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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골 똥, 서울 똥>의 원고를 검토하고 썼습니다.

그러니 책을 보시면 더 잘 이해가 될 겁니다. http://bit.ly/Z9EXqN



 


지난번에 말한 내용을 오늘 성포도서관에 가서 찾았습니다. 책은 <서유럽 농업사>(http://bit.ly/Z9EZ23)이고 350~351쪽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휴경지의 소멸과 대체로 많은 시비를 요하는 환금작물 재배로 막대한 양의 거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토양에 질소를 공급하는 나비꽃작물(콩과식물)이 새로운 윤작제에서 재배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토양이 필요로 하는 많은 자양분 수요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또한 사료 작물의 재배를 통해서 가능해진 가축 수의 증가로도 거름의 부족란을 해소하지 못했다. 특히 플랑드르에서는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다해서 그들 토지의 수확고를 증대시킬 수 있는 거름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미 중세에 그들은 농가의 외양간두엄 외에 도시의 오물(인분)과 쓰레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유채 재배가 확대된 후에는 착유기에서 나오는 깻묵이 거름으로 이용되었다.

 

이상입니다. 그네들이 늘 똥을 이용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나라도 조선 초기에는 그와 사정이 비슷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또 페스트 같은 전염병도 다른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말하자면,

8세기 말에 시작된 삼포제와 무겁고 땅을 깊이 가는 쟁기 덕에 농업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삼포제의 중요성은 생산량이 늘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양학적으로 균형잡힌 식탁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주로 곡류, 특히 밀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어 탄수화물은 충분했지만 단백질이 부족했지요. 우유를 이용해 버터나 치즈를 만들고 했지만 그걸로는 다 채울 수 없었다고 하네요. 탄수화물만 먹으면 아미노 결핍증에 걸린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던 것이 삼포제 때문에 콩 농사를 많이 지으면서 단백질을 충분히 먹을 수 있어 인구가 급증했답니다.


또 콩이 가진 질소를 붙잡는 효과는 삼포제로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게 한 숨은 공신이기도 하구요. 이미 로마의 플로비우스인가 하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글을 남겼다고 하네요. 그걸 알기는 했지만 농사에 응용한 것은 삼포제를 실시하고부터입니다. 그 사람은 "곡류보다 콩류가 더 훌륭한 음식이다"라고 했답니다. 중세의 어느 수도사는 "콩의 축복"이라 하기도 하고, 유럽에서는 콩으로 가득찼다라는 말이 활기차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밀농사 = 사막화' 공식도 위태롭습니다. '밀농사+콩농사' = '논농사+콩농사' 이런 공식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콩은 이래저래 참 좋은 식물인가 봅니다. 서양사람들도 우리처럼 다 알고 이용했네요.

 

그렇게 인구가 급증하면서 인구밀도가 올라가고, 또 땅이 모자라서 개간을 하려고 북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해 예전에 살던 곳도 새로 사는 곳도 도시가 되면서 상업이 활성화됩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는 상인들이 있을 수 있는 건 십자군 원정과 성지순례 경험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인구 폭발에 상인들은 뻔질나게 드나들고, 거기에다 페스트가 창궐할 무렵 몰아닥친 가뭄 같은 재해 때문에 엄청 굶주려 면역력도 떨어진 상태이고, 위생 상태도 한몫 거들긴 하겠지요. 하지만 앞의 요인이 더 주요한 것 같습니다. 똥이나 위생은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고, 기근과 인구 폭발에 따른 밀집이 결정적일 겁니다. 똥이 결정적이라면 그 전이나 후에는 멀쩡한대 왜 그때만 그런지 설명이 안 됩니다.

 

또 다른 것으로 일상 음식은 역시 밀로 만든 빵이었다고 합니다. 호밀과 귀리는 말 사료로 쓰고, 이것도 삼포제 덕에 생산량이 늘어나 말을 많이 키우고 자주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말이 많아지고 자주 쓰다보니 역시 소보다는 빠르다는 특징이 있으니 교통수단이 엄청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그래서 상인들이 그렇게 이 도시 저 도시로 오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상업의 발달에는 역시 삼포제로 남는 생산물이 생기고, 또 그 덕에 말을 쉽게 부릴 수 있었던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빵이 주식이고, 거기에 빵과 같이 먹는 것(companaticum)이라 하여 고기, 푸성귀, 과일을 곁들였다고 합니다. 지방은 지중해에서는 올리브 기름으로, 북부에서는 돼지기름이나 치즈, 버터로 먹었다고 하네요. 중세 말기가 되면 확실히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육류를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기 먹은 사람의 똥이 페스트가 창궐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많이 먹었다고 해도 지금보다는 적을 것이고, 일부 신분 높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네들도 우리의 보릿고개처럼 여름에 수확하기 직전 곡식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빵 대용품으로 푸성귀를 먹었다고 하네요. 감자가 들어와 값싼 식량으로 이용하기 전까지는요. 우리가 나물 뜯어다 죽 쑤어 먹은 모습이랑 어쩌면 이리도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중세 말기에는 그때 동양에서 쌀도 수입해다 먹었다고 하는데 아마 인도쪽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가난한 사람은 완두, 콩, 푸성귀를 먹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입니다. 중세 말이 되면 인구 폭발과 밀집 때문에 도시의 행정기관에서 오물 처리를 두고 고심했다고 합니다.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해자와 배수로를 이용한 공중변소가 있었다고 하네요. 15세기 뉘른베르크 같은 도시에는 집 뒤에 한줄로 나란히 강으로 흘러가는 하수구를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도시에서는 이렇게 요강에 싸서 하수구에 버리거나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게 강이나 해자로 흘러가면 물이 낮아지는 때 쌓인 오물을 정기적으로 퍼다 수레에 실어 성벽 밖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럼 그걸 인근에 사는 농민들이 수레를 끌고 와서 가지고 가거나 사 갔겠지요. 또 확인하니 수도원이나 교황청 같은 건물에는 화장실이 다 있더군요.


이상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책과 <사생활의 역사>(http://bit.ly/Z9F71k),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http://bit.ly/Z9F7P7) 등에서 본 내용입니다.



이 내용과 함께 함께 보면 좋은 글... 인간과 가축의 똥을 재활용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농업의 핵심 http://blog.daum.net/stonehinge/8728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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