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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전통 채소를 기르던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 -2장

by 雜것 202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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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사는 채소, 파는 종자   -채소와 종자의 변천, 에도에서 근대로

메이지 중후기 이후 도시의 발달을 배경으로 채소 생산의 상품화가 진행된다. 시장향 균질한 채소를 생산할 때 중요한 것은 종자의 높은 균일성이다. 채소 생산의 상품화가 진행됨에 따라 농가는 자가채종한 종자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어, 더 좋은 종자를 구입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몇 안 되는 통계 자료를 구사해 메이지 이후의 전국적인 채소 및 그 종자의 수급 동향을 파악함과 동시에, 근대의 그 특질을 조사한다.

 

 

 

 

1. 도시의 성장과 근대 채소 생산의 특질 

 

1) 통계 수치로 본 채소 생산의 추이

 

근대의 채소 생산에 관한 전국적인 데이터 중에는 <메이지 7년 부현 물산표府県物産表>(주1 「物産表』는 明治 文献資料 刊行会 編 「明治前期産業発達史資料』 第一巻, 明治文献資料刊行会, 1959년에 수록되어 있음.)(이하 <물산표>)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 뒤 1905년의 <제2차 농상무 통계표>(이하 <통계표>)까지의 사이, 전국적인 채소 생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메이지 초기, 채소 생산은 3대 도시 근교에 집중 

 

<물산표>에 의하면, 1874년의 농업 총생산액은 2억4234만 엔이었다. 그 가운데 쌀이 1억4279만 엔으로 약 59%의 비중을 차지하고, 다음으로 보리 2507만 엔, 잡곡류 1610만 엔을 합친 식용 농산물이 전체의 약 76%를 차지했다. 두류, 면류, 유채 씨, 누에고치, 쪽, 연초, 마 등의 가공원료 작물은 4629만 엔으로 약 19%, 채소류는 1106만 엔으로 겨우 5%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채소류의 생산액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무로 272만 엔이고, 2위인 고구마가 252만 엔, 3위인 토란이 188만 엔으로 이들 세 가지 채소가 전체 채소 생산액의 약 65%를 차지했다.(주2 渡辺善次郎 『近代日本都市近郊農業史』 論創社, 1991년, 19쪽.) 여기에서 상위에 위치하는 채소는 곡물류의 대용품, 곧 잡곡밥의 요소가 강하고 배추, 양배추, 토마토, 양파 등 근대 이후에 외국에서 도입된 외래 채소 등은 계상되어 있지 않다. 나아가 <물산표>에는 생차나 곤약 줄기 등도 '채소류' 안에 포함되어 있는 등 분류의 문제도 지적할 수 있는데, 그 반면 메이지 초기의 채소 생산의 대부분은 무, 고구마, 토란이고 그외의 채소 생산은 아직 얼마 안 되는 생산 단계에 있었단 것을 볼 수 있다.다음으로 각 부현의 채소 생산의 지위를 보기 위하여, 농가 1호당 채소 생산액을 산출했다(표2-1). 1874년 전국 평균은 77전이었는데, 1엔 이상에 달하고 있는 지역이 13부현이다. 4엔 77전인 도쿄를 필두로 이하 미에, 나가사키, 나라, 오사카, 쿠마가야熊谷(주3 1871년, 무사시국武蔵国 북부, 코우즈케국上野国의 거의 전역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현. 현재 사이타마현의 대부분, 군마현의 거의 전역에 해당한다.), 메이토우名東(주4 1871년, 아와국阿波国, 아와지국淡路国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현. 관할 지역은 당초는 현재의 도쿠시마현 및 효고현 아와지시마. 한때 카가와현이 추가되었다.), 아이치, 오키타마置賜(주5 1871년, 우젠국羽前国 남부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현. 현재 야마가타현 오키타마置賜 지방에 해당한다.), 시라카와白川(주6 1871년, 히고국肥後国에는 구마모토현과 야츠시로현八代県이 설치되었다. 구모모토현은 그 뒤 시라카와현으로 고쳐져 1873년 시라카와현과 야츠시로현이 병합해 시라카와현이 되었다. 1876년, 다시 구마모토현으로 개명되어 현재의 구마모토현이 탄생했다.), 교토, 아시가라足柄(주7 1871년에 사가미국相模国 서부, 이즈국伊豆国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현. 현재의 카나가와현 서부, 시즈오카현 이즈 반도, 도쿄도 이즈 제도에 해당한다.), 미야자키 순이다. 그러나 <물산표>와 합치면 제2위인 미에현에서는 70% 이상이 생차이고, 제3위인 나가사키에서도 90% 가까이가 고구마였다. 기타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토란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생차나 토란류 이외의 채소 생산이 성행한 지역은 도쿄, 나라, 오사카, 교토 등 3대 도시와 그 주변으로 한정되었다.(주8 渡辺善次郎 『近代日本都市近郊農業史』 論創社, 1991년, 19-23쪽) 즉, 메이지 초기의 채소 생산은 3대 도시 근교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표2-1 농가 1호당 채소 생산액

출전 : 明治文献資料刊行会 編 「明治前期產業発達史資料」 第一卷所 「明治七年府県物產表」 1959년, 明治38(1905)년 『府県統計書」, 明治38(1905)년 『農商務統計表」, 農林統計研究会 編 「都道府県農業基礎統計」 農林統計協会, 1983년에서 작성.

주1) 메이지 38(1905)년의 미야기宮城・카나가와神奈川・니이가타新潟・후쿠이福井・기후岐阜・시즈오카静岡・아이치愛知・시가滋賀・오사카大阪・와카야마和歌山・시마네島根・오카야마岡山・도시마徳島・에히메愛媛・사가佐賀・나가사키長崎・오이타大分・미야자키宮崎・가고시마鹿児島의 총 농가수는 메이지 41(1908)년의 수치를, 교토京都・고치高知는 메이지 39(1906)년, 카가와香川는 메이지 37(1904)년의 수치를 이용했다. 

주2) 메이지 7(1874)년의 음영은 농가 1호당 채소 생산액이 1엔 이상에 달하는 지역, 메이지 38(1905)년의 음영은 농가 1호당 채소 생산액이 전국 평균 19.40엔을 상회한 지역. 

 

 

 

메이지 후기, 지방도시 근교에도 생산이 퍼지다

1905년의 <통계표>에서는 무, 고구마, 감자, 마늘, 우엉, 죽순, 콩류가 '식용 농산물'로 계상되었다. 같은 해의 '식용 농산물'의 생산액은 1억 3081엔으로, 농업 총생산액의 약 35%를 차지했다. 이것은 맥류의 생산액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쌀 생산액의 1/4에 상당한다.(주9 松本貴典 編 『生産と流通の近代像』 日本評論社, 2004년, 142쪽.) 메이지 후기의 농업 생산은 쌀을 기축으로 하는 곡물 중심형 농업이었는데, 동시에 '식용 농산물'의 생산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까지 성장했단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1905년이 되면, 채소 생산액의 전국 평균 19.40엔을 상회한 지역은 94엔인 홋카이도를 필두로 다음 사이타마, 오키나와, 미야기, 카나가와, 가고시마, 에히메, 이바라키, 도쿄, 구마모토, 야마구치, 치바, 후쿠오카, 나가사키, 도쿠시마, 후쿠시마, 아이치, 미야자키, 토치기, 이와테, 고치, 야마나시, 시즈오카, 아오모리, 아키타, 이시카와, 니이가타의 27부현에 이르렀다(표2-1). 메이지 초기 단계와 비교하면, 메이지 후기는 3대 도시 근교의 부현만이 아니라 그외의 지방 도시 근교의 도현에서도 채소 생산이 활발히 행해졌단 것이다. 

 

 

 

다이쇼우 시기 이후, 생산되는 채소가 다양화

그 뒤 1909년의 <통계표>에서는 '채소'라는 단독 항목이 설정되어, 조사하는 종류도 무, 당근, 우엉, 고구마, 토란, 순무, 절임 채소, 파, 양파, 연근, 쇠귀나물, 오이, 호박, 수박, 참외, 가지, 토마토의 17종류가 되었다. 이것은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 다양한 채소가 조사 항목에 더해질 만큼 생산이 확대된 하나의 지표인 듯하다. 그러나 <통계표>에 '채소'의 항목이 설정된 초기 단계에는 연차나 지역에 따라서 조사 대상인 채소의 종류가 변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어느 해에는 조사된 채소가 이듬해에는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어느 지역에서는 17종류 모두가 조사 대상인데 어느 지역에서는 17종류 가운데 몇 종류를 조사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17종류 '채소'의 데이터가 각 도부현에서 비교적 충실해지는 것은 다이쇼우 시기 이후, 데이터가 완전히 갖추어지는 건 다이쇼우 말기 이후였다. 따라서, 실제 채소 생산액 및 작부면적은 <통계표>의 수치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상의 점에 유의하면서 전국적인 통계 데이터가 충실한 다이쇼우 시기 이후의 채소 작부면적 추이를 살펴보자. 표2-2에 나오듯이, 1912년은 22억9770만 평이었던 채소 작부면적이 1917년에는 28억1700만 평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표2-2 다이쇼우 시기~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의 채소 작부면적 및 가액의 추이

출전 : 日本 園芸中央会 編 『日本園芸発達史」 有明書房, 1975년, 101-102쪽에서 작성

주) ー은 기재 없음.

 

 

이 5년 사이에 작부면적이 해마다 4% 전후, 약 1억 500만 평씩 증가했다. 그 뒤, 다이쇼우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 작부면적은 일시 조금 줄지만, 1930년부터 다시 27억 평을 넘어, 1935년에는 30억 평을 넘는 추세가 되었다.

다음으로, 품목별 작부면적의 추이를 보면, 표2-3대로이다. 1912년부터 1916년의 5개년 평균을 기준으로 다이쇼우 후기(1922~1926년)과 쇼와 초기(1927~1931년)의 5개년 평균 각 품목의 작부면적을 비교하면, 양배추, 수박, 양파, 토마토의 뚜렷한 증가와 토란, 고구마, 무, 순무의 약간 감소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는 서서히 작부면적이 감소하고 있지만, 해당 기간에 일관하여 3억 평 이상 재배되어, 전체 채소의 43% 차지할 만큼 중요한 채소였다. 

 

 

표2-3 주요 채소 작부면적의 추이(정보; 3000평)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園芸要覧』 日本園芸会, 1933년에서 작성

 

 

 

 

일본의 중요 채소는 무

표2-4에는 1925년 무의 생산액 상위 다섯 도부현을 들었다. 도쿄부의 550만 엔을 필두로 니이가타, 홋카이도, 가고시마, 아이치 순이고, 모두 200만 엔 이상의 생산액이었다. 기타 현에서도 무가 채소 생산액의 상위인 지역이 많아, 전국적으로 무가 채소 생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무의 전국 생산량과 인구 1인당 연간 소비량을 산출하면 1년에 50개 정도가 되고, 영유아를 포함해 한달에 1인당 4개의 무를 소비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주10 앞의 책, 145-146쪽.)

 

 

표2-4 1925년 무의 생산액 상위 다섯 도부현

출전 : 商工省 商務局 編纂 「商取引組織及系統ニ關スル調査蔬莱及果實」 日本商工會議所, 1927년에서 작성

 

 

무는 주로 절임용으로 재배되는 일이 많았다. 사진 2-1은 수확한 무를 씻어서 말리고 있을 때의 모습이고, 사진2-2는 말린 무를 절인 통이다. 절임을 절일 때에 사용하는 통의 일반적인 크기는 4말들이(약 72리터)로, 여기에 말린 무 60~70개가 절여진다.(주11 東京都 練馬区 教育委員会 生涯学習課 編 『練馬大根』 練馬区 教育委員会, 1998년, 112쪽.) 1927년에 농림성 농무국에서 간행된 <단무지에 관한 조사(澤庵漬二関スル調査)>에 의하면, 당시 단무지의 총생산수량은 약 200만 통으로, 그 가격은 약 1000만 엔이나 되었다고 한다.(주12 農林省 農務局 編 『澤庵漬ニ関スル調査』 農林省 農務局, 1927년.) 단무지 이외에도 된장절임, 누룩절임, 술지게미절임 등 각지에 여러 가지 절임이 있는데, 모두 일본의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전통적인 반찬이다. 

 

 

사진2-1 무 말리는 모습.  출전 : 원래 사진 소장자 불명(네리마구 구립 샤쿠지이石神井 공원 고향문화관 제공) 

사진2-2 절임 가공업자와 절임통. 출전 : 원래 사진 소장자 불명(네리마구 구립 샤쿠지이 공원 고향문화관 제공)

 

 

외래 채소의 보급

한편, 뚜렷하게 증가가 눈에 띄는 양파, 양배추, 수박, 토마토 네 품목 가운데 양파, 양배추, 토마토는 이른바 외래 채소로, 양파는 3.8배, 양배추는 2.3배, 토마토에 대해서는 24배나 증가했다. 표2-5에는 1925년의 양파, 양배추, 토마토의 생산액 상위 다섯 도부현을 들었다. 우선, 세 품목 모두에서 생산액이 상위인 홋카이도에 주목하고 싶다. 홋카이도는 개척 경영을 위하여 설치된 개척사開拓使에 의하여 1871년부터 양파, 양배추, 토마토 등의 외래 채소를 구미에서 적극적으로 수입함과 함께, 도 안 각지에서 농업시험장을 설치해 그 시험재배와 보급이 도모되었다.(주13 大蔵省 『開拓使 事業報告 第三編』 大蔵省, 1885년.) 또한 장마가 없고 여름철이 서늘한 홋카이도의 기후는 구미의 기후와 유사해서 본섬과 비교해 외래 채소의 재배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점도 생산 확대를 후원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표2-5. 1925년 양파, 양배추, 토마토의 생산액 상위 다섯 도부현

 

출전 : 商工省 商務局 編纂 「商取引組織及系統二關スル調査蔬菜及果」 日本商工會議所, 1927년에서 작성

 

 

홋카이도 이외의 지역에 착목하면, 양파에서는 홋카이도의 '삿포로札幌 황黄'이란 봄 파종 품종에 대하여 '센슈泉州 황黄'이란 가을 파종 품종의 재배 방법을 확립한 오사카가(주14 南野純子 『泉州玉葱と坂口平三郎』 南野純子出版, 1987년 및  畑中加代子 『玉葱王:今井伊太郎とその父佐次平』 毎日新聞社大阪本社総合事務局, 2002년.) 세 품목 중에서 유일 홋카이도를 상회하는 비율이다. 양배추는 기본적으로 20℃ 안팎의 서늘한 기후를 좋아한다. 그 때문에 홋카이도와 함께 아키타, 나가노, 이와테 등 한랭지의 재배가 눈에 띈다. 토마토는 수입 당시 독특한 풋내가 일본인의 미각에 경원시되는 가운데 1914년에 아이치 토마토 소스 제조 합자회사(현 카고메 주식회사)(주15 上野町 教育委員会(愛知県) 「トマト王盤江一太郎』 上野町 教育委員会, 1955년.)가 설립되는 등 토마토 재배와 가공업이 발전한 아이치가 홋카이도에 이어 제2위의 비율을 차지한다. 메이지 초두, 재배의 어려움이나 일본인 식생활과의 괴리로 잠시는 거절된 외래 채소가 고도 경제 성장 시기 이후 일상의 필수 채소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 단계로서 메이지 중후기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의 외래 채소 재배의 밑바탕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방도시 근교의 논 지대에서도 높은 채소의 생산 의욕

마지막으로 다이쇼우 말기 채소 생산의 지역적 특징을 확인해 두고자 한다. 표2-6에는 1924년 도부현별 채소 생산액 및 작부면적과 각지의 논밭율 및 밭을 차지하는 채소 농사의 비율을 나타냈다. 채소 생산 가액은 3135만 엔의 홋카이도를 필두로, 도쿄가 2148만 엔, 1000만 엔 이상이 아이치, 사이타마, 니이가타 순이 된다. 

한편, 작부면적에서는 3억 4500만 평의 홋카이도를 필두로, 이하 3000만 평 이상이 후쿠오카, 니이가타, 이바라키, 치바, 아이치, 도쿄, 구마모토, 사이타마, 시즈오카, 효고, 히로시마, 가고시마, 토치기, 후쿠시마, 오사카의 순이 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채소 작부면적이 많은 상위 30위 가운데 * 표시를 붙인 2위의 후쿠오카, 3위의 니이가타, 5위의 치바, 6위의 아이치, 11위의 효고, 12위의 히로시마, 14위의 토치기, 15위의 호쿠시마, 16위의 오사카, 17위의 야마구치, 19위의 아키타, 23위의 기후, 24위의 오카야마, 25위의 미야기, 27위의 교토, 28위의 사가, 29위의 미에, 30위의 아오모리 등 합계 18곳의 지역은 무논율이 높은 점이다. 나아가 무논율이 높은 18곳의 지역 가운데 15곳의 지역에서 밭을 차지하는 채소 농사의 비율이 높아지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밭농사 지대의 토지 이용은 채소 이외의 토란류나 맥류 등의 농사 비율이 높아지지만, 무논 지대 안으로 한정된 밭에서는 채소 생산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표2-6 1924년 도부현별 채소 생산액 및 작부면적과 각지의 논밭율 및 밭을 차지하는 채소 농사의 비율

출전 : 農林省 農務局 「蔬菜及果樹之栽格状況」 大日本農会, 1927년 및 大正13(1924)年 『農商務省統計』에서 작성

주) *표시는 전국 평균을 상회하는 무논율 및 밭을 차지하는 채소 농사 비율을 나타냈다. 

 

 

이처럼 메이지 이후 3대 도시 근교를 중심으로 개시된 채소 생산은 메이지 후기가 되면 지방 도시 근교에도 퍼져 생산되는 채소의 종류도 다양화되고 증가해 나아갔다. 덧붙여 말하면, 채소 생산이 활발한 지역은 종래의 연구가 대상으로 삼은 대도시 근교의 밭농사 지대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 도시 근교의 무논 지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책의 5장에서 니이가타현에 착목한 의도는 이러한 지방 도시 근교의 무논 지대에서 채소 생산의 전개를 근대 일본의 채소 생산의 한 특질로서 의의를 두고자 하는 점에 있다. 

 

 

 

2) 상품화가 진행되는 채소

 

지방도시에서도 늘어나는 소비 인구

메이지 이후 채소 생산의 최대 특징은 도시 주민을 위한 상품 유통을 전제로 한 채소 생산의 진전인 듯하다. 우선은 채소 상품화의 진전을 뒷받침하는 메이지 이후의 소비자 인구의 규모를 확인해보자. 

1889년에 시 제도가 실시된 이래, 1890년은 도시 수가 합계 47곳, 이 가운데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6곳이었는데, 1913년에는 도시 수가 합계 70곳, 이 가운데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11곳, 1935년에는 도시 수가 합계 125곳, 이 가운데 인구 10만 명 이상인 도시가 34곳이 되어 이 45년 사이에 도시 수가 약 3배, 10만 명 이상의 도시는 5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메이지 시기에는 인구 5만 명 미만의 소도시가 압도적으로 많고, 인구 10만 명 이상의 대도시나 중도시는 매우 소수였는데 다이쇼우 시기부터 쇼와 초기는 소도시가 비교적 적고 중도시 및 대도시가 뚜렷하게 증가했다.(주16 岡崎文規 「明治以降の日本都市人口の推移」 『都市問題』 48(1), 1957년, 40쪽.) 다음으로 도시 인구의 추이를 보도록 하자. 전체 인구에 대한 도시 인구는 1890년의 약 403만 명에서 1918년에는 1000만 명에 달하고, 1935년에는 2267만 명으로 확대되어 이 45년 동안 전체 인구에 대한 도시 인구의 비율은 10%에서 30%로 상승했다.(주17 앞의 책, 41쪽.)

 

그중에서도 도쿄, 오사카, 교토, 나고야, 요코하마, 고베 등 여섯 도시는 일본에서 최대의 인구를 지닌 대도시이다. 도쿄의 인구는 1890년에 이미 100만 명 이상이고, 1935년에는 590만 명을 넘는 거대 도시로 발전해 그 증가율은 5.1배이다. 오사카의 인구는 1890년에는 47만 명 이상이었는데, 1935년에는 299만 명을 넘을 정도로 증가해 그 증가율은 6.3배이다. 교토는 1890년부터 1935년의 인구 증가율이 3.8배로 6대 도시 중에서는 가장 작지만, 기타 나고야, 요코하마, 고베는 모두 도쿄 이상으로 증가율이 크다. 이러한 도시 인구의 증가에 비례하듯이, 산업 경제의 증심은 농업에서 상공업으로 이행해 나아갔다. 

그림2-1에는 태평양전쟁 전기의 전체 고용인 수에서 차지하는 비농림수산 고용인 수의 추이를 나타냈다. 비농림수산업의 고용인은 1886~1890년 768만 명에서, 1906~1910년에는 1033만 명에 달하고, 1931~1935년에는 1582만 명으로 확대되어 전체 고용인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4%에서 52%까지 상승했다. 근대 도시의 성장에 따른 도시 인구의 증가나, 1차 산업에서 2차, 3차 산업으로 노동 인구의 이동은 채소를 포함한 농산물 수요를 뚜렷하게 신장시키게 되었다. 곧, 채소를 구입하는 층의 형성이다.  

 

 

그림2-1 태평양전쟁 전기 일본의 전체 고용인 수에서 차지하는 비농림수산업 고용인 수의 추이

출전 : 中村隆英 編 『日本の経済発展と在来産業」 山川出版社, 1997년, 15쪽에서 작성

 

 

 

 

수송 원예의 발달과 청과물 시장의 정비

표2-7에는 <일본 전국 상공인 명록>을 바탕으로 채소를 판매하는 '청물상'의 전국적인 분포와 그 추이를 나타냈다. 먼저, 1898년의 분포를 보면, 전국에서 242개의 청물상이 확인된다. 가장 많은 것이 도쿄의 69개(약 30%)로 되어 있고, 다음으로 오사카 29개, 효고 24곳, 카나가와 20곳으로 이어지며, 이 상위 네 부현에서 전체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청물상의 분포는 도쿄부를 중심으로 한 6대 도시가 위치하는 부현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표2-7 청물상의 전국 분포와 그 추이

출전 : 鈴木喜八・関伊太郎 編 「日本 全国 商工人 名録」 日本 全国 商工人 名録 発行所, 1898년 및 商工社 編 「日本 全国 商工人 名録」 商工社, 1919년에서 작성

주) 여기에 등장하는 청물상이란 이른바 읍내의 채소가게가 아니라, 채소의 도매를 담당하는 청과 도매로 상정된다. 숫자에는 겸업 청물상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 1919년의 분포를 보면, 청물상의 수는 전국에서 872개로, 이 20년 기간에 4배 가까이까지 증가했다. 가장 많은 것은 아이치의 115개(13%)이고, 다음으로 도쿄의 90개, 오사카 79개, 홋카이도 54개, 효고 50개, 카나가와 30개로 되어 있다. 자료의 성격에 따라, 두 해 모두 청물상의 수가 0개인 지역도 있다면, 1919년 쪽이 적어지고 있는 지역도 드문드문 볼 수 있는데, 대다수의 지역에서 청물상의 증가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청물상의 증가는 채소 수요의 확대에 따른 채소 생산의 상품화 진전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그럼 구체적인 수요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사료2-1에는 1914년의 철도 수송에 의한 채소 출하 상황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사료2-12](주18 鉄道院 編 「本邦鉄道の社会及経済に及ほせる影響』 中巻, 鉄道院, 1916년, 593-594쪽.)

 

도쿄 및 오사카 두 시는 일본에서 채소의 최대 소비지이고, 그리고 도쿄시에서는 특수한 것, 나머지는 대부분 부근에서 생산되며, 짐수레 또는 짐마차 등에 의하여 청물 시장으로 반출되기에 그 소비 총액을 아는 건 불가능하지만, 1개년 철도편에 의하여 반입되는 것을 보더라도 약 1만 3600톤에 달하고, 그들은 모두 센쥬千住, 시나가와品川 등의 청물 시장에서 코마고메駒込, 다마치田町, 교바시京橋 등의 각 시장으로 보내져, 일반 청물 상인에게 판매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치바현 히가시카츠시카東葛飾郡 부근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로 해마다 도쿄에 보내지는 게 약 3000톤 안팎에 달하며, 그 가운데 철도편에 의한 것은 1/3을 점하는 듯하고, 또 오사카시에서는 철로로 이 시에 반입되는 것은 연액 약 2만 1000톤으로 그 또한 특수한 종류 외는 대체로 근교 각지에서 공급되는데, 최근 수송 편리의 증가에 수반해 각 지방에서 수입되는 것도 적지 않음에 이른다.

 

도쿄, 오사카 두 시에서 채소 수요량이 큰 것은 상술한 바와 같지만, 단지 그들 도시만이 아니라 기타 도회지에서도 인구의 증가는 점점 채소의 수요를 증대시켜, 이 때문에 예전에는 채소 재배는 농가의 한 부업에 지나지 않던 것이나 오늘날에는 점차 다수의 전업자를 생기게 하리란 전망을 보이며, 그리고 그것이 수송 방법 같은 것도 종전 같이 짐수레와 마차 등에 의하여 날마다 부근 도시에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원거리에 있는 주산지에서 활발히 대소비지를 향해 기차 수송을 하게 됨에 이르고, 이와 같이 수요에 수반한 공급의 증가는 우연히 철도 수송의 편리로 멀게는 홋카이도, 모리오카盛岡, 나가노, 큐슈 등의 각지에서 도쿄, 오사카 기타 도시에 공급하는 것이 매우 많음에 이르렀다.  (밑줄은 필자가 덧붙임)      

 

 

1914년 철도에 의해 도쿄시에 반입된 채소는 연간 1만 3600톤, 오사카시가 약 2만 1000톤으로 두 시가 해당 시기 최대의 채소 소비지였다. 또한 도쿄·오사카 이외의 도시에서도 인구의 증가를 배경으로 한 채소 수요의 고조가 눈에 띄게 나타나, 채소 전업농가가 다수 출현하고 있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원격지인 홋카이도·이와테·나가노·큐슈에서 대소비지인 도쿄시·오사카시나 기타 도시로 철도를 이용한 채소 수송이 매우 많은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1916년에 수송할 때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통풍차가 설계되자,(주19 貨車技術発達史 編纂委員会 編著 「日本の貨車 —技術発達史 明治5(1872)年~平成16(2004)年—」 日本鉄道車輛工業会, 2008년.) 지금까지 손상되고 부패 때문에 수송이 곤란했던 시금치, 쑥갓, 파, 소송채, 배추 등의 연약 채소도 수송성을 증가시켜 원격지에서 대도시로 입하되는 양이 해마다 증대해 갔다. 게다가 1923년 3월에는 중앙 도매시장 법안이 성립되었다. 이는 종래와 같은 도매상인에 의한 사재기나 부정행위를 초래하는 당사자끼리의 거래를 재검토해, 출하품 모두를 시장을 통해 경매 거래하는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주20 일본 중앙 도매시장의 특ㅈ징이나 의의에 대해서는 秋谷重男 『中央卸売市場』 日本経済新聞社, 1981년을 참고하길 바란다.) 최초의 중앙 도매시장이 개장한 것은 1927년 교토시로, 이후 고치시(1930년), 요코하마시·오사카시(1931년), 도쿄시(1935년)에 순차적으로 개장했다.(주21 도쿄시에 대해서는 코우토우江東 청과시장이 1927년에, 칸다神田 시장이 1928년에 가개설되었다.) 이러한 수송 원예의 발달과 청과물 시장의 정비에 따라 쇼와 시기에 들어와서부터도 채소 수급은 더욱 확대되어 나아간다.

 

 

 

 

 

상품 유통을 전제로 한 채소 생산의 급속한 신장

표2-8은 1925년과 1932년 도시의 채소 수요량을 비교한 것이다. 자료의 제약으로 두 해의 데이터가 갖추어진 도시에 한정한 비교인데, 합계 16개 도시 가운데 고베시, 아오모리시, 아키타시, 후쿠이시의 4개 시 이외의 도시에서 채소 수급의 증가를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증가율이 높은 것은 돗토리시 3.5배이고, 다음으로 모리오카시 2.9배, 도야마시 2.3배, 야마가타시 2.0배로 이어진다. 한정된 데이터이지만 지방 도시에서 채소 수요 증대의 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표2-8 1925년과 1932년 도시의 채소 수급양 비교

출전 : 商工省 商務局 編纂 『商取引組織及系統ニ關スル調査蔬菜及果實」 日本商工會議所, 1927년 및 農林省 農務局 編 『全國都市ニ於ケル主要農産物需給調査』 農林省 農務局, 1934년에서 작성

주) 음영은 채소 수급의 증가를 볼 수 없던 지역. 

 

 

또한, 1934년 농림성 농무국에서 간행된 <전국 도시의 주요 농산물 수급 조사>에 의하면, 조사 대상인 전국 주요 91개 도시에 출회되는 채소 20개 품목(무, 우엉, 당근, 고구마, 감자, 토란, 죽순, 고추냉이, 파, 양파, 양배추, 배추, 절임채, 오이, 호박, 수박, 가지, 누에콩, 완두콩, 송이버섯)의 총수량은 1912만 500톤으로, 그 총 가격은 6100만 엔에 달했다.

표2-9에는 각 도시에 출회되는 채소의 수량 및 가격을 나타냈다. 가장 그 양이 많은 건 도쿄시로, 수량 46만 653톤(24%), 가격 974만 2000엔(16%)였다. 다음으로 오사카시가 수량 20만 1828톤(11%), 가격 438만 9000엔(7%)로 도쿄와 오사카 두 시에서 총수량 35%, 가격 23%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쿄시 및 오사카시는 메이지 이후 최대츼 채소 소비지로서 군림해 갔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6대 도시로 자리매김되는 나고야, 고베, 교토, 요코하마의 총수량은 34만 8405톤(18%), 그 가격 1450만 3000엔(24%)으로 수량 및 가격 모두 6대 도시에서 약 50%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타 8만~30만 명의 인구를 가진 28개 도시에서 약 30%, 5만~8만 명 이하의 29개 도시 및 5만 이하의 28개 도시에서 10% 안팎으로 되어 있다. 

 

 

표2-9 1932년 각 도시에 출회되는 채소의 수량 및 가격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全國都市ニ於ケル主要農産物需給調査』 農林農務局, 1934년에서 작성

 

 

한편 30만 명 이하의 도시, 곧 6대 도시 이외에 출회되는 채소의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은 가고시마시의 6만 1106톤으로, 이는 6대 도시인 요코하마시의 6만 693톤을 상회한다. 다음으로 히로시마시의 5만 227톤, 삿포로시의 4만 3421톤으로 이어지며, 3만 3750톤 이상 3만 7500톤 이하가 사카이시와  하코다테시의 2개 도시, 1만 8750톤 이상 3만 3750톤 이하가 쿠레시呉市, 오타루시小樽市, 후쿠오카시, 시모노세키시, 센다이시, 가와사키시의 6개 도시, 1만 3125톤 이상 1만 8750톤 이하가 나가사키시, 마에바시前橋市, 기후시, 야와타시八幡市(후쿠오카현), 미야자키시, 나하시, 와카마츠시若松市, 돗토리시의 8개 도시, 7500톤 이상 1만 3125톤 이하가 24개 도시로 되어 있다(표2-10). 

 

 

표2-10 1932년 6대 도시 이외에 출회되는 채소의 수량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全國都市ニ於ケル主要農産物需給調査』 農林省 農務局, 1934년에서 작성

 

 

350만 관을 톤으로 환산하면 1만 3125톤이란 수치가 된다. 이는 앞에 기술한 1914년 철도 수송에 의한 도쿄시의 채소 반입량 1만 3600톤에 필적하는 수치이다. 즉, 이 18년 사이에 다이쇼우 초기에 도쿄시로 반입된 채소의 양과 동등 또는 그 이상의 양을 필요로 하는 도시가 19개 도시나 있었단 것이다. 

이와 같이 메이지 이후의 자본주의 경제 확립에 따른 근대 도시의 성장은 소비자 인구를 증가시킴과 함께 채소 수요를 증대시켜 도시 주민을 위한 상품 유통을 전제로 한 채소 생산을 촉진시켰다. 반복해 기술했듯이, 해당 시기의 채소는 모두 고정종이다. 즉, 메이지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는 고정종 채소의 상품화가 진행된 시기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 

 

 

 

 

2. 확대되는 고정종 종자의 수요

 

1) 종자를 구입하는 농가

채소의 상품화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은 농가의 종자 수요가 질과 양, 쌍방의 변화를 통해 확대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여, 얼마나 양질의 종자를 입수할 수 있는지가 상품 가치가 높은 채소를 증산하려는 농가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고정종 시대의 종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통계 데이터(1929년)인 <소채 및 과수의 종묘에 관한 조사(蔬菜及果樹ノ種苗二関スル調査)>(주22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掛ノ種苗ニ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년.)를 중심으로 당시 종자 수요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질・양의 안정을 요구한 생산 농가

그림2-2에는 쇼와 초기 각 채소 종자의 수요액에 대한 구입 종자와 자가채종의 비율을 보여준다. 구입 종자의 비율이 80% 이상을 나타내는 건 양배추와 배추이고, 50% 이상 80% 이하가 양파, 우엉, 순무, 당근, 무, 수박, 오이, 가지이며, 50% 이하가 파, 호박, 월과越瓜였다. 같은 개체의 꽃가루로 수분하는 '자식성 작물'이나 '근교 약세'가 거의 없는 호박, 월과 등의 박과 채소는 소수 모본에 의한 품종의 유지가 가능하고, 자연 교잡이나 돌연변이 그루, 다른 품종의 혼입을 막는 것도 적은 노력으로 해결되기에 자가채종율이 비교적 높다. 그에 대해 양배추, 배추, 양파, 우엉, 순무, 당근, 무 등 근교 약세가 뚜렷한 타식성 작물은 품종 특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수의 모본을 필요로 하고, 교잡을 막기 위해 큰 노력을 요구하기에 종자를 구입하는 비율이 높아진다.(주23 中川原敏雄・石綿菓 「自家採種入門 ー生命力の強いタネを育てるー』 農山漁村文化協会, 2009년, 39쪽.) 즉, 많은 수고나 기술력을 요하는 채소 종자에 대해서는 농가가 자가채종이 아니라 구입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2-2 각 채소 종자의 수요 총액에 대한 구입 종자 및 자가채종의 비율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衝ノ種苗ニ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년에서 작성

 

 

또한 구입 종자의 비율을 도부현별로 보면, 50% 이하의 지역은 아오모리, 도야마, 나가노, 기후, 교토, 오사카, 와카야마, 돗토리, 카가와, 나가사키, 미야자키, 가고시마의 12개 부현이고, 그 이외의 35개 도부현에서는 자가채종보다도 종자를 구입하는 비율이 높아진다(표2-11). 그 비율은 평균하면 총수요액의 약 64%에 이르고, 채소의 종류나 지역에 따라서 정도의 차는 있어도 종자를 외부에서 구입하는 농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표2-11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 채소 종자 수요 총액에 대한 구입 종자 비율(도부현별)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衝ノ種苗ニ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년에서 작성

주) 음영은 구입 종자의 비율이 50% 이하인 지역

 

 

자급을 위한 채소 생산이 일반적인 단계에서는 종자도 자가채종만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시장에 적합한 채소를 증산하기 위해서는 농가는 자가채종만으로는 질과 양 모두에서 종자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어,  더 좋은 종자를 구입할 필요에 쫓겨 간다. 근대 일본에서 시장 유통하고 있던 종자는 모두 고정종으로, 자가채종하는 일은 기술적으로는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자를 구입하는 농가가 총수요량의 약 2/3를 차지하고 있던 사실은 상품 유통을 전재로 한 채소 생산이 꽤 진전되었단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형질이 좋은 '청과'를 시장에 팔고 싶은 농가와 형질이 좋은 '청과'를 채종용 모본으로 남기는 종자상 사이에 고정종이란 종자를 둘러싸고 이미 분업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단 것을 보여준다. 

 

 

 

더 좋은 품종을 선택하고 싶은 동기도  

종자의 '질과 양'이란 측면에 더해 '품종의 선택'이란 측면이 종자를 구입하는 동기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의 인식에서는 전통 채소는 그 품종이 성립된 지역에서 장기에 걸쳐서 재배되어 왔던 '지역 고유의 품종'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면, 네리마 무는 도쿄, 미야시게宮重 무는 아이치, 쇼고인聖護院 무는 교토에서 재배되어 오던 것이란 인식이다. 그러나 표2-12에 보이듯이, 품종이 탄생한 지역에서 재배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널리 각지에서 재배되었던 품종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가지는 마구로真黒・야마나스山茄・츠루보소센나리蔓細千成・타치바나다橘田, 오이는 카리와刈羽・마고메馬込 반백半白・오치아이落合, 호박은 코쿠히黒皮・슈쿠사이縮細・키쿠자菊座, 수박은 야마토大和・신야마토新大和・칸로甘露・아이스크림アイスクリーム, 토마토는 베스트오브올べストオブオール・폰테로사ポンテローザ・아리아나アーリアナ, 무는 미야시게, 네리마, 쇼고인, 미노美濃 조생, 순무는 쇼고인, 텐노우지天王寺・코카부小蕪, 당근은 타키노가와滝野川・킨토키金時・삿포로札幌・산즌三寸, 우엉은 타키노가와, 파는 센쥬우千住・쿠죠우九条, 양파는 옐로 단바스イエローダンバース, 절임채는 시후우芝罘・호우토우렌包頭連・아이치愛知・쵸쿠레이直隷・타이사이体菜, 양배추는 석세션サクセション・토요타豊田 조생・노자키野崎・나카노中野이고, 이들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재배되었던 말하자면 유행 품종이라고도 할 만한 품종이었다.

 

 

표2-12 유행 채소 품종과 그 생산 지역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主要品種ノ分布調査」 社団法人日本園芸会, 1936년에서 작성

 

 

 

물론, 이 시대는 F1 품종이 아니라 고정종이기 때문에 각지의 토지 조건에 따라서는 매우 적합하지 않은 품종도 있었다. 그러나 재래종이 아니라 고정종이기 때문에 토지 조건에 어느 정도 적합하다면 각지에서 재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도쿄에서 육성된 네리마 무는 홋카이도, 아오모리, 아키타, 야마가타, 후쿠시마, 이바라키, 군마, 사이타마, 치바, 카나가와, 니이가타, 도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야마나시, 기후, 시가, 효고, 시마네, 히로시마, 야마구치, 후쿠오카, 사가, 미야자키, 가고시마의 25개 도부현에서 주력 품종으로 재배되었다.(주24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主要品種ノ分布調査』 社団法人 日本園芸会, 1936년.) 이처럼 근대의 농가는 자신의 지역에서 육성된 품종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육성된 다양한 품종을 재배하기 위하여 종자를 구입했던 것이다. 

 

 

 

2) 종자의 산지화

 

생산량이 많았던 뿌리채소, 고가였던 외래 채소

다음으로 종자의 생산에 주목해 보자. 1925년부터 1927년에 판매용 종자의 평균 총생산량은 1만 700섬, 가액으로 130만 엔이었다.(주25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ノ種苗二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년.) 품목별로 그 생산양을 보면 표2-13과 같다. 채소의 종류에 따라서 종자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생산량이 많은 것은 무로 5300섬, 다음으로 당근 2700섬, 우엉 1200섬, 배추 380섬, 순무 350섬으로 이어진다. 당시의 채소 종자 생산은 뿌리채소류가 중심으로, 특히 무는 총생산량의 약 50% 차지하고 있었다. 품목별 생산가액으로 보면, 생산량 순위와는 달리 무 34만 엔, 양파 30만 엔, 당근 25만 엔, 양배추 12만 엔이다. 1되당 평균 가격을 산정하면, 가장 고액의 종자는 양배추의 17엔 28전이다. 모든 채소의 1되당 평균 가격인 4엔 45전에 대해 양배추의 그것은 대략 4배였다. 기타 평균 가격 4엔 45전 이상인 채소는 오이, 가지, 양파의 순으로 되어 있다. 양배추나 양파 등 외래 채소나, 종자 구입율이 50%를 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이 적은 오이나 가지는 고가의 종자였다고 할 수 있다.  

 

 

 

표2-13 품목별 판매용 채소 종자의 평균 수확량 및 평균 가액과 1되당 평균 가격

출전 : 農林省 農務局 『蔬菜及果樹ノ種苗ニ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년에서 작성

 

 

 

 

홋카이도北海道와 아이치愛知가 2대 종자 산지

채소 종자의 도부현별 생산량에서는 홋카이도와 아이치가 함께 3200섬을 생산해 둘의 합계는 총생산량 1만 700섬에서 약 60%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치바 720섬, 교토 500섬, 사이타마 410섬, 도쿄 370섬, 기후 360섬으로 이어진다. 카가와의 260섬을 제하고 시코쿠와 큐슈, 호쿠리쿠, 도호쿠 지방에서는 거의 생산을 볼 수 없다.(주26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ノ種苗二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년.) 생산량이 많은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농학 학위를 수여한 교육기관인 삿포로 농학교를 졸압한 학생이 도쿄 흥농원興農園 삿포로 지점을 비롯해 아이자와相沢 상회, 흥농원 오번관五番館, 삿포로 식산원殖産園, 혼고우本郷 종묘원 등의 종자상을 도 안에서 개업하고, 확대된 경지를 이용한 채종업이 전개되었다고 여겨진다.(주27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ー日本種苗業界の歴史明治・大正ー』 カネコ種苗株式会社, 1991년, 304-320쪽.)  또한 개화기부터 종자의 결실기까지 강우는 종자의 수량과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주28 井上頼数 『蔬菜採種ハンドブック』 養賢堂, 1967년, 141-148쪽.) 일본의 채소 대부분은 개화·결실기가 장마와 겹치는 데 반해 장마가 없는 홋카이도는 기상조건의 면에서도 채종 적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이치현은 에도 시대부터 특산 채소였던 미야시게 무나 호우료우方領 무의 산지를 중심으로 채종업이 성행해, 1881년에는 독농가 20여 명에 의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채종을 위한 조합이 설립되었다.(주29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ー日本種苗業界の歴史明治・大正ー』 カネコ種苗株式会社, 1991년, 219-222쪽.) 나아가, 1904년부터는 현이나 군 농회에 의한 원종포의 관리, 모본 선발, 교잡 방지 등의 기술 지도가 실시되었다. 후술하듯이, 종자상의 수도 전국 1위였던 아이치현에서는 메이지 말기부터 행정이 운영하는 채종 조합과 종자상의 조합 사이에 판매 계약이나 가격 협정이 맺어지는 등(주30 愛知県 園芸発達史 編さん会 編 『愛知園芸発達史』 愛知県, 1981년, 367-368쪽.) 행정과 민간에 의한 조직적인 채종사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채종업이 차츰 발전해 나아갔던 듯하다.다음으로 각 품목별 생산 상황을 살펴보자(표2-14). 우선 생산량이 많은 상위 5품목을 보면, 무는 아이치(57%), 당근은 홋카이도(73%), 우엉도 홋카이도 (69%), 배추는 아이치(42%), 순무는 나가노(32%)에서의 생산량이 많았던 걸 알 수 있다. 기타 품목에서는 양파는 홋카이도(46%), 수박은 기후(57%), 호박은 홋카이도(91%), 양배추도 홋카이도(88%), 오이는 니이가타(36%), 파는 기후(18%), 가지는 야마가타(24%), 월과는 니이가타(64%)를 중심으로 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채소 종자의 경우는, 품목별 생산량에 따라서 산지를 특정하기보다도 품종의 다양성이 중요해, 생산량은 소량이어도 품종별 산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표2-14 각 품목별 종자 생산량 상위 다섯 도부현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ノ種苗ニ関スル調査』 大日本農会, 1929년에서 작성

 

표2-15는 주요 채소 품종의 채종지 분포를 보여주는 것이다. 종자의 산지는 시도 단위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우선, 채소의 품목별로 보면 무는 전국에서 83개 시군, 당근은 34개 시군, 우엉은 31개 시군, 배추는 43개 시군, 순무는 21개 시군, 양파는 20개 시군, 수박은 32개 시군, 호박은 23개 시군, 양배추는 24개 시군, 오이는 41개 시군, 파는 30개 시군, 가지는 33개 시군, 월과는 8개 시군, 절임채는 32개 시군, 시금치는 20개 시군, 토마토는 18개 시군에나 이르는 종자 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도부현별 종자 산지 수를 보면, 가장 대부분의 종자 산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이치의 30개 군이고, 다음으로 홋카이도, 이바라키, 기후, 효고가 각 26개 군, 사이타마가 25개 군, 니이가타가 23개 군, 야마구치와 후쿠오카가 각 23개 군이다. 종자 생산량이 많은 홋카이도와 아이치는 여기에서도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외에도 통계에는 계상되지 않은 다양한 품종이 있어, 그 품종의 수만큼 종자의 산지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표2-15 주요 채소 품종의 채종지 분포(시·군)

출전 : 農林省 農務局 編 『蔬菜及果樹ノ種苗ニ関スル調査 昭和十四年度」 農林省 農務局, 1940년에서 작성

 

 

 

 

3. 민간 주도의 채소 육종

그럼 이러한 새로운 종자 수요의 형성 시기에 종자의 공급은 누가 담당해 왔을까? 여기에서는 근대 일본의 육종 사업 전개를 개관해 보도록 하겠다. 

 

 

1) 관에 의한 육종 사업의 개시와 실패

메이지 정부에 의한 최초의 채소에 대한 정책은 "내외 곡채과수의 시작・번식・반포(内外穀菜果間の試作・番殖・頒布)" 사업이었다.(주31 메이지 정부에 의한 외국 채소의 수입에 대하여 언급된 것으로 戸田博愛 『野菜の経済学』 農林統計協会, 1989년, 渡辺善次郎 『近代日本都市近郊農業史』 論創社, 1991년, 青葉高 『野菜の日本史』 八坂書房, 2000년을 들 수 있다.) 메이지 정부는 1871년에 개척사 소관의 관원官園을 도쿄의 아오야마青山(현 도쿄도 미나토구港区 아오야마)에 개설하고, 주로 미국산 채소, 곡류, 축산 관계의 시험 재배를 개시했다. 또한 1872년, 도쿄의 요츠야四ツ谷(현 도쿄도 신쥬쿠구 요츠야)에 나이토 신쥬쿠内藤新宿 시험장을 설치하고, 1874년부터 내외 각지에서 모은 식물을 시험 재배함과 함께, 각종 시험 재배 품종을 각 부현에 활발히 배부해 전국에 보급하도록 했다.

 

사료2-2는 나이토 신쥬쿠 시험장이 1874년 10월에 작성했던 각 부현으로 송부한 시험 재배에 관한 의뢰서이다.

 

 

[사료2-2](주32 農商務省 農務局 編纂課 編 『農務顛末 第5巻』 農林省, 1956년.)

 

 

서간안 각각 통지(御書簡案 但各通)

 

当寮出張所ニ於テ洋種穀菜類成育方相試ミ候処、別紙ノ次第ニ有之候得共、其国ニ依り風土気候ノ異ナルヨリ、自然適不適等モ有之、其良否得失ニ至テハ一所ノ試験ヲ以テ難相定候条、乍御手数試植御依頼ニ及度、御同意ニ候ハ、御望ノ種物書取ヲ以テ、四ツ谷内藤新宿当療出張所へ御申出相成候ハ、御渡可申候再試験ヲ別紙表式之通、明細御取調御報知有之度依之目録井表式相添此段御掛合ニ及候也

 

년年 월月 일日
도쿄부를 제외한다(東京府ヲ除ク)
부현 장관 앞(府県長官宛)

 

서양종 곡채 목록
一    귀리(燕麦)   원명原名 오트ヲーツ   국내산 메귀리 종류로서 키 1.2m에 이른다(邦産からす麦の類にして高四尺に至る)
一   양배추(甘藍)   (야채椰菜, 원명 게베치ゲベチ)
一   큰가지(大茄子)   (원명 에그플란트エグプラント)
一   반카蕃茄   (원명 토마토トマト)
(후략)

 

 

나이토 신쥬쿠 시험장에서 시험 재배한 귀리, 양배추, 큰가지, 토마토의 시험 재배를 도쿄부 이외의 2개 부 59현에 그 시험 재배를 의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로서에 대하여 각 부현에서는 매년 시험 재배 결과의 보고문서를 보냈다(사료2-3).

 

 

[사료2-3](주33 農商務省 農務局 編纂課 編 『農務顛末 第3卷」 農林省, 1955년, 330쪽.)

 

 

〇 아오모리현青森県
本年三月中御依頼有之洋菜類各地適不適試験ノ為メ右種物御廻シ有之候二付管下人民樹芸精練ノモノ相撰ヒ為蒔付候処、別紙三名ニ下渡シ候分ハ本年六月中霖雨ノ為メ水腐ニ及ヒ其他ハ漸々繁茂枯損モ無之ニ付追テ果実ノ季其景況委曲可申進得共、別紙試験表ヲ以テ届出候間御了承ノ為メ此段申進候也

 

参事鹽谷良翰 代理
明治八年 十二月 八日     青森県 権参事 那須 均
勧業権頭 河瀬秀治 殿
(후략)

 

 

아오모리현의 1875년 보고 안에는 올해 3월 중에 의뢰된 서양 채소류는 6월 중의 며칠이나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썩어 버린 것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옥수수는 4월에 파종한 것이 결실했는데, 4월 하순에 파종한 근대와 양배추는 잎이 90cm 정도로 생육했지만 채종할 수 없었다는 보고도 있다.(주34 農商務省 農務局 編纂課 編 『農務顛末 第3巻」 農林省, 1955년, 328쪽.) 이들 시험 재배 결과의 보고문서를 살펴보면, 다른 지역에서도 시험 재배 품종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시험 재배한 것 등이 원인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끝난 것이 많았던 듯하다. 각지에서의 시험 재배 시험이 계속되는 가운데 나이토 신쥬쿠 시험장에서는 두류, 보리, 면화 등의 시험 재배에 토양이 적합하지 않아 순조롭게 생육하지 않는 일 등도 있어 1877년에 도쿄의 미타三田(현 도쿄도 미나토구 미타)에 '미타 육종장'을 개설하고, 1879년에 나이토 신쥬쿠 시험장이 관내성宮内省의 소관이 되면서부터는 과수, 곡채 등에 관한 시험 재배 업무는 모두 미타 육종장으로 이관되었다. 표2-16처럼, 미타 육종장에서도 곡숙류穀菽類 88품종, 엽채류 84품종, 근채류 91품종, 과채류 71품종, 향신채 20품종 합계 354품종을 시험 재배하고, 각 부현으로 배부했다. 그러나 나이토 신쥬쿠 시험장의 시험 재배 결과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부현에서는 진귀한 외국 채소의 전시회로 끝나고, 정부가 기대한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각지의 군, 읍, 마을 등에 설치되었던 권농시험장이나 식물시험장은 소멸되어 버렸던 듯하다. 

 

 

 

 

표2-16 1880년 전후에 미타 육종장에서 시험 재배되어 각지에 배포된 외래 채소 품종

출전 : 『三田育種場舶来穀菜一覽表(明治十九年二月)」 農林省 農務局 福 「明治前期勧農事績輯録(上)」 長崎出版株式会社, 1975년, 203-215쪽에서 작성

주) ー는 기재 없음.

 

 

 

 

2) '종자를 판매하는 사람'들의 태두

             

 

채소 육종은 관에서 민으로

이와 같은 수입 농업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외국 기술의 모방을 그만두고 일본 독자의 기술을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다. 이러한 와중에, 1880년에 농무국農務局 보고과報告課는 <각 지방 노농 및 종묘호種苗戸 명부>의 작성에 착수한다. 이 명부의 작성 목적을 농무국 보고과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료-4](주35 農務局 報告課 編 『各地方老農及び種苗戸 名簿』 農務局報告課, 1882년. 다만, 종묘호가 0인 지역이 5개 현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의도가 반드시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던 현도 있단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당시 종자상의 전국적 수치를 파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시험용 계지界紙를 조제調製해 그것을 각 부현에 나누고, 또 식물 시험을 위한 종자를 위탁함에 따라 매회 각지 장관을 경유하는 건 다만 번잡하기만 해,  농가에서도 자연히 그걸 기피하기에 이르러, 완전한 시험을 달성하기 어려움으로써, 육종장보다 직접 노농에게 위탁하고, 또한 육묘의 매판도 다시 직접 조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니, 13년 1월、미리 노농가와 종묘호 등의 성명 조사의 사건을 각 부현에 조회하고, 아울러 우편국의 유무도 통지하는 것을 의뢰할까 (후략)

 

 

<각 지방 노농 및 종묘호 명부>는 당초 정부에 의하여 실시되던 국가에서 각 부현을 경유해 농가로 채소 종자를 배포한다는 경로는 번잡하여 시험 재배 시험이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기에, 지역의 실질적인 기술 지도자였던 노농이나 농가 수요에 정통했던 종자상을 통한 종자의 보급을 도모하기 위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즉, 1880년의 시점에서 정부는 국가에 의한 채소 육종 사업의 한계를 똑똑히 확인하고, 민간에 의한 육종 사업의 추진을 구상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2년 뒤인 1882년에 개척사의 관원이 폐지되고, 1884년에 미타 육종장이 대일본농회로 이관되자 메이지 초기에 개시되었던 정부에 의한 외국 채소의 시험 재배 사업은 1887년 무렵까지는 모두 폐지되었다. 한편 1893년에 국립 농사시험장이 도쿄의 니시가하라西ヶ原(현 도쿄도 기타구)에 개설되어, 일본 독자의 육종 사업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루어진 시험 연구의 중심은 쌀, 보리, 유채, 조, 대두이고 채소는 채택되지 않았다.(주36 「農林水産省百年史」 編纂委員会 編 『農林水産省百年史 上巻』 「農林水産省百年史」刊行会, 1979년, 189쪽.) 그 뒤 1902년에 시즈오카현 쿄우즈興津에 농사시험장의 원예부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서 이루어진 연구 대상도 과수로, 특히 감귤 연구를 목적으로 했다. 채소에 관한 시험 연구는 쿄우즈 시험지 개설 무렵부터 업부의 대상이 되었는데, 실제로 행해지게 된 것은 다이쇼우에 들어가서부터였다.(주37 「農林水産省百年史」 編纂委員会 編 『農林水産省百年史 中巻』 「農林水産省百年史」刊行会, 1979년, 184쪽.) 이처럼 메이지부터 다이쇼우 시기에 걸쳐 국가의 농업에 관한 시험 연구를 처음으로 한 여러 시책은 쌀을 중심으로 한 곡류 재배에 중점이 두어져, 다이쇼우 말기까지 채소 관계의 시험 연구를 국공립 시험 연구기관에서 행한 예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미타 육종장에서 배포된 채소의 종자는 각지의 종자상이나 지방 농사시험장 등에 계승되어, 서서히 정착해 나아가는 지역도 있었다. 쌀을 중심으로 한 곡류 재배나 수출품인 양잠, 생사가 국가의 장려와 연구에 의해 발전했던 것에 반하여, 지역성이 강한 다양한 품종을 지닌 채소에 대해서는 민간을 중심으로 지방 농사시험장이 그것을 지원하는 형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종자상의 확대와 기능 분화

종자상의 전국적인 수치를 파악하는 데 가장 오래된 자료가 앞에 적었던 <각  지방 노농 및 종묘호 명부>일 것이다. 이 <명부>의 안에 '종자를 판매하는 사람'으로 기재되어 있던 종자상은 에도 시대 이래로 채소 생산지인 대도시 근교를 중심으로 전국에 1054명 확인된다. 현재의 일본 종묘협회 정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종묘회사(1132개 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숫자의 종자상이 메이지 초기의 단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채소 생산이 확대되어 가는 다이쇼우 중기가 되면, 그 수는 3556개로 3배 이상 증가했다. 

그림2-3은 1918년에 간행된 <전국 종묘업자 인명록>(주38 農界新報社 編 「全国種苗業者人名録』 農界新報社, 1918년. 다만, 통계의 수치가 아니라 「인명록人名録』에서 산출한 수치이기에 『인명록』에 게재되지 않은 종자상이 있을 것도 예측된다.)을 바탕으로 종자상의 전국적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이에 의하면, 오키나와를 제하고 46도부현에서 종자상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표2-17에는 종자상이 90개 이상인 지역을 추출했다. 가장 많은 것은 아이치의 562개로, 이는 일본 전체의 16%를 차지하는 수치였다. 다음으로 기후 270개, 홋카이도 178개, 후쿠시마 175개, 나가노 173개, 도쿄 139개, 사이타마 127개, 아키타 127개, 이바라키 98개, 후쿠오카 98개, 효고 95개, 니이가타 92개의 순으로 이어진다. 이것에 전술했던 채소의 생산가액 및 작부면적의 순위와, 밭에서 차지하는 채소 농사의 비율(표2-6)을 조회하면, 4위의 후쿠시마와 5위의 나가노는 예외이지만, 기타 지역은 채소의 생산가액이나 작부면적이 상위의 지역이든지, 또는 밭에서 차지하는 채소 농사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도 높은 지역인 것이 판명된다. 채소 생산이 활발한 지역에 종자상이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경향일 것이다. 이처럼 종자상의 뚜렷한 증가나 전국적인 확산의 동향은 확대하는 종자 수요에 대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림2-3 1918년 종자상의 전국 분포

출전  : 農界新報社 編 『全国種苗業者人名録」 農界新報社, 1918년에서 작성

 

 

표2-17 종자상이 90개 이상인 지역과 채소 생산과의 상관관계

출전 : 農界新報社 編 『全国種苗業者人名録」 農界新報社, 1918년 및 표2-6에서 작성

주) *는 밭에 차지하는 채소 농사 비율이 전국 평균보다도 높은 지역. 

 

 

메이지 중기 이후 국가의 채소 육종 사업이 차차 폐지되어 채소 육종의 대부분이 민간으로 위임됨과 함께, 종자 수요가 증대·다양화해 나아가는 가운데 종자의 생산부터 소매까지를 단독으로 담당하는 종자상은 예외적으로, 종자의 생산·유통 과정에서 분업화가 진행되었다. 분업화란 도매, 채종 관리인, 중매상, 소매상과 같이 종자의 생산·유통 과정에서 각각의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위에 적은 <명부>에서는 종자상의 경영 형태 차이까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분업화에 의해 다이쇼우 중기까지 다양한 경영 형태의 종자상이 대도시 근교만이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나 군, 시, 읍, 마을에 1개~몇 개 단위로 속속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럼, 종자상의 분업화에 의하여 종자의 공급 체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개별 종자상의 실증 분석이 빠질 수 없다. 그래서 다음 장 이후에서는 경영 형태가 다른 세 유형의 종자상을 들어서 각각의 개별 경영 전개를 검토함과 함께, 분업화에 의한 종자 공급 체제의 실상을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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