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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법

소와 벌이는 한판 놀이 '쟁기질'

by 石基 2010.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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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찾아온 기회


2010년 4월 10일, 전국귀농운동본부(이하 귀농본부)에서 새로 시작하는 소농학교의 교육 가운데 하나인 '일소 부리기'에 함께 참가했다. 그동안 쟁기질과 관련해 몇 번 취재를 나갔지만, 겨울이라 일할 수 없든지 일에 방해가 될까 멀찌감치 구경만 하던 처지였던지라 이번 '일소 부리기'에 거는 기대가 컸다. 드디어 나도 소로 쟁기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아침 10시, 소농학교 교육생 19명과 귀농본부 간사 몇 분과 함께 "이웃집의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와 비슷한 25인승 노란 버스에 타고 보은으로 출발했다. 2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충청북도 보은의 백록동. 이곳은 나와도 인연이 꽤 깊은 곳이다. 지금 집에서 키우는 연풍이란 개를 얻어온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은근히 그 어미는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했던 차에 겸사겸사 잘되었다.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 같은 호랑이 버스. 


오늘 취재에 응해주신 분은 강창운(73) 어르신이다. 어르신께서는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경상북도 봉화에서 지내시며 살다가 이곳에 오신지는 4년쯤 되셨다고 한다. 주업은 토종벌을 치는 일이신데, 소 쟁기질은 이 마을에 귀농하여 살고 있는 이선신 씨의 밭일을 도우며 다시 시작하셨다. 어르신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일을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으신다는 걸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들어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며 살아오신 자신감이 말씀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논농사를 118섬까지 지어보셨다고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당시에는 생산왕도 몇 번 탄 적이 있다고 하신다.

 

군만와 밭으로 향하는 강창운 어르신.


일소가 되기 위해


짐만 부려놓고 바로 쟁기질 실습에 들어갔다. 외양간에서 군만두(소의 이름)를 데리고 나와 멍에를 메워 쟁기를 달았다. 이 소는 2008년 5월생으로 이제 2살 정도인 어린 소이다. 코뚜레는 9개월 된 2009년 2월에 꿰고, 상처가 다 아물 때쯤인 열흘 뒤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군만두는 조금 일찍 훈련을 시작한 편이긴 하다. 어르신께서는 15~18개월쯤 된 소가 훈련을 시작하기에 알맞다고 하신다.

훈련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사람이 앞에서 소를 끌면서 따라오도록 하는 훈련을 먼저 한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런 훈련은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어미 옆에서 따라다니면 저절로 사람을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요즘은 코뚜레를 꿰고 일소로 부르는 소가 없으니 할 수 없이 이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단다. 하긴 요즘 축사에서 자라고 있는 소들에게 다가가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나 경계하기만 할 뿐 사람을 따르는 소는 별로 없다. 소도 사람처럼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가 중요한가 보다.

 

군만두에게 멍에를 메우고 있다.

 

어느 정도 사람을 따르게 되면 다음부터는 소가 앞서고 사람이 뒤에서 따라가는 훈련이 시작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보름 남짓 걸린다. 이 과정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열흘 정도 뒤에 처음으로 멍에를 메우고 쟁기질을 시작한다. 하지만 쟁기질은 여간 힘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쉽사리 쟁기를 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때도 앞에서 한 사람이 고삐를 잡는 일이 필요하다. 코가 아파서라도 앞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코뚜레를 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을 던지니 어르신은, 장정 네댓이 달라붙어야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하신다. 소의 기운은 정말 엄청나다. 사람은 그 힘을 제어하고 조절하고자 코뚜레라는 걸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양 문자인 알파벳의 A는 황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서도 황소가 얼마나 사람에게 절실하고 위대한 존재였는지 엿볼 수 있다.


혼자 쟁기를 끌기까지가 가장 지난한 과정이다. 여기에만 거의 한 달이 걸린다. 예전 아르바이트로 공사장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3일이 고비라더니 하루, 이틀은 죽겠더니 사흘이 지나니 그래도 버틸 만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달 정도가 될 무렵 정말 그냥 끝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데 한 달이 지나니 오히려 몸이 그 일에 적응해 있는 걸 발견한 적이 있다. 이런 경험은 군대 훈련소에 갔을 때 다시 한 번 겪었다. 그런데 소도 그런가?

 

잠시 쉬는 사이 넓적한 돌로 근육도 풀어주고 털도 골라주면 소가 사람을 더 친근히 여긴다고 한다. 

 

쟁기를 잡고서


이곳의 쟁기가 조금 이상하다. 당연히 땅을 갈아엎는 쟁기에는 흙밥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넘기는 볏이 달려 있어야 할 텐데 볏이 없다. 어르신께 여쭈니 조선쟁기에는 원래 볏이 없는 법이라며, 볏이 달린 쟁기는 양洋쟁기라고 하신다. 그런데 여느 책에서는 쟁기에는 당연히 볏이 달리고, 극젱이 종류에만 볏이 없다고 나와 있어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맞는지는 더 따져보아야 알겠지만, 그저 어르신께서 살아오신 곳이 태백, 봉화, 보은처럼 산간지역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양쟁기의 특징은 다루기 쉽고 일의 효율이 더 높다는 점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조선쟁기를 쓰는 이유는 조선쟁기로는 볏쟁기로는 할 수 없는 골을 타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논은 갈아엎는 데에 중점을 맞춘다면, 밭은 갈아엎는 일만이 아니라 골을 타는 일도 중요하기에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쟁기질하다 잠시 쉬는 사이 똥도 싸고 오줌도 싼다. 밭을 갈며 고스란히 흙속으로 들어가 거름이 된다.


 

이곳 쟁기는 손잡이도 특이하게 두 개가 있다. 직접 쟁기질을 하며 겪으니 위의 손잡이는 아래로, 곧 보습을 조절하여 골이나 고랑의 깊이를 조정한다. 그리고 아래의 손잡이는 보습이 나아가는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쟁기의 방향을 조절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자전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자전거를 탈 때 한쪽으로 넘어지려 하면 반대쪽이 아니라 넘어지려는 바로 그쪽으로 손잡이를 돌려야 넘어지지 않듯이, 쟁기도 비뚤어 내가 나아가길 바라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로 기울여야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보통은 진행방향의 아래쪽(이미 간 땅)으로 쟁깃술(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는 보습을 다는 나무)을 살짝 기울이면서 나아간다. 아무튼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억지로 힘으로 방향을 바로잡으며 쟁기까지 내가 들자니, 나도 무지하게 힘들고 소도 엄청 힘들어했다. 초짜가 쟁기를 잡으면 소가 더 힘들어 한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우리가 떼로 몰려와 소를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소도 초짜인데다 사람도 초짜니 서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초짜와 초짜가 만나 서로 힘들었다.

 

소는 너댓 골을 타니까 벌써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그 거친 숨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옆에서 함께 걸어가면서 깜짝 놀란다. 흐~허억허억, 흐~허억허억 거리며 침까지 질질 흘러나왔다. 뒷다리 쪽에는 봇줄(멍에와 쟁기의 성에를 연결하는 줄)에 쓸려서 살갗이 다 까졌다. 상처가 났는데 괜찮은지 여쭈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진다면서 이런 과정을 거쳐야 제몫을 하는 거란다. 어찌 보면 잔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축사에서 먹을 것만 받아먹으며 자라다 고기소로 죽임을 당하느니 이런 팔자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비유는 아니지만 배부른 돼지로 사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고나 할까. 아무튼 고기소로 팔릴 때는 한우의 경우 비거세우는 18~24개월 정도에, 거세우(등급을 잘 받고자 불알을 깐 수소)는 30~33개월, 암소는 새끼를 2~3번 낳게 한 뒤 6~8개월 살을 찌우니 42~48개월 정도에 죽임을 당한다. 암소에게 새끼를 3마리까지 낳게 하는 이유는 재생산이라는 의미도 있고, 암소는 그때까지 자라기에 최대한 가치를 높이고자, 막말로 뽑아먹을 데까지 뽑아먹고자 해서이다. 홀스타인육우의 경우는 거세우가 22~24개월쯤 살 수 있다. 이런저런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고기를 먹을 수 없는데,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고기 앞에 서면 젓가락부터 들게 된다.

 

동네에서 만난 15년 된 일소. 이런 소도 봄철 첫 쟁기질에 살갗이 벗겨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축사 안에서 사람을 경계하는 배부른 소들.


일소 부리기


강창운 어르신께 본격적으로 일소를 부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르신께서는 밭 전체를 가는 삭갈이를 ‘도빈다’ ‘삭간다’ ‘되빈다’ ‘모조리 간다’라고 하신다. 그 넓이는 보통 1000~1200평쯤인데, 양쟁기는 1800평까지 가능하다. 일소가 그만큼 일하려면 3년은 부려야 마땅한데, 대략 1,5000평은 갈아야 ‘이제 일 좀 한다’고 할 수 있고, 이후 1,5000평을 또 갈아야 ‘제대로 된 일소다’라고 한다. 아무튼 그때가 되면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예전에 소가 와서 하루 일해주면 사람이 똑같이 하루로 갚고, 소에다 쟁기꾼까지 따라와서 일하면 이틀을 가서 갚아야 했단다. 힘이 더 센 소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지 모르지만, 소도 사람과 동등한 입장으로 보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소가 가진 힘에 사람이 가진 기술이 결합된 형태가 바로 쟁기질이다. 옛날에 쟁기꾼의 기술을 얼마나 중요했냐면, 쟁기질부터 써레질까지 소로 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쟁기꾼은 30가구가 되는 마을에 2~3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 가구에 10명이라 치면 300명에 2~3명만 할 수 있는 일이 요즘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번 찾아볼 일이다.

 

 

기계로 로타리를 친 논(위)과 소로 쟁기질한 밭(아래) 

 

 

일소로 하는 농사일에서 논갈이를 빼놓을 수 없다. 예전에는 가을갈이를 할 수 있으면 꼭 했는데, 그럼 이듬해 수확이 더 많이 났다고 한다. 본격적인 논갈이는 해동만 되면 바로 시작하여 보통 세벌갈이까지 한다. 해동이 되고 하는 첫 쟁기질을 ‘아이갈이’라 하여 흙덩이를 넘겨 놓고, 다음 20일 뒤 두벌갈이를 하여 흙덩이를 깬다. 다음 세벌갈이는 하는 사람이 있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도 하는데, 한다면 모심기 직전에 한다. 세벌갈이할 때 물을 대기 어려운 논은 미리 물을 받아 놓고서 갈고, 물을 대기 쉬운 곳은 그냥 간다. 물을 대면 아무래도 질척거려 힘이 더 든다고. 그리고선 써레질로 넘어간다. 써레질은 수평을 잡아야 하기에 보통 기술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써레질은 하루에 2500평까지 할 수 있다.


밭농사에서는 사이짓기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먼저 60cm 정도의 두둑을 지으면서 낸 골에다 가을에 보리를 심는다. 이곳을 보릿골이라 한다. 다음해가 되어 보리를 수확할 때쯤이 되면 두둑의 한가운데에 콩·팥·서숙 등을 심는다. 그리고 보리를 벨 때가 되면 콩·팥·서숙이 싹이 터너 조금 자란 상태가 된다. 보리를 다 베고 난 뒤에 보리 밑동이 있는 곳을 2번 갈게 되는데, 첫 번째를 ‘끌떠기’라 하고 두 번째를 ‘돌갈이’라 한다. 방법은 보릿골을 둘로 나눠 먼저 끌떠기로 보릿골의 반을 나머지에 넘겨 놓는다. 다음 20일 뒤에 그 넘겨 놓은 곳을 다시 콩·팥·서숙 쪽으로 다시 넘긴다. 그럼으로써 보리 밑동을 썩혀 거름도 만들고, 김을 매는 효과도 보는 한편, 북주기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것이다.



소와 함께하는 삶


일소는 더 이상 짐승이 아니라 식구나 마찬가지다. 식구로 들어온 순간, 일소는 수단의 대상이 아닌 생명의 존재가 된다. 일소는 길들이면서 절대 때리는 법이 없다. 속이 터져 한 대라도 때리는 순간, 그 소는 사람을 교감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하신다. 물론 멀쩡하게 일을 잘하던 소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을 뜨는 경우도 있다. 그거야 어떻게 된 속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잘 길든 소는 애기가 옆에서 놀아도 밟지 않고 알아서 피한다고 한다.


먹을거리는 풀과 소죽이 있는데, 풀이 나는 철에는 풀을 주고 그렇지 않은 11~4월에는 소죽을 끓여 준다. 겨우내 큰 소를 먹이려면 350평 정도에서 나는 볏짚이면 충분하다. 그 볏짚은 가을걷이한 뒤 비가 맞지 않도록 잘 갈무리해 놓아야 한다. 소죽에는 볏짚 말고도 집에서 나오는 온갖 음식물을 넣어서 먹일 수 있다. 짠 음식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소도 가끔씩 짠 음식을 먹어줘야 건강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육류와 세제가 섞인 물 등은 절대로 먹여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4월 말쯤이면 풀도 조금씩 먹일 수 있게 된다. 소가 잘 먹는 풀은 여느 풀이라면 다 잘 먹는데, 독이 있는 풀과 망초는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해동이 되면서 일을 시작하면 고되기도 하여 살이 많이 빠지는데, 그때는 소죽에 콩을 2홉 정도 섞어서 5번을 주기도 한다.

 

고생한 군만두에게 두부를 만들며 나온 비지를 소죽에 섞어 주었다. 


이렇게 마음을 쓰며 일소로 부리면 30년 이상은 살 수 있다. 하지만 경제 사정도 있고 하여 어느 정도 일소로 부리다가 판 다음 새로 소를 들여 다시 훈련을 시키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그냥 소가 400만 원 정도 한다면 길든 소는 600만 원은 받을 수 있단다. 소를 부릴 때는 발이 줄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여 엎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뚜레는 노간주나무로 만드는데, 보통 3년 정도 쓰면 삭기도 하고 부러지기도 하여 한 번씩 갈아줘야 한다. 쟁기의 경우 쟁깃술과 성에는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들고, 힘을 받아야 하는 한마루는 부드러운 물푸레나무로 만든다. 성에게 길수록 힘이 덜 든다고 하시는데 길이를 재니 2m 남짓 정도이다.


소를 부리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다. 이 마을의 소 부리는 소리는 여느 곳처럼 네 가지가 있다. “이랴” “워” “어뎌뎌뎌” “이랴루”가 그것이다. 앞으로 가라는 이랴, 멈추라는 워, 방향을 제대로 잡거나 왼쪽으로 움직이게 할 때는 어뎌뎌뎌, 오른쪽으로 돌릴 때는 이랴루라고 한다. 소는 보통 오른쪽으로 돌아서 방향을 바꾼다. 쟁기질에 들어갔을 때 소는 이미 타 놓은 골을 따라 걸어가고, 사람은 쟁기 뒤에서 새로 만든 골을 따라 걸어가게 된다. 그리고 골을 탈 때 소는 골을 낼 바로 옆을 걸어가도록 한다.

 

 

같은 동네의 베테랑 일소. 멍에가 닿는 곳에 멍에살이 박혀 있다. 어릴 때부터 멍에를 메우지 않으면 절대로 멍에살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은 소에게 멍에를 메우면 그곳을 너무 아파해 일을 시킬 수 없다고. 이 소는 경력이 오래된 만큼 느긋하게 자기 발걸음에 맞게 주인과 호흡을 맞춰 쟁기를 끈다. 그러면서 잠시라도 틈이 나면 봄이 되어 새로 난 풀을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에서 뭐랄까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 모든 이야기는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강창운 어르신은 몸으로 이 모든 걸 말씀하신다. 농사의 農 자를 '별의 노래'라고 해석하여 농부(農夫)를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農은 농기구를 콱 쥐고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힘차게 땅을 갈아엎고 김을 매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서양의 Agriculture도 또한 땅(Agri)을 갈아엎는다(Culture)라는 뜻이 아니던가! 농사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산꼭대기를 향해 돌을 굴리는 시지푸스와 같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 속에서 나온 행위이다. 그러니 쟁기질이 정 궁금하여 참지 못하시는 분은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다 소 쟁기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 잠시 차를 멈추고 걸어서 가까이 다가가 어르신과 소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라. 그래도 우리는 잠자코 골똘히 어깨 너머 보는 광경에서 생각보다 많은 걸 배울 수 있기도 하다. 물론 거기에는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열린 마음자세가 기본이리라.

 

 

후기 : 안타깝게도 우리집 개 연풍이의 어미는 사냥개에게 물려 죽었단다. 얼마나 슬프던지 사냥을 취미로 즐기는 장인어른이 갑자기 미워졌다. 처음에는 바람들이 농장에서 키우려고 데려왔다가 잠시 우리집에 머무는 사이 정이 들어 눌러앉게 된 연풍이. 그래서 이름도 바람을 따른다는 뜻도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도 되는 연풍이라고 지었다. 이제 이놈이 씨를 퍼트리지 않으면 이런 모습의 개는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우리집 연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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