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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식탁의 일본사 -제1장 쌀농사와 밥의 역사

by 石基 202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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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쌀농사는 야요이 시대부터 시작한다

 

일본인의 '먹을거리'와 가장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쌀인데, 벼는 일본열도에 원래부터 자생하던 것이 아니다. 벼의 원생지는 중국 대륙, 장강의 중하류역이라고 생각되며, 그곳에서는 7000년 전부터 논벼농사가 행해졌다. 이 논벼농사의 기술이 2천 몇백년 전에 도래인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던 경로에 대해서는 산동반도에서 조선반도 서해안을 경유해 기타큐슈에 전해졌든지, 또는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건너가 조선반도를 경유해 전해졌다고 생각된다. 일본 신화에서는 아마테라오오미카미天照大神가 황손,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를 토요아시하라豊葦原의 싱싱한 벼이삭의 나라에 강림시켰을 때 벼이삭을 주었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벼는 일본열도에 자생하지 않고 중국 대륙에서 전해진 작물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 몇백년 전, 죠몬 시대의 말기 수렵채집에 의존해서는 식량이 부족하시 시작할 무렵, 때마침 조선반도에서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다수의 도래인이 이주해 온 것이다. 벼는 고온이고 비가 많은 일본의 기후에 적응한 작물이었기에, 논벼농사는 몇백년 안에 전국에 퍼져 쌀이 일본인의 주식이 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 논 유적은 기원전 5세기 후쿠오카시 이타즈케板付 유적, 노다메野多目 유적이고, 가래와 괭이 등의 목제 농기구, 이삭을 따는 돌칼 등이 출토된다. 그곳에서는 120평 규모의 장방형 논이 여러 개 펼쳐져 있고, 모내기를 하던 흔적도 남아 있다. 큐슈 북부에서 시작했던 이 논벼농사는 그 뒤 어떻게 도호쿠에까지 전해졌을까? 기원전후, 야요이 중기부터 후기의 논 유적이 아오모리현의 스나사와砂沢 유적과 다레야나기垂柳 유적에서 발견되기에, 논벼농사가 큐슈부터 혼슈 북단에까지 전해진 데에는 500년이 걸렸다고 생각된다. 

벼는 수확량이 좋은 작물이어서, 한 알을 심으면 야요이 시대에도 100알의 쌀이 수확되었을 것이다. 품종개량이 진행된 현대에는 단 1포기(3알 파종)에서 2000알의 쌀을 채취할 수 있고, 밥공기로 절반 정도의 밥이 된다. 또한 저장성도 좋고, 맛있다. 벼라는 우수한 곡물을 손에 넣었던 덕분에, 일본의 선조는 식량을 찾는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생활에 여유가 생겼기에 인구가 늘어 마을이 커지고, 이윽고 국가가 되어 야마토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본의 나라는 쌀농사를 시작함에 의해 탄생했다고 말해도 좋다. 기원전 3세기 고대사로 유명한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히미코卑弥呼 여왕은 어떤 식사를 했던 것일까? 고대 먹을거리의 연구가 히로노 타카시廣野卓 씨는 야마타이국의 유적지라고 생각되는 나라현 마키무쿠纏向 유적에서 출토된 물고기나 동물의 뼈, 식물의 씨앗 등을 참고하여, 히미코가 먹었을 식사를 추정해 보았다. 그에 의하면, 주식은 쌀과 조를 찐 지에밥과 새고기와 물고기, 채소를 섞은 무른밥이고, 반찬은 어패류의 나마스鱠(토막)이나 소금구이, 건어물, 미역, 대황 등의 국, 소금 데침이고, 또는 소금 절임을 한 토란, 무, 순무, 머위, 달래 등과 복숭아, 감, 매실, 배, 참외 등의 과일, 밤과 칠엽수나 비자나무의 열매 등의 나무 열매, 그것과 미인주가 아니면 과실주이다.  

 

벼농사 기원지와 일본열도로의 전래길

 

 

야마타이국의 시대에는 논벼농사가 전국으로 퍼져 쌀의 수확이 늘었기 때문에, 쌀을 죽으로 삶든지 또는 쪄서 지에밥으로 먹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인의 습속을 전하는 중국의 역사서 <위지魏志 왜인전>에는 "왜국에는 59개국이 있고, 그 가운데 야마타이국은 7만여 호, 토우마국投馬国은 5만 호이다" "왜의 땅은 온난하여 겨울에 여름 채소를 먹는다" "음식에는 고배高杯를 사용해 손으로 먹는다"라고 되어 있기에, 생선 토막이나 건어물, 생채소, 과일 등을 쟁반에 담아 손으로 먹었던 것 같다. 쌀이 충분히 나지 않아 도토리나 호두 등의 나무 열매도 먹어야 했던 야요이 시대와는 달리, 히미코 시대가 되면 벼농사가 퍼져 쌀의 수확이 늘어서 쌀로 만든 지에밥이나,  물기 많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어패류나 채소를 반찬으로 먹었던 것 같다. 

 

 

2. 수렵채집으로 살았던 죠몬인

 

여기에서 이야기를 그보다 1만 년의 옛날로 돌려 본다. 일본열도에 인류가 나타난 것은 약 3만 년 전으로 생각된다. 그 무렵은 아직 빙하기였기에 해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낮고, 소우야宗谷 해협도 쓰시마対馬 해협도 육지나 다름 없었기에 구석기인은 사냥감을 구하러 시베리아부터 홋카이도로, 또는 조선반도부터 얕은 해협을 건너 큐슈로 이동해 왔을 것 같다. 그들의 생활유적에서는 조리에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불탄 잔해, 모닥불의 흔적인 불탄 흙, 대형 짐승의 뼈가 발견된다. 아마 뗀석기를 창날로 붙인 투창으로 맘모스, 나우만 코끼리, 엘크, 큰뿔사슴 등을 사냥하고, 부엌칼 대신 석기로 고기를 잘라 모닥불에 태우든지 구워 먹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먹을거리에 불을 더하면 부드럽고, 먹기 쉬워지며, 맛있어진다. 동물도 나무 열매의 껍질을 벗기거나, 조개의 껍질을 깨거나 하지만, 불이나 도구를 쓰지는 않는다. 불과 도구를 써서 먹을거리를 처리하는, 즉 조리하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며 먹을거리 문화의 시작인 것이다. 

약 1만년 전에 최후의 빙하기가 끝나자 기후가 급속히 온난해져 일본열도의 지형과 생태계는 크게 변화했다. 우선, 해수면이 크게 상승해 바닷물이 내륙부로 침입해 복잡하게 뒤엉킨 해안선이 생겼다. 식물의 생태도 변하여 한랭한 기후에 적응해 번성했던 침엽수림이 북쪽으로 후퇴하고, 그때까지 큐슈 남부부터 아마미 제도에 자라던 붉가시나무나 모밀잣밤나무 등의 상록조엽수림이 서일본에 퍼지고, 동일본에서도 온난성 너도밤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등의 상록활엽수림이 무성해졌다. 초원이 숲으로 변하자 나우만 코끼리와 큰뿔사슴 등 대형 짐승은 멸종하고 일본사슴과 멧돼지가 나타났다. 

이 시대에 등장한 죠몬인은 조엽수림, 활엽수림에서 도토리, 밤, 호두, 칠엽수, 모밀잣밤나무 등의 나무 열매, 산풀, 버섯을 채취하고, 사슴과 멧돼지, 토끼 등의 작은 동물, 꿩과 산새, 오리, 비둘기, 메추리 등의 야생 조류를 활과 화살로 포획해 식량으로 삼았다. 복잡하게 뒤엉킨 내만内湾과 하천에서는 연어, 송어, 도미, 농어, 전갱이, 정어리, 붕어, 잉어 등의 물고기, 대합과 바지락, 전복, 굴, 소라, 재첩, 우렁이 등의 패류가 풍부하게 잡혔다. 해안에서는 성게, 해삼 등의 갯바위 생물, 미역과 대황, 모자반 등의 해초를 땄다. 다량으로 얻은 나무 열매와 어패류를 햇볕에 말려 저장해 두고 먹을거리가 적은 계절에 대비하기도 했던 것 같다. 각지의 패총 유적에 버려져 있는 물고기의 뼈, 조개껍질, 나무 열매의 껍질 등으로 추정하자면, 당시의 일본열도는 자연의 은혜가 가득한 보고였던 것 같다. 

죠몬인의 식생활에 일어났던 혁명적 진보는 석기 외에 토기를 사용한 것이다. 바닥이 평평한 토기에는 나무의 열매 등을 보존할 수 있고, 뾰족한 바닥의 깊은 그릇에 물을 넣고 불에 올리면 고기나 조개를 삶을 수 있다. 덧나무나 머루의 열매를 으깨어 저장해 놓으면 발효되어 술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영양의 절반 정도를 도토리, 밤, 칠엽수 등의 열매로 섭취하고, 나머지를 어패류, 극히 일부를 조수의 고기로 섭취했던 것 같다. 도토리나 밤 등은 칼로리가 100그램당 250킬로칼로리나 되는 훌륭한 먹을거리였다. 아오모리시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서는 밤나무를 재배했던 것 같은 흔적이 있다. 죠몬인의 뼈 형태나 탄소, 질소 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추정하면, 죠몬인의 체격과 영양 상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은 상태였다고 하는데, 먹을거리가 부족해 기아 상태가 되기도 했기에 평균수명은 30세 정도였다고 한다. 

가족이 사는 주거는 지면을 파내려가 겨울의 추위를 막고, 중앙에 기둥을 세워 새로 지붕을 인 수혈식竪穴式 주거이고, 봉당에 화로를 놓아 취사를 했다. 이러한 주거가 수십 채, 공용 건물과 묘를 둘러싸고 고리 모양으로 배치된 고리 모양 마을이 이미 생겨나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고대의 문명은 예외없이 큰강 유역에서 농경을 시작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곳에는 상류부터 홍수가 날라온 비옥한 흙이 퇴적되고, 관개의 편의성도 좋아서 곡식이 잘 자랐기 때문이다. 최후의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년 전, 여기에 정착한 인류는 쌀과 보리를 재배하는 농경을 행하여 더욱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식량을 구하는 노고에서 해방되어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인구가 증가하고, 마을이 커져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며, 문명 사회가 출현한다. 기원전 3000년 무렵에 흥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그리고 황하와 장강 중류의 문명은 모두 농경을 시작함으로써 흥했던 것이다. 

그것과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아직 수렵채집과 어로로 살아가는 죠몬 시대가 이어져, 농경 같은 농경은 끝내 시작되지 않았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 수렵채집의 생활을 1만 년이나 계속해 온 것은 세계의 먹을거리 문화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일본열도의 복잡한 지형과 풍부한 생태계가 가져오는 자연의 혜택이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데 충분했기 때문에, 농경은 필요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죠몬인의 은혜로운 식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았다. 기원전 수백 년 무렵이 되면 기후가 서서히 한랭해져 식물의 생태가 바뀌어 산야에서 채취할 수 있는 식량이 적어졌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인구가 감소하고 마을의 규모는 갑자기 작아지고 있었다. 그 시기에 벼농사의 기술이 대륙에서 전해졌던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고 해야 한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농경을 통해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않으면 문명이 흥할 수 없었고, 일본에서는 벼농사가 전국으로 보급되는 고분 시대가 그 시기에 해당한다. 

 

 

3. 벼농사로 일본의 나라를 지탱하다

일본 최초의 통일 왕조, 야마토 왕권이 수와 당의 정치체제를 모방해 본격적인 율령국가로 이행한 것은 7세기부터 8세기의 야스카飛鳥, 하쿠호우白鳳、텐표우天平 시대이다. 율은 오늘날의 형법, 령은 행정법과 민법에 상당하는 것으로, 율령에 기반해 관제, 신분제, 전제田制를 정하여 민중을 통치하는 중앙집권체제가 율령제이다. 분부文武 왕의 대보大宝 원년(701), 대보 율령이 제정되어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화려한 텐표우 문화가 개화한 8세기, 나라奈良의 도시 경제를 지탱한 것은 쌀이었다. 벼농사가 율령 국가의 세수를 조달하는 유일하고 중요한 산업이었던 것이다. 왕이 주관하는 제사의례 중에서도 가을에 수확한 쌀을 신에게 바쳐 풍작을 감사하는 신상제新嘗祭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고토쿠孝徳 왕의 타이카大化 2년(646) 타이카의 개신改新이 행해져 왕족이 관직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전답과 하인을 제하고 모든 전답과 영민을 공유하는 공지공민公地公民 제도가 발족되어 공민에게는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한다는 반전수수법班田収授法이 실시되었다. 그때까지는 왕족, 호족이 경작 부민을 사유하고, 그 수확물을 수확하던 것을 고친 것이다.

공민 남자에게는 2反(726평), 여자에게는 1反120步의 논을 지급하고, 가구마다 수확한 쌀을 조租로 물납시킨 것이다. 구분전 1반에서 수확할 수 있는 벼는 평균하여 쌀로 8말, 120킬로그램 정도였다고 생각되기에, 구분전 2반에서 수확할 수 있는 쌀은 1섬6말이다. 1일분으로 하면 쌀 4.3홉이다. 쌀과 절임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 1인 하루에 쌀 5홉, 1년에 1.8섬을 필요로 하기에, 이것으로 한 가구를 부양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 구분전 1반당 벼 1단 5다발을 조租로 공출해야 했다. 쌀이 잘 되는 上田이라면 수확량의 3%, 下下田이라면 10%에 상당한다. 그외에 용庸(노역), 조調(특산물을 공출함), 병역 등의 과역을 부담하기에 농민의 생활은 더욱 괴로워진다. 출거出挙라고 하여 농민에 대하여 볍씨를 1반당 2단을 대부해주고 가을 수확에서 50%의 이자를 붙여 반납시키는 제도도 있어, 그 이자는 조租와 함께 지방관청의 중요한 수입이 되었다. 귀족과 사찰과 신사의 사유지를 빌려 경작하면, 그 10배, 때로는 100배의 이자를 냈다. 농민 중에는 가혹한 부담을 면하고자 도망하든지, 귀족의 노비가 되는 일이 많았다. 

조정은 벼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타이카 2년(646)에 금주령을 반포해 농경이 바쁜 계절에 농민은 물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지 못하도록 명한다. 나아가 덴무天武 4년(675)에 반포된 육식금지령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소, 말, 개, 원숭이, 닭을 죽여 먹지 못하게 한다는 포고였는데, 실은 농민이 농경에 부리는 소와 말을 죽이는 걸 금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금주령과 육식금지령은 모두 나라의 경제를 지탱하는 벼농사를 장려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4. 일본 나라의 재정과 쌀의 가격

논벼농사가 전국으로 퍼지자 수확한 쌀을 일원적으로 관리할 지도자가 나타나 나라 만들기를 시작한 것이 고분 시대이다. 쌀은 사람들의 주식이 되고, 쌀농사는 나라의 재정을 조달하는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그 이후로 최근까지인 2000년 사이, 쌀농사가 나라의 경제와 사람들의 삶을 계속 지탱해 온 것이다. 

고토쿠孝徳 왕의 타이카 2년(646) 타이카 개신에 의해 모든 논밭, 영민을 공유한다는 공지공민 제도가 발족되어 성인 남자에게는 2반, 여자에게는 1반 120보의 논을 지급하고, 가구마다 수확한 쌀의 10%를 전조田租로 물납시킨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나라 시대의 전국의 경지면적은 100만 정보(약 30억 평)로, 그 가운데 논은 70만 정보였다고 추정할 수 있기에 수확할 수 있는 쌀은 약 470만 섬, 70만 톤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에 납입되는 전조미는 7만 톤이다. 당시 쌀의 경제가치는 잘 모르지만, 텐표우 시대의 관리나 병사의 일당이 쌀 8홉과 술 4홉이었던 것으로부터 추정하면, 현재의 6000억 엔 정도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쌀을 나라의 주요한 재원으로 하는 경제체제는 그 이래 메이지가 되기까지 1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쌀을 통화로 하는 석고제石高制(코쿠다카사이)를 채용했다. 전국의 논과 밭, 가옥 부지 등 모든 토지의 경제가치를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쌀의 섬 수로 견적을 내, 그것을 기반으로 연공미를 징수해 막부와 여러 번의 재원으로 하는 제도이다. 전국의 총 석고는 3000만 섬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에도 후기의 총 경지면적은 296만 정보, 그 가운데 논은 164만 정보였기에 실제로 수확했던 쌀은 약 2400만 섬, 360만 톤이었을 것이다. 쌀 1섬은 당시 1량으로 매매되었기에, 1량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약 13만 엔이라 한다면 쌀의 총 생산액은 3조 엔이 된다. 연공을 그 40%라고 한다면, 1조 2000억 엔이 막부와 여러 번의 수입이 되었다. 참고로, 현재 쌀의 생산량은 약 800만 톤, 금액으로 1조 8000억 엔이며 농업 총생산액의 20%를 차지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국세 수입은 약 50조 엔이기에, 쌀의 국가 재정에 대한 기여는 현저히 감소했다고 해도 좋다. 

에도 시대, 현미는 1섬, 1량으로 판매되었지만, 쌀가게의 정미 비용이나 이윤을 더하면 소매가는 1되, 90문文, 현재 가격이라면 1800엔 정도였다. 1킬로그램이 1200엔이기에, 현재의 소매가 1킬로그램, 350엔에 비하면 3배 이상이다. 막부 말인 가에이嘉永 4년에 막부가 조사한 바, 에도에는 쌀 도매상이 910곳, 소매를 하는 쌀가게가 2919곳이었다. 주민 350명, 세대로 70세대에 1곳의 쌀가게가 있었던 셈이다. 

무사는 쌀을 현물로 지급받지만, 장인들은 쌀을 사야 했기에 쌀 대금이 수입의 30% 가까이 되었다. 쌀 대금이 가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이 정도로 큰 것은 메이지, 다이쇼大正 시대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2차대전 이전에 태어난 저자는 아이 무렵, 쌀은 한자로 八十八이라 쓰듯이 농민이 많은 수고를 들여 만드는 것이기에, 한 알의 밥알이라도 함부로 하면 벌이 마땅하다고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2차대전 이후는 쌀밥 중심의 식생활이 완전히 바뀌어 서구화되었기에 쌀의 소비가 줄어, 현재 아이 3명의 표준가정이라면 쌀은 1개월에 15킬로그램, 6000엔이면 충분하기에 쌀 대금은 생활비의 2%에 지나지 않는다. 

 

 

 

5. 세 끼 밥을 먹는 건 에도 시대부터

일본에 전래해 온 벼는 쌀알이 둥글둥글한 온대 자포니카종의 찰벼이기에, 밥을 지으면 점성과 단맛이 강해진다. 야요이인들은 돌칼로 베어 거둔 벼이삭을 나무절구와 공이를 사용해 탈곡하고, 토기 사발을 사용해 수분이 많은 물죽(汁粥), 또는 적은 된죽(固粥)으로 쪄서 먹었다. 고분 시대가 되면 시루(사발 바닥에 구멍을 뚫은 찜기)로 찐 지에밥을 먹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수확량이 많은 멥쌀을 재배하게 되자, 철가마솥을 사용해 여분의 수분이 없어지기까지 끊여 찐 공주밥(姫飯)을 먹게 되었다.  

덧붙여서 쌀밥을 '밥(めし)'이라 부른 것은 무로마치 시대부터이며, 그 이전은 '밥(いい)'이라고 했다. '식사(ご飯)'라고 하는 것은 꽤 새로워 에도 시대 말기부터인 듯하다. 에도 시대에는 '맘마(ママ)'라는 말도 썼다. 유아 놀이의 소꿉장난의 맘마이다. 거기에 정중어를 붙인 것이 오맘마(御飯)이고, 아이나 여성이 썼다. 현재, 식당에서는 종업원이 빵인가요, 라이스인가요 하고 묻는다. 라이스란 흰그릇에 담은 밥을 말하는 것 같다.

일본인이 하루에 세 끼, 식사를 먹게 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다. 전기나 가스가 없었던 시대이기에 밥을 짓는 건 주부에게 큰일이었다. 우선, 아궁이에 땔감을 태우고 씻은 쌀을 철제 가마솥에 옮겨 물을 부어 아궁이에 건다. 가마솥에는 솥전이 달려 있어 아궁이에 푹 빠져 불길이 허투루 도망가지 않는다. "최초는 홀홀, 중간은 훨훨, 아이가 울어도 뚜껑을 열지 마라'라고 아궁이의 불길을 조절해, 두툼한 목제 뚜껑을 결코 열지 않고 여분의 수분이 사라지기까지 강불로 끓여 찌는 것이다. 에도의 큰 가게에서는 밥짓는 여성을 고용할 정도로 수고가 드는 큰일이었다.

 

밥을 짓는 것은 큰일. <日用助食竈の賑ひ>에서

 

 

 새벽 6개의 종(여름은 4시, 겨울은 6시)이 울리면, 에도의 공동주택에서는 주부가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짓기 시작한다. 아침밥은 갓 지은 밥에 된장국, 절임, 말린 생선, 무말랭이 조림, 콩조림 등의 1국 2찬이다. 밥을 짓는 데에는 수고가 들기에 아침에 하루치 밥을 한꺼번에 지어, 아침에는 따끈한 밥을 먹지만 점심은 남은 찬밥을 남은 반찬과 먹으며, 저녁에는 찬밥을 물에 말아 절임만 곁들여 먹어치운다. 상류사회의 교토, 오사카에서는 아침은 죽을 먹고, 점심에 밥을 짓고, 저녁은 찬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당시 쌀 가격은 현재보다 몇 배 비쌌기에 에도의 소상공인의 가정에서는 물론, 메이지가 되어 2차대전 전에도 수입이 적은 가정에서는 식비의 절반이 쌀값으로 소비되었다. 맘마(밥)를 먹이는 것은 곧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고도 경제성장 덕분에 사람들의 수입이 늘었기에, 일을 하고 있으면 밥을 먹는 데에 큰 노고는 필요없다. 쌀값은 싸져 식비의 겨우 4%로 끝나게 되었다. 밥을 짓는 일도 편리해졌다. 전기밥솥을 사용하면 자고 있는 사이에 밥이 되어, 그대로 보온해 두면 세 끼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 랩에 싸서 냉동보존해 놓은 밥이나 사온 팩에 담긴 밥을 전자렌지에 "칭" 해도 좋다. 

 

 

 

6. 밥이 맛있는 일본식

가마솥에 잘 지은 흰쌀밥만큼 맛있는 것은 없다. 한 알 한 알의 밥알이 은색으로 빛나고, 씹으면 알맞게 찰기와 은은한 단맛이 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고, 된장국과 절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몇 그릇이나 먹을 수 있다. 하루에 쌀 5홉 정도를 먹는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훌륭한 먹을거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맛있는 밥을 2000년 전부터 주식으로 삼아 온 일본인은 행복한 사람이다.

일본의 전통식, 일본식은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발달해 왔다고 해도 좋으며 밥에 어울리게 요리가 발달한 것은 물론인데, 밥 자체의 맛을 살린 비빔밥이나 섞음밥도 많다. 초여름이라면 푸른 완두콩을 밥에 넣은 콩밥, 제철인 꽃돔을 밥에 넣은 도미밥, 죽순밥, 가을이라면 송이밥, 밤밥, 겨울에는 굴밥 등이 있어, 모두 사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일본인의 감성에서 생긴 밥 요리이다. 

에도시대에 출판된 요리책 <명반부류名飯部類>에는 흰쌀밥, 지에밥, 붉은밥, 주먹밥, 죽, 잡탕죽 끓이는 방법과 콩밥, 채소밥, 염색밥, 생산밥, 닭고기밥, 초밥 등 참으로 148종류의 밥 요리 레시피가 소개되어 있다. 유부, 당근, 우엉을 잘게 잘라 우려서 밥을 지으면 섞음밥(かやくご飯), 그걸 달게 익힌 유부에 담으면 유부초밥이 된다. 지역 특산의 물고기, 야채를 듬뿍 사용한 뿌림밥(散らし寿司)이나 김밥은 축제나 잔치의 진수성찬이었다. 주먹밥이나 찻물밥은 간단히 만드는 궁극의 밥 요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식은 밥에 어울리도록 국, 채소, 절임을 갖추는 것이 원칙이다. 다실에서 대접받는 1국 3채의 간소한 간단요리에서도, 또는 무로마치 시대, 무가의 연회에 나왔던 8국 23채라고 하는 호화로운 혼젠本膳 요리에서도 모두 주역은 상의 중앙에 놓인 밥과 절임이다. 현대의 회식(會席) 요리에서도 식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밥과 된장국, 절임이다.

반찬을 옛날에는 '맞춤(아와세あわせ)' 또는 '순경(오마와리おまわり)'라 했던 건 밥에 맞추는 것, 또는 밥 주변에 두는 것이란 의미이다. 지방이 희끗희끗한 소고기가 놓여 있든 참치 뱃살이 나오든 그건 밥에 대한 부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밥 없이 일본식은 없음'인 것이다. 

뜩운 흰쌀밥에 날계란을 얹고, 또는 매운 명란, 구운김, 낫토, 후리카케 등을 얹어 먹는 건 밥맛에 감명을 받는 지극히 행복한 때이며, 일본인에게는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때이다. 초밥이나 장어덮밥은 회나 구이를 그대로 먹는 게 아니라 움켜쥔 초밥이나 양념이 스며든 따뜻한 밥과 함께 볼이 미어지게 먹을 때 더 맛있다. 똑같은 이유로, 튀김덮밥, 계란덮밥, 돈카츠덮밥, 소고기덮밥 등의 덮밥류가 선호된다. 또 카레라이스, 하야시라이스, 오무라이스, 치킨라이스 등은 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고안된 양식 밥 요리이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쌀농사 지대에서는 밥과 다진 재료를 함께 기름에 볶는 볶음밥이 있고, 올리브유나 버터로 쌀을 물고기나 채소를 함께 볶아 국물로 끓이는 빠에야와 리조또가 있는데, 밥의 맛있음을 한껏 살린 일본의 밥 요리에는 당할 수 없다. 

일본인들은 쌀밥을 애착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밥'이라 부른다. 옛 수도 교토에서는 사이좋게 지내자고 동료를 초대할 때 '밥이나 먹자'고 말을 한다. '밥을 먹는다'는 건 일본인에게 중요한 사회적 가치가 있으며, 프랑스 혁명 때 앙투아네트 왕비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돼지"라고 했듯이 태평하게 대체하는 게 효과 있는 건 아니었다.

 

 

 

7. 쌀 부족에 시달린 2000년의 역사

일본인은 쌀을 먹는 민족이라 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쌀은 어느 시대에나 끊임없이 부족했다. 벼는 고온다우의 일본 기후에 적합해 수확량은 많지만, 국토의 70%가 숲이고 논을 만들 수 있는 평지가 적기 때문에 벼농사를 시작한 야요이의 옛날부터 최근까지 민중이 충분히 먹을 만큼 쌀은 수확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쌀을 지어도 공물로 차출되고, 쌀밥을 먹을 수 없어 조나 피의 잡곡밥으로 참았던 것이다. "햇님과 쌀밥은 어디에 있어도 따라온다"라고도 했지만, 실은 그렇지는 않았다. 일반 민중이 어떻게든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에도시대부터이며, 누구나 흰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야요이 시대의 도로登呂 유적을 조사해 보아도 논에서 수확할 수 있는 쌀은 주민이 필요로 하는 절반도 안 되어, 죠몬 시대처럼 나무 열매를 채취해 부족함을 보충했던 걸로 보인다. 나라奈良 시대의 농민은 반전수수班田収授의 제도에 의해 대여된 구분전口分田에서 수확된 쌀의 30%를 세금 등으로 징수되고 수중에 남은 쌀 1일 약 5홉으로 한 가구가 살아갔다. 밥과 매우 적은 양의 반찬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데에는 하루에 쌀 5홉이 필요한데, 당시의 농민은 5홉여의 쌀을 가족 여러 명이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 당시 농민의 비참한 생활에 분노하며 야마노우에 오쿠라山上億良가 읊은 <빈궁문답가貧窮問答歌>가 <만엽집万葉集>에 실려 있다. "봉당에 짚을 깔고 가족이 뒤섞여 자고, 며칠이나 밥을 짓지 못해서 아궁이에는 불씨가 없으며, 쌀을 찌는 시루에는 거미가 집을 짓는다"라는 형평이었다. 

그 뒤 어느 시대라도 새논을 개간하여 쌀의 수확량을 늘리는 노력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수확이 늘어도 인구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해 2차대전 전까지는 쌀 생산량이 6300만 섬, 950만 톤, 국민 1인당 9말, 130킬로그램, 하루로 치면 2홉4작, 360그램을 넘는 적이 없었다. 에도시대 하급 무사의 급여는 쌀로 지급되었는데, 1인 급여는 쌀 1섬, 150킬로그램이었던 점, 또한 메이지 육군의 병사 식사는 하루 흰쌀 6홉, 900그램을 기준으로 했던 점에 비교하면 쌀의 수확량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량에 부족했던 것이다. 

농민은 수확한 쌀의 대부분을 영주에게 바치고, 조나 보리를 먹고 살아야 했다. 빈발하는 기근과 전란에 의해 많은 식량 난민이 발생해 도시로 밀려와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가마쿠라 시대의 초기, 가모노 초메이鴨長明는 그의 저서 <방장기方丈記>에서 "오곡이 여물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라고 헤이안교 인구의 1/5에 이르는 아사자가 나왔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혼간지의 렌뇨蓮如 상인上人조차 오우슈우奥州 지방을 순례할 때 농가에서 받은 대접은 피죽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쿠로사와 아키라黒沢明 감독의 명작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는 당시 농민의 빈곤한 식생활이 묘사되고 있다. 쌀밥을 먹여준다는 약속으로 사무라이를 고용해 마을을 산야의 무사의 약탈로부터 지키려는 농민의 이야기이다. 잡곡밥으로 견디는 농민이 먹여준 한 그릇의 흰쌀밥 때문에 목숨을 던지는 사무라이들의 이야기는 전혀 지어낸 이야기 같지 않다. 

에도 시대가 되어도 막부는 농민에게 쌀은 공물로 차출하고 잡곡밥을 먹으며 살아가도록 강제했다. 게다가 벼는 흉작이 될 때마다 대기근이 일어났다. 막부 말에 일어난 덴포우天保의 대기근에서는 단바丹波로부터 교토로 들어가는 쌀이  예년의 1/40로 줄어 쌀값이 3배로 뛰어올랐다. 민중의 불만은 높아져 오오사카에서는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塩平八郎의 난이 일어났다.

쌀 부족은 메이지가 되어도 계속되었다. 메이지 14년(1881) 벼의 작부면적은 259만 헥타르이고, 477만 톤의 쌀을 수확했는데, 1인당으로 치면 124킬로그램으로, 에도 중기와 비교해 조금도 증가하지 않았다. 메이지 20년 무렵에도 도시부에서는 흰쌀밥을 먹었는데, 농촌에서는 보리, 잡곡이 60%, 쌀이 40%인 잡곡밥을 먹고 있었다. 쇼와 58년(1983) 전국의 인기를 모았던 NHK 아침 연속 드라마 <오싱>에는 메이지 40년대 야마가타현 가난한 마을의 빈곤한 농가의 삶이 묘사된다. 주인공 오싱이 태어난 농가에서는 쌀이 부족해서 무밥을 먹으며 견디고 있었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1차대전 이후에 일어났던 호경기에 의해 도시부의 쌀 수요가 증가하자 쌀 부족은 더욱더 심각해졌다. 그래서 조선, 타이완, 나아가서는 미얀마, 베트남에서 쌀 수입이 시작되어, 많을 때는 수입 쌀이 200만 톤에 가까워 국내의 쌀 자급율이 85%로 떨어졌다. 다이쇼 7년에는 쌀 독점이 일어나 쌀 가격이 4배나 올랐기에, 전국 각지에서 주부들이 들고일어나 쌀가게로 몰려가 가격 인하를 강요하는 "쌀 소동"이 일어났다. 월수입이 15엔 정도의 저소득가정에서는 식비의 60%가 쌀 대금으로 소진되었기에 무리도 아니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쌀 부족이 다시 심해졌다. 농촌에서는 성년 남자가 징병되어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쌀 생산량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정부는 쌀을 배급제로 하여 1인 1일 2홉3작, 345그램, 연간 126킬로그램을 확보하도록 했는데, 전쟁 말기에는 그것도 할 수 없어졌다. 정쟁에 패한 1945년에는 쌀 생산량이 550만 톤, 1인당 77킬로그램으로까지 떨어져 버렸다. 고구마, 호박, 또는 콩깻묵, 밀기울, 쌀겨, 고구마줄기까지 주식 대신 먹는 '대용식'으로 굶주림을 달래야 했다. 1946년에는 극단적인 쌀 부족으로 항의하는 데모대가 왕의 거처에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4년 뒤 국회에서는 제3차 요시다 내각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재무상이 "가난한 사람은 보리밥을 먹어라"라고 답변했다가 질책을 받아 난리가 나는 등 쌀 부족을 보여주는 화제는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쌀농사를 시작하고나서 2000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된 쌀 부족이 돌연 해소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인 196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쌀 생산량이 사상 최고인 1445만 톤, 1인당 144킬로그램으로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쌀의 소비가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세 끼 중 한번은 빵을 먹게 되고, 고칼로리 고기 요리나 기름 요리를 먹게 되었기에 쌀을 먹는 것이 전쟁 이전의 1/3로 줄어 1인당 연간 57킬로그램, 하루에 156그램(1홉)으로 충분하게 된 것이다. 밥을 하루에 밥그릇 두 공기밖에 먹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과거 2000년 동안 일본인을 끊임없이 괴롭혀 왔던 쌀 부족은 밥 중심의 일본식을 서구식 빵과 고기 요리로 바꾸게 되면서 해소되었다. 최근에 쌀은 800만 톤이나 있으면 남게 되어, 일본의 선조가 영위하며 어렵게 개간해 확대해 온 논의 40%가 휴경논이 되어 버렸다. 현재, 쌀의 생산량은 약 800만 톤, 금액으로 치면 1조8000억 엔이며, 농업 총생산의 20%, 국내 총생산 500조 엔의 0.4%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쌀 소비량 추이(1인 1년당 공급량). 농림수산성 <식량수급표>에서

 

 

 

 

8. 불안해진 쌀농사 농업

그래서 정부의 논 감소 정책이 시작되어 쌀 생산량은 약 450만 톤으로 제한된다. 2010년도의 쌀 작부면적은 163만 헥타르로 줄어, 전국의 논 면적 240만 헥타르의 무려 38%에 해당하는 90만 헥타르가 휴경논으로 방치되고 있다.

일본의 쌀은 생산 가격이 국제 가격에 비하면 꽤 높다. 경작면적이 좁기 때문에 생산효율이 나쁘고, 게다가 노동 임금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의 쌀농사 농가의 작부면적은 평균 1헥타르로 좁고 효율 좋게 기계화를 할 수 없는데, 미국에서는 평균 114헥타르의 대규모 농업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기계화되어 있다. 그렇기에 쌀 1톤당 생산비는 일본에서는 21만 엔 들지만, 미국에서는 1/10인 2만 엔이면 된다. 태국 농가의 논은 평균 5헥타르로 미국만큼 넓지는 않고 기계화도 되어 있지 않지만, 임금이 싸기에 쌀 1톤을 1.3만 엔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일본에선 논을 빌려 모아서 50헥타르 규모로 재배해도 이 큰 내외 가격차는 반 정도밖에 축소할 수 없다. 

그래서 정부는 수입 쌀 1킬로그램에 341엔이란 높은 관세를 매겨서 국내의 쌀농사 농가를 지키고 있는데, TPP 교섭에 의해 수입 관세가 철폐되어 해외에서 싼 쌀이 유입되어 오면 일본의 쌀농사 농가는 대항할 수 없다. 싼 수입 쌀에 져서 국산 쌀의 생산량이 반감된다면, 일본의 식량자급율은 35%로 떨어진다고 걱정하고 있다. 

쌀은 일본의 주식이고, 국내에서 유일, 충분히 자급할 수 있는 귀중한 식량이다. 그런데 쌀의 소비량은 1963년에는 1341만 톤이었는데, 그 뒤 계속 감소해 현재는 724만 톤이 되었다. 1인당으로 보면, 1963년에는 연간 117킬로그램을 먹었는데 지금은 절반인 57킬로그램으로 감소했다. 하루로 보면 156그램이기에, 밥으로 치면 밥그릇으로 두 공기이다. 

쌀의 소비가 이렇게 줄어든 원인은 빵이 보급된 것과, 부식으로 고기 요리, 기름 요리 등을 많이 섭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식사 영양균형이 이상적이었던 것은 30년 전으로 비만이나 생활습관병은 적었다. 밥이나 빵 등의 주식으로 칼로리의 절반 가까이를 섭취하고, 부식으로 물고기나 채소를 많이 먹었던 당시의 식사는 이상적인 건강식이라고 국제적으로도 격찬되었다. 그래서 비만과 생활습관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고기나 기름을 너무 섭취하고 있는 현재의 식사를 고쳐 밥을 더욱 먹었던 30년 전의 식사로 돌아가 보면 어떻게 될까.

30년 전에는 쌀의 소비량이 1인 1일 204그램으로, 현재보다 48그램이나 많았다. 밥으로 치면 밥그릇으로 가볍게 3공기이다. 당시와 똑같이 밥을 먹고, 수입 밀로 만드는 빵이나 스파게티를 줄여 보면, 쌀의 소비량은 945만 톤으로 돌아가고 식량자급율은 칼로리 베이스로 40%에서 46%로 회복한다. 또한 지금, 한달에 4번 먹고 있는 고기 요리를 당시와 똑같이 3번으로 줄이고, 기름의 소비도 10% 정도 줄인다면 자급율은 더 나아가 5% 회복해 51%로 회복한다. 값싼 수입 식량에 밀려 완전히 쇠퇴해 버렸던 일본의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밥을 먹는 일본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쌀농사 농업은 쌀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국토의 자연환경과 경관을 유지한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논은 집중호우, 태풍이나 가뭄의 피해를 완화해 준다. 장마와 태풍철에 집중되어 내리는 호우의 유수지가 되어, 그 담수량은 전국 치수댐 총저장량의 1/3에 해당한다. 그리고 논에서 증발하는 다량의 물은 혹서를 완화시키는 냉각기의 역할을 한다. 또, 하천에 연결되어 있는 논은 어류의 치어나 수생곤충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논으로부터 수확되는 쌀의 연산액은 2조 원 미만이지만, 논이 홍수 방지, 수자원 함양에 기여하는 역할은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5조 원이나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농작물은 낮 동안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광합성을 행하기에 1헥타르의 경지당 연간 15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한다. 전국의 논에서 쌀농사를 한다면 연간 36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있기에, 전국의 가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25%를 흡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 된다. 황금 물결이 일렁이는 너른 벼논과 산 정상에 이르는 다락논의 아름다운 경관은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큰 편안함을 준다. 드넒은 논에 볏모가 산들거리고, 반딧불이가 춤추며, 고추잠자리가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전원 풍경은 앞으로도 반드시 유지해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농촌의 사회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하면 8조 엔이나 된다고 한다. 고도경제성장을 마치고 지속가능한 경제사회로 전환하려 하는 일본에게 농업과 농촌이 가져오는 이러한 사회적 역할은 귀중하다. 식량을 자급하는 것만이 아니라, 국토의 환경과 민속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도 국내 농업을 사회 전체가 지원해 유지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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