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4일. 오늘은 일본에서 이하라 히로미츠井原宏光(75) 씨가 선감도에 가려고 한국을 방문한 날이다. 이하라 씨는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난 재한일본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선감학원이란 곳에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 왔는데, 그때 그의 나이 8살, 우리 나이로 9살이었다.
이하라 씨를 만나는 길에 중앙역 옆 안산천 위로 지나는 전철로.
선감도는 조선시대에는 국유 목장으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그곳의 원주민들은 반농반어의 삶을 꾸려 나가고 있었을 게다. 이러한 곳이 변모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조선감화령이 발표된 다음부터였다. 조선총독부는 1923년 최초로 원주에 영흥학교라는 감화원을 세우고, 1938년에는 전남 무안군 고하도에 목포학원을 세웠다. 이곳의 목적은 8~18세의 부랑아, 고아, 넝마주이, 불량해질 우려가 있는 청소년들을 수용하고자 해서였다. 그렇게 선감도에 선감학원이 세워진 것은 1942년 5월 19일이었다. 이하라 씨는 원산 원흥학교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이곳 선감학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국민학교를 오사카의 한곳에서 다니다 그를 따라왔다.
조선감화령의 의도와 목적은 어찌되었든, 결과만 놓고 보면 이렇다. 사회복지란 개념조차 없었을 당시 거리의 부랑아나 고아는 총독부 당국의 골칫거리였을지 모른다. 당시는 군軍 체제. 지금도 군대는 그때 배워서 깔끔하게 잘.. 이란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대동아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시대, 일제도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한다. 흠집은 없어야 하는 것, 그런 것은 없애야 하는 것. 자연스레 지우고자 했을 테다. 조선감화령이란 법령 자체가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테고...
그래서 선감학원 개발이 시작되었다. 당시 90가구 정도가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집마다 농지의 크기에 따라 보상금의 액수는 달랐다고 한다. 아무튼 평균으로 따지면 한 집에 3만원, 당시 땅값으로 따지면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멀찍감치 떨어진 곳에 2000평 정도의 땅에 집을 구하는 값. 그런데 수치로 따져 그게 다일까?
액수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용산참사가 돈 때문에 일어났을까?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결과만 놓고 볼 수밖에... 보상금이, 보상금으로 사람의 삶을 계산할 수 있는 경우가 있었던가?
더구나 그 당시는 돈으로 평생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나라고 받는 게 지금보다 더 쉽진 않았을 게다.
선감학원에 부랑아라는 청소년들이 들어왔단다. 그 아이들을 이곳으로 모은 이유는 떠도는, 아무 연고도 없는 아이들을 자급자족시키려고 해서였단다. 그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농사 교사가 있어도, 지금도 그렇지만 청소년들 교육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명목이 좋아 부랑아들을 교육시킨다는 목적이었지, 난 그게 아니라고 본다. 이곳은 수용소였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다. 아이들을 모아다가 두드려 잡으려는 목적. 왜, 김춘삼이 이런 곳에 잡혀올까 걱정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역사는 아닐지 모른다. 소설이라 해야 할지도... 그런데 묻고 싶은 건 그럼 역사는 무엇인가? 사료와 자료와 문서로 확립할 수 있는 무엇? 웃긴 소리일지 모른다.
일대에 선감학원에서 죽은 청소년들의 무덤이라고 설명하시는 홍 할아버지.
함께 돌아보시는 이하라 상과 홍 할아버지. 이 일대에 대략 400여 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단다. 그 가운데 이 분이 기억하시는 조선인 아이의 무덤은 50기 정도.
난 무덤을 보고 놀랐다. 이런 곳이 있다니. 아무도 무덤을 그 뒤에 수습하지 않았다. 물론 모두 고아에 넝마주이니 누가 수습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조선시대에 고아는 그래도 동네에서 책임지게 했다. 고아만이 아니라 과부, 노인 등을 책임지게 했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으로 보면 복지국가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오히려 미친 나라가 되었다.
무덤마다 나무가 자란다. 나무는 사람이 죽으면 한 그루씩 자라게 하는 것인가? 나도 죽으면 나무 한 그루가 될까? 이렇게 생각했는데, 알아보니 볼록한 곳이 자라기 좋아서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사죄하러 왔다고 하는 이하라 씨.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사죄하는가? 이런 한 분이 사죄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 거시기... 그것만큼 바보 같은 협정이 어디 있는지... 철두철미한 군바리정신에서 가능했을까? 박정희의 빛이 큰 만큼 그늘도 그렇다. 그건 경중으로 따질 수 없는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지만 기억하는 듯하다. 그게 중요할지도 모른다. 국민성이니 뭐니 하건, 배를 곯지 않는다는 논리. 그게 중요했을지도... 더 창피한 일은 해방이 된 이후 이곳이 전쟁고아로 다시 채워졌다는 이야기. 배운 대로 한다는 그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이어졌으니...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는 것보다, 그들이 제대로 사죄하는 일. 물론 용서가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럼 성인이 될지도... 아무튼 이하라 씨가 일본인의 사죄에 앞장선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설마 괜시리 자기 어렸을 적 마음에 쌓은 죄책감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애초에 그만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떤 마음이셨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또 만나 뵙고 얘기할 수밖에.
잡목이 무성한 곳. 이곳에 빽빽하게 무덤이 자리하고 있단다. 나무 하나에 사람 하나, 그렇게 따지면... 눈물이 난다.
일대를 대략 둘러본 다음 질문 시간을 가졌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하여 시간을 지냈다.
그런데 일본인 이하리 씨는 사죄를 위해 왔다. 그런데 조선인 홍 할아버지는 당시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왔다. 아버지를 부정하면 본인의 삶 자체도 무너지기 때문일까? 당시 선감학원 학생들 가운데 죽은 사람은 대부분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바다로 도망가다가 죽었지, 세간의 소문처럼 맞아 죽거나 한 사람은 별로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과연 없었을까? 군사정권 시대를 지나면서 하나둘 밝혀지는, 소문으로 전해지던 일들이 사실로 밝혀지는 역사를 보낸 나로서는 믿을 수 없다. 그런 말씀조차 역사의 하나겠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없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삶의 한 단면이지 않을까? 아무튼 지주보다 마름이 더 그렇다는 말이 실감이 된다.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악랄했다는 모씨의 소설 구절이 다가오고, 조선인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이 더 가슴 아프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게 가슴 아프고...더럽다.
간담회 시간에 질문을 주고받았다. 어느 분이 선감학원과 교관 자제들의 학교를 하나로 보았다. 난 그게 아니란 걸 알려야겠기에 질문을 했다.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선감학원 원생과 학교를 같이 다니신 건가요? 또 일본인 선생님께서는 산해진미와 낙원이라고 선감도를 표현하셨는데 어떤 음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요?
그래서 얻은 답. 선감학원과 대부국민학교 선감도 분교장은 다른 학교다. 자세히 말은 안 해 주셨지만, 선감학원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그 내용이 계속 언급되는 것, 힘들게 하여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 이런 사실을 입에 올리시기 꺼려하셨다. 그 말씀 중간 중간에 있는 내용으로 이런 걸 상상할 뿐.
더군다나. 일본인 그분과 함께 당시에 1942~1945년 이 당시 하루에 세 끼를 꼬박꼬박 흰쌀밥을 먹었다는 것. 이게 말이나 되는가?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무리 선감도에 농지가 넓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행간을 읽을 수 있는 분이 함께였다면 좋겠다.
일본인의 사죄는 받자. 우리가 왜 사죄를 받아야하는지 잘 알자. 그리고 제대로 사죄를 하라고 하자. 헌데 아직 일본인은 제대로 사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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