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서 본 해삼형 담륜 @damryun 님의 글이 시초였다.
"밥푸는 주걱과 같은 것은 미야지마(宮島)에서 만들어 오는 것이라야만 밥이 잘 퍼지는 것이 아닐 것이며." ㅡ김용관, '조선공업문제', 『신동아』, 1935년 6월호. 조선상품 애용을 주장하며.
도대체 미야지마 밥주걱이 무엇이길래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일까 궁금해졌다.
밥주걱의 모양과 각도, 재질이 특별했을까? 얼마나 밥이 잘 퍼지길래 그랬을까...
일본 사이트를 뒤지니 미야지마 밥주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유래가 나왔다.
미야지마의 밥주걱은 18세기 말 수행승 誓真이 도민을 구제하고자 이츠쿠시마(厳島) 신사의 참배객들에게 토산품으로 꿈에 나타난 칠복신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弁才天이 들고 있던 비파 모양으로 밥주걱을 만든 뒤 도민들에게 그것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여기서 잠깐 弁才天은 원래 힌두의 예술과 학문의 여신 사라스바티로서, 이 여신이 불교로 들어오기까지 했다.
인도에서는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그런데 이 수행승은 어쩌다가 꿈에 이 여신을 보았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설명이 이어진다.
근대국가가 형성되던 메이지 20년대, 즉 1880년대 후반, 전국에 철도와 해운망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며 히로시마도 함께 발전했고, 그에 따라 히로시마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특산물인 "미야지마"라는 낙인이 찍힌 밥주걱을 많이 사갔다고 한다. 또한 도매상을 통해서도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점차 이 밥주걱으로 밥만 뜨는 것이 아니라, 복도 뜨고, 행운도 뜨고, 부도 뜨는 것은 물론 적까지 뜨는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마치 한국의 복조리와 같은 그런 상징물이 된 것이다.
이 밥주걱은 기능적으로 잘 궁리하여 만들어, 밥알이 쉽게 주걱에 붙지 않고, 주걱의 나무 향이 밥에 배지 않으며, 열에도 변형되지 않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다 하나의 상징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부터란다. 당시 히로시마의 宇品항에 징집된 병사들이 이곳에서 출정식을 했는데, 이 이츠쿠시마 신사에서 무사귀환을 빌며 '적을 뜨는 밥주걱'을 바치고, 또 고향에 돌아갈 때에도 이걸 하나씩 사서 돌아갔다.
이츠쿠시마 신사는 참 재미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바다에 한국의 사찰에 있는 일주문 같은 도리이가 서 있다. 썰물에는 물이 빠져서 아랫 부분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1930년대 조선에서 이 밥주걱이 유행한 것은 밥을 푸는 일상용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용품으로 유행했을 가능성이 높겠다. 어디 놀러 다녀오면 기념품을 사오던 관습이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퍼지면서 미야지마 밥주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것은 아닌지. 또한 그만큼 품질도 좋았을 테고 말이다.
이 신사가 있는 동네의 상점가에 가면 길이 7.7미터, 무게 2.5톤에 달하는 거대한 밥주걱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재질은 느티나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미야지마에서는 아직도 활발하게 이 밥주걱을 특산물로 판매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만날 수 있는 이 공예품 상점에서는 주로 뽕나무나 벚나무로 만든 밥주걱을 판다. 벚나무와 뽕나무가 내구성도 좋고, 나뭇결과 색이 예쁘기 때문이라는데... 언제 가면 하나 사봐야겠다.
http://www.d-department.com/shop/item_detail/4703630069736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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