전쟁 이후 비료가 부족할 때에는 잠시 풀덮개가 부활되었다.
골짝 습논에서 모내기 준비의 가장 마지막 일은 물이 새지 않도록 두렁에 진흙을 바르는 '두렁치기(クロヌリ)'였다. 전년에 흙벽처럼 발랐던 곳을 괭이나 가래로 잘라내고, 그 면을 나무망치인 곰방메로 다져 물 새는 걸 막도록 다잡는 동시에, 새로이 진흙을 바르기 쉽게 만든다. 미리 진흙을 준비해 반죽한 걸 괭이로 두둑 가생이에 흙벽 모양으로 비스듬히 발라 간다. 이 '두렁치기' 작업은 땅강아지, 두더지, 쥐 등에게 무너져 물이 새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6월 10일 전후에 써레질을 하고, 6월 20일 무렵에 모내기를 했다. 모내기 시기는 현재보다 1달 반 정도는 늦었다. 모내기와 벼베가가 빨라지게 된 것은 전쟁 이후 보온 절충 못자리의 발명이나 품종 개량 등에 의하여 '조기 파종, 조기 이식, 조기 수확'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보온 절충 못자리라는 것은 논 곁에 만든 물못자리와 밭에 만든 밭못자리 양자의 이점을 취합한 못자리로서, 또 기름종이로 못자리의 표면에 덮개를 해서 벼의 생장에 알맞은 온도로 보온하는 못자리이다. 1932년 무렵 나가노현 카루이자와마치軽井沢町의 농민인 오기와라 토요지荻原豊次가 고안해, 나가노현 농업시험장에 의해 개량이 더해져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기름종이는 이후에 폴리에틸렌 필름으로 변화했는데, 보온을 위해서 발열 자재나 전열 등을 사용하지 않고 태양열을 충분히 받아들여 보온 육묘하기에 자재나 설비비가 절약된다. 또한 육모의 규모를 크게 해 대량의 모를 기를 수 있음과 함께 초기 생육이 촉진되고 건강한 모를 조기에 육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랭지의 육묘법에 널리 채택되어 생산의 안정에 공헌함과 동시에, 시코쿠나 큐슈 등 서남 난지의 조기 재배에도 도움이 되었다.
기계력에 의지하지 않던 무렵의 모내기 작업은 대략 1인 1일 150평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기 집의 모내기가 일찍 끝나면, 이웃 집에 도와주러 가는 '유이結'라는 상호부조 제도가 있었다. 억새 지붕의 지붕 갈이나 모내기 등 함께 일함에 따라 공동체의 유대가 강해졌다. 모내기 뒤 3번의 사이갈이·김매기를 행했다. 애벌은 6월 말에, 두벌은 7월 20일 무렵, 세벌은 8월 상순이었다. 여름의 뜨거운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해 도롱이를 입고, 또 규소가 많이 함유된 벼의 잎에 피부가 베이는 걸 막기 위해 팔을 덮는 '팔토시(手さし)'를 끼고서, 몸을 구부리면서 일하는 가혹한 중노동이었다. 그동안 가뭄으로 관개수가 적어지면, 마을들의 물 싸움이 시작되어 밤새 물 당번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주위보다 높은 평탄지의 밭에서는 보리 베기와 고구마밭의 김매기도 있었다. 복날 무렵, 산에 접한 밭에서는 조릿대가 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산과 밭 사이에 도랑을 팠다. 이를 '대숲 자르기(藪切り)'라고 불렀다. 8월이 되면, 마른논이 된 논에서 물을 잠시 떼고 '사이 말리기' 또는 '복날 말리기'라는 작업을 행했다. 논물을 일시적으로 빼냄으로써 땅속 벼의 뿌리에 산소를 공급하여 뿌리를 튼튼하게 발달시키기 위함이다. 아울러 토양을 건조시킴으로써 앞에 기술한 '마른흙 효과'를 도모하는 합리적인 기술이었다. 이 중간 말리기는 에도 시대 중엽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논이라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논의 배수를 쉽게 할 수 있고, 다시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용수를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전제로, 빗물 뿐인 천둥지기에서는 할 수 없고, 완전한 평탄지이며 큰 하천의 삼각주 벼농사 지역과 같은 곳에서도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중간 말리기 기술은 대부분의 논이 경사가 있는 곳에 계단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골짝 습논이나 다락논 지형 쪽이 더 적합하다. 그러한 자연 조건만이 아니라 동시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 용배수 시설을 갖추어 온 축적 위에서 중간 말리기 기술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최근 중간 말리기가 지구온난화 방지의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려졌다. 앞에 기술했듯이, 논은 강력한 온실효과 가스인 메탄가스의 배출원이 되는데, 메탄가스의 발생을 억제하려면 여름철에 논에서 물을 빼고 벼의 생육을 향상시키는 중간 말리기 기간을 늘리면 유효하다는 것이 알려졌다. 메탄 생성균은 혐기성이기에, 산소가 있으면 활동할 수 없다. 따라서 물을 빼고 토양에 산소를 공급하면 온실효과 가스인 메탄가스의 발생이 억제된다. 중간 말리기 기간을 1주일 정도 늘리거나, 논벼 재배 중에 물대기와 물떼기를 반복하는 '끊김 관개'를 고려하거나 하여 메탄가스의 발생을 억제한다. 이들 방법은 비용이나 노동력이 별로 들지 않고, 벼의 수확량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게다가 관개수의 사용을 줄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고안한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도 있는 소재인 중간 말리기란 전통적인 기술도 장기에 걸쳐 하게 되면, 칸토우 평야 이북의 혼슈에 서식하는 도쿄 다루마개구리의 올챙이를 햇볕에 말려 버리는 것은 아닐지 등, 수생 동물의 생물다양성을 빼앗게 되는 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지 염려하는 소리도 연구자에게서 나오고 있다.
초봄 골짝 습논(谷津田)의 생물들
마을 산에 봄이 와 논에서 쟁기질, 써레질, 거름주기 같은 작업이 진행되고 모내기가 행해질 무렵, 논물의 영양 염류 농도가 극도로 높아져, 식물 플랑크톤이 이상 번식한다. 그러면 그걸 먹는 동물 플랑크톤이 이상 번식한다. 플랑크톤이 있는 동안은 작은 물고기나 어린 수생 곤충이 풍부한 먹이를 먹고 자란다. 4~5월 무렵에 논에서 일어나는 완연한 봄의 이 현상을 '스프링 블룸'이라 하는 것 같다. 영양 염류가 소진되면 플랑크톤이 급격히 감소하고, 6~7월 무렵은 스프링 블룸이 수습된다. 그 뒤에는 벼 위에서 생활하는 멸구, 매미충, 거미 등 곤충이나 작은 동물이 수면으로 낙하해 수생 동물들의 중요한 먹이가 된다.
아직 봄기운이 남은 시기에 골짝 습논 안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면, 고추잠자리의 작은 유충이 돌아다니는 걸 알게 된다. 고추잠자리로 친숙한 이들은 여름을 높은 산에서 보내는데, 가을이 되면 평지로 내려와 벼베기가 끝난 뒤에도 물이 남아 있는 습지인 골짝 습논에 산란한다. 골짝 습논에 낳아 떨어뜨린 알은 다음해, 유충이 된다. 고추잠자리의 알은 10℃ 이상이 되면 부화해 버린다. 알은 얼었던 물 속에서 월동할 수 있는데, 유충은 물이 얼면 죽어 버리기에, 알이 부화할 걱정이 없어지는 가을도 깊어질 무렵, 산지에서 내려와 산란한다고 한다. 고추잠자리도 빙하 시대에 대륙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고추잠자리라도 고산에 서식하는 것은 여름이 되어 부화하고 곧 산란한다. 빙하 시대에 건너왔을 무렵은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온난화됨에 따라 그에 적응하기 위하여 산지와 마을 산을 왕복하는 생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고추잠자리의 알이 부화하는 초봄, 역시 빙하 시대에 건너온 일본갈색개구리, 산갈색개구리, 도룡뇽류 등의 양서류도 습논에서 산란을 한다. 이러한 양서류의 알은 수온이 너무 높아지면 죽어 버린다. 최근에는 생산력이 높아지도록 건논화가 진행되었기에, 일본갈색개구리나 도쿄 도룡뇽 등의 산란 장소가 줄어들고 있다. 초봄에 논에서 출산 러쉬가 일어나는 건 물을 댄 논은 적당한 온도이고, 플랑크톤이 풍부한 점, 흐르지 않는 점, 거기에 외적이 적기 때문일 듯하다. 개구리는 옛날 모내기 시기였던 6월까지 올챙이 시대를 끝낸다. 올챙이에서 개구리가 되어 논두렁으로 기어오르고, 논두렁에 있는 귀뚜라미의 유충이 적당한 먹이가 된다. 그리고 여름에는 서늘하고 습한 산 속에서 살아간다. 생물도 또한, 골짝 습논의 농작업이나 벼와의 공존에 적응하면서 골짝 습논의 경작지 생태계 안에서 생활 리듬을 새기고 있었다.
골짝 습논, 저수지, 산은 한묶음
논을 적신 물은 수로로 빠져, 이윽고 하류의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논의 물은 하류의 큰 강과도 연결되어 있다. 5월이 되어 논에 물을 대면, 논에서 데워진 물이 수로를 타고 큰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면 큰 강에서 잉어나 붕어나 메기가 수로나 논 안으로 들어와 산란한다. 산란을 마친 어미 물고기는 곧 큰 강으로 돌아가지만, 태어난 치어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칠 수 있을 때까지 논을 요람 삼아 살아간다. 많은 개구리나 미꾸라지가 있기에, 그걸 먹이로 삼는 유혈목이를 비록한 뱀이나 백로, 때까치, 왕새매 등의 조류도 골짝 습논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저수지에 서식하는 물방개, 장구애비, 게아재비 등은 모내기가 끝난 논에 날아와 논두렁 등에 산란을 한다. 그 비행 거리는 1~1.5km에나 이른다고 한다. 부화한 유충은 얕고 따뜻한 논물 속에서 물고기의 새끼나 올챙이 등 풍부하게 있는 먹이를 먹고 발육한다. 논에서 성장한 유충은 8월 무렵에 성충이 되면 저수지로 날아 돌아가고, 그곳에서 생활하며 월동한다. 8월 무렵에 마른논에서는 논물을 떼고 '중간 말리기'의 작업을 행하는데, 마치 물방개는 마른논에서 물이 사라져 버리는 이 작업을 다 알고 있는 듯한 타이밍이다.
골짝 습논을 둘러싼 자연은 논벼농사가 시작된 야요ㅕ이 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천 년이라는 시대를 거쳐 깃들어 산 이러한 다양한 생물은 논에 물을 대는 시기나 모내기, 중간 말리기, 논두렁의 제초 등의 농사력을 다 알고서 그에 맞추어 번식을 해 온 듯하다. 그리고 골짝기 습지 정도의 작은 면적에서 이렇게나 다양한 요소를 가진 환경을 만들어 내기란 어렵다.
일본 멧토끼는 숲속을 서식처로 하는데, 먹이터는 논두렁이나 저수지의 제방이나 주변보다 높은 평탄지의 밭 등이다. 일본 돌거북도 마을 산 지역의 여러 다른 자연 환경을 오가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마을 산의 생물에게는 2가지 이상 다른 환경이 없으면 번식할 수 없는 종이 많다. 생물에 한하지 않고, 농업에서도 논과 논두렁, 수로, 저수지, 산은 각각의 역할이 있어 하나라도 빠지면 성립되지 않았다. 골짝 습논을 둘러싼 환경은 한 묶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을이 되면 나팔버섯, 그물버섯, 만가닥버섯 등 버섯을 산에서 채취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작은 소쿠리를 들고서 산으로 버섯을 따러 나갔다. 봄의 죽순은 남의 대숲에서 마음대로 캐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가을의 버섯류는 어느 집의 산에서 따더라도 괜찮았다고 한다. 산에서는 벌 애벌레 잡기도 행해졌다. 벼베기는 지금보다 훨씬 늦어 11월 10일 전후였다. 습지인 골짝 습논에서는 논나막신을 신고 차가운 물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하거나, 거머리 방지용 자루를 신고서 벼베기를 했다. 그리고 벤 벼를 논 안에 짜 놓은 볏덕에 이삭을 아래로 해서 걸어 건조시켰다. 볏덕의 가로로 놓는 긴 장대는 똑바른 소나무나 맹종죽을 산에서 베어 와 사용했다. 맑은 날이 계속되면 1주일 정도에 벼는 건조되는데, 비가 이어지거나 하면 1개월이나 말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 뒤, 탈곡과 방아찧기의 일이 이어진다. 쌀은 보통 골짝 습논 300평에서 7~8가마니 정도 거두었다. 6가마니는 공출하고 나머지를 자가 밥쌀용으로 빼 두었다. 탈곡을 마친 볏짚은 논에 쌓아 올려서 짚더미를 만들고, 잠시 건조시켜 놓았다. 지방에 따라서 짚더미의 모양은 다양한데, 벼를 벤 쪽을 바깥으로 하여 단을 묶어 쌓아 올려 간다. 짚더미 안은 따뜻하기에 뱀이나 벌레들의 은신처가 된다. 그러고나서 볏짚을 집터 안의 볏짚 오두막으로 옮기고, 소중히 보존해 놓았다. 볏짚은 땔감에 불을 붙일 때에 쓰거나, 짚신이나 쌀가마니를 짜거나, 새끼줄을 꼬거나, 낙엽과 섞어서 퇴비로 쓰거나 하기에, 말하자면 생활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볏짚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서 콤바인으로 탈곡하면서 볏짚을 잘게 잘라 유기물로 논에 뿌리고 있다.
농작업이 일단락되고 산의 나무들이 단풍이 들고 낙엽지면, 새 베기나 낙엽 쓸기가 일가 총출동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산주는 산판꾼에게 의뢰해 땔감 베기를 시작하고, 맹아 갱신 작업을 시작했다. 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농민은 산주에게 교섭해 벌채한 소나무의 그루터기를 팔 수 있도록 허락받고, 집으로 운반해 건조해 연료로 소중히 사용했다. 어느 정도 양의 땔감이나 섶나무가 1년 동안 사용되었을까? 이바라키현茨城県 임업 경영지도소가 실시한 1958년의 조사에 의하면, 히타치常陸 대지台地에서는 농가 1호당 떌감의 연간 평균 소비량은 178단(1단 10kg)이고, 섶나무가 55단(1단 60kg)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70년 전의 조사이지만, 당시 연간 5톤 가까운 땔감이나 섶나무가 한 집의 농가에서 사용되었던 걸 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은 물론이고, 전재 ㅇ이후 잠시 동안 연료가 부족했던 시기에, 땔감은 상당한 현금 수입원이 되었기에 산주는 타인이 들어와 땔감을 하는 등 황폐하게 해서는 안 되기에, 산을 밤새 둘러보는 '산 파수꾼'을 부탁하곤 했다. '참마 캐기'는 겨울철 즐길거리의 하나이다. 자연산 마인 참마는 말라 시든 잎이 떨어지지 않고 덩굴에 달려 있을 때 찾기 쉬웠다. 마의 상부를 조금 남기고 아랫쪽을 파서 캐면, 남은 부분에서 다시 생장한다. 겨울 한 철에 20~30개는 캤다고 한다. '근절시키지 않는다'라는 2차림 안에서 키워 온 순환과 자원 절약을 기초로 하는 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갈아 낸 토로로에 계란을 섞어서 따뜻한 보리밥에 끼얹어 먹으면 맛있고 식욕이 땡겼다.
풀덮개와 농경용 말
메이지 시대의 농업이 '풀덮개 농업'이라고도 불렸던 것으로부터, 풀덮개를 얻기 위한 낙엽광엽수림은 농업 생산에는 뺴놓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누이 타다시의 『마을 산과 사람의 이력(里山と人の履歴)」(2002)에 의하면, 나가노현 아즈미노安曇野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이쇼 시대까지 풀덮개가 시용되어, 특히 메이지 중엽이 최성기였다. 다만, 일부 농가는 1935년 무렵까지 사용하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비료 부족으로 풀덮개나 풀 모으기로 논 비료를 보충하는 농가도 적지 않았다. 당시, 집터에 가까운 상수리나무・졸참나무 숲은 오로지 현금 수입을 가져오는 멧누에의 사육 전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풀덮개는 주로 옛 공동 부지였던 공유 마을 산에서 채취되었다. 다만, 공유림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논두렁에 직접 상수리나무나 오리나무를 심거나, 하천가 주변의 충적 저지에 많이 자생하는 오리나무나 버드나무 등의 새순에서 자란 잎을 채취해 풀덮개로 썼다. 현재도 요로즈이강万水川의 강가에는 예전 풀덮개를 채취했다고 보이는 오리나무가 남아 있다. 수확한 벼를 자연 건조시키기 위해 말리는 볏덕으로도 이용되었던 두렁의 오리나무에는 콩과 이외의 식물 뿌리에 공생하며 뿌리혹을 만들어 대기 중의 질소 가스를 고정하는, 방선균인 프란키아Frankia를 뿌리에 번식시키는 작용이 있다. 따라서 논의 질소분을 가로채기는 커녕, 오히려 논에 질소를 보급하는 작용이 있다.
두렁에는 들풀만이 아니라, 자주 대두가 심어져 이걸 농민은 두렁콩이라 불렀다. 두렁콩을 심으면 몇 가지 효과가 있다. 첫째 효용은 생태적 효과이다. 서장에서 다루었듯이, 콩과식물은 공중 질소를 고정하는 세균(박테리아)인 뿌리혹 박테리아를 뿌리에 공생시키고 있다. 논을 둘러싼 두렁에 빙 둘러 콩을 심어 놓으면, 대기 중의 약 80%를 차지하는 질소를 흡수·고정하는 뿌리혹 박테리아로부터 질소 비료분을 공급할 수 있다. 두렁콩의 두번째 효용은 콩을 심어 놓음으로써 생태계 안의 다양성이 보전된다. 맛있는 가지콩으로 먹는 두렁콩을 심어 놓고 있으면, 제초제는 사용하지 못하고 콘크리트로 발라 굳어져 있지도 않기에 다른 식물도 살 수 있다. 두렁콩의 셋째 효용은 콩의 자람새를 보거나 수확하거나 하려 농민이 빈번히 논에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때 두렁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논물의 과부족이나 수온이 너무 높지 않은지, 잡초가 나지 않았는지, 벼에 병충해가 발생하지 않았는지 등도 빨리 알 수 있고, 대처도 빠를 수 있다. 벼가 잘 자라는지 어떤지는 무엇보다도 '부지런한 농민의 발소리'라고 한다. 이것도 농민이 오랜 세월 자연과 관계 맺는 법의 경험으로부터 습득한 뛰어난 지혜였다.

1-8 대두 뿌리에 붙은 흰색 알이 뿌리혹에 의하여 고정된 질소
또한 '나무 밑 잡초 소작'에 의해 소작농은 숲 지주의 평지림에서도 풀이나 낙엽을 입수해 비료로 만들었다. 88밤, 즉 입하 무렵을 맞이해 북알프스의 지이가타케爺ヶ岳에 '씨 뿌리는 할아버지'의 눈 그림자가 나타나면, 농민은 '못자리 끝맺음'을 하고 밭에 채소 씨를 뿌렸다. 그리고 마을 산의 풀덮개 숲이 싹을 틔우는 5월 하순부터 6월에 걸쳐서 공유 숲의 산 입구를 열고 풀덮개 베기가 해금되었다. 산 입구의 개방일은 말을 끌고서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여명과 함께 겨루듯이 풀덮개를 베었다. 마을 산에서 여러 날에 걸친 풀덮개 채취는 고단한 중노동이기에 주로 남자의 일이고, 졸참나무와 상수리나무, 밤나무, 오리나무 등의 새순의 잎을 중심으로 칼날이 두툼한 낫으로 베었다. 한편, 풀덮개를 운반하는 건 여성들의 일이었다. 사람의 등에 등짐을 지거나, 새끼줄로 단을 묶어 말 등에 얹거나 해서 '풀덮개 길'을 통과해 논으로 몇 번이나 운반했다. 늦어도 6월 상순까지 풀덮개는 베어 거두고, 산의 입구는 닫혔다.
말의 등에는 양 옆구리에, 길이 약 60~90cm의 가지를 3단씩 합계 6단을 배분해서 쌓았는데, 이걸 1짐바리(태駄, 약 100kg)라고 부른다. 논두렁까지 운반한 풀덮개는 뒷갈이로 보리를 농사짓는 논을 중심으로 애벌 써레질을 마친 수렁논에 어린 잎이나 잔가지가 달린 채 흩뿌리고 밟아 넣었다. 그 투입량은 300평당 1.7~3.9톤(15~35짐바리)에 달했다고 한다. 풀덮개 밟기(논밟기)는 부녀자의 일이기도 하여, 맨발 또는 논 나막신이나 큰발(大足)을 발에 달고 논에 들어가, 풀덮개를 밟아 넣었다. 말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말 돌리기'라고 하여, 코뚜레에 180cm 정도의 막대를 연결한 '밟는 말'을 논에 넣고, 수렁농 안을 끌고 다니거나, 말에게 '써레'나 '남태(별사탕차コンペト車)'를 끌게 하거나 해서 '풁덮개 밟기'나 '흙덩이 갈아 부수기'를 행했다. 남태란 것은 1-9의 사진처럼 둥근 통나무에 50개 정도의 느티나무로 만든 이빨을 박아 넣은 것으로, 그 위에 사람이 타는 널판지 받침을 달고서 논에서 말이 끌고 다니게 한 것이다. 이빨이 '별사탕'의 돌기와 비슷했기에 별사탕차라는 이름을 붙였다. 흙덩이가 많은 아즈미노 지방에서 발명된 농기구로, 194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었다.

논 나막신 종류


큰발 종류와 시착한 모습

1-9 풀덮개를 논에 깔고 넣기 위한 별사탕차(나가노현 호타카마치穂高町 향토박물관의 전시)
이리하여 풋거름으로 풀덮개를 밟아 넣고 본 써레질을 마친 논에 6월 중순부터 하순에 걸쳐 깔아 넣은 잔가지 사이에 모내기가 행해졌다. 밟아 넣은 어린 가지나 잎이 상승하는 수온에 의해 서서히 분해되고, 벼는 그 비료분을 흡수하는 동시에 분해될 때 나오는 발효열에 의해 따뜻하게 데워져 생육했다.
이처럼 풀덮개 농업의 시대에는 풀덮개의 운반이나 밟아 넣기·써레질 등의 여러 작업에 말이 담당한 역할이 컸다. 그러나 산간지와 달리, 일부 지주를 제외하면 신슈의 아즈미노에서는 말을 소유하고 있는 농가는 적었다. 그래서 말을 조달하기 위하여 카미미노치군上水内郡이나 기타아즈미군北安曇郡 등 산간지의 말 산지로부터 농번기에만 말을 빌려오는 대마貸馬·차마借馬 관행이 있었다. 이 관행은 에도 시대 중엽에 성립되었다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 활발히 행해졌다. 풀덮개 베기가 시작되기 약간 전인 5월 중순, 12일 15일, 18일, 22일에 현재의 나가노현 오오마치시大町市 샤쿠마借馬(옛 샤쿠마무라借馬村)에서 말 시장이 열렸다. 장날에는 '세마'를 빌리러 아리아케有明부터 북쪽으로 20km를 걸어서 외출했다. 대차 기간은 일반적으로 5월 중순부터 모내기가 완료되는 6월 중순까지 1개월이었다. 말의 대차료는 그 말의 능력에 따라서 다양했는데, '반납 지불(上げ取り)'이라 하여 결제는 '반납 말'일 때, 곧 일이 끝나서 말을 돌려줄 때 지불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또한, 논벼 수확 뒤인 10월 10일에 지불하는 '열흘 밤 지불'이라는 결제 방식도 볼 수 있었다. 대차료는 쌀 1바리에 약간의 금전을 더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이 물납이었다. 또한, 말을 돌려줄 때 와사비나 볏짚을 토산으로 함께 말에 딸려 보내기도 했다. 옛 호타카마치 논 지대의 말 소유 농가는 농번기가 지나면 말을 우츠쿠시가하라美ヶ原 목장으로 보내거나, 마을 산에 가까운 목장 마을(牧集落)의 농가에 맡기거나 했다. 이처럼 당시 농업 경영에 필요했던 말은 1860년대 후반 메이지 초년에는 1029마리를 헤아렸는데, 1930년에는 455마리, 그리고 1970년에는 11마리로 감소했다.
자운영과 금비
20세기 메이지 30년대가 되면, 풀덮개나 낙엽, 볏짚, 퇴비와 외양간거름, 나무재 등의 자급 비료에 더해 콩깻묵이나 정어리나 청어의 깻묵 같은 물고기 비료, 골분, 칠레 초석, 생석회 등의 금비가 보급되었다. 나아가 1907년(메이지 40년) 무렵부터는 자운영(Astragalus sinicus) 재배가 아즈미노 일대에 급속히 확산되어, 다이쇼 시대를 전성기로 1965년 무렵까지 재배되었다. 자운영은 중국 원산으로 여러해살이풀인 콩과의 식물이며, 자홍색에 흰 반점이 있는 나비 모양을 한 꽃이 8~10개 달린다. 봄, 자운영이 피면 논 전체가 자홍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된다. '연화초蓮華草'라는 것은 이 꽃을 연꽃으로 본 이름이다. 자운영 씨앗은 미노美濃(기후현)에서 구입했다. 이 지역의 자운영 재배의 보급은 마츠야마松山 쟁기의 개발에 수반한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에 의한 바가 크다고 이야기된다. 자운영 씨앗을 뿌리는 건 8월 하순 논의 물떼기 이후부터 시작해 9월 하순이 적기라 하며, 뒷그루로 생육해 월동시킨다. 그리고 이듬해 5월 하순 개화함과 함께 말을 논에 들여 쟁기를 끌어서 자운영을 갈아엎는다. 자운영은 콩과식물이기에, 뿌리에 뿌리혹 박테리아가 부착되어 대기 중의 질소 가스를 흙 속에 고정시킨다. 이 질소 고정력은 강대하여 10cm 정도의 생육으로 대략 300평당 7~9kg의 질소를 고정할 수 있다고 하기에 놀랍다. 이건 뒷갈이로 심는 벼의 비료가 되고, 자운영의 종자를 뿌리면 그 뿌리가 흙 속 깊이 파고들기 때문에 흙을 깊이 갈이했을 때와 똑같이 공기가 통하기 쉬워지는 효과가 있다. 자운영은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화학비료가 출회되기 전까지 효능이 뛰어난 풋거름으로 금비와 함께 주요한 비료가 되었다. 그래서 봄이 되면 논은 전체가 자운영밭이 되어 1-10의 사진처럼 자홍색으로 물들었다(삽화 9 참조). 화학비료의 공급이 적었던 당시, 물고기 비료 등이 상당히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만큼, 새로운 속효성 자급 비료로 얼마나 중요시되었을지 알 수 있다. 자운영이 보급되자, 마을 산에서 베어 가져오던 중노동이 수반된 풀덮개는 차츰 그 필요성이 줄어들어 갔다.

1-10 예전 논은 봄이 되면 자운영 꽃으로 진홍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이 되었다.
질소 비료는 주로 광합성을 행하는 잎에 영향을 주는 성분으로 모든 작물의 생육과 수확량에 가장 크게 관련된 영양소이다. 식물체의 단백질이나 핵산 등을 만드는 기초가 되기도 하고, 줄기나 잎을 신장시키며, 잎 색을 짙게 하기 위한 '잎 거름'이라고도 불린다. 20세기 초인 다이쇼 시대가 되면 질소 비료의 공업 생산이 성행하게 되어, 콩깻묵이나 물고기 깻묵, 골분 등의 유기질 비료로부터 무기질 화학비료로 이행하는 걸 급속히 진행시켰다. 유안이나 석회질소, 과인산석회, 황산칼륨 같은 화학비료가 다이쇼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키무라 시게미츠木村茂光의 『일본 농업사』(2010)에 의하면, 쌀의 300평당 수확량은 1860년대 후반인 메이지 초년 1.24섬에서 다이쇼 전기에 1.85섬, 쇼와 시기에는 1.95섬으로 급속히 상승한다. 메이지 초년을 100이라 하면, 다이쇼 전기 149, 쇼와 시기 157이었기 때문에 20세기 초인 다이쇼 전기까지는 거의 달성한 것이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가 되자, 배합비료나 합성비료도 일반적이 되었기 때문에, 자운영을 재배하는 농가는 차츰 줄어들어 갔다. 앞에 기술했듯이 보온 절충 못자리 등의 보급에 의해, 모내기 시기를 앞당길 수 있게 되어 자운영의 뿌리혹 박테리아에 의한 질소 고정 효과가 충분히 올라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게 되어 버린 점도 결과적으로 자운영 감소를 뒷받침해 버렸다. 자운영이나 풀덮개, 퇴비 등의 전통적 비료는 효과가 지속되는 대신에, 지효성이란 것과 효과가 나타나는 시기를 조절하는 것이 어려운 점이 난점이다. 공기 중의 질소가 고정되어 유기 성분에 포함되어 있는 상태를 '유기태 질소'라고 하고, 단백질이나 아미노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유기태 질소는 토양 미생물의 작용으로 '암모니아태 질소'로 분해되고, 그걸 다시 질산화 세균에 의해 질산화되면 '질산태 질소'가 되어 식물인 작물은 질소를 흡수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시간을 요함과 함께, 비나 기온에 좌우되거나 해서 작물의 생장기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 점, 화학비료는 최초부터 작물에 흡수되기 쉬운 질산태 질소를 곧바로 공급할 수 있기에, 질소를 효과를 내고 싶을 때에 효과를 볼 수 있다. 따라서 더욱 속효성인 화학비료가 있다면 인간의 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기에, 풀덮개나 낙엽 퇴비 같이 수고가 드는 전통적인 시비법에 의존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이 큰 이점이다.
일본의 다비집약적 논벼농사는 재배 기술의 진보, 화학비료와 농약의 보급, 기계화의 진전 등에 의해 높은 증산 의욕에 힘입어, 더욱더 다비집약의 정도를 더하면서 비상한 기세로 수확량을 높여 나아갔다. 덧붙여 2018년 현재, 쌀의 300평당 수확량은 529kg(약 3.53섬)이기에, 메이지 초년을 100이라 하면 285로 3배 가까이 되었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서 크게 진행된 습논의 건논화는 벼농사의 다비집약화와 동시에 논 2모작의 발전도 가져왔다. 원래 1년 안에 같은 토지에서 습윤열대 원산인 논벼와 비교적 건조한 냉량한 기후를 좋아하는 맥류, 유채 등을 농사지을 수 있는 조건의 토지 등은 세계에서도 드물다. 이것은 일본의 기후가 기온의 한난차가 매우 커 여름은 습윤열대, 겨울은 건조냉온대의 기후를 볼 수 있기 때문으로, 특히 태평양 연안의 특수한 기후 조건 덕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배수 설비가 정비되어 비로소 논 2모작이 가능해졌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논 2모작과는 조금 다르지만, 지목 교체의 일종으로 논밭 돌리기란 것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논 상태에서 논벼의 생산을 몇 년 동안 계속하고나서, 그것을 밭 상태로 해서 몇 년 동안 목초, 채소, 사료작물, 공예작물 등의 밭작물을 재배하고 다시 논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주기적, 계획적으로 반복하는 경작지 이용 방식이다. 다만, 논밭 돌리기에는 논 2모작 같은 1년 이내에 이용을 전환하는 건 포함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경작지의 물리적 성질에 변화가 주어져, 잡초나 병해충을 방제할 수 있고 이어짓기 장해의 회피, 작물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방식이었다. 논밭 돌리기는 에도 시대 중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킨키 지방을 중심으로 목화농사와 논벼농사가 교체로 행해지고, 그 뒤 1950년대까지 나라현이나 토야마현에서 수박, 채소와 논벼의 교체, 홋카이도에서 목초와 논벼의 교체란 방식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들 논밭 돌리기에서는 토양의 성질이 개량되어 잡초가 줄고, 밭작물의 이어짓기 장해가 회피되어 논벼, 밭작물 모두 수확이 늘어나게 되는 등의 기술적 이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옛날의 논밭 돌리기는 논의 용수 부족, 유리한 환금작물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했기에, 이들 조건이 해소되자 논으로 돌아와 버려서 논밭 돌리기는 소멸되었다.
1960년대 말에 쌀의 자급 달성이 현실화되자, 1970년부터 '벼농사 재배면적 축소 정책'이 시작되었다. 1987년에 개시된 논 이용 재편 대책 중에 마을 영농을 조직하고 논벼와 전환 재배 작물을 블록 로테이션이라는 형태로 이어짓기의 회피, 지력 회복, 마을 내 부담의 공평성 등의 이유로 논밭 돌리기가 널리 실시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두를 재배했을 때 그 수확량 저하가 가시화되고, 토양 유기물 함량 등의 비옥도 저하가 우려되었다. 논밭 돌리기 조건에서 비옥도 변동이 일어나는 법칙성이나 메커니즘의 해명 등, 앞으로 논밭 돌리기의 새로운 연구가 과제로 남아 있다.
논과 거름의 위기
이야기를 논 2모작으로 되돌리면, 앞그루인 논벼의 그루갈이로 밀, 보리, 유채 등이 재배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먼저 미국과의 MSA(상호 안전보장법)에 근거한 달러 차관, 무기 공여의 대가로 밀 수용에 의하여 논벼농사의 그루갈이인 맥류 농사가 붕괴되어 갔다. 그 뒤에도 고도 경제성장기에 정부가 공업제품 수출의 대가로 밀, 대두, 사료 곡물 등의 수입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결과, 논 2모작은 완전히 붕괴되어, 현재의 논 이용 방식은 논벼 홑짓기, 이어짓기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농업 노동력의 감소, 고령화, 경종과 축산의 분리 등과 함께 최근에는 퇴비 등의 유기물 시용량이 해마다 감소하고 있으며, 토양 속의 유기물 함유량이 확실히 저하되는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은 화학비료, 농약 시용의 단순히 양적인 증대만이 아니라, 벼농사 기술의 변화에 수반해 진행된 것이다. 예를 들면, 화학비료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생육 후기에 중점을 둔 웃거름 기술의 발전에 결합되어 있고, 동시에 비료의 형태도 유안, 요소, 과인산 같은 단일성분 비료로부터 고도화성 비료로 완전히 대체되어 갔다. 농약도 또한, 조기 재배나 기계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사용량을 증대시켜 갔다. 그러나 화학비료는 경작지로부터 유망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어, 시용한 화학비료의 대략 절반 가량은 유망되어 버린다. 이 유망된 초산태 질소가 하천이나 지하수에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호수나 바다로 흘러 나가서 부영양화를 일으켜 녹조나 적조의 대발생 같은 환경문제를 일으킴과 함께 직접 인간의 몸에 해를 주는 문제도 생기고 있다. 인간은 호흡을 하면 혈액 속 헤모글로빈 안의 철분과 산소가 결합해 철분이 온몸으로 산소를 운반하고, 산소를 놓아준 철분은 영양소와 결합해 온몸으로 영양을 운반한다. 그런데 높은 농도의 질산태 질소가 체내에 들어오면 질산태 질소는 철분과 결합해 철분이 모세혈관으로 운반하더라도 산소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 때문에 산소가 결핍되는 '메트헤모글로빈 혈증'을 발병시키게 된다. 질산태 질소 문제는 지하수를 식수로 이용하고 있는 유럽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곳에서는 화학비료뿐만 아니라, 가축의 분뇨 등에 포함된 암모니아태 질소가 질산태 질소로 변화하면서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과정을 포함해 심각한 환경문제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사람의 피해 보고는 없지만, 2003년 10월 28일 아사히 신문의 기사 「환경과 농촌·도시의 지속적 발전 농촌 편상」에 의하면, 일본에서도 적어도 매년 수십 마리의 소가 메트헤모글로빈 혈증으로 죽고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 일본에서는 농약의 삭감은 강하게 의식되지만, 비료의 삭감은 별로 의식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비료 투입량은 늘었고 가축의 분뇨도 농지에 투입되어 그 반동의 결과로 질산태 질소 문제가 부상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농업의 기계화, 화학화와 함께 농업용 숲이나 풀덮개 등 풋거름의 중요성이 사라져, 그 대부분이 방기되면서 자취를 감추어 풀덮개 숲이나 자운영밭 자체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들은 거름으로 사용되던 절반 가까운 질소를 대기 중에서 고정시켜 논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논 생태계 안에서 이용되던 전통적인 유기질 비료 여러 가지가 생태계 밖에서 가지고 들어오는 화학비료로 대체된 것이다. 앞서 일본 논 토양의 비옥함을 자연 조건으로 설명했지만, 그와 함께 대량의 자급 비료를 농민들이 땀 흘려 논으로 운반해 매년 거듭해 투입하던 노동의 산물이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1-11 논에서 퇴비 시용량의 추이(1967~2015년)
지력증진법에 의거해 2008년 농림수산성에서 개정·공표한 '지력증진 기본 지침'에서는 퇴비의 표준적인 시용량으로 볏짚 퇴비 환산으로 논에서는 300평당 1~1.5t, 보통 밭에서 1.5~3t이다. 밭의 퇴비 시용량에 대해서는 누년 통계는 없지만, 논의 퇴비 시용량은 그래프와 같이 최근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농림수산성 '쌀 및 보리의 생산비 조사' 각 연도에 따라 작성.
1960년대 후반 논 퇴비의 시용량은 1-11의 그래프와 같이 300평당 500kg 안팎이었다. 그것이 해마다 계속 감소해 50년 뒤인 2015년의 퇴비 시용량은 약 1/10인 51kg까지 떨어져 버렸다. 지력증진법에 의거해, 2008년 농림수산성에서 개정·공표한 '지력증진 기본 지침'에서는 퇴비의 표준적인 시용량으로 볏짚 퇴비 환산으로 논에서는 300평당 1000~1500kg, 보통 밭에서 1500~3000kg으로 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주요 작물별 퇴비의 표준적인 시용량을 각각의 시비 기준 등에서 정해 놓았. 그러나 화학비료 등 질소비료를 과다하게 주는 것과 그에 대한 과신에 의하여 외양간두엄 등을 시용하지 않았던 결과, 실제로는 토양 유기물의 상실을 가속화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여 탄소의 저류 기능이나 물질 순환 기능이 대폭 저하된 것을 의미한다. 퇴비에 의한 흙 가꾸기는 토양의 양분 유지 능력을 강화하고, 투입된 비료 성분의 이용률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토양 병충해 등의 피해 경감 등에도 효과가 인정되고 있다. 토양 유기물이 토양 비옥도 유지에 필요한 것은 직접 농작물의 영양원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영양분의 방출과 섭취의 촉진을 돕는 토양 생태계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가타오카 나츠미 번역 『흙의 문명사』(2010)에서 토양 유기물과 토양 비옥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기술하고 있다.
유기물은 수분의 유지를 도와 토성을 개량하고, 점토나 부식으로부터 영양이 유리되는 걸 촉진해 그 자체가 식물 영양소가 된다. 토양 유기물이 손실되면 토양 생물상의 활성이 떨어지고, 따라서 영양분의 순환도 느려지기 때문에 수확량이 감소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퇴비 시용의 감소에 의해 미량 요소가 결핍된 일종의 '영양실조' 상태의 농작물을 먹어야 해서, 서장에서 기술했듯이 사람의 건강에도 영향이 미칠 것이 염려된다. 그러나 흙 속 부식의 양이 감소하는 일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느린 변화야말로 소비자인 우리는 물론 농민에게도 때로는 느끼기 매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에 들어서 농림수산성은 '생태계의 물질 순환 등을 활용해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면서 환경에 대한 부담을 경감하는 지속가능한 농업'을 환경보전형 농업으로 규정하고, 환경을 배려하는 농업의 관점을 추가해 추진해 왔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서 유기농업이나 환경보전형 농업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일부로, 아직 일반적이지는 않다. 화학비료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야기로 수천 년의 일본 벼농사의 발걸음은 오히려 물이나 마을 산의 풀과 나무가 지닌 양분 공급력에 힘입어 왔다. 화학비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늘날의 일본에서는 그 모습이 잊혀져 버린 듯하지만, 흙과 거름의 자연력을 살리는 방법을 되찾으면 농가는 화학비료의 부담이나 사람과 환경에 대한 부하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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