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에도, 도쿄의 분뇨는 어디로
똥거름의 효용과 변소
생물로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생명을 빼앗아 그걸 식재료로 먹고 분뇨로 배설함으로써 오래 살 수 있다. 식재료는 이용된 뒤에 분뇨가 되어 신선 야채의 생태를 뒷받침한다는, 자연과 인간이 뒤얽히는 경작지 생태계를 1960년대 무렵까지 만들어 냈다. 인간 사회와 그 배설물인 인분뇨의 관계는 나라에 따라서도 지역에 따라서도 다양하며, 또한 그 변천도 복잡하다. 예를 들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인간 배설물, 즉 인분뇨는 오랜 세월에 걸쳐 농업, 특히 도시 주변의 '거름'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기예의 지리학자 유자와 노리코湯澤規子는 『똥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2020)에서 이것을 단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한편, 유럽 사회에서 인분뇨는 비료라는 가치물과 전염병 등을 매개하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하는 오물이란 2가지 평가 사이를 요동쳤는데, 후자의 오물로서의 자리매김이 지배적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돌려짓기의 대략적 체계 안에서 주로 가축의 배설물이나 그것으로 만든 외양간두엄에 의해 지력 유지를 실시해 왔던 유럽의 농촌에서는 경작지에 인분뇨를 시용하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적었던 듯하다. 와타나베 젠지로우渡辺善次郎의 『도시와 농촌의 사이 -도시 근교농업사론-』(1983)에 의하면, 로마 시대에는 채원이나 과수원에서 똥거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타카하시 에이이치高橋英一의 「비료가 왔던 길 돌아갈 길』(1991)에서도 중세 말의 영국 도시 근교 농촌에서도 도시에서 배설되는 똥거름이 상당히 조직적인 수집과 시용을 행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일본처럼 인구가 많고 가축이 적은 농촌에서는 인분뇨를 부숙시킨 똥거름은 비교적 싼 가격으로 구하기 쉬운 비료로서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이용되었다. 대도시의 주민이나 무사 같은 비농업인구로부터 배설되는 인분뇨는 주변 농촌에서 떠맡아 똥구덩이에서 부숙시키고나서 논밭에 똥거름으로 뿌려졌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 먹을거리는 소화·흡수라는 변화를 받아 칼로리와 양분이 인간의 몸에 흡수된 뒤에, 몸 밖으로 배설된다. 그러나 배설물에는 아직 인간이 소화·흡수할 수 없었던 칼로리와 양분이 남아 있어, 작물을 기를 여력이 상당히 남아 있다. 똥거름의 이용은 무로마치 시대 무렵부터 볼 수 있었던 듯한데, 에도 시대가 되어 많은 인구를 품은 성의 시가지가 정비되자 그 이용은 본격화되었다. 주변의 농촌으로부터 시가지의 인분뇨를 퍼내러 나오게 되었다. 에도의 상공인 지역이나 무가 지역에서는 각각 단골로 드나드는 농민과의 관계가 생겨, 자신이 농사지은 작물 등을 납입하고 똥 청소권을 얻어 인분뇨를 구하고 있었다. 에도에서 거주하는 상공인 대부분은 공동 주택(역주: 일본 도시부의 공동 주택 나가야長屋에 대한 설명은 여기를 참조)에 살아서 공동 주택의 지금으로 치면 관리인인 집주인이 똥 청소인인 농민과 계약에 의해 공동 변소를 퍼내는 요금을 받고, 그건 집주인의 수입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에도 시대의 농가는 촌장이나 조장 등 마을 상층부에 속한 자를 제외하면 대략 25평(약 83㎡) 안팎의 넓이이고, 지붕은 새 아니면 널빤지였다. 또한 마굿간도 인간과 동거하는 형태로 봉당의 한켠에 설치되어 있는 곳이 많았는데, 변소만이 본채와는 다른 건물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1649년 「케이안 고시문(慶安御触書)」에도 변소의 건축법이 상세히 적혀 있다. 그런데 「케이안 고시문」이라는 것은 막부가 농민에 대해 내건 막부법(幕法)이었다고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 성과에 의하면, 이건 막부가 내건 것이 아니라 겐로쿠元禄 무렵에 코우후번甲府藩에서 작성한 것인데, 19세기 전반 에도 후기인 분세이文政 연간이 되어 현 기후현의 미노국美濃国 이와무라번岩村藩에서 출판되고, 이것이 각지로 퍼졌던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되는 듯하다. 그 「케이안 고시문」을 읽어 보면, "백성은 거름이나 재를 취해 놓을 것"과 같이 자급 비료 제조의 지시가 적혀 있었다. 동시에 "변소는 넓게 만들어, 비가 내려도 똥항아리 안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부부 뿐이고 말을 키우지 않는 사람은 마당에 90cm에 3.6m 정도의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쓰레기를 쓸어 모으고, 또한 길의 잔디를 베어 거두어 넣으며, 부엌 등의 배수를 흘려 넣어서 비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변소의 구조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또 상세한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는 건 당시, 똥거름으로서 인분뇨를 이용하는 일이 아직 전국적으로는 보급되지 않았던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변소를 주거에 비해 넓게 만든 것은 변소가 비료의 저장 장소를 겸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농가의 낡은 변소는 대변소와 소변소로 나뉘어 있었다. 이것은 시골만이 아니라, 에도의 대처에서도 대소변은 같은 장소에 배설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던 듯하다. 미츠마타 노부코三俣延子의 논설 <도시와 농촌이 육성하는 물질순환 -근세 교토에서 이루어진 똥오줌 금전 거래의 사례>(2008)에 의하면, 특히 교토 주변의 교토 특산 채소 산지에서는 소변과 대변을 가려 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변의 주성분인 요소는 대변보다도 영양분이 많고, 게다가 요소 쪽이 대변의 주성분인 암모니아보다 흙이 산성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흙에도 작물에도 훌륭한 거름이 될 것이다.
타니 나오키谷直樹・엔슈 나츠코遠州敦子에 의한 『변소 이야기』(1986)에 의하면, 소변소는 일반적으로 안채의 입구 왼쪽에 설치되었다. 소변소를 출입구의 옆에 만들어 '문옆 변소' 또는 '출입구 변소'라고 부르는 곳도 있었다. 가족만이 아니라 손님 것까지 모아서 거름으로 만들려고 하는 눈물겹기까지 한 궁리를 볼 수도 있다. 또한 5개 큰 가도를 따라 있는 농가의 대부분은 '반농반숙'이었기 때문에 측간을 가도에 면해서 짓고, 나그네에게 사용하게 함으로써 분뇨를 모아 똥거름으로 농업에 이용했다. 지리학자 이치카와 타케오市川健夫의 『풍토 속의 의식주』(1978)에 수록된 '변소 문화고'에 의하면, 야츠가타케八ヶ岳 서쪽 기슭의 야마우라山浦 지방에서는 변소의 똥항아리 옆에는 아게츠보あげ壺(거름통이라고도 함)가 있어, 거기에 인분뇨를 옮겨 걸쭉하게 썩기까지 방치해 두고 그걸 똥거름, 곧 거름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또한 변소의 한쪽 구석에는 초목재를 저장하는 '재 상자'도 설치되었던 지방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변소는 배설이란 소비 생활의 기능을 수행한 것만이 아니라, 거름을 생산하고 저장하는 장이기도 해서 넓게 건축했던 듯하다. 즉 농가의 측간은 퍼내기가 쉽기도 하면서 농작업의 짬 등에 진흙이 묻은 채로 거리낌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편리한 면이 있으며, 배설물을 농업 생산에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측간은 농업 생산 면에서 보면 이치에 맞지만, 생활에서의 편리성을 희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낮에는 차치하더라도 밤에 사용한다면 멀고, 어둡고, 특히 겨울철에는 추웠음에 틀림없다. 에도 시대 전기에는 논밭의 흙 가꾸기나 채소 재배에서 도시에서 나오는 똥만이 아니라 재나 쓰레기 등도 거름으로 유효하게 활용되었다. 오로지 떌감이나 재를 연료로 썼던 당시 에도 시내에서는 매일 엄청난 재가 나왔다. 그 재는 칼륨 비료나, 토양 중화제로 중요하기 때문에 '재 구매인'가 사 모아서 그걸 파는 '재 가게'가 존재했다고 한다. 재는 비료로서 중요했던 것만이 아니라, 술 담그기, 종이 만들기, 염색, 도기 만들기 등에도 이용되었다. 코이즈미 타케오小泉武夫의 『재와 일본인』(2019)에서는 시내를 돌아다니는 재 구매인에게서 중개-도매상이라는 회수 조직이 성립되어 있고, 전국 각지에서 '재 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밖에 쌀의 정백 과정에서 나오는 쌀겨, 어시장에서 나오는 '찌꺼기'라고 부르는 머리나 내장의 '창자' 등 먹을 수 없는 음식쓰레기는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에도 쓰레기'라고 부르며 거름으로 이용되었다. 정어리나 청어의 말린 정어리나 채종유나 대두유를 짠 나머지 깻묵도 거름이 되었다. 똥거름은 금비 중에서도 말린 정어리를 비롯한 물고기 거름이나 채종이나 대두의 깻묵에 비하면 저렴했기 때문에 주요한 거름이 되었고, 그걸 빼고서는 농산물의 상품적 생산은 성립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똥그럼은 속효성이면서 결코 '거름 피해'를 일으키지 않기에, 쌀이나 채소 재배에는 빼놓을 수 없었다. 다만, 거름으로서 이용하는 인분뇨는 그대로 사용하면 작물이 뿌리가 썩는 일이 있기 때문에, 대개는 똥구덩이에서 일단 발효시키고나서 이용했다. 덧붙여 발효 중인 똥거름은 매우 악취가 강해진다. '거름 피해'라는 것은 똥거름 등의 고농도 질소 비료, 또는 다량의 유기질 비료를 지나치게 시용하면 도리어 뿌리가 상해 버리는 것을 나타낸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이미 유박, 콩깻묵 등의 공급도 있었지만, 그에 비하면 저렴하고 속효성인 질소비료의 공급이 적었던 당시로서는 에도 시내에서 공급되는 똥거름이 최고의 액비로 농업 생산에 큰 의의가 있었다. 인분뇨는 무료로 농가에서 인수한 것이 아니라, 채소 등의 농작물과 교환될 뿐만 아니라 점차 똥거름으로 금전에 의해 거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금비로는 다른 것에 비하면 저렴했다.
이 변소 치기는 처음에는 오로지 농민이 행했는데, 근세도 중엽이 되면 변소 치기와 운반을 업으로 하는 전문 똥 청소부가 나타났다. 이들 전문업자는 지주나 집주인과 계약해 변소 치기의 대가를 결정했다. 퍼낸 인분뇨의 수송에는 가까운 곳은 큰 짐수레에 거름통을 쌓고, 번화가 방면은 배를 이용하고, 야마노테山手 방면은 큰 짐수레나 말의 등에 싣거나, 소 달구지나 마차로 운반하거나 했다. '카츠시카구葛飾区 향토와 천문의 박물관」의 2004년 전시 도록 「거름의 힘」에 의하면,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 병사는 똥거름 운반용 마차나 달구지에서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똥거름을 백주대로를 당당히 운반하는 걸 마주치자, 놀림 반으로 "허니 왜건"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배로 싣고 가는 것은 치바千葉 카사이葛西, 사이타마埼玉 방면으로, 달구지나 마차는 타마多摩 방면이나 카나가와神奈川 방면으로 보내졌다.


『일본에서 메이지 이후의 토양비료고』(1975)를 저술한 쿠로카와 케이黒川計에 의하면, 에도 시기 인분뇨 취급 업자 사이에서는 그 품질에 따라 표2-1 같이 5단계로 구별해 각각 가격을 결정했다고 한다. 등급별 구체적인 가격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등급은 일상의 식사 내용에 따라 똥거름의 비효에 차이가 난 데 근거한 것인 듯하다. 또한, 소변 분량이 많은 상등품 '츠지고에辻肥', 중등품 '마치고에町肥' 등과 하등품 '타레코미タレコミ'의 차이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타레코미'는 빗물 등의 수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듯하다.
2-1 에도의 똥거름 등급
| 등급 | 호칭 | 비고 |
| 최상등품 | 킨반勤番 | 다이묘 저택 교대 근무자의 것 |
| 상등품 | 츠지고에辻肥 | 시중 공중 변소의 것 |
| 중등품 | 마치고에町肥 | 보통 장사꾼 집의 것 |
| 하등품 | 타레코미タレコミ | 오줌이 많은 것 |
| 최하등품 | 감옥, 유치장의 것 |
黒川計, 『日本における明治以降の土壌肥料考 (上巻)」에서 작성
액체인 똥거름은 운반에는 불편함이 있으나, 속효성이고 수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에 시비와 아울러 물을 대기도 하기 때문에 작물 재배에는 유리한 것을 농민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인분뇨의 교환은 에도 주변 농가의 토양을 비옥하게 한 것만이 아니라, 유럽의 거리와 달리 길가에 분뇨가 야적되지 않게 하여 깨끗한 에도의 거리 모습에도 크게 공헌했다고 이야기된다. 도시와 주변 농촌 지역 사이의 순환권을 담당해, 철저하게 변소 치기를 이용한 것이 농가의 자립이나 도시 발전에 일조하게 되어 농업과 환경의 바람직한 순환의 좋은 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분뇨의 비효가 높은 점이나 식사의 질에 따라서 인분뇨의 성분이나 농도가 다르다는 점을 농민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19세기 후반 메이지 시기가 되고나서 과학적 근거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건 '외국인 초빙사'의 한 사람으로 1881(메이지 14)년에 일본에 온 독일인 초빙사 켈너Kellner(1851~1911)이었다. 켈너는 독일의 '농예화학 창시자'라고 불리는 리비히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럼, 켈너는 코마바駒場 농학교 및 그 후신인 도쿄 농림학교(이후 도쿄대 농학부)나 제국대학 농과대학에서 토양학을 강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토양 성분, 그 질소와 인에 대한 흡수력, 토양 속 유효 성분의 정량법 등의 연구 성과를 남겼다. 켈너는 서양 농업의 재탕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특히 일본 농업에서 논벼농사의 중요성을 알고서 일찍이 그 연구를 시작했다. 논밭에 인분뇨가 대량으로 시용되는 것을 실제로 가서 검사하고서 농예화학의 방법을 이용해 그 양분 조성을 조사하고 비료로서의 가치를 논하며, 일본 농업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다만, 리비히의 가르침을 받은 켈너가 독일의 농예화학 또는 리비히 식의 농예화학 연구와 교육법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와 열심히 교육·연구 활동을 실행한 실적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이 거국적으로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농업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지적하는 일부 사람도 있다.
2-2의 표처럼 인분뇨를 일반 농민, 도쿄 시민, 중등 관리, 군인의 4종류로 나누어 분뇨 안 각종 성분의 세세히 분석 조사를 행하여, 직업이나 계층에 따라 일상의 식생활이 다르며 함유 비료 성분에 상당히 큰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군인의 그것은 질소, 인산 등의 함유량이 다른 것에 비해 고율을 나타나고, 중등 관리의 것은 그 뒤를 잇고 있다. 메이지 정부에서는 군인의 분뇨가 가장 비효가 풍부하고, 다음으로 관리의 그것이 비효가 높다고 한다. 이 점으로부터 군인이나 관리의 대우가 좋고, 농민이나 도쿄의 일반 시민에 비하면 식사 사정이 풍부하고 영양분이 있는 걸 먹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 켈너는 똥거름의 취급 방법이나 저류 기간에 따라서도 성분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화학적으로 입증했다. 이는 앞에서 기술한 에도 시대 말기 사람들의 생활 정도나 식사 사정의 차이가 분뇨의 비효에 반영되었을 때의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이미 에도 시대 대부분의 농서에 적혀 있는 걸 비롯하여, 농민의 경험지식으로부터 이끌어낸 결과와 화학 분석 모두 실용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2-2 켈너에 의한 속성별 인분뇨의 성분 분석(단위: %)
| 농민 | 도쿄 시민 | 중등 관리 | 군인 | |
| 수분 | 95.40 | 95.40 | 94.50 | 94.60 |
| 유기물 | 3.03 | 3.18 | 3.89 | 4.07 |
| 질소 | 0.55 | 0.59 | 0.57 | 0.80 |
| 인산 | 0.12 | 0.13 | 0.15 | 0.30 |
| 칼륨 | 0.30 | 0.29 | 0.24 | 0.21 |
| 소다 | 0.51 | 0.41 | 0.45 | 0.26 |
| 석회 | 0.01 | 0.02 | 0.02 | 0.03 |
| 고토 | 0.03 | 0.05 | 0.06 | 0.05 |
| 황산 | 0.07 | 0.04 | 0.05 | 0.07 |
| 염소 | 0.70 | 0.55 | 0.61 | 0.51 |
| 규산 및 모래 | 0.04 | 0.10 | 0.11 | 0.04 |
| 산화철 및 알루미늄 | 0.03 | 0.02 | 0.06 | 0.06 |
黒川計, 『일본의 메이지 이후 토양 비료고(上巻)』에 따름
에도 근교와의 경제와 에도 '분뇨권'
159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입부入府 이래, 약 1세기를 지나 에도는 인구 100만 명을 거느린 세계 최대규모의 대도시가 되었다. 에도의 건설, 발전에 따른 칸토우・도우고쿠東国의 생산력 발전, 소농의 자립을 배경으로 해 독자의 시장권인 '에도 근교와의 경제권'을 형성해 나아갔다. 이 '에도 근교와의 경제' 형성을 구체적이며 체게적으로 밝힌 것은 이토우 코우이치伊藤好一이다. 이토우는 저서 「에도 근교와의 경제 전개』(1966)에서 칸토우 농촌의 변모와 생산 지대의 형성을 '튀넨Thünen 권'으로 비교해 추정하면서 밝혔다. 곧, 18세기 중엽에는 에도를 중심으로 근교의 채소 지대, 그 바깥쪽에 곡작 지대, 면직물 지대로 이어져, 주변부에 해당하는 칸토우 산지에는 임업 지대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100만 명이란 대인구를 껴안은 에도의 대도시 주변에서는 그 식재료 수요에 대하여 이토우가 밝혔듯이, 경제성이 높은 채소류를 중심으로 한 근교의 농업 지역이 전개되어 똥거름의 수요가 생겼다. 대도시인 에도에서는 연간 50만 톤 이상의 똥거름이 생산되어, 에도 동부에 발달했던 하천이나 운하 등의 수로에 의해 배 등을 사용해 대량으로 근교 농촌에까지 운반되어 소비되었다. 그 과정에서 똥거름의 생산 현장인 도시부와 농촌부를 잇는 비료 사업이 형성되었다.
4말들이 거름통을 한 짐이라 부르는데, 에도 근교의 농민은 그걸 큰 짐수레에 4~5짐 실어 운반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 근교의 농촌까지 육송하는 데에는 2-3의 그림처럼 2개의 거름통을 말 등에 나누어 지게 해서 1마리에 2짐밖에 나를 수 없었다. 야마구치 미츠코山口光湖 번역 『대군大君의 수도 ー막부 말기 일본 체재기ー(上)』(1962)의 5장 '수도와 그 주변 -도회와 농촌의 실태-'에서 말부 말기에 일본을 방문한 영국 초대 공사 올콕Alcock이 똥거름의 운반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2-3 똥거름을 운반하는 말. 올콕 『대군의 수도 (上)』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에서 옮겨 실음.
시골길이나 에도 시내의 거리는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서양의 그것에 못지 않을 듯하다. 잘 가꾸어진 거리는 여기저기에 거지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매우 청결해서 오물이 쌓여 통행을 방해하는 일은 없다. -이는 내가 일찍이 방문했던 아시아 각지나 유럽의 많은 도시와 신기하지만 기분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가끔 마을에서 논밭으로 보내는 액체 비료를 담은 덮개가 없는 통을 나르는 운반꾼이 줄지어 서 있거나,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위험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예의 물건을 실은 말이 줄지어 서 있거나 하는 일은 정말 역겹다.
이러한 도시와 농촌의 인분뇨 교환은 에도 주변의 농지를 비옥하게 하고 상품작물의 생산을 지탱했을 뿐만 아니라, 가두에 오물이 훝어져 있지 않고 청결하고 깨끗한 에도의 거리가 형성되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렇지만 똥거름 운반을 조우하면 주변에 풍기는 강렬한 악취에는 질린 듯했다. 올콕의 관찰처럼 기본적으로는 똥거름을 비료로 쓰지 않았던 유럽 사회와 일본은 그 점에서 크게 달랐다.
에도의 똥거름과 카사이선葛西船
에도 동쪽 근교인 카사이葛西는 예전엔 현재의 도쿄도 동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 예전의 시모우사국下総国 카츠시카군葛飾郡의 서쪽 반분半分(중세 이전), 무사시국武蔵国 카츠시카군(에도 시대 초기에 발족)을 가리키는 지역으로, 후루토네강古利根川이나 후토이강太日川(현 에도강), 후루스미다강古墨田川 등의 하천으로 둘러싸인 저지대로, 남쪽은 도쿄만의 해안선에 면해 있다. 현재의 행정 구분에서는 도쿄도 카츠시카구, 에도가와구의 전역과 스미다구의 일부(옛 무코지마구向島区의 거의 전역), 코우토우구江東区의 일부(옛 쇼우토우구城東区의 거의 전역) 등이 된다. 현재도 카사이 지역에는 아라강荒川, 에도강, 아야세강綾瀬川, 나카강中川 등 크고 작은 하천이나, 카사이 용수나 카미시모노와리上下之割 용수 등의 농업용수가 있어 관개나 주운 등에 이용되었다.
1940년대 중엽까지 나카강이나 에도강 언저리에는 여기저기에 '킬립キリップ' 또는 '카시바타カシバタ' 등이라 부르던 석착장이 설치되었다. 강가에 작은 포구 같은 걸 만들어 말뚝을 박아서 배를 서로 붙들어 매고, '야이비'라고 부르던 판자를 육지와 배 사이에 걸치고 화물을 올리고 내리는 등을 했다. 여기에서는 에도·도쿄의 시내에서 오는 똥거름 운반선이나 앞에 기술한 '에도 쓰레기'라고 부르던 거름으로 쓰는 에도의 생활 폐기물을 운반해 온 배가 정기적으로 정박하는 선착장이 설치되어, 뱃사공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장소도 되었다.
크고 작은 하천에 의해 저습지인 카사이 지역 일대는 에도 동쪽 근교의 주요한 쌀 산지였다. 에도 초기에 활발히 행해졌던 새논 개발에 의하여 새로운 마을이 늘어나, 이 시기에는 농촌 인구도 증가했다. 논이 많은 카사이 지역은 역시 벼농사가 중심 농업으로, 특히 이향반령二郷半領(역주: 일찍이 사이타마현 미사토시三郷市와 요시카와시吉川市에 걸친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 요시카와·히코나리彦成란 두 개의 큰 향(마을)과 그들의 남쪽에 있는 작은 한고우半郷(마을)를 합친 말)을 중심으로 조생 벼의 산지로 유명하여 '카사이 3만 섬 곡창'이라 불리고, 에도에 근거리라 곧바로 반송할 수 있는 유리함 때문에 에도 시민의 밥상에 잽싸게 보내 주었다. 그와 함께 중기에 들어서면 에도 시가의 발전, 인구의 집중에 의해 미곡은 물론, 대량의 채소 수요가 일어나 에도에 근접하는 입지 조건으로 혜택을 입은 카사이령 일대에 자연히 농업 기술의 진보를 촉구했다. 또한, 수운 교통에 혜택이 있는 이 지역은 선도가 좋은 신선 채소를 소비지로 출하하는 데에 편리하고, 채소는 모래톱이나 자연 제방 위의 모래가 퇴적된 땅에서 재배되었다. 이 지역에서 재배된 대표적인 채소는 '카사이 채소'라고 불렸던 코마츠나小松菜, '센쥬우千住 파'라고 불렸던 대파, 결구하지 않는 배추인 산동 채, 양배추 등의 잎채소나 '카나마치金町 순무', '류우토竜戸 무' 등의 뿌리채소 종류가 알려져 있다. 또한 곁들임(妻物) 채소라고 불리는 요정 요리 등의 요리 장식으로 곁들이는 차조기 싹, 차조기 이삭이나 가느다란 무, 실 파드득나물(糸三つ葉) 등도 생산했다. 그런데 대파는 현재의 아다치구足立区 센쥬우 시장이 집적지였던 것으로 인하여 '센쥬우 파'라고 불렸다. 카사이 지역만이 아니라 야시오시八潮市 하치죠우八条, 마츠도시松戸市 야기리矢切, 코시가야시越谷市, 요시카와시吉川市, 마츠부시마치松伏町 등 현재도 도쿄 북동부 근교에서 재배되는 파를 포함하여 센쥬우 시장에 출하되는 파는 '센쥬우 파'라고 불리며 상품화되어 있다.
카사이 지역에서는 논의 쌀 면적당 수입이 특별히 높은 것은 아니고 수해나 한해에 의한 벼농사의 약점을 보완하고 사계절 내내 현금 수입의 길이 밭의 채소 농사에 의해 개척되어, 에도・도쿄의 시장에서도 높은 평가를 얻었다. 좁은 농지에서 다양한 채소를 농사짓는 것이 특색인 집약적 농업이 특색이었다. 이러한 농촌을 도쿄 근교의 농가나 청과시장 관계자는 '푸성귀판(센자이바前栽場)'이라고 불렀다. 센자이란 원래는 마당에 심은 꽃나무나 채소 등을 나타내는 단어로, 센자이바란 '가까운 채소 산지'라는 의미이다. 카사이 지역만이 아니라, 도쿄 서쪽 근교인 무사시노의 농촌도 도쿄 근교의 센자이바로서 네리마練馬 무를 비롯해 각 지역의 전통 채소를 농사지었다. 도쿄 동쪽 근교의 센자이바를 '카사이', 나카노中野, 이타바시板橋나 네리마 등 서쪽 근교의 센자이바를 '니시야마西山'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카사이 지역에서도 논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을 행하는 곳을 '타바쇼田場所'라고 불렀다. 타바쇼에서도 밭에 채소를 농사짓는 일은 있으나 자가용이 중심으로, 출하하는 채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에도 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재배가 성행하게 된 카사이의 신선한 채소는 밤중에 마을을 배로 출발해 노를 저어 가면 신강新川 오나기강小名木川의 수로로부터 그날 안에 에도에 들어가, 에도 시내의 사람들 밥상을 푸짐히 할 수 있었다. 쇼와 초기에는 큰 짐수레나 리어카로 운반하고, 1940년대 중엽이 되면 달구지를 사용하는 농가가 늘었다. 같은 에도의 근교라도 서쪽 근교인 무사시노처럼 여러 가파른 고개를 넘어 말 등이나 짐수레 등으로 운반해 오는 다른 지역의 채소에 비하면 동쪽 근교의 채소는 '운송 도중의 손상'도 적고, 운반 비용도 저렴하다는 유리함 때문에 늘 시장의 우위를 유지했다. 나아가 수운 편은 채소의 운송 면만이 아니라, 쌀이나 채소나 특산품의 재배에는 빠질 수 없는 주요 비료였던 에도 시가의 똥거름 운송에도 편리하여, 에도 중기 이후 똥거름 이외의 말린 정어리, 쌀겨 등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액비인 똥거름은 배에 의해 대량으로 수송하는 데에는 편리하고, 게다가 다른 구입 비료에 비하면 훨씬 싸고 속효성으로, 에도 동쪽 근교의 농민은 농업 생산에서 유리했다. 연간을 통틀어 에도 시내에서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똥거름은 에도 동쪽 근교 마을의 벼농사를 비롯해 채소 농사도 크게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대체 경작지에 어느 정도의 똥거름이 사용되었던 것일까? 와타나베 젠지로渡辺善次郎의 「근대 일본 도시 근교 농업사」(1991)에 의하면, 에도 시대 말기, 무사시국 카츠시카군 사사가사키촌笹ヶ崎村(현재의 에도가와구 안)의 예에서는, 논에는 연간 300평당 똥거름 30짐, 밭에는 그 배인 60짐의 똥거름을 투입했다고 한다. 한 짐은 4말들이 거름통 1통이니, 연간 논에는 120말(2165리터), 밭에는 배인 240말(4330리터)의 똥거름을 주었단 계산이 된다. 모내기 전에 논에 밑거름으로 거름을 넣었는데, 논의 거름에는 1950년대 중엽까지는 주로 똥거름을 사용했다. 넓은 논에 똥거름을 골고루 넣기 위해 '세이마'라 부르는 볏짚을 꺾어 만든 표식을 논 안에 두고, 똥바가지를 이용해 균등하게 흩뿌렸다.

에도·도쿄 동쪽 교외의 저지대 논에서는 논벼 이외에 연근, 꽃창포, 쇠귀나물(慈姑), 미나리 등도 농사지었다. 이들 논에도 대량의 똥거름이 들어갔다. 똥거름에 의해 질소분을 비롯한 영양분을 주는 것과 농사땅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겨울철은 똥거름의 가격도 싸서, 가능하면 겨울에 확보해 똥구덩이에 모아 두었다. 「카츠시카구사葛飾区史」(2017)에 의하면, 논에는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똥바가지를 사용해 균일하게 되도록 똥거름을 살포했는데, 연근 논에는 거름통에서 똥거름을 그대로 넣든지, 홈통을 사용해 흘려 넣었다고 한다. 300평의 논에 똥거름의 통으로 약 60바가지 투하가 기준이었다. 대량의 똥거름을 넣었기 때문에 연근 논은 "마치 다메보시タメボシ(똥거름 저장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연근은 일본 재래종인 '나가바스ナガバス'가 재배되었는데, 오랫동안 똥거름의 시비 과다가 탈이 되어 부패병이 발생해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저항력이 있는 중국 원산의 연근으로 바뀌었다. '나가바스'는 빛깔이 희고 부드러워 조림으로도 일본식 비빔밥(五目ずし)으로 만들어도 평판이 좋은 농작물이었다. 연근은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반면, 밭에서 재배된 채소와 마찬가지로 똥거름을 대량으로 투입하거나 추운 계절에 논에 들어가거나 해서 연근을 캐는 작업 등은 중노동이었다.
마찬갖지로 정월의 금줄 장식(注連飾り)의 재료인 '미토라즈ミトラズ'라고 불렀던 벼도 습논에서 재배되었다. 미토라즈란 것은 문자 그대로 알곡인 쌀을 수확하지 않은 벼를 의미하고, '흑수黒穂'나 '동산東山' 같은 짚이 길고 포기 나누기를 해서 줄기의 수가 늘어나기 쉬운 품종으로, 설맞이 금줄 장식을 만들기 쉬운 것이었다.
이 미토라즈는 특히 키가 커지도록 부영양화된 습논에 심었는데, 짚이 더 길게 생장하도록 더욱 질소분이 많은 똥거름이 다량으로 투입되었다. 에도 시대, 토쿠가와 가문을 비롯한 각 다이묘大名, 하타모토旗本, 상가商家, 연극장(芝居小屋) 등 에도 시내의 모든 설맞이 금줄 장식은 대부분 카사이 지역 농가가 농사지은 것이었다. 이건 메이지 이후에도 계속 생산되어, 한때는 수요의 증가와 함께 두드러지게 발전해 농가의 현금 수입원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엽부터 순차적으로 감소했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다시 부흥되었다. 그러나 그 양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져 버렸다.
또한, 이 지역에는 크고 작은 하천과 많은 못과 늪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잉어나 금붕어의 양식장도 많이 조성되었다. 그중에도 금붕어의 양식은 원래 현재 코우토우구江東区의 스나쵸우砂町・오오시마大島・카메이도亀戸 방면에서 옛날부터 행해졌는데,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시기에 차츰 동쪽으로 옮겨서, 1923년 칸토우 대지진 이후가 되면 카사이에서도 금붕어의 양식이 성행했다. 금붕어 양식을 전업으로 경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농업을 주로 하면서 금붕어 양식을 부업으로 했다. 이 금붕어 양식에도 똥거름이 한몫했다. 초봄에, 똥거름을 대량으로 양식장에 투입해 금붕어의 먹이가 되는 몸길이 1~3mm의 미세한 갑각류인 물벼룩을 발생시키기 위해 똥거름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논벼농사가 주체였지만, 동쪽 근교 저지대의 밭에서는 현금 수입원이 되는 집약적인 채소 재배가 행해졌다. 시장에 내거나, 에도의 일류 청과물 도매상에 출하하거나 하는 농가는 보기에도 좋은 고품질 채소를 농사지을 것이 요구되었다. 각 농가가 종자를 꼼꼼히 조사해 준비하고 똥거름을 충분히 사용하는 등 창의적 고안을 하면서 앞에 기술했듯이 품질이 높은 채소를 경합하며 농사지었다. 밭작물 가운데 파를 중심으로 똥거름의 시용법을 카사이구 향토와 천문 박물관의 전시 영상이나 전시도록을 참고해 살펴보겠다.
카사이 지역에서는 봄 3월 상순에 씨앗을 심어, 7월 중순에 본밭에 옮겨심기하는 봄파종 겨울 수확 파의 생산이 주체였다. 3월 상순에 못자리에 파종하기 전에 듬뿍 똥거름을 넣어 두고, 그 뒤에도 1개월에 1번 정도로 똥거름을 웃거름으로 주었다. 파의 모종은 줄지어 심기 때문에, 똥거름은 그 줄을 따라서 주어 간다. 7월 중순에 옮겨심기하는데, 이때는 파의 밑동에 흙을 북돋아준다. 이 파를 하얗게 만들기 위해 북을 준 흙 부분에 충분히 웃거름을 주는 것이 부드럽고 단맛이 나는 맛있는 '대파'를 만드는 요령이었다. 파의 북주기는 생장에 맞추어 3회 행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북주기마다 똥거름을 주기 때문에 상당히 대량의 똥거름이 사용되었다. 1881년 간행된 『도쿄부 지역의 농사 요람(東京府下農事要覧)』의 권6 미나미카츠시카군南葛飾郡 항에는 미나미카츠시카군 타로베에太郎兵衛 새논의 파 재배 사례로 "거름은 300평당 30짐 정도를 준다"라고 하는데, 이건 통상 논벼농사의 1.5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처럼 동쪽 근교의 다양한 농작물을 비롯해 특산품 등에도 에도·도쿄에서 오는 똥거름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카사이 지역은 대도시 근교에 있음과 함께, 액체의 무거운 짐을 수송하기에 유리한 하천 환경에 혜택을 입은 입지 조건을 살려, 에도로부터 배출되는 대량의 인분뇨를 똥거름으로 이용한 농업이 특색이었다. 에도·도쿄 동쪽 근교의 농촌에서는 크고 작은 하천이나 농업용 수로를 이용해 에도·도쿄 도심부에서 배를 사용해 똥거름을 운반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배를 사용할 수 없는 육상으로 이어진 서쪽 근교의 무사시노 대지台地의 농촌에 비하면 훨씬 대량으로, 게다가 조직적으로 똥거름을 대량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카사이 지역에는 똥거름을 운반하기 위한 '오사후네長船'라고 하는 거름배를 소지하고 똥거름을 퍼내어 농가에 판매하는 '똥거름 도매업자'가 많이 존재해, 이들 업자가 지역에서 똥거름을 농업에 이용하는 데에 중핵을 담당했다. 오사후네는 길이 약 16m, 너비 약 2m의 가늘고 긴 모양의 배로, 아야세강 등 강폭이 좁은 작은 하천에서도 운항할 수 있었다. 노로 젓는 거룻배 형인데 2-4의 사진처럼 돛도 달 수도 있고, 또한 배의 노꾼이 쉬거나 숙박을 하거나 하는 '세이지せいじ'라고 부르는 기능의 방이 있는 것도 있었다. 이 에도의 똥거름을 운반하는 오사후네는 일반적으로는 '카사이부네葛西船'라고 불렀다. 당시는 에도의 똥거름 대부분이 카사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운반되었기에, 그러한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던 듯하다. 또한, 악취를 풍기는 똥거름을 나르는 '카사이부네'를 비꼬아 '구린내 배(쿠사이부네くさい船)' 등이라고 험담을 하기도 했다. 현재, 카츠시카구 향토와 천문 박물관에는 2-4의 사진처럼 1898년에 발주된 시방서에 기반해 복원한 아주 새로운 카사이부네의 실물 크기 1/2의 카사이부네가 거름통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2-4 거름배인 카사이부네(카츠시카구 향토와 천문의 박물관 전시)
또한, 저지대의 생활 환경에서는 연료가 되는 장작이나 섶나무 등을 모으는 숲이나, 비료의 재료 공급원인 임야가 적다. 볏짚은 연료만이 아니라 새끼줄, 오히려 가마니 등의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된 이외에 밭의 흙이 건조하지 않도록 밭에 덮거나 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노인들이 짚풀덮개를 만들어 센쥬千住로 가져 가 도매상에게 팔았다. 그 때문에 볏짚 전부를 연료로 사용해 버릴 수는 없었기에, 볏짚을 좋은 것만 골라낼 때에 나오는 부스러기 부분인 '시비シビ'를 연료를 위해 추려 놓았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떌감으로 부족했기에 인접한 호우소우房総 시모우사下総란 주변보다 높은 평탄지의 풍부한 소나무 장작을 구입했다. 소나무는 수지가 많아 화력이 강한 점과 볏짚보다 불이 오래 지속되어 밥짓기에는 편리했다. 나무재나 볏짚재는 무나 고구마를 농사지을 때 비료로 이용되었다. 그 때문에 재를 보관해 두는 잿간을 설치하는 집이 많았다. 또한, '헤이야へーヤ(재 장사)'라 불렀던 사람이 농가를 돌면서 재를 사 모았다. '헤이야'가 모은 재는 노가타ノガタ(野方)라고 부르는 무사시노 대지臺地나 오오미야大宮 대지 등 칸토우 롬층에 두텁게 덮인 대지에 존재하는 농촌에서 산성 토양인 밭흙의 중화제로 판매되었다. 나아가서는 용수로나 연못의 흙을 준설해 비료로 농업에 이용하기도 했다. 퇴비 같은 비료를 만들어내는 지혜로서 앞에 기술했던 '에도 쓰레기'라고 부르는 에도 시내에서 운반되는 생활 폐기물이나 음식 쓰레기를 부숙시킨 거름도 여름 채소의 모판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에도 쓰레기는 쇼와 시기가 되고나서는 도쿄시의 청소 담당자가 배로 에도강이나 나카강을 사용해 운반했다. 에도 쓰레기를 사용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여름 채소의 재배가 활발한 지역에서, 강가에 운반해 온 에도 쓰레기를 각 농가가 손수레로 날라 밭에서 부숙시켜 모판에 넣었다. 에도 쓰레기는 공짜로 1950년대 중엽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에도·도쿄와 동쪽 근교 농촌 사이의 물질순환이란 연결을 읽을 수 있다.
주운舟運에 의한 '에도 분뇨권'의 확대
18세기 후반 칸세이寬政 시기 이후가 되자 에도에 직결되는 하천에서는 거름배의 활약이 눈에 띄기 시작해, 에도 시내의 변소에서 인분뇨를 퍼내어 거름배에 싣고 그걸 시골의 거름 상인에게 활발히 보냈다. 인분뇨는 에도 시대의 교통 정책에서는 서민이 유일하게 가도 수송을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된 자재였다. 그러나 말 등에 싣고서 똥거름을 나르는 육송은 올콕이 보았듯이 말 1마리에 2짐이었는데, 거름배를 이용하면 일반적으로 50짐분이란 대량의 똥거름을 적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부는 가도와 마찬가지로 거름배의 왕래에도 규제를 가하지 않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했다. 사이타마현의 내륙부에서도 수로가 있는 한, 거름배는 아라강荒川, 후루토네강古利根川, 모토아라강元荒川, 그리고 미누마츠우센보리見沼通船堀(현 누마다이沼代 용수) 등을 빈번히 오르내렸다.

2-5 아야세강을 운행하는 거름배(1940년대 중엽). 『카츠시카구사」에서 옮겨 실음.
근세 시기 사이타마현의 거름배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통계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메이지 초기에 작성된 『무사시武蔵 국군촌지国郡村誌』에 의하면, 거름배의 수는 아다치군足立郡 63, 사이타마군 29, 가츠시카(무사시) 1이라 하여, 에도에 가까운 아다치와 사이타마 2군에 집중되어 있다. 마을별로는 현 토다시의 하야세早瀬(시모사사메下笹目)가 최다로 50척, 우치야内谷 12척, 현재의 사이타마현 하토가야시鳩ケ谷市 코부치小渕 1척(이상 아다치군), 현 야시오시八潮市 오오세大瀬・오오조네大曾根・키소木曽가 각 5척, 야시오의 코신덴古新田・우키즈카浮塚・가와사키川崎, 현 코시가야시越谷市의 센비키千疋・오오요시大吉가 각 2척, 야시오의 가케垳・니쵸우메二丁目・니시부쿠로西袋, 코시가야의 시죠우四条가 각 1척(이상 사이타마군)이었다. 막부 말기의 토다령領인 하야세는 자료적으로는 미확인이지만, 메이지 초기 거름배의 수로부터 보아 사이타마현에서 최대의 똥거름을 다루는 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아다치군의 경우는 아라강 본류와 신가시강新河岸川, 사이타마군의 경우는 후루토네강古利根川과 아야세강의 각각 합류점에 분포한다. 그것은 거름배가 이 두 지점을 중계기지로 활동했기 때문으로, 적어도 막부 말기 거름배의 활동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더구나 『에도가와구사江戸川区史」(1976)에 의하면, 1845년 시점에는 토다에서 분뇨 수송이 2-6의 모식도를 보면 니고우한령二郷半領·마츠부시령松伏領·니이가타령新方領·하치죠우령八条領·히라야나기령平柳領·토다령 등 58개 마을로 에도의 분뇨가 회송되었다고 한다.

그림2-6 거름배의 수송 경로(모식도). 하야마葉山(1988)에서 옮겨 실음
거름배를 다루는 사공은 에도에서는 변소 청소부로 불리며, 그들은 담당하는 구역의 변소를 차례차례 퍼내어 만조와 함께 똥거름 알선인(거름 상인)이 기다리는 강을 올라 시골의 거름배에 짐을 건넨다. 이 과정에서 야음을 틈타 분뇨를 강물에 희석해 증량하는 등 수많은 부정이 행해졌다고 히라카타平方의 사공이 이야기했다고 「신편新編 사이타마현사 자료편 15」(1984)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 경제사」의 태두 노무라 켄타로野村兼太郎도 1940년의 논설 「에도 똥거름 거래에 대하여」에서, 똥거름은 상류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물타기되어 묽어지고, 그런데도 원가로 팔렸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부정 수단에 의해서, 비료로서의 효력이 희미해져 버렸다고 한다. 밑거름을 토다의 하야세 도매상에게서 샀다는 전문은 많다.더구나 1859년 「신가시 다섯 하역장 허가증 기록장부(新河岸五河岸鑑札控帳)」에 나오는 우시코牛子 강가의 오오시마야大島屋는 짐배 4척과 거름배 1척을 가지고 광범위하게 비료 도매상도 겸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동업조합을 만들지 않아 자유롭고 허가증도 필요없었던 거름배에는 앞에 기술한 노무라가 지적하듯이 나쁜짓을 꾸미는 사공이 많아 가격을 끌어 올렸고, 그것이 에도 마치부교우町奉行에게 시골 농민들의 탄원서가 자주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신편 사이타마현사」(1984)에 의하면, 1867년 5월의 단속 포고문에는 똥거름 등귀의 이유를 (1)에도의 집주인에 의한 청소비의 인상, (2)청소부 상호의 투쟁에 의한 청소비 등의 경합 인상, (3)사공의 악덕 행위에서 구하여, 에도에서 반출되는 똥거름은 도매장을 통하도록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사시노 대지의 중앙부를 점하는 옛 타나시시田無市(현 니시도쿄시西東京市) 발행 『타나시시사田無市史』(1995)를 보면, 똥거름의 수요가 늘어 변소 청소권을 놓고 경쟁하여 다투게 되자, 도시나 무가 저택 측에서도 이 상황을 탐타서 가격을 끌어 올리고 경쟁을 부추켰다고 한다. 그 결과, 똥거름의 가격은 40~50년 전에 비교해 3~4배나 급등했다고 한다. 이건 똥거름을 최대의 비료로 했던 근교 농촌에게는 사활 문제였다. 1789년 에도 주변의 무사시, 시모우사下総 두 나라를 합한 37개 령 1016개 마을은 대동단결해 에도의 똥거름 가격을 평균해서 대략 15% 가격 인하를 쟁취하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에 가담한 지역은 동쪽은 에도강 우안 지역, 북쪽은 사이타마현의 삿테幸手나 이와츠키岩槻 부근까지, 서쪽은 타나시 부근까지의 무사시노 여러 마을, 남쪽도 타마강을 넘어서 카나가와神奈川・코즈쿠에小机까지 확산되어, 에도의 똥거름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마을들이 결집했다. 그 뒤에도 똥거름 가격을 둘러싼 문제는 때때로 표면화되었는데, 막부 말인 1867년에는 변소 청소 통제는 말하자면 마을들의 자주적인 결집 단위였던 '령鈴'-'령령총대領々総代'에 의한 구조로부터 감정소勘定所-칸토우 관리取締役에게 직결되며 더욱 강한 단속권을 가진 개혁 조합촌組合村(요세바寄場 조합)의 구조로 이행되고, 요세바 조합 마을들 측에서 경매인을 단속함으로써 가격을 억제하려는, 지금까지의 자세와 기본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은 합의가 맺어졌다. 에도 시대에 이만큼 대규모로 농민이 대동단결해 싸운 운동은 드물다고 하는데, 그만큼 근교 농촌에게 에도의 똥거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야기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탄지 켄조우丹治健蔵는 저서 『근세 교통운수사의 연구』 6장 "근세 미누마見沼 통선通船과 근교 경제의 전개"에서 아라강으로 통하는 사이타마현의 미누마다이見沼代 용수 주변의 농촌에서도 말린 정어리나 똥거름이나 재나 쌀겨 등 비료의 수송을 비롯해 에도 근교 경제의 진전에 기여했던 점을 지적한다. 이렇게 해서 주운에 의한 똥거름이나 말린 정어리 등의 금비 수송은 에도 주변 농촌의 상업적 농업을 촉진시키고, 농민의 상품 생산을 더욱 추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가면 도쿄시에 인구가 집중되고, 농촌부에서 받아들이는 똥거름의 양을 넘어서 버리게 되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다. 그 때문에 메이지 시대 후기 이후의 도시부에서는 넘쳐나는 분뇨를 얼마나 합리적이고 위생적으로 적절히 처리하느냐가 과제가 됐다.
다이쇼 시대로 들어서자, 도쿄의 농업 용지 감소에 박차가 가해지고 화학비료의 보급도 맞물려서 그때까지의 똥거름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쿄시는 1919년에 시영으로 분뇨 퍼내기를 개시하게 되었다. 이 무렵이 되면 분뇨 처리의 합리적 방법은 하수도 처리라는 것이 각 방면에서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대규모 도시 정비의 필요성과 그에 소요되는 방대한 비용의 변통이 어려워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실현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카츠시카구 지역을 포함한 도쿄 동쪽 근교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똥거름의 농촌 환원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1934년에는 옛 도쿄시 전역, 그리고 1936년에는 카츠시카구와 세타가야구世田谷区의 일부를 제외하고 현재의 23구 안 거의 전역이 시영 분뇨 퍼내기가 되었다. 도쿄시에서 모은 분뇨는 근교 농촌에서 받아들여져, 사이타마현이나 치바현의 농촌까지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때, 군농회나 농사실행조합 등에서 받아들여서, 대형 분뇨 저류조의 건설비나 똥거름 운반선의 청부비는 각 조직에서 변통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뒤에 기술하겠지만 1930년에는 '오물 청소법' 개정에 의해 "각 자치단체의 책임으로 쓰레기나 분뇨는 처리해야 한다"고 해서 일반적인 똥거름의 개념이 "비료에서 폐기물"로 크게 변화했다. 도쿄시 안에서 똥거름의 시영 퍼내기가 행해지지 않았던 가쓰시카구 지역에서는 똥거름 퍼내기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퍼내러 갈 수 있는 장소에는 금전을 지불하며 똥거름을 구입하고, 그렇지 않은 장소에서는 퍼내 주는 쪽에게서 요금을 받으며 생업을 영위했다. 그 경우, 퍼내는 요금은 1짐(70리터)에 18전 정도이고, 그 이후 똥거름을 판매할 때도 같은 가격으로 판매했다.
근교 농업의 발전과 '도쿄 분뇨권'
도쿄도 구 지역인 야마테山手를 동쪽 가장자리로 하고 그 서쪽에 이어지는 무사시노 대지의 농업 지역을 최초로 계통적으로 분석한 것이 오다우치 미치토시小田内通飯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인 메이지 시기부터 다이쇼 전기에 걸쳐서 근교 농업 지역의 경관과 그 변화에 대해 『제국 수도와 근교』(1918)에 극명히 기술하며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니혼바시日本橋부터 2리(8km)까지는 시가지이지만, 그보다 서쪽으로 향해 오오이즈미大泉, 샤쿠지이石神井, 이오기井荻, 타카이도高井戸, 치토세千歳, 진다이神代, 코마에狛江까지의 범위, 곧 니혼바시부터 약 5리(20km)까지의 범위가 도쿄에 채소를 공급하는 근교 농업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여기는 또한, 도시로부터 비료로 분뇨를 반입하는 지역인 점이 "・・・・・채소의 재배에 필요한 인분뇨도 또한 운반될 수 있는 상태임」이라고 지적되었다. 나아가 오다우치는 『제국 수도와 근교』의 4장 비료 항에서 인분뇨 가격의 하락, 사용 지역, 운반법 등을 기록한다. 당시 인분뇨의 사정이 아래와 같이 손에 잡힐 듯이 기술되어 있기에, 현대어로 발췌해 보겠다.
"도쿄시의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여 오늘날에는 시 및 인접한 정촌町村을 합치면 약 250만 명이 되었다. 지금, 한 사람이 1년에 3짐의 분뇨를 배설한다고 가정하면, 그 총량은 750만 짐이 된다. 이처럼 비료원이 풍부해졌기 때문에 가격이 하락했다. 메이지 28년(1895) 무렵에는 어른 1인당 1년 동안 35전, 어린이는 17전 5리였던 분뇨 퍼내기 요금(똥 청소 계약)이, 다이쇼 4년(1915)에는 큰 집은 연 1엔, 작은 집은 50전으로 개정되어 하락해 버렸다." "야마노테山の手의 여러 구에 대하여, 농가가 한 달에 1인당 2전을 수거료로 지불하고 있지만, 도쿄시 중심부인 니혼바시·쿄바시구京橋区에서는 퍼내러 오는 사람이 적은 결과, 그보다도 많은 수거료를 지불하는 경향이 있다." "질소가 주요 성분인 속효성의 완전 비료인 똥거름은 채소 재배에 가장 저렴하면서도 유효한 비료이다. 그 때문에 대도쿄의 배후지인 이 지역의 농촌이 채소 재배지로 크게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분뇨는 그 성분 중 약 95%가 물이기 때문에, 무게가 있어서 운반이 매우 어렵다. 이처럼 풍부한 비료인 똥거름을 가능한 한 먼 거리로, 또 가능한 한 다량으로 운반하는 데에는 오로지 교통기관의 개량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등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7 큰 짐수레로 똥거름을 운반
오다우치에 이어서 아오시카 시로우青鹿四郎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도쿄시를 중심으로 서쪽 근교만이 아니라, 북쪽 근교나 동쪽 근교도 포함한 근교의 농업 경영 지역 구분과 그 변화에 대하여 입지론적으로 설명했다. 평지 농촌은 상품경제의 발달을 보면, 수요지와의 거리에 의해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어 지역 분화가 일어났다. 쇼와 초기의 도쿄 근교 농업의 분포는 니혼바시로부터의 거리가 1.5~2리(6~8km)인 '제1대'에서 주로 착유, 양계, 관상식물 재배, 온실 재배가 행해지고, 2~3리(8~12km)인 '제2대'에서는 곡숙(곡물과 두류), 채소 재배가 행해졌다. 5리(20km)를 넘는 '후방 지역'이라 불리는 지대가 되면 뽕나무밭의 비율이 높아졌다. 논은 주로 3리(12km) 이상의 북쪽 근교부터 동쪽 근교에 분포하는데, 3~4리(12~16km)의 안쪽에서는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 같은 거리의 원근은 생산물의 운반 출하에 대한 제약이 되어 각종 작물의 운반 한계를 규정하고 있었다. 출하물의 운반 방법은 ①인력에 의한 것은 제1대의 주변 지대까지, ②소의 힘(달구지)에 의한 것은 제2대부터 제4대의 일부까지, ③말의 힘(마차)에 의한 것은 제4대의 일부와 4대의 밖이었다.

도쿄시 똥오줌의 사용 지역도(농가 및 민간 영업자에 의한 것). 1점은 똥오줌 7,000섬을 표시한다.
2-8 아오시카 시로우가 그린 도쿄 분뇨권. 아오시카青鹿(1935)에 의한다.
이러한 근교 농업 지대의 생산력을 지탱했던 것이 도시 주민에게서 수거료를 받고 수거해 온 똥거름이었다. 그리고, 아오시카는 분뇨 수거량 및 수거요금, 도쿄시 분뇨량, 옛 시내 지역의 분뇨 처리 상황, 분뇨 배급표 등의 상세한 자료를 실어 놓았다. 그리고 2-8처럼 1929년 도쿄시의 분뇨 사용 지역도를 ①손수레·달구지·자동차에 의함, ②수운에 의함, ③철도에 의함이라는 3가지 운반 방법별로 그려 놓았다. 이에 의하면 농산물의 출하 운반방법과 마찬가지로, 도쿄시로부터 5리(20km)권 안인 서쪽 근교는 ①의 손수레·달구지나 트럭으로 운반하고, 5리권의 동쪽인 히가시카츠시카東葛飾나 치바현과 5리권 밖인 북쪽 근교의 미나미사이타마南埼玉는 ②의 주운에 의하고 있다. 또한 사이타마현의 이루마군入間郡을 중심으로 철도에 의하고 있었단 것을 알 수 있다.
아오시카는 똥거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대어로 바꾸어 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채소의 다모작은 주로 속효성 질소질 비료, 곧 똥거름의 다량 시용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들 똥거름은 자가 노동에 의해 인수하러 가야 했고, 그 다량의 인수는 제2대처럼 근거리여야 한다. 그 결과, 일반적으로는 농가가 시민으로부터 수거료를 받게 되어, 비료비에 대한 현금이 크게 절약되었다."
지금까지는 농가가 수거료를 지불하고 분뇨를 매수했지만, 이 시점에는 역전되어 농가가 시민에게서 수거료를 받고 분뇨를 수집했단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도시부에서의 똥거름 입수가 곤란한 키타타마군이나 이루마군 등의 바깥 가장자리 농촌에서는 이누이 타다시犬井正가 『칸토우 평야의 평지림関東平野の平地林』(1992)에서 지적했듯이, 낙엽 퇴비를 비롯하여 생산자재나 장작과 재 등의 생활자재 대부분을 평지림에서 채취하며 농업용 자재로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상세히 기술하겠다.
오다우치나 아오시카는 예전에 도시의 근교 농촌에서는 도시의 인분뇨를 이용하는 '분뇨권'이란 것이 존재했단 것을 명확히 하고, 지력을 필요로 하는 채소는 오로지 근교의 '분뇨권'에서 재배되며, 도시와 농촌 사이에는 똥거름과 농산물의 물질 순환을 수반한 일종의 공생관계가 있었단 것을 밝혔다.
아래의 글을 토쿠토미 켄지로徳富健次郎의 1913년 초판 「지렁이의 허튼 소리』에서 '농農'이란 장에 나온다. 도쿄의 비농가와 근교 농민이 농산물-식재료-똥거름-농산물이란 원환적 물질 순환을 형성하고 있었던 무렵의 이야기이다.
도쿄 일대의 농가가 합의하여 일절 똥거름을 수거하지 않게 된다면, 도쿄는 정말로 곤란해진다. 그가 도쿄 주거를 하며 살았을 때, 어느날 이웃의 노파가 “가득 차서 흘러넘칠 것 같은 걸, 부지런히 와서 가져가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하고, 씩씩대며 농부를 꾸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권세 높은 귀부인의 노성이라기보다도, 안달 난 아이가 의지할 데 없이 원망스럽게 토로하는 불평의 목소리였다. 대군의 슬하, 일본의 중추라며 뽐내는 도쿄인도 아이처럼 똥오줌의 뒷처리를 남에게 맡겨서, 시골의 보모가 오는 것이 늦기라도 하면 이처럼 곤란해 안달하는 것이다. 꾸지람을 들은 농부는 묵묵히 그 똥오줌을 치워 그걸 비료로 곡물과 채소와 잡다한 산물을 길러서 다시 도쿄로 가져와 도쿄인을 먹여 살린다. 더러움을 가지고 깨끗함을 만들고, 폐물을 가지고 생명을 만든다.
정말로, 메이지 시기부터 다이쇼 시기에는 아직도 근교 농촌의 농산물 생산이 똥거름에 의해 이루어졌단 것을 토쿠토미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그에 더하여, 메이지 후반부터 다이쇼 시기에 걸쳐 도쿄에 집중되는 비농가 인구의 증대에 수반해 인분뇨도 증대되어, 도쿄의 인분뇨 처리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전해지는 문장이다. 이처럼 에도 시대 이후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인분뇨를 똥거름으로 귀중한 비료로 이용하던 일본에서는 유럽처럼 분뇨를 직접 강에 흘려 보내거나 도로에 버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철도에 의한 분뇨의 운반
이러한 '도쿄 분뇨권'의 존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얼마동안 이어졌다. 전후는 식재료 부족이 점점 심해져 농가는 증산에 필사적이었는데, 중요한 비료의 입수가 어려웠기에 똥거름은 농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비료였다. 한편, 도제都制가 시행된 도쿄도는 2차 세계대전 중부터 일손이 적어지고, 가솔린은 부족하며, 트럭으로 교외까지 운반하거나 배로 도쿄만에 투기하거나 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그 결과, 똥구덩이가 넘쳐 변소 퍼내는 구멍으로부터 대소변이 넘쳐 흐를 것 같은 상태라 변소 청소는 막다른 상태가 되었다. 당시 오오다치 시게오大達茂雄 도쿄도 장관(현재 도쿄도 지사직)은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에 세이부西武 철도의 츠츠미 야스지로우堤康次郎 사장에게 철도에 의한 인분뇨의 수송을 의뢰했다.
그런데 세이부 철도의 인분뇨 수송이라고 하면 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전후에 걸쳐서의 일이란 것이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이전에도 이케부쿠로선池袋線의 전신인 무사시노 철도가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도 인분뇨 수송을 행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카츠시카구사葛飾区史』(2017)에 의하면, 1921년에는 토우부東武 토우죠우선東上線, 쇼와 초기에는 토우부 이세사키선伊勢崎線, 도쿄 서부로는 세이부 철도나 무사시노 철도로도 인분뇨의 수송이 행해지게 되었다.
무사시노 철도에 관해서는 이 사실은 당시의 경영보고서나 관계 촌사무소村役場 문서에만 기재되어 있었기에, 실태는 대부분 불명이지만, 나가스 토시유키長須祥行가 지은 『세이부 이케부쿠로선 각 역 정차』(1973)에 의하면 대략 아래와 같았다. 인분뇨의 수송은 도쿄시가 화주가 되어 행해졌던 것으로, 카지무라加治村(현 한노우시飯能市) 촌사무소 문서에 의하면 1922년 7월에 이루마군 농회와 이루마군 구매판매조합이 도쿄시와 계약해 분뇨 인수 역은 히가시쿠루메역東久留米駅, 아키츠역秋津駅, 미카지마무라역三ヶ島村駅, 부시역仙子駅, 한노우역이었던 것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1923년에 도쿄시로부터 유개 차량 5량을 빌려서, 이듬해 1924년에 히가시쿠루메역 구내에 전용 하역소와 측선을 조성했다. 수송 형태는 불명이지만, 빌린 화차가 덮개가 달린 유개차였단 바로부터, 거름통을 싣고서 수송한다는 전쟁 이전의 전형적인 방법에 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수송은 4년 뒤인 1928년 3월에 폐지되어, 동사의 분뇨 수송은 일단 중단하게 되었다.
무사시노 철도의 수송이 폐지되고 16년 뒤인 1944년에 분뇨 수송은 도쿄시로부터 도쿄도의 위탁에 의해 옛 세이부 철도를 포함시켜 부활하게 되었다. 분뇨 수송에 대해서는 옛 세이부 철도의 사내로부터 큰 반발을 받은 듯하나, 같은 해 9월부터 도쿄도 위탁에 의한 대규모 분뇨 수송을 개시했다. 옛 세이부 철도 신주쿠선에서는 이오기역井荻駅의 북쪽에 측선을 부설하고, 타나시역田無駅의 북쪽에 부설한 측선, 히가시코다이라역東小平駅의 남쪽에 부설한 측선, 히가시무라야마역東村山駅의 세이부엔선西武園線이 나뉘는 곳의 측선, 고쿠분지선国分寺線 오가와역小川駅의 서쪽 측선에 저류조를 설치했다.
한편, 무사시노 철도선, 현재의 세이부 이케부쿠로선에서는 히가시나가사키東長崎-에고타江古田 사이에 하행선으로부터 남쪽에 측선을 내어, 새롭게 '나가에長江'라고 하는 화물역을 마련해 하역소를 설치하고, 키요세역清瀬駅의 북쪽, 사야마가오카역狭山ヶ丘駅의 북쪽, 코마역高麗駅의 서쪽에 각각 저류조를 설치했다.
1973년 발간된 『키요세시사清瀬市史』에는 "1945년 도쿄도의 분뇨 처리용 큰 저류조가 설치되고, 그곳에 이르는 선로도 키요세역에서부터 놓여 전용 탱크차로 7량에서 10량 연결된 특별 열차가 많을 때는 3회 왕복도 했다"고 한다. 탱크차는 2-9의 사진과 같고, 마개를 틀면 적재된 인분뇨가 아래로 흘러내리는 구조였다.


2-9 무사시노 철도의 분뇨 운송 차량. 나가스長須(1973)에서 옮겨 실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기생충증 등의 문제로 인해 똥거름의 농업 이용은 중지를 권고받거나 일본인이 생채소를 먹는 식생활로 바뀌었거나 한 점, 비농가인 도시 주민이나 농민이 인분뇨의 살포를 싫어했다거나, 또 1940년대 말부터 화학비료가 출시됨에 따라 철로 인근 농민의 분뇨 수요는 차츰 감소했다. 한편, 가솔린도 공공적인 것은 겨우 필요량을 구할 수 있게 되어 도민의 분뇨는 농민의 수요와 반비례해서 배로 도쿄만 중앙부에 운반해 투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53년 3월에는 세이부 철도의 분뇨 수송은 완전 폐지되었다. 그에 수반해 인분뇨의 농업 이용은 차츰 감소해 나아갔다.
분뇨 처리와 하수도 정비
지금까지 보았듯이, 근대(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분뇨에 의한 똥거름은 논밭의 지력을 유지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저렴한 거름으로 농업에 이용되었다. 그런데 20세기 초두가 되자, 똥거름을 거름으로 농업에 이용하는 순환 체계가 차츰 막히게 되었다. 그 배경으로는 급격한 인구 증가, 도시화와 공업화에 따른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과 농업 노동력의 감소, 교외 농지의 감소에 의한 수급 균형의 붕괴, 화학비료의 보급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20세기 중기)가 되면, 도시부에서는 분뇨가 넘치는 사태가 되어, 하천과 호수, 바다, 산골짜기 등 모든 장소에서 분뇨의 무질서한 투기가 행해져 환경오염, 수계 전염병, 기생충 이환 등 건강 피해가 가시화되기 시작해, 분뇨의 위생 처리가 긴급 과제가 되었다. 분뇨 처리를 위한 법제도나 분뇨 처리시설 정비를 위한 재정 지원 제도, 처리나 구조·유지 관리에 관한 기준을 정비함과 함께 분뇨의 처리 방법, 수집·운반 방법에 관한 기술 개발을 급속히 진행해 일본 독자의 집약 처리 체계를 구축해 나아가게 되었다.
1878년 1월에는 일본에서 콜레라가 유행해 인분뇨의 처리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져 '분뇨 단속 개칙概則'이 제정되며 분뇨 처리의 기준이 정해졌다. 이것이 분뇨 처리에 대한 법적 조치가 취해진 최초이다. 1880년에는 이 개칙이 폐지되고 새롭게 '분뇨 단속 규칙'이 정해지며, 나아가 1887년에는 '분뇨 수거운반 규칙)이 공포되어 분뇨의 수거 방법이나 취급 시간 등에 관하여 세부에 이르는 구체적인 단속 제도가 명시되었다. 덧붙여, 이 무렵이 되어 분뇨를 대신해 시뇨屎尿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883년이 되어 요코하마 벽돌제 하수도, 1885년 도쿄의 칸다神田 하수를 시작으로, 오사카와 센다이, 히로시마, 나고야 등의 대도시에서 하수도 사업이 행해지고, 1900년에는 '옛 하수도법'이 제정되었다. 다만, 그 목적은 토지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있었다. 수용하는 것은 빗물이나 생활 잡배수가 대상으로, 분뇨는 동시에 생긴 '오물 청소법'으로 다루어져, 그 반출은 각자가 가까운 농가에게 수거를 부탁하면 된다고 여겨졌다.
1902년에는 콜레라, 아메바성 이질의 대유행이 덮친 뒤 1907년, 1910년, 1912년에 거듭해서 콜레라가 유행하고, 또 이질도 매년 3~4만 명의 환자를 발생시켰다. 그래도 분뇨 초리를 농가에 의존할 수 없게 된 대도시로부터 분뇨를 받아들이는 하수도와 그 처리장의 건설이 개시되기 시작했다. 1호는 도쿄의 미카와시마三河島 처리구였다. 1913년부터 종말처리장과 그에 인접한 하수도 건설을 진행해, 22년에 운용을 개시했다. 이 시대는 유럽에서도 산포여상법으로, 미카와시마 처리장도 그를 따랐다. 다음으로 공사를 진행한 시바우라芝浦 처리구는 1931년, 스나쵸우砂町 처리구는 30년에 완성되었다. 모두 산포여상법이었다. 이것은 생물막법의 하나로, 원형 연못 안에 쇄석 등의 여과재를 높이 1.5~2m 정도로 채우고, 그 표면에 하수를 산포함으로써 여과재의 표면에 부착된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하수가 쇄석 위를 통과하는 동안에 유기물이 분해된다는 방식이다. 이 방법에서는 악취나 파리가 발생하고, 여과 바닥에서 박리된 미세한 부유물에 의해 처리수의 투시도가 낮아짐과 함께, 시설의 필요면적이 커지는 등의 단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는 현재 대부분의 하수 처리장이 산포여상법을 중지하고 있다.
도쿄에서 더욱 고도한 하수 처리가 가능한 '활성오니법'의 최초 도입은 미카와시마 처리장에서 1934년 실용화되어 산포여상법과 병용되었다. 활성오니법은 미생물이 모인 활성오니를 더하여 바닥에서 공기를 보내 미생물의 힘으로 하수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하수도관과 종말처리장을 한 묶음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던 도시는 매우 일부의 대도시뿐이었다. 1930년에 '오물청소법 시행 규칙'이 개정되어, 분뇨 처분이 원칙적으로 시정촌의 일이 되는데, '지사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할 때는 당분간 종래와 같이 분뇨를 처분하고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는 '단서'가 붙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 전국에 이 '단서'가 적용되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종전과 크게는 바뀌지 않았다.
분뇨와 쓰레기가 동거했던 서구의 중세 도시에서는 페스트나 자주 급성 전염병이 덮쳤기 때문에, 상수도와 함께 수세식 변소와 하수도 건설을 긴급한 일로 전력을 기울여 몰두했다. 파리에서는 1792년의 대혁명 무렵에 이미 하수도가 그물망처럼 둘러쳐져 있었던 것은 1862년에 출판된 빅토르 위고가 지은 명작 『레미제라블』에서 혁명 시기에 주인공 쟝 발쟝이 하수도를 따라 이동하며 경찰의 손에서 도망가는 묘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앞에 기술한 '단서'가 달린 건 오물 청소법을 대신하는 1954년 제정된 '청소법清掃法'으로 분뇨 처분은 시정촌의 책무가 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는 전쟁 부흥이나 산업 기반정비가 우선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하수도 사업이 지지부진하여 그 대상은 시정촌 전역이 아니라 특별 청소 지역에 한정되었다. 1955년의 특별 청소 지역의 처리법은 하수 처리가 겨우 6.4%로, 산과 들에 매립 투기·해양 투기 등 비위생적 처분이 50%를 넘었다. 그 결과, 휴지가 수면이나 산과 들에 산재하는 사태가 되어, 하천과 호수, 연못, 항만, 해양 등의 공공용수역에 분뇨 투기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동시에 이 무렵부터 산업 배수에 의한 공공수역의 수질 오탁이나 오염이 드러나게 되어, 도쿄만에서 어업 피해 문제나 쿠마모토현 미나마타만水俣湾에서 '미나마타병' 등 공해 문제도 표면화되었다.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전후 부흥을 완수한 일본은, 계속해서 에너지 전환이나 기술 혁신을 진전시켜, 생산 활동을 뚜렷하게 고도화·대규모화시키며 경제를 고도로 발전시켰다.
사회경제가 계속 변모함과 동시에 공해 등 여러 문제가 표면화되어, 법 정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 하수도 행정이 뒤를 좇고 있었다. 1957년에 하수도는 후생성, 공업용수는 통상산업성, 하수도 관리는 건설성, 종말처리장은 후생성으로 소관이 명확해지는 한편, '종적관계 행정'이 진행되었다. 이듬해, 1958년에 하수도법도 전면 개정되어 '(신)하수도법'이 탄생했다. 단, 여기에서는 '합류식 하수도'를 전제로 도시 안의 침수 방제와 환경 정비에 중점을 두어, 공공용수역에 대한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8년 말, 일본의 본격적인 하천이나 호수나 해양의 수질 오염 방지를 위한 '공공용수역의 수질 보전에 관한 법률(수질보전법)'과 '공장 배수 등의 규칙에 관한 법률(공장 배수 규제법)'의 이른바 수질 2법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종말처리장에서 방류되는, 처리 하수의 수질 기준이 정해졌다. 유해물질의 배출은 논외로 하고, 종말처리의 방법별로 처리 하수의 수소이온 농도(pH), 생물화학적 산소 요구량(BOD), 부유물질량(SS), 대장균군 수 등이 규제되었다. 활성오니법에서는 수소이온 농도는 5.8~8.6pH, BOD는 20㎎/ℓ 이하, 대장균군 수는 3000개/㎤이하로 결정되었다. 당시, 이 정도의 검사 항목을 설정하고 BOD도 20㎎/ℓ 이하라고 하는 건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꽤 엄격한 수치였다. 나아가 일본에서는 대장균 군수를 엄격히 규제해, 처리 하수에도 방류 전에 염소 소독을 하도록 했다. 공공용수역의 수질 보전이 클로즈업되면서 1964년 종말처리장 건설이 후생성으로부터 건설성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그 관리는 1970년까지 후생성에서 행했다. 하수도관과 종말처리장 건설의 이원화에 따라 하수도와 종말처리장으로 나뉘어 있던 5개년 계획을 일체화하고 '신 하수도 정비 5개년 계획'도 시작했다.
수질 보전을 위하여
고도 경제 성장기, 편리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누리는 것과 그 폐해에 의한 피해자 사이에 큰 격차를 발생시켰지만, 국민 대부분은 공해를 특수한 사례라고 간과해 왔다. 수질 2법도 규제의 대상을 특정 수역이나 업종에 한정했기 때문에, 규제 밖의 공장 배수로 제2의 미나마타병이나 이타이이타이병의 발생을 또다시 용인해 버렸다. 기본적 대응에 급급해 1967년 '공해 대책 기본법'이 생기고, 1970년 이른바 공해 국회에서 공해 관계 14법안이 가결되었다. 신규에는 '공해 범죄 처벌법' '공해 방지 사업비 사업자 부담법' '해양 오염 방지법' '수질 오탁 방지법' '농용지 토양 오염 방지법' '폐기물의 처리 및 청소에 관한 법률(폐기물 처리법, 폐소법)' 등이었다.
개정이 '하수도법' '공해 대책 기본법' '자연공원법' '소음규제법' '대기 오염 방지법' '도로교통법' '독물 및 극물 단속법' '농약 단속법' 등이었다. 생활이나 생산 활동으로 배출된 배수는 폐기물 처리장이나 하수처리장에서 처리되고나서 하천이나 해양에 방류하도록 되었다. 이 때문에 하천이나 해양의 부영양화가 큰 문제가 되었다. 내륙부의 상류나 도시에서 배설된 배수가 영양염류를 고농도로 포함하고 있는 경우, 호수나 내만内湾 같은 곳에서는 그들의 영양분이 집적되어 조류나 플랑크톤이 대발생했다. 그 때문에 수면은 담수조에 의한 녹색으로 변색되어 투명도가 떨어짐과 함께, 악취를 풍기는 호수나 내만에서는 해수욕이나 수영을 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해양에서도 공장의 오수나 분뇨의 배수 등에 의한 수질 오탁에 의하여 '적조'의 발생이 자주 문제가 되었다. 도쿄만이나 사가미만相模湾이나 세토 내해에서는 적조가 발생해 김이나 바지락 등의 양식어패류에 큰 피해를 가져와 어업자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기업은 사회에 손해를 끼치거나 환경을 더럽히거나 하는 외부 비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체하고, 내부 비용을 작게 하는, 이른바 '외부 불경제'라고 하던 시대였다. 대기 오염과 마찬가지로, 오염 물질이 하천이나 해양으로 확산됨으로써 발생하기 때문에 물의 오염이 미치는 범위도 매우 광역적이었다. 이러한 사태는 유역이나 연안의 어민이나 시민에게는 자신들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매우 공공적인 성질을 가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염의 발생 정도도 불확실하고, 또한 그 영향의 정도도, 어느 범위에 미치는지도 불확실했다.
공장이나 사업소 등에서 나오는 배수를 규제하는 등으로 공공용수역의 수질 보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수질 2법'을 대신해서 1972년 '수질 오탁 방지법'이 제정되었다. 그 배수 기준은 우선 성령省令으로 일률적으로 설정하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수역에 대해서는 도도부현의 조례로 더욱 엄격한 기준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73년에는 '인간의 건강 보호에 관한 환경기준'과 '생활환경의 보전에 관한 환경기준'으로 분류되는, 공공용수역의 '수질오탁에 관한 환경기준'이 고시되었다. 전자는 시안, 알킬수은 등의 유해 물질을 공공용수역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전국 일률의 기준치를 정하고 즉시 달성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후자는 하천이나 호수, 해역별로 기준치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개개의 수역마다 어느 유형을 적용할지를 지정하고 단계적으로 실현을 도모해 가는 것이었다.
공공용수역의 오탁원(汚濁源)의 하나인 분뇨는 '공해 국회'에서 청소법을 대신해 성립된 '폐소법廢掃法'에서 일반 폐기물로 취급되어, 그 처리시설은 시정촌이나 행정조합 등이 설치·관리하고, 처리시설의 규모가 501인 이상이라면 수질 오탁 방지법의 특정 시설로서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나아가 하수도법 개정에서는, 하수도 보급 지역에서는 화장실의 수세식화를 의무화하는 외에, 종말처리장을 반드시 설치하도록 규정하는 등과 아울러, 공공용수역의 수질 보전이 목적에 더해져 그에 수반하는 수질 환경기준이 정해졌다. 공공용수역의 목적 달성·유지를 위해 '유역별 하수도 정비 종합계획(류총流総 계획)'의 책정을 도도부현에 의무 지우게 되었다.
1976년의 하수도법 개정에서는 종말처리장에서 방류하는 하수의 수질 관리를 곤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 악질 하수를 배출하는 자에 대한 직벌 제도 도입 등 규제 감독도 강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도시의 배수 시설로서 시작된 일본의 하수도 사업은 1950년대 중엽에 시작되어, 1960년대 중엽의 공해 문제로부터 공공용수역의 수질 보전에 깊이 관계되는 환경 시설이란 측면이 더해지고, 당시 10% 미만이던 하수도 보급률은 급속히 늘어나 지금은 70%를 넘었다. 하수도 사업을 선진적으로 추진한 도쿄도의 보급률은 거의 100%이다.
하천이나 해양의 환경 오염 방지를 위해서는 기업이나 지방자치체, 주민 모두가 일어서야 한다. 하천이나 해양이 공공용수역으로서 공동 이용하기에 걸맞은 상태로 유지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공공 전체에 미친다는 점에서 다시금 환경 오염의 중대성을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보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대도시 주변에서는 그 주민이 소비하는 대량의 채소 재배를 위해 가장 저렴하고 대량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똥거름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화학비료의 보급으로 똥거름 사용이 줄어들고, 남은 분뇨는 배로 해양에 투기되었다. 하수도의 보급으로 수거는 줄지만, 분뇨는 하수도와 하수도 처리장을 거쳐 강이나 바다로 흘러갔다. 전 아야세 청소연구소 주임연구원이자 해양 투기의 현장에도 입회했던 의학박사 스즈키 카즈오鈴木和雄는 가쓰시카구 향토와 천문의 박물관 편집 2004년 특별전 전시도록 『거름의 힘』에 기고한 글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도쿄에서는 1995년 3월 말로 해양 투기선 '제1 다이토우마루大東丸'가 폐선되어서 분뇨의 해양 투기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1997년 3월 말로 정화조 오니 등을 포함해 투기가 금지되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대도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세식 화장실과 하수도의 보급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어린이용 그림책에도 수세식 화장실에 관한 것이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네다섯 살 아동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으로 1978년 초판 이래 지금도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도우신사童心社의 다지마 유키히코田島征彦가 지은 『지옥의 소우베에(じごくのそうべえ)』라는 그림책이 그 하나이다. 칸사이 만담 『지옥 팔경 망자 익살(地獄八景亡者戯)』을 소재로 한 그림책이다. 곡예사 소우베에가 줄타기 도중 균형을 잃고 떨어져 삼도천을 건너 염라대왕에게 지옥행을 선고받아 '분뇨 지옥'에 내던져지고 만다.
"별로 냄새도 안 나네. 이런 거라면, 우리집 화장실이 더 냄새가 날 정도야. 똥이 밑바닥에 말라 버려서 달라붙어 있을 뿐이야."
"지옥도 요즘은, 어디나 수세식 화장실이 되어 버려서 분뇨가 모이지 않습지요."
수세식 화장실과 하수도의 보급으로 완전히 말라버린 분뇨 지옥의 도깨비들과 소우베에의 유머러스한 대화가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인은 예로부터 변소를 '고후조ご不浄(부정)' '하바카리はばかり(삼가함)' 등이라 부르며 남의 눈을 꺼리는 더러운 곳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자, 변소의 표현도 '토이레'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많아졌고, 최근에는 '오테아라이お手洗い', '화장실化粧室', '파우더룸パウダールーム' 등이 일반적이 되어 '변소便所'라고는 부르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 넘쳐 흐르는 질소
에도 시대 중기 이후, 일본 각지에서 여러 가지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쪽이나 유채 씨앗의 특수 작물조차 똥거름이나 외양간두엄 등의 자급 비료가 기본이었다. 최초로 금비가 사용된 것은 키나이畿内, 비사이시尾西 지방의 목화 농사였다. 이 지방에선 에도 중기부터 물고기 거름이 사용되었다. 이 물고기 거름은 처음에는 말린 멸치가 주였고, 시코쿠와 큐슈, 나아가 나중에는 보우소우房総 99리里의 멸치가 오사카에 모여 각지로 팔려 나아갔다. 막부 말이 되어 홋카이도 개발이 진행되자 마츠마에松前의 청어에 의한 청어 깻묵이 중요성을 증대시켜, 역시 오사카를 집산지로 거래가 이루어졌다. 물론 유채 깻묵, 목화씨앗 깻묵, 닭똥, 누에똥인 잠사蚕沙 등도 이용되었는데, 뭐니뭐니 해도 목화 농사의 발전은 물고기 거름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도 정월 요리의 차례상에 올리는 '타즈쿠리田作り'는 어린 멸치의 조림으로, 옛날 멸치가 논의 거름으로 이용되었단 것에서 유래한다. 풍작을 염원하는 상징물로 지금도 아직 우리들의 정월 요리 안에 숨쉬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콩깻묵도 메이지 초년부터 수입이 시작되었는데, 1895년 청일 전쟁 이후에는 청나라, 특히 만주에서 수입된 콩깻묵의 이용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물고기 거름은 질소와 인을 주로 한 비료이다. 그러나 콩깻묵은 인 함량이 매우 낮은 질소비료로 물고기 거름이 밭작물에 시용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벼농사로 옮겨간 반면, 콩깻묵은 처음부터 벼농사를 위한 비료였다. 콩깻묵은 청어 깻묵의 약 절반 가격이었기 때문에, 인을 특별히 필요로 하는 작물을 제외하고는 콩깻묵의 우위를 움직일 수 없었다.
화학비료인 유안이 처음으로 수입된 것은 1896년이고, 국내에서 처음 생산된 것은 1901년에 도쿄 가스 및 오사카 가스가 가스 제조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생기는 유안의 생산을 시작했을 때였다. 유안이 본격적으로 비료로 사용된 것은 쇼와에 들어가서부터였다. 4장에서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1913년 도일에서 하버와 보슈에 의해 공업화된 유안 제조법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에 개방되어 세계적으로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4장에서도 기술하겠지만, 유안 공업은 폭약의 원료인 질산이나 각종 약품염료와도 관련이 크기 때문에 국가의 원조도 크고,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최대의 화학공업으로 진보했다. 그 때문에 가격도 싸서 비료의 왕좌를 점유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50년대 중엽이 되면 비료 부족도 해소되고, 급격히 질소비료를 비롯한 비료 소비량이 증가했다. 이 시대에는 질소, 인, 칼륨 같은 단일 비료의 시용이 감소하고 복합비료의 시용이 급격히 증가해 간다. 이건 경제의 고도 성장, 쌀값 상승의 시기와 일치해, 화학비료의 사용은 농가에게 큰 부담이 아니게 되어서 사용료의 증대, 외양간 두엄 시용량의 감소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본래 식물인 작물에는 흙 속의 영양과 공기 중의 탄산가스나 질소를 받아들여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갖추어져 있다. 토양이나 공기로부터 얻는 영양의 섭취가 주체로, 비료가 지나치면 토지도 농산물도 영양 과다가 되어 버린다. 현재, 일본은 방대한 양의 식재료나 사료나 비료를 해외로부터 수입에 의지하고 있다. 2000년에 일본의 질소와 인의 순환은 마츠다 아키라松田晃・마토우 토오루間藤徹의 「질소 사이클과 식재료 생산 ー식물 영양학 21세기의 과제」(2003)이라는 논고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식재료와 사료의 형태로 들여오는 질소는 대강 101만 톤. 화학비료 49만 톤의 2배를 넘는다. 식재료, 사료의 질소나 인의 대부분은 돌고 돌아서 인간이나 가축에게서 배설된다. 질소의 양은 음식쓰레기 등을 포함해 인간이 71만 톤, 가축이 61만 톤. 인간 분량의 대부분은 현재 높은 경비를 지불하며 소각되고 있다. 환경에 대한 영향이 심각한 것은 가축으로, 가축 배설물은 약 94%가 재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만약 이 질소를 농지에 균등하게 뿌렸다고 하면, 3000평당 약 131kg이나 된다. 덧붙여서, 평균적인 논의 질소비료 양은 연간 90kg 안팎, 맛을 좋게 하기 위해 60~70kg 정도의 양만 시용하는 농가도 있다.

2-10 일본에서 2000년 질소와 인의 순환(단위: 만 톤). 괄호 안의 수치는 인. 마츠다·마토우(2003)에 의함
모두 어디까지 계산상의 이야기로 배설물을 퇴비로 사용하려 한다면, 그 안의 질소 30~50%는 질소 가스로 공중으로 날아가 줄어든다. 한편, 일본의 농지 과반을 차지하는 논에서 축산 퇴비는 대부분 쓰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축산 지대에 질소가 체류하고 있는 셈이다. 농수성은 1999년에 성립된 가축 배설물법과 비료 단속법의 일부 개정에 의해, 가축 배설물의 적정 관리와 퇴비의 품질 관리 강화에 착수했다. 작물을 농사짓는 경종 농가에게 가축 퇴비를 사용하게 하는 '경축 연대'를 질소 오염을 막는 기둥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가축 분뇨에 대해서는 '항생물질 등이 걱정이기 때문에 동물성인 것을 쓰지 않는다'라는 농가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중량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피도 큰 외양간 두엄은 수송 비용이 이동을 저해한다. 운반해 사용해 주는 건 겨우 30~50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농가 뿐이라는 것이 종래의 실태였다. 또한 일본의 축산 대부분은 수입 사료에 의존하고 있다. 자신의 밭에서 농사지은 사료로 기른다면 질소가 그곳에서 순환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장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현실이 있다. 농가도 소비자도 싸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찾아 여기까지 왔으니까.이들의 일부가 가정의 음식쓰레기, 하수 오니, 가축 배설물로 국내의 여기저기에 배출되어, 그 처분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 결과, 지하수나 유역도 오수와 해양 등의 공공수역도 영양 과다가 되어 버리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 영속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는 걸 지탱하는 농업이 영속적, 순환적이어야 한다. 거기에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환경도 지속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농촌을 포함해, 일본 사회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려 하고 있는 걸까?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질소라는 원소의 순환으로부터 그것을 점검해야 한다. 식생활과 농업 생산 현장의 점검을 행하여, 환경에 체류하는 질소를 저감시켜 가는 것을 기대하고 싶다. 화학비료의 다용으로 손쉽게 작물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유기물을 넣어 미생물의 힘을 빌리면서 경작지의 지력과 식물 뿌리의 힘으로 기르면 작물은 건강하게 자라며 맛도 좋아지고, 좋은 순환이 만들어져 간다. 질소가 가득한 상태로부터 질소가 적은 바람직한 환경계를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 식생활이나 농업 생산의 장에서도, 지하수나 하천이나 해양의 수질 보전 면에서도 요구되고 있다.
설마 바다와 호수의 '빈영양화貧栄養化'
2차 세계대전 이후 고도 경제 성장에 따라 해외로부터 수입되는 사료나 비료, 식재료 등에 포함되어 있는 질소나 인 등은 수역으로 배출되어, 이에 수반해 호수나 연안의 해역은 부영영화되고 각지에서 녹조나 적조가 발생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기술해 왔다. 현재는 하수도의 보급과 함께 하수 처리장의 배수 기준이 엄격해져 유해 물질과 더불어 플랑크톤 등의 생육에 필요한 영양분까지 제거되어, 하천이나 호수나 해양이 이전에 비하면 뚜렷하게 깨끗해졌다. 이러한 다양한 조치에 의해 최근엔 적조의 발생이 화제가 되는 일은 상당히 줄어들고, 투명도의 상승으로 볼 수 있듯이 수질은 명확히 양호해졌다.
이러한 대책은 당연히 취해야 하지만, 그 한편으로 바지락의 흉어, 김의 색빠짐, 어획량의 저하 등 새로운 문제가 일어나는 해역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질 정화나 수질 개선의 결과 단지 오수나 악취가 개선되었다고 기뻐할 뿐, 어떠한 변화가 해양 생태계에서 일어날지에 대해 우리는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히로시마 대학 명예교수 야마모토 타미지山本民次는 세토 내해를 중심으로 '바다의 빈영양화와 어획고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스와호諏訪湖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는 하나자토 타카유키花里孝幸와의 공편저 『바다와 호수의 빈영양화 문제』(2015)에서 다루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지금 뜻밖에 바다와 호수의 빈영양화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깨달게 되었다.
환경성은 2005년부터 제6차 수질 총량 규제에서 "오사카만을 제외한 세토 내해에서의 규제 강화는 보류하기로 하고, 질소나 인도 적당하다면 어업에 플러스로, 맑은 바다와 물고기가 풍부한 바다는 반드시 양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이것이 공통 인식이 되어 가며 '빈영양화 문제'가 일본에서 서서히 인지되며 논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육지나 바다의 생태계 안에는 여러 생물이 서식하고, 그들 생물끼리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 또한 생물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 또는 화학적 환경의 영향 등 그것들이 생태계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동시킬 것인지 예측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생태계 안의 동적 응답을 다루는 복잡과학의 새로운 진보가 요망된다.
오니가 구원할까 흙과 거름의 위기
현재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화학비료의 원료는 앞에서 기술했듯이, 대부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인과 칼륨은 원료가 되는 천연 광석이 일부 국가에 편재되어 있어, 일본은 최근까지 약 90%를 중국이나 러시아 등에서 수입해 왔다. 그러나 2022년 7월 21일자 아사히 신문 기사에 의하면, 2021년 가을 이후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오는 수입이 지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중국 국내의 수요를 우선하기 위한 사실상의 수출 규제라 보고 있다. 더욱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영향으로, 천연가스 등에서 만들어지는 질소계 비료나, 러시아나 벨라루시로부터 원료를 수입하던 칼륨계 비료도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국내 최대의 JA 전농은 2022년 6월부터 표준적인 비료의 도매가를 약 1.5배 인상했다고, 2022년 7월 21일자 아사히 신문 기사 「비료 가격 상승 ‘하수’가 구한다?」에서 보도했다. 거기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이 국산 자원인 하수 오니이다. 하수 처리 과정에서 두 종류의 미생물 작용에 의해, 유기물 및 질소가 산화, 분해된다. 먼저, 질산화균이 암모니아성 질소를 산화시켜 아질산성 질소를 만든다. 다음으로 탈질균脱窒菌이 물속에 녹아 있는 용존산소를 영양원으로 아질산성 질소를 질소가스로 변환시켜 그대로 대기 중에 방출된다. 이 과정에서 미생물의 체내에는 인과 질소가 흡수된다. 분리되어 제거된 대량의 미생물 사체가 하수 오니이다. 국토교통성에 의하면, 전국 2000곳 이상의 하수처리장에서 나오는 오니는 연간 230만 톤이고, 그 안에는 5만 1000톤의 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국내 농업 분야에서 사용되는 인 성분의 20%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한다. 2021년에 농림수산성이 정한 '그린 식재료 시스템 전략'에서는 화학비료 사용량을 "2050년까지 30% 줄인다"는 목표를 내걸고, 하수 오니의 활용도 언급한다. 나아가 2022년 9월 10일자 아사히 신문 기사에 의하면,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화학비료 가격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하수 오니 등 국내 자원의 이용을 확대하도록 농림수산성에 지시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국내 자원에 눈을 돌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단순히 화학비료의 가격 급등에 대한 대처만이 아니라 퇴비 등의 유기물 시용이 감소하고 토양 비옥도가 저하되며 농과 식과 환경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그 근본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단, 하수에는 여러 가지가 흘러든다. 대장균 등은 고온에서 발효시킬 때 사멸되지만, 수은이나 납 등의 중금속은 남는다. 이들을 제거하고 유기질 비료를 제조하려는 시도는 여러 해 전부터 행해지고 있지만, 설비와 비용, 안전성 등 여러 문제로 인해 자원의 유효한 이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상이다. 특히 유기농업에서 오니를 사용하는 경우, 농림수산성은 그 오니의 전부가 천연물질이나 천연물질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오니 이용의 장벽을 높이고 있다. 비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전체의 약 10%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하수 오니를 비료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도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의 오오미야大宮 남부 정화센터에서는 병원체가 완전히 사멸되어 있는지, 중금속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지 등의 정기 검사를 마친 고도 하수처리에 의해 만들어진 오니를 '이데오유우키イデオユーキ'라는 이름으로, 2003년부터 시민에게 한 봉지 10kg들이를 100엔에 희망자에게 배포하고 있다. 나는 매년 다섯 봉지를 구입해 정원의 화단이나 작은 텃밭의 흙 가꾸기에 이용하고 있다. 나아가 사이타마현에서는 도로의 유지관리에 수반해 깎아내며 발생한 풀이나 가지를 퇴비화해서 희망하는 현민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농업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데에는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하수 오니'라는 이미지 개선 외에도 안전성이나 성분의 안정성 확보, 제조 비용의 절감 등이 과제가 되고 있다. 고베시에서는 하수 오니에서 화학적으로 인을 추출하는 방법을 2020년부터 사업화했다. 하수 오니에 마그네슘을 더해 MAP(인산마그네슘암모늄)의 결정을 추출해 1kg에 45엔으로 비료 제조업자에게 판매하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큐슈의 후쿠오카시에서도 오니 처리 과정에서 MAP을 과립상으로 추출해 비료로 판매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진다면, 물질대사의 사이클을 인위적으로 완결시키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순환의 시대로 돌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류도 반드시 위급존망危急存亡의 시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2-11 사이타마시의 오니에서 퇴비를 제조하는 장치(좌)와 완성된 '이데오유우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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