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식에 빠질 수 없는 된장과 간장
된장과 간장의 뿌리는 아스카, 나라 시대에 중국이나 조선반도에서 전해졌던 "장醬 과 히시오ひしお"이다. 장이란 곡물이나 고기 또는 채소를 소금절임하여 발효시킨 것을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콩, 쌀, 보리 등에 누룩과 소금을 혼합해 발효시킨 곡장穀醬을 조미료로 사용해 왔다. 나라의 도읍지에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장을 만드는 장원醬院이 있고, 동서의 시장에서도 장이 팔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된장과 간장은 일정식의 맛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조미료인데, 그 원료인 대두는 일본에 자생했던 것이 아니라 서역부터 중국과 조선반도를 경유해 전래되었다. 만약 대두가 전래되지 않았다면 된장도, 간장도 탄생하지 않아 일정식의 맛은 지금과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대두의 알이 아직 으깨지지 않고 남아 있는 미숙한 장, 즉 미장未醬이 미장味醬, 미회味會로 변화해 된장(미소味噌)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 같다. 찐 콩이나 밀, 쌀 등을 누룩과 함께 소금절임을 하여 발효시킨 된장은 원래는 혀끝으로 맛보는 데 사용하여, 군량에도 휴대하고 있었다. 그 된장을 된장조림 등 조리에 사용하게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부터이고,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 된장국으로 만들어 마시는 일도 시작했다. 그 이후로 일정식에는 된장을 쓴 무침, 조림, 찌개, 구이 등이 많다.
대두를 쪄서 누룩과 소금을 더해 발효시킨 된장은 농가에서 간단히 만들 수 있는데, 상인이나 장인이 많은 에도의 마을에서는 된장가게에서 구입했다. 에도에서 인기 있던 된장은 대두와 쌀누룩을 1년에 걸쳐 발효시킨 적갈색의 짠 센다이仙台 된장과 쌀누룩을 많이 사용해 한 달 안 되게 발효시킨 염분이 적은 에도 단 된장이었다. 에도 사람은 매일 된장국을 빼놓지 않고 마셔 머위 된장, 유자 된장, 와사비 된장 등의 반죽 된장을 만들어 밑반찬으로 삼았다. 된장국을 '오미오츠케御御御付け' 또는 '오츠케御付け'라고 말한 것은 밥에 곁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된장은 옛날부터 '자화자찬(手前味噌)'이라 말할 만큼 지역이나 가정에 따라 선호가 달라, 된장을 만드는 공장은 전국에 2000채나 있고 제조되는 된장의 종류는 100종류를 넘는다. 누룩의 원료에 따라서 쌀된장, 보리된장, 콩된장의 구별이 있는데, 생산량의 80%는 쌀누룩을 쓰는 쌀된장이고, 신슈信州 된장이나 센다이 된장이 그것이다. 교토의 사이교西京 된장은 쌀누룩을 특히 많이 사용한 단맛의 흰된장이고, 규슈와 시코쿠, 츄고쿠 지방에서는 보리된장이 만들어진다. 아이치愛知, 미에三重, 기후岐阜의 도우카이東海 3현에서만 만들고 있는 것은 쌉쌀한 콩된장으로, 핫쵸八丁 된장은 그 대표이다.
된장 10그램과 두부와 미역을 넣은 된장국, 한 그릇에는 약 45킬로칼로리의 영양이 있는데, 소금이 1-2그램 있는 것이 신경쓰인다. 그러나 전 국립 암센터의 히라야마 다케시平山雄 박사에 의한 13년 동안의 역학조사에 따르면, 된장국을 매일 마시는 남성의 위암에 의한 사망률은 마시지 않은 사람보다 명백히 낮다고 한다.
된장국은 쌀밥과의 상성도 좋기에 '밥과 두부의 된장국'이 조식의 정석이었는데,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다. 된장의 소비량은 최근 일식을 먹는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인지 40년 전에 비하여 70%인 43만 톤으로 감소했다. 전쟁 이전은 1인당 1일에 30그램이나 사용했는데, 지금은 10그램, 된장국으로 치면 1그릇 분량으로 줄었다. 전국의 가정을 조사해 보면 된장국을 마시는 것은 3일에 1번 정도이고, 특히 젊은이에게는 빵 식사에 맞지 않다고 경원되고 있다.
된장과 함께 일식을 조리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것은 간장이다. 일본 간장의 기원은 가마쿠라 시대에 된장통의 바닥에 고인 국물을 진간장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무로마치 시대, 텐몬天文 연간(1532-1555)에는 찐 콩과 볶은 밀을 거의 동량으로 섞고 누룩과 소금물을 더하여 발효시켜 간장을 만든 일이 기슈紀州 유아사湯浅와 반슈播州 타츠노龍野에서 시작되었다. 간장의 감칠맛 성분은 누룩균이 대두의 단백질을 분해하여 생기는 아미노산으로, 특히 글루탐산이다. 간장 양조에 쓰는 간장 누룩균은 글루탐산을 생성하는 효소, 글루타미나제의 작용이 특히 강하기 때문이다.
간장은 된장과는 달리 가정에서 만드는 것이 어렵고, 에도의 초기까지는 1되가 100문, 약 3000엔이라는 고급주 맞먹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러나 간사이의 유아사, 타츠노의 담백간장(淡口醤油)이 대량으로 에도로 운송되고, 이어서 에도에 가까운 조시銚子, 노다野田 등에서 진한간장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1되를 1200엔 정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간장을 회, 장어구이, 데리야키, 조림, 소바의 장국이나 우동의 육수 등에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간장을 쓰게 되어서 생선의 먹는 방법이 변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때까지 생선을 잘라 회를 날로, 또는 식초에 먹었는데, 두텁게 자른 토낙을 와사비 간장에 먹는 회로 변했다. 소금구이가 주였던 생선구이는 간장을 써서 양념한 구이, 데리야키로 바뀌었다. 조림은 오사카에서 스미다 강隅田川 하구의 츠쿠다지마佃島로 이주시킨 어민이 작은 생선과 조개를 간장으로 졸인 것이 시작이었다. 생선초밥, 장어구이, 튀김 등도 진한간장 없이는 탄생할 수 없던 생선 요리일 것이다. 분세이文政 4년(1821) 에도에서 소비된 간장은 125만 통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통 4말들이로 쳐서 계산하면 50만 톤 섬, 9만 킬로리터, 1인당 연간 90리터가 되기에, 현재보다 15배나 많은 소비량이다.
간장에는 크게 나누어 감칠맛과 향이 강하고 색이 짙은 진한간장과 색이 옅은 담백간장의 구별이 있는데, 생산량의 80%는 진한간장이다. 간사이 지방에서는 국물의 풍미를 해치지 않고, 조림에 진한 색이 들지 않는 담백간장이 선호된다. 회 등에 쓰이는 진간장은 밀의 사용량이 적은 농후한 간장으로, 미카와三河 지방(지금의 아이치현) 등에서 만드는 백간장은 밀을 많이 쓴 색이 옅은 간장으로 장국이나 찌개에 쓰인다.
최근 간장은 해외에서 소이소스로 애호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일식을 먹는 일이 줄었기에 소비량이 감소해 연간 82만 킬로리터가 되었다. 전쟁 이전에는 1인당 14리터의 간장을 썼는데 지금은 6.5리터로 줄고, 게다가 그 60%는 면 장국이나 양념장의 가공에 쓰이고 있다. 전통적인 간장을 대신해 간장에 다시마 육수나 가다랑어 육수, 감미료를 조합한 양념간장이나 스테이크 소스, 데리야끼 소스, 간장맛 콘소메 스프 등 서양풍으로 변형한 간장 조리묘가 팔리고 있다.
2. 일본 요리의 맛을 결정하는 다시마와 가츠오부시
가츠오부시, 다시마, 멸치, 표고버섯 등으로 육수를 내는 것은 일본에서 독자로 발달한 요리법이다. 단백질과 지방이 많은 육류를 쓰는 구미의 요리에서는 고기 그 자체에서 감칠맛이 나오는데, 지방, 단백질이 적은 채소, 버섯, 해초 등 담백한 식재료를 맛있게 조미하려면 감칠맛이 나는 육수를 더해야 한다. 회식 요리의 국은 육수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으로, 한 모금 먹었을 때는 부족하지만 다 먹었을 때쯤 딱 맛있도록 만드는 게 전문 요리사의 비법이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 맛있다고 느껴지는 서양식 국물이나 소스와는 전혀 다른 맛으로, 맛이 진한 서양식 요리나 중국 요리에 익숙해진 요즘 일본인들은 알기 어려워진 맛이다.
다시마와 가츠오부시의 육수는 된장국에도, 소바 장국, 튀김을 찍어 먹는 국에도 쓰인다. 다시마에서 나온 감칠맛 성분, 글루타민산과 가츠오부시의 이노신산, 또는 말린 표고버섯의 구아닐산을 함께 합치면 상승효과로 감칠맛이 몇 배로 증가하는 걸 경험적으로 알았던 듯하다. 일본의 물은 미네랄이 적은 경수이기에 잡미가 없는 육수를 내는 데에 적합하다. 서구에서는 맛을 신맛 단맛 짠맛 쓴맛의 4가지 기본 맛(사원미)으로 설명하는데, 그밖에 육수의 '감칠맛'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건 일본인이다. 감칠맛과 육수에 상당하는 외국어는 없기에 지금은 'UMAMI(감칠맛)' 'DASHI(육수)'가 국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간장과 된장, 어장 등의 발효 조미료의 맛도 글루타민산과 구아닐산 등의 감칠맛으로, 동남아시아의 식사에 공통된 맛이다.
다시마를 양념으로 사용한 것은 무로마치 시대에 에조蝦夷의 땅(북해도)에서 츠루가敦賀로 운송되어 온 다시마를 교토에서 양념으로 사용한 것이 처음이다. 에도 시대가 되면 기타마에부에北前船로 대량의 다시마가 오사카와 에도로 운송되어 온다. 오사카에서 다시마는 육수를 내는 것 이외에 자른 다시마, 조림, 소금 다시마 등으로도 가공되었다. 다시마의 감칠맛 성분이 글루타민산인 것을 발견한 것은 도쿄 대학의 이케다 키쿠나에池田菊苗 박사로, 글루타민산 나트륨을 사용한 세계 최초의 화학조미료 '아지노모토味の素'가 시판된 것은 메이지 42년(1909)의 일이다. 최근 가정에서는 다시마와 가츠오부시로 육수를 내는 대신 글루타민산 나트륨과 이노신산 등을 조합한 화학조미료를 쓰는 것이 매우 보통이 되고 있다. 조미료로 쓰는 글루타민산의 생산은 전쟁 이후 급증해 60만 톤에 달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해외로 판매되고 있다.
가츠오부시가 육수를 내는 데에 사용된 것은 에도 시대이다. 가다랑어를 쪄서 말림이나 끓인 국물을 바짝 조린 진액은 나라 시대부터 조미에 사용되고, 무로마치 시대부터 쓰였던 볶은술은 가다랑어포 1되에 매실 장아찌, 청주 2되를 더해 바짝 조린 것이다. 그러나 가다랑어를 쪄서 뼈를 제거하고 훈연하여 건조한 것을 반복하며, 거기에 누룩곰팡이를 피워 향과 감칠맛을 끌어내는 현대의 가츠오부시 제조법이 토사土佐(지금의 고치현高知県)에서 고안된 것은 에도의 중기이다. 그 이래로 국간장과 다시마 육수로 조리하는 담박한 맛의 교토 요리에 대하여, 진간장과 가츠오부시 육수의 에도 요리가 탄생했다. 홋카이도나 도호쿠 연안에서만 채취되는 다시마와 남쪽 규슈와 시코쿠에서 태어난 가츠오부시가 만나서 일정식의 맛을 결정한다는 것도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일본열도만의 일이다.
무엇보다 에도 시대의 가츠오부시는 고가로 서민은 쓰지 못했다. 현재 가츠오부시의 제조사로 알려진 '닌벤にんべん'의 창업자 다카츠 이헤에高津屋伊兵衛는 양질의 가츠오부시를 매입해 현금 판매하는 것으로 재산을 일궜는데, 가츠오부시와 교환할 수 있는 선물용 가츠오부시 우표를 고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메이지가 되어서도 가정에서 가츠오부시를 사용하는 것은 경축일이나 손님이 있을 때 만으로, 일상은 쪄서 말린 걸 사용했다. 그러나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에 걸쳐서 대형 어선에 의한 가다랑어 어로가 성행하게 되어 오키나와, 타이완, 당시 일본의 통치를 받던 남양군도에서 가츠오부시 생산이 시작되자 가츠오부시의 가격은 싸졌다.
딱딱한 가츠오부시를 깎는 건 바쁜 현대인의 식사 준비에서는 꺼리어 멀리하고 있지만, 쇼와 43년(1968)에 가정용 가츠오부시포 팩이 출시되어 이 고뇌는 해소되었다. 최근 일정식에 빠질 수 없는 간장과 된장 등의 소비량은 감소하고 있지만, 가츠오부시만은 생산량이 늘고 있다. 이것은 가정에서 가츠오부시를 쓰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양념장이나 면 장국의 제조에 쓰는 업무용이 늘었다. 소비자의 건강 지향에 응하여 간장과 소금을 줄이고, 대신에 가츠오부시의 육수를 조합하고 있다.
전쟁 이전의 가츠오부시 생산량은 약 1만 톤이었는데, 현재는 4만 톤 전후로 늘었다.
3. 식초는 일본 요리에 빠질 수 없다
식초는 소금과 나란히 가장 오래전부터 쓰여 온 조미료이다. 일본에서는 오우진応神 왕 무렵에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이 주조와 초조(酢造り)를 전한 것 같다. 술을 양조할 때 초산균酢酸菌이 혼입하면 술이 산패해 시큼한 식초가 된다. 우선 찐쌀과 누룩으로 술을 만들고, 다음으로 씨식초를 더해 발효시켜 식초로 만든다. 나라의 도읍에서는 궁정에서 사용하는 식초를 만드는 '조초사造酢司'가 있어, 동서의 시장에서도 식초가 팔렸다. 식초에는 날생선의 향을 없애고 감칠맛을 끌어내는 힘이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날생선이나 삶은 생선에 소금, 식초, 장 등을 곁들여 먹었던 것이다. 요리의 맛을 가감하는 걸 '안바이塩梅'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소금과 매실초의 적당한 조합이라는 의미이다. 그 정도로 소금과 식초는 옛날부터 요리에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가고시마현 기리시마시霧島市에 옛날 방법으로 만드는 항아리 식초가 있다. 집 밖에 늘어선 항아리에 넣은 쌀과 누룩이 식초로 변하는 데에는 반년 걸린다고 한다. 누룩의 작용으로 쌀의 전분이 분해되어 당으로 되면 효모가 그것을 알코올로 발효시키고, 최후에 씨식초로 더해 놓았던 초산균이 알코올을 초산으로 바꾸는 것이다.
식초에는 강한 살균력이 있어 부패를 방지하기 때문에 식품의 선도를 보존하고, 요리에 쓰면 지방을 분해해 입속을 상쾌하게 하는 효용이 있다.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에는 생선의 회를 식초로 무쳐서 초된장, 생강초, 겨자초 등을 초무침에 쓰게 되었다. 식초는 회 등, 그리고 초무침에 사용해 초절임, 초조림에도 사용하는 등 용도가 많다. 식초에 간장 또는 술, 미림을 합한 초간장(二杯酢), 양념장(三杯酢), 삶은 달걀 노른자를 으깨서 절여 섞은 노른자초 등으로 생선과 채소를 버무린 '초무침'은 일본 요리의 식단에 빠질 수 없는 하나이다. 회식 요리에서는 회, 국, 구이, 조림으로 얼추 끝내고 초무침으로 입가심을 하고, 밥과 절임으로 마무리한다.
요리에 산뜻한 신맛을 더하는 데에는 등자, 유자, 영귤, 광귤 등의 과즙을 쓰기도 하는데, 일본에서는 주로 쌀을 발효시켜 만든 쌀식초를 사용해 왔다. 서양의 와인 식초나 몰트 식초의 날카로운 신맛과는 달리, 쌀식초의 달고 부드러운 신맛은 일본인의 혀에 친숙한 맛이다.
상업적인 식초 제조는 무로마치 시대에 기나이畿内의 주조장이 시작한 것 같고, 이즈미和泉에서 제조한 이즈미초와 기슈紀州의 고카와초粉河酢의 평판이 좋으며, 간토우에서는 사가미相模의 나루세초成瀬酢와 스루가駿河의 젠토쿠지초善徳寺酢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식초는 소량으로 충분한 조미료로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고가였다. 식초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싼 가격이 된 것은 에도 시대에 오와리尾張, 한다무라半田村의 주조가 나가노 마타자에몬中野又左衛門(현재의 미츠칸 식초 창업자)가 술지게미를 원료로 한 지게미초를 제조하기 시작하고부터이다. 싼 값의 지게미초를 써서 에도에서는 초밥, 지방에서는 다양한 지라시즈시, 바라즈시 등이 탄생했다. 초밥은 가장 오랜 역사가 있는 식초 요리이다.
쌀과 누룩을 섞어서 발효시킨 양조 식초의 소비량은 최근 연간 17만 킬로리터로 감소했다. 아마 식초를 쓰는 일본풍 요리를 별로 만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알코올을 원료로 하여 생산하는 식용 식초가 마요네즈나 드레싱의 제조에 20만 킬로리터나 쓰이고 있다. 식초와 기름을 섞어서 노른자로 유화한 마요네즈를 생채소에 곁들여 먹는 것은 전쟁 이후에 퍼진 일로, 일본풍 초무침이 서양풍 마요네즈 샐러드로 교대된 것이다.
4. 일정식에는 짠 것이 많다
고대의 요리는 현재처럼 간장이나 된장으로 양념되어 있지 않았기에 각자가 작은 접시에 담긴 소금, 식초, 장 등을 기호에 맞춰 곁들여 먹었다. 장은 콩, 쌀, 보리 등을 소금절임으로 발효시킨 곡장으로, 나중에 된장, 간장이 되는 것이다. 새나 물고기의 살에 소금을 더해 발효시키는 육장, 채소와 과일, 해조 등을 소금절임을 한 초장을 만드는 데에는 소금이 필요했다. 대량으로 잡은 전갱이, 고등어, 정어리 등을 소금절임을 해 보존하는 데에도 다량의 소금을 썼다.
암염을 캘 수 없는 일본에서는 소금은 모두 바닷물에서 얻어야 한다. 죠몬인들은 바닷물을 토기에 담아 졸였던 것 같은데, 야요이 시대가 되면 바닷물을 해조에 뿌려 말리기를 반복하고, 그 해조를 구운 재를 물에 녹여 졸여서 소금을 얻는 '조염구이'가 시작되어 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이윽고 헤이안 시대부터 바닷가의 염전에서 바닷물을 뿌려 햇살에 말리고, 그 모래를 물로 씻어서 졸이는 염전 제염이 행해졌다. 바닷물을 떠다가 염전에 뿌리는 건 중노동이기에 당시의 소금은 1되가 쌀 2되와 교환될 수 있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었다.
에도 시대가 되면 된장과 간장, 절임에 쓰는 소금의 수요가 증가했기에, 제방으로 둘러싼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입빈식入浜式 제염법이 개발되어 온난하고 비가 적은 세토瀬戸 내해 연안에 퍼졌다. 당시 전국에서 사용되는 소금의 90%를 생산하던 것은 세토 내해에 면한 하리마播磨, 아와阿波, 사누키讃岐, 이요伊予, 비젠備前, 빗츄備中、빈고備後、아키安芸、스와周防、나가토長門의 10개국으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십주염十州塩이라 불렸다. 추신구라忠臣蔵로 알려진 반슈播州 아코번赤穂藩은 품질 좋은 소금의 생산으로 윤택했다. 현재는 염전은 그 모습이 사라졌고, 식용 소금은 모두 이온 교환법으로 제조되고 있다.
에도 시대의 소금 생산량은 연간 475만 섬으로 늘어, 그 대부분이 된장, 간장, 절임, 생선절임 등의 가공용으로 사용되었다. 소금 475만 섬을 70만 톤으로 치면, 당시 인구 1인당 1일 73그램이 된다. 현재 가정용, 업무용으로 사용되는 식용 소금은 114만 톤, 1인당 1일 25그램이기 때문에 그 3배 미만에 상당한다.
전쟁 이전은 염분이 많은 생선절임, 말림, 절임, 된장, 간장 등을 많이 먹었기에, 1인당 하루에 25그램의 소금을 섭취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고혈압증이 되기 쉽고, 뇌출혈, 뇌경색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전쟁 이후는 식염의 섭취량을 성인 남자는 1일 9그램, 여자는 8그램 이하로 줄이자는 영양 지도가 행해져, 최근에는 13그램 정도로 줄었는데 그렇더라도 구미인에 비하면 아직 5그램 정도 많다.
간장, 생선 소금절임, 건어물, 장아찌, 된장국, 소바 장국, 면 장국 등으로 섭취하는 소금은 하루 염분 섭취량의 60% 가까이 차지하기에, 이들 색재료에는 염분 감소 제품이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옛날 된장은 염분 농도가 15% 정도였는데, 지금은 10% 이하로 감소되어 있다. 염분을 감소해 맛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식초나 육수, 향신료 등을 잘 사용해 보충하게 하고 싶다. 염분이 많아지기 쉬운 일정식의 약점은 일정식의 지혜로 보충하면 좋을 것이다.
5. 일정식에는 설탕을 자주 쓴다
설탕이 일본에 운송되어 온 최초는 덴표우쇼우호우天平勝宝 6년(754), 감진鑑真 화상이 조정에 찾아왔을 때이다. 감진이 고우켄孝謙 왕에게 감기약으로 헌상한 설탕은 겨우 2그램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만드는 일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꿀이나 물엿, 그리고 칡청을 감미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칡청은 칡에서 채취하는 달콤한 수액을 졸인 것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소설 <마죽(芋粥)>은 섭정 후지와라노 모토츠네藤原基経가 손님에게 참마를 칡청으로 졸인 달달한 마죽을 대접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그 뒤에도 중국에서 수입된 설탕은 매우 적어 귀족이나 부호만 약용으로, 또는 과자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귀중품이었다. 설탕의 수입이 갑자기 증가한 것은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에 동남아(南蛮) 교역이 시작되고나서부터로, 네덜란드 배와 중국 배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으로 운송한 설탕은 연간 1100만 근(6600톤)이나 되었던 것 같다. 마카오에서 사들인 설탕은 일본에서 그 10배나 20배로 팔렸다고 한다. 설탕의 가격은 비싸고, 1근 600그램이 쌀 2말에 상당했다고 하기에 오늘날이라면 3만 엔 정도 되지 않을까. 값비싼 설탕은 주로 과자의 제조에 사용되어 카스테라(加須底羅), 보우로(芳露), 카르멜로(浮名糖), 알페로아(有平糖), 콘페이토(金平糖) 등 설탕을 다량으로 사용한 달달한 유럽 과자는 사람들을 강하게 매료시켰다. 설탕을 사용해 달콤한 양갱과 만주를 만드는 일도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의 초기에 이르러서야 류큐나 아마미오시마에서 흑설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8대 쇼군 요시타카吉崇가 설탕의 국내 생산을 장려한 일도 있어 칸세이寛政 연간(1789-1801)에는 사누키讃岐에서 흑설탕을 정제하여 백설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누키(지금의 카가와현)에서 생산된 와산본和三金은 흑당을 손으로 주물러 당밀이나 잿물을 제거한 정백당으로, 쿠림색을 띠고 있지만 그래뉴당에는 없는 독특한 풍미가 있다. 와산본이란 일본에서 최고의 백설탕이란 의미이다.
그전까지 생선의 양념구이나 조림에 단맛과 양념을 하기 위해서는 미림을 사용했다. 미림은 소주에 쌀누룩과 찹쌀을 더해 만든 일본 독자의 단맛 조미료이다. 그러나 설탕의 생산량이 늘어 1근(600그램)이 280문, 6000엔 정도로 싸게 구할 수 있게 되자 점차 요리에 설탕을 사용하게 되었다. 단조림(旨煮), 단짠조림(煮つけ), 달달조림(甘露煮), 해산물 조림(佃煮) 등의 진간장에 설탕을 넣은 진한 맛은 에도 사람들의 입맛에 맞았다. 그렇지만 막부 말기의 설탕 소비량은 5000만 근, 약 3만 톤, 1인당으로 치면 연간 1킬로그램 정도였기 때문에, 현재와 비교하면 1/18 정도이다. 에도 시대의 백설탕은 1킬로그램이 1만 엔이었기 때문에, 1킬로그램을 200엔으로 살 수 있는 현재에 비교하면 매우 비싼 것이었다.
그 뒤에도 2차대전 전까지 설탕은 답례품, 선물에도 사용되는 고급품이었는데, 전쟁 이후에는 설탕 수입이 늘어서 가격이 싸졌다. 설탕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885년에는 3킬로그램이었는데, 1935년에는 14킬로그램, 1973년에는 28킬로그램으로 늘며, 그 이후는 식사의 서양화, 이성화당의 사용, 감미를 피하는 건강 지향 등으로 18킬로그램으로 감소한다.
참고로, 가정에서 요리에 사용되는 것은 그 20% 정도라고 추정하는데, 그렇더라도 현대의 일정식 만큼 설탕을 자주 쓰는 요리는 드물다. 설탕 소비량에서 생각하면, 메이지 무렵에 비해 일정식은 5배 이상 달아져 불고기, 고기 감자 조림, 해산물 달큰조림 등의 간장과 설탕을 합한 단짠한 맛은 현대 일정식의 기본적인 맛이 된다. 생선을 설탕, 간장에 절여서 말린 미림말림도 다이쇼 시대에 고안된 것이다. 조림에는 5%, 콩조림이나 단식초, 단된장이라면 10%의 설탕을 넣는 것이 보통으로, 설음식의 찬합에 담긴 마른멸치, 검은콩, 생선달걀말이, 밤 으깬것(栗きんとん), 무 당근 초절임 등에는 합계하면 1킬로그램의 설탕이 쓰인다. 최근 가정에서 요리에 쓰는 설탕이 줄고 있는 것은 일정식을 만드는 것이 줄었기 때문인 것일까.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요리에 설탕을 넣는 일은 거의 없고 그 대신 식후 디저트 과자에 듬뿍 설탕을 사용한다.
6. 일본 요리와 향신료
선사의 산문 옆에는 '훈채와 술, 산문에 들어가는 걸 허하지 않는다'라고 새긴 계단석戒壇石이 세워져 있다. 훈채와 술은 파, 부추처럼 향이 강한 채소와 술로서, 모두 승려의 정념을 어지럽히고 수행에 방해가 되므로 먹거나 마시지 말아야 했다. 사원에서는 마늘, 염교, 파, 산달래, 부추를 5훈이라 부르며 싫어했다.
그런데 이러한 향신채는 약용이 되고, 강장 효과도 있기에 민간에서는 옛날부터 먹을 수 있었다. 만엽집에도 '초간장에 산달래를 찧어 넣고 도미를 먹고 싶다 나에게 보일듯 말듯 물옥잠의 국'이라고 읊고 있다. 그러나 불교 신앙이 퍼져 사원의 사찰 요리가 민간에도 보급되자 향이 강한 채소를 싫어하는 습관이 후세의 일본 요리에 남았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옛날부터 강한 향이 있는 향신료나 향초에는 악마를 몰아내고, 약효가 있다고 믿어 귀히 여겨졌다. 향신료는 원래 열대 또는 아열대산 식물의 나무껍질이나 씨앗, 꽃봉오리 등을 건조한 것으로, 방향과 매운맛이 있어 방부 작용이나 건위 효과가 있다. 더운 인도나 서아시아에서는 먹을거리의 부패를 막고 악취를 없애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 습관이 그리스와 로마에 전해진 것이다.
후추와 계피, 정향이나 육두구는 4대 향신료라고 알려져, 모두 로마 제국 시대부터 이탈리아 상인과 이슬람 상인에 의해 인도에서 아라비아해, 홍해, 지중해를 통해 운송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가을에 죽인 가축의 고기를 소금절임으로 겨우내내 먹고 살았기에, 그 악취를 없애는 향신료가 빠질 수 없었다.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경우하는 인도 항로가 개발되자 놀라울 만큼 다량의 향신료가 유럽으로 운송되어 들어왔다. 쓸데없이 많은 향신료를 요리에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사치가 되고, 요리의 맛은 부수적이 되었다.
후추는 일본에도 유럽 배에 의해 들어왔는데 일본에서는 신선한 어패류나 채소를 먹었기에 후추 같은 강렬한 향신료는 필요없었다. 마찬가지로 남미 원산의 고추도 가지고 들어왔지만 소재의 특색을 살리는 순한 요리에 익숙해진 일본인에게는 고추의 강렬한 매운맛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삼씨, 산초, 검은깨 등을 섞어 매운맛을 줄인 칠미 고추(七味唐辛子)는 우동이나 메밀을 먹는 양념으로 사용되었다. 내친 김에, 고추를 다량으로 쓰는 조선의 절임, 김치는 2차대전 이후 일본에 들어온 것이다.
일본식에서 자주 쓰이는 향신료는 고추냉이, 겨자, 산초, 생강일 것이다. 고추냉이는 일본 원산의 식물이면서 아스카, 나라 시대에는 식용으로 사용된 흔적이 없다. 향신료로서 사용된 것은 오래되었지만 가마쿠라 시대 이후의 일인 듯하고, 뿌리줄기를 갈아서 회, 초밥, 다랑어 김초밥, 소바 맑은장국, 고추냉이 무침 등에 사용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여 이즈伊豆의 산간부에서 고추냉이 재배가 시작되었다. 고추냉이는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는 효과가 있어 초밥도 고추냉이 없이는 맛있지 않다. 뿌리와 줄기를 잘라 술지게미에 절인 고추냉이 절임은 막부 말기부터 시즈오카静岡의 명물 토산품이 된다.
겨자는 중국에서 전래된 갓의 씨앗을 분말로 만든 것이고, 물을 넣어 반죽해 겨자 간장, 겨자 된장, 겨자 식초로 회나 무침에 사용한다. 생강은 옛날부터 뿌리줄기를 식초에 절여 생선구이의 양념, 초절임이나 식해에 곁들였다. 또 강판으로 갈아 회간장에 더하거나, 매실초절임, 설탕절임, 쌀겨절임, 된장절임에 쓰는 등 용도가 많다. 생강뿌리를 잘게 썰어서 육고기나 생선과 간장, 설탕으로 조린 것은 야마토 조림(大和煮) 또는 시구레 조림(時雨煮)이라 부른다. 산초는 일본에 자생하고 있어 만엽집에서는 하지카미라고 불렀다. 향긋한 새싹을 코노메木の芽라고 부르며 국의 향미용, 조림에 곁들이는 푸른 채소로 쓰고, 산초 된장으로 두부구이를 만든다. 산초 열매는 간장과 미림으로 졸여 전채나 찻물밥의 반찬으로 하고, 가루로 내 장어구이 등에 뿌리면 맛이 돋구어진다. 이처럼 일본 독자의 향신료 역사는 의외로 새로운 것이다.
또한 향신료는 아니지만, 요리에 곁들여 색과 향을 즐기고, 요리의 풍미를 돋구는 '양념(薬味)'이 있다. 다진 파, 푸른 차조기, 차조기 싹, 파드득나물, 산초 순, 유자, 가다랑어포, 김, 간 무, 칠미 고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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