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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식탁의 일본사 -3장 일본술의 문화지文化誌

by 石基 202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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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쌀을 써서 주조를 시작하다

일본인은 신화 시대부터 쌀로 술을 빚어서 마셔 왔다. 고사기에 따르면 4세기, 오진応神 왕의 치세에 백제에서 온 수수고리舞須許理가 미주美酒・대어주大御酒를 양조해 헌상했다고 하니, 주조의 기술이 조선반도 전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조선반도에서는 거미줄곰팡이속을 기른 떡누룩(餅麹)을 사용해 술을 빚지만, 일본에서는 습윤한 기후에 적합한 누룩곰팡이속으로 쌀누룩(米麴)을 만들어 쓰도록 변했다.

일본인이 술을 마시는 것을 익힌 것은 아직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던 1만 년 정도 옛날 일이었을 것이다. 과일의 즙이나 벌꿀 등이 자연히 발효되는 것을 발견한 죠몬인은 보글보글 거품이 일고 좋은 향이 나는 그 즙을 무서워 떨면서 맛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알코올의 작용으로 마음이 고양되는 '취기'를 경험한 그들은 곧바로 흉내를 내 술을 담가 보았을 것이다. 개머루의 과실 등을 모아 밟아 뭉개서 항아리에 저장해 두면 과피에 묻어 있던 효모의 작용으로 과즙이 발효되어 술이 되는 것을 익힌 것이다. 죠몬 시대의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에서 발견된 대량의 말오줌나무, 다래, 나무딸기, 왕머루의 씨앗은 과실주 주조가 행해졌던 증거라고 생각된다. 

기원전 몇 세기가 되어 논벼의 재배가 보급되자, 식량 걱정이 없어지고 인구가 증가해 큰 마을이 출현해 국가가 탄생한다. 인구가 증가하면 마시는 술도 다량으로 필요해지고, 주워 모아 온 과실과 벌꿀에서 술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져 풍부히 수확할 수 있는 쌀을 써서 다량의 술을 빚는 일이 시작된다. 그러나 생쌀을 입으로 잘게 씹어서 침으로 당화하고, 그것을 모아 발효시키는 미인술은 대량으로는 만들 수 없다. 고사기에 의하면 4세기 오우진応神 왕의 시대에 기록이 있듯이, 본격적인 주조 기술은 조선반도에서 전해진 것인 듯하다. 와도우和銅 6년(713)에 편집된 <하리마국풍토기播磨国風土記>에는 "신들에게 바친 지에밥이 누져서 곰팡이가 피었기에 술을 빚었다"라고 하기에, 찐쌀에 누룩곰팡이를 피운 가루 누룩(散麹)을 사용해 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좋다. 

고대의 사람들은 술을 어떻게 마셨던 것일까? 술을 마시면 기분이 고양되어 일상과는 차원이 다른 몹시 취한 상태가 되는데, 고대인은 술은 신에게서 받은 것이며 신의 힘으로 몹시 취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고대 농경 생활은 태풍, 홍수, 가뭄 등 자연의 위협에 끊이지 않고 노출되었기에 자연 현상을 지배하고 풍요를 주는 초자연적 존재, 즉 신에 대한 외경심이 생긴다. 사람들은 신에게 술을 바치고, 그 제퇴주를 마시고 마음을 고양시켜 신의 지도를 묻고자 했다. 술을 마시는 것으로 비일상의 심리 상태가 되고, 신과 일체가 된다고 믿은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술을 번갈아 마시며 수확을 축하하고, 또 전쟁의 승리를 함께 기뻐하며, 동료의 결속을 다졌다. 축제는 먼저 술을 집는 일부터 시작해, 만든 술을 신 앞에 바치고 기도하며, 그 제퇴주를 마을사람 전원이 마시고 춤춘다. 고대의 술은 신의 영력을 나누어 받기 위하여, 그리고 부족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마을 전원이 함께 마시고 혼자서 마시는 일은 없었다. 기원 3세기 무렵, 야요이 시대 말기 일본인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중국의 <위지魏志 왜인전倭人伝>에는 "그 회동은 좌기座起에 부자父子, 남녀의 구별없이 사람의 성질이 술을 즐긴다"라고 적혀 있기에 사사건건 마을사람 전원이 모여서 술잔치를 했던 것 같다. 

기원 7세기에 들어와 야마토 왕권이 율령국가로 이행할 무렵이 되면, 다량의 술이 조정의 제사의식이나 절회節会의 축연에 쓰이게 되어, 술의 양조는 관영이 되었다. 헤이안궁에는 궁내성이 관할하는 조주사造酒司가 설치되어 주부酒部라는 관인이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궁중의 제사에 쓰이는 주조에 종사하고 있었다. 헤이안교의 조주사에서는 연간 624섬, 45킬로리터의 술을 빚었던 기록이 있다. 지방의 국부国府에서도 주부 또는 주인부酒人部가 설치되어 술을 빚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제사 행사에는 언제나 술잔치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겐쇼우제元正帝의 우대신 나가야왕의 대저택에는 어주양소御酒醸所가 있고, 저택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쌀, 누룩과 급수의 배합비율이 기록되어 있기에 쌀을 누룩으로 당화해 발효시키는 일본주 만들기의 기술이 이미 정비되어 있었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농민은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다이카 2년(646)에 농경이 바쁜 계절에 농민이 물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는 금주령이 반포되어 농민이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다. 설령 금주령이 내려졌어도 조세, 부역, 병역 등의 과역 부담에 시달리는 농민은 생활이 어려워 술을 마시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야마노우에 오쿠라山上憶良의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에 있듯이 "바람 뒤섞여 비내리는 밤의   비 뒤섞여 눈 내리는 밤은   방법도 없이   춥다면   굵은소금을 계속 먹으라   술지게미 녹인 뜨끈한 물 홀짝홀짝 마시고   기침하는 ......"라고 하는 울적한 생활이었다. 일반 민중이 일상적으로 음주할 수 있게 된 것은 에도 시대 이후이다. 

 

 

 

 

2. 식삼헌式三献이라는 음주 의례

헤이안 시대의 귀족과 무로마치 시대의 상류 무가는 연회의 시작으로 식삼헌이란 술의 의식을 행했다. 같은 잔으로 술을 번갈아 마시는 '헌献'을 3번 되풀이하여 일족의 단결과 주종의 맹서를 굳건히 한 것이다. 전국 시대의 무장들은 출진할 때 승리를 기원하며 삼헌 의식을 행했다. 출진식의 안주는 적에게 이긴다는 '전복 썬 것(打ち鮑)'  승리하여 '황밤(勝栗)' 기뻐하는 '다시마'의 3종으로 결정되었다. 오늘날 결혼식에서 행하는 부부 다짐의 339도의 술잔, 연회에서의 건배나 잔을 주고받는 수작 등은 식삼헌의 자취이다. 연회에 늦게 온 사람에게 '서둘러 와 3잔'을 마시게 하는 풍습도 식삼헌이 끝나지 않으면 연회가 시작되지 않았던 데에서 비롯된다.

헤이안 귀족이 행했던 대향의 연회는 식삼헌으로 시작해 회식으로 옮겨서도 술을 번갈아 마셨다. 회식이 끝나면 장소를 바꿔 짚방석을 깔고 앉아 각자의 앞에 굽다리접시에 놓인 술안주가 운반되어 온노자穏座라는 주연이 된다. 공경들은 저마다 생황, 세로피리, 횡적, 비파 등을 연주하며 술을 즐겼다. 온자는 의례가 아닌 마음 놓고 즐기는 주연으로 오늘날의 2차 술자리에 상당한다.   

본상 요리나 회식 요리 등 전통적인 일본 요리는 술을 마시기 위한 주연 요리이며, '헌'에 맞추어 요리를 결정하는 '식단(献立)' 즉 술과 요리의 조합을 중요시해 왔다. 술에 맞추어 술안주를 준비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술을 맛있게 마시기 위하여 요리가 있고, 서구에서는 요리를 맛있게 먹기 위하여 와인을 마신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쌀에서 만들어진 밥과 일본주는 일본 독자의 요리 문화를 발전시킨 차의 두 바퀴라고 해도 좋다.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 주조는 나라奈良, 가와치河内, 오우미近江의 대사원에서 행해졌고, 이윽고 가업으로 주조를 하는 양조장이 교토와 나라에 나타났다. 오에이応永 32년(1425) 교토 시내와 교외의 양조장 명부에는 342채의 양조장이 기록되어 있다. 술을 손에 넣기 쉬워지자 무사, 공경, 승려 등 상류 계급은 연가連歌의 모임이나 차 마시는 모임의 자리에서 주연을 즐기게 되었다. 술잔치가 매일 밤 반복되었던 것 같다.

오다 노부나가를 알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포루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는 일본인의 음주 습속에 놀라 "우리는 포도주를 차갑게 마시지만, 일본에서는 쌀로 만든 술을 1년 내내 데워서 마신다. 우리는 유리잔으로 의자에 앉아서 한 손으로 마시는데, 일본에서는 나무잔이나 토기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마신다. 우리는 남에게 강제하지 않고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는데, 일본인은 서로에게 억지로 권하며 마신다. 몹시 취하는 건 우리에게는 불명예이지만, 일본에서는 충분히 대접받은 것을 기뻐하는 증거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 술은 신화 시대부터 귀중한 것으로, 일상에서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주로 제사나 잔치의 자리에서 동료와 함께 마시는 '무리지어 음주'를 하는 것이었다. 에도 시대가 되어 민중의 생활이 풍요로워져 경사스러운 날(특별한 날)에 한하지 않고 평소의 날(일상)에도 술을 마시는 일이 가능해졌어도 동료와 함께 마시는 음주 관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술은 모임주, 향응주, 접대주로서 상대를 찾아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으로, 선술집 등에서 독작으로 마시는 건 버릇없고 천한 것으로 여겼다. 메이지가 되면 가정에서 가구의 주인이 저녁 반주를 하는 습관이 시작되는데, 이 풍습은 혼술을 공공연히 즐기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도 해석된다. 

 

 

헤이안 시대, 귀족들의 주연 풍경. 『餓鬼草紙』에서.

 

  

 

일본술을 마시는 잔에도 변천이 있었다. 고대에는 유약 없이 구운 토기가 사용되고, 상대와 중세의 주연에서는 옻칠을 한 큰 평잔平杯을 사용해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또는 순번대로 마셨다. 중세, 무사의 출진식에서는 유약 없이 구운 막사발을 쓰고, 다 마신 막사발은 마루에 던져 깨버리고,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타냈다. 의협 영화에서 보는 두목과 부하의 맹세의 잔으로도 평잔을 사용한다. 1홉 도쿠리徳利와 작은 잔(猪口)이란 작은 술잔을 사용한 것은 에도 시대가 되어서부터이다. 술을 알맞게 데워서 마시는 것이 시작되자, 큰잔으로 고개를 젖히고 단숨에 들이키듯이 마시는 일은 줄어들고, 작은 잔으로 조금씩 마시게 되었다. 냉주를 찻사발로 마시는 것은 취기가 빨리 돌기 때문에 버릇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긴죠주를 차갑게 해 쭉 들이켜 마시는 일이 많다. 작은 잔보다 용량이 많아 얼굴을 내밀어 들여다보듯이 마시는 쭉 들이킴은 혼자서 마시는 데에 적합하지만, 연회의 자리에서 술을 따라 마시거나 그렇게 하여 마시게 하기에는 좋지 않다. 일본은 술을 마시는 의식과 도구에도 세심한 배려가 있는 나라이다. 

2차대전 이후 일본주와 맥주를 가정에서 마시는 일이 늘어났다. 현재는 일본주의 50%, 맥주의 80%가 가정에서 소비된다. 한 세대의 주류 구입금액은 연간 4만6000엔이기에, 밖에서 마시는 술값을 포함해 한달에 1만 엔 정도는 되지 않을까. 술값은 가계 소비의 2% 정도로 해결된다. 덧붙여서 최근 주류의 연간 소비 총금액은 약 5조 엔, 국고에 수납되는 주세의 총액은 약 1조 2000억 엔으로 국세 수입의 2%를 점하고 있다. 

 

 

 

3. 일본술의 제조 기술

찐쌀에 누룩곰팡이를 피운 가루 누룩을 써서 쌀의 전분을 천천히 당화시키면서 주모(효모)에게 알코올 발효를 시키는 병행 복식 발효라는 고도의 주조 기술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에 걸쳐 거의 완성됐다. 발효의 초기에는 효모의 활동이 약하기에 찐쌀과 누룩의 1//3을 더하고, 발효가 강해지는 걸 기다려 여기에 1/3을 더하며, 최후에 나머지 1/3을 더하는 '3단 분할'의 기법과 잡누룩의 오염이 일어나기 어려운 한겨울에 술을 빚는 '추위 주조' 등은 오늘날의 양조 과학의 지식에서 보아도 참으로 합리적이다. 술을 60도 이상으로 가온하여 화락균火落菌을 살균하는 '불넣기'가 시작된 것은 프랑스의 생화학자 파스퇴르가 와인의 저온살균법을 고안한 것보다 300년이나 전의 일이었다. 술쌀을 극단까지 정백하여 저온에서 ㅓㄴ천히 발효시키는 긴죠주는 최근에 와서 개발된 것인데, 외국인은 과실 같은 좋은 향이 쌀에서 만들어진다고 듣고서 놀라게 된다. 

쌀과 보리 등의 곡물을 원료로 하여 술을 빚는 데에는 우선 알곡의 전분을 누룩균과 맥아의 효소로 달달한 당류로 분해(당화라고 함)하고나서, 효모균으로 알코올 발효시키는(복複발효법이라 함) 것이다. 전분을 분해하는 데에 서양에서는 보리를 발아시킨 맥아를 사용하고, 동양에서는 누룩곰팡이를 쌀에 피운 누룩(중국에서는 曲)을 쓴다. 포도의 과즙에는 포도당과 과당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대로 효모균으로 발효(단單발효법이라 함)시키면 와인이 되고, 그것을 증류하면 브랜디가 된다. 

맥주의 양조는 보리의 전분을 맥아로 당화해 보리즙으로 만드는 공정과 그 보리즙을 효모균으로 발효시키는 공정을 별도의 통에서 행하는 '단식 복발효법'인데, 일본술의 양조는 찐쌀을 누룩으로 당화시키는 공정과 만들어진 전국을 주모(효모균)로 발효시키는 공정을 같은 통에서 병행하여 진행하는 '병행 복발효법'이기에 세계에서도 가장 복잡한 주조라고 해도 좋다. 그 개략을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찐쌀의 제조

원료 쌀의 품질은 술의 품질에 큰 영향을 주기에, 대립이고 전분이 많고 흡수성이 좋은 품종을 고른다. 주요 품종은 야마다 니시키山田錦, 오마치雄町, 고햐쿠만고쿠五百万石 등이다. 일본술의 제조에 쓰이는 주조미는 연간 30만 톤 미만이다. 현미로 입하한 주조미는 정미기로 정미 비율 70₩75%까지 정백한다. 즉, 현미알의 바깥 부분을 1/3 만큼 쌀겨로 깎아서 전분이 많은 중심부(심백)을 남긴다. 쌀을 정백하면 하는 만큼 주질은 향상되기에, 최그에는 정미 비율이 70% 이하로 한다. 

정백한 백미는 물에 씻어 탱크에 넣고 3-10시간 담그어 25-30%까지 흡수시키고, 시루에 넣어 30-60분 쪄서 찐쌀로 만든다. 찐쌀의 일부는 냉각하여 누룩의 제조에 쓰고, 나머지는 술밑이나 술빚음에 사용한다. 

 

2) 누룩의 제조

찐쌀을 누룩상자라는 얕은 나무 상자에 펼치고 28도 전후의 누룩방에 넣어 누룩씨(황국균의 포자)를 뿌려 40-45시간 배양하면 누룩균의 균사가 자라 쌀알의 표면을 덮은 쌀누룩이 생긴다.

 

3) 술밑(인공 유산을 쓴 술밑 速醸酛)의 제조

술밑 탱크에 찐쌀, 누룩, 물을 넣고 유산과 일본술 효모를 더하여 15-20도로 약 2주일 배양해 효모를 증식시키는 것이 술밑이다.

 

4) 전국의 제조(술빚음 당화와 발효) 

원료가 되는 찐쌀을 누룩으로 당화하면서 술밑(효모균)으로 알코올 발효시키는 일본술 제조의 주요 공정이다. 통상은 술밑에 찐쌀, 누룩과 물을 3회로 나누어 더해 전국으로 한다(3단 술빚음이라 함). 전국을 20-25일 발효시키면 전국의 온도가 15-18도로 상승해 알코올이 18-19% 생성된다. 전국이 숙성될 때 양조용 알코올과 당류를 더하여 주질을 조정한다.

전국이 숙성된다면 소량씩 자루에 담아 압착해 짜서 청주와 술지게미로 나눈다. 청주는 냉각해 탁함을 가라앉히고,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65도로 살균(불넣기라고 함)한다. 통상 백미 1톤에서 일본술 3킬로리터를 제조할 수 있다.  

 

원료미를 잘 정백하면 술의 잡미가 줄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술이 생긴다. 원료미를 절구와 공이로 도정하던 에도 시대에는 정미 비율이 85% 정도(현미 100킬로그램을 정백하여 정미 85킬로그램이 됨)이었기에, 산미가 강하고 쌉쌀한 주질이었다고 생각된다. 수직형 정미기를 쓰는 현대에는 통상 70% 정도로까지 정백하지만, 긴죠주에서는 60% 이하루 다이긴죠주라면 40%로까지 정백한 백미를 쓰고, 저온에서 서서히 발효시켜 과일향의 긴죠향을 생성시킨다. 발효가 끝난 전국에 알코올과 당을 첨가하는 것은 2차대전 중에 주조미가 부족했기에 발효시킨 전국에 알코올을 첨가해 술을 증량하는 3배 양조법을 시행하면서 시작됐다.

 현재는 주조미의 부족은 없지만, 주질을 담백하고 부드럽게 하기 위해 원료 백미의 중량 가운데 10% 정도의 양조용 알코올을 더한다. 알코올을 전혀 더하지 않고 제조한 술은 준마이주라고 표시할 수 있다. 

 

에도 시대의 주조. 술빚음을 하고 있다. 『日本山海名産図会』에서

 

 

전국을 잘 발효시켜서 술이 남은 당분을 줄이면 산뜻한 쌉쌀한 맛이 되고, 당분을 많이 남기면 달달한 맛이 된다. 일본술의 도度는 쌉쌀한 맛인지, 달달한 맛인지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물에 대한 술의 비중을 부표식 비중계로 측정해 당분이 적은 쌉쌀한 술은 플러스 지수로, 당분이 많은 달달한 술은 마이너스 지수로 표시한다.

 

 

 

4. 에도에서 술 많이 마시기 대결이 유행

일반 민중이 일상에서 음주를 즐기게 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다. 그때까지 술은 주로 상류 계급이 즐기는 것으로, 민중은 관혼상제 등 특별한 날에만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에도 시대가 되면 농업, 어업, 상공업이 발달해 민중의 생활도 돌연 풍요로워져서 일상적으로 술을 마시는 여유가 생겼다. 겐로쿠元禄 11년(1698) 막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주조장은 2만 채, 양조량은 92만 섬(16.6만 킬로리터)이기에, 당시 인구 1인당으로 치면 연간 3되, 5.5리터이다. 

그러나 에도의 주민은 놀라울 만큼 다량의 술을 마셨다. 대소비지인 에도에서는 간사이의 이타미伊丹, 이케다池田, 나다灘에서 양조된 양질의 술이 술 전용 운송선으로 운송되었다. 이들 상방에서 아래로 향한 술은 분세이文政 4년(1821)에는 연간 122만 통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도의 인구 1인당으로 치면 4말들이 술통이 1통, 72리터가 되기에, 알코올로 환산하여 비교해 보면 현대인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알코올을 마시고 있었다. 

술의 소매가는 1되가 250문, 약 5000엔으로, 술집에서 마시면 데운 술 1홉이 20문에서 30문, 약 500엔이었다. 장인들의 일당은 400문 정도이니까 술은 그리 싼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에도에는 200채가 넘는 술집이 있고 곤약 조림, 고등어 된장조림 등의 안주는 한 접시 4문이었다. '오뎅에는 데운 술'이라 말하듯이, 도쿠리로 데운 술을 마신다는 세계에서도 진귀한 풍습이 에도 시대에 퍼졌던 것이다. 그러나 술집이 술을 물로 희석하는 일이 횡행하여 금붕어주(금붕어가 헤엄칠 정도로 옅음)나 소나기주(소나기가 지나간듯이 금방 술이 깸) 등이라는 형편없는 술이 있었던 것 같다. 

 

 

에도의 술 대결. 지오우보우 다루츠기地黄坊樽次, 『水鳥記』에서.

 

 

술꾼들이 모여 음주양을 겨룬 술 대결의 기록이 몇 가지 남아 있다. 분카文化 12년 센쥬슈쿠千住宿의 주인 나카야로쿠 우에몬中屋六右衛門이 열었던 센쥬 술싸움에는 술꾼 100명이 모여 1되들이, 3되들이 등의 큰 잔으로 마시는 경쟁을 했다. 안주는 알집 절임, 꽃소금, 잘잘한 매실, 닭꼬치 등을 준비해 1잔을 다 마실 때마다 예기(芸妓)가 술을 따르는 것이다. 이때는 고야마小山의 사베에左兵衛라는 남자가 7되 5홉을 다 마셔서 우승했다고 전해진다. 분카 14년 료우고쿠両国의 만파치로우万八楼, 요로즈야万屋(잡화점) 하치베이호우八兵衛方에서 개최된 야나기하시柳橋 술 먹기 대결에서는 68세의 사카이야 츄우조堺屋忠蔵가 3되들이 잔으로 3잔 마시고, 30세의 코이야 리베이鯉屋利兵衛가 3되들이 잔으로 6잔 반을 마셨다고 <토원소설兎薗小説>에 써 있다. 1말 9되 5홉, 35리터의 술을 다 마셨다니 놀랍다. 에도 시대의 기록에는 종종 과장이 있지마, 쇼와 2년(1927) 사이타마현埼玉県 쿠마가이시熊谷市에서 열린 기업조합 주최 '쿠마가이 대주회大酒会'에서 우승자가 1말 2되를 마셨다는 것은 확실한 기록이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일본술의 소비는 막부 말의 3배로 증가해 1인당 연간 1말, 18리터를 마시게 되었다. 맥주, 위스키, 와인 등의 양주도 생산하게 되었는데, 최초는 완전 희귀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급되지 않았다. 메이지 34년(1901)의 주세 통계에 의하면, 전국 주조장은 1만3000채, 양조 섬 수는 643만 섬(83만 킬로리터)이다. 그러나 드디어 국산화를 할 수 있게 되었던 맥주의 제조양은 겨우 4.5만 킬로리터였다. 소주는 5만 킬로리터, 와인은 단맛 포도주를 제하면 0.03만 킬로리터였다고 추정된다. 

맥주, 와인, 위스키 등의 양주 소비는 그 뒤에도 별로 늘어나지 않고, 2차대전 직전까지는 일본술이 일본의 술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쇼와 10년(1935) 전후의 연간 생산량은 보면, 일본술이 73.6만 킬로리터, 맥주 19.7만 킬로리터, 소주 9.6만 킬로리터, 미림 1.8만 킬로리터, 증류주 2.3만 킬로리터, 합계 107만 킬로리터로, 일본술이 전체의 69%를 차지하고 있다. 위스키, 과실주(와인)의 생산량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아마 1000킬로리터 이하였음이 틀림없다. 

 

막부 말기의 술집 풍경. 입구의 미닫이문에는 '고급주 800문 선물주 80문'이라 적혀 있다. 『揚酒屋賑ひの図』에서.

 

 

 

 

5. 전쟁 이후는 일본술에서 맥주로 대체되다

2차대전 이후 식생활이 서양화되어 일본식을 먹는 일이 줄자 일본술을 마시지 않게 되고, 대신해서 맥주를 자주 마시게 되었다. 전쟁 이전까지는 술이라 하면 일본술로 정해져 있었는데, 전쟁 이후에는 사정이 확 변한 것이다. 일본술의 소비량은 쇼와 52년(1975) 166만 킬로리터를 정점으로 그 뒤는 계속 감소해 현재는 60만 킬로리터, 전체 주류의 7%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인당으로 치면 연간 4.7리터(2되6홉)이다. 

이것과 반대로 전쟁 이전에는 31만 킬로리터에 지나지 않았던 맥주는 전쟁 이후 식생활의 구미화에 수반해 생산량이 급증해 헤이세이 6년(1994)에는 719만 킬로리터에 달하여 국민 1인당 연간 58리터, 500밀리리터 캔으로 116캔을 마시게 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전쟁 이전에 비해 맥주의 생산량은 23배, 1인당 소비량은 13배나 증가한 것이다. 소비량으로 비교하면, 전쟁 이전 일본에서 마시는 주류의 70%를 독점하던 일본술을 대신해 전쟁 이후는 맥주가 70%를 점하게 되었다. 

원래 어느 나라에서나 술은 그 나라의 민족주를 계속 마신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천 몇백 년 동안 마셔오던 민족주, 일본술을 대신해 외래의 맥주를 즐겨 마시게 된 것이다. 그 나라의 전통주가 외국에서 이입된 술로 이렇게까지 단기간에 교대된 것은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특이한 현상이다. 

일본술에 대신해 맥주를 좋아하게 된 것은 식생활이 서양화된 것과 큰 관련이 있다. 전쟁 이전의 가정에서는 양식은 진귀한 것이었는데, 전쟁 이후는 햄에그, 비엔나 소시지, 햄버거, 새우튀김, 돈카츠, 불고기, 교자, 고기만두, 스튜, 그라탕, 스파게티 등을 먹는 것이 일상적이 되었다. 또한 여성의 60%가 직업을 가지고 일하게 되어, 식사 만들기에 걸리는 시간과 수고를 가능하면 줄이고, 저녁 반주의 술안주를 특별히 준비하는 일도 적어졌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와 함께 고기 요리나 기름 요리를 분주하게 먹는 저녁밥에는 간편히 마실 수 있는 맥주나 츄하이가 어울리는 것이다. 술안주를 음미해 차분하게 마시는 일본술의 차례를 적어질 뿐이다. 좌식 자리에서 일본술을 마시는 주연은 드물어지고, 수작과 잔 돌리기 등 일본의 독특한 술문화도 폐기되어 버렸다. 

원래 술과 요리는 옛날부터 차의 두 바퀴처럼 제휴해 발달해 온 역사가 있다. 일본 요리는 관혼상제의 주연 요리로 발달해 왔기에, 일본술을 마시느 데에 적합한 식단이 많다. 회와 반찬, 무침 등은 일본술을 차분히 마시는 데에는 상성이 좋은데,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 전쟁 이후 일본인이 맥주를 마시게 된 것과 전통적인 일본 요리가 조락한 것은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술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도 일본 요리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생활 행동이 다양해지면 마시는 술의 종류가 늘어 마시는 장소도 다양해진다. 최그의 주류 소비량은 전부 하여 890만 킬로리터인데, 그 64%는 맥주와 맥주 계통 음료이며 11%가 소주의 갑류와 을류, 그리고 일본술이 7%, 와인이 3%, 위스키가 1%, 병이나 캔에 담긴 츄하이, 칵테일 등이 14%이다. 더하여, 음주를 하는 것은 식사를 할 때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포츠를 하고 난 뒤, 취미 모임에서, 또는 행락지 등에서, 가볍게 마시는 일이 늘었다. 그러한 때에는 역시 간편하게 마시는 맥주, 발포주나 츄하이 등이 선택되다. 이들 술음료는 취기를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청량음료나 커피, 챠를 마시듯이 기분전환을 위해, 또는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마신다. 논알코올 맥주, 논알코올 칵테일, 논알코올 츄하이 등 유사술음료가 인기를 끌어 슈퍼의 주류 매대에 늘어서 있는 것은 그 증거이다. 

지금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젊은이의 술 무관심이다. 음주 습관이 있는 젊은이는 최근 15년 사이 남녀 모두 크게 감소했다. 총무성의 가계 조사를 보아도 20대의 주류 구입 금액은 30대의 절반, 60대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스포츠나 야외 활동 등 젊은이의 즐길거리가 다양화된 것도 있지만, 그보다 한층 더 큰 이유는 지금까지의 수직사회가 수평사회로 변하고 핸드폰이나 메일의 보급으로 젊은이의 인간관계가 넓고 얕아져, 회사의 상사나 동료와 함께 마시는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구의 고령화가 진행되어 건강을 위해 음주를 줄이는 중장년층의 '술 무관심'도 심해졌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술을 즐기는 방식을 모색하고 '음주 소통'에 대신하는 소통 수단을 찾아야 한다. 

 

 

 

6. 술은 백약의 으뜸인가?

최근에는 음주가 건강에 장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져, 술의 소비가 감소하고 있다. 예전부터 '술은 백약의 으뜸, 허나 과하면 큰 해가 된다'고 말해 왔듯이, 과도한 음주는 여러 건강 장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적당량을 지켜 마시면 건강을 증진하게 된다. 

어떠한 술이라도 마시면 그 알코올의 대부분은 30분 이내에 체내로 흡수된다. 20-30%는 위에서, 70-80%는 십이지장과 공장空腸에서 흡수되어 혈액으로 이동한다. 혈액으로 이동한 알코올이 이성과 판단을 관장하는 대뇌신피질을 마비시키기에, 본능과 감정을 관장하는 대뇌구피질이 흥분해 '취기'가 발생한다. 이 '취기'에 의해 스트레스에서 해방됨과 고양된 심리상태를 구하여 인류는 고대부터 술을 마시고 취기를 계속 즐겨 왔던 것이다. 

혈액에 흡수된 알코올은 간장으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아세트알데히드를 거쳐 아세트산으로까지 산화되고, 아세트산은 최종적으로 탄산가스와 물로 분해되어 오줌과 호흡에 의해 체외로 배출된다. 대량의 술을 마시면 알코올에서 아세트알데히드가 대량으로 생성되어 일시적으로 체내에 축적된다. 이 아세트알데히드는 몸에는 독물로 작동해, 안면 홍조와 심장의 두근거름, 두통, 발한, 현기증, 구토 등 숙취 증상이 나온다. 

그래서 아세트알데히드를 재빠르게 무해한 아세트산으로 산화시켜 제거하기 위하여 알데히드 탈수소효소(ALDH)가 작용하는데, 이 효소에는 고농도의 아세트알데히드를 저농도로까지 분해하는 1형과, 저농도가 된 아세트알데히드를 신속히 분해해 제거하는 2형의 두 종류가 있고, 일본인이나 한국인 등 몽골리안 인종에게는 2형의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효소의 작용이 없든지, 또는 약한 사람이 많다. 일본인에 대해서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효소 2형의 유전자형을 조사해 보면, 비활성형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 약 5%, 저활성형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약 40%이며, 이러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든지, 또는 조금밖에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다. 구미의 백인, 아프리카 흑인의 유전자형은 누구나 활성형이기에 술에 강하다. 

또한 알코올이 분해될 때에는 활성산소가 많이 발생해 간장에 산화 스트레스를 주어 노화나 생활 습관병의 원인이 되는 일이 있다. 많은 양의 알코올을 습관적으로 계속 섭취하면 대부분의 장기에 장해를 일으킨다. 잘 알려진 질병은 지방간, 알코올성 간염, 간경변 등 간장 장해와 고혈압증, 식도암, 간장암, 장암 등의 위험성 증가, 그리고 알코올 의존증이다. 

그러나 거나하게 취기를 즐기는 적당한 음주라면 전혀 마시지 않는 것보다 마시는 쪽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1일 음주량이 알코올 환산으로 40그램 정도의 음주를 하는 집단은 전혀 마시지 않는 집단보다도 허혈성 심질환의 병에 걸리는 비율이 뚜렷하게 낮다는 것이 호눌루루에 사는 일본계 일본인, 7750인에 대해서 1977년에 보고된 이래, 적당량의 음주에 허혈성 심질환의 예방효과가 있다는 것이 20사례를 넘는 역학조가로 확인된다. 이들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는 알코올에 의한 혈액 속의 이로운 콜레스테롤의 증가, 일시적인 말초혈관의 확장과 혈압 저하, 혈소판 응집 억제 작용 촉진과 혈류의 순환 촉진 등에 의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미국인 남성, 4만7000명을 12년 동안 추적조사한 결과에서는 하루에 알코올 15-29그램을 1주일에 5회 이상 음주하는 집단은 2형 당뇨병에 걸리는 비율이 전혀 마시지 않는 집단보다 낮았다.

똑같은 결과가 일본인에 대해서도 확인된다. 후생노동성이 전국 14만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2일에 1번, 일본술로 1홉, 맥주로 500밀리리터 캔을 1캔 마시는 집단은 전혀 마시지 않는 집단에 비해 사망 위험이 36% 낮고, 매일 1홉 또ㅡㄴ 1캔을 마시는 집단도 13% 낮았다. 그런데 매일 4홉 또는 4캔을 마시는 집단은 사망 위험이 거꾸로 32% 상승했다.

더구나, 적당한 음주는 암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국립 암센터가 27만 명을 16년 동안 추적조사한 결과, 또 문부성 특정연구반이 13만 명을 7년 동안 추적조사한 결과 모두 매일 적당히 음주하는 집단은 폐암, 간암, 위암에 의한 사망률이 전혀 마시지 않는 집단보다 낮다는 것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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