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 맑고 화창한 봄날
청명, 참 이름답게 청명한 봄날이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예쁜 꽃들을 자랑하니, 양지 바른 땅에서는 제비꽃들이 뒤질세라 앙증맞게 피어나고 있다.
사계절이 자기의 본색을 절정으로 뽐내는 절기는 청명처럼 4절 기(춘분, 하지, 추분, 동지) 직후에 오는 절기다. 그러니까 봄은 춘분 다음 청명에서 절정에 이르고, 여름은 하지 다음 소서에서 절정에 이르고 가을은 추분 다음 한로에서 절정에 이르고 겨울은 동지 다음 소한에서 절정에 이른다.
사실 해의 기운은 4절기를 지나면 다음 계절로 접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예컨대 동지 지나면 해가 살아나기 시작하니 겨울을 지난 것이고, 하지 지나면 해가 죽어드니 여름을 지난 것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 로 춘분 지나면 해는 봄을 넘긴 것이고 추분 지나면 해는 가을을 넘긴 것이다. 그럼에도 지구는 태양의 기운을 받아 놓은 복사열 때문에 해의 기운대로 쫓아가질 않는다. 방금 설명했듯이 지구는 4절기를 지나야 본격적인 그 계절의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춘분이 지나면 완연한 봄의 계절이지만 아직 아침 저녁에는 약간의 찬 기운이 남아있다. 영상의 날씨로 확실하게 돌아섰지만 아침에는 영상 3~5도 정도다. 그러나 낮에는 10~15도 정도 되어 일교차가 꽤 크다. 게다가 올해처럼 입춘이 설날 전에 오면 봄 추위가 길어져 춘분이 지나도 꽃샘추위가 올 수 있다. 그래서 발아가 금방 되는 채소 종자를 춘분에 바로 심으면 싹이 나왔을 때 마지막 꽃샘추위가 불어 닥쳐 냉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 감자는 발아가 늦으므로 춘분에 심어도 피해를 피할 수 있다.
그래서 제일 안전한 파종은 춘분 지나 청명 직전에 하는 것이다. 청명에는 식목일과 한식이 겹치기 마련이다. 식목일 은 나라에서 정한 나무 심는 날이다. 식목일을 청명에 맞춘 것은 바로 청명이 뭐든지 심기에 안전한 절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나무 묘목을 심을 경우 청명 이전, 춘분에 심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다. 나무는 청명이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눈을 틔워 활동을 개시하는 시점이기에 그 때 옮겨 심으면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이 틔기 전, 그러니까 나무가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때 옮겨 심어야 타격이 덜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청명 쯤 되어야 날씨도 화창하여 나무 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한식(寒食)은 동지 후 105일째로 4대 명절 중에 하나다. 설날 다음으로 오는 두 번째 명절인 것이다 . 그런데 한식 때 성묘를 가는 것이 참 이해가질 않았다. 추석 때처럼 산소에 풀이 많이 난 것도 아니고, 추수할 것도 없는데 무슨 일로 산소엘 갈까? 어느 봄날인가, 시골 가다 퍼뜩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밭 위 제일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은 한 무덤을 보고 말이다.
전형적인 농경 사회인 우리나라는 절대적인 신보다는 조상신을 섬겨왔다. 물론 어느 나라든지 최초의 신은 조상신이었을 것이다. 조상신이 발전하여 절대적인 신이 되었 을텐데, 우리는 그렇게 나아가질 않았다. 굳이 조상신 위에 있는 존재를 얘기하자면 삼신할매 정도다.
농경 사회는 기본적으로 붙박이다. 특히 밀농사가 아닌 벼농사 중심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붙박이로 산다 는 것은 사실 조상 은덕으로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버지가 농사짓던 땅, 그 위로 할아버지가 농사지었고,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농사짓던 땅에서 목숨을 부치고 있으니 어찌 조상 덕에 산다 하지 않을 수 있을 까. 그 땅이 또한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퇴비를 넣고 열심히 갈며 비옥한 땅을 지켜왔기에 현재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그 땅에서 우리의 후손들이 먹고 살아 가야 한다. 그러 려면 땅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는 법이다. 나도 조상들처럼 신이 되어야 한다. 땅을 비옥하게 갈고 닦는 농부의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같이 붙박이 사회의 공동체는 죽은 조상 귀신도 같은 식구이고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도 같은 식구이다. 시간을 초월한 공동체인 셈이다.
목축, 유목을 하는 밀농사 지역에선 조상신보다 절대적인 신이 중요했다. 가축의 먹이인 목초는 사람이 재배하는 작물이 아니라 자연이 키워주는 것 이다. 그 목초는 그들에게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목초를 잘 키워주는 자연은 자연스럽게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밀농사는 벼농사와 다르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농사지어야 한다. 이른바 윤작과 휴경을 꼭 지켜야 하는 농사다. 게다가 목축, 유목이 더 그들의 이동 문화를 발달케 했다. 붙박이 문화에서 차지하는 조상신의 가치가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덜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와서, 그럼 한식 때 왜 조상들을 찾아 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밭에 씨앗을 심고 조상님들에게 한 해 농사 잘 되게 해 달라는 신고식이자 기원이었을 것이다. “조상님들이 일구어놓은 이 밭에 씨앗을 심었으니 잘 되게 해주십시오.”하고 말이다.
한식 때 성묘 가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겨우내 흙이 얼었다 녹았다 하며 자칫 봉분이 허물어졌을 수도 있고 무덤의 떼가 들떠 있을 수도 있다. 허물어진 봉분은 다시 돋아주고 들뜬 떼는 밟아주거나 구멍 난 곳은 새 뗏장 으로 메워주어야 한다.
청명 즈음해서 음력으로 중요한 날이 삼짇날이다. 음력 3월 3일은 양의 날이 겹쳐서 아주 길한 날로 여겨왔다. 작년 9월 9일 강남으로 돌아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다. 삼짇날은 원래 음력 3월 들어 첫 번째로 오는 뱀날(상사일上巳日)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날이 따뜻해 뱀도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이라 이날 뱀을 보면 재수 좋다고도 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재수 없다고도 하는 데가 있다. 어쨌든 삼짇 날이 되면 완연한 봄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 봄꽃 구경하러 봄나들이 가는 날이기도 하다. 진달래꽃 따다 화전도 부쳐 먹고, 양지 바른 곳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쑥나물 뜯어다 쑥버무리 해먹기도 한다.
청명이 되면 이제 안심하고 무엇이든 파종을 하면 되는 날이니 화사한 봄꽃에 마음 들뜨기도 하지만 부지런히 몸을 놀려 농사에 매달려야 한다.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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