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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장인>이란 책을 빌려 왔다.





책장을 열고 읽은 옮긴이 김홍식 님의 말이 머리를 띵 하고 때렸다.

 

"언제부턴가 '소비자'가 대중, 나아가 인간의 동의어가 돼버렸다. 시장 안에서만 생각하면 인간을 소비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소비하는 인간'이란 게 철학도 그 무엇도 없는 얼마나 천박한 인식인가? ... 시장 밖에서 인간을 볼 줄 알 때 시장을 인간에 이롭게 쓸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 나도 언젠가부터 도시민/농민을 시장 안의 소비자/생산자라는 관점으로 보는 버릇이 생겼다. 즉, 세상의 모든 걸 시장이라는 안경을 통해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스스로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있는 걸 볼 줄 아는 시력을 잃어버린 다음 생긴 버릇이다. 시장이란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는 능력을 다시 키워야 한다.

 

어떻게 그 능력을 회복할 것인가? 바로 지금처럼 농사지어 생산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소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이를 프로슈머라고도 표현하더라.

 

그런데 언젠가부터 소비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소비만 하고, 생산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생산만 하게 되었다. 또한 생산하는 방법도 본인의 몸과 맘을 다하여 일하기보다는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를 저자는 '장인'이 사라진 탓으로 바라보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이런 이야기를 던진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공학자, 기술자)은 보통 자기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극단적인 예로 원자폭탄을 만든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사례를 든다. 그는 1954년 정부 산하 위원회에서 "무언가 매력적인 기술이 눈에 띄면, 우리는 일단 달려들어 일을 벌인다. 그러고는 그 기술이 성공한 뒤에야 그것으로 무얼 할지 따져본다. 원자폭탄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고 증언한다.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초반 적어도 7000만 명이 죽은 대량 살상의 현상을 맹목적인 과학과 무지막지한 관료주의가 만든 합작품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무지막지한 관료주의의 예로 죽음의 유태인 수용소를 기획한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이 자신은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라 항변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를 "일상의 탈을 쓴 악(banality of evil)"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맹목적인 과학의 모습으로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5년 11월 2일의 원폭개발 프로젝트 고별사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최대한 개발해 대다수 인류에게 전해주고, 그 힘이 인류의 지성과 가치에 따라 쓰이도록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과학자는 늘 이렇게 과학은 가치중립성을 언급하며 세상에 대한 책임에서 발을 쏙 빼곤 한다. 이처럼 "세계를 향해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주장한다.

 

이를 보며 난 이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넘어 '왜'라고 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에 대한 파악은 단지 앎으로만 그치기 쉽지만,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알면 행한다"는 말은 무엇이 무엇인가를 아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왜 그런지 아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문화가 사라질수록 우리의 삶은 노예와 같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듦을 잃어버리면 결국 남는 건 구매행위뿐이고, 그건 '시장'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리는 일이 아닌가. 시장의 밖에서 시장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시장의 질서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엄청나게 많든지, 아니면 시장의 밖으로 스스로 걸어나올 수밖에 없다. 시장 밖으로 걸어나온다는 건 그만큼 힘들고 가난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기도 하다. 물론 행복도 함께 있을 수 있다.

 

누군가가 어떠한 일에 익숙해져서 달인이나 장인이 될 때, 두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일하는 몸이 그저 단순히 기계의 연장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가 되는 걸 넘어서 머리가 개입하며 그 과정에서 무언가 새로움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생활의 달인'을 보면서 출연자들에게 늘 무언가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고 느끼던 바가 있었는데, 그것이 <장인>을 읽으며 위와 같이 정리되었다.

 

머리로만 사는 일, 그리고 몸으로만 사는 일 모두 조심하고 경계해야겠다. 머리와 몸, 더 나아가 사회까지 살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머리와 몸, 굳이 무엇이 먼저일까 생각하면, 일단 몸이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겠다. 몸이 온전히 체득하여 반응할 때 비로소 머리를 굴려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겠다.

 

그래서 동서를 막론하고 먼저 청소하고 인사하는 등과 같이 아주 사소해 보이는 몸을 바르게 하는 일을 강조했겠지. 실제로 유교 경전의 가장 첫 단계인 <소학>을 열어보면 별 이야기 없다. 그저 마당에 물 뿌려 비질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도리라고 나온다. 이렇듯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가에서 그 사람의 품성이 절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만약 아이가 있다면 그냥 아이와 같이 널부러질 것인가, 아니면 먼저 본을 보일 것인가? 선생이든 부모든 자라나는 세대를 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자리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냉수 마시는 모습도 따라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식에게 '너는 누구 닮아서 그 모양이냐?'고 하는 질문에는 늘 똑같은 답이 놓여 있다. 바로 부모를 닮아 그런 것이다. 부모답지 않은 부모, 그리고 스승답지 않은 단순 기능인일 뿐인 교사들... 이처럼 요즘은 대부분 같이 널부러지는 길을 택하는 듯하다. 그것이 편하고, 편한 걸 쉬이 따르는 것이 인지상정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아이나 우리 자신의 상상력을 거세하지는 말자. 농사일에 맞닥뜨려 일머리를 한번이라도 상상했던 사람은 맞든 틀리든 무언가 배우고 깨닫는 바가 있다. 하지만 아무 상상도 하지 않았던 사람은 기계처럼 움직임만 습득할 뿐이다. 그러니 제발 상상력을 거세하지 말자. 요즘 교육이나 세태는 상상력을 거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여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재능보다 동기를 소중히 하자. 물론 재능이 있다면 목적지까지 더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다. 하지만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처럼 재능만 있다고 목적지까지 간다고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는 공부하는 사람이든 일하는 사람이든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진 재능을 북돋아줄 수 있는 동기, 그 동기를 잘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책에서 보니 고대 그리스에서 장인은 Demioergos, 즉 공공의 물건을 생산하는 사람을 뜻했다고 한다. 마치 조선시대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과 흡사해 보인다. 당시에는 물건을 만든다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적 이익, 특히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행위로 변질된 듯하다.

 

고대의 기능사회에서는 그래서 개인의 재능보다 사회규범이 더 중요하여, 재능을 계발하려면 이전 세대가 만들어놓은 규칙을 준수해야 했다고 한다. 장인에게 기술을 배울 때 자기 멋대로 하면 호되게 혼나고 하는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농사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엔 요렇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겠다 싶어 어른들이 일러준 말을 안 듣고 내 맘대로 하다가 보면 그게 더 힘들고 일도 더디다는 걸 알 수 있다. 오히려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게 더 편하고, 나중에 몸에 익고 나면 나에게 맞춰 알맞게 변형이 일어나더라.

 

이상 <장인>의 프롤로그를 읽으며 떠오르는 단상을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았다.

벌써 책을 다 읽은 것 같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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