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9일 군포시 속달동에 있는 동래 정씨 묘역에 다녀왔다. 이곳은 정난종이란 분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며 동래 정씨 집성촌이 형성된 곳이다. 그럼 정난종은 누구인가?
본관 동래東萊. 자 국형國馨. 호 허백당虛白堂. 시호 익혜翼惠. 1456년(세조 2) 생원·진사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검열·대교待敎·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감찰·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460년 봉교奉敎로 정자청鄭子淸과 함께 서얼庶孼의 과거응시를 반대하였다. 1463년 시강원 문학文學을 거쳐 예조정랑·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중시에 급제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예조참판을 지낸 뒤 등준시登俊試에 급제, 형조참판으로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전임, 1469년(예종 1) 춘추관동지사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이조참판을 지내고 1470년(성종 1) 중추부동지사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좌리공신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고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영안도관찰사·호조참판·영안북도병마절도사·한성부판윤·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우참찬·이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작품에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김철산묘비〉(連山)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楊州)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襄陽) 등이 있다.
들어가는 입구. 밤에 이곳에 남녀가 들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경고문이!
이곳에는 정난종 이하 그 후손들의 묘까지 자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 묘역이 정난종 부부의 묘.
정난종 선생 묘 양 옆에 서 있는 문신상 1.
문신상 2.
특이한 혼유석.
봉분의 크기가 엄청나다. 2m는 됨직하다.
이곳에서는 속달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이 명당이런가?
다음 그 아들 정광필의 묘가 그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정광필은?
본관 동래東萊. 자 사훈士勛. 호 수천守天. 시호 문익文翼.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에게 극간極諫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부제학에 복직, 이조참판·예조판서·대사헌을 거쳐 1510년(중종 5) 우참찬右參贊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수습한 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고,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1537년 총호사總護使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김해金海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김안로의 사사賜死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廟庭과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배향되었다. 문집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세월이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묘비.
이건 정광필의 동생인가 하는 분의 묘비. 장식이 참 멋지다. 처음 이 묘비를 세웠을 때는 더 화려했으리라.
문인상이 참 다채롭다.
재밌는 동자상의 모습. 술병을 들고 있는 걸까? 근데 동자상은 왜 다 중국식 머리에 옷차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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