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채종 관리를 맡은 '종자상'
- 경작 장소 관리의 대행자, 노구치 히라조우野口平蔵(타치바나야橘屋 종묘점)
본장 채종 지대의 도시화에 따라 경작 장소를 원격지로 옮기게 된 종자 도매상. 그러나 경작 장소가 멀어지자 종자 도매상에 의한 정기적인 순회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도매상을 대신하여 원격지의 경작 장소 관리를 대행하는 채종 관리인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머지않아 채종 관리인에서 종자 도매상으로 경영을 확대해 나아가는 사람도...
이 장에서는 도쿄부 기타타마군 죠우후마치調布町의 노구치 집안을 예로, 채종 관리인의 실태와 종자 도매상으로 성장하는 과정까지를 소개하겠다.
1. 새로운 경작 장소가 된 도쿄부 기타타마군北多摩郡
앞장에서 밝혔듯이,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은 같은 군 안의 도시화에 따라 채종 지대의 쇠퇴에 의하여 경작 장소를 키타타마군, 치바현, 사이타마현 등의 교외를 필요로 했다. 표4-1처럼, 키타토시마군에서는 1910년 시점에 이미 농업 종업자가 34%로 줄고, 그 뒤 1920년에는 11%에까지 저하되었다. 그에 반해 키타타마군의 농업 종업자는 1910년에 78%, 1920년에는 68%였다.(주1 斉藤修・梅村松次 「人口増加と移動 ー統計にみる変化」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国分寺市, 1991년, 645-651쪽.) 키타타마군에서도 이 10년 사이에 10%의 감소가 보이지만, 다이쇼우 후기가 되어도 약 70%가 농업 종업자로서 키타타마군은 도쿄부 안에서도 농업을 중심으로 한 농촌 지대의 특색이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표4-1 키타토시마군과 키타타마군의 농업 종사자 추이

출전 : 斉藤修・梅村松次 「人口増加と移動 一統計にみる変化」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1991년, 646-647쪽)에서 작성
키타타마군은 타마천多摩川의 북부에 위치하고, 키타토시마군의 서쪽 교외에 위치한다(그림4-1). 타마천의 북쪽에 맞닿은 평야에는 논이 있었지만, 논 비율은 겨우 12% 정도로 대부분은 키타토시마군과 마찬가지로 검은 화산재흙으로 뒤덮인 무사시노武蔵野 대지이다. 화산재흙이라 투수성이 좋기 때문에 수원이 적고, 대부분은 에도 시대에 하무라羽村의 제방으로부터 타마가와玉川 상수를 끌어온 뒤에 개간·정착이 행해졌던 평탄한 밭농사 지대이다.(주2 기념지 편찬위원회 『東京農業と試験研究100年のあゆみ』 東京都, 2000년, 3쪽.) 키타토시마군의 특산 채소인 네리마 무, 타키노가와 우엉, 타키노가와 당근은 길이 1m에나 이르는 품종으로, 본토 종자로서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사시노 대지 위의 두터운 화산재흙에서 재배하는 것이 빠질 수 없었다. 그래서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은 키타토시마군의 토양 조건과 유사하고, 또 인접한 농촌 지대였던 키타타마군을 새로운 경작 장소로 개척의 거점으로 했던 듯하다.

그림4-1 키타타마군의 위치. 키타토시마군의 서쪽 교외에 위치하는 밭농사 지대.
다음으로, 키타타마군의 농업 생산을 개관해 보도록 하자. 키타타마군에서는 1804~1830년부터 양잠이 시작되어, 에도 막부에 의한 요코하마 개항 이후 양잠 농가가 비약적으로 증가해, 1880년대 말에는 키타타마군 전체 농가의 70%가 양잠을 행하고 있었다.(주3 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 ー明治中期~昭和慌期を中心としてー」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卷, 国分寺市, 1991년, 408-409쪽.) 또한, 메이지 초기 키타타마군의 밭에서는 맥류를 중심으로 잡곡, 두류, 밭벼나 환금작물로서 뽕나무, 쪽(특용 작물) 등의 재배가 성행했다. 그러나 메이지 중후기 이후가 되면 잡곡, 두류, 특용 작물의 재배가 차츰 감소해 나아가던 중에 토란류, 채소류, 뽕나무밭이 확대해 나아간다(표4-2). 채소 종자에 대해서는 <통계서統計書>에 기재가 없기 때문에 실수치를 따를 수는 없지만, <각 지방 노농 및 종묘호 명부>(주4 農務局報告課 編 『各地方老農及び種苗戸名簿」 農務局 報告課, 1882년.)에 의하면, 메이지 초기에는 키타타마군에서 종자상은 볼 수 없지만, 다이쇼우 중기가 되면 11곳의 종자상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메이지 중후기 이후 종래의 에도 근교 농촌의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키타타마군은 키타타시마군을 대신하는 새로운 채소 공급지 및 종자 공급지로서 발달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출전 : 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一明治中期~昭和恐期を中心として一」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編『国分寺市史」下巻、国分寺市、1991年、469頁より作成
그러한 지역 안에서 20년 이상에 걸쳐 채종 관리인을 맡으며 이윽고 직접 종자의 생산 도매상으로 성장해 나아간 것이 다음에 소개할 노구치 집안, 타치바나야橘屋 종묘점이다.
2. 채종관리인의 등장
1) 노구치 집안 5대째 당주当主 히라조우
노구치 집안의 5대째 당주이며 나중에 채종 관리인이 되는 히라조우는 도쿄부 키타타마군 스나가와무라砂川村의 종자상 코바야시 토우베에小林藤兵衛 집안(주5 코바야시 토우베에 집안은 히라조우가 고용살이를 했던 고시베 아사고로우의 지점이었다(増田昭子 『種子は万人のもの 在来作物を受け継ぐ人々』 農山漁村文化協会, 2013년, 140-141쪽).)의 양자로 자라, 노구치 집안의 사위가 되었다.(주6 노구치 집안의 개요에 대해서는 현 당주인 헤이이치平一 씨에게서 한 청취 조사에 의하여 작성된 種村威史 「해제」 (『野口平一家文書目録』 비매품, 2009년)에 더해 필자의 추가 청취 조사에 의한다.) 노구치 집안은 농업, 양잠업, 셋집 경영으로 셍계를 유지하는 한편, 키타타마군 안을 거점으로 제례나 잿날 등으로 손님을 모아서 장사를 하는 노점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히라조우는 키타타마군 죠우후마치 카미소메야上染屋, 시모소메야下染屋, 쿠루마가에시車返, 오시타테押立, 토비타큐우飛田給, 카미이시와라上石原, 시모이시와라下石原, 후다코지마布田小島, 카미후다上布田, 시모후다下布田, 코쿠료우国領, 아게큐우上給의 12곳의 말단 행정구획(大字)을 세력권으로 하는 노점상 집단 '타치바나야 일가'를 통솔하는 우두머리도 맡고 있었다. 또한, 히라조우는 양자로 들어간 코바야시 토우베에 집안과 본점·지점 관계에 있던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의 종자 도매상 코시베 아사고로越部浅五郎 집안으로 수행하러 들어간 시기가 있었다.(주7 노구치 헤이이치 씨에게 한 청취 조사에 의한다.) 코시베 집안은 나카센도우를 따라 가게를 차린 대규모 종자 도매상으로(앞에 나온 그림3-3) 코시베 아사고로는 도쿄 종자 동업조합의 조합장이기도 했다. 노구치 집안처럼 종자상을 개업할 경우나 당주의 대를 이을 때, 도쿄의 대규모 종자 도매상으로 견습하러 들어가는 사람은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교토의 노포 종자상 타키이 지사부로 상점(현 타키이 종묘 주식회사)의 지사부로 씨는 대를 이을 때 도쿄부 도쿄시의 종자 도매상인 타니모토 세이베에谷本清兵衛 집안에서 수행을 쌓고, 세이베에 씨로부터 "도쿄 시내는 물론, 시외인 타키노가와, 이타바시 가도까지도 마치 자기 자식을 세상에 내놓듯이 간곡하게 한 집 한 집 소개해 주었다"(주8 瀧井治三郎 『種苗七十年』 タキイ種苗 出版部, 1964년, 43쪽.)고 하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 히라조우도 마찬가지로, 아사고로 씨로부터 채종 기술이나 경작 장소의 관리 방법, 종자상의 경영 방법 등을 습득함과 함께, 이 무렵에 코시베 집안이나 그 인근에 집적해 있던 종자 도매상과 면식을 쌓아 나갔던 듯하다.이러한 경위를 지나, 1893년부터 히라조우는 도쿄부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의 종자 도매상 시미즈 요시에몬清水由右衛門, 스즈키 이치로우에몬鈴木市郎右衛門, 코시베 아사고로로부터 채종 관리인으로서 경작 장소의 관리를 맡게 된다(표4-3). 이후 1898년에는 에노모토 케이타로우榎本銈太郎, 1899년에는 코시베 부자에몬越部武左衛門, 1901년에는 스즈키 야스자에몬鈴木安左衛門, 1904년에는 사토우 사시치佐藤佐七, 1905년에는 코시베 토메키치越部留吉와 채종 관리 계약을 맺는다. 위에 적은 8곳은 모두 대규모 종자 도매상으로, 도쿄 종자 동업조합의 조합원이었다.
표4-3 노구치 집안이 채종 관리인을 맡은 종자 도매상과 그 개시년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349 「大正五年第四月 農親種仕附帳」, 같은 문서 739 「明治三十七年四月吉祥日 農種物親種帳」, 같은 문서 776 「明治三十年酉一月吉日 農種物親種帳」, 같은 문서 779 「明治三十三年子五月吉祥日 農種物親種帳」에서 작성
2) 동업조합도 관여한 채종 관리인과의 계약
도쿄 종자 동업조합에서는 종자의 시세나 채종 관리인에 건네는 수수료를 둘러싸고 채종 관리인과 교섭이나 협의를 행했다.(주9 横山恵美 「東京種子同業組合の設立経緯と活動内容について」 豊島区立 郷土資料館 編 『生活と文化』 第17号, 豊島区 教育委員会, 2008년, 25-26쪽.) 사료4-1은 1916년 8월에 도쿄 종자 동업조합에 의한 매입 시세의 '규정서'로, 동업조합과 키타타마군의 채종 관리인들과의 협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료 4-1](주10 田中清昭家文書 133 「大正五年八月 親種物仕切相場協定について定書」。)
(전략)
1. 8월 7일 임시총회 이후의 협의회에서 올해 가을 파종 우엉을 서부 중개인(두 타마군)(주11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西部 仲買人(두 타마군)'이란 '중개인'이라 기재되어 있지만 도쿄 종자 동업조합의 본거지인 키타토시마군의 '서부'에 위치하는 같은 부 키타타마군・미나미타마군에서 노구치 집안과 마찬가지로 채종 관리인을 맡았던 '채종 관리인'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에게 지시하고자 숙의하기 위해 당 조합에서 다음 3명을 선정해 서부 중개인들이 개최한 집회(8월 30일)에 임시로 참석해 숙의했다.
스즈키 마사고로우鈴木政五郎, 이이즈카 미키조우飯塚造酒蔵, 도베에 긴지로우戸部銀次郎
1. 당 조합의 결의 사항 및 서부 중개인의 협정 시세는 다음과 같다.
1. 서부 중개인으로서 조합의 결의 사항을 엄격히 준수하지 않거나, 또는 중개인 사이에 정한 시세 협정을 무시, 위반하고, 기타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자는, 당 조합원은 해당 위반자와 일체의 거래를 중단할 것이다.
1. 서부 중개인의 구전口錢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당 조합원 각자 직접 농민에게 원종을 교부하고 중개인을 거쳐 매입하는 경우, 금액의 5%, 중개인에게 원종을 맡기고 중개인에게 거두게 하는 경우 최고 10%
1. 서부 중개인이 협정한 시세는 다음과 같다.
가을 파종 우엉 씨앗 붉은줄기 카티노카와 엔에 2되
스나가와 엔에 2되 2홉 (다만 산지 거래 기준 시세)
(밑줄은 필자 부기)
동업조합에서는 1916년 가을 파종 우엉의 시세를 채종 관리인들과 상의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30일에 3명의 조합원을 채종 관리인의 집회(주12 서부 중개인 집회는 나중에 '도쿄부 타마 농산 종자업 조합'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이 조합은 1928년 12월 20일에 당시 도쿄부 지사인 히라츠카 히로요시平塚広義가 설치를 인가한 조합으로, 조합 지구는 도쿄부 키타타마·미나미타마·니시타마의 3개 군이었다(進藤進家 문서 '도쿄부 타마 농산 종자업 조합 규약').)에 파견했다. 그때 ①농가에 종자 배포는 도매상 자신이 행하지만, 농가가 채종한 종자의 집하를 채종 관리인에게 맡기는 경우는 집하 금액의 5%, ②농가에 원종의 배포도, 채종한 종자의 집하도 채종 관리인에게 맡기는 경우는 최고 10%의 수수료가 지불된다는 것, 나아가 동업조합은 채종 관리인과의 거래에 즈음하여 이 조합이 결의한 지시 사항을 엄수하지 않고 시세 협정을 무시, 위반하며 기타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자와는 일체 거래하지 않는다고 정했다.이처럼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과 키타타마군의 채종 관리인의 계약은 종자 도매상과의 직접적인 교섭으로 동업조합도 관여하는 것으로, 원격지에 채종 계약의 기반이 정비되어 나아갔다.
3. 채종관리인의 일
1) 원종의 염격한 관리
3장에서도 기술했듯이, 우량한 종자를 생산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량한 원종을 육성하는 일이다. 채종 관리 계약을 맺은 각 종자 도매상에서는 각각 엄선한 형질이 있어, 형질의 우열을 결정짓는 원종의 육성에는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도매상의 생명이라고도 할 만한 원종이 채종 관리인인 히라조우에게 맡겨져, 히라조우를 사이에 둔 위탁 채종처인 농가에게 배포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그 배포 형태이다. 히라조우는 '채종 관리인'을 책임지고 맡은 당초부터 <농원종 장부(農親種仕附帳)>에 원종 제공처인 도매상 이름과 배포처인 채종 농가 이름을 맞추어 기입했다.(주13 「農親種仕附帳」는 1893년부터 1919년 분량의 네 책이 존재한다.) 사료4-2는 1916년의 <농원종 장부>(주14 野口平一家文書 349 「大正五年第四月 農親種仕附帳」.)의 기재 예이다.
[사료4-2]
도쿄부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 산겐카三軒家
코시베 아사고로우
10월 20일 미타카무라三鷹村 렌자쿠連雀
1. 여름 원종 3홉 킨자에몬金左衛門
10월 20일 코가네이무라小金井村 누쿠이혼다貫井本田
1. 같은 것 5홉 큐우지로우久次郎
10월 20일 누쿠이혼무라貫井本村
1. 같은 것 4홉 모하치茂八
10월 20일 미타카무라 렌자쿠
1. 같은 것 1홉 5작 카모시다鴨志田 소우타로우惣太郎
종자 도매상인 코시베 아사고로우로부터 제공된 여름 무의 원종을 1916년 10월 20일에 키타타마군 미타카무라 렌자쿠의 킨자에몬, 코네이무라 누쿠이혼다의 큐우지로우, 같은 군 코가네이무라 누쿠이혼무라의 모하치, 같은 군 미타카무라 렌자쿠의 카모시다 소우타로우 4명의 농가에 배포한다. 이 기재 양식에서는 히라조우가 종자 도매상에게서 제공받은 원종에 대하여 그 배포처나 배포된 원종의 종류와 수량, 일자에 이르기까지 확실히 기록하고 파악했단 것을 알 수 있다.
종자는 기후나 경작 장소 환경에 따라 작황에 변동이 있어, 종자가 부족한 때에는 타인의 경작 장소에서 시세보다 할증된 가격으로 종자를 가로채는 업자도 있었다. 또한 복수의 종자 도매상에게서 다종다양한 품종의 채종 관리를 맡은 '채종 관리인' 중에는 흉작일 때 종자의 횡령이나 불량 종자의 혼입에 의한 양 부풀리기 출하를 하는 사람도 있으며, 이 일이 종자의 품질 문제가 발생한 주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주15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ー日本種苗業界の歴史明治・大正ー』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1991년, 250-251쪽.) 이에 대하여 히라조우는 계약하고 있는 8곳의 종자 도매상의 '엄선한 원종'이 혼합되지 않도록 기록하면서 배포해, 원종을 제공한 종자 도매상이 자신의 원종으로 채종된 종자를 독점적으로 매수할 수 있도록 원종의 배포처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채종 농가의 확보
한번의 위탁으로 종료되는 농가가 60%
히라조우가 배포한 원종은 근교 농가에 의하여 판매용 종자가 채종된다. 표4-4에는 1893년부터 1919년에 히라조우가 채종을 위탁한 농가의 소재지를 나타냈다. 그 위탁처는 코가네이무라, 미타카무라, 무사시노무라, 코쿠분지무라国分寺村, 코다이라무라小平村, 타마무라多摩村, 호우야무라保谷村, 타나시쵸우田無町, 코마에무라狛江村, 진다이무라神代村 등 10개 마을이 중심으로, 모두 노구치 집안의 거주지에서 약 3~12㎞ 범위 안에 위치하는 키타타마군 중동부의 마을들이었다.
표4-4 채종원(경작 장소)의 소재지와 채종 농가와의 위탁 년수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349 「大正五年第四月 農親種仕附帳」, 같은 문서 739 「明治三十七年四月吉祥日 農種物親種帳」, 같은 문서 776 「明治三十年西一月吉日 農種物親種帳」, 같은 문서 779 「明治三十三年子五月吉祥日 農種物親種帳」에서 작성
주) 1893년~1923년의 채종 거래 가운데 1908~1915년은 사료가 결손됨.
히라조우는 채종 관리인이 되고나서부터 매년 8~36곳의 근교 농가에게 채종을 위탁했다. 그러나 해에 따라서 위탁처 농가가 바뀌는 일도 많아 안정적인 위탁 관계는 아니었다. 농가와의 위탁 년수는 위탁 채종이 5년 이상 계속되는 일은 드물고, 한 번 위탁으로 종료되는 농가가 약 60%를 차지하며, 5년 이상 위탁 관계였던 농가는 전체의 10% 이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3년 이상 위탁 관계가 있는 경우에도 연년의 위탁 관계가 아니라, 몇 년 간격의 위탁 관계도 눈에 띈다. 이처럼 변칙적인 위탁 관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탁처인 농가의 특징도 알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래서 아래에는 히라조우의 위탁처였던 키타타마군 코쿠분지무라에 거주하고 인근의 종자상에게서 위탁 채종을 맡고 있던 오야나기 미노루小柳實를 예로,(주16 오야나기 집안이 채종한 종자의 집하처는 키타타마군 코쿠분지무라의 카와사토川里 종묘점이다(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 ー明治中期~昭和恐慌期を中心としてー」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国分寺市, 1991년, 472쪽.) 위탁 채종의 특징을 찾아 나아가고자 한다.
위탁처의 농가 경영에 좌우되는 종자 생산
오야나기 집안은 1881년에 약 6600평의 농사땅을 소유하고, 그 뒤 1902년에는 약 7200평, 1919년에는 약 1만 5300평으로 농사땅을 확대하며, 약간의 밭을 소작으로 주면서도 그 대부분은 머슴을 부리면서 자작하고 있었다.(주17 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 -明治中期~昭和恐慌期を中心として-」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国分寺市, 1991年, 367-369쪽. 오야나기 집안의 토지 소유면적은 코쿠분지무라 91호의 농가 가운데 17위였다.) 같은 시기 키타타마군의 농가(겸업 농가를 포함) 1호당 평균 토지 소유면적은 논·밭 합계해서 3000평 미만이었던 점에서 메이지·다이쇼우 시기에 오야나기 집안은 키타타마군 안에서도 상층의 농가였다고 할 수 있다.(주18 1950년 치바현 및 후쿠오카현의 채소 채종 기구에 관한 연구 조사에 의하면, 채종은 비교적 경영 규모가 크고, 마을의 평균 이상인 농가에서 받아들였다고 한다(石橋俊治 「蔬菜採種機構の研究」 農林水産省 農業技術研究所 編 『農業技術研究所報告』 第9号, 農林水産省 農業技術研究所, 1953년, 37쪽).) 오야나기 집안에서는 누에고치, 생사를 주축으로 뽕나무, 뽕나무 묘목, 차 제조, 보리·밀, 토란류, 나아가 쪽잎, 비료, 나뭇재, 땔감, 쌀, 잡곡, 두류, 채소, 채소 종자, 모종·묘목, 조경수·꽃 등 다각적인 양잠·밭농사 경영을 전개했다.(주19 오야나기 집안의 상세한 농업 경영의 변천에 대해서는 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 -明治中期~昭和恐慌期を中心として-」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国分寺市, 1991年, 367-480쪽을 참조하길 바란다.) 키타타마군에서는 오야나기 집안처럼 양잠을 중심으로 하는 농가가 총 농가 호수의 70%를 차지하고 있어, 경영 규모의 차이만은 히라조우가 채종을 취탁했던 대부분의 농가에도 공통되는 경영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표4-5에는 1902년부터 1925년에 걸쳐서 오야나기 집안의 채종 수입 내역과 전체 농업 수입에서 채종 수입의 비율 및 채종 면적의 추이를 나타냈다.
표4-5 오야나기 집안의 채종 수입 내역과 전체 농업 수입에서 채종 수입의 비율, 채종 면적의 추이

출전:小柳實家文書 7-124 「明治三十二年口亥一月 家宝万年帳 第弐号」 및 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 一明治中期~昭和恐慌期を中心として一」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国分寺市, 1991년, 455・459・461쪽에서 작성. 口는 벌레 먹어 해독할 수 없음.
주)-는 채종되지 않은 해이다. *는 장부에 수치의 기재가 남아 있지 않다.
우선, 채종 수입을 보면 1920년 이후는 매년 채종되고 있으나, 메이지 시기부터 다이쇼우 중기에 걸쳐서는 종자가 채종되는 해와 채종되지 않는 해가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몇 년 간격의 위탁 채종 동향은 전술했던 히라조우와 근교 농가와의 위탁 관계의 특징과도 비슷하다. 또한, 오야나기 집안의 평균 채종 수입액은 55엔 78전으로 전체 농업 수입의 약 1.5% 정도이고, 많은 해도 112엔 29전(2.8%)에 지나지 않아 다양한 양잠·밭농사 경영을 전개한 오야나기 집안에게 종자 생산은 약간의 수입원이었다.
나아가, 채종면적을 보면 120~2100평으로 해에 따라서 변동의 폭이 크다.(주20 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 -明治中期~昭和恐慌期を中心として-」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国分寺市, 1991년, 455-461쪽.) 이카와井川(1991)에 의하면, 같은 시기의 기타 농작물에서도 논벼 240~780평, 밭벼 660~2340평, 잡곡 240~1320평, 보리 600~3990평, 밀 840평~6030평, 두류 0~2490평, 서류 1441~4740평, 원예류 660~4590평으로, 해에 따라서 크게 변동했다.(주21 井川克彦 「北多摩郡地方経済の展開 ー明治中期~昭和恐慌期を中心としてー」 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 下巻, 国分寺市, 1991년, 455・459・461쪽.) 즉, 오야나기 집안에서는 위탁 채종을 위하여 매년 같은 규모의 토지가 확보되었던 것은 아니고, 논벼와 밭벼, 잡곡, 보리, 밀, 두류, 서류, 원예 작물류 등의 시장 동향이나, 그에 따른 작부 계획과 맞물려서 매년 채종 면적이 조정되었던 것이다.(주22 채종 농가의 실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연구가 없어, 오야나기 집안의 한 사례를 가지고 채종 농가의 특징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채종 농가의 특징이나 위탁 채종의 구조를 더욱 상세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채종 농가 및 채종 관리인의 사례 분석을 축적함과 함께, 지역별 자료를 비교 검토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상의 노구치 집안의 위탁 채종 동향과 오야나기 집안의 종자 생산 실태를 바탕으로 하면, 이 시기의 위탁 채종은 어디까지나 다각적인 양잠·밭농사 농업 경영의 일부문에 지나지 않고, 또한 한 농가에서 매년 채종하는 일은 드물며, 위탁처의 농가 경영 동향에 좌우되는 측면이 강했다. 그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위탁 채종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농가 경영의 동향을 고려하면서도 위탁 채종을 위하여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농가를 매년 일정 수 확보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것이 채종 관리인에게 부과된 중요한 역할이었다.
3) 종자 집하와 도매상으로의 납품
농가에 의하여 채종된 종자는 히라조우에 의하여 집하되어,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에게 인도되었다. 그때 히라조우는 집하된 채종 종자와 휴대용 '통장'을 가지고 가서, 키타토시마군의 각 종자 도매상을 돌아다니며 종자를 납품해 대금을 결제했다. 사료4-3은 1895년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마치의 종자 도매상 고시베 아사고로우에게 종자를 납품하고 대금을 결제한 예이다.
[사료 4-3](주23 野口平一家文書 785 「種苗代金等ニ付」 (明治23~28年).)
고시베 아사고로우 앞
메이지 28년 9월 1일
1. 우엉 종자 1말
대금 3엔 57전 1리
9월 27일
1. 일금 20엔 수취
1. 우엉 종자 6말
대금 11엔 42전 8리
1. 미카와시마 1말 2되 6홉
대금 1엔 53전 6리
1. 다다기 오이(ふしなり胡瓜) 1말 5되
대금 7엔 50전
1. 나가토마리長留り 6되
대금 1엔 30전 5리
1. 긴 네리마 4되
대금 1엔
1. 꼬투리 완두(サヤエン豆) 6되
대금 66전 6리
10월2일
1. 일금 15엔 수취
1. 우엉 종자 3말
대금 10엔 71전 4리
1. 여름 무 3말
대금 6엔 66전 6리
가을 종자 잔금 8엔 77전 6리
1. 시금치 1되 7홉
대금 18전 8리
합계 일금 55엔 57전 4리
정산 일금 11엔 79전 8리
다음과 같이 건네 드렸사옵니다.
28년 10월 13일 타키노가와마치 고시베 아사고로우 印
(밑줄은 필자 부기)
통장에는 히라조우가 기재한 '고시베 아사고로우 앞'부터 시작해, 집하된 채종 종자의 납품목, 위탁 채종 품종명, 채종량과 그 대금, 고시베 집안에서 지불된 선불금 등이 기록되어 있다. 히라조우가 집하한 채종 종자는 9월 1일, 9월 27일, 10월 2일 3회로 나누어 고시베 집안으로 납품되고, 그때 9월 27일에 20엔, 10월 2일에 15엔의 선불금을 고시베 집안으로부터 수취한다. 이 해의 채종 합계 금액은 55엔 57전 4리로, 여기에서 선불금 35엔과 가을 종자 잔금 8엔 77전 6리를 뺀 11엔 79전 8리를 10월 13일에 고시베 집안으로부터 징수해, 최후로 고시베 아사고로우에 의한 "다음과 같이 건네 드렸사옵니다. 28년 10월 13일 타키노가와마치 고시베 아사고로우"라는 서명과 고시베 집안의 가게 이름인 '마루아사丸浅 상점'의 날인으로 매듭짓고 있다. 즉, 각 도매상과의 채종 거래에서 결제는 종자 도매상에게서 서명 또는 날인을 받고 완료했다.
이상의 검토에서 채종 관리인에 의한 위탁 채종의 구조를 정리하면 그림 4-2와 같다. 종자 도매상으로부터 채종 관리인에 임명된 히라조우에 의한 원종의 관리, 도매상이 행하던 위탁 채종의 대행, 도쿄 종자 동업조합과의 협의와 교섭에 의하여 원종을 지급한 종자 도매상이 독점적으로 종자를 매수하는 시스템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림4-2 채종 관리인을 사이에 낀 위탁 채종의 구조
출전 : 野口平一家 사료 분석에서 작성.
지방 농사시험장에 의한 채종 조합의 설치
1929년에 농림성 농무국이 작성한 <채소 및 과수의 종묘에 관한 조사>에는 다이쇼우 말기부터 쇼와 초기의 판매용 종자에 대한 비판과 개량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아오모리, 아키타, 미에, 아이치 네 현을 제한 43도부현에서 종묘업자에게서 구입한 종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종묘점이 판매하는 것은 발아 불량인 것이 많고, 우량한 것을 판매하는 가게는 적다"라는 등의 의견이나, "신뢰하기 어려운 종묘가 많고, 순정한 종자를 얻는 것도 매우 어려우며, 잡악한 것이나 묵은 종자 등을 혼입해 판매하는 것도 있다" 등의 비판이었다. 이러한 비판의 개선책으로 ①채종 조합의 설립 장려(19개 현), ②종묘 단속법·규칙의 제정(17개 현), ③국가·지방 농사시험장의 원종 배포 및 지도 감독(12개 현), ④농회 등의 공동 구입(12개 현)이 제안되었다. 가장 많은 개선책은 채종 조합의 설립으로, "도부현은 채종 조합의 조성을 도모하고, 우량 종자의 생산에 힘쓰며, 널리 종자의 공급을 도모하는 일. 종자의 구입에 대해서는 도부현 서로 연락을 취하고, 채종 조합보다 직접 생산 종자를 구입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등의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림1은 1940년에 간행된 <채소 및 과수의 종묘에 관한 조사>를 바탕으로 채종 조합의 설치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1895년부터 1938년까지 전국에 319개의 채종 조합이 설치되었다. 주목할 만한 건 그 가운데 80%인 268개의 채종 조합이 다이쇼우 후기 이후에 설치된다는 점이다. 3장에서 다루었던 키타토시마군이 그랬던 것처럼, 이 시기는 마침 대도시 근교에 성립된 각지의 채종 지대가 도시화에 따라 쇠퇴하고, 새로운 채종지의 개척과 그에 따른 관리 체제의 전환이 도모된 시기와도 겹친다. 이러한 와중에 품질이 열화되어 가는 특산 채소 종자를 보전해 가기 위하여 행정과 채종 조합이 연대하여 종자상을 끼지 않은 종자의 생산·유통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기대되었다. 곧, 채종 조합은 농림성이나 도부현이 직접 또는 도움을 주어 조성하는 형태로 조직된 조합으로, 종자상에서 결성된 동업조합과는 전혀 다른 조직이었다.
근대 일본에서 중요한 채종 지대이자, 3장에서 다루었던 도쿄부 키타토시마군에서도 1927년도부터 도쿄부, 도쿄부 농사시험장, 도쿄부 농회의 원조를 얻어 '네리마 무'와 '미노 올무'의 무 채종 사업이 개시되었다. 그밖에도 도쿄부에서는 합계 12개의 채종 조합이 설치되었다(사진1). 이러한 채종 조합의 설치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는 아래와 같다.
먼저, 농사시험장에서 부 농회로 '채종 조합장'의 추천이 의뢰된다. 부 농회는 각 군 농회로 각지의 채종에 뛰어난 농가를 지명하도록 지시하고, 각 군 농회는 추천하는 조합장의 성명과 주소를 기입한 '특산 채소 위탁 채종 담당자 추천에 관한 건'이란 문서를 농사시험장에 제출한다. 그리고 농사시험장과 각 채종 조합 사이에는 ①채종 방법이나 재배에 관한 일체의 사항은 시험장의 지도에 따를 것, ②자신의 사정에 의해 도중에 수탁을 사퇴하지 않을 것, ③위탁 채종비로 일금 5엔을 수취할 것, ④채종한 종자는 일단 전부 시험장에 납부할 것, ⑤채종한 종자는 검사 시험의 종료 뒤, 시험장의 허가를 받고나서 조합원의 소유로 할 수 있다. 다만 시험장에서 필요해진 경우에는 채종한 종자의 일부 또는 전부의 납부를 명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요해해 둘 것, ⑥일지에는 채종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기입하고, 작황을 때때로 보고할 것, ⑦채종이 종료된다면 성적서를 제출할 것 등의 약정이 교환된었다.
이상은 도쿄부의 예이지만, 각지에서도 똑같은 경로를 거쳐 채종 조합이 설치되어 특산 채소 종자의 품질 개선이 도모되었다. 그러나 채종 조합은 전쟁 이후가 되면 소멸되어 버리는 사례가 많고, 행정에 의한 채종 사업은 어느 기간에 한정된 사업으로 그 역할을 마치게 된다.
<참고문헌>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ノ種苗二関スル調査』 農林省 農務局, 1929년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掛ノ種苗二関スル調査 昭和十四年度』 農林省 農務局, 1940년
「昭和拾年以降委託採種関係書類 委託請書綴」 (東京都 農林総合研究センター 소장)

그림1 메이지 중기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의 채종 조합 수 추이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疏来及果ノ種苗二関スル調査 昭和十四年度」 農林省 農務局, 1940년

사진1 도쿄부 부립 농사시험장 지정 위탁 채종장
4. 채종 관리인에서 종자 도매상으로
1) 판매는 농가에 직매하다가 도매로
채종관리인을 하면서 종자의 소매도
노구치 집안은 채종 관리인을 맡는 한편, 타치바나야 종묘점으로서 종자 판매업의 기능도 담당했다. 노구치 집안 문서 안에 종묘업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료인 <종자 매입 장부(種物仕入帳)>(주24 野口平一家文書 647 「種物仕入帳」 (明治25~35年).)에 의하면 1889년에 키타토시마군 타키노가와무라의 종자 도매상인 스즈키 이치로우에몬에게서 '네리마 나가루長留 무 5되, 미가와시마채 2되, 긴 순무 6되, 늦가을 무 1되, 9일 무 1되'의 종자를 구입한 것이 처음 보인다. 즉, 노구치 집안에서는 채종 관리인이 되기 전부터 소규모로 종자 판매에 착수하고 있었던 것이다.표4-6에는 1902년 노구치 집안의 연간 판매 주기를 나타냈다. 이 시기의 판매 스타일은 노점이나 정기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에 더해, '내부 판매(内売り)'라고 부르는 가게에서의 소매나 '평당 판매(坪売り)'라고 부르는 죠우후마치와 그 주변의 단골 거래처로의 행상이었다. 전술했듯이, 노구치 집안은 노점상 집단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어, 세력 범위인 키타타마군 죠우후마치의 후다텐진布田天神・진다이지深大寺나 세력권 밖의 후츄우시府中市의 오쿠니타마大国魂 신사神社・렌코우지連光寺의 제례에서 노점으로 종자를 판매했다. 나아가 타나시쵸우田無町나 후츄우시에서 개최되었던 정기 시장에서 연간 32일 정도 종자를 판매했다. 매월, 후츄우에서는 1, 7일에(7월 20일은 스모모 마츠리李子祭), 타나시에서는 1, 6일에 정기 시장이 열렸다.(주25 府中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府中市史』 下巻, 府中市, 1974년, 1070・1252쪽 및 田無市 企画部 市史編さん室 編 『田無市史』 第4巻 民俗編, 田無市, 1994年, 558쪽.) 그중에서도 타나시쵸우의 정기 시장으로의 출점이 가장 많아, 그 출점일수는 연간 28일이었다. 또한 7월 하순부터 8월에 걸쳐서는 '평당 판매'가 집중된다. 이것은 8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가을 파종 종자의 파종기에 맞춘 행상 행동인 듯하다. 한편, '내부 판매'의 일수는 연간 13일 정도가 되어, 이 시기에는 가게 앞 판매보다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정기 시장이나 노점, 행상에 나가는 판매 스타일이 주류였다. 그러나, 그 판매 스타일도 1905년을 경계로 일변한다.
표4-6 1902년 타치바나야 종묘점의 연간 판매 스타일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745 「明治三拾五年老月吉日 農種物売上帳」에서 작성
주) '평당 판매(坪売り)'는 행상 판매, '내부 판매(内売り)'는 가게 앞 판매를 나타낸다.
표4-7에는 노구치 집안의 판매 형태 추이를 나타냈다. 노구치 집안은 1903년까지는 소매 전문의 판매였는데, 1905년부터 정기 시장·노점·가게 앞·행상으로 농가에게 소매 판매에 더해, 종자 소매상에게 도매 판매를 개시한다. 그런데도 1908년까지는 도매 매상보다도 노점에서의 매상이 상회했는데, 1909년에는 노점 판매 121엔 50전, 가게 앞 판매 47엔 75전, 행상 판매 4엔 50전을 합한 소매 매상 173엔 75전을 도매 매상 249엔 81전이 상회하게 되어, 소매와 도매를 조합한 판매 스타일이 정착해 나아간다.
표4-7 타치바나야 종묘점의 판매 형태 추이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345 「明治四拾一年二月七日辰 種物売揚帳」, 같은 문서 346 「大正十三年第七月 種物売上帳」, 같은 문서 745 「明治三拾五年壱月吉日 農種物売上帳」, 같은 문서 764 「明治三拾八年第三月吉祥日 種物売上帳」, 같은 문서 780 「明治三十八年一月吉祥日 種物売上帳」에서 작성
주)*표시는 도매와 소매를 합한 합계액이다.
채소 생산의 발전에 맞추어 경영 확대
표4-8에는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우 후기에 노구치 집안의 도매 판매처를 나타냈다.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우 시기를 통하여 주요 판매처는 도쿄부 에바라군荏原郡, 같은 부 키타타마군, 카나가와현 타치바나군橘樹郡에 집중되었다. 이 세 군의 채소 작부율 추이를 보면, 1916~1935년 사이에 에바라군은 33.8%에서 60.9%로, 키타타마군 지역은 4.3%에서 22.0%로, 타치바나군은 1910~1922년 사이에 8.9%에서 20.1%로 급증한다.(주26 坂井勉三 「都市近郊地帯の農業 -東京の記録-」 大明堂, 1984년, 18-20쪽 및 大豆生田稔 「農業技術の普及と農会組織の形成 -明治中後期の橘掛郡-」 横浜 近代史 研究会・横浜 開港 資料館 編 『横浜近郊の近代史 ー橘(郡にみる都市化・工業化』 日本経済評論社, 2002년, 135쪽.) 모두 도쿄시 근교 농촌 지대로서 상품 채소 생산이 진전된 지역이고, 노구치 집안은 판매처인 채소 생산의 발전과 연동하듯이 그 경영을 확대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표4-8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우 후기에 타치바나야 종묘점의 도매 판매처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345 「明治四拾一年二月七日辰 種物売揚帳」, 같은 문서 376 「大正八年一月 種物売上帳」, 같은 문서 346 「大正十三年第七月 種物売上帳」에서 작성
주) 一는 기재 없음. *메이지 후기~다이쇼우 시기에 걸쳐서 거래 관계에 있었던 사람, △는 2~3년 이내에 거래 관계에 있었던 사람, ◎는 다이쇼우 중기부터 지속적인 거래 관계에 있었던 사람, ✕는 1년으로 거래가 중단된 사람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거래처 수에 착목하면, 노구치 집안이 도매 판매를 개시한 당초는 도쿄부 에바라군 3곳, 같은 부 키타타마군 3곳, 카나가와현 타치바나군 2곳으로 합계 8곳의 거래 규모였는데, 다이쇼우 중기 이후는 도쿄부 에바라군 8곳, 같은 부 키타타마군 13곳, 같은 부 미나미타마군 2곳, 같은 부 도서島嶼 1곳, 카나가와현 타치바나군 7곳, 치바현 히가시카츠시군東葛飾郡 1곳으로 합계 32곳의 종자 소매상과 거래한다. 그러나 더욱 상세히 보면, 노구치 집안에서 메이지 후기부터 다이쇼우 시기를 통하여 지속적인 거래 관계가 있었던 곳은 *표시를 붙인 종자 가게 하치고로우八五郎(키타타마군 진다이무라)와 세키구치야関口屋 상점(같은 군 죠우후마치)의 2곳 뿐이고, ◎표시의 8곳은 다이쇼우 중기 이후에 새롭게 지속 거래가 개시되어, 기타 2~3년의 거래로 중단되는 경우(△표시)나, 한 번의 거래로 종료되는 단발적인 거래처도 눈에 띈다(×표시). 메이지 후기 이후 노구치 집안은 종자의 소매 전문에서 도매 판매를 전개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영업 활동을 시도했지만, 신규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았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업 활동 안에서 10곳의 거래처를 확보하고, 소매 전문에서 소매와 도매를 조합한 판매 스타일로 이행해 판로를 확대시켜 갔다.
2) 지방 종자 도매상으로 성장
판매용 종자의 채종 위탁이나 원종 생산에도 착수하다
다음으로 종자의 매입 활동을 보도록 하자. 전술한 대로, 키타타마군 안에서 위탁 채종한 종자는 노구치 집안에 의하여 직접 판매되는 일은 없고, 모두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에게 납품되는 것이 결정되어 있었다. 한편, 노구치 집안이 판매하는 종자는 다시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에 주문했다. 곧, 노구치 집안의 채종 관리인으로서의 채종 종자와 종자 판매업자로서 다루는 판매용 종자는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주27 노구치 집안 문서 가운데 매입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장부는 4권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2권은 앞서 언급한 채종 농가에게서 채종 종자를 매입한 장부이고, 나머지 2권은 주로 종자 도매상에게서 판매용 종자를 매입한 장부이다. 노구치 집안에서는 메이지 시대에는 채종 농가로부터의 매입 장부와 종자 도매상으로부터의 매입 장부가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가 되면, 그것이 1권의 장부로 통일되어 채종 농가로부터의 채종 종자 매입과 종자 도매상으로부터의 판매용 종자 매입이 혼합되어 기재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장부의 분화·통일 과정은 노구치 집안의 매입 형태가 전환됨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다이쇼우 후기가 되면 채종 관리인으로서의 위탁 채종이 아니라 노구치 집안이 위탁주가 되어 근교 농가에 판매용 종자의 채종을 위탁하고, 그 종자를 자기 가게에서 판매하게 된다.
1916년의 <농원종 장부(農親種仕附帳)>(주28 野口平一家文書 349 「大正五年第四月 農親種仕附帳」.)에는 히라조우가 자신의 밭에서 원종을 육성하기 위하여 구획을 하고 있는 장면도가 있어, 키타타마군의 특산 채소인 우엉(스나가와 우엉), 시금치, 파드득나물, 가지 등의 원종을 독자로 육성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원종의 육성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지만, 노구치 집안의 관리·기술력은 20년 이상이나 걸친 채종 관리인으로서의 경험과 죠우후시 농회 품평회 및 키타타마군 물산 공진회에서 우엉, 가지, 종자류의 포상을 수상한 바로부터 증명된다(사진4-1).(주29 野口平ー家文書 1074 「大正五年 第三回 北多摩郡 物産 共進会 褒状」, 같은 집안 文書 1063 「大正六年 褒状」, 같은 집안 文書 1076 「大正六年 賞状」.) 그리고 원종의 육성에 착수한 3년 뒤인 1919년에는 노구치 집안이 위탁주가 되어 키타타마군의 농가 21명에게 채종을 위탁하고, 시금치와 스나가와 우엉, 파드득나물, 오이 각종, 여름 무, 산가지 등 합계 26섬 2말 7되 3홉의 채종 종자의 집하에 성공했다(표4-9).(주30 野口平一家文書 357 「大正八年 第九月 種物仕入帳」.) 이리하여 스스로 종자 생산자가 됨과 함께 그밖의 종자는 다른 종자 도매상에게서 매입했다.

사진 4-1 노구치 히라조우의 포상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노구치 헤이이치野口平一 집안 소장)
표4-9 1919년 타치바나야 종묘점의 위탁 채종 상황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357 「大正八年第九月 種物仕入帳」
주) 채종 농가의 합계치(*표시)는 채종 품종을 종복해서 채종하고 있는 농가가 있기 때문임.
매입처는 서서히 다양화, 도매상으로 자립
표4-10에는 메이지·다이쇼우 시기에 노구치 집안의 판매용 종자 매입처를 나타냈다. 메이지 시기의 매입처는 고시베 아사고로우, 스즈키 이치로우에몬, 스즈키 마사고로우의 3곳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노구치 집안은 전술한 채종 관리 부문만이 아니라, 종자의 매입 부문에서도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그중에서도 히라조우가 고용살이한 고시베 아사고로우와의 유대가 강했다. 다이쇼우 시기 노구치 집안의 최대 매입처가 되었던 제국 종묘 식산 주식회사도 1920년에 키타토시마군의 대규모 종자 도매상 5곳이 합병해 고시베 아사고로우가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던, 당시 일본 최대의 종묘 회사였다.(주31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日本種苗業界の歴史明治・大正 篤-』 カネコ種苗 株式会社, 1991년, 348-351쪽.) (이후의 미카도みかど 육종 농장, 현재 미타도 협화協和 주식회사.)
표4-10 메이지·다이쇼우 시기 타치바나야 종묘점의 판매용 종자 매입처

출전 : 野口平一家文書 357 「大正八年第九月 種物仕入帳」, 같은 집안 문서 647 「種物仕入帳」(메이지 25~35년)에서 작성
그러나 다이쇼우 시기 이후가 되면 키타토시마군 이외의 지역, 곧 도쿄부 미나미아다치군의 스나가와 농원, 에바라군의 시바미치柴道 종묘점·요시다吉田 종묘점·고토우 시게베에後藤茂兵衛, 키타타마군의 무사시야武蔵屋 본점·코바야시 토우베에小林藤兵衛, 남만주의 타카노 농원鷹野農園이란 7곳의 종자 도매상으로도 종자를 주문하게 된다. 구색을 충실히 갖추고자 각지의 종자 도매상에서 새로운 품종을 주문하거나, 동일 품종을 복수의 도매상에서 구입하여 위험을 분산시키는 일은 대부분의 종자 도매상에서도 볼 수 있던 매입 행동으로, 노구치 집안에서도 도매 판매를 전개해 나아가는 과정에 매입처를 다양화해 나아갔던 듯하다. 나아가, 이 시기의 장부에는 '운임' '게이오京王' '발송료'란 표기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것은 노구치 집안의 가장 가까운 노선인 게이오선의 운임과 그에 따른 발송료의 기록으로, 노구치 집안에서는 1916년 게이오선의 개업을 계기로 철도 운송을 도입하고, 종자의 매입 활동 효율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이상의 검토로부터, 노구치 집안의 경영 전개를 정리하면 그림4-3과 같다.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의 지점 같은 기능을 담당했던 노구치 집안이 다이쇼우 시기 이후에 자기 가게에 의한 위탁 채종과 다른 지역의 종자 도매상에서 종자를 매입해 도매 판매해 나아가는 과정은 키타토시마군의 종자 도매상으로부터 자립을 도모해 채종 관리인에서 지방 종자 도매상으로 성장해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4-3 채종 관리인의 성립부터 지방 종자 도매상으로 성장하는 과정
출전 : 野口平一家 사료 분석에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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