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뭇 생명이 일제히 소생하는 완연한 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봄다운 봄이 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일전인가 산수유가 꽃 몽우리를 내밀더니 춘분인 오늘 화들짝 만개를 했다. 남쪽에는 매화 소식이 들려 온지 며칠 되었다. 이제 며칠 안 있으면 개나리도 지천으로 만발할 것이고 산에는 진달래가 연한 핏빛의 기운으로 퍼져갈 것이다.
그러나 봄기운을 대표하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 어쩌면 꽃보다 더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을 새순들이 힘차게 돋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냉이와 씀바귀 광대나물 꽃다지 등의 나물들이야 진작에 자리 차지하고 힘을 내기 시작했지만 할미꽃, 수선화, 상사화, 창포, 제비꽃 등의 예쁜 꽃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새순을 들어 올리느라 애를 쓰고 있다.
작물들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에 심었던 밀 싹들이 겨우내 풀죽은 듯이 죽어있더니 춘분 즈음이 되자 힘차게 녹색 기운을 머금으며 힘을 내고 있다. 겨우내, 아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칙칙하다 싶을 만큼 밝지 않고 힘없는 녹색의 풀에 불과했는데 이젠 젊은 녹색의 기운이 맑은 햇빛을 받으며 맘껏 뽐내는 것 같다. 양파들도 몇 개들만 은근히 힘을 내는 듯 하더니 힘찬 녹색의 기운이 양파 밭 전체에 걸쳐 퍼져있다. 마늘은 작년에 비해 일주일 늦게 순이 올라왔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으면서 이제 낮이 더 길어지기 시작하는 전환점이다. 그에 따라 온도도 더 이상 영하로 내려가질 않는다. 입춘 이후 한낮에만 얼굴을 드러내던 봄기운이 아침 저녁에도 환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니 바야흐로 본격적인 봄의 세계가 온 것이다.
그래서 춘분도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정월 설날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낮이 밤을 이기기 시작하고 날씨도 영상으로 확실히 돌아섰으며 만물이 본격적으로 소생을 하는 철이니 한 해의 시작이라 하기에 적당한 것이다. 해가 가장 짧았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도 정월로 삼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 같지만 날은 본격적인 겨울을 준비하고 있으니 작은 설날에 만족해야 했다. 동지가 설날에 적당치 않다면 그 다음으로 가장 적당한 절기는 역시 춘분 밖에 없다. 낮이 드디어 밤을 이기기 시작한다는 점이나 만물이 소생하는 절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제로 춘분을 설날로 삼았던 지역이 있었는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그러했다고 한다. 춘분이 되면 그들의 주식인 밀이 본격적으로 성장을 개시하기 시작하므로 더더욱 설날로서 춘분의 의미가 깊다 하겠다. 밀만이 아니라 가축의 먹이가 되는 목초들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생장을 개시하므로 가축들을 다시 키울 수 있으니 여러모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메소포타미아 지역만이 아니라 밀과 고기를 주식으로 했던 지역에선 춘분이 매우 중요했던 것 같다. 가령 기독교에서 예수가 부활한 날을 춘분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것도 만물이 소생하는 춘분의 의미와 관련이 깊다. 성경에는 예수의 생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예수가 부활한 날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후세들이 억지로 날을 만든 것인데 이는 다분히 로마의 고대종교에서 동지 축제와 함께 춘분 축제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서양이나 동양이나 춘분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우리는 춘분을 설날로 삼기에는 너무 늦다. 서양처럼 밀을 주식으로 삼기에는 겨울이 너무 추워 밀 생장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우리는 밀보다는 벼가 잘 자라는 몬순 기후의 환경인데 벼 중심의 여름 곡식 농사를 잘 지으려면 춘분 이전, 그러니까 입춘 지나서부터 한해 농사 준비를 해야 한다. 앞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종자 준비, 퇴비 준비, 밭이나 논을 갈고 둑 정비를 하는 작업이 춘분 이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춘분이 지나면 모든 씨앗을 파종할 수 있는데 특히 감자와 봄채소들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감자를 제일 먼저 심고 감자를 심은 다음에는 강낭콩, 완두콩을 심으며 얼갈이나 상추 시금치 아욱 등 채소를 심는다. 여름 작물들은 서리가 사라지는 곡우를 기점으로 곡우 이후에 싹이 나도록 파종하는 것이 좋다. 괜히 일찍 파종하여 싹이 났을 때 서리를 맞으면 냉해를 입어 죽거나 약하게 자란다.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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