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라奈良의 도시, 나라야 왕長屋王의 사치스러운 밥상
나라의 도시에 덴표우天平의 번영을 쌓은 여제, 겐쇼元正 왕의 치세에 권세를 자랑하던 우대신右大臣 나가야 왕의 대저택 터에서 3만5000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그중에 나가야 왕가에서 쓰던 식재료를 기록한 목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것을 참고해서 고대 먹을거리 연구가인 타카시 히로노廣野卓 씨가 재현해 본 나가야 왕의 밥상은 해산물을 중심으로 한 미식 요리가 30접시나 진열된 사치스러운 것이다.
밥 그릇에 수북한 흰쌀밥
국(뜨거운 국) 대합국, 학의 가슴살과 순무의 국
회와 발효초밥 은어초밥, 해파리 회, 잉어 회, 멍게 회, 게와 고동(蜷貝), 빙어
조림 은어 소금조림, 토란 조림
구이 문어 구이, 소라 구이, 대합 구이, 꿩 구이
찜 전복 찜, 새우 찜, 순무 찜
말림 도미 소금 말림, 송어 소금 말림, 농어 소금 말림, 연어 소금 말림, 사슴 육포, 멧돼지 육포
간장 절임 가다랑어 간장절임, 은어 간장절임, 도미 달래 간장식초 무침
지게미 절임 오이 지게미 절임, 순무 지게미 절임
초무침 큰실말, 한천, 순무 초절임
과자 곶감, 밤, 귤, 빈귤(柑子), 산복숭아, 비파, 복숭아, 떡
술 청주(여과한 쌀술)
조미료 소금, 식초, 술, 간장, 가다랑어 육수
이 식단에 나오는 간장이란 쌀, 보리, 콩 등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걸쭉한 액체이다. 우선, 이 식단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유와 '소酥' '요구르트(酪)' '크림(醍醐)' 등의 유제품도 즐겨 먹었다. 이 시대부터 식사에는 한국식으로 젓가락과 숟가락을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 쓰고 있는 2개의 젓가락은 쇼토쿠聖徳 태자의 시대에 견수사가 중국에서 가지고 돌아온 것인 듯하다.
나가야 왕의 호화로운 밥상에는 짐승 고기가 일절 쓰이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육식금지령이 반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육식이 금지되어 있던 건 불교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불교가 공식으로 전래된 것은 긴메이欽明 왕 13년(552) 백제 성왕이 불상, 경전과 승려를 보내준 때이다. 궁정에 불교 신앙이 퍼지자 덴무天武 왕은 살생 금단의 계율을 지켜 육식을 금지하는 조칙을 덴무 4년(675)에 공포했다. 농경이 바쁜 4월부터 9월까지는 소, 말, 개, 원숭이, 닭을 죽여 먹는 건 안 된다는 명령이다. 살생 금단의 조칙은 그 뒤 몇 번이나 반복되어 반포되었다. 그중에서도 쇼무聖武 왕은 덴표우 17년(745)에 앞으로 3년 동안 일체의 금수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엄하게 명한다. 중국에서는 살생 금단의 계율은 사원의 승려만 지키고 민중에게 강제하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는 불교가 국가권력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에게까지 육식 금지가 강제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라 시대가 되어 왕, 왕족, 관료, 농민이라는 사회계층이 명확히 정해지자 권력, 재력이 있는 왕이나 왕족은 산해의 식재료를 모은 호화로운 식사를 하지만, 대다수의 관료나 농민은 현미밥에 데친 채소와 된장국이라는 가난한 식사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신분과 계층에 의하여 생긴 '식사 격차'는 2차대전 뒤가 되어서 누구나 똑같은 식사를 할 수 있는 '먹을거리의 민주화'가 실현되기까지 계속된다.
2. 젓가락과 상을 사용하는 식사 스타일이 시작되다
고대의 서민은 어떠한 식사를 하고 있었을까.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후지와라노교藤原京 유적에서 발굴된 출토품을 참고하여 당시의 식사를 재현해 본 일이 있다. 그것을 소개해 보면, 귀족의 식사는 흰쌀밥, 미역국, 은어조림, 데친 미나리, 도미 무침, 전복 무침, 한천 간장 식초 곁들임, 완두콩, 오이 지게미 절임, 생강 식초절임과 술, 조미료는 식초와 소금, 후식은 요구르트, 호두, 매실, 비파의 열매이다.
하급 관리는 현미밥과 소금, 푸른채소 장국, 정어리 조림, 순무 식초무침과 술지게미를 뜨거운 물에 녹인 지게미술(糟湯酒), 서민의 식사는 더욱 빈곤하게 현미밥, 대황국, 데친 달래와 소금뿐이다. 어느 요리에도 간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각자 소금, 간장, 식초 등을 찍어 먹었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그려진 <병초지病草紙>에는 하급 관리 같은 남자가 밥상을 앞에 두고 이뿌리에 고름이 흐르는 아픔을 참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네모난 쟁반이란 얇은 판자의 상 위에 수북하게 밥을 담은 그릇이 있고, 젓가락이 꽂혀 있다. 또한 국그릇과 반찬 같은 것의 접시가 있고, 소금과 식초를 담은 작은 접시가 있다. 이처럼 밥을 1국 2채로 먹는 것이 일본인 식사의 원풍경인 것이다.
견수사가 가지고 돌아온 젓가락을 쓰기 시작한 것은 쇼토쿠 태자 무렵부터인데, 숟가락을 쓰는 관습은 헤이안 시대가 끝날 무렵 사라졌다. 찰기가 있는 쌀밥을 먹는 건 젓가락으로 충분히 할 수 있고, 국물은 그릇에 입을 대고 마셨기 때문이다. 현재 젓가락은 중국, 조선, 베트남 등에서도 쓰고 있는데, 숟가락을 쓰지 않고 젓가락만 사용하는 곳은 일본뿐이다.
젓가락을 써서 식사를 하는 것이기에 먹을 건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잘라서 조리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부엌칼과 도마를 이용해 생선을 능숙하게 손질하고, 토란과 당근, 무 등을 모양을 내서 깎는 일본식 독자의 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했다고 생각해도 좋다. 요리인은 요리를 멋지게 만들고, 아름답게 담아서 보여주기 위하여 '부엌칼을 능숙하게 다루어야' 했다. 요리인을 칼잡이라 부르고, 일본 요리는 '잘라서 보여주는' 요리라고 이야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고기는 덩어리채로 굽거나 끓이고, 식탁에서 나이프를 써서 잘르는 것이 관습이기 때문에, 능숙한 칼질은 필요하지 않다.
이처럼 쌀밥과 생선, 채소, 간장을 기본으로 하는 식사를 접시와 그릇, 젓가락을 써서 먹는 식사 스타일은 중국, 조선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의 쌀을 먹는 지대에 옛날부터 공통되는데, 식탁은 나라마다 특징이 있다. 우선 중국에서는 테이블과 의자를 써서 식사를 하는데, 조선과 일본에서는 마루에 앉아서 밥상을 쓴다. 귀족은 굽다리 접시, 형중衡重, 현반懸盤 등을 쓰고, 서민은 간단한 네모난 밥상을 써서 1인분의 밥과 국, 채소를 그릇과 접시에 담아서 각자 상에 놓는 '명명선銘銘膳'이란 급사 방식이 나라 시대부터 행해졌다. 명명선을 쓰는 관습은 부족한 먹을거리를 공평하게, 또는 신분과 서열에 맞게 분배하는 지혜라고도 볼 수 있다.
한 사람씩 명명선을 쓰는 관습은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져, 그 뒤는 가족끼리 교자상을 둘러앉았고, 최근에는 의자에 앉아서 식탁에서 함께 먹게 되었다. 그러나 가족 한 사람씩 먹을 분량을 미리 작은 접시에 나누어 담아놓는 관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냄비나 큰접시에서 직접 먹는 서구와는 다르고, 먹을거리를 자기 용도로 나누어 담는 작은 접시나 그릇이 고대부터 발달해 있었다.
게다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전용 밥그릇, 국그릇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세계적으로 보아 진귀한 관습도 이 시대에 시작된 것 같다. 헤이세이궁의 주거터에서 발굴된 식기에는 사용자의 이름을 묵서하여 타인이 사용하는 걸 금하고 있는 것이 있다. 에도 시대의 상인 집안이나 공동주택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식기나 젓가락을 수납해 놓는 젓가락상을 쓰고 있었다. 서양 요리와 중화 요리에서는 식탁의 한가운데에 큰접시나 그릇에 담은 요리를 놓고, 자신의 먹을 분량을 담는 접시에 나누어 담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자기 전용 나이프나 스푼, 접시 등은 정해져 있지 않다.
3. 헤이안교의 귀족이 즐긴 대향大饗 요리
헤이안 시대, 왕가를 대신해 정치권력을 쥔 후지와라藤原 씨 일족은 전국에서 헌상된 산해진미를 모아 대향이란 사치스러운 향안을 자주 개최했다. 에이큐우永久 4년(1116)에 후지와라 타다미치藤原忠通가 내대신内大臣에 임명된 일을 축하하는 큰 연회의 기록이 남아 있기에 소대해 보겠다.
먼저 다이반台盤이란 중국풍 테이블에 많은 요리를 차려놓고, 참석자들이 의자에 앉는다. 거기에 술과 안주가 운반되어 오면, 우선 주빈인 후지와라 일족의 연장자, 요리나가頼長가 잔으로 술을 마시고 그 잔을 참석해 모인 공경들에게 차례로 돌린다. 이를 제1헌献이라 한다. 다음으로 손님만 잔을 돌려 마시는 2헌을 한다. 3헌은 다시 요리나가부터 마시기 시작해 손님에게 잔이 돌아간다. 동료 의식을 다지기 위하여 같은 잔으로 한 좌석의 사람이 돌아가며 마시는 것이다. 상석부터 차례로 잔이 한 바퀴 도는 것을 '1헌'이라 하고, 3개가 한 벌로 된 잔을 차례로 써서 '헌'을 3번 반복하면 '3헌'이 된다.
이 3헌의 의례가 끝나면 밥과 국이 운반되어 와 향연으로 넘어간다. 향연의 요리를 설명하자면, 먼저 손님 앞에 밥을 수북히 담은 사발과 젓가락, 숟가락을 놓고 소금, 식초, 술, 간장을 담은 작은 접시를 늘어놓는다. 그 너머에 와배窪杯라는 깊은 그릇에 담긴 해파리, 멍게, 모무키코미(새 내장의 소금절임), 편석蝙螫(도미 젓갈)을 늘어놓는다. 좌우에는 꿩고기, 잉어, 송어, 도미의 회, 전복, 소라, 백합, 말똥성게(石蔭子), 고둥, 게, 성게 등의 날것과 전복, 문어, 작은 새, 생선살 말린 것을 놓는다. 다이반의 건너편에는 목과자(말린 과일)과 당과자(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해 기름에 튀긴 중국풍 쿠키)를 몇 종류씩 늘어놓는다. 요리의 가짓수는 손님의 신분에 따라 달라, 왕족 등에게는 20품목의 요리와 8품목의 과자, 합하여 28품목이 제공되며, 배석하는 공경에게는 20품목, 소납언少納言 등 관료층에게는 12품목이다.
대향의 형식은 중국의 연회 형식을 모방하는데, 헌립의 내용은 일본 고래의 신에게 바치는 음식에 공통하는 것이 많다. 바다에서 먼 교토이기에 어패류는 대단한 진수성찬인데, 그 대부분은 날것, 말린것, 소금절임, 식초절임으로 조미료를 더해 찌고 굽는 등은 하지 않았다. 각자가 자기 주위의 작은 접시에 담긴 소금과 장, 식초 등으로 원하는 맛을 더해 먹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된장, 간장, 다시를 써서 양념하여 조리를 하게 된 것은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에 사찰 요리, 혼젠本膳 요리, 가이세키 요리가 생기고나서의 일이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은 1000년 전에 영화를 누렸던 관백関白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나 겐지 이야기를 쓴 재원 시키부紫式部보다 훨씬 맛있는 요리를 먹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의 백과사전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를 보면, 곡물과 채소, 뿌리채소, 어패류와 또 산야초, 해초, 조미료, 향신료, 술 등을 합쳐 200종류 정도의 식재료, 식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곡물, 야채, 과일, 조미료 등의 1/3 정도가 이미 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근세 이후에 서구에서 이입된 식재료를 제하고 비교하면, 1000년 전의 벼슬아치들이 먹고 있던 식재료와 현대 우리가 먹고 있는 식재료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4. 도우겐道元 선사가 전한 사찰 요리
이미 소개했듯이 나라, 헤이안 시대의 연회 요리의 조리법은 실로 간단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요리는 어패류의 날것, 구운것, 데친것, 말린것과 소금절임이고, 그것들을 잘라서 접시에 담고 손이 닿는 주위의 작은 접시에 소금, 식초, 장 등을 더하여 원하는 맛으로 먹었다. 현재처럼 생선, 콩이나 토란, 채소를 된장이나 간장으로 양념해 조리하게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가 되어 중국에서 귀국한 유학승이 사찰 요리를 소개하고나서의 일이다.
중국에서 전해진 사찰 요리는 불교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절에서 먹는 요리이기에, 살생계를 따라 조수, 어패류를 쓰지 않는데 콩, 토란, 채소, 두부, 유바, 밀기울 등을 써서 맛있게 조리거나 튀기거나 하는 요리이다. 이 조리법을 본받아 일본에서도 된장과 졸인 술(일본술에 매실 과육을 넣고 바짝 졸인 것)을 써서 생선과 채소를 양념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사찰 요리를 송나라에서 가지고 돌아와 보급한 것이 가마쿠리 시대의 선승 도우겐이다. 나중에 조동종曹洞宗의 개조가 된 도우겐은 법을 지켜 식사를 만들고, 법식 대로 먹는 것은 좌선을 하는 것과 같이 중요한 선의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도우겐은 <전좌교훈典座教訓>과 <부죽반법>을 저술하여 마음을 담아 요리하고 감사하게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요리를 하는 마음가짐으로 기뻐하고 감사히 조리하는 '희심喜心' 상대를 배려하는 '노심老心' 편견 없는 '대심大心'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고, 식전에 '잘 먹겠습니다' 식후에 '잘 먹었습니다'라고 외치며, 귀한 생명을 주는 먹을거리에 감사하고 요리를 해준 사람을 위로하라고 가르쳤다.
선사禪寺의 사찰 요리는 '삼덕육미三徳六味' '조리의 3순旬'을 지켜 조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삼덕이란 조리가 가볍고 연하다는 것, 청정한 것, 규정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고, 육미란 쓴맛, 신맛, 단맛, 매운맛, 짠맛, 담백한 맛의 육미를 살리는 것이다. 3순이란 제철의 재료, 조리의 적절함, 양념의 요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사찰 요리를 본따서 사시사철의 식재료를 써 그 자체의 맛을 살려서 부드럽고 맑게 조리하는 것이 후세에 일본식을 조리하는 기본이 되었다고 해도 좋다. '모양'을 중시하고 '마음'을 추구하는 선사의 식사 사상은 일본식의 문화에 큰 영향을 남겼다고 해도 좋다.
사찰 요리에서는 고기, 생선, 닭 등을 쓰지 않지만, 그 대신에 두부, 유바, 밀기울 등을 기름에 튀겨 생선이나 닭고기와 비슷한 맛을 낸다. 두부를 으깨서 잘게 썬 우엉, 당근, 표고버섯, 은행 등을 넣고, 참기름으로 튀겨 조미료로 졸인 '비룡두飛龍頭 또는 간모도키(雁もどき)'는 그 한 예이다. 또한, 채소를 다시마, 표고버섯의 육수로 맛있게 졸이는, 참깨가루, 호두, 된장, 초된장 등으로 무치는 등의 고안을 한다. 와사비식초, 고추식초, 초된장 등을 쓴 초무침도 그것이다. 된장, 참깨, 두부 등을 가는 데에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온 철확을 썼다.
사찰 요리에서는 된장이 자주 사용된다. 찐 콩에 누룩을 더해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된장을 조미료로쓰는 건 가마쿠라 시대에 시작되고, 된장국으로 마신 것은 무로미치 시대부터의 일이다. 또한 사찰에서 먹던 낫토는 나라 시대에 중국이나 조선에서 전해진 소금 낫토이다. 콩 누룩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소금 낫토는 일본인이 먹는 실 낫토와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사찰 요리의 식재료와 조리법은 선사만이 아니라 무가 사회와 일반민중의 사이에도 퍼져서 혼젠 요리나 가이세키 요리 등 후세의 일본 요리가 발달하는 기초가 되었다. 일본 요리는 짐승 고기를 사용하지 않는 점과 채소의 요리가 맛있다는 점이 특장이라고 해도 좋은데, 모두 그 원류를 중국 선원의 사찰 요리에서 발단하고 있다.
남북조 무렵에 쓰여진 가정용 <정훈왕래庭訓往来>에 소개되어 있는 사찰 요리는 국은 두부국, 설림채雪林菜(비지), 야생 마 국, 죽순, 와사비 냉국, 조림은 썬 무, 우엉 조림, 머위의 검은조림(黒煮), 다시마, 대황 조림, 순무 조림, 죽순 데침, 초무침은 순무 초절임, 초절임 양하, 가지의 초무침, 오이 단절임, 초미역, 청태, 볶음은 볶은 콩, 송이 술볶음, 느타리버섯 볶음(雁煎り), 과자는 생밤, 밀감, 곶감, 말린 대추, 외瓜, 마름, 쇠기나물, 간식은 만두, 우동, 소면, 키시면 등이다. 간식이란 식사와 식사 사이에 먹는 가벼운 먹을거리를 말한다. 우동, 소면, 키시면 등의 면류를 먹게 된 것은 이 시대부터 밀농사가 펴졌기 때문이다.
5. 두부, 유바, 밀기울, 참기름을 쓰는 조리
사찰 요리에서는 고기나 생선 대신 두부와 유바 등 콩 가공품을 자주 쓴다. 콩은 짐승 고기나 생선살에 뒤지지 않는 양질의 단백질을 풍부히 함유하고 있기에 그것을 두부나 유바로 가공해 적극적으로 섭취한 것이다.
두부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활발히 만들어지게 되었다. 물에 담궈 부풀려진 콩을 맷돌로 간 즙을 데우면 두유, 간수를 넣어 단백질을 굳히면 두부가 된다. 간수를 넣지 않고 그대로 졸이면 단백질 박막이 냄비의 표면에 떠오르기 때문에, 건져 올려 말린 것이 유바이다. 이어서 생기울은 밀가루를 물과 소금으로 반죽해 단백질, 글루텐을 분리시켜 찹쌀가루를 섞어 찐 것으로, 밀가루와 섞어서 구우면 오래 보존하기 좋은 구운기울이 된다. 모두 생선살이나 짐승 고기에 대신하는 단백질원으로 후세의 일본 요리에 자주 쓰이게 되었다. 게다가 그것들을 건조시킨 언두부, 말린유바, 구운기울 등은 단백질 함량이 치즈보다 많고, 일정식에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을 보충하는 데에는 편리한 식재료이다.
식물성 기름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사찰 요리의 특징이다. 그때까지 참깨, 유채씨, 콩, 비자, 동백 등에서 짠 기름은 등불용으로 사용하는 귀중한 것으로, 식용으로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두부를 참기름에 튀겨 육수에 먹는 튀긴두부나 채소를 튀긴 사찰 튀김은 사찰 요리에 자주 나오는 일품이다. 특히 교토 우지宇治의 만푸쿠지萬福寺에 전해지고 있는 보차普茶 요리는 참기름을 쓰는 농후한 사찰 요리이다. 에도 시대 초기, 중국의 선승 인겐隠元이 일본에 와서 황벽종黄檗宗 만푸쿠지를 열었는데, 그때 전해진 것이 중국의 보차 요리이다. '보차'란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차를 베푼다고 하는 의미로, 법요나 불사 이후에 승려나 단가檀家가 차를 마시면서 먹는 사찰 요리이다. 중국풍으로 참기름을 써서 두부나 채소, 말린음식을 튀기고, 또는 볶아서 칡고물을 뿌리든지, 칡묵을 만드는 요리가 많으며, 좌탁을 4인이 둘러앉아 일품씩 큰 접시에 담은 요리를 나누어 먹는 것이다.
오늘날 본격적인 사찰 요리를 맛보려면 에이헤이지永平寺와 코우야산高野山 등의 절방에 숙박하든지, 또는 교토 다이토쿠지大徳寺나 묘신지妙心寺 등의 문 앞에 있는 사찰 요리 전문점을 이용하면 좋다. 보차 요리는 만푸쿠지의 탑두塔頭 사원, 또는 주변의 전문점에서 먹을 수 있다. 사찰 요리는 건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들 참배객을 위한 사찰 요리에는 유바나 두부, 된장, 참기름 등을 쓴 요리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칼로리는 칼로리는 그다지 적지는 않다. 그러나 수행승처럼 죽이나 밥 한 그릇과 된장국, 절임과 두부나 채소 조림 일품으로 지낸다고 하면 하루 1100킬로칼리로 정도이다.
6. 무가武家 사회에서 혼젠本膳(본상) 요리가 탄생했다
현재의 일본 요리의 기본형이 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에 고안된 혼젠 요리이다. 상을 몇 개나 늘어놓고 품목이 많은 요리를 올리는 호화로운 혼젠 요리는 무로마치 시대, 무가 귀족의 연회 요리로 고안되어, 그 간략화된 것은 에도 시대의 무가 사회, 그리고 마을사람이나 농민 사회에서도 관혼상제의 회식에 널리 이용되었다. 헤이안 조정의 연회(대향) 형식을 계승해 식단이나 조리법, 시중드는 법을 순일본풍으로 고친 것이 혼젠 요리라고 해도 좋다.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로 이어진 궁정 정치가 끝나자, 정치의 실권은 공가公家, 사찰과 신사에서 떨어져 신흥 무사 계급으로 이전되어 간다. 겐큐建久 2년(119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열자 무가가 정치를 행하는 가마쿠라 시대가 시작되고, 아시카가 씨足利氏가 통치했던 무로마치 시대가 끝나는 16세기 후반까지의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말하자면 일본의 문화대혁명의 시대였다. 먹을거리의 세계에서도 논 개간이 진행되어 쌀 수확량이 늘고, 벼농사의 뒷그루로 보리를 재배하는 일이 퍼져 면류를 먹는 풍습이 시작되었고, 또 중국 대륙의 송나라에서 선승이 전한 차 마시는 관습이나 사찰 요리가 퍼져 혼젠 요리나 가이세키 요리가 탄생하는 등 요리의 혁명 시대이기도 했다. 쌀의 수확이 늘어났기에 무가나 승려들은 일상적으로 쌀밥을 먹고 술판을 벌이게 되었다.
동쪽 지방에서 나와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을 무렵의 무사들은 농민과 다를 바 없이 검소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정월에 유력한 주종 관계의 무사가 쇼군에게 식사를 바치는 오우반垸飯(진수성찬)이란 의식이 있었는데, 오우반의 요리는 검소했다. 치쇼우治承 5년(1181) 정월 초하루, 치바 츠네타네千葉介常胤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바친 오우반은 잉어 1마리의 요리에 지나지 않았고, 요리토모가 연어 말림을 헌상받고서 크게 기뻐하는 등 검소, 검약을 취지로 한 식생활이었다. 그러나 조우큐우承久의 변 이후 무사가 전국에 세력을 펼치고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를 여는 무렵이 되면, 교토의 공가 방식의 사치스런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들 무가 귀족들은 헤이안 조정에서 전해진 공가풍의 대향 요리에 사찰 요리에 사용되는 식재료나 조리법을 도입해 혼젠 요리라는 순일본풍 연회 요리를 만들어냈다. 혼젠 요리의 상에 늘어놓는 요리는 '밥과 국, 채소, 절임'을 조합시킨다는 약속이 있다. 구체적인 예로 설명하면, 손님의 정면에 자리잡은 본상(1번 상이라 함)에는 밥과 절임을 중심으로 두고, 연어 소금구이, 꿩고기 구이, 푸른채소를 첨가한 회, 초밥과 국, 합하여 1국 4채를 늘어놓는다. 본상의 오른쪽에 자리잡은 2번 상에는 잉어탕과 간장 맛의 꿩탕, 거기에 도미 소금구이, 소라와 문어 조림을 더한 2탕 3채이다. 본상의 왼쪽에 자리잡은 3번 상에는 생선 냉국, 작은 새와 조개의 볶음찜, 오징어의 1국 3채와 밥을 늘어놓는다. 구이와 회는 접시와 사발에 나뭇잎이나 종이를 깔아서 아름답게 담고, 어묵이나 조개에는 종이 세공 장식을 더해 호화롭게 보이게 한다.
에이로쿠永禄 4년(1562)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중신인 미요시 요시나가三好義長의 저택에 초대되었을 때에는 먼저, 쇼군과 요시나가가 주역의 잔을 3번 교환하는 식3헌의 의례를 마친 뒤 7번 상까지 늘어놓고 8국 23채와 과자 8품의 혼젠 요리로 향연이 행해졌다. 본상에는 더운물에 만 밥, 절임, 생선 소금절임, 구이, 무침, 해삼창젓, 어묵, 도미 조림, 2번 상에는 문어, 해파리, 도미국, 고둥, 알집 절임, 새우, 잡탕국, 3번 상에는 작은 꼬치, 고니탕(くぐい汁), 꽃게, 잉어탕, 닭, 4번 상은 酒浸し, 전북, 고래탕, おちん, 5번 상에는 초밥, 메추라기, 양태탕, 오징어, 6번 상에는 갯장어, 피조개, 가오리탕, 7번 상에는 만새기 소금말림, 붕어탕, 도요새이다. 혼젠 요리가 끝나면 술안주를 교체해 주연이 4헌부터 17헌까지 밤을 새워 반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30년 뒤의 분로쿠文禄 3년(1594),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의 향연에서는 5개의 상을 늘어놓은 혼젠 요리에서 3국 27채의 요리와 답례품, 과자 18품을 제공한다.
도시만이 아니라 지방에도 접대 향연의 풍습이 퍼졌다. 헤이안 조정 무렵에는 신임 지방관(国司)이 도시에서 이지로 내려왔을 때 현지 관리들에 의한 '공급供給'이란 환영 연회가 열렸다. 중세가 되면 지방관이나 마름(地頭)은 원격지인 장원의 검지検地나 연공 징수에 대관代官을 파견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삼일 주방(三日厨)'이란 삼일 낮밤의 연회가 혼젠 요리를 써서 개최되었다. 일본 요리에는 이처럼 접대 요리로서 발달해 온 역사가 있다.
이 뒤 등장하는 다도 자리의 가이세키 요리, 에도의 요정에서 즐기던 회식 요리는 모두 이 혼젠 요리의 품목수를 줄여 간소화한 것이다. 그리고 밥, 국, 채소, 절임의 4점을 조합한 혼젠 요리의 식단 형식이 이 시대 이후 2차대전 전까지 전통적인 일본 요리의 기본 형식이 되어 이어진다.
그리고 요리 방법이나 시중 드는 법이 복잡해짐에 따라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칼잡이, 조채인調菜人이 필요해졌다. 칼잡이란 무가의 부엌에서 생선과 닭 등을 조리하는 요리인, 조채인은 사원의 부엌에서 사찰 요리를 조리하는 요리인이다. 부엌칼, 도마, 젓가락 다루는 법, 조리 방법, 요리의 배식, 식사 자리의 예법 등에 여러 가지 규정과 약속이 많아지고, 그것을 비법, 비전으로 도맡아서 가업으로 전승하는 집안이 생겼다. 공가 사회에는 사조가四条家, 무가 사회에서는 진사가進士家, 대초가大草家, 산내가山内家이다. 요리를 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 시조(和歌)와 가무극(能樂)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류 무가의 교양이 되어, 에보시烏帽子를 쓴 무사의 예복 차림의 주인 또는 요리인이 손님의 앞에서 오른손에 부엌칼, 왼손에 긴 젓가락을 들고 생선을 도마 위에서 멋지게 손질해 보여주는 의식을 연회 자리의 퍼포먼스로 행하기도 했다.
7. 노부나가信長와 히데요시秀吉가 향응했던 호화로운 본상(本膳) 요리
덴쇼우天正 10년(1582) 5월 15일과 16일 이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의 토벌에 협력한 도쿠가와 이야에스徳川家康를 아즈치성安土城에 초대해 향응했다. 이틀 모두 저녁밥으로는 5번 상까지 갖춘 혼젠 요리로 향응이 행해졌다. 첫날의 식단을 재현해 보면, 본상에는 도미 구이, 잉어 회, 붕어 초밥 등, 2번 상은 은어 내장젓, 멍게 냉국, 전복 등, 3번 상은 꿩의 가슴살, 꽃게, 학과 참마 탕, 4번 상에는 말린 오징어 말이, 표고버섯, 붕어탕, 5번 상에는 병어회, 우엉, 오리탕, 자른 다시마 등이다. 과자에는 요우비떡(ようひ餅)과 콩사탕이 쓰였다. 다음날에는 생선 소금구이, 도미, 장어, 잉어, 문어, 새우, 어묵, 말린 해삼, 전복, 말린 알집 절임, 소라, 고둥, 말린 청어알, 고래탕, 새고기는 백조, 왜가리, 도요새, 채소는 죽순, 외, 땅두릅, 표고버섯, 과자는 양갱 등이다. 이어서 이때 향응역을 맡은 아케치 마츠히데明智光秀가 불과 보름 뒤인 6월 2일, 교토 혼노지本能寺에 숙박하던 오다 노부나가를 습격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덴쇼우天正 16년(1588)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쥬라쿠다이聚楽第에서 고요세이後陽成 왕의 행차를 모셨다. <행행어헌입기行幸御献立記>에 의하면, 4월 15일의 주연에는 초헌의 안주는 작은 꼬치와 장어, 2헌은 고둥, 새, 잉어, 3헌은 다진 것, 김, 수선水仙, 4헌은 알집 절임, 전복, 생선회, 백조, 5헌은 갈은 것, 다진 것, かたのわ, 6헌은 만새기, 소금절임, 식해, 술에 살짝 담근 생선, 마른 오징어, 7헌은 김, 무 초절임, 만두, 8헌은 오징어말이, 산초 잉어, 학의 무침, 9헌은 민물고기(川物), 붕어이다. 다음날에는 초헌을 생선 소금절임, 야채 쌀겨절임, 회, 식해, 토란섞음(いもこみ), 밥, 2헌은 알집 절임, 연꽃, 숭어회, 해파리, 도미, 학탕, 3헌은 말린 대구, 산초 장어, 말림(かんそう), 새, 전복, 양태, 4헌은 술에 살짝 담근 생선, 고둥, 어묵, 농어, 5헌은 오리 날개 장식(鴨羽盛), いけはく, 오징어, 백조탕, 6헌은 소라, 밀기울, 새, 잉어, 7헌은 회, 전복꼬치, 붕어로 행했다. 과자는 밀기울, 도코로마, 다시마 말이, 호두, 솔잎 다시마, 금귤, 표고버섯이다. 쓰였던 식재료에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있고 조리방법도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산해진미를 모았던 본상 요리로 첫날은 9헌, 다음날은 7헌까지 호화로운 향응이 행해졌다.
오다 노부나가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새롭게 손에 넣은 권력, 재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한 호화로운 본상 요리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도 시대가 되어 막번幕藩 체제가 확립되어 쇼군, 다이묘, 카신家臣의 신분이 고정되어 버리자 요리의 내용보다도 요리의 품목수가 많은 것, 요리가 보기 좋은 것을 다투는 향연 요리로서의 호화로운 본상 요리는 불필요해진다. 7번 상까지 늘어놓는다는 상궤를 벗어난 '보여주는 본상 요리'는 차츰 자취를 감추고, 2탕 5채나 3탕 7채의 '먹는 본상 요리'가 무사, 마을사람 및 농민의 관혼상제에 쓰이게 되었다.
민간에서의 3탕 7채 식단의 예를 들면, 생선살 완자, 채소나 버섯을 건더기로 넣은 장국과 생선의 초무침, 조림, 맑은 육수의 2탕에는 생선, 고기, 채소의 조합, 절임 또는 무침을 조합하고, 도미 맑은탕 또는 탁한 육수의 3탕에는 새고기나 물고기 구이 또는 튀김, 회, 생선 꼬치구이, 채소 절임 모듬을 곁들이고, 선물로 과자와 가츠오부시를 더한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만의 문반고万の文反故>에는 부유한 상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식단을 음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본상에는 밥과 토란국에 전복 무침(鮑とくみの和え物), 소라, 보리멸, 도미 회, 표고버섯, 무, 채소 절임, 2번 상에는 연어 구이, 흰생선살에 계란을 엉기게 한 것, 오리, 산나물, 버섯국 등, 3번 상에는 잉어 회, 매실 절임과 술을 끓여 거른 것, こだたみ汁로 정하고, 따로 참대를 끓여 식힌 것, 도미와 왜가리 삼나무 구이, 새우와 푸른콩 무침이 나온다.
농민 사회에서도 쇼우야庄屋나 나누시名主 계급의 혼례에는 2번 상까지 나오는 본상 요리가 나왔다. 본상에는 1탕 6채, 2번 상에는 1탕 3채 정도인데, 산간부라도 도미나 새우, 계란, 어묵 등이 쓰였다. 이세伊勢 참배객이 묵는 숙소(御師宿)에서는 2번 상까지 나오는 본상 요리가 나왔다. 예를 들면 본상은 밥, 국, 회, 전복, 밀기울, 톳 조림, 절임, 2번 상에는 국, 회, 도미 구이, 생선살을 납작하게 찐 것, 표고버섯, 땅두릅 조림이다.
8. 다도와 가이세키 요리의 탄생
가마쿠라 시대의 초기에 중국에서 차를 마시는 관습이 전래되었다. 나중에 임제종의 개조가 된 선승 에이사이栄西가 송나라에서 차나무의 씨를 가지고 돌아와 재배해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하고 말차의 제조법과 차 마시기의 효용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사원에서 불전에 차를 바치는 의식, 다례에서 시작한 차 마시기 관습은 남북조 시대가 되면 무가 사회, 마을사람 사회에 퍼져 한데 모여 차를 마시고 차의 산지 등을 맞추는 투차闘茶를 즐기며, 연가連歌를 하고 주연을 즐기는 다회茶会(다기합茶寄合이라고도 함)가 유행했다. 이윽고 이러한 다회는 '간소하고 차분함(侘び)' '한적함(寂)'을 중시하는 '다도(茶の湯)'로 변해 나아간다. 차 마시기의 작법이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다케노 죠우오우武野紹鷗, 센노 리큐千利休 등에 의하여 극에 달해 좁은 다실에 앉아서 한 잔의 찻사발로 차를 마시고 화경청적和敬清寂、일기일회一期一会를 즐기는 '간소하고 차분한 다도'가 탄생한 것이다.
한적하고 차분한 차의 다회에서는 다도에 앞서 주인이 간소한 요리로 손님을 대접했다. 이것이 가이세키 요리의 기원이다. 애초에 가이세키懐石란 선을 수행하는 승려가 따뜻한 돌을 품에 넣어 배고픔을 달리는 것에서 나온 말로, 따뜻한 돌 대신 가벼운 식사를 의미한다. 기본적인 식단은 밥, 국, 상 맞은쪽에 놓는 회 같은 요리, 절임, 구이의 1국 3채로, 사치스러운 본상 요리의 품목수를 줄여서 간소화한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다만 본상 요리에서는 모든 요리를 몇 개의 상에 동시에 늘어놓는 것에 대비해, 가이세키에서 쓰는 상은 하나 또는 둘이고 그곳에 요리가 한 접시씩 운반되어 다 먹으면 다음 요리가 운반된다. 뜨거운 국물이 식기 전에 먹게 하려고 배려한 것이다. 가이세키 요리가 고안됨에 따라 일본 요리는 요리 내용, 시중 작법 모두 거의 완성의 영역에 이른 것이다.
가이세키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도의 정신에 따라 요리는 간소하더라도 최대한 대접받는 느낌이 들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사계의 계절감이 있는 제철 재료를 써서 요리와 그릇이 조화를 이루도록 아름답게 담고, 따뜻한 요리는 차갑지 않도록 좋은 시점에 시중하게 된다. 주인이 손수 시중하여 대접하는 것이다. 그 뒤, 에도 시대에 유행하게 되는 회식 요리에서는 가이세키 요리보다 요리의 품목수가 늘어나는데, 손님이 한 접시를 다 먹을 무렵에 다음 요리를 내오는 등 가이세키 요리의 대접 정신을 변함없이 이어받고 있다.
텐몬天文 13년(1544년) 리큐利休가 개최한 다회에서 나왔던 요리는 1국 3채이다. 상에는 건너편에 밀기울 조림과 땅두릅 무침을 놓고, 앞쪽에는 밥, 두부와 쇠뜨기를 넣은 국을 늘어놓는다. 이외에는 그릇에 담은 요리를 손님에게서 손님에게로 직접 전해 돌아가며 한 사람씩 덜어가는 덜어 먹는 요리로 해파리 초무침이 있고, 과자는 문어 조림, 밤과 비자나무 열매의 3종이다. 에이로쿠永禄 2년(1559)의 다회에서는 가다랑어와 도미의 무침을 큰접시에 담고, 조리료로 소금을 놓았다. 그러고 덜어 먹는 요리로 加雑鱠, 백조와 죽순 조림, 거기에 밥과 채소의 국이 나오는 1국 3채의 간소한 식단이다. 리큐는 '1국 3채로 좋다'라고 하여 요리의 품목수가 많은 것이나, 일부러 가져온 진귀한 식재료를 우연히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제공하는 일 등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덴쇼우 15년(1587)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에 즈음하여 하카타의 대상인 카미야 소우탄神屋宗湛의 저택에서 가이세키 요리를 대접받았다. 이때 요리는 밀기울과 백조의 탕, 산초를 더한 장아찌, 밥, 백조와 무, 생강의 회, 은어 소금구이, 채 썬 생강을 더한 생전복, 갓끈동부와 가지의 호두 무침이고, 마지막으로 과자로 호두, 솔방울, 복숭아, 두드린 우엉, 밀기울 조림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대는 에도 시대가 되지만, 교우호우享保 18년(1732) 오모테센케表千家 당주家元 소우사宗左가 열었던 다회의 가이세키 요리는 2국 3채이다. 최초에 도미의 회에 무즙과 생강을 곁들인 것, 두부와 땅두릅을 넣은 국과 밥의 상이 나온다. 그 뒤에 꼬치에 꽂은 해삼과 매실 장아찌의 조림 그릇, 찬합에 담아서 돌리는 은어 구이, 장아찌, 마지막으로 얇게 썰어 소금을 뿌려 주무른 오이, 소금 송이와 유자의 맑은국이 시중되었다. 과자는 칡만두였다.
9. 서양인 요리에 흥미를 보였던 카톨릭교 다이묘
일본에 서구인이 도항한 것은 덴몬天文 12년(1543) 포루투갈 배가 오오스미大隅 반도에 가까운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하여 철포를 전했을 때가 최초이다. 그 뒤 다수의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선교사들이 차례로 내항해 카톨릭교의 포교를 행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져온 서구의 문화는 남만南蛮 문화, 요리는 남만 요리라고 한다. 에이로쿠永禄 12년(1569)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 니조성에서 포루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ルイス・フロイス를 알현했을 때 유리병에 담긴 별사탕을 헌상받고 기뻐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튀김 요리인 텐푸라는 포루투갈인에게서 전해진 것인데,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겐나 2년(1616) 정월, 교토의 상인 차가게(茶屋) 시로지로四郎次郎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유행하던 남만 요리라고 소개한 텐푸라는 도미를 비자 열매 기름으로 튀긴 것이었는데, 나중에 에도에서 유행한 텐푸라는 밀가루 옷을 입혀 튀기는 것으로 변한다.
전국 시대의 다이묘들은 소고기 요리를 기꺼이 먹었던 것 같다. 카톨릭 다이묘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은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의 진 안에서 소고기 요리를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와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에게 대접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남만 요리가 마음에 들어, 자택에 닭고기와 올리브유를 써서 빠에야를 만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히라도시平戸의 성주 마츠라 시게노부松浦鎮肩는 영국 상선의 선장에게서 소고기, 돼지고기, 닭, 비스킷, 빵, 포도주 등을 헌상받아 먹고 8대 쇼군이 된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는 네덜란드 상관에서 소고기, 햄, 버터, 포도주, 맥주 등을 헌상받아 시식했던 것 같다.
당시 새로운 지배자가 된 다이묘들은 선교사들이 소개한 유럽의 고기 요리나 설탕 과자에 큰 흥미를 보였다. 고기 요리는 먹어 보면 맛있기 때문에, 불교의 불살생계에 반하는 행위이나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남만 요리에 흥미를 보였던 건 다이묘들만이 아니었다. 에이로쿠 10년(1557) 카톨릭교 다이묘 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의 영지 오오이타에서는 400명의 카톨릭 신자가 소고기와 올리브유, 사프란을 넣어 볶은 빠에야로 부활절을 기념한다. 히라도시나 나가사키에서는 다수의 남만인이나 중국인이 거류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상대하는 관리나 상인은 남만 요리, 중국 요리에 접할 기회가 있고, 또한 나가사키에 유학하던 서양학 연구자, 화가 등에게도 남만 요리를 시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중국인들이 손님을 접대했던 요리의 흔적이 지금도 나가사키 명물이 되어 있는 싯포쿠卓袱 요리이다. 싯포쿠란 베트남어로 식탁으로, 상을 쓰지 않고 식탁을 둘러싼 여러 사람이 큰접시에 담긴 중화풍 요리를 나누어 먹는 것이다.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관에서는 네덜란드 정월(양력 정월)에 통역과 서기와 그 가족, 마을 관리, 출입 상인 등을 초대해 멧돼지 넓적다리 구이, 구운 돼지, 햄, 소시지, 돼지 커틀렛, 오리 조림, 생선 튀김, 새우 스프, 카스테라, 타르트 등 네덜란드 요리와 과자를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칸에이寛永 16년(1639) 토쿠가와 3대 쇼군 이에미츠家光가 쇄국을 단행한 뒤에도 외국을 향해 열린 유일한 창이었던 나가사키의 주인들은 네덜란드와 중국의 식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포교를 했던 카톨릭교 선교사들은 체재중의 일기나 본국으로 보낸 서간에 당시 일본인의 먹을거리와 식사의 예법을 기록한다. 그것을 보면,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인이 소고기를 먹지 않고 쌀밥과 날생선이나 구운 생선, 채소의 조림을 다다미에 앉아 작은 상과 젓가락을 써서 깔끔히 먹는 것에 놀라고 있다. 예수회의 선교사 발리냐노Valignano는 "일본인의 식사 방법과 요리는 우리의 식사와 전혀 유사한 바가 없다. 각자는 한 사람씩 자기 식탁(각자의 상)에서 식사를 하고, 식탁보, 냅킨, 나이프, 포크, 스푼이 없으며, 젓가락이라 부르는 두 개의 작은 봉을 청결, 교묘히 사용해 먹을거리를 접시에서 상에 떨어뜨리는 일이 없다. 그들이 매우 애호하며 우리에게는 유해한 쌀로 만든 술을 마시고, 식사가 끝날 때에는 겨울이든 여름이든 늘 뜨거운 물을 마신다. 그들의 음식과 조리법에 대해서는 재료라든지, 맛이라든지 전혀 유럽의 것과 유사한 바가 없다. 그들의 음식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라고 기록한다.
그로부터 300년 뒤 막부 말기에 페리 함대가 내항했을 때, 막부의 관리는 에도의 유명 요정 니혼바시日本橋의 모모카와百川에 주문했던 2국 5채의 일본 요리로 페리 제독 등을 접대했다. 그런데 페리 제독은 이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분량이 놀랄 만큼 적고, 짐승 고기가 없이 조잡한 재료만 쓰였다"고 그의 일본 원정일지에 기록되어 있다.
놀란 것은 서양인만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이 되어 구미를 시찰하고 귀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는 <서양의식주西洋衣食住>를 저술해 "서양인은 젓가락을 쓰지 않고 고기류 그외의 음식은 조심히 잘라 평평한 접시에 담아 각자의 앞에 늘어놓은 것을 오른손에 칼을 쥐고 이걸 작게 잘라 왼손의 포크로 찔러서 먹는다. 칼 끝에 음식을 올려 곧바로 입에 넣는 건 매우 버릇없는 일이라고 여긴다"고 서구의 식사 풍경을 진기한 것처럼 소개한다. 우리들도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식습관을 외국여행에서 견문했던 해외 여러 나라의 그것과 비교, 대조해 보고 비로소 동서의 식문화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10. 회식(会席) 요리는 일본 요리의 최고봉
에도 후기 분카文化분세이文政의 무렵(1804-1830)이 되면 부유한 상인과 문인, 관리가 유흥하는 고급 요정이 나타났다. 요정의 시작은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清水寺와 기온샤祇園社(야사카八坂 신사)의 문 앞에 있던 요리집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에도에서는 후카가와深川 스사키洲崎에 개업한 마스야升屋가 최초이다. 이어서 야오젠八百善과 히라키요平清 등 고급 요리집이 차례로 개업하고, 그곳에서는 사치스러운 회식 요리를 먹고 술을 마시며 춤과 노래, 대화를 즐길 수 있었다. 회식이란 원래 해학의 자리를 의미하고,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요리를 먹었기에 요리집에서 내오는 상등의 요리를 회식 요리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회식 요리는 손님을 초대해 술을 마시고 회식하기 위한 요리이기에 품목수가 많고, 오늘날의 일정식 회식이 그것이다. 계절감 있는 식재료를 맛있게 조리하고, 아름다운 식기에 담아낸 요리를, 정원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좌식에서 게이샤 등도 곁들여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것이다. 회식 요리는 활발한 상업 활동으로 풍부한 재력을 얻은 에도의 상인들이 쌓아올린 요리 문화의 꽃으로, 헤이안 시대의 대향연 요리에서 시작해 가마쿠라 시대의 사찰 요리, 무로마치 시대의 본상 요리, 다도의 가이세키 요리를 거쳐 일본의 요리가 도달한 최고봉이라 말할 만하다.
명요정으로 평판이 높았던 야사쿠사 야오타니浅草山谷, 야오젠八百善의 회식 요리 식단의 한 예를 소개해 보겠다. 본상에는 전채로 평평한 접시에 옥돔, 오리고기, 송이버섯, 쇠귀나물, 미나리를 배합해서 내오고, 상 맞은쪽의 그릇에는 넙치와 오징어의 회에 땅두릅, 석이버섯, 파래, 생강을 곁들여 담았다. 국은 보리멸을 우려낸 국, 절임은 오이, 가지 나라식 절임과 심지무(芯大根)였다. 2번 상의 잔 모양의 작은 접시의 뱀밥과 쑥부쟁이의 무침이 있고, 입가심을 넣은 종지에는 새꼬막의 부드러운 조림, 군밤과 은행이 들어 있었다. 맑은 장국의 건더기는 쥐노래미와 방풍나물이고, 3번 상의 구이 요리는 작은 도미의 우엉, 표고 등을 유바에 말아 튀긴 것과 고추조림이었다. 이들 요리는 주연을 하기 위한 식단이었기 때문에 밥과 장아찌는 최후에 나왔다. <에도요리유행대전江戸料理流行大全>이란 요리책에 "회식은 요리가 아니고, 따라서 요리 솜씨의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으며, 먹는 맛을 본의로 한다"라고 있듯이, 형식보다 맛을 중시하며 맛있는 것을 즐기는 요리였다. 요금은 1인당 은 10문, 약 3만 엔부터였다고 한다.
부유한 척하는 상공인이 야오젠에서 극상의 찻물밥을 주문했던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하고 반나절이나 기다리게 한 끝에 나온 것이, 봄에는 진귀한 외와 가지의 지게미 장아찌, 거기에 우린 차가 든 질주전자와 밥. 이것만으로 1냥2푼이나 청구되었다는 이야기가 <관천견문기寛天見聞記>에 기재되어 있다. 파발꾼을 고용하여 다마가와玉川까지 좋은 물을 뜨러 보낸 수고비도 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회식 요리에서는 8촌八寸(전채, 술안주), 점주의 추천 안주를 먼저 내오고 주연을 행하고, 국그릇(국물), 상 맞은편 요리(회), 구이, 조림, 튀김, 초무침, 밥과 붉은된장국, 장아찌(절임)의 순으로, 마지막에 과일과 과자를 내오는 7품부터 9품의 식단이 많고, 상을 쓰지 않고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이 보통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마와 가츠오부시로 육수를 내고, 간장과 된장, 미림으로 양념하는 조리를 일반 가정에서도 행하게 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다.
혼상제의 회식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연회를 자택의 좌식이 아닌 요정이나 요리집에서 행하게 되고, 또 좋아하는 일본 요리, 몇 품목을 선택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일품요리집과 일본요리점(割烹)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이쇼우大正 12년 간토우 대지진 뒤에는 간사이의 요리집이 도쿄에 진출해 교토풍 가이세키 요리 등을 퍼뜨렸다.
일본 요리를 먹는 즐거움의 하나는 어떤 그릇이나 주발로 시중을 드는가이다. 일본 요리에서는 요리를 1인분씩 각자의 상에 배열하기에, 어떠한 그릇이나 접시, 주발 등을 쓰는지에 취향을 집중한다. 국물과 마실거리에는 열이 전해지기 어려운 칠기의 그릇을 쓰는데, 요리를 담는 사발, 접시, 주발에는 얇아서 입에 닿는 느낌이 좋은 채색된 자기를 쓴다. 채색 자기의 식기를 쓰는 것은 아리타有田, 세토瀬戸, 교토京都에서 자기의 생산이 본격화된 에도 후기부터의 일이다. 요정에서는 금이나 은으로 무늬를 놓은 검은칠, 붉은칠을 한 그릇에, 흰바탕에 채색을 입힌 둥근접시나 각접시, 주발을 조합해 요리에 선명한 색채를 더하고자 경쟁했다. 아무리 훌륭한 레스토랑이라도 똑같은 흰색 큰접시와 컵으로 시중드는 서양 요리와는 운치가 사뭇 다른 것이다. 일본 요리 만큼 크고 작은 식기를 많이 구별해 사용하는 요리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11. 요정의 일본 요리에서 가정의 일본식으로
일본 요리가 발전해 온 역사를 정리해 보면, 우선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사찰 요리를 기본으로 하여 무가 사회에 본상 요리가 탄생하고, 다도의 자리에서 가이세키 요리가 태어나며, 에도 시대가 되어 요정의 회식 요리로 발전해 어패류, 채소, 두부와 유바 등을 된장, 간장, 육수를 써서 조리하는 일본 독자의 요리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일본 요리는 모두 상류계급의 연회 요리로 발달한 것이고, 민중이 일상에서 먹는 식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에도의 상공인 사회가 되면 초밥, 메밀국수, 우동, 장어덮밥, 튀김 등이 탄생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것 같은 밥에 생선구이, 토란과 당근 조림, 소송채의 무침, 거기에 된장국과 채소 절임을 곁들이는 1국 3채의 일정식이 되었다. 그리고 메이지가 되어 소고기 전골, 카레라이스, 고로케, 커틀렛 등 양식이 더해지고, 2차대전 뒤에는 돈카츠, 고기구이, 닭구이, 라멘 등이 추가되어 현재의 일본식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먹었던 것처럼 어패류 요리, 채소 요리를 주체로 한 전통적인 일상식을 '일정식(和食)'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무렵부터인 듯하다. 특히 2차대전 뒤는 가정의 식탁에 구미풍 요리나 중화풍 요리가 많아졌기에, 전쟁 이전까지 먹었던 밥에 생선구이, 채소의 조림, 무침, 절임과 된장국이란 1국 3채의 식사를 일정식이라 불러 구별한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2차대전 뒤에는 일본식의 식재료와 요리법은 크게 변하여 전쟁 이전처럼 일본풍의 식단이 가정의 식탁을 독점하는 일은 사라졌다. 그러나 가타카나 영어가 아무리 많아져도 일본어가 영어로 변하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일정식이란 전통 식문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민족의 전통요리로서 서양풍 요리, 중화풍 요리 등과 공조하게 되었다.
이처럼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요정이나 고급 여관, 일본요리점에서 이어받은 회식 요리는 현대 일본식의 원점으로서, 또 그 최고봉으로 자리매김되는 존재라고 생각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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