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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전통 채소를 기르던 사람들, 종자상의 근대사 -1장

by 雜것 2025.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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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찍이 '종자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각지에서 재검토가 진행되는 '전통 채소'. 그 종자는 '고정종'이라 부르고, 이른바 재래종과도 현재 주류인 F1 품종과도 다르다.
이 고정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태평양 전쟁 전기에 걸쳐 채소 종자의 육종, 생산, 유통에 관여한 '종자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1. 일본의 채소 생산을 지탱하던 '종자상'

 

1) 지금 ,주목받는 전통 채소

 

전통 채소는 고정종 채소

요즘 '전통 채소'가 주목을 모으고 있다. '전통 채소'란 각지에서 옛날부터 재배되던 채소 가운데 지방의 자치체나 생산·유통에 관련된 사람들이 재배 지역이나 재배력 등에 독자 조건을 마련해 그들의 보존과 특산품화를 목표로 할 경우에 이와 같은 명칭으로 부른다. 

아시자와芦澤(2002)는 이 '전통 채소'에 대해 "건너온 채소가 일본 각지에 전파·순화되어 각각의 지역에서 그곳의 기후·토양·식생활·지역적 행사 등에 대응하도록 선발·고정이 반복됨에 따라 성립된 품종"이라고 정의한다.(주1 昔澤正和 「日本の地方野菜・地方品種の成立」 タキイ種苗株式会社出版部 編 『地方野菜大全』 農山漁村文化協会, 2002년, 11-12쪽) 이른바 '고정종'이라 불리는 것으로, 고도 경제 성장기 이전까지 일본의 채소는 대부분 고정종이 차지하고 있었다. 또, 최근 간행되고 있는 전통 채소 관련한 많은 서적에도 대체로 비슷하게 정의되어 있어, 필자도 '전통 채소=고정종'이라는 정의가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고정종 채소는 매년 재배하며 씨앗을 받고, 또 그 종자를 심음으로써 대대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고정종 채소를 농사지어 온 지역에서는 그 유지와 생산의 증대를 위해 다시 한번 힘껏 몰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쿄도의 "에도 도쿄 채소"는 에도 시기부터 시작되는 도쿄의 채소 문화를 계승함과 함께 종묘의 대부분이 자급 또는 인근의 종묘상에게 확보되어 있던 1965년 무렵까지의 이른바 재래종 또는 재래의 재배법 등에서 유래한 채소로 정의하며, 2015년 9월 현재 42개 품목을 인정하고 있다.(주2 「江戸東京野菜」http://www.tokyo-ja.or.jp/edo/edoyasai_index.html에 따름. 최종 접속일: 2015년 9월) 이시카와현石川県의 "카가加賀 채소"는 1945년 이전부터 재배되어 현재도 주로 카나자와金沢에서 재배되는 채소로, 15개 품목을 인정하고 있다.(주3 「"いいね金沢" 加賀野菜」http://www.kanazawa-kagayasai.com/에 따름. 최종 접속일: 2015년 7월) 교토부의 "교토 채소"는 메이지 이전부터 교토부에 도입되어 재배되던 죽순을 포함하고 버섯을 제외한 채소로, 현재 재배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멸종된 채소를 포함해 41개 품목을 인정하고 있다.(주4  JA京都 「京野菜」http://www.jakyoto.com/jakyoto/kyoyasai/에 따름. 최종 접속일: 2015년 7월) 이밖에도 야마가타현山形県의 "야마가타 전통 채소", 후쿠이현福井県의 "후쿠이 채소", 나가노현長野県의 "신슈信州 채소", 아이치현愛知県의 "아이치 전통 채소", 오사카부의 "나니와 채소" 등은 대대적으로 선전되어 해마다 생산량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고도 경제 성장기 이후에 보급된 F1 품종에 의한 획일화된 채소 생산에 대한 반동으로, 1990년대 이후 지방 시대, 읍 활성화, 마을 활성화라고 하는 지역 활성화를 부르짓게 되자 지역 자원을 재평가하는 기운이 높아져 관민 일체로 고정종 채소를 '전통 채소'로 부활시키려는 대처로 이어졌다. 여기에서는 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일본 채소 생산의 역사적 전개를 정리하려 한다. 

 

 

 

 

2) 채소 생산의 3가지 신기원

 

재래종에서 고정종으로

 

그림1-1처럼 일본에서 채소 생산의 발전에는 크게 3가지 신기원이 있었다. 첫번째 신기원은 교토, 오사카, 에도의 3대 도시 주변에서 상품 채소 생산이 개시된 에도 시대 중후기, 두번째 신기원은 각지의 도시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한 채소 수요의 확대, 수송 원예의 발달이나 청과물 시장의 정비에 따른 채소 생산의 상품화가 진전되었던 메이지 중후기부터 쇼와 태평양 전쟁 전기, 세번째 신기원은 1966년에 성립된 채소 지정 산지 제도에 기반한 대산지가 형성되었던 고도 경제 성장기 이후이다. 

 

첫번째 에도 시대 중후기 3대 도시 주변에서 상품 채소 생산의 개시
두번째 메이지 중후기~쇼와 태평양 전쟁 전기 채소 수요 확대
수송 원예, 청과물 시장의 발달
→채소 생산의 상품화 진전
→각 도시 근교에 채소 산지 형성
=고정종의 보급
세번째 고도 경제 성장기 이후 지정 산지 제도(1966)
→채소의 대산지화
=F1 품종의 보급

그림1-1 일본 채소 생산의 3대 신기원

 

 

채소 육종은 첫번째 신기원인 에도 시대 중후기의 상품 채소 생산의 개시와 함께 시작되었다. 도쿄의 네리마練馬 무, 아이치의 미야시게宮重 무, 오사카의 텐마天満 무, 교토의 쇼고인聖護院 무, 아이치愛知・기후岐阜의 모리구치守口 무, 가고시마의 사쿠라지마桜島 무와 같은 각지의 토지 조건에 맞춘 개성적인 채소가 탄생한 것도 이 무렵이라 한다(그림1-2). 그러나 이 시기에 탄생한 개성적인 채소는 그 대부분이 '재래종'이었다. 재래종은 재배하는 사람이나 재배하는 토지에 따라서 모양이나 크기가 고르지 않게 되는 것이 단점이다. 에도 시대의 채소 육종은 농민의 경험지식에 의한 바가 많고, 모양이나 크기를 고르게 하는 기술 체계, 즉 '고정종'을 육성하는 기술의 체계화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뒤의 칼럼 참조). 

 

그림1-2 각지의 토지 조건에 맞춘 개성적인 무 품종   출전: 후쿠이 이사오福井功 『東京都 練馬 地方における 「練馬大根」の成立の過程と変遷」, 春陽歴研社、1991년에서 가필 수정

 

 

재래종으로부터 고정종을 육성하는 기술 체계가 확립하는 건 두번째 신기원이었다. 메이지 중후기 이후 근대 도시가 형성되고, 도시 인구가 증가하자 채소의 수요가 확대되어 채소 생산의 상품화가 진행된다. 각지에 채소 시장이 성립하자, 출하되는 채소의 균질성이 요구되어서 채소의 육종에도 새로운 대응이 독촉되었다. 그래서 모양이나 크기가 고르지 않은 재래종에서, 모양이나 크기가 고른 품종을 선발·고정하는 기술이 체계화되어 고정종을 만들어 냈다. 즉, 일본에서 제1차 채소 산지의 형성기라고도 할 만한 두번째 신기원이 고정종 채소가 재배되어 대량으로 생산, 유통되는 시기인 것이다. 

 

 

 

고정종에서 F1 품종으

1966년에 채소 산지 출하 안정법에 기초한 채소 지정 산지 제도가 성립되자, 채소 생산은 더욱 새로운 무대로 이행하게 된다. 채소 지정 산지 제도란 지정된 채소의 출하 수량의 1/2 이상을 지정 소비 지역에 출하할 의무를 지우는 대신에, 출하 품목의 가격이 일정 이하로 하락한 경우에 채소 공급 안정 기금을 통해 생산자 보조금이 교부되는 제도이다. 이 때문에 한 종류의 채소 대산지화가 진행됨과 함께, 'F1 품종'의 보급도 급속히 진행된다. F1 품종은 종래의 고정종에 비하여 현격히 재배가 쉽고, 수량성도 우수하며, 모양이나 품질도 균질하다. 시장 유통 기구가 정비되어 단품·대량 생산·대량 공급이 더욱 요구되자, 재배가 용이하고 수량이 많으며 생산면이나 시장 유통면에서도 취급하기 쉬운 F1 품종이 널리 중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역에 뿌리내린 독특한 모양이나 풍미를 지닌 고정종 채소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예를 들면, 무에서는 대부분의 품종군이 사라지고, 미야시게를 기간으로 육성된 아오쿠비青首 무가 무 수요의 대부분을 충족시키게 되었다. 이 F1 품종의 보급과 품종의 단순화는 지금까지 계승되어 오던 고정종 채소의 품종 육성이나 채종 기술도 쇠퇴시켰다. 

 

 

 

3) 고정종을 낳고, 기르고, 퍼뜨린 '종자상'

이처럼 에도 시대부터 고도 경제 성장기까지의 채소 생산을 통해 보면, 에도 시대 중기부터 메이지 초기까지는 '재래종'의 시대, 메이지 후기부터 1897년 무렵까지는 '고정종'의 시대, 1965년 이후는 'F1 품종'의 시대라고 분류할 수 있다. 채소 생산이 발전하는 배경에는 그것을 지탱할 육종 기술의 진보가 늘 있었다. 더 강조해서 말하면, 육종 기술의 진보 없이 일본의 채소 생산의 발전은 실현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채소 육종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면서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고정종 채소를 낳고, 기르고, 퍼뜨린 '종자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종자상이란 주로 채소나 화초 종자의 육종부터 생산과 유통까지를 담당하는 업종으로, 사카타サカタ 종자나 타키이タキイ 종묘 등으로 대표되는 현재 종묘회사의 전신이다. 2014년 4월 1일 시점으로, 업계 단체인 일본 종묘협회의 정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종묘회사는 전국에 1132사(주5 社団法人 日本種苗協会의 공식 홈페이지 http://www.jasta.or.jp/에 따름. 최종 접속일: 2015년 7월)가 존재한다. 이 가운데 쇼와 태평양 전쟁 전기까지 창업한 것이 판명되는 대표적 종묘회사를 예기한 것이 표1-1이다. 쇼와 태평양 전쟁 전기까지는 법인화된 종묘회사는 매우 희소하고, 대다수가 개인 상점이었던 걸 알 수 있다. 카네코金子(1991)에 의하면, 당시의 종자업자는 자신을 "종자상(タネヤ)"이라 부르는 것과 함께 고객에게서도 "종자상"이라고 불리며 친숙하게 지냈다고 한다.(주6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 -日本種苗業界の歴史- 明治・大正篤』 カネコ種苗株式会社, 1991년, 348-351쪽) 여기에서 별기한 이외에도 종묘업계는 대기업 업체부터 읍내의 소매점까지 오랜 업력을 가진 회사가 많고, 창업 100년 이상의 노포 회사도 적지 않다. 이러한 종자상이 옛날에는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다이쇼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 그리고 현재에도 일본의 채소 육종을 견인하는 담당자로 활약해 왔다.

 

그럼 '종자상은 어떻게 고정종 채소를 낳고, 기르고, 퍼뜨려 왔을까?' 이것이 필자의 문제 관심의 원점으로, 여기부터 종자상 연구가 시작되었다.   

 

 

표1-1 쇼와 초기까지 창업한 종묘회사의 일례

시기
구분
창업년 창업년의 이름 현재 사명 소재지(본사)
에도 1688~1704
1804~1818
1809
1819
1835
1852
1861
1866
越部浅五郎 상점
山田清之助
赤松久兵衛
大原乙次郎 상점
瀧井治三郎 상점
鈴木政五郎 상점
松下仁右衛門
高山 종묘원
みかど協和(株)
株山清 상점
赤松 종묘(株)
大原 종묘(株)
タキイ 종묘(株)
(株)日本農林社
(有)松下 종묘점
(株)タカヤマシード
치바현
이와테현
오사카부
교토부
교토부
도쿄도
이시카와현
교토부
메이지 1868
1873
1879
1883
1885
1890
1895
1902
1909
種佐
米屋 36지점
アサヒ 농원
松永 종묘점
松永金次郎
野崎徳四郎
(有)横浜植木 상회
金子才十郎 상점
불명
前川 상점
高田 종묘(株)
(株)米三
(株)アサヒ 농원
松永 종묘(株)
(株)野崎 채종장
横浜植木(株)
カネコ 종묘(株)
野原 종묘(株)
(株)高知前川 종묘
오사카부
니이가타현
아이치현
아이치현
아이치현
카나가와현
군마현
사이타마현
고치현
다이쇼우 1913
1916
1917
1918
1920
1922
1926
坂田 농원
本枡屋
時田源三郎 상점
田中 농원
大和 농원
渡辺穎二
水澤 종자점
(株)サカタのタネ
(有)石川鉄造 종묘점
トキタ 종묘(株)
(株)田中 농원
(株)大和 농원
(株)渡辺 채종장
(株)水沢 종묘점
카나가와현
시즈오카현
사이타마현
후쿠오카현
나라현
미야기현
미야기현
쇼와
전쟁 전
1927
1928
1931
불명
渡辺 농원
(合)油木 상점
植松種苗緑化(株)
渡辺農事(株)
(株)武蔵野 종묘원
도쿄도
치바현
도쿄도

출전: 「일반사단법인 일본 종묘협회 역원 명부」 (https://www.jasta.or.jp/about/officer_list.html、최종 접속일:2015년 9월)、각 회사 홈페이지 및 회사 역사, 필자에 의한 청취 조사, 農界新報社 편집 「전국 종묘업자 인명록」, 農界新報社, 1918년, 金子才十郎 「種子のロマンー日本種苗業界の歴史 一明治・大正篇」, カネコ 種苗株式会社、1991년에서 작성

 

 


에도 시대의 '종자 선발'

에도 시대의 농업 기술을 기록한 <근세 농서>에는 토양, 비료, 품종 개량, 작부 방법, 방충법, 농업 경영 등의 다채로운 농업 기술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도 품종 개량은 중요한 주제로 에도 시대 농업 기술이 진보한 점 가운데 하나는 작물의 종자를 잘 조사해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종자를 선발하는 지표라 여겨지는 사고방식이 '초목 자웅설'이다.
초목 자웅설(다음부터 자웅설)이란 음양론을 작물의 형태에 적용한 것으로, 인간이나 동물에게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의 종자나 개체에도 암컷과 수컷의 구별이 있다고 하는 설이다. 암씨앗과 숫씨앗, 암모와 숫모, 암그루와 숫그루, 암나무와 숫나무처럼 일정 기준에 기반하여 작물을 암수로 구별하고, 재배의 목적에 따라서 모든 걸 선택하면 품질이 우수하고 다량의 수확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 자웅설이 최초로 등장한 농서가 1697년에 간행된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崎安貞의 <농업전서>이다. 
미야자키 야스사다는 이 책 안에서 "벼에서는 알맞게 잘 익은 이삭, 곧 암이삭을 골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암이삭이란 것은 나락이 많이 달리고, 줄기나 잎이 부드러우며, 마디가 길지 않은 이삭을 말한다"라는 생각을 보여준다. 즉, 암이삭이라 말하는 이삭의 나락을 종자로 하면 좋다고 했다. 이후 벼의 자웅설이 기타 농작물이나 초목 일반까지 통용되어, 자웅설은 대부분의 농서에 인용된다. 그중에서도 1828년에 미야오이 야스오宮負定雄에 의해 간행된 33종류의 작물 암수 구별을 도해한 1장 인쇄물인 <초목찬종록草木撰種録>은 연간 1800부의 매상을 자랑하는 베스트셀러 농서로서 많은 농민에게 보급되었다(사진1). <초목찬종록>의 표제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초목 찬종록 남녀의 그림"라 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천지 사이에 이른바 만물도 널리 남녀의 차별이 있고, 오곡 죽목에 이르기까지 여성 종자를 심으면 막대한 이익이다"라고 적혀 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남녀의 차이가 있어, 곡물부터 대나무와 나무까지 여성 종자를 심으면 풍작을 이룬다고 한다.
대부분의 자웅설에서는 여성이 아이를 낳는 이미지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양질의 종자를 '여성'이라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남성' 종자를 선택하는 걸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1832년에 간행된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초목 6부部 경종법>에서는 "뿌리채소류의 종자는 수컷의 종자를 심어야 한다. 수컷은 곧게 자라는 성질이 있고, 암컷은 옆으로 퍼지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강한 남성의 종자를 양질이라 하는 설이 나타나 있다(사진2). 
그러나 자웅설은 1832년에 간행된 오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의 <재종방부록再種方附録>에서 그 과학성이 처음으로 부정된다. 오오쿠라 나가츠네는 현미경으로 벼꽃의 수분을 관찰하고, 벼에는 자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외에도 막부 말기의 농서에는 자신의 벼농사 시험을 근거로 자웅설을 비판하는 것도 많다. 그런데, 자웅설은 널리 농민에게 퍼져 많은 지지자를 획득해, 벼농사 생산 현장에서는 1890년대까지 농민의 지배적인 품종 설별 의식이었다. 자웅설은 생물학적으로는 확실히 틀린 사고방식이었지만, 그 선종 기술로서의 실용성, 즉 작물의 형질에 따른 채종법에 대해서는 오오쿠라 나가츠네도 "남녀가 있다는 설은 틀리지만, 종자 선택 방법으로는 유효하다"고 인정하여, 농민이 우량한 종자를 선택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가 되면일본의 육종 사업은 메이지 초년(1868)의 미타三田 육종장 설치를 시작으로 하는 권농 정책의 일환으로 개시되어, 이후 벼에 대해서는 요코이 토키요시横井時敬가 부르짖었던 종자를 일정한 비중의 소금물에 넣어 뜬 것을 제거하고, 가라앉은 것을 종자로 선택하는 '소금물가리기'가 보급됨과 함께, 1900년 전후 이후에는 공적 기관에서 개량 품종이 육성되어 갔는데, 채소에 대해서는 자웅설을 기반으로 한 채종법이 그 뒤에도 민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곧, 메이지 이후의 채소 육종은 노농의 계보를 잇는 종자상을 중심으로, 잡다한 '재래종' 가운데 우량 형질의 적극적인 선발과 고정화를 도모해 상품 채소 생산이 진전하는 메이지 중후기 이후의 '고정종' 시대를 맞이한다.


〈참고 문헌〉
川名登 「農業要集・草木撰種録解題(1)」 『日本農業全集』 第3巻, 農山漁村文化協会, 1979 
田中耕司 「農業要集・草木撰種録解題(2)」 「日本農業全集』 第3巻、農山漁村文化協会, 1979
張基善 「近世後期~明治前期における草木雌雄説と選種」 「歴史』(100), 東北史学会, 2003
佐藤常雄 「品種改良と奇品 -農学の発展と園芸文化」 『週刊朝日百科75 日本の歴史近世 II-5 本草の世界と鉱山町』 朝日新聞社, 2003 

사진1 초목찬종록 남녀의 그림

출전 : 미야오이 야스오宮負定雄 「草木撰種録』 1828년 (나가노현 현립 나가노 도서관 소장)

 

 

사진2 숫무(좌), 암무(우)

출전 : 佐藤信淵 『草木六部耕種法』 1832년 (이타바시구板橋区 구립 향토자료관 소장)

 

 

 

 

 

2. 종자상 사료의 발견

채소 생산의 전제가 되는 채소 종자의 육종·생산·유통 실태에 대해서는 고도 경제 성장기 이후에도 그 이전 시대에도 기존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것은 담당자 대부분이 민간의 종묘점이고, 그 후신은 민간 회사였기 때문에 경영에 관한 기록 정보가 일반에 공개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각지의 향토자료관에 종자상의 사료가 기증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함과 함께, 각지의 종묘회사를 직접 방문해 사료의 소재에 대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방문처의 대부분은 경영주가 바뀔 때나 가게를 개축할 때 사료를 폐기해 버린 사례가 많았다. 종자상의 사료를 발견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지만, 끈질기게 조사를 진행하면서 3곳의 종자상 사료를 발견했다.

 

 

에노모토 타이키치複本泰吉 집안 문서

첫 번째 사료는 토시마구豊島区 향토자료관에 기증된 에노모토 타이키치 집안 문서이다. 에노모토 집안 문서는 1991년 12월부터 자료관 동호회  고문서 서클인 에노몬회エノモン会에 의해 착실히 사료 정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정보를 입수한 필자는 향토자료관에 사료 열람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그러나 필자가 문의한 2007년 시점에 전체 사료의 2/3에 해당하는 약 3만5000점의 사료 정리가 종료되어 있는 단계였다. 사료 정리에는 목록 카드가 작성되어 이 카드에 사료 번호나 사료 정보 등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목록의 데이터베이스화는 착수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료 정리가 종료된 3만5000점 중에서 메이지 말기부터 쇼와 초기까지의 시기로 한정한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필자가 담당했다. 약 1년에 걸쳐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5시쯤까지 자료관 안의 작은 책상을 빌려 거기에 PC를 반입하고 목록의 데이터베이스화를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약 1만4000점의 방대한 사료 목록의 데이터베이스를 완성시켰다.

에노모토 타이키치는 상호 카네토カネト '에노모토 토메키치榎本留吉 상점'의 5대째로, 초대 토메키치 이래 백 몇십년에 걸쳐 도쿄부 기타토시마군北豊島郡 스가모무라巣鴨村(현 토시마구 니시스가모)에서 종자상을 경영했다. 초대 토메키치는 도교부 키타토시마군 키타노가와무라滝野川村의 종자상 창시자의 한 사람인 에노모토 쥬우자에몬榎本重左衛門의 셋째 아들로, 1844년 분가를 계기로 본가의 쥬자에몬은 종자상을 그만두고 토메키치가 뒤를 이었다.(주7 4대 榎本留吉 『榎本の思い出集』 4대 榎本留吉, 1981년, 7-8쪽) 키타토시마군은 에도 시대부터 채소 종자 생산이 진전되어 가도 나카센도우中山道를 따라서 종자 도매상가가 형성된 지역으로, 에노모토 집안은 그 가운데 한 집에 해당하는 대규모 종자 도매상이었다. 사료 내용은 종자 거래에 관한 통신 서간, 경영 장부, 종묘 카탈로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사진1-1). 이들 사료는 메이지 말기부터 태평양전쟁 이후 부흥기에 걸쳐 한 종자상의 경영 내용을 추구할 수 있는 사료로서 매우 가치가 높다.  

 

 

 

사진 1-1 에노모토 타이키치 집안 문서(토시마구 향토자료관 소장). 도쿄부 스가모무라(당시)에서 백 몇십년에 걸쳐 종자상을 경영했던 '에노모토 토메키치 상점'의 문서류로, 종자의 거래에 관한 귀중한 사료이다. 

 

 

 

 

노구치 헤이이치 집안 문서

두 번째 사료는 도교부 다마군 쵸우후마치調布町(현 쵸우후시 토비타큐우飛田給)의 노구치 헤이이치 집안 문서이다. 노구치 집안 문서는 2003년 노구치 집안 소장자료 조사단에 의해 사료 정리가 개시되어, 2009년에 사료 정리가 종료되었기에, 소장자의 양해를 얻어 곧바로 열람할 수 있었다. 노구치 집안 문서는 1464점에 달하고, 그 내용은 농업·노점업 사료, 지역사회 관계 사료, 의례 관계 사료, 신앙 관계 사료, 교육 관계 사료, 생활 관계 사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그 가운데 종자상에 관계되는 사료는 1890년부터 1940년까지 32점 존재했다(주8 種村威史 「해제」 『野口平一家文書目錄』 비매품, 2009년)(사진1-2). 

 

 

사진 1-2 노구치 헤이이치 집안 문서(노구치 헤이이치 집안 소장)

도쿄부 쵸우후마치(당시)에서 상층의 농민으로, 노점상이기도 했던 노구치 집안의 문서류. 종자업에 관한 사료는 아직 손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노구치 집안 역대 당주는 쵸우후 지역에서 공직을 역임함과 함께 마을 안에서 둘째가게 토지를 소유하는 등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상층의 농민이었다. 또한 옛 후다고슈쿠布田五宿 지역의 노점상 집단 '타치바나야橘屋 일가一家'의 우두머리를 대대로 맡아, 일가를 통솔함과 동시에 다른 지역에 출점하는 상인에 대한 갖가지 보살핌이나, 잿날縁日·장날에 가게를 내는 상인들의 장소 배정 등을 수행했다. 노구치 집안은 지금까지 노점상으로서의 기능이 주목되었기 때문에, 종자업에 관한 사료는 이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타카하시 히로시高橋熙 집안 문서

 

세 번째 사료는 니이가타현 기타칸바라군北蒲原郡 쿠즈즈카마치葛塚町(현 니이가타시 키타구)에서 현재도 종자 소매상을 경영하는(사진1-3) 타카하시 히로시 집안 문서이다. 타카하시 집안의 사료 발견에는 첫 번째 사료의 제공자인 에노모토 타이키치 씨가 깊이 관계한다. 타카하시 집안은 에노모토 집안의 오랜 단골이었다. 필자가 에노모토 씨와 이야기하다가 "예전에 타카하시 집안에서 옛 사료를 보여준 적이 있다"라고 들어, 에노모토 씨가 타카하시 히로시 씨를 소개해 주셨다. 필자가 타카하시 집안을 방문한 바, 가게의 안쪽에서 많은 사료가 발견되었다. 이 사료를 일괄하여 받아, 2010년에 필자가 당시 소장하던 연구실에서 정리해 목록을 작성했다. 

 

사진1-3 기타칸바라군 쿠즈즈카마치(현 니이가타시 키타구)에서 현재도 종자 소매상을 경영하는 타카하시 니시치高橋仁七 종묘점

 

 

 

정리 공정으로는 우선 보존도가 높은 중성지 봉투를 준비하고, 거기에 사료를 1점씩 수납한다. 봉투에는 '사료의 표제' '작성 연대' '작성자·발송인' '수취인' '형상' 등을 기록하고, 정리번호를 부기한다. 다음으로 봉투에 기록한 모든 항목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데이터베이스 목록을 작성한다. 그리고 정리번호에 따라 문서함에 넣어 보관했다. 정리한 492점의 사료는 타카하시 집안의 양해를 얻어 현재는 타카하시 집안 인근에 있는 니이가타시 키타구 향토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타카하시 히로시 씨는 현 '타카하시 니시치 종묘점'의 6대째로, 1830년부터 종자 행상 판매를 개시했다.(주9 히로시 씨에게 청취 조사함) 타카하시 집안의 경영은 종자 소매상 중에서도 '행상인에서 상설 점포로'라는 전개를 거치고, 이들 사료는 한 종자 소매상의 경영 발전을 추구할 수 있는 사료임과 동시에 해당 지역이 채소 산지로서 형성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함께 갖추고 있다. 더욱이 타카하시 집안에서는 다이쇼우 시기 이후에 전개되는 판매 형태가 1960년대까지 계승되었기에, 현 당주인 히로시 씨를 대상으로 한 청취 조사에서 얻을 수 있는 식견도 중요했다.

 

이외에도 이타바시구板橋区 구립 향토자료관이 소장한 이세마고伊勢孫 문서, 네리마구練馬区 향토자료실(현 네리마구 구립 샤쿠지이石神井 공원 고향문화관)이 사료 정리를 담당했던 다나카 기요아키田中清昭 집안 문서,(주10 다나카 집안 문서 조사는 2001년도 특별전 「네리마의 상품작물과 절임練馬の商品作物と漬物 -에도・도쿄를 지탱한 특산물」의 성과이다. 이 집안 문서는 449점 존재하고, 그 사료는 현재 다나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練馬区郷土資料室 編 『練馬の種子屋』 練馬区教育委員会, 2002년) 무사시코쿠분지武蔵国分寺 터 자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오야나기 미노루小柳實 집안 문서(주11 오야나기 집안 문서는 1981~1982년에 国分寺 시립 모토마치もとまち 공민관의 자주 그룹 '나와 근대사의 모임[私と近代史の会]이 조사하고, 현재는 武蔵国分寺 터 자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집안 문서는 1792점에 이르고, 농업 경영에 관한 문서는 93점 존재한다[国分寺市史編さん委員会 編 『国分寺市史料目録(III)」 国分寺市, 1994년, 10쪽]) 등의 사료를 보충적으로 이용해 분석을 진행했다.
사료 조사는 사료의 발견부터 정리까지 장기간에 걸쳐 매우 꾸준하고 노력이 많이 드는 작업의 반복이다. 발견한 사료의 양에 따라 몇 년에서 몇십 년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종자상 연구를 시작한 지 올해로 8년째가 되는데, 그 70% 이상의 세월은 사료의 탐색과 정리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들여서라도, 그 안에서 역사의 통설에 재검토를 촉구하는 새로운 '발견'을 만날지도 모른다. 종자상 사료는 바로, 지금까지의 근대 농업사의 모습을 재검토하는 데에 다가서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종자상의 장사 도구

역사 자료 안에는 문자로 남긴 역사, 이른바 '문헌 자료'와 문자는 아니지만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것, 이른바 '민속 자료'가 있다. 여기에는 메이지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에 걸쳐서 종자상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민속 자료인 장사 도구의 일부를 소개하겠다.

◆종자 장롱
아래의 사진1은 판매용 종자를 정리해 넣는 종자 장롱이다. 이 장롱에는 거래량이 비교적 적은 종자를 넣고, 거래량이 많은 종자는 차 상자(茶箱) 같은 상자에 넣으며, 명찰을 세워 가게 앞에 진열하고 양을 달아 파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종자 장롱은 상하 합쳐서 58개의 서랍이 있고, 종자가 서랍의 틈으로 떨어져 다른 종자와 섞이지 않도록 제조된 특별 주문품이다.

◆검사봉, 종자 됫박, 종자 통
사진2는 가마니에 꽂아서 종자를 빼내어 검사할 때 썼던 검사봉과 종자의 분량을 계량하는 종자 됫박이다. 당시는 척관법의 됫박을 사용했는데, 1958년에 미터법의 됫박으로 전환되고나서는 1작=20㎖, 1홉=2㎗, 1되=2ℓ로 환산한다. 사진3은 1말 통이다. 거래량이 많은 종자는 5되 통이나 1말 통 등이 사용되었다.

◆채소의 표본병
사진4는 포르말린 담근 채소의 견본을 넣는 견본병이다. 채소는 품평회 등에서 수상한 것을 견본으로 했다. 종자는 그것이 성장해 수확함에 따라 비로소 상품으로서 가치를 찾을 수 있어서, 종자 자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품질의 우열을 판단하는 일은 어렵다. 그 때문에 그 종자를 사용해 재배한 채소를 포르말린에 담가 보존하는 것으로 판매하고 있는 종자가 양질임을 증명했다. 그 때문에 표본병은 점포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놓아 두었다고 한다.

◆도장함
사진5는 도장함으로, 325매의 영업용 도장이 6면의 회전하는 함에 수납되어 있다. 도장은 '네리마 무'나 '호우료우方領 무' 등 채소나 화초의 품종명, '10밀리리터' 등 분량을 표시한 것, '극조생 촉성용' 등 종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 '선불금' 등 영업에 관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부나 서간 등의 문헌 자료만이 아니라, 이러한 민속 자료에서도 당시 종자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板橋区立郷土資料館 編 『江戸・東京の四季菜 ー商品作物と漬物・東京をささえた特産物ー』 板橋区立郷土資料館, 2001
練馬区立郷土資料室 編 『練馬の種子屋』 練馬区教育委員会, 2002
豊島区立郷土資料館 『一粒入魂!-日本の農業をささえた種子屋-』 豊島区, 2008

사진1 종자 장롱. 야마구치 야스히사山口安久 집안 문서(이타바시구 구립 향토자료관 소장)

 

사진2 종자 됫박과 검사봉(좌상). 출전:종자 됫박; 야마구치 야스히사 집안 문(이타바시구 구립 향토자료관 소장), 검사봉(네리마구練馬区 교육위원회 소장)

 

사진3 1말 통. 출전 : 에노모토 타이키치 집안 문서(토시마구 구립 향토자료관 소장)

사진4 센자이千歳 배추(상)와 오오쿠라大蔵 무(하). 출전 : 네리마구 구립 샤쿠지이 공원 고향문화관 소장

사진5. 도장함. 출전 : 네리마구 구립 샤쿠지이 공원 고향문화관 소장

 

 

 

 

 

3. 이 책의 구성

 

위와 같은 종자상의 1차 자료를 이용해 이 책에서는 채소의 종자 수요가 확대되는 메이지 중후기 이후의 각 종자상의 전개와 역할을 그리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그림1-3). 

그림1-3 이 책의 구성

 

 

우선 2장에서는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시대, 곧 메이지 중후기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에 걸쳐 채소 생산과 종자 생산에 대해 다루었다.  이는 3장 이후에 각 종자상의 전개를 논의하기에 앞서 그 배경이 되는 채소 생산과 종자 수요의 전국적인 동향을 파악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 메이지 이후의 채소 생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선행 연구에서도 그 확대와 다양화의 사실을 지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전국적인 통계 수치의 분석이나, 채소 생산에 빠질 수 없는 종자 생산과의 관련에 대하여 아직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그것은 채소 생산이나 종자 생산의 동향을 보여주는 통계 자료가 이외의 농작물이나 공업제품 등에 비해 매우 적은 것도 관계가 있다. 따라서 본래라면 메이지 초기부터 쇼와 태평양전쟁 전기의 수치를 연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나, 어느 시기에 한정된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그 때문에 <농상무성 통계표>의 데이터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수치는 농림성 농무국 편찬 <소채 및 과수 주요 품종의 분포 조사(蔬菜及果樹主要品種ノ分布調查)> <소채 및 과수 재배의 상황(蔬菜及果樹栽培之状況)> <소채 및 과수의 종묘에 관한 조사(蔬菜及果ノ種苗ニ関スル調査)> 등 다양한 통계 자료를 이용해 분석한다.

2장을 바탕으로 3장부터 5장이 종자상의 분석이다. 분석에서는 3가지 시점에서 종자상의 특질을 유출하려 시도했다. 첫 번째 시점은 종자 수요의 확대와 함께 다양화되는 종자상의 경영 형태의 차이를 주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시점은 종자 수요가 확대되는 앞 단계, 곧 종자상이 등장하는 에도 시대 중후기부터 메이지 초기도 시야에 넣는 것이다. 세 번째 시점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선행 연구에서 대상이 되어 왔던 대도시 근교의 밭농사 지대에 더해,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지방 도시 근교의 무논 지대에도 분석 대상 지역을 넓힌 것이다. 이상의 3가지 시점에서 행한 분석을 가능케 하고자 3장에서는 도쿄부 기타토시마군 스가모무라의 '종자 도매'를, 4장에서는 도쿄부 기타타마군 쵸우후마치의 '채종 관리인'을, 5장에서는 니이가타현 기타캄바라군 쿠즈즈카마치의 '종자 소매상'을 다룬다. 종자상 각각의 경영 진전을 해명할 때에도 지역사라는 시점을 중시하면서도 종자상 서로의 관계성을 항상 의식하는 것을 유의한다.

이상 2장부터 5장의 분석을 통해 4장에서는 총괄하여 근대 종자상의 전개와 공적을 고찰함과 함께, 지금까지 이루어진 선행 연구를 정리하고, 종자상 연구의 의의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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