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종자의 대량 생산, 대량 유통을 담당하다
- 에도 도쿄의 종자 도매상, 에노모토 토메키치榎本留吉 상점
'종자상'으로서 1번 타자로 들 수 있는 건,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노농'이 모체인 종자 도매상. 도쿄부 키타토시마군北豊島郡의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을 예로, 고정종 육성의 과정, 동업조합을 통한 품질 관리, 종자의 통신 판매의 실태를 소개한다.
종자 생산은 시가지의 확대에 따라 채종포장의 원격지화에 맞추어서 결국은 '채종 관리인'을 통한 간접 관리로. 이 장에서는 고정종의 육성부터 종자의 대량 생산·대량 유통, 품질 문제의 발생까지를 추적한다.
1. 종자 도매상 거리의 형성
1) 에도 시대에 등장한 '종자상'
에도 시대 중기가 되면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는 세계에서도 유수의 대도시가 되어, 에도시 안에서는 식량의 수요가 높아져 에도 근교 농촌은 특히 선도가 중시되는 채소의 산지로 발전해 나아갔다.(주1 ) 이 장에서 다루는 도쿄부 키타토시마군은 현재의 도쿄도 토시마구豊島郡, 기타구北区, 아라카와구荒川区, 이타바시구板橋区, 네리마구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대소비도시인 에도로부터 15㎞ 정도에 위치하는 에도 근교 농촌이었다(그림3-1). 키타토시마군에서는 쿠로보쿠黒ボク라는 결이 고운 화산재가 두텁게 쌓인 토양을 살려서 길이 1m나 이르는 네리마 무를 비롯해 타키노가와滝野川 당근이나 타키노가와 우엉 등 대형 뿌리채소류의 재배가 성행했다(그림 참조). 키타토시마군에서 종자 생산이 발전했던 건 네리마 지역이 식용 무의 생산에 바빠 종자의 생산에까지 손이 미치지 않았던 와중에, 차츰 네리마무라(현 도쿄도 네리마구)는 '식용' 재배 담당, 타키노가와무라滝野川村(현 도쿄도 기타구)는 '종자용' 재배 담당이란 분업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라 알려졌다. 그리고 겐로쿠元禄, 곧 1688~1704년의 시기에는 타키노가와 우엉, 교우와享和의 1801~1804년 시기에는 타키노가와 당근의 종자를 판매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주2 ) 마스야 마고하치枡屋孫八, 코시베 한에몬越部半右衛門, 에노모토 쥬자에몬榎本重左衛門이라는 3명이 타키노가와무라에서 '종자상'을 시작한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 성립 기원을 입증하는 사료는 지금까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림3-1 도쿄부 키타토시마군의 위치
해당 지역의 채소 종자의 매매를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1670년에 간행된 <본조통감本朝通鑑>으로, 당시 네리마·이타바시·우라와浦和가 무의 산지로 평가되었던 것에 더해, '여름 무의 씨앗'이 에도시 안에서 판매되고 있었단 것을 처음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1735년 <속에도스나고続江戸砂子 온고명적지温故名蹟志>, 1756년 <키소지안켄 그림岐蘇路安見絵図>, 1830~1844년 <에도 명소 그림江戸名所図会>, 1842년 <동해대승양도중괴보도감東海木曽両道中壊宝図鑑>, 1847년 <교훈골계혼담몽보담教訓滑稽魂胆夢輔譚>, 1858년 <오해도중세견기五海道中細見記> 등의 문헌에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따라 있는 마을들에서 채소 종자가 판매되어, 여러 지역의 높은 평판이 기록되어 있다.(주3 ) 사료3-1은 1847년에 간행된 <교훈골계혼담몽보담> 안에 묘사된 타키노가와무라의 '종자상' 그림이다(그림3-2).
그림3-2 <교훈골계혼담몽보담> 안에 묘사된 종자상
출전 : 一筆菴主人 『教訓滑稽魂胆夢輔譚』 五編 上巻(成田山仏教図書館 所藏)
[사료 3-1](주4 )
아하あは "여기에는 씨앗을 매점하는 곳이 터무니없이 많아."
유메ゆめ "당연하다. 네리마 무라고 하면 명물이고 굵은 것이 제일이니까, 씨앗은 모두 여기로 사러 오지."
(중략) "이 씨앗은 모두 싹이 틀까나?"
오야지おやぢ "싹이 나는 게 틀림없고, 우리가 말이야, 농사일이 짬나는 대로 가게를 열고 있는데, 속이는 물건을 팔까나. 거짓말이라 생각하면 가져 가서 심어 보쇼."
그곳에 기록된 문장에는 유메夢輔와 아하粟九郎가 이타바시슈쿠板橋宿에서 시모네리마무라下練馬村로 가는 도중에 '진짜 네리마 무 물건들'이란 간판이 있는 '종자상'에 들러서, 종자상 점주와 말다툼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인근의 농민 및 먼곳의 '종자상'의 거래가 있었던 년월을 알 수 있는 해당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료는 나카센도우의 이타바시슈쿠에서 여관과 상가를 운영하고 '종자상'도 겸업하던 이세야 마고베에伊勢屋孫兵衛(이하 이세 마고)가 인근의 농민에게 종자 생산을 청부해 맡긴 1860년의 '합의'이다(사료 3-2).
[사료 3-2](주5 )
합의 한 통의 증서
一 네리마練馬 무(大根) 씨앗(種) 1개년(壱ヶ年) 1섬씩(壱石宛)
一 당근(人参) 씨앗(種) 同 1섬 5말씩(壱石五斗ツ、)
一 여름 무(夏大根) 씨앗(種) 同 보통 1반(300평) 정도씩(凡壱反程ツ、)
右之通毎年蒔附、其年之相場ヲ以極月二至り代金御払被下候御約定承知いたし候、右議定違変申間敷、為念入置申一礼、依而如件
安政七年 申弐月 弥左衛門 印
孫兵衛 殿
매년 네리마 무의 종자 1섬, 당근의 종자 1섬 5말, 여름 무의 종자 1반(300평) 정도를 파종해, 그해의 종자 시세에 기반하여 12월에 이세 마고로부터 야자에몬弥左衛門에게로 대금을 지불하는 합의가 있었다. 다음의 사료 3-3은 이세 마고에 대하여 코우즈케국 마로무라茂呂村(현 군마현 이세사키시伊勢崎市)의 키쿠치 덴시치菊池伝七가 채소의 종자를 주문했을 때의 편지이다.
[사료 3-3](주6 )
以島屋便一筆致啓上候、時節向暑之初御座候得共、其表皆々様被成御揃珍重不少奉候、然者当春中ねりま壱石も御送り被下候様申上候処、今式斗御増被下候而御送り可被下候外、つまり大根種子壱斗、尾張大根種子壱斗五升、江戸菜種子弐斗五升、大株菜種子七升、右之分出来次第早々御送り可被下候、扨春中之牛房種子代金壱両也、差送り申候間御改御請取可被下候、右者早々得御意度、如斯御座候、恐惶謹言
五月 十四日 菊池伝七
伊勢屋 孫兵 様
이번 봄에 키쿠치 덴시치에게는 무 종자 1섬이 송부되었다. 덴시치는 그 추가분으로 2말 외에 무의 종자 1말, 오와리尾張 무의 종자 1말 5되, 에도 채菜의 종자 2말 5되, 대주大株 채菜의 종자 7되를 새롭게 이세 마고에게 주문하고 있다. 이세 마고가 그 고장의 농민에게 채종시킨 에도 채소나 오와리 무 등 다른 지역 원산의 종자를 코우즈케국 등 먼곳에도 판매했던 모습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복수의 문헌과 사료에 의하여 에도 시대 중기 무렵부터 에도 근교 농촌이며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가도인 나카센도우를 통하는 키타토시마군의 마을들에서는 채소 종자의 생산과 그 매매가 개시되었단 것이 판명된다.
2) 메이지・다이쇼우 시기에 성장한 종자 도매상
도쿄부 키타토시마군에 집중된 '종자를 파는 사람'들
종자를 판매하는 사람들은 당초 자신들의 채소 농사에서 채종한 것 가운데 남은 종자를 판매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메이지 초기 종자상의 실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점이 많지만, 1882년에 도쿄부가 작성한 <도쿄부 노농 명부(東京府下老名簿)>(주7 )에 의하면, 도쿄부에는 95명의 '노농'이 있고, 그 가운데 '종자를 판매하는 사람'이 32명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농'이란 에도 시대에 간행된 농서에 의거하여, 재래 농학을 연구하고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더해 우수한 농업 기술을 몸에 익힌 농업 지도자이다. 채종은 보통의 채소 재배보다도 재배 기간이 길고, 꽃가루 교잡의 방지나 모본 선발 등 특수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그 때문에 품종 개량이나 채종 기술에 뛰어난 '노농'이 종자업자로 직업을 바꾸어 나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종자를 판매하는 사람'의 내역을 보면, 도쿄부 안의 56%에 해당하는 18명이 키타토시마군에 집중되어 있으며, 1880년 전후에는 이미 키타토시마군이 도쿄의 채소 종자업의 중심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표3-1). 나아가 1885년에 나카센도우를 따라 이타바시역이 개업하고, 철도 수송에 의한 채소 종자의 대량 발송이 가능해지자 에도 시대 이래의 '종자를 판매하는 사람'을 본격적인 생산·도매업자로 성장시켜 나아갔다. 다이쇼우 중기가 되면, 키타토시마군의 종자상 수는 61개까지 증가하고, 에도 시대부터 종자 매매가 성행했던 나카센도우는 통칭 '종자상 거리'라고 부르는 종자 도매 거리가 되었다(그림3-3).
표3-1 1882년 도쿄부의 종자상
출전 : 東京府 編 「東京府史』 行政篇 第二巻, 東京府, 1935년에서 작성
그림3-3 나카센도우를 따라 자리잡은 종자상의 분포와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위치
출전 : 「一粒入魂! ~日本の農業をささえた種子屋』 豊島区立郷土資料館, 2008년에서 옮겨 실음
1916년에는 동업조합도 설립
성장하는 종자 도매상이 늘어나는 가운데 1894년에는 키타토시마군 안의 종자 도매상 45명에 의하여 '농산물 도매 조합'(주8 )이 결성되어 이를 모체로 1916년에는 '도쿄 종자 동업조합'이 설립된다. '농산물 도매 조합'의 실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점이 많지만, 1906년 7월 가을 길고 둥근 끝부분(秋長丸尻), 가을 크고 긴 끝부분(秋大長尻), 도쿠리 미야시게(徳利宮重), 9일 무(九日大根)의 결산 시세 '정定'(주9 )나, 1909년 6월의 미카와시마三河島 채菜, 잎배추(体菜), 산둥山東 채, 배추, 교토 채, 긴 순무, 텐노우지天王寺 순무의 원종 결산 시세 '정定'(주10 ), 1912년 8월의 당근 씨앗 '결산 시세'(주11 ) 등의 사료가 약간이지만 남아 있어,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이 조합을 만들어 판매용 종자나 원종(친종親種)의 가격을 책정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메이지 중기 이후의 종자 수요 확대에 의해 자가채종만으로는 수요에 대응하지 못하여 근교 농가에게 위탁 채종이 일반적이 되었던 결과, 위탁처인 농가에게서 종자를 집하할 때 종자 가격을 책정할 필요가 생겼던 것을 의미한다.
1913년이 되면 도쿄시·키타토시마군·미나미아다치군南足立郡·토요타마군豊多摩郡의 네 지역에서 종자 판매 수량은 1만 2000섬에나 달하고, 그 판로는 국내에 그치지 않고 대만이나 조선 등 여러 외국에까지 확대되었다(표3-2). 이러한 상황 아래, 1900년에 공포된 중요 물산 동업조합법에 기반한 조합으로서 1916년 2월에 도쿄시, 키타토시마군, 미나미아다치군, 토요타마군을 조합 지구로 한 '도쿄 종자 동업조합'이 설립되었다.(주12 ) 같은 시기 도쿄부 안의 종자업자는 139명이며, 이 가운데 조합 지구 안의 종자상 수는 109명으로 조합원은 46명이었기 때문에 수치상의 가입률은 약 40%이다(표3-3). 그러나 조합 지구 안의 종자상 수의 수치에는 종자 소매상이나 종자 생산자 등도 포함되어 있는 것도 상정되기 때문에, 아마 대부분이 이 조합에 가입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주13 )
표3-2 1913년도 도쿄시·키타토시마군·미나미아다치군·토요타마군의 종자 판로, 수량 및 가액
출전 : 田中清昭家文書 88 「大正三年(1914) 東京種子生產販売同業組合設置の発起認可申請書雛形」에서 작성
표3-3 도쿄 종자 동업조합의 가입률
출전 : 農界新報社 編 「全国種苗業者人名録」 農界新報社, 1918년, 横山恵美 「東京種子同業組合の設立経緯と活動内容について」 豊島区立 郷土資料館 編 『生活と文化』 (17) 豊島区 教育委員会, 2008년에서 작성
주) 굵은 테두리는 조합 지정 지구를 나타낸다.
도쿄 상표를 보증
조합의 사무소는 1943년의 조합 해산까지 도쿄부 종자업의 중심지인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무라의 타키노가와 하치만八幡 신사神社의 사무소에 설치되었다. 주요 활동은 ①조합원이 모여서 업무보고나 회계보고를 협의하는 '총회', ②종자의 수확 전에 담당 지역의 채종포장에 나가서 종자의 작황을 실지 조사하고 예상 수확 비율을 보고하는 '종자 작황 조사회', ③종자 작황 조사회의 보고를 받아서 종자의 매입 가격을 결정하는 '결산 시세 협정', ④조합원에 한정해 각자가 종자 견본을 가지고 와서 상거래를 행하는 '조합원 거래 시장', ⑤해당 지역의 특산물이며, 영엽에서 가장 중요한 도쿄 네리마 긴 끝부분 무, 도쿄 네리마 길고 둥근 끝부분 무, 도쿄 여름 무, 도쿄 붉고 긴 당근, 도쿄 타키노가와 우엉이란 다섯 품종의 '원종 재배 시험'이었다.(주14 ) 도쿄 상표의 종자 품질을 조합에서 보증하고, 동업자 사이의 과당 경쟁에 의한 종자의 가치 붕괴를 방지하며 영업의 신용 보전을 도모하는 것이 조합 설립의 목적이었다.
이상을 감안하면, 종자 수요의 확대와 함께 유통 기구가 정비되는 메이지 중후기가 전국 규모의 채소 종자의 대량 생산·대량 유통이 시작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종자의 판로가 확대되어 가는 와중에 동업조합을 설립하고 '본고장 채종지'의 지위를 지키면서 종자 도매상 거리로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이 다이쇼우 시기 이후의 행보였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전체상을 감안하며 에도 시대에 종자상을 개업하고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으로서 발전한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키타토시마군 스가모무라巣鴨村, 이하 에노모토 집안)을 소개한다.
2. 원종의 육성과 품질 관리
1) 원종의 육성, 열쇠는 모본 선발
종자 도매상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로 원종의 육성이 있다. 종자 도매상에 의하여 우량한 종자를 확보하는 일은 거래처와의 신뢰에 직결된다. 그 때문에 메이지 중후기 이후, 근교 농가에 판매용 종자의 채종을 위탁하게 되더라도 판매용 종자의 우열을 결정짓는 원종의 육성은 종자 도매상 자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한다.(주15 ) 그럼 어떻게 원종이 육성되었던 것일까? 종자 도매상에 의한 원종의 육성 방법에 대해서는 사료가 부족해 알 수 없는 점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해당 지역에서 가장 생산되던 네리마 무를 예로, 종자 도매상에 의한 실제 원종의 육성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료3-4는 키타토시마군 시모네리마무라(현 네리마구)의 종자 도매상인 도쿄부 네리마 농원의 해설서인데, 그 안에 네리마 단무지 무의 원종 재배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사료 3-4](주16 )
(표지)
교토부 네리마 농원 해설서 원주 다나카 우헤에田中宇兵衛(주17 )
1. 네리마 단무지 무 종자
8월 12일 파종, 밑거름(300평당)으로는 쌀겨 2섬 8말, 훈탄 225㎏·깻묵 30㎏을 혼합하고, 분뇨 거름 2짐을 써서 눅눅해진 걸 이용해, 고랑에 30㎝, 그 골에 36~39㎝ 정도의 거리를 두고 거름을 놓고, 그 옆(가능하면 거름에 가깝게)에 5~6알 또는 7~8알을 심으며, 싹이 튼 뒤 16일째에 솎아서 1포기만 남기고, 웃거름(겨 1섬 4말·분뇨 거름 7짐·짚재 2가마니를 혼합)을 주고, 흙을 뿌리로 모이게 사이갈이를 하고, 또한 전체 사이갈이를 더해 11월 20일 그것을 뽑고, 그 가운데 형상이 순정한 것을 골라, 한번에 한곳에 모아 한 줄 한 줄의 사이에 흙을 넣어 가식한 걸 1주일 놔두고, 그것을 두둑 60㎝, 거리 75㎝로 하고, 약 45도 정도의 경사로 기울여, 잎만 지상에 나오도록 심어, 양달이 되도록 사이갈이를 하고, 3월 상순에 이르러 웃거름을 주고 반대의 사이갈이를 하고, 6월 18일 꼬투리가 황색이 될 때 베어 그걸 말려 두고, 6월 25일 타작해 체질해 풍구 고르기를 하고, 씨알을 멍석 1장에 6되 정도 깔고, 맑은날 4시간 건조시킨 뒤 가마니에 담고, 곳간의 마루 위 습해지지 않는 곳에 보존해 놓고, 이듬해까지 종자를 보존해 놓을 때는 다시 8월 7일(土用明) 무렵에 하루 동안 건조시켜 저장하고, 파종하는 밭은 그 부근에 다른 품종의 무 또는 동시에 개화하는 십자화과가 없도록 주의한다. (후략)
사료3-4의 채종 재배 공정을 정리하면, 네리마 단무지 무의 파종 시기는 8월로, 11월 중순에는 모본 선발 시기를 맞이한다. 선발한 모본은 가식을 하고나서 1주일 뒤, 45도 정도 기울여서 잎만 지상으로 나오도록 심고, 그 뒤 7개월을 보내고 개화·결실시켜 채종한다. 종자 재배는 통상의 채소 재배에 비하여 3배 정도의 생육 기간을 필요로 했다. 비료는 재배 기간이 길기 때문에 쌀겨, 훈탄, 깻묵, 분뇨 거름 등 완효성 유기질 비료를 중심으로 하고, 짚재 등의 속효성 무기질 비료도 이용한다. 또한 십자화과에 속하는 무는 교잡이 쉽기에, 채종포 부근에는 다른 품종의 무나 동시에 개화하는 십자화과 식물과의 꽃가루 교잡을 피하는 일이 관리할 때 주의할 점이었다. 그러나 원종의 육성 공정 가운데 가장 주의가 필요했던 작업은 무엇보다도 '모본 선발'이었다. 사료3-4에는 모본 선발이 '형상이 순정한 것을 골라'라는 한 마디로 기재되어 있지만, '형상이 순정한 것을 골라' 내는 기준에 대하여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2) '모양 순정한 것을 선발'해 내는 원종 재배 시험
1949년 타키노가와의 종자 도매상 집단에 의한 좌담회의 기재에는 무의 모본을 선발할 때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재가 있다.
[사료3-5](주18 )
하나하나 직접 밭에 나가서 종자의 모본을 선발했습니다. 이때 모본을 뽑는 것이 어려워서, 먼저 가서 살짝 뽑아 두는데, 조금 무리하게 무를 뽑으면 껍질이 벗겨지기에 매우 혼났습니다. 제대로 선발을 하려면 첫째로 잎을 조사하고, 목을 조사하고, 무의 뿌리를 보고, 끝부분이나 껍질까지 보아야 하고, 이것이 하나라도 합격하지 못하면 원종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골라 낸 모본의 형질이 그대로 다음세대의 판매용 종자의 형질에 반영되기 때문에, 모본은 첫째로 잎을 조사하고, 목을 조사하고, 무의 뿌리, 끝부분이나 껍질까지 살펴 고르며, 이것이 하나라도 합격하지 못하면 원종이 되지 않을 만큼 엄격하게 선발했다(사진3-1).
사진3-1 무의 모본 선발 모습(練馬区立 石神井公園 ふるさと文化館 소장). 잎을 조사하고, 목을 조사하고, 무의 뿌리, 끝부분이나 껍질을 보고 골라,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엄격히 선발했다.
이러한 재배 관리에 의하여 얻은 원종 가운데,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도쿄 네리마 긴 끝부분 무·도쿄 네리마 길고 둥근 끝부분 무·도쿄 여름 무·도쿄 붉고 긴 당근·도쿄 타키노가와 우엉의 다섯 원종에 대해서는 도쿄 종자 동업조합에서 하는 원종 재배 시험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먼저, 조합원은 '원종 검사 신청서'에 원종명, 검사 제공 수량, 해당 년도의 원종 소요 수량을 기입하고, 조합사무소에 제출한다. 조합의 시험장은 타키노가와마치滝野川町의 원포에서 경작 감독인이 재배하고, 조합장 및 선정위원이 심사한다. 심사 결과, 합격자에게는 합격증이 교부되고, 불합격자에게는 합격자의 원종이 유상으로 반포되었다.(주19 ) 원종 재배 시험은 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도매상에 의한 엄밀한 원종의 육성과 동업조합에 의한 조직적인 품질 관리 체제에 따라 우량 원종이 육성되고 있었다.
표3-4는 1919년 에노모토 집안의 원종이다. 에노모토 집안이 육성한 것은 네리마 나가토메長留 무, 당근, 쑥갓 세 품종으로, 다른 원종은 도쿄 종자 동업조합원의 종자 도매상에게서 구입해쑈다고 추정된다.(주20 ) 이 원종을 바탕으로 판매용 종자의 대량 생산, 곧 위탁 채종이 행해진다.
표3-4 1919년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원종
출전 : 根本泰吉家文書へーかー1 「万種物仕入帳」에서 작성
3. 판매용 종자의 대량 생산과 매입 거래
1) 근교 농가에 위탁 채종
원종과 비용을 선불로 주고 위탁
종자 도매상이 근교 농가에게 판매용 종자의 채종을 위탁하는 방법은 위탁할 때 원종과 채종 재배 비용을 선불금으로 건네주고, 채종 시기에 도쿄 종자 동업조합에서 결정된 매입 가격의 시세를 바탕으로 결제하여 잔금을 지불하는 시스템이었다(그림3-4). 그때 종자 도매상은 원종과 재배 비용 이외에도 채종 재배에 관한 기술지도를 행하여 비료 등을 위탁처의 농가에게 지급했다. 그리고 채종한 종자의 소유권은 위탁자인 종자 도매상이 독점적으로 매수하는 계약이었다고 한다.(주21 )
그림3-4 다이쇼우 중기의 위탁 채종 구조
출전 : 에노모토 타이키치榎本泰吉 집안 사료 분석에서 작성
매입 가격은 협의회의 투표로 결정
위탁 채종의 매입 가격은 도쿄 종자 동업조합원 중에서 채종 품종별로 선출된 조사위원회가 종자의 채종 전에 담당 지역의 채종지(이하 경작 장소)에 나가서 종자의 작황을 실지 조사하고,(주22 ) 그 예상 채종 비율의 보고를 받아서 협의회가 개최되어 투표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매입 시세는 서열을 가리키기 위하여 '갑' '을' '병'이라 정하는 경우나, 종자를 등급별(1등, 2등, 3등, 등외품)로 나누어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네리마 무의 경우는 '조기 입하'의 종자는 고가로 거래되기 때문에 집하 시기가 ①6월 30일까지, ②7월 8일까지, ③7월 9일 이후로 3단계로 나누어 정해짐과 함께, 집하 시기가 장마철과 겹치기에 '장마 입하' 이후의 종자는 시세가 싸게 설정되었다. 가지에 대해서는 1되의 중량 937.5g을 기준으로 37.5g마다 15전씩 오르내리도록 시세가 정해졌다. 이것은 같은 1되라도 저울질 가감으로 종자의 양에 차가 생기는 일을 막기 위함이다. 대체로 종자는 '건조 정선 양호한 것' '색채와 광택 양호한 것'이 양질로 여겨져, 그해의 작황, 품종별로 세세하게 설정되어 이를 바탕으로 위탁 채종할 때 종자의 매입 가격이 결정되었다.(주23 )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매입 가격
<온갖 씨앗 매입 장부(万種物仕入帳)>(이하 <매입 장부>)에 의하면, 1919년에 에노모토 집안이 채종을 위탁한 농가는 68명 있었다(표3-5). 매입 총수량은 약 67.3섬, 매입 총가액은 약 3120엔이다. 에노모토 집안의 채종 품목은 절임채 23.0섬(34%), 무 22.9섬(34%), 배추 10.7섬(16%), 당근 5.9섬(9%)이 중심이었다. 품종별로 보면, 가장 많은 생산은 네리마 나가토메 무 12.1섬(18%)이고, 다음으로 네리마 긴 무 8.0섬(12%), 산동 채 7.4섬(11%), 잎배추 6.4섬(10%), 당근 5.9섬(9%)로 이어진다. 매입은 5월부터 12월 사이에 행해지고, 6월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에노모토 집안의 채종 품목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절임채, 무, 배추의 채종 시기가 6월이었기 때문이다.
표3-5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채종 농가별 종자 매입량 및 가액과 그 소재지(1919년)
출전 : 根本泰吉家文書へーかー1 「万種物仕入帳」에서 작성
주) *는 소재지를 특정할 수 없는 농가.
다음으로, 채종 품종에 착목하면 동일 품종의 채종을 복수의 농가에 위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자는 기후나 꽃가루 교잡 등 자연환경의 제약이 작황에 크게 영향을 주는 상품이다. 채종 농가 1인당 채종 규모를 보더라도, 2섬 이상이 6명, 1섬 이상 2섬 미만이 22명, 5말 이상 1섬 미만이 22명, 5말 미만이 17명으로, 농가에 따라서 채종량에 큰 차이가 난다. 즉, 복수의 농가에 위탁 채종을 분산시킴으로써 작황 상황의 변동 위험에 대응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경작 장소(위탁 농가)는 어디에?
다음으로, 농가(경작 장소)의 소재지이다. 소재지를 특정할 수 있던 건 표3-5 가운데 *표시가 붙은 9명이다. '매입 장부'에는 농가의 소재지가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에노모토 집안의 통신 서간에 기재가 있는 주소와 대조해 확인하여 소재지를 특정했다. 9명의 소재지는 이렇게 특정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에 해당하는 나머지 59명의 소재지는 특정할 수 없었다. 그럼 이들 농가의 소재지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에노모토 집안의 4대째 토메키치가 기록한 <에노모토 추억집(榎本の思い出集)>(주24 )에 의하면, "내가 16, 17살 무렵, 자전거를 사 주셨다. (중략) 또, 나는 스미스 모터를 사들여 자전거에 달고서 달렸다. 지진 재해 뒤 오토바이를 타기로 했다. (중략) 장사 때문에 군 지역에 가려면 탈 것이 필요했다"라는 기술이 있다. 필자인 4대째 토메키치가 16, 17세 무렵은 1915년부터 1916년 무렵이다. 관동 대지진 재해 이후는 오토바이로 경작 장소에 다녔다는 기술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인 1919년에 에노모토 집안의 경작 장소는 아마 스미스 모터를 단 자전거(주25 )로 순회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또한 철도나 우편 등 통신망을 통하지 않는 당주 토메키치에 의한 농가의 직접 관리와 직접 거래를 했다고 추측된다. 그런 이유로 '매입 장부'에도 소재지는 기록되지 않고, 통신 서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에노모토 추억집>에 "전쟁 이전이라면 우리집에서 전부 떠맡지 않고, 주문이 많은 분에게는 현지에서 직송하"(주26 )라고 하는 것처럼 주문이 많은 거래처에는 경작 장소에서 직접 발송했다.
스미스 모터를 단 자전거. 에도 도쿄 박물관 소장.
<에노모토 추억집>에는 구체적인 경작 장소의 소재에 대해서까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좌담회 타키노가와 나카센도우의 채소 종자상"(주27 )에 의하면, 타키노가와 주변의 종자 도매상은 무, 당근, 우엉은 도쿄부 키타토시마군, 절임채와 배추는 인접한 도쿄부 미나미아다치군을 중심으로 위탁 채종을 행했던 듯하다. 또한 타키노가와 주변에서는 과채류의 채종이 어렵고, 특히 가지는 채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채류의 대다수는 도쿄부 키타다마군에서 채종했다고 하는 증언도 있다. 이들 정보와 에노모토 집안의 채종 품목을 대조해 확인하면 무, 당근, 절임채, 배추를 위탁 채종했던 에노모토 집안의 경작 장소는 거주지인 키타토시마군 및 인접한 미나미아다치군이 중심이었다고 추정된다. 즉, 위탁 채종을 개시했다고 상정되는 메이지 중기부터 다이쇼우 중기 무렵의 에노모토 집안의 경작 장소는 에노모토 집안의 거주지 근처에 있으며, 당주 토메키치의 직접 관리에 의한 위탁 채종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2) 각지 종자 도매상과의 매입 거래
에노모토 집안은 근교 농가에 채종을 위탁하는 한편, 동업 종자 도매상에게서도 종자를 매입하고 있었다. 그럼3-3처럼 에노모토 집안은 나카센도우를 따라 자리한 점포를 차리고, 그 주변에는 몇 개의 종자 도매상이 늘어서 있었다. 에노모토 집안의 매입 장부 가운데 하나인 "종자 통장(通帳)"(이하 "통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1919년의 거래 상대는 니시가하라西ヶ原 종묘점(키타토시마군타키노가와마치), 스즈키 이치로우에몬鈴木市郎右衛門(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 나카다 규우베에中田久兵衛 상점(키타토시마군 스가모마치)의 3곳으로, 모두 에노모토 집안 주변에 점포를 차린 종자 도매상이었다. 각각의 매입 상황으로부터 판매용 종자의 집하 특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표3-6).
'자신 있는 종자'의 교환
첫번째는 '자신 있는 종자'의 교환이다. '자신 있는 종자'란 근교 농가에게 채종을 위탁하는 채종 품종이다. 에노모토 집안의 경우는 네리마 나가토메 무, 네리마 긴 무, 산동 채, 잎배추, 당근 등이 '자신 있는 종자'이다. 니시가하라 종묘점에서 매입한 거래에서는 에노모토 집안의 위탁 채종에서는 볼 수 없던 다다기 오이(節成胡瓜), 철 없는 무(時無大根), 덩굴성 가늘고 많이 달리는 가지(蔓細千成茄子) 등 도쿄 특산 채소의 종자를 매입하고 있다. 또한 스즈키 이치로우에몬에게서 매입한 총수량의 53%를 차지하는 것은 도쿄 특산 채소인 타키노가와 붉은줄기 우엉과 스나가와砂川 우엉의 종자이고, 나카다 규우베에 상점의 경우도 타키노가와 붉은줄기 우엉과 스나가와 우엉의 종자가 매입 총수량의 63%를 차지하고 있다. 한 곳의 종자 도매상에서 모든 도쿄 특산 채소 종자를 채종하는 일은 곤란하다. 그래서 주변의 종자 도매상과 서로 '자신 있는 종자'를 교환하는 것을 통해 도쿄 특산 채소 종자의 구색을 충실히 갖추고자 도모했던 것이다.
빈번한 거래
두번째는 빈번한 종자 거래이다. '통장'을 보면, 1회당 거래 수량은 적지만, 월에 수십 회나 빈번한 거래가 연간을 통하여 오가고 있다. 종자가 부족할 때 삽시간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도매상 거리의 장점이었다.
동업조합원과의 거래
세번째는 도쿄 종자 동업조합원과의 종자 거래이다. 이 조합에는 에노모토 집안 주변의 종자 도매상만이 아니라 도쿄시, 미나미아다치군, 토요타마군의 종자 도매상도 가입되어 있어, 이러한 조합원과도 종자를 거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술한 대로, 1919년 2월부터 이 조합에서 '조합원 거래 시장'이 개최되었다. 거래 시장은 1월 하순~3월 중순과 6월 말~8월 중순에 개최되어, 각 도매상이 '종자 견본'을 가지고 와서 조합원에 한정해 상거래를 행하는 걸 목적으로 했다.(주28 ) '종자 견본'에는 ①거래 수량·최저 가격·인도처를 명기하고 보증서를 첨부할 것, ②거래가 성립한 뒤에는 3일 이내에 금품을 인도할 것, ③매매 수수료는 거래 금액의 3%(파는 쪽 1%, 사는 쪽 2%)로 하고, 당일 조합에 납부할 것, ④거래 시장에 제공된 종자는 조합에서 재배 시험을 행하고, 불량 종자는 대금을 반환할 것, ⑤위반자는 손해 보상으로 거래액의 10%를 지불할 것 등 세세한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장의 개최에 의해, 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에노모토 집안도 주변의 종자 도매상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조합원과도 거래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사료의 제약 때문에 3곳의 종자 도매상(조합원)과의 매입 거래밖에 확인할 수 없지만, 1919년에 에노모토 집안은 19곳의 주변 종자 도매상 및 조합원에 대하여 약 19섬의 종자를 판매한다. 이것으로부터도 에노모토 집안에 의한 주변의 종자 도매상 및 조합원에게서 매입한 곳의 수 및 매입 수량은 이보다는 훨씬 많은 것이라 예상된다.
전국 각지에서 지방 특산 채소나 서양 채소 종자도 매입하다
네번째는 지방 특산 채소나 서양 채소 종자의 매입이다. 미미한 양이지만, 전국 각지의 특산 채소나 서양 채소 종자도 주변의 종자 도매상에게서 매입하고 있다. 교토의 쇼고인 무, 가고시마의 사쿠라지마 무, 홋카이도의 삿포로 당근과 노란 양파 등의 품종이다. 에노모토 집안 사료에는 다른 지역의 종자 도매상에게서 매입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장부는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절에서도 상술하듯이, 에노모토 집안에서는 도쿄 특산 채소 종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특산 채소나 서양 채소의 종자도 판매하고 있다. 에노모토 집안은 주변의 종자 도매상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종자 도매상에게서도 각지의 특산 채소 종자나 서양 채소 종자를 매입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4. 종자의 통신 판매
1) 현재와 다름없는 판매법
종자 도매상에는 각각 단골 거래처가 결정되어 있어, 아침마다 이타바시역 앞의 타카키 운송상(高木運送屋)이 짐을 싸러 와서, 철도 소화물이나 철도 소량 화물 또는 우편 소포나 보통 우편으로 각지에 발송했다. 또한 인근이나 먼곳에서 구매하러 오는 손님도 있었다. 그 한편으로, 판로의 개척과 선전을 위해 업자 쪽에서 지방으로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주29 ) 에노모토 집안 사료의 대다수는 고객에게서 온 종자 주문에 관한 주문 엽서나 주문 서간이다(사진3-2). 종자의 판매 방법으로 우편엽서나 우편 대체가 이용되어, 통신판매에 의한 거래가 성립해 있었다. 종자 도매상은 년도별 종자의 매입 상황을 바탕으로 시세를 결정하고, 그 뒤 '종자 카탈로그'나 '시세표'를 작성해 각지의 고객에게 발송했다(사진3-3, 사진3-4). '종묘 카탈로그'나 '시세표'에는 철도 소화물의 중량별 요금표가 표시되어 있고, 주문서에는 철도 소화물의 도착역 이름을 기입하는 칸이 있었다. 에노모토 집안의 구체적인 종자의 판매 규정은 다음과 같다(사료3-6).
사진3-2 종자의 주문 엽서(豊島区立 郷土資料館 소장)
사진3-3 종묘 카탈로그(豊島区立 郷土資料館 소장)
사진3-4 시세표(豊島区立 郷土資料館 소장)
출전 : 에노모토 타이키치 집안 문서
[사료 3-6](주30 )
종묘 도매 시세표
◎영업 규정
1. 주문은 선금으로 주시길 바라옵니다.
1. 대금 상환 소포 우편 또는 화환 어음의 주문으로도 괜찮으시오며, 또한 상환료는 우편국 및 철도원의 표지表紙 내면의 게시에 있사오니 살펴보아 주십시오.
1. 저희 가게의 대체 저금 계좌는 도쿄 18259번으로 용지에 덧붙여 두었으니, 주문하실 때는 사용해 주시옵소서.
1. 환어음으로 송금하오실 때는 우편국은 스가모 코우신즈카巣鴨庚申塚 우편국의 소매점 앞으로, 은행은 도쿄시 어디라도 지장이 없사옵니다.
1. 기차 편 또는 기선 편으로 의뢰하는 화물은 짐을 부리는 장소 및 운송점 이름을 지시해 주시옵고, 그렇지 않으시면 저희 가게에서 적당한 운송점으로 취급할 수 있사옵니다.
1. 짐 포장은 주의깊고 가장 견고하게 하겠사오니, 운송 중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인한 손해는 저희 가게의 책임이 아니옵니다.
1. 도쿄 종자 도매상 조합 규정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짐 포장 비용을 받습니다.
사료3-6에서, 주문부터 발송까지의 공정을 정리하면 ①주문자는 '시세표'를 바탕으로 구입 품종명, 구입 수량, 발송 방법 등을 기입한 뒤 에노모토 집안 앞으로 '주문서'를 발송한다, ②대체 저금 계좌 '도쿄 18259번' 에노모토 집안 앞으로, 주문 합계 금액을 납입한다, ③에노모토 집안은 '주문서'의 도착을 기다려 출하 준비를 한다, ④송금을 확인한 뒤, 주문 종자를 출하한다. 종자 판매는 주로 우편 대체에 의하여 거래되고, 선금이 원칙이었다.
2) 광범위한 종자 판매처
1부府 23현県의 종자상에 판매
에노모토 집안의 종자는 어디에 판매되고 있었을까? 표3-7처럼 에노모토 집안의 가장 많은 판매처는 도쿄의 25곳이었다. 이것은 전술한 것처럼 도쿄의 종자 도매상(도쿄 종자 동업조합원)과의 거래가 중심을 이룬다. 다음으로 치바 17곳, 이바라키 16곳, 나가노 14곳, 아이치 10곳으로 이어진다. 종자의 판매는 칸토우 지방(도쿄, 치바, 이바라키, 토치기, 군마, 사이타마, 카나가와)을 중심으로, 토우호쿠東北 지방(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신에츠信越 지방(나가노, 니이가타), 호쿠리쿠 지방(도야마, 이시카와), 도카이 지방(기후, 시즈오카, 아이치), 킨키 지방 (미에, 나라, 와카야마), 산인 지방(돗토리), 산요우 지방(오카야마, 히로시마), 시코쿠 지방(고치) 등 1부 23현에나 미치는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다.
표3-7 1919년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판매처 및 출하 수량과 출하 가액
출전 : 根本泰吉家文書 ニーくー1、ヘーいー1、ヘーいー2、へーきー1、へーきー2、へーきー3, へーきー4, へーきー5, へーきー6、へーくー25、へーくー26、ツーせー24、ルーこー1 「農産種販売」에서 작성
부현별 판매 수량을 보면, 도쿄의 65.8섬이 판매 총수량의 40%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치바 17.5섬(10%), 아이치 16.7섬(10%), 나가노 16.2섬(10%), 이바라키 16.0섬(10%)이다. 판매 수량에서도 도쿄를 필두로 거래처 수가 많은 치바, 아이치, 나가노, 이바라키에서 약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같은 해의 판매처 총 수는 122곳, 판매 총수량은 약 168.1섬, 판매 총가액은 약 1만 7000엔이었다. 에노모토 집안의 단골 거래처는 최종 소비자인 채소 생산 농가에게 직접 판매가 아니라, 각지의 종자 도매상, 종자 소매점, 행상인 등에게 판매하고, 종자 소매상이나 행상인 들을 통하여 채소 생산 농가에게 판매되었다. 소매상에게서 농가로의 판매에 대해서는 5장에서 상세히 소개하겠다.
취급 수는 47품목 250품종
다음으로 판매 품목에 착목해 보자. 판매 수량이 가장 많은 품목은 무 36.4섬(22%)이고, 당근 31.5섬(19%), 우엉 23.6섬(14%), 절임채 20.6섬(12%)로 이어지고, 이들 네 품목으로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네 품목의 품종에 주목해 보면, 모두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도쿄 특산 품종인 네리마 무, 도쿄 붉고 긴 당근, 타키노가와 붉은줄기 우엉, 잎배추였다. 그러나 지방 특산 채소 품종도 볼 수 있다. 미야시게宮重 무(아이치), 쇼고인 무(교토), 삿포로 당근(홋카이도), 서양 긴 당근(홋카이도) 등이다. 당근에 이르러서는 총수량에서는 지방 특산 채소 품종이 도쿄 특산 채소 품종을 상회했다. 이외에도 표3-8에서 보듯이, 같은 해에 에노모토 집안에서는 합계 47품목 250품종에나 이르는 다종다양한 채소 종자를 판매했다. 3절에서 본 매입량에 비하여 판매량이 압도적으로 많고, 판매 품종도 참으로 다양화되어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표3-8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출하 품목과 품종수(1919년)
출전 : 榎本泰吉家文書 二-〈-1、ヘーいー1、へーいー2、へーきー1、へーきー2、へーきー3、へーき-4、へーき-5、へーき-6、
へーくー25、へーくー26、ツーせ-24、ルーこ -1 「農産種販売」에서 작성
이상의 검토로부터, 에노모토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채소 종자의 생산·유통 구조를 정리하면 그림3-5와 같다. 종자 도매상은 해당 지역의 특산 종자를 위탁 채종하는 한편, 각지의 종자 도매상에게서도 종자를 구입하고, 통신 판매에 의하여 전국 각지의 종자 도매상, 종자 소매상, 행상인 등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그림3-5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을 중심으로 한 채소 종자의 생산·유통 구조
출전 : 에노모토 타이키치 집안 문서 분석에서 작성
통신 판매의 선구자는 종묘였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통신판매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통신판매 상품이 '종묘'였단 사실을 알고 있나요? 1667년 영국의 원예가 윌리엄 루카스Wiliam Lucas에 의하여 발행된 카탈로그는 원예용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이야기된다. 엽서로 원하는 종묘를 지정하면, 받은 즉시 상품을 보내주는 구조였다. 1700년대에 들어오면 원예용 카탈로그는 영국이나 유럽 여러 국가에서 널리 볼 수 있게 되어, 1720년 무렵에는 미국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의 신문에도 종묘 판매 광고가 게재되었다. 미국의 통신판매의 시작도 또한 '종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통신판매도 구미 농업 도입의 선구자였던 츠다 센津田仙이 1876년에 발행한 <농업 잡지> 제1권 제8호에 게재한 "종묘 판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사진1). 그곳에는 "일본 재래의 옥수수는 단맛이 연하고 좋은 종이 아니고, 미국의 옥수수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다. 따라서 지금 반창사般敞社에 의하여 미국 우량 종의 옥수수를 발매하니, 삼가 용기를 갖고 제군에게 고한다. 다만 1봉지 우편요금 포함 10전이고, 돈을 보내는 방식이 번거로운 분은 우편 우표를 붙여 봉투에 넣어 주문하십시오."라고 한다. 미국산 옥수수 종자를 우편에 의한 신청을 받아서 상품을 송부한 것이다.
츠다 센은 미국의 농업을 공부하기 위해 도미했을 때, 그곳에서 활발히 행해지던 종묘의 통신판매를 보았다. 당시, 일본은 벼농사 중심으로, 기후에 의하여 수확량이 크게 좌우되는 상황이었기에 ①기후의 영향이 적은 작물로서 수요도 높은 옥수수를 일본에 가지고 들어오면 많은 농민에게 도움이 될 것, ②통신판매를 일본에서도 퍼뜨리고 싶다고 하는 두 가지 생각에서 일본에서 옥수수의 통신판매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농업 잡지>에서는 호마다 외국 종이나 국내 종의 묘목·종자 수십 점의 품명과 가격을 싣고, 종자의 주문을 받는 광고가 게재되었다(사진2).
이러한 통신판매가 퍼지기 위해서는 우편 제도의 발달과 철도의 정비가 빠질 수 없음은 물론이다. 1872년에 홋카이도의 매우 일부를 제하고 철도에 의한 우편물의 우송이 개시되고, 이듬해 1873년부터는 우편요금이 전국 균일제가 되어 중량 7.5g의 편지라면 전국 어디로도, 어디에서도 2전으로 우송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철도 우편노선도 1888년에 도쿄-나오에츠(니이가타현 죠우에츠시上越市) 사이, 1889년에 도쿄-고베 사이, 1891년에 도쿄-아오모리 사이로 점차 확대되었다.
보통우편으로 발송하는 경우, 농산물 종자에 한하여 농가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처치로, 1889년 10월에 제4종 우편물에 추가되었다. 나아가 1895년에는 농산물 종자를 제5종 우편물로 독립시켜 요금도 반액으로 고쳐 113g마다 1전으로 했다. 이 결과, 1893년에 약 8만 통이었던 농산물 종자의 차출 상황이 개정 이후인 1898년에는 약 25만 통 이상으로 급증했다. 1911년에 간행된 <실업계実業界>라는 잡지에 의하면, 1890년 무렵에는 2000~3000부, 청일전쟁 뒤에는 1만 부 이상, 1910년에는 백 수십 만 부에 달하는 방대한 종묘 카탈로그가 전국의 농촌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후 소량을 위한 보통우편만이 아니라, 철도 소화물이나 철도 소량 화물에 의하여 대량의 종자를 보낼 수 있게 되자, 많은 종자상에서 통신 거래가 채용되어 나아갔다.
<참고문헌>
木綿良行 「アメリカに於ける通販売の新しい展開」 成城大學 經済學會 編 『成城大學經済研究』 (93) 成城大學 經濟學會, 1986년, 129-154쪽
黒住武市 『日本通販売発達史 明治・大正期の英知に学ぶ」 同友館, 1993년
郵政省 郵務局 郵便事業史 編纂室 編 『郵便創業120年の歴史』 株式会社 ぎょうせい, 1991년
老川慶喜 「工業化の進展と鉄道」 野田正穂・原田豚正・青木栄一・老川慶喜 編著 『日本の鉄道 ー成立と展開」 日本経済評論社, 1986년, 49-58쪽
井関晩夏 「本邦においてもつとも早く通信販売を実行せし商売と其の目覚しき発展史」 「実業界」 3 (9) 1911년, 25~38쪽
사진1 일본에서 처음으로 실린 종묘 판매의 광고
출전 : 学農社 編 「農業雑誌」 第1巻 第8号, 学農社, 1876년(국립 국회도서관 소장)
사진2 <농업 잡지>의 종묘 광고
출전 : 学農社 編 「農業雑誌」 第13巻 第35号, 学農社, 1888년(국립 국회도서관 소장)
5. 경작 장소의 원격지화와 품질 문제의 발생
1) 주산지 채종 지역의 쇠퇴
3절에서 다이쇼우 중기까지 에노모토 집안의 경작 장소의 중심은 도쿄부 키타토시마군이었다는 것을 고찰했는데, 여기에서는 선행연구가 보여주는 데이터를 이용해 키타토시마군에서 일어난 채종업의 변천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1872년부터 1931년에 키타토시마군의 작물 변천을 조사하는 데에 니혼바시日本橋 원표元標의 거리에 따라서 키타토시마군을 네 곳의 대상지역으로 구분하고, 채종 품목의 입지 이동을 밝힌 아오시카青鹿(1935)의 조사(주31 )에 의하면, '첫째 대상지역'으로 구분되는 키타토시마군 미나미센쥬마치南千住町·미카와시마마치三河島町·닛포리마치日暮里町·오구마치尾久町·타키노가와마치·스가모마치・니시스가모마치西巣鴨町・타카타쵸高田町는 1882년부터 1921년 무렵까지 무, 당근, 우엉의 채종 지대였다. 그러나 1921년 이후 종래의 채종지였던 '첫째 대상지역'으로부터 채종업이 소실되고, 키타토시마군 안에서 채종업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행해 나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요인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들 수 있다.
첫번째는 밭 면적의 감소이다. 종래의 채종지였던 '첫째 대상지역'에서 밭 면적을 산출하면 1920년에는 174만 평이었던 면적이 1930년에는 42만 평까지 급감한다(그림3-6).(주32 ) 특히 관동 대지진을 낀 시기에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농업 종업자의 감소이다. 똑같은 '첫째 대상지역'에서 농업 종업자 수를 보면 1920년의 4122명에서 1930년에는 2301명으로 약 1/2로 감소한다(그림3-7). 이 10년 사이에 아오시카가 조사한 '첫째 대상지역'은 농업 후퇴의 최종 단계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3-6 첫째 대상지역에서 밭 면적의 추이
출전 : 각 년 『東京府統計書』에서 작성
그림3-7 첫째 대상지역에서 농업 종업자의 추이
출전 : 北区史 編纂調查会 編 「北区史 通史編近現代」 東京都 北区, 1996년에서 작성
나아가 『도쿄부東京府의 산업(농업) 그 일一 원예園芸』에는 다이쇼우 후기 이후 키타토시마군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재가 있다.
[사료 3-7](주34 )
지세가 대체로 평탄하여 밭이 풍부하고 또 수도에 접근해 있어 옛부터 채소의 재배가 성행해 일찍이 무, 당근, 우엉, 절임채 등의 특산지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도시의 팽창에 수반해 시에 근접한 마을은 대부분 주택공업지로 변화하고, 모든 마을의 과반수는 거의 시가지가 되어 농업지의 형체가 사라지는 데에 이르렀다. 또한, 종래의 채소 명산지로 이동을 일으켜 미카와시마의 절임채, 미나미센쥬의 시오이리汐入 무, 야나카谷中의 생강처럼 작금은 전혀 볼만한 게 없는 데 이르고, 그에 반해 종래 보통 작물을 주로 하던 오오이즈미大泉、샤쿠지이石神井 등의 농촌에서 활발히 채소를 재배해 우량품을 산출하는 데 이르렀다. (밑줄은 필자가 부기)
에도 시대부터 무, 당근, 우엉, 절임채 등의 특산지로 발전했던 키타토시마군도 다이쇼우 후기 이후 도시의 팽창에 따라 도쿄시에 인접한 마을의 대부분은 주택공업지로 변화하고, 모든 마을의 농지 대부분이 시가지가 되어 갔다. '농업지의 형체가 사라지는 데에 이르렀다'라는 문장에서는 종래의 채소 생산 지역 및 채소 채종 지역이 급속히 쇠퇴해 갔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2) 채종 관리의 전환
그 결과, 경작 장소와 그 관리 체제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변화를 정리한 것이 표3-9이다. 표3-9에서 다이쇼우 후기 이후의 에노모토 집안의 위탁 채종이 보이는 특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경작 장소의 원격지화
첫번째는 경작 장소의 원격지화이다. 우선, 채종 품종에 착목하고자 한다. 본래 도쿄부 키타토시마군이나 미나미아다치군에서 채종되던 산동 채, 잎배추, 타키노가와 붉은줄기 우엉 외에 네리마 무, 미노 9일 무, 여름 무, 철없는 무, 늦가을 무, 2년생 무가 도쿄부 키타타마군, 사이타마현, 치바현에서 채종하게 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 이후 도쿄부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를 중심으로 했던 '첫째 대상지역'의 밭 면적 및 농업 종업자 수가 급감하고, 본장 채종지로서의 기능이 저하됨에 따라 생긴 경작 장소의 원격지화를 보여준다.(주35 ) 이 와중에 1919년부터 에노모토 집안과 위택 채종의 계약이 맺어진 것은 니이키라 키사부로新倉喜三郎(소재지 불명), 하라 키헤이原喜兵(도쿄부 키타타마군 미타카무라三鷹村), 에노모토 슈우조우複本周造(도쿄부 키타타마군 무사시노무라武蔵野村), 나가사와 마고시치永沢孫七(도쿄부 키타타마군 코쿠분지무라国分寺村)의 4명으로, 소재지 불명의 1명 이외는 키타토시마군의 서쪽에 위치한 키타타마군의 채종 농가였다. 에노모토 집안은 키타타시마군의 종래 경작 장소 지역의 도시화가 진전되어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경작 장소를 교외의 도쿄부 키타타마군에서 구하고, 다이쇼우 후기에는 더욱 원격지인 사이타마현이나 치바현의 경작 장소를 개척해 나아갔던 것이다.
직접 관리에서 간접 관리로
두번째는 '채종 관리인'의 등장이다. 채종 관리인이란 종래 당주인 토메키치에 의하여 행해지던 원종 배포부터 채종 종자의 집하·발송에 이르는 모든 채종 업무를 종자상으로부터 일임받은 인물이다. 더하여 그들은 집하 금액에 따라서 일정률의 수수료를 종자 도매상에게서 수취했다.(주36 ) 표3-9에서 보는 *표시의 7명은 에노모토 집안으로부터 채종 관리업무를 일임받은 채종 관리인으로, 에노모토 집안에게서 '수수료'가 지불되었다. 사료3-8은 에노모토 집안과 채종 관리인인 하야시 야자에몬林弥左衛門(치바현 카토리군香取郡 쿠리모토마치栗源町)과의 채종 거래의 한 예이다. 에노모토 집안으로부터 하야시 야자에몬에게 약 10%의 '수수료'가 지불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표3-9 다이쇼우 후기에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위탁 채종과 그 소재지
에노모토 타이키치榎本泰吉 집안 문서 ツーす-3 「農産種 매입장仕入帳」에서 작성
注)-는 소재지 불명, *는 채종 관리인을 나타낸다.
[사료 3-8](주37 )
<농산종農産種 매입장>에서 발췌
1924년 10월 하야시 야자에몬
흡입吸込 2년생 무 5말
대금 21엔 74전
금 2엔 51전 수수료
금 75전 운임 자루 값
계금 25엔 지불 완료 1924년 10월 15일
(밑줄은 필자 부기)
4장에서 상세히 소개하겠지만, 채종 관리인은 종자 도매상에게서 원종을 수취한 뒤, 농가에 원종을 배포하고 채종을 위탁했다. 여기에서 채종을 수탁한 농가는 채종 관리인에 의하여 위탁된 농가로서, 에노모토 집안과 이 농가의 사이에 직접적인 접점은 없다. 즉, 위탁 채종의 관리 체제는 당주 토메키치에 의한 농가의 직접 관리로부터 채종 관리인을 낀 간접 관리로 이행했던 것이다. 이 점이 에노모토 집안의 위탁 채종에서는 최대의 전환점이었다.
3) 판매처에서 보내는 '불만 엽서'
이러한 위탁 채종의 전환이 판매 거래에 준 영향으로, 단골 거래처인 종자 소매점에서 온 이의 제기이다. 에노모토 집안 사료 가운데 '불만 엽서'나 '불만 편지'로 분류되는 사료가 현재까지 36점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불만 엽서'는 1920년 이후에 출현하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표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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