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의 말, 아내가 얼마 전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서 그 주무대인 벌교를 가고 싶다고 하여 한 달 전부터 약속한 날이다. 나도 2년 전 여름, 후배와 함께 찾았던 곳인데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차에 함께 길을 나섰다. 더구나 사흘의 연휴가 끼어 있으니 더욱 좋다. 원래는 하루 자고 오려고 했으나, 집에서 기다리는 개새끼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열차표까지 샀다가 다시 취소하고 끊었을 정도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잠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지나자 아내가 꿈틀대기 시작했고, 연풍이도 이른 아침 산책을 해야 하기에 씻고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나오는 건 무서운가? 원래 겁이 많은 놈이기도 한데, 무엇이 스르륵 거릴 때마다 겁이 나서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꼬리를 내리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한다. 이렇게 겁이 많은 자식도 한 가지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진돗개! 진돗개만 보면 용맹하게 덤빈다. 내가 다 민망하고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며칠 전에도 그렇게 동네 골목길에서 만난 진돗개한테 덤벼 물려 죽는 줄 알았다. 그 진돗개가 내 눈치를 보고 연풍이만 제압한 다음 도망가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물려 죽었을 게다. 제압당했을 때도 그때뿐, 진돗개가 도망가자 그걸 또 쫓아내며 의기양양이다. 진돗개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자 그제야 낑낑거리며 자기 아프다고 엄살이다. 웃긴 자식.
아무튼 그렇게 아침 산책을 가볍게 마치고 6시 30분 집을 나섰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나가 버스를 타고 출발! 앗, 그런데 이게 웬일? 카메라를 집에 놓고 왔다. 한 정거장도 가기 전에 알아차려 다행이지, 큰일날 뻔했다. 얼른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뛰어서 다녀오니 6시 40분이 조금 넘었다. 상록수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 수원행 버스로 갈아타고 수원역에 도착하니 7시 5분쯤되었다.
아침에 서두르느라 해결하지 못한 생리현상을 수원역에서 처리하고, 간단한 요기거리를 사들고 여수행 기차에 7시 25분 올랐다.
기차 안에서는 일단 배부터 채우고 미처 풀지 못한 피로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멀기도 멀어라, 4시간 반을 달려 순천역에 도착했다. 지난 여름에는 이곳에서 88번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그때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버스도 자주 없다는 걸 알았던지라 이번에는 아예 터미널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만 가면 바로 터미널이다. 한 사람에 2300원을 내고 12시 35분 벌교행 버스가 출발했다.
1시 00분, 벌교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침도 못 먹고 왔는지라, 배에서는 허기가 져 아우성이다. 그래도 미리 생각한 동선대로 움직여야겠기에 먼저 회정리 교회로 향했다. 회정리 교회를 향해 가는데 '조정래길'이란 주소판이 눈에 띈다. 2년 전에는 못 본 것인데, 이제 조정래와 태백산맥으로 문화관광상품을 만들었나 보다.
조정래길. 한 소설가의 이름이 이렇게 주소로 사용되는 곳이 얼마나 될까? 그의 태백산맥 집필 과정이 힘들었던 만큼 이제야 제 빛을 보는 듯하여 흐뭇하다.
회정리 교회는 지난 여름에도 둘러본 곳이다. 1935년에 지은 건물이라는데 당시의 건물치고 규모도 크고 독특한 건물이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교회는 김형모 목사와 신도들이 힘을 모아 지은 60평의 예배당이다. 태백산맥에서는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70년 전 일본인 농학자 다카하시 노보루가 이곳 벌교에 왔을 때도 이 언덕 위에서 벌교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회정리 교회는 지금은 예배당이 아닌 '대광어린이집'으로 쓰이고 있다. 휴일이라 문이 잠겨 있어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의 마룻바닥이 그대로 깔려 있다. 그리고 당시 유교 관념에 걸맞게 남녀의 출입구가 사진과 같이 따로 나 있다. 왼쪽이 남자, 오른쪽이 여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지금은 왼쪽 문만 사용하고 오른쪽 문은 아예 걸어 놓았다.
첨탐 부분도 원래 벽면과 같은 방식으로 쌓아 올렸으나, 지금은 합판 같은 걸로 둘레를 쳐 놓았다. 관계자가 있으면 설명을 듣고 싶었으나, 시간도 없고 그냥 지나쳤다. 건물 뒷편(사진의 오른쪽)으로 가건물을 덧대어 주방으로 쓰고, 건물 저 건너편으로는 어린이집 건물과 놀이터가 있다.
회정리 교회를 한 바퀴 훑어 본 다음에는 배를 채우러 갔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는 벌교의 참맛인 꼬막을 맛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오늘은 제대로 먹을 수 있어 내심 기대했다. 미리 알아보니 '홍도회관'이란 곳이 유명하다고 하여 '외서댁 꼬막나라'를 지나 빙둘러 그리로 향했다. 태백산맥을 보신 분은 알겠지만 외서댁이란 이름과 꼬막을 연결해 놓은 그 집,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내는 두 이름을 연관시켜 놓은 게 참 거시기하다며 입에 올리지 말란다.
홍도회관에 도착하니 점심 때가 조금 지나서인지 그리 붐비지 않는다. 오면서 지난 다른 식당들은 관광버스들이 잔뜩이라 시끌벅적해 보였다. 그래서 들어오면서 좀 걱정했다. 소문만 무성하고 맛은 별로가 아닐까? 자리에 앉으니 자동으로 정식 2개가 착착 나온다. 먼저 살짝 데친 꼬막이 나왔는데, 이것들이 머금은 국물이 오묘하다. 벌교의 뻘흙을 머금은 꼬막의 내장에서 나는 그 향과 맛은 머릿속에 푹 들어와 박혔다. 꼬막에서 처음 느끼는 향과 맛이다. 다음으로는 꼬막에 어울린다고 하여 13도의 녹차주를 시켰는데, 이건 생각보다 별로다. 여성을 겨냥해 만든 것인지 너무 달다. 꼬막의 좀 짭쪼름한 맛을 살리려면 이렇게 달짝지근한 술보다 시큼새콤한 맛이 더 나을 것이다. 아니면 개운한 맛이라든지. 아무튼 술은 영 별로다. 그냥 안동소주나 시켜 먹을 걸 그랬다.
맛있게 꼬막의 다양한 요리를 조금씩 맛보았다. 전체 평은 10점 만점에 7점. 지난 여름 벌교 장날 먹었던 2000원짜리 밥이 너무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집도 맛은 있으나 비싼 값에 비해 양이 좀 적다는 단점이 있다. 밑반찬도 그날 한 것이 아닌 듯하고... 벌교가 꼬막으로 너무 떠서 그런가 보다. 어딘가 벌교 장터 밥집 같은 곳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벌교 사람한테 물어야 알겄지.
아내는 교정기를 위아래에 설치한 뒤라 음식만 먹으면 곧바로 화장실로 향하여 이를 닦는다. 꼬막을 먹으면서도 맛있는데 질기다며 이러면 이에 많이 낄 것이라 걱정하더니, 우려대로 먹고 난 뒤 이에 잔뜩이다. 시장터에 자리한 공용화장실에 가서 이를 닦고 나오는 틈에 난 고기를 손질해 말려 놓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내의 표현에 따르면 개코원숭이 대가리 같다는 가오리? 홍어?
이건 갯가 사람들 아니면 먹지 못할 듯하다. 바로 옆에 서 있어도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배도 채웠겠다, 술도 한 잔 마셨겠다, 이제는 동네 산책을 할 차례이다. 벌교읍이라는 행정명이 있지만, 솔직히 이곳 벌교는 우리 동네보다도 좁다. 옛날의 영화만 가득 안고 있는 옛 건물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지난 번에 왔을 때 깜짝 놀랐던 본정통 거리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때의 거리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이걸 놓칠 수 없기에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찾은 곳은 다카하시 노보루가 묵었던 보성여관(남도여관)이란 곳이다. 일본식 정원이 아직도 남아 있는 흔치 않은 곳이라 자연스레 이곳을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리에 들어선 순간 무언가 느낌이 달라졌다. 여기저기 어수선한 흔적들, 파헤치고 무너뜨린 모습들, 먼지가 이는 거리, 어수선하다.
분명 이 자리에 있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은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사라지고 잔해와 먼지만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다. 그 뒤 공터에서 여자아이들이 비누방울을 불면서 놀고 있다. 비누방울과 철거, 묘하게 어울린다. 지금 내 기분과도.
2년 전에 서 있던 건물. 이렇게 사진은 역사가 되는 것인가 보다.
여관 건물도 창이 깨지고 을씨년스럽다. 입구를 통해 지난 번처럼 안을 보려고 가니 공사안내판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올해 말까지 보수공사를 하느라 이렇다는 설명이다. 그럼 내년에 올 걸 그랬나? 아니다, 2년 전에 와서 역사를 간직한 채 현대의 사람들이 쓰던 모습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새로 단장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간 다음, 내년에 또 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해야 쓰겄다.
문화재보수를 위해 보성군청에서 발벗고 나선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전에 낡은 건물을 보면서 이런 가치 있는 건물이 방치되는 것 같아 가슴 아팠는데 말이다. 참, 이곳 여관을 다시 오니 작년 가을 일본 후쿠오카에서 묵었던 80년 넘은 여관이 생각난다. 그 건물과 비교하여 규모가 절반 정도는 된다. 이곳도 잘 살려서 계속 여관 건물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
요즘 한옥을 여관으로 쓰는 일도 많으니, 역사문화의 거리로 조성하려면 아예 이곳을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보성군에 말하고 싶다.
2년 전 태풍이 지나간 어느 늦여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건물을 찍은 사진.
다음으로 걸음을 금융조합 건물로 옮겼다. 지금으로 치면 농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얼마나 멋있게 지어 놓았느지 지금 보아도 훌륭하다. 이곳에 들어가는 조선 농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단 돈을 빌려야 하니 굽신거리며 들어가, 머리를 연신 조아리고, 서류에 도장을 찍고는 소중하게 품에 넣고서 나오며 인사를 꾸벅 드렸겠지.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돈 없는 놈이 서러운 것이라는 말이 왜 계속 귓가에 맴도는지 모르겠다. 역시 요즘 같은 시대에는 돈이 최고인가? 언제 화폐의 역사도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아야겠다. 분명 인간의 필요로 만든 돈이, 오히려 인간 위에 군림하며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니, 이건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지금은 농민상담소르 쓰는 옛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건물. 이런 촌구석에 이렇게 훌륭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벌교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곳에서 인근을 쌀을 모두 그러모아 목포로 보냈겠지. 옛날에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그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권에 개입된 세력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먹들이 모이며 서로 이권 다툼을 벌였기에 생긴 말이다.
똑바로 솟은 교회 첨탑 앞으로 금융조합의 삐딱한 피뢰침, 또 거리엔 시험포장을 한다는 공사 안내 현수막까지, 정비되지 않고 옛 영화만 간직한 벌교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정비 사업이 끝나고 나면 과연? 그때 가서 다시 확인할 일이다.
벌교 본정통은 지금 공사중. 기차를 타고 순천을 거쳐 버스를 타고 벌교로 향하면서도 대한민국은 현재 '공사중'이란 사실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섬진강은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벌겋게 흙탕물이 흐르고 있고, 여기저기서 새로 뚫는 고속도로에, 이곳까지 속살을 다 드러내 놓고 먼지가 풀풀 나며 공사중.
이곳은 이제 '태백산맥길'이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가 되는 건물들이 즐비한 곳이라 이렇게 이름을 붙였을 게다.
이제 소화다리를 건너 태백산맥 문학관에 갈 차례이다. 소화다리는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화가 건너다닌 다리라서 소화다리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소화 몇 년에 놓은 다리라서 그렇게 부른다. 원래는 부용교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있으나 벌교 사람들에게 이 다리는 일본놈들이 놓은 소화다리일 뿐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이 다리에 얽힌 아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바로 빨치산을 처형하는 장소로 이 다리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다리에는 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 위에 개울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리고 앉힌 다음, 뒷통수에 대고 총을 "탕" 쏘면 시체를 수습할 필요도 없이 바닥에 쳐박히는 편리함(?) 덕분에 이곳을 이용했다는 이야기이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지금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주변 풍광이 아름답기만 하다.
소화다리 위에서.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상처가 아물어 흉터만 남기고 모든 게 사라지듯이.
태백산맥 문학관은 터미널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벌교읍은 걸어서 2~3시간이면 모든 곳을 다 돌아볼 수 있다. 산책 삼아 문학관까지 슬슬 걸어 올라가 입구에 들어서니, 보성군민을 제외하고는 입장료가 2000원이라 한다. 장애인 무료란 말은 없는지 눈 씻고 보았지만 그런 문구는 없어 그냥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갔다. 화요일은 휴관이고, 5세 미만 65세 이상은 무료라고 한다.
1층은 태백산맥과 관련한 여러 자료를 전시하고, 2층에는 조정래 씨의 다른 소설들을 전시하며, 4층은 전망대로 벌교를 한눈에 내려다보게 만들어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전망대에 창이 없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태백산맥을 뻥튀기해 놓은 책 10권이 서 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도 한 장 찍었다. 연휴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있어 솔직히 좀 놀랐다.
1층의 여러 자료 가운데 나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무엇보다 취재노트이다. 옛날 일수 찍는 수첩에 취재 기록을 적었는데, 전체의 양이 그걸로 200여 권이나 된다고 한다. 아, 취재는 이렇게 하는구나. 그걸 바탕으로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도 여기저기 취재를 많이 다니기는 했는데, 자료를 어떻게 모으는지 어떻게 정리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아 모두 흩어져 버렸다. 유일한 것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정리되어 있는 원고뿐. 그것만큼 원천자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앞으로는 잘 정리해서 보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벌교읍의 모습을 기억하여 정리한 지도. 이런 철저한 취재 끝에 대작 태백산맥이 탄생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일각의 목소리도 있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소설은 없는 법이란 것도 사실이다. 소설은 당시 현실을 기반으로 작가라는 인간을 통해 새롭게 구성된 기록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위에 보이는 약도 말고도 빨치산의 활동을 적어 놓은 기록도 흥미로웠다. 빨치산의 은신처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려 놓은 그림이 있었는데, 꼭 감자움 같아서 여기에도 농사의 기술이 쓰였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또 빨치산을 취재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인간의 환경적응력은 대단해서, 산길을 그렇게 뛰어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다는 둥, 무거운 짐을 지고 밤을 꼬박 새며 산을 넘어 다녀도 힘들지 않았다는 둥, 겨울을 나려고 준비하는 것을 우스개 소리로 똥을 피한다는 월똥준비라고 했다는 둥, 신발이나 생필품을 많이 사가는 사람이 있으면 빨치산으로 의심을 받았다는 당시의 생생한 증언들이 가득했다. 그냥 전시물을 쓱 훑고 지나가면 보이지 않으니, 언제 가시면 전시물에 적힌 글씨를 꼼꼼히 보시라.
문학관을 나오며 기념품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 머그컵(5000원)과 연필(10자루, 5000원)을 구입했다. 문학관 사업에 긴요하게 쓰이면 좋겠다. 이 모든 게, 입장권까지 현금영수증 처리가 되어 더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 연말정산 환금을 받아보니 좋더라.
문학관을 나와서는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현부자집을 들어갔다. 이곳에 처음 왔던 건 2년 전 그때. 당시에는 아직 건물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점심 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라 대청마루에는 인부로 보이는 분들 몇몇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날도 덥고 하여 들어가 한켠에 조용히 앉았다가 땀을 식히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재밌는 기억으로는 이런 부잣집은 화장실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찾아 돌아다닌 일이다. 특이하게도 근현대에 지은 집이라 그런지 화장실이 살림집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아래 사진에 보이는 왼쪽 편 제일 뒤에 마련되어 있다. 문을 열면 이른바 푸세식이라 부르는 변기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아래로 똥이 뚝 떨어지면 그걸 긁어서 치우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래 '아, 화장실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며 호기심에 마루 밑으로 몸을 굽혀 바라보니, 아저씨들 똥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에이, 그래서 괜히 기분 잡쳤다. 똥이 거름이 된다는 생각이 있어도, 그래도 남의 똥을 보는 건 기분이 더럽다.
현부자집에서 한 장. 일제강점기에 지은 한옥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집이다. 대문 위에 솟아 있는 감시탑. 물론 감시탑이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자신이 소유한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조이니, 소작인들이 이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는 뻔하지 않을까? 전에 토종수집을 위해 교동도에 들어갔을 때도 이런 구조의 집이 보여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일정 때문에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또 마루 앞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현관 구조. 그리고 앞서 말한 건물에 속해 있는 화장실도 그러하리라. 조선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로 들어오면서 한옥의 형태와 구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벌교 태백산맥 기행을 마치고 다시 벌교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3시 50분. 4시에 떠나는 순천행 버스에 몸을 싣고 순천에 가서 마침 장이 열린지라 아랫장(2, 7일장)에 들러 기차 안에서 저녁 대신 먹을거리와 집에 와서 먹을 한 할머니가 직접 캔 봄기운 가득 담긴 냉이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시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벌교터미널은 엄청나게 크다. 언젠가 이 터미널에 각지로 가는 버스로 붐비게 될지, 아니면 조그맣게 줄어들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헐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이 한 장의 사진도 또한 역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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