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마을을 거닐고, 시장에서 파는 시골의 '종자상'
- 외상 신용 판매로 지역 밀착, 소매 행상 슈니種仁 상점
대도시 도쿄 근교로부터 완전히 바꿔, 지방 도시 니이가타의 채소 수요를 담당했던 니이가타현 키타칸바라군北蒲原郡으로 눈을 돌린 것이 이번 장.
논 우월지대에 산재한 약간의 밭을 이용해 다양한 채소를 농사짓는 키타칸바라군. 소량 다품목의 채소 생산을 뒷받침한 것은 지역에 밀착해 종자를 판매한 소매상이나 행상들이었다. 그중에는 종자 수요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경영을 발전시켜 소규모로 채종 시스템을 만들어 고정종 육성에 나선 사람도 있다.
현재도 이어지는 종자 소매상 타카하시 니시치高橋仁七 종묘점을 예로 그 실태를 소개하겠다.
1. 니이가타현新潟県의 채소 생산
1) 무논 지대 안의 채소 생산
니이가타현은 다이쇼우 말기에 채소 생산 가액으로 전국 5위, 작부면적에서 전국 3위라는 순위에 있었다. 이 가운데 작부 순위가 전국에서 10위 이내에 있던 채소를 들면 표5-1과 같다. 가장 작부면적이 많은 채소는 무로 1718만 1000평으로 전국 2위, 다음으로 가지 489만 3000평(전국 1위), 절임채 408만 6000평(전국 6위)으로 이어지고, 그밖에 오이(전국 2위), 수박(전국 3위), 호박(전국 4위), 참외(전국 3위), 월과(전국 8위)와 같이 과채류가 많은 점이 니이가타현 채소 생산의 특징이었다.
표5-1 니이가타현의 작부 10위권 안의 품목 및 주요 품종과 종자 구입 비율
출전: 1924年 「新潟県統計書」,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栽培之状況」 大日本農会, 1927年,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褂主要品種ノ分布調査」 社団法人 日本 園芸会, 1936年,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ノ種苗二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年에서 작성
주) -는 기재 없음, *표시는 니이가타 원산인 품종을 나타낸다. 印は新潟原産の品種を示す。調査」社
한편, 해당 시기에 생산되었던 주요 품종을 보면, 니이가타 특산 채소 품종은 *표시를 붙인 10품종, 곧 우오누마魚沼 돈주머니(巾着) 가지, 카리와刈羽 오이, 곱자(矩子) 호박, 츠시마야津島屋 무, 오천섬 파, 요리이寄居 순무, 코이케小池 우엉, 만니치満日 채, 노자와野澤 채, 타네스하라種芋原 양배추이고, 그밖에는 니이가타 이외의 품종인 것이 주목된다. 2장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당 시기는 지방 니이가타의 특산 품종에 그치지 않고, 다른 지역의 품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채소 생산이 정착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니이가타현 채소 생산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자. 표5-2처럼 현 안의 채소 생산은 키타칸바라군, 나카칸바라군中蒲原郡, 니시칸바라군西蒲原郡, 미나미칸바라군南蒲原郡, 나카쿠비키군中頸城郡의 다섯 군에서 약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 니이가타시, 타카다시高田市라는 지방 도시 근교에 위치하는 농촌 지대이다. 나아가, 각 군의 채소 생산과 논밭 비율의 관계를 보면, 위의 다섯 군 모두 현 평균 71%를 상회하는 논 지대인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니이가타현은 전국에서도 유수한 쌀 산지이다. 그러나 니이가타현의 농가는 벼농사 경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한편으로 여러 가지 생업을 조합시킨 복합 경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표5-3에서 보듯이, 키타칸바라군 및 나카칸바라군의 농가 수입 내역을 보면, 벼농사를 중심으로 채소, 화훼, 과수, 뽕잎, 땔감, 제작가공, 양잠, 가축, 비료에서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오카무라岡村(1986)에 의하면, 칸바라 평야의 농가가 생계를 유지해 나아가기 위한 현금 획득의 수단으로 농한기의 타관 벌이나 부업 성격의 가내공업과 함께 자연 제방 위의 한정된 토지에서 채소·과수 등의 환금작물 재배가 중요했다고 한다.(주1 岡村治 「明治期三条町の『市』と店舗商業」 『歴史地理学』 (134\), 1986년, 17-30쪽.)
표5-2 1924년 니이가타현의 채소 작부면적과 생산가액
출전 : 1924年 「新潟県 統計書』에서 작성
주) *표시는 현 평균을 상회하는 논 비율을 나타낸 것.
표5-3 1915년 키타칸바라군 및 나카칸바라군의 농가 수입 내역
출전 : 新潟県 農会 編 『新潟県 農家释濱 調查』 新潟県 農会, 1917년에서 작성
2) 채소 수요의 확대와 원예 장려 정책
압도적인 논 지대이면서도 니이가타현의 채소 생산이 전국적으로 높은 지위를 점하는 데까지 발전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지방도시의 발달에 따른 소비 인구의 증가
첫번째는 도시의 발달을 배경으로 한 채소 수요의 확대이다. 1900년 이후 니이가타에서는 전기화학공업, 제사, 직물업의 공장제 공업, 광업 등 경공업·중공업 두 부문에 걸쳐서 뚜렷하게 발달했다. 1919년에 현 안의 2차·3차 노동자 수는 25만 8080명으로, 그 가운데 약 20%에 달하는 5만 1821명이 니이가타시에 집중되어 있었다.(주2 新潟県 編 『新潟県史』 通史編 7 近代二, 新潟県, 1988년, 769-773쪽.) 이러한 노동 시장의 확대를 배경으로 니이가타시의 인구는 1920년에는 9만 2130명, 1925년에는 10만 8941명이 되었다.(주3 新潟市史編さん 近代史部会 『新潟市史』 通史編 4 近代 (下) 新潟市, 1997년, 68쪽.) 인구 증가에 따른 새로운 채소 수요의 창출은 청과 도매상의 신설을 촉진했다. 니이가타현의 청과물 도매 거래는 니이가타시의 '혼쵸우本町 고五・로쿠반쵸우六番町 아침 시장'과 '눗타리沼垂 아침 시장'이란 2개소에서 개최되어, 농가가 생산한 채소는 주로 청과 도매상을 통해 소매업자로부터 시내의 소비자에게 판매되었다.(주4 新潟 中央青果 株式会社 二十年史 編纂委員会 「新潟 中央青果 株式会社 二十年史』 新潟 中央青果 株式会社, 1984년, 9-12쪽.) 「일본 전국 상공인명록商工人名録』에 의하면, 1890년대에 16곳이었던 니이가타시의 청과 도매상 수가 다이쇼우 말기에는 46곳으로 약 3배까지 증가한다.(주5 1892년 「日本 全国 商工人名録』에는 청과 도매상이 일체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그 뒤의 「같은 人名録」에는 청과 도매상의 창업 시기가 기재되어 있기에 이 책에서는 창업 시기를 바탕으로 도매상 수를 산출했다.) 다이쇼우 시기에 들어와 니이가타시의 채소 수요는 크게 늘어, 그에 따라서 근교 농촌에서 상품 채소의 생산도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현에 의한 원예작물의 진흥
두번째는 니이가타현에 의한 원예 장려 정책이다. 1914년 4월에 니이가타현 지사에 취임한 사카 나카스게坂仲輔는 <현 시책 규정(県是策定)>의 기반을 정비하기 위해 같은 해 8월부터 이듬해인 1915년 5월에 걸쳐서 대대적인 산업 조사를 실시하고, 그 성과를 『니이가타현新潟県 산업조사서産業調査書』(이하 <조사서>)로 간행했다. '시是'란 '방침'이란 의미이다. 즉, 산업 진흥에 열심이었던 사카 지사는 니이가타현의 산업 현황을 파악한 뒤 앞으로의 개량 방침을 정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1915년에 <산업에 관한 현 시책>을 공표했던 것이다.(주6 新潟県 編 『新潟県史』 通史編 7 近代 二, 新潟県, 1988년, 459쪽.) 이 조사에서는 현 안의 채소 생산에 대해서도 조사되어 <조사서>에 정리되었다. 이에 의하면, 1913년에 니이가타현 안의 채소 총소비액은 603만 518엔, 채소 생산액이 550만 5146엔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52만 5372엔을 다른 현에서 이입하는 것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하여 현은 "10개년 뒤는 현재 인구의 12%, 곧 1213만 7400명이 되는 비율로, 그 과채의 소비액은 생활의 향상을 예상해 현재 소비액에 비해 약 채소 10%, 과실 27%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예상된다"(주7 新潟県 編 「新潟県 產業調查書』 上卷, 新潟県, 1915년, 437-438쪽.)고 하여, 이하의 <원예작물의 개량 및 증수>란 실시 항목을 내세웠다. 그리고 개량에 의한 10년 뒤(1925년)의 목표 생산액을 777만 6764엔(1.41배 증가), 작부면적을 7932만 6000평(1.17배 증가)으로 했다.(주8 新潟県 編 『新潟県 産業調査書』 上巻, 新潟県, 1915년, 483쪽.)
[사료 5-1](주9 新潟県 編 『新潟県 産業調査書』 上巻, 新潟県, 1915년, 500-502쪽.)
개량 사항 방법
(1) 각 시군에 적당한 원예작물의 종류 및 품종과 아울러 그 증식액을 예정하고 실행할 것
(2) 우량 종묘의 육성 및 보급을 도모할 것
(3) 각종 과채의 명칭을 일정하게 할 것
(4) 모범 과수원 및 채소원을 설치할 것
(5) 강습·강화·실지 지도의 방법에 의한 지식의 보급을 도모할 것
(6) 토지의 이용 방법을 완전하게 만들 것
(7) 비료의 증시를 장려함과 함께 그 배합을 합리적으로 만들 것
(8) 경종 표준을 작성해 일반적으로 그에 의하도록 만들 것
(9) 특수 원예작물에 대해서는 재배, 판매, 기타 모든 걸 목적으로 하는 조합을 설립할 것
(10) 병해충의 공동 방제를 장려할 것
(11) 과수 묘목의 청산 기와(青酸瓦) 훈제법을 도모할 것
(12) 과수의 울타리 만들기에는 철사의 이용을 장려할 것
(13) 과실의 종이봉지는 우량 종이의 공동 구입을 행하도록 하여 봉지 씌우기를 보급할 것
(14) 채소는 특히 종자의 관계가 중요한 걸 주지시킴과 함께 우량 종자 및 품종을 선택해 종자의 공동 구입을 하도록 할 것
(15) 채소는 특히 돌려짓기를 완전하게 할 것
(16) 논 그루갈이로 채소 농사를 장려할 것
(17) 종묘 조합의 완전을 기하여 유량 종의 보급을 도모할 것
(18) 조합 기타의 기관에 각 종자의 모본원을 설치해 좋은 종자의 번식 보급을 도모할 것
(19) 가공 및 저장법을 연구 장려할 것
(20) 시장 및 공동 판매를 아울러 판로의 확장을 도모할 것
(21) 원예 품평회를 개설할 것
(22) 원예 품평회 심사는 장려 방침과 일치시키도록 할 것
고액의 채소 농사가 크게 늘어나다
그럼, 이렇게 현의 원예 장려 정책을 받아서 10년 뒤의 실제 채소 생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산액에 의한 비교는 가격 변동이 격심해 비교가 곤란하기에, 여기에서는 작부면적을 비교해 보겠다. 표5-4에는 ①현이 현황 파악을 위하여 산업 조사를 실시한 해의 채소 작부면적, ②현이 내건 목표치, ③실제로 달성된 실수치를 나타냈다. 2배 이상의 증가율을 보인 양배추, 양파를 필두로 수박, 생강, 파, 연근, 참외, 감자, 가지, 고구마, 절임채, 오이, 호박의 13품목에서 1.06~1.99배의 증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감자, 고구마, 절임채, 호박을 제하고 9품목은 모두 채소의 값을 평균한 가격 55.1엔을 상회하는 고액의 채소였다. 또한 가지, 절임채, 오이, 토란, 순무, 당근, 무의 7품목은 현에 의한 작부 목표치가 산업 조사의 실시년보다도 낮게 설정되어 있지만, 이것은 고가의 채소로 전용을 추진한 의도로 설정된 수치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는 당근과 무만 감소하고, 특히 무는 약 5100만 평 이상 감소한 걸 볼 수 있다. 채소 총작부면적의 감소가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저가인 무에서 고가의 채소로 전용하는 걸 도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표5-4 <산업 시책>에 의한 채소 작부면적의 추이
출전 : 1913년의 채소 작부면적과 10년 뒤의 목표 작부면적은 니이가타현 편찬 「新潟県 産業調査書」 上巻, 新潟県, 1915년에서 작성. 1925년의 채소 작부면적과 300평당 가격은 「新潟県 統計書」 「大正・昭和 年間 府県 統計書 集成」 202, 雄松堂フィルム出版, 1996년에서 작성.
주) *표시는 목표치가 1913년 때보다도 낮게 설정된 품목.
이처럼 메이지 후기 이후의 도시 발달을 배경으로 한 채소 수요의 확대, 현에 의한 원예 장려 정책이 추진되어 나아가면서 니이가타현의 채소 작부면적은 1925년에 1억 1253만 평(1.60배 증가)을 달성했다.
이러한 채소 생산의 발전에는 지금까지 기술했던 요인만이 아니라, 현 안의 종자 구입 비율이 증가한 데에서도 시사하듯이(표5-1), 양질의 채소 종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종자 소매상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었다. 다음 절 이후에 소개할 슈니 상점(니이가타현 키타칸바라군, 이하 타카하시 집안)은 그러한 소매상의 한 사람으로, 행상에 의한 종자 판매부터 지역 농업의 변혁 속에서 단계적인 발전을 이룩해 나아간다. 그 유연하게 대응해 나아가는 모습을 다음으로 보아 가고자 한다.
2. 종자 행상인
1) 종자의 매입
가볍고도 고가인 종자는 행상용
1882년에 출판된 <각 지방 노농 및 종묘호 명부>에 의하면 니이가타현에서는 32곳의 종자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명부 안에 타카하시 집안의 기재는 없다. 그건 이 시기의 타카하시 집안이 아직 점포를 마련하지 않고서 종자를 행상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엣츄우越中 토야마富山의 약장수'로 대표되는 배치매약업配置売薬業의 약과 마찬가지로, 종자는 비교적 경량이면서 고가로, 행상에는 최적의 상품이었다. 특히 철도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마을사람을 대표로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의 종자 도매상에서 종자를 매입해, 현 안팎의 단골 거래처를 돌아다니는 '종자 행상인'이 전국 각지에 존재했다고 한다.(주10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日本種苗業界の歴史 明治・大正篤-』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1991년, 66-68쪽.)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 활동은 그 한 예이다.(주11 막부 말・메이지 시기에 타카하시 집안이 종자 행상을 겸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카네코金子(1991)에 의하면, "메이지 시기의 소매상 대부분은 판매 시기도 짧고, 겸업이 대부분이었다"라는 지적이 있듯이(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日本種苗業界の歴史 明治・大正-』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1991년, 198쪽), 해당 시기의 매상 금액이 낮은 걸 고려하면 같은 시기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 활동은 다양한 업종을 내포한 복합경영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종자 도매상과는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
타카하시 집안의 당주 니시치仁七는 종자의 행상에 나설 때에는 작은 장부를 휴대하고, 도중에 지불한 운임, 숙박비, 식사대 등의 비용이나 도쿄까지 가는 길, 종자를 판매한 농가나 판매 금액 등을 기입했다. 그 기록에는 <도중 일기>나 <시종市種 일지>라는 표제를 붙여 놓았다. 1880년의 <도중 일기>(주12 高橋熙家文書 7 「明治十三年 道中日記 辰十月六日」.)에 의하면, 10월 6일에 니이가타를 출발해 배나 인력거를 갈아타고, 에치고越後 가도 - 시라카와白河 가도 - 오우슈우奥州 가도 - 닛코우日光 가도를 지나 같은 달 16일에 도쿄에 도착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종자의 매입 거래에 관한 구체적인 기재는 없지만, 다이쇼우 시기의 매입 기록에는 니시치가 지난 가도를 따라 있는 니이가타현 키타칸바라군 시바타마치新発田町나 니이가타시의 종자 가게 곤시치権七, 쿠라타 유우키치倉田勇吉, 카지와라 토우시치梶原藤七, 후쿠시마현 키타아이즈군北会津郡 코우자시무라神指村의 미나가와 츄우지로皆川忠次郎, 키쿠치 분에몬菊池文右衛門, 카토 세이사쿠加藤清作, 사카이 키사부로酒井喜三郎, 도쿄부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와 같은 군 스가모무라의 이소가이 유이키치磯貝唯吉, 고시베 진자에몬越部甚左衛門, 3장에서 다룬 에노모토 토메키치, 코부 긴지로우戸部銀次郎라는 종자 도매상과의 거래가 있는 점에서 당시도 이러한 종자 도매상에게서 직접 종자를 매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1960년 타키노가와의 도매상들이 말했던 좌담회의 기록에는(주13 1955년에 타키노가와의 종자 도매상 관계자를 모아 개최된 회고 좌담회이다. 참석자 가운데 하나인 에노모토 도쿠지로우榎本徳次郎 씨는 1879년 생으로, 1891년 무렵부터 도매상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日本種苗業界の歴史 明治・大正 篤-」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1991년, 217쪽). 이 점을 가미하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담화의 내용을 이 장의 대상 시기에 있던 에피소드로 제시해도 지장이 없다고 판단했다.) 메이지 시기에 타키노가와의 종자 도매상으로 종자를 매입하러 온 지방의 종자 소매상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다(사료5-2).
[사료 5-2](주14 鈴木光蔵 編 「滝野川中山道の野菜たね屋」 東京都 北区史編さん調査会 編 『北区史研究』 (1) 東京都 北区 企画部 広報課, 1992년, 113-114쪽.)
(소매상이) 지방에서 올라오면, 빨라도 3일 정도는 (도매상에) 머물고, 일주일이나 10일 동안 종자가 생길 동안 머물러 있어요. 일찍부터 와서 말이죠. (도매상은 소매상에게) 좋은 여관 같은 곳이지요. (소매상은) 종자가 생길 때까지 매일 아사쿠사에 가서 놀다 오고, 저녁쯤 돌아와 한 잔 마시고 밥을 먹고 잡니다.
(괄호는 필자 보충)
도매상은 종자를 매입하러 온 소매상에게 채소의 재배 기술이나 종자의 작황 상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술과 밥을 대접하며 교류를 깊게 함과 함께 때로는 가족적인 상담까지 하고 있었다. 나아가, 거래의 결제에서는 도매상은 소매상에게 파종부터 수확까지의 기간, 종자값을 빌려주는 경우도 많아, 이른바 우란분재와 연말 지불로, 걔중에는 1년 동안 빌려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주15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日本種苗業界の歴史 明治・大正-』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1991년, 197-199쪽.)
이처럼 종자 도매상과 종자 소매상은 채소 종자의 매매와 같은 단순한 장사 상대로서의 관계만이 아니라, 신변 보살핌이나 지불 기한의 융통과 같은, 마치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상을 통한 "얼굴을 맞댄 거래"에서 구축된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타카하시 집안에서는 메이지 말기 이후 통신 거래에 의한 매입 활동을 전개해 나아간 것이다.
2) '큰집'을 거점으로 한 행상
행상 판매에서는 종자를 버들고리에 넣어 보자기로 싸서, 등에 등짐으로 지고 한 집 한 집 농가를 돌아다니면서 팔러 다녔다. 이러한 농가 순회에서는 매년 정해진 '큰집'에 숙박하면서 마을을 순회하는 것이 통례였다. '큰집'이란 마을 안의 자산가에 위치하는 농가로, 숙박처인 '큰집'에는 숙박료나 식사비 대신에 종자를 무료로 제공했다.(주16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1905년의 <시종 일지>(주17 高橋熙家文書 8 「明治参拾八年 市種日誌」.)에 의하면, 이 시기의 행상 기간은 3월 하순~10월 상순 사이로, 2군郡 31촌村 78마을을 돌고, 1개년의 거래 농가 수는 143곳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니시치가 순회한 촌락들은 후술하는 다이쇼우 시기 이후의 행상 판매권과 합치한다는 점이다(표5-11). 즉, 다이쇼우 시기 이후의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 판매권은 막부 말·메이지 시기를 통하여 개척되어 갔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때 행상 판매에서는 종자 공급만이 아니라, 추천 품종의 소개나 각 품종의 설명과 파종 방법 등 종자 도매상에게서 배운 정보를 현지의 농가에 전수하면서 팔아, 신규 고객의 획득에 노력했다고 한다.(주18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
이상의 검토로부터 막부 말·메이지 시기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 활동을 나타내면 그림5-1처럼 된다. 해당 시기에 종자의 매수·행상 판매의 모든 건 당주 니시치 혼자서 담당하고 있으며, 판매하는 종자의 종류나 수량은 꽤 한정적으로 간신히 종자 수요를 충당하는 정도의 행상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농가의 종자 대금 정산은 현장에서 대금을 수취하는 현금 거래가 주류로, 특정 단골 거래처와의 거래는 희박한 단계였다. 그러나 그중에는 대금의 일부만을 지불하고, 뒷날 잔금을 정산하는 농가나, 현장에서는 지불하지 않고 이듬해 대금을 정산하는 농가도 여기저기 보여, 다이쇼우 시기 이후 본격화하는 '외상 판매'에 따른 현지 농가와의 신뢰 거래가 형성되어 갔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막부 말·메이지 시기의 소매 스타일이 채소 생산의 발전기를 맞이하는 메이지 중후기 이후 어떻게 전개되어 나아갔는지 그 구체적인 전개의 실태를 살표보도록 하자.
그림5-1 막부 말·메이지 시기 종자의 매입·판매 구조
출전 : :髙橋熙家 문서 사료 분석에서 작성
3. 다양한 소매 형태로 농가의 수요에 대응
1) 통신 거래와 위탁 채종
우편제도의 정비와 철도의 발달
종자 소매상으로서의 본격적인 발전에는 종자의 통신 거래의 실현, 곧 종자의 주문서 발송과 대금을 송금할 때에 이용하는 우편제도의 정비, 그리고 주문한 종자를 대량으로 입하하기 위한 철도의 발달이 빠질 수 없었다. 타카하시 집안에 인접한 토요사카豊栄 우편국은 1877년에 설치되어 어음 취급은 1888년부터 개시되었다. 철도의 부설은 1898년에 니이가타·우에노上野 사이가 전선 개통하고, 1905년에는 직통 운행이 개시되었다. 그 뒤 1907년에 니이가타·우에노 사이의 전선이 국유화됨과 함께 대폭적인 운임의 인하가 실현되었다.(주19 新潟市 編 『鉄道と新潟』 新潟市, 2010년, 1428쪽.) 니이가타시부터 타카하시 집안이 있는 쿠즈즈카마치葛塚町까지의 주요 운송수단은 증기선이었다. 타카하시 집안은 주변의 우편·운송 환경이 정비된 메이지 중후기 무렵에 증기선 발착장인 쿠즈즈카마치 시모타몬下他門 부근에 주거를 이전하고, '슈니 상점'이란 점포를 차렸다.(주20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 그리고 1911년부터 각지 종자 도매상과의 통신 거래를 개시한다.
농가 수요에 응하여 각지로부터 매입처를 선택
표5-5에는 타카하시 집안의 종자 매입처와 주요 매입 품종을 나타냈다. 우선, 매입처에 주목하면, 다이쇼우 전기는 메이지 시기를 통해 거래가 있었다고 추측되는 니이가타, 후쿠시마, 도쿄의 종자 도매상에서 한 매입을 중심으로 양적으로는 약간이지만 종래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던 홋카이도, 아이치, 교토의 종자 도매상과의 거래를 개시한다. 그 뒤 다이쇼우 후기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가 되면, 앞에 적은 지역에 더해 새롭게 미야기, 이바라키, 치바, 나가노, 중국, 조선의 종자 도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상세하게 보면, 매입처인 종자 도매상과의 거래 관계에서도 시기에 따른 변화를 볼 수 있다. 타카하시 집안에서 다이쇼우·쇼와 태평양전쟁 전기를 통해 지속적인 거래 관계에 있었던 것은 *표시를 붙인 11곳이고, x표시의 12곳은 다이쇼우 후기가 되면 거래가 중단되며, ◎표시의 15곳은 다이쇼우 후기부터 새롭게 거래가 개시되고 있다. 3장에서 지적했듯이, 다이쇼우 후기 이후는 에도 시대에 성립된 대도시 근교의 종자 도매상이 본장 채종 지대의 도시화에 따른 경작 장소의 원격지화에 의하여 새로운 품질 문제가 발생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타카하시 집안에서는 현지 농가의 수확 결과나 품질의 요망을 바탕으로, 매입처인 종자 도매상이 취급하는 종자의 품질 저하가 계속될 경우에는 거래를 중단하고 양질의 종자를 취급하는 종자 도매상과 새롭게 거래를 트는 등으로 매입처인 도매상을 엄선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표5-5 슈니 상점의 매입 거래처와 주요 매입 품종
출전 : 高橘熙家文書 9 「明治四拾四年 各国種物注文帳 第九月上浣」에서 작성
주1)다이쇼우 전기는 1911~1917년, 다이쇼우 후기는 1918~1929년,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는 1926~1937년을 나타낸다.
2) *표시는 다이쇼우・쇼와 태평양전쟁 전기를 통해 지속적인 거래가 있던 도매상, ✕표시는 다이쇼우 전기까지 거래가 있던 도매상, ◎표시는 다이쇼우 후기부터 거래가 개시된 도매상을 나타낸다.
다음으로, 매입처와 매입 품종의 관계에 대해서 보면, 다음 3가지의 특징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첫번째는 에도 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채소 생산지, 이른바 '본고장'에서 육성된 특산 채소 종자의 매입이다. 예를 들면, 후쿠시마의 아이즈 당근, 도쿄부의 미노 올무, 아이치의 미야시게 무, 교토의 쇼고인 무 등이 그에 해당한다. 두번째는 동일 품종을 복수의 종자 도매상에서 매입한다는 점이다. 종자는 겉모습으로는 품질의 우열 판단이 어렵고, 실제로 재배하지 않으면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종자라는 상품으로서의 특수성을 고려해 매입처를 분산시켰다고 추찰된다. 세번째는 각지의 종자 도매상과 니이가타의 종자 도매상과의 사이에도 각각의 지역 특산 종자의 교환이 있고, 이러한 니이가타 종자 도매상으로부터도 타카하시 집안이 다른 지역의 특산 종자를 구입했단 점이다. 종자가 부족할 때나 긴급히 필요해질 때 등은 곧바로 구입할 수 있는 인근의 종자 도매상이 편리했다. 이들 매입 품종은 표5-1에 나온 현 안에서 생산되던 주요 품종과도 대개 겹친다. 타카하시 집안은 농가 수요에 응하여 각지의 종자 도매상에서 다양한 품종을 들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위탁 채종의 개시
더하여, 1911년부터 소규모이지만 타카하시 집안에 의한 근교 농가로의 위탁 채종도 개시되었다. 표5-6처럼 타카하시 집안이 채종을 위탁한 농가는 12명, 위탁한 것은 오와리尾張 무, 츠시마야津島屋 무, 네리마 무, 쥐꼬리(鼡尾) 무, 아이즈 청무(青大根), 붉은살(赤筋) 무의 6품종이고, 채종량은 통신 거래를 포함한 전체 매입량의 20%에 상당하는 2섬 6되 5홉이었다. 경작 장소는 타카하시 집안의 거주지 근처인 도노이리樋ノ入(키자키무라木崎村), 타유우하마太夫浜(미나마하마무라南浜村), 에비가세海老ヶ瀬(오오가타무라大形村)가 중심으로, 타카하시 집안의 경우 원종은 근교 농가에 육성을 의뢰했다고 한다.(주21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 3장 및 4장에서 다루었던 종자 도매상이나 채종 관리인의 위탁 채종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이지만, 해당 지역의 채소 생산에서 가장 중요했던 무 종자의 수요 확대에 대하여 자기 가게에서도 위탁 채종을 개시했던 것이었다.
표5-6 1911년 슈니 상점의 위탁 채종
출전 : 髙橋煕家文書 11 「万日記 明治四拾四年第壱月吉日」에서 작성
2) 판매원의 고용과 상비 종자(置種)
'판매원'을 고용, 상권 확대를 도모하다
통신 거래에 의하여 종자의 대량 구입이 실현되자, 창업 때보다 당주 니시치가 혼자서 담당했던 농가로의 행상 판매도 일변한다. 타카하시 집안에서는 '판매원' 3명을 고용해서 행상 판매권의 확대를 도모했다. 청취 조사에 의하면, '판매원'은 평소에는 다른 일을 하다가 봄 종자와 가을 종자 판매의 성수기가 되면 타카하시 집안에 일손을 보태러 온 사람이었다. 타카하시 집안과 '판매원'의 고용 형태를 나타내면, 사료 5-3대로이다. 여기에는 쇼와 시기부터 '판매원'에 가담한 코야마 이시조우小山石造에게 한 임금 지불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사료 5-3](주22 高橋熙家文書 1 「昭和五年 出廻帳 第七月上浣」.)
코야마 이시조우
쇼와 9년 12월 11일 15엔
쇼와 10년 1월 24일 일금 20엔
2월 15일 일금 15엔
3월 16일 일금 5엔
합계 55엔 외 5엔 선지급
일수 87일 일당 1일 일금 80전
일금 69엔 60전 공제 9엔 60전
쇼와 10년(1935) 3월 31일 지급 완료
(밑줄 부분은 필자 부기)
12월부터 3월까지의 행상 기간중, 한 달에 1번 타카하시 집안에서 코야마 씨에게로, 선불금으로 임금의 일부가 지불되었다. 해당 기간 코야마 씨의 행상 일수는 87일 동안이었기 때문에, 하루 80전의 일당으로 합계 임금은 총 69엔 60전이었다. 이 합계에서 선불금 등의 60엔을 공제한 9엔 60전을 3월 31일에 지불, 결제하고 있다.
표5-7 안의 우메자와 키로쿠梅沢喜六, 스가야 신노스케菅谷新之助, 사토우 켄타佐藤堅太의 3명이 다이쇼우 시기를 통해 타카하시 집안이 고용했던 '판매원'이다. 행상 판매는 하루로 종료되는 마을도 있다면, 10일 이상 머무는 기간을 요하는 마을도 있었다. 그 때문에 당주 니시치와 각 '판매원'들은 행상 마을을 분담해 '큰집'인 농가나 숙소에 숙박하면서 각 마을을 순회하여 농가에 종자를 팔러 다녔다. 행상 기간은 매년 12월 하순~3월 상순과 7월 전후의 두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농가가 종자를 심는 시기는 봄파종이 4월 하순부터 5월 하순, 가을파종이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 사이로, 농가가 종자를 구입하는 시기는 파종기의 약 1~2개월 전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 기간은 봄파종과 가을파종의 파종기에 맞춘 판매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주23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ー日本種苗業界の歴史 昭和前期ー』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1993년, 93쪽.)
표5-7 1914~1915년 슈니 상점의 행상 활동
출전 : 高橋家文書 11 「万日記 明治四拾四年第壱月吉日」에서 작성
주:판매원의 一는 장부 기재자인 타카하시 니시치高橋仁七 본인일까? 口는 벌레 먹어 해독 불능.
외상 판매에 의한 거래 관계의 구축
종자를 농가에 판매할 때에는 봄종자를 판매할 때 지난해 가을종자의 대금을 회수하고, 가을종자를 판매할 때 봄종자의 대금을 회수하는 '외상 판매'가 행해졌다. 종자 판매에서 농가에 대한 '외상 판매'는 타카하시 집안에게는 판매처인 농가와의 지속적인 거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편, 농가에서 보자면, 재배 결과가 나오고나서 종자값을 지불하면 좋기 때문에, 겉보기로는 품질의 우열 판단이 어려운 종자의 상품으로서의 특수성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키는 측면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금의 지불 유예는 충분한 자금이 없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수확한 채소의 풍작, 흉작에 따라서 대금의 수금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때 타카하시 집안은 어떻게 자금을 조달했던 것일까? 청취 조사에 의하면, 타카하시 집안에서는 인근 '주류상 겸 금전대부업'의 츠루마키 료우키치弦巻良吉(상호 : 산죠우야三条屋)에게서 필요에 따라서 장기적으로 자금을 차용했다.(주24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 『日本 全国 商工人名録』에 의하면, 1898년의 츠루마키 집안의 소득세는 9엔 72전, 영업세는 13엔 57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츠루마키 집안으로부터 자금 조달이 어떻게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종자 소매상의 활동에 미치는 현지 자산가의 중요한 역할을 엿볼 수 있다.
판매원의 증원과 상비 종자의 도입
쇼와 시기에 들어서면, 타카하시 집안은 더욱 확대되는 종자 수요에 대해 '판매원'을 증원함과 함께 '상비 종자'를 도입해서 새로운 판매 활동의 효율화를 도모했다. '상비 종자'란 종자를 '큰집'인 농가나 마을의 잡화점 등에 맡기고, 주변 농가가 필요한 양을 그곳에서 구입해 가는 시스템이다. 즉, '큰집'이나 잡화상이 타카하시 집안의 지점이 되어 마을의 농가에 종자를 팔아 치워 '상비 종자'의 위탁처에는 매상 금액의 20%의 수수료를 지불함과 함께, 팔고 남은 종자는 타카하시 집안이 회수했다.(주25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 판매권이나 거래처 수가 확대되었음으로 한 집 한 집의 농가를 순회하는 일이 곤란해졌기에, 타카하시 집안에서는 행상하는 마을과 종자를 상비하는 마을을 분리해 종자를 판매하게 되었다. 1929년의 <상비 종자 장부(置種控帖)>(주26 高橋熙家文書 10 「昭和四年 置種控帳 第壱月下浣」.)에 의하면, '상비 종자'를 이용한 판매는 표5-11에 보이는 전체 판매 지역 가운데 약 30%에 해당하는 27촌(100마을)으로, 나머지 70%의 마을에서는 행상 판매했다. 쇼와 시기에 들어와 거래처가 더욱 늘어나자, 니시치의 장남 니사쿠仁作, 차남 니하치로우仁八郎, 분가分家의 에이죠우英三도 '판매원'에 가담해 합계 6명이서 행상 지역을 분담하고,(주27 高橋熙家文書 1 「昭和五年 出廻帳 第七月上浣」.) 증대하는 종자 수요에 대응했던 것이었다.(주28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 형태와 사토우佐藤(2002)가 비교 검토한 「에치고의 독극물 판매(越後の毒消し売り)」와 「도야마의 약 판매(富山の薬売り)」의 행상 형태를 대조하면,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 형태는 ①판매원이 남성인 점, ②상품을 버들고리로 지고 나른 점, ③상비 약置薬(상비 종자置種)・후불 방법, ④단골 거래처를 고객 장부(상품 판매 장부)에 기재하는 점에서 「도야마의 약 판매」와의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다(佐藤康行 『毒消し売りの社会史』 日本経済評論社, 2002年).)
3) 정기 시장으로 출점
역사 깊은 정기 시장
더하여, 타카하시 집안은 정기 시장에서 종자 판매도 개시했다. 니이가타현(에치고국越後国)은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부터 각지에서 산사이이치三斎市가 개최되고, 에도 시대가 되면 로쿠사이이치六斎市가 성행하게 되었다. 산사이이치란 한 달에 3번 열리는 정기 시장을 가리키고, 한 달에 6번 열리는 정기 시장을 로쿠사이이치라고 한다. 정기 시장에서는 채소·과수·선어를 중심으로 포목, 헌 옷, 철물, 잡화 등이 판매되어 많은 곳에서는 500개 점포 이상의 가게가 늘어섰다. 1916년의 <니이가타 통계서>에 의하면, 당시 현 안의 정기 시장 수는 합계 127개소로, 타카하시 집안이 있는 키타칸바라군에서는 18개소에서 정기 시장이 개최되었다. 전술했듯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채소, 화훼, 과수 등 다양한 생업을 조합해 생계를 유지했던 니이가타현의 농가에게 정기 시장은 정기적으로 현금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장이고, 소비자에게는 1개소에서 여러 가지 상품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장이었다. 니이가타현에서는 현 안 각지에서 정기 시장이 존속해 있어, 타카하시 집안은 현재도 정기 시장에서 종자의 판매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주29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
각 정기 시장을 순회 판매
타카하시 집안에서는 1911년부터 키타칸바라군 안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큰 ①쿠즈즈카(출점 수 550점포), ②마츠가사키하마松ヶ崎浜(출점 수 231점포), ③미즈하라水原(출점 수 580점포), ④시바타新発田(출점 수 230점포)의 각 시장으로 출점을 개시했다. 각 시장에 따라 매월 개최일이 정해져 있어, ①쿠즈즈카는 1·5·10·15·20·25일, ②마츠가사키하마는 2·7·12·17·22·27일, ③미즈하라는 4·8·14·18·24·28일, ④시바타는 2·4·6·8·10·12·14·16·18·22·24·26·28·30일이 장날이었다(사진5-1).(주30 1916년 「新潟県 統計書』에 의한다.)
사진5-1 현재 쿠즈즈카시의 모습
먼저, 타카하시 집안의 구체적인 정기 시장으로의 출점 행동을 알기 위하여, 1916년 4월의 출점 상황을 살펴보자. 표5-8에 의하면, 30일 동안 출점하지 않는 날은 9일 동안으로, 나머지 21일 동안은 각 정기 시장을 순회하고 있다. 전술한 행상 판매가 당주와 '판매원'의 일이었던 것에 대해, 정기 시장에서 판매하는 건 '가족'의 일이었다. 장날이 겹치는 경우는 가족 안에서 분담하고, 시장에서 시장으로 리어카로 이동하면서 가게 앞에서는 나무상자에 종자를 담아서 '되질 판매'했다.(주31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한다. 정기 시장으로의 출점은 2011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표5-8 1916년 4월 정기 시장으로의 출점 행동
출전 : 高橋熙家文書 11 「万日記 明治四拾四年第壱月吉日」에서 작성
이처럼 각 정기 시장으로 순회하는 건 매년 3월 하순~10월 상순에 행해졌다. 표5-9에는 1911~1918년에 타카하시 집안이 정기 시장에 출점한 횟수를 나타냈다. 연간 출점 수는 130~176회이고, 특히 4~9월의 성수기에는 평균 20~27회(한 달 2/3 이상)는 출점했다. 슈니 상점이 면하고 있던 도로에서 열리는 쿠즈즈카의 정기 시장에 출점한 것이 연간 41회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마츠가사키하마 39회, 시바타 39회, 미즈하라 36회로 이어진다. 고객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정기 시장에 채소를 팔러 온 농가에게 판매하는 것이 태반이었다고 생각된다. 연간 평균 매상 금액은 709엔 91전으로, 그 가운데 매상이 가장 많은 정기 시장은 쿠즈즈카의 390엔 93전(55%)이고, 다음으로 마츠가사키하마 185엔 17전(26%), 미즈하라 91엔 6전(13%), 시바타 42엔 75전(6%)이다. 정기 시장에서의 매상은 행상 판매와 동등, 또는 약간 상회하는 해도 있어 지역에 밀착한 정기 시장에서의 판매 활동에 의해 매상의 증대를 실현했던 것이다.
표5-9 1911~1918년 정기 시장에 출점한 횟수
출전 : :高橋熙家文書 11 「万日記 明治四拾四年第壱月吉日」에서 작성
4) 타카하시 집안의 매입, 판매 상황
-경영 발전과 종자 수요의 신장
이상의 검토로부터 타카하시 집안을 중심으로 한 채소 종자의 매입·판매 구조를 정리하면 그림 5-2처럼 된다. 타카하시 집안은 각지 도매상과의 직접 거래에 의해, 또는 니이가타의 도매상을 경유한 간접 거래에 의해 각 지역의 특산 종자를 구입했다. 더하여, 소규모이지만 근교 농가와의 위탁 채종도 행했다. 한편, 타카하시 집안에 집하된 종자는 세 가지 판로, 곧 '행상'과 '상비 종자'와 '정기 시장'을 끼고서 종자 유통 경로의 말단인 농가로 판매되었다. 사료의 제약에 의해 전체 거래를 통시적으로 복원할 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어림으로 보아야 할 수치이지만, 타카하시 집안의 경영 추이를 정리하면 대략 표5-10처럼 된다. 막부 말·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에 걸쳐서 타카하시 집안이 행상한 마을은 78에서 325(4.2배), 1개년 거래처 수는 143곳에서 2589곳(18.1배), 행상 매상 금액은 69엔 65전에서 3058엔 13전(43.9배), 정기 시장 매상 금액은 644엔 95전에서 1285엔 80전(2.0배)로 뚜렷하게 증가했다. 이러한 타카하시 집안의 경영 발전은 해당 지역의 상품 채소 생산이 진전하고, 종자 수요가 확대해 나아가는 과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림5-2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에 종자의 매입·판매 구조
출전 : 髙橋煕家 문서 사료 분석에서 작성
표5-10 슈니 상점의 경영 추이
출전 : 高橋熙家文書 1 「昭和五年 出廻帳 第七月上浣」, 같은 집안 文書 4 「明治十三年 万控帳 辰一月吉日」, 같은 집안 文書 8 「明治参拾八年 市種日誌」, 같은 집안 文書 11 「明治四拾四年 万日記 第壱月吉日」, 같은 집안 文書 10 「昭和四年 置種控帳 第壱月下流」, 같은 집안 文書 100-14~33 「農産種子売貸帳(昭和十二年)」에서 작성
주) ー는 기재 없음,*1은 1880년의 수치, *2는 1905년의 수치,*3은 1911~1913년의 평균치, *4는 1911~1917년의 평균치, *5는 1918~1919년의 평균치, *6은 1918년의 수치,*7은 1930년의 수치, *8은 1935~1937년의 평균치,*9는 1937년의 수치,*10은 1940년의 수치를 나타냈다.
형형색색의 종자 그림 봉투
종묘 카탈로그와 아울러, 종자를 판매할 때 넣는 종자 그림 봉투는 자기 가게의 종자 품질을 고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유효한 전달 수단의 하나였다. 메이지 초기 무렵까지만 해도 종자는 신문지로 접은 삼각봉투에 주문을 받은 만큼만 담아 고객에게 판매했다. 그러나 메이지 중기 무렵이 되면, 사진1처럼 문자와 그림 등을 반대 방향으로 새긴 판목을 사용해 인쇄된 봉투를 이용하게 되고, 메이지 후기 무렵부터는 인쇄 기술의 향상에 따른 컬러 인쇄가 보급되었다. 종자를 담는 그림 봉투에는 종자가 성장한 뒤의 모습을 형성화한 채소 그림이 컬러로 인쇄되고(사진2, 그림 참조) 뒷면에는 각 채소의 내력이나 재배 방법 등이 기재되었다.
종자 그림 주머니의 제조는 당시 도쿄부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에 있던 쇼우분도우昇文堂・사와다 우노스케澤田卯之助 상점(현재는 주식회사 쇼우분도우에부쿠로昇文堂絵袋)가 유명했다. 쇼우분도우는 농원예의 미술 인쇄 제조사로 채소의 종자 그림 봉투 이외에 화초 종자 그림 봉투, 카탈로그나 포스터 등의 인쇄도 취급했다. 종자 도매상이 집적한 같은 읍내에서 종자의 그림 봉투를 다루는 산업도 부설되었던 것이다. 쇼우분도우의 그림 봉투에는 "〇にS" 마크 표시가 붙어 있어, 이것이 쇼우분도우 제품임을 증명하는 상표로 복제를 막기 위한 마크도 있었다.
또한, 종자의 카탈로그가 있었듯이, 종자 그림 봉투에도 견본 카탈로그가 있었다. 3장에서 다루었던 에노모토 집안의 사료 중에는 쇼우분도우에서 '그림 봉투 견본첩'이나 '종자 그림 봉투'를 구입했을 때의 '다이쇼우 15년 7월 납품첩'도 남아 있다. 이 '납품첩'에 의하면, 쇼우분도우의 채소 종자 그림 봉투 견본첩을 1책 25전에, 화초 종자의 그림 봉투 견본첩을 1책 50전에 에노모토 집안이 구입한다. 종자 그림 봉투는 대략 100매 단위, 1000매 단위로 구입했는데, 많은 날에는 1만 매 단위로 구입하는 날도 있었다. 그 종자 그림 봉투를 에노모토 집안의 고객인 종자 소매상이나 행상인에게 팔아 치운 것이다.
종자 소매상은 종자 도매상에게서 종자와 종자 그림 봉투를 매입하면, 3작형, 5작형, 1홉형의 각각의 종자 봉투에 종자를 담아, 그것을 판매처별로 한데 모아 짐을 꾸렸다. 쇼우분도우가 제조한 그림 봉투는 봉입하는 부분을 접지 않은 상태로 3작형(소형)이 세로 10.8x5.9㎝, 3작형(대형)이 세로 11.4x6.5㎝, 5작형이 세로 14.0x7.1㎝, 1홉형이 16.7x8.8㎝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종자를 담은 종자 봉투는 크기별로 분류해 나무상자에 보관되었다. 사진 3이 종자 봉투 서랍이라 부르는 나무상자로, 왼쪽부터 3작, 5작, 1홉, 2홉, 3홉으로 되어 있다.
<참고 문헌>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ー日本種苗業界の歴史ー 昭和前期 篇』 1993年,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群馬県立 歴史博物館 編 「亀升屋種苗園 旧蔵の絵袋について」 2011年、非売品
榎本泰吉家文書 ツーさー35 「大正十五年七月 納品帳」 (豊島区立 郷土資料館 所蔵)
사진1 판목 인쇄
출전: 模本孫久 집안 소장(板橋区立 郷土資料館 제공)
사진2 종자 봉투
출전 : 田中清昭 집안 소장
사진3 종자 봉투 서랍
출전 : 練馬区立 石神井公園 ふるさと文化館
4. 판매처 농가의 다품목 채소 생산
그럼 타카하시 집안이 종자를 판매하는 농가에서는 어떠한 채소 생산이 이루어졌을까? 타카하시 집안의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의 판매 지역은 키타칸바라군 25정촌町村, 나카칸바라군 6정촌 합계 31정촌(315마을)으로 광범위에 이른다(표5-11). 거래처 수가 가장 많은 것은 키타칸바라군 키자키무라의 481곳이고, 다음으로 같은 군 세이로무라聖籠村 472곳, 같은 군 나가우라무라長浦村 339곳으로 이 세 촌에서 20% 이상을 점하고 있었다. 이하, 200~300곳의 거래가 있었던 지역은 10정촌, 100~200곳이 8촌, 100곳 이하가 10정촌으로 이어져 합계 5351곳(이 가운데 키타칸바라군 4799곳)의 농가와 거래한 걸 확인할 수 있다.(주32 사료의 잔존 상황이 높은 1931~1937년의 사료를 추출해 통시적 분석을 시도했다. 당시 타카하시 집안의 거래와 거래처 수의 대략적인 경향은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구체적인 거래 상대를 특정할 수 없는 정기 시장의 거래처 수를 가미하면, 더욱 많은 농가와 거래가 있었다고 짐작된다.) 1937년에 거래의 중심이었던 키타칸바라군의 농가 총호수가 2만 3237호였던 것을 고려하면,(주33 1937년 『新潟県 統計書』에 의한다.) 타카하시 집안은 행상과 정기 시장에서의 판매 활동을 통해 키타칸바라군 안의 20% 이상에 달하는 농가 수요를 충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주34 1918년에 간행된 『全国 種苗業者 人名録』에 의하면, 타카하시 집안의 판매권인 키타칸바라군 및 나카칸바라군의 종자상 수는 전자가 8곳, 후자가 21곳이었다. 煕 씨와의 청취 조사에 의하면, 타카하시 집안의 행상권에서는 타카하시 집안 이외의 행상인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른 소매상과의 경합 관계는 없었지만 죠우에츠上越・나카에츠中越 지방에는 나가노현의 행상인이 빈번하게 출입하고 있었다 한다.)
표5-11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 슈니 상점의 행상 판매 지역과 판매처 수
출전 : 高橋熙家文書 100-14~33 「農產種子売貸帳 (昭和十二年)」, 108-1~9・15・26~30・41~42 「農産種子売貸帳 (昭和六・七・十一年)」, 109-2~16 「農産種子売貸帳 (昭和七・八年)」, 1104~8 「農産種子売貸帳 (昭和九年)」, 111-1・4~11・16~17・22・27~29 「農産種子売貸帳 (昭和九・十・十一年)」에서 작성
주) *는 그림5-3에서 다루었던 지역.
다음으로, 판매처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타카하시 집안의 판매처는 사큐우砂丘 마을이나 아가노가와阿賀野川・코마바야시가와駒林川・니이고우가와新井郷川의 자연 제방 위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사큐우 마을이란 바람에 의하여 운반된 모래가 집적된 언덕 모양의 지형에 있는 마을이고, 자연 제방 위 마을이란 하천의 토사 퇴적에 의해 자연히 생긴 제방 위에 있는 마을이다. 대부분은 저습지로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약간 사구나 자연 제방 위가 밭으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타카하시 집안의 판매 지역이자 사구 마을과 자연 제방 위 마을의 전형인 마츠가사키하마무라, 미나미하마무라, 키자키무라, 쿠즈즈카마치, 나가우라무라, 니고리가와무라濁川村, 오카가타무라岡方村의 7정촌을 예로, 그 토지 이용의 특징과 채소 생산의 관련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림5-3에는 7정촌의 토지 이용 비율(막대 그래프)과 밭의 작부 비율(원 그래프)를 나타냈다. 이들 7정촌 가운데 마츠가사키하마무라·미나미하마무라는 바깥쪽 사구, 키자키무라·쿠즈즈카마치의 일부는 안쪽 사구에, 쿠즈즈카마치의 일부, 니고리가와무라, 오카가타무라, 나가우라무라는 자연 제방 위에 위치한다. 마츠가사키하마무라와 미나미하마무라는 사구 방풍림으로서의 산림 비율이 높지만, 그외의 5정촌에서는 논(수렁땅)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한정된 밭과 아가노가와 하천부지에서는 맥류, 두류, 서류, 채소 등이 재배되었다.(주35 하천 부지는 1896년 제정된 구 하천법에 의하여 대부분이 관유 하천이 되었는데, 아가노가와 하천 부지에서는 그 이후도 점용 경작이 계속되고 있다(建設省 北陸地方 建設局 阿賀野川 工事事務所 編 『阿賀野川史』 建設省 北陸地方 建設局 阿賀野川 工事事務所, 1988년, 772쪽). 1983년에 간행된 『阿賀野川 河川敷地 同盟史』에 의하면, 1980년대에도 타카하시 집안의 판매권인 하천 부지 점용자는 2400명으로, 점용 면적 약 185만 평 가운데 약 60%인 117만 5000평에서 논농사가, 나머지 40%인 66만 1800평에서 밭농사가 행해지고 있었다(阿賀野川 河川敷地 擁護同盟 『阿賀野川 河川敷地 同盟史』 阿賀野川 河川敷地 擁護同盟, 1983년).)
그림 5-3 7정촌의 토지 이용 내역 및 밭의 작부 비율
출전 : 北蒲原郡 西部教員協議会 「産業基本調査」 「郷研究」 第一輯, 1937년에서 작성
주) *표시를 붙인 2촌村에는 阿賀野川 하천부지 점용자가 존재한다.
밭에서 각각의 작부 비율을 보면, 바깥쪽 사구와 안쪽 사구에서는 서류와 채소, 자연 제방에서는 맥류와 두류의 작부가 눈에 띈다. 서류를 제한 채소, 곧 타카하시 집안의 종자 취급 품목인 채소에 한정해 보면, 가장 작부면적이 많은 건 키자키무라의 68만 1300평(밭에서 채소의 작부 비율은 62%)이고, 다음으로 미나마하마무라 36만 6900평(밭에서 채소의 작부 비율 11%), 오카가타무라 20만 5200평(밭에서 채소의 작부 비율 19%), 니고리가와무라 17만 8200평(밭에서 채소의 작부 비율 27%), 쿠즈즈카마치 11만 9100평(밭에서 채소의 작부 비율 56%), 나가우라무라 11만 400평(밭에서 채소의 작부 비율 19%), 마츠가사키하마무라 7만 2900평(밭에서 채소의 작부 비율 22%)으로 되어 있다. 채소 작부 비율이 높은 키자키무라는 타카하시 집안과 거래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또한 각 정촌에서 생산되는 채소를 보면 표5-12처럼 된다. 수박, 오이, 호박, 가지, 월과 등의 과채류나 무, 순무, 우엉, 당근, 절임채(배추), 파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이러한 채소는 자급용에 더해 니이가타시에 출하됨과 함께 인근의 정기 시장에서 판매되었다.(주36 北蒲原郡 西部教員協議会 「產業 基本調查」 『鄉研究』 第一輯, 1937년, 81-83쪽.)
표5-12 정촌의 채소 작부 비율
출전 : 北蒲原郡 西部教員協議会 「産業基本調査」 「郷研究」 第一輯, 1937년에서 작성年より作成
주: *는 서류로 분류되는 채소.
시대는 거슬러 올라가지만 1878년 7월 12일에 니이가타현 키타칸바라군의 나카죠우마치中条町, 키자키무라, 세이로마치를 방문했던 영국의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루시 버드Isabella Lucy Bird의 여행 일기에는 이 지역의 농업 생산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사료 5-4).
[사료 5-4](주37 Isabella Lucy Bird, 金坂清則 訳注 『完訳 日本 奥地紀行2 ー新潟-山形-秋田-青森』 平凡社, 2012년, 70쪽.)
실제 소나무밖에 없는 불모의 모래땅 같은 사구가 이어지고, 야윈 적송이나 그 어린 나무밖에 자라지 않았다. 그러나 수구와 사구 사이의 모래땅에서는 비료를 대량으로 주고서 (영국의) 텃밭 같은 (집약적인) 재배가 행해져 오이, 수박, 호박, 토란, 고구마, 옥수수, 차, 참나리, 대두, 양파 등의 작물이 훌륭히 재배되고 있었다. 오이는 완두 같이 지주를 세워 놓았다.
버드가 관찰했듯이, 타카하시 집안의 판매권에서는 메이지 초기 단계부터 광대한 사구 방품림과 논 지대 안에 산재한 사구, 자연 제방, 하천부지에 있는 약간의 밭을 이용해 다품목의 채소 생산이 전개되었다. 이 지역적 특징을 이해하고 있는 종자 소매상에 의한 농가 수요를 반영한 매입과 현지에 밀착한 유연한 소매 형태의 전개에 의하여 농가에 다품종의 종자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어 니이가타현의 채소 생산은 발전해 나아갔던 것이다.
'농담 > 농-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통 채소를 기르던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 -맺음말 (0) | 2025.02.19 |
---|---|
전통 채소를 기르던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 -6장 (0) | 2025.02.18 |
전통 채소를 기르던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 -4장 (0) | 2025.02.10 |
전통 채소를 기르던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 -3장 (0) | 2025.02.03 |
전통 채소를 기르던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 -2장 (0) | 2025.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