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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함안군의 김미경, 사천시의 고헌주 님을 만나다



토종을 찾아서


토종, 그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다. 그런데 무엇을 토종이라고 할까? 인터넷 검색창에 ‘토종’이란 단어를 적어 넣었다. 그러자 먹을거리와 관련된 것들이 가장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일부 씨앗과 관련된 결과가 나온다. 막연한 개념을 확실히 하고자 토종을 연구하는 사) 한국토종연구회를 살펴보았다. 거기에서는 “토종은 한반도의 자연생태계에서 대대로 살아왔거나 농업생태계에서 농민에 의해 대대로 사양, 재배 또는 이용되고 선발돼 내려와 한국의 기후 풍토에 잘 적응된 동물, 식물 그리고 미생물이다”라 정의하고 있다. 곧 야생이나 인공으로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에 적응한 생물을 토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토종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기에 그럴까? 그건 아니다. 물론 어떤 생물은 다른 곳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기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토종은 세계의 어느 곳인가에 살아 있지 않은가. 고추가 우리나라에만 있고, 벼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럴까? 그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토종 수집·조사를 다녀보면 토종만이 가진 맛과 향이 있어 계속 심고 있다는 말씀들을 하시지만, 그렇다고 그게 토종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주 우연히 탄생하게 된 그 특성을 농민이 선택한 결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 1887~1943)라는 옛소련의 식물육종학자가 있었다. 그는 세계 식물유전학자들이 우상으로 삼는 사람인데, 115번에 걸쳐 온 세계를 대상으로 식물자원 탐사에 나섰던 인물이다. 조사를 더 원활히 진행하고자 15개 국어를 배우기까지 했다니 그 열정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한 바빌로프가 1926년 ‘다양성 중심지’ 이론을 주장했다. 그 이론의 내용은 식물종이 발생한 중심지에는 그 변이가 가장 풍부하고 다른 지방에는 보이지 않는 변이도 있는데, 그러한 곳을 식물의 원산지라고 하여 다양성 중심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원산지’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 바로 그다. 그의 주장에서 주목할 점은, 그렇게 작물이 다양한 지역에서는 생물다양성도 유지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라 작물이 다양한 지역에서는 전통문화도 다양하다고 한다. 곧 토종 씨앗이 다양하게 많은 곳에는 생물이 다양하게 존재하며, 사람들의 전통문화도 살아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농업이 근대화되면서 우리는 토종 씨앗을 잃어 버렸다. 우리나라 토종 연구의 대가인 안완식 박사에 따르면, 1985년 전국 규모로 토종 씨앗을 수집·조사하고 8년 뒤인 1993년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수집·조사를 시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1985년에 비교하여 24% 정도의 토종 씨앗만 남아 있었다. 근대화를 통해 생산성과 효율 중심으로 농업의 구조가 재편되면서 맛과 향, 농민의 기호와 선택에 의해 살아오던 토종 씨앗이 이 땅에서 하나둘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나마 농촌 지역에 살고 계신 70대 이상의 노인들이 이 땅을 떠나고 나면 더 이상 현지에 살아 있는 토종 씨앗이란 건 거의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황이 그렇게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 여기저기서 토종 씨앗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러 농업 관련 단체에서 토종 씨앗을 살리려는 모임과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찾아간 경남 지역의 함안군 여성농민회 김미경(44) 님과 사천시에 사는 고헌주(47) 님이 그런 사람들이다.



토종 씨앗과 함께 농사의 참맛을 알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함안군 여성농민회의 토종 씨앗 사업에 대한 소식은 익히 들어왔던 차에 큰맘 먹고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함안군 여성농민회의 회장인 김미경 님과는 공적인 자리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인심 좋게 생기셨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와 약속을 잡고 멀리 경상남도 함안군이란 곳에 난생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함안은 예로부터 아라가야가 자리했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경상남도, 특히 남해 바다 쪽에 가까운 곳의 지형을 보면 가야라는 이름의 여러 나라가 존재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큰 강이 발달하고 너른 들이 펼쳐져 있는데다가 적당한 높이의 산들이 이어진 곳. 충청북도와 강원도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자연조건에서 힘이 엇비슷한 여러 나라가 서로 어깨를 견주었을 것이다. 아무튼 가야인의 기질이 아직도 이곳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인지,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여당 쪽 인사의 당선이 어렵다고 한다. 현재 군수도 무소속인 사람이 맡고 있다니 그 정서를 알 만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도 귀농자다. 지금의 남편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시절. 결혼식장에 찾아가 누구랑 결혼하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는 그 캠퍼스 커플이었단다. 80년대 후반 법학과 전공의 여학생과 경제학 전공의 남학생이었으니 어떤 대학 생활을 보냈을지는 훤히 알 수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노조활동을 하다가 IMF 이후 그들은 귀농을 결심한다. 남편은 자신의 고향인 함안으로 내려오고 싶었으나, 금의환향이 아닌 관계로 어른들 눈치 때문에 처음에는 창원 쪽의 선배 곁에 살다가 2000년 고향으로 들어왔다. 아무튼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이 틀림없는데, 그 배경에는 시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한다. “남편은 못 미더웠지만, 시어머니가 계서서 마음먹었죠.”

그녀의 시어머니 김순년(72) 할머니는 한눈에 보아도 단단하다. 21살에 창녕에서 함안으로 시집와서 안 해본 일 없이 억척스럽게 자식들 공부 가르치고 시집·장가보냈다는 할머니는, 지금도 논 2200평에서 겨울·봄에는 수박농사, 여름·가을에는 벼농사를 짓고 계신다. 김미경 님은 여성농민회 관련한 일로 바빠 농사일을 제대로 거들지 못하고, 남편인 빈지태 님은 이번에 재보궐 선거에서 함안군 군의원에 당선되어 엄청 바빠졌다. 그래 자연스레 농사일은 모두 할머니 몫이 되었다. 김미경 님이 왜 시어머니를 믿고 귀농을 결심했는지 알겠다. 이렇게 든든한 버팀목이 계시니 말이다.

그녀의 농사땅이 있는 함안군 대산면 일대는 큰 강을 낀 널찍한 논이 발달한 곳이다. 물론 이곳이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김순년 할머니는 여기 처음 시집왔을 때인 1960년대만 해도 밭농사뿐이었단다. 커다란 두 강(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이라 여름이면 늘 큰물이 져서 고생이 말도 못했다고. 그래서 처음 시집와서 보니 집들은 모두 산중턱에 올라앉았고, 여름농사는 아예 포기하다시피 하고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다. 그러던 것이 제방을 쌓으면서 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논농사 위주에서 돈벌이를 따라 80년대 이후 하우스농사, 특히 수박농사가 점점 퍼지게 되어 이제 대산면 수박이라고 하면 알아준다고 한다. 수박농사가 시설비며 인건비가 많이 들어 쉽지만은 않지만, 한 번에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라 많이들 한다. 그러면서 토종 씨앗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토종 씨앗 사업을 벌일 생각을 했을까? 그녀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함안군 여성농민회가 토종 씨앗과 관련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인 것은 2009년의 일이다. 바로 이전 해에 함안은 2008년 전국 여성농민회 총연합과 환경운동연합이 힘을 모아 토종 옥수수 사업을 벌였을 때, 그 채종포로 선정된 4곳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의 경험이 이들을 토종 씨앗 사업에 뛰어들게 만들었다고. 2009년에는 함안군에 2년짜리 사업계획을 제출해 4000만 원 남짓한 지원을 받았다. 지난해로 그 사업은 끝이 났는데, 행정기관과 함께 사업을 벌인 경험이 없어서 문서 하나 작성하는 일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단다. 그때 앞으로 이 사업을 더욱 본격화하려면 그와 관련한 행정 업무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올해도 농진청에서 토종 종자와 관련한 공모사업이 각 도별로 진행되었는데, 경상남도는 아쉽게도 산청군이 낙점을 받았다고 한다. 산청군은 여성농민회도 없고 어떻게 사업을 진행시킬지 걱정스럽긴 하지만, 일단 한숨 돌리고 쉬었다 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토종 씨앗 사업을 펼치며 중점을 둔 것은 세 가지였다. 먼저 토종 씨앗 사업에 참여한 15가구의 회원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다음으로 안완식 박사님을 모시고 함안군 일대의 토종 씨앗을 수집·조사하는 일을 벌였다. 그 결과 100여 점의 씨앗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업성이 있는 15가지를 중심으로 600평의 채종포에 심어 씨앗을 받았다. 그렇게 자체 상표를 만들고자 디자이너를 물색하여 탄생한 것이 ‘씨앗드리’라는 이름의 토종 농산물 꾸러미다. 지난해에는 꾸러미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경남 지역에서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그 일에 현실적인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함안 일대의 농사는 논·하우스농사 중심으로 규모가 크다 보니, 꾸러미에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공급할 작은 텃밭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물량이 달리고 워낙 양이 적어 수익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남편들은 하우스농사로 “한방에 큰돈을 쉽게 만지다 보니, 꾸러미로 찔끔찔끔 만지는 돈을 우습게” 여겨 도움을 주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어떤 회원은 먹고 살아야지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남편과 싸우는 일도 있었다고.

그런데도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이 사업에 꾸준히 참여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토종 씨앗 농사를 통해 “스스로 토종의 중요성과 농사의 참맛을 깨닫고, 즉각적으로 돌아오던 소비자의 좋은 평가” 때문이다. 올해는 여성들이 주도하여 토종 씨앗 작목반 형태의 모임과 통장을 만들 계획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교육장을 마련해 더 많은 농민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채종포도 안정화시키고, 법인까지 만들고자 한다. 그리고 1차 생산물 형태만이 아니라 2차 가공품, 특히 전통음식을 복원해 판매하고자 한다. 그 중심에는 역시 김미경 님의 시어머니가 계신다. 김순년 할머니는 지금도 이 지역의 전통음식의 하나인 ‘밀장’을 만들어 먹고 있다. 밀장은 밀로 만든 장이란 뜻으로, 주로 쌈장으로 먹는다. 그 재료가 되는 밀은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애밀(왜밀이란 말인데, 이 지역에서는 왜라는 발음을 애라고 함)로, 이것도 토종의 하나인 셈이다. 할머니께 애밀의 특성에 대해 들으니 애밀이 바로 호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은 풋거름작물로나 이용한다는 호밀도 우리네 삶 속에서는 이렇게 활용되었던 것이다. 작물다양성은 문화다양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바빌로프의 주장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언젠가 스스로 자신은 식탐이 많다고 하던 김미경 님. 그녀는 식탐만이 아니라 토종 씨앗을 보존하고 퍼트릴 욕심도 많은 사람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경남 지역에 더 많은 토종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다양하게 활용되기를 바란다.



거지 마냥 토종 씨앗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진주성 앞에서 푸른늑대라는 별명으로 “씨드림”이란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하는 고헌주 님을 만났다. 어찌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의 강인하고 드셈은 역사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진주성에서 5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친 일이며, 적장을 안고 물에 빠졌다는 논개의 이야기며 참으로 드세고 드센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 또 삼천포에서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을 잘못하면 주먹부터 날아온다며 조심하라는 그의 충고에서도 그런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강인하게 만들었을까? 고헌주 님도 그런 경남 사람의 한 명이다.

평소 인터넷에 올리는 그의 사진과 글에서 토종에 대한 사랑과 해박함을 엿보며 무척 놀라고 있었다. 이 기회에 가장 먼저 ‘왜, 어떻게 해서 토종을 좋아하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했다. “학창시절부터 아버님이 농사짓는 걸 보며 토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는 인근에서도 부지런한 농부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호박농사를 지으면 구덩이를 크게 파서 외양간두엄을 한가득 넣은 다음 심어서 정말로 호박이 커다란 항아리만 했단다. 그리고 씨앗 갈무리를 얼마나 깔끔하게 잘하는지, 지금은 나오지 않는 소주 댓병을 모아서 거기에 한 종류씩 잘 보관했다가 마을 사람들이 얻으러 오면 나눠주곤 했다. 그런 아버님을 보고 자라며 자신도 저절로 씨앗의 소중함을 체득하게 되었다고.

그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2001년 고향인 사천시 곤양면으로 귀농을 하면서부터다. 토종 씨앗을 찾아다닌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70년대 후반의 학창시절부터, 남들처럼 놀러 다닌 게 아니라 씨앗을 수집·조사하는 식으로 여기저기 다녔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전자·통신 분야의 일을 하면서 사비를 털어 짧게는 당일로, 길게는 며칠씩 여관을 전전하며 그렇게 토종 씨앗을 찾아 헤맸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했다. 먼저 철저한 사전조사를 한다. 지형도를 충분히 보면서 어느 곳에 토종 씨앗이 남아 있을 법한지 밑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한 번의 수집·조사 때 하나의 품종만 찍어서 그것만 찾으러 다닌다. 만약 감자를 찾는다고 하면 마을마다 들러 감자만 묻고 찾지 다른 건 설사 토종이 있더라도 그냥 넘어간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지체되기에 그렇다. 그렇게 철저히 준비하고 조사를 가더라도 “10번 가운데 9번은 허탕을 치기 일쑤다.” 그럴 때는 혼자 여관방에 누워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이렇게 미친놈처럼 뭐하고 다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는 토종을 찾아 홀로 헤매야 했다. 그로 인해 생긴 어려움이 많았으리란 짐작이 간다. 그도 “토종수집단의 이야기를 카페에서 보면서 함께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단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이고, 이제는 혼자 다니는 게 그리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낸 토종 씨앗이 모두 200점 정도. 그동안 2000평 남짓한 자신의 밭 가운데 200평을 전시포로 만들어 씨앗도 늘리고 보존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자신의 생업은 생업대로 유지하면서 토종 씨앗의 수집·조사와 보존을 병행했다니 참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찾은 씨앗을 더 많은 사람이 토종 씨앗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널리 퍼졌으면 하는 생각으로 지금은 대부분 밀양의 농업자원관리원에 기증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서 먹거나 할 몇 가지만 남겼다. 그가 토종 씨앗을 찾으려고 자주 찾아가 분양을 문의하기도 하면서 직함이나 지위가 없어 모욕과 업신여김을 당한 곳이 행정기관이었단다. 그런데 왜 그런 곳에 어렵사리 모은 씨앗을 기증했을까? 그건 오랫동안 농업자원관리원을 지켜보면서 거기에서 일하는 최시림 박사에 대한 믿음이 생겨서 그렇단다. 현재 경남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토종농산물 보존·육성에 관한 조례’까지 제정하여 농민의 소득과도 연결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는 선뜻 자신이 피땀 흘려 모은 소중한 토종 씨앗을 기증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보상은 없었냐고 묻자, 감사패를 받았다고 웃어넘기는 그다.

그와 이야기하다가 나온 감자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가 자료로 확인한 결과 우리나라에만 80여 종의 토착화된 감자가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그가 9번이나 강원도와 경북 일대를 헤매며 찾은 것이 자주감자, 분홍감자, 길쭉한 감자, 울산감자(천개감자)로 4종이다. 그 가운데 울산감자는 알이 많이 달린다고 천개감자라고도 하는데, 한번은 인터넷에 이 감자를 올렸다가 사람들이 벌 떼처럼 찾아오는 통에 고생했단다. 그러면서 요즘 인터넷을 통해 토종 씨앗을 나누는 모습이 많아졌는데, 씨앗을 구하기만 하면 그걸로 입을 싹 씻어 버리는 듯한 행태에 속상할 때가 많았단다. 지금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지만 한때는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그러면서 “토종 씨앗을 손쉽게 찾으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요즘은 인터넷부터 뒤지는데 발로 먼저 뛰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씨앗 나눔이 나눔으로만 그치지 말고 “증식과 퍼짐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조그만 텃밭 규모가 아니라 전업농이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많이 지어서 나눔이 활발해졌으면 한다”고 꼬집는다.

산속의 헤매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어떨 때는 구걸하듯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는 고헌수 님. 그는 행정기관이 “농사의 기본은 씨앗인데 농민이 필요로 하는 토종 씨앗은 수집·조사한 다음 쉽게 내주지 않으며 독점하려”고 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개량종을 보급하고 토종 농산물은 수매도 안 해주고 못 심게 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씨앗은 판매가 아니라 나눔이 기본”이라 말한다. 토종 씨앗이 귀한 만큼 얻는 사람도 고맙게 여기며 농사 잘 지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눔을 하는 그런 모습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함안군 여성농민회에서 만든 자체 상표. 



채종포 푯말.



토종 씨앗 저장고.



함안군 여성농민회의 토종 씨앗.




애밀(왜밀).



김미경, 김순년 할머니.




고헌주 님.




남해 창선도에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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