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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지역의 주거

(1) 대부동
1) 섬 개관
대부도(大阜島)는 서해안에서 제일 큰 섬으로 명칭에는 ‘큰 언덕[大阜]’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1994년 말에 안산시로 편입된 대부도는 법정 명칭으로는 대부동, 행정적으로는 대부동동·대부북동·대부남동·선감동·풍도동으로 나뉜다. 1997년 2월 현재 전체 가구 2103호, 총인구 5948명인 대부도는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한해나 수해 등 천재지변으로부터 별다른 영향이나 피해를 입지 않은 특이지역, 즉 ‘축복의 섬’으로 알려져 있다.
농업가구가 전체의 80%를 차지하는데, 그 중에서도 포도는 거의 모든 농가가 중요 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광객의 급증으로 이들을 상대로 굴·낙지·바지락을 파는 노점상이 성행하고 있다.
대부도의 주거상황을 알아보기 위한 조사지 선정에서 어촌으로서의 성격이 가장 강한 곳으로 알려진 ‘대부남동’ 일대를 택하였는데, 이는 변화된 대부도의 모습보다는 기존의 어촌 모습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시화지구개발로 인하여 산과 해안이 황폐화되어 가고 있고, 시화담수호는 국내 환경오염의 대명사로 지칭될 만큼 인근 해안의 어종 감소와 생태계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주민생활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전통가옥이 현대식 주택으로 개량되어 가고 있다.
한편 얼마 전까지 탈농현상으로 인해 인구 감소가 지속되었으나 1994년 이후 점차 인구가 증가(연 0.5% 이상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특히 대부북동 방아머리 지역은 시화방조제가 시작되는 곳으로 과거 영세농어업에 의존하던 곳이었으나 개발로 인해 외지인의 투자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현재는 상가 형성이 타지역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2) 김문국 씨 가옥
대부남동 남3리의 ‘고래뿌리’에 자리잡은 김문국(57세, 농어업) 씨 집은 원래 ㄱ자형 가옥으로 건축되었으나 변형된 튼입구자형으로 재건축된 동향에 가까운 집이다. 이는 어촌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민가의 특징으로서 추운 겨울 바람을 막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집 뒤로는 산과 언덕을 끼고 있고 주변은 포도밭이다. 김문국 씨 집안은 덕적도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와 4대째 살고 있는데, 인근 어장에 나가 해조류·굴·바지락 등을 채취하기도 하지만 주수입원은 1987년부터 시작한 포도농사이다. 즉 주업은 농업이고 어업은 부업이다. 집의 건축 시기는 안채의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龍上梁文昭和十八年七月二十四日入住龜’라고 간단하게 건축 연대를 적고 있어 1943년 7월에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낡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아래채를 개조해 사용하는데 안채 마루에는 뒤쪽으로 작은 다락이 있고 마루 중간에는 기둥이 세워져 있다. 또한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건넌방에 아궁이가 있는데, 그 위에 쪽마루를 놓았다. 안방과 안방 아궁이 역시 아궁이 바로 위에 다락을 달아 안방의 이불장으로 써 왔다. 안채 처마밑의 노출된 부분을 통해 수수깡흙벽집임을 알 수 있다.





























그림 3-10 김문국 씨 가옥 평면도.
원래는 ㄱ자형가옥이었으나 변형된 튼입구자형으로 재건축하였다.





























그림 3-11 신동한 씨 가옥 평면도.
70년이 넘은 집이지만 증ㆍ개축이없어 농어가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

이 집은 안방과 건넌방의 구별이 모호한 것이 특징이다. 원래 안방에는 부엌이 딸리기 마련인데, 애초에 부엌에 비중을 두어 짓지 않고 아래채에 있던 간이부엌을 주부엌으로 사용해 왔다. 지금은 안방 아궁이 두 곳에 가마솥을 걸어 소먹이통과 나뭇간으로 사용한다. 안채는 거의 사용을 안 하지만 명절 때나 작은 소일거리 등이 생기면 안채를 사용하기도 한다. 안채는 거주공간이라기보다는 농사일이라든가 명절의례를 행하는 공간이 되었다.
안채가 개조되지 않고 그대로인 반면 아래채는 외양간과 광을 헐고 공간을 통합해 방으로 사용하는데, 광으로 사용될 때의 문은 폐쇄되어 있다. 아래채는 이처럼 개조를 많이 해 원래의 건축 시기를 잘 알 수 없지만 1943년에 건축된 안채와는 건축 시기에 있어서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안방의 창살은 정자전창(井字箭窓)으로 본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창살은 가장 간단한 형태로서 서민가정에서 많이 활용하였다.

3) 신동한 씨 가옥
신동한(67세, 농어업) 씨 집은 인근에 선재도(仙才島)로 가는 나루터가 있는 대부남동 남5리 ‘큰 망송’이라 하는 마을에 있다. 주변에서 말을 타고 성(城)에서 망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림 3-11 신동한 씨 가옥 평면도.
70년이 넘은 집이지만 증ㆍ개축이없어 농어가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

신동한 씨 집안이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7대째이고, 이 집에서 산 것은 3대째이므로 비교적 정확히 집의 건축 시기를 알고 있었다. 조부께서 일제 시대(1925년)에 직접 지었다고 했으므로 건축된 지 70여 년이 넘은 집임을 알 수 있는데, 증축한 안채 부속건물을 빼고는 거의 개조나 증축이 이루어지지 않아 농어가(農漁家)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집 뒤는 밭과 대나무 숲이 있는 산이고, 앞은 선재도로 빠지는 길이 있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남서향집으로, 오른편 뒷산이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어우러진 ‘튼입구자형’집으로, 안채 건넌방 옆에 헛부엌을 따로 증축하여 소여물 끓이는 곳과 나뭇광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집 역시 안방과 부엌을 1991년에 기름 보일러로 개조해 주요 거주공간으로 삼고 있다.
바깥채를 보면 아랫방·광·나뭇광·외양간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다만 바깥채 작은 방만 비어 있다. 특히 대문 바로 옆에 외양간이 있어 들어오는 즉시 외양간을 거쳐야 안채로 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은 바깥채에서 대문이 하나의 공간으로 당당히 자리잡은 결과이다. 그 외양간 위에는 농기구 등을 놓을 수 있는 선반을 설치해 두었다.
바깥채는 돌담을 쌓고 그 위에 수수깡을 엮어 흙벽을 칠했고, 외양간은 소먹이통에 꼴을 줄 수 있도록 미닫이문을 해 달았다. 집안에 외양간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입구도 미닫이 나무문을 하였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거름을 나를 수 있도록 작은 통로를 하나 더 두었다.
이 집은 인근 가옥보다 높이가 더 높은 것이 특징이다. 안채는 222cm, 바깥채는 215cm로 평균보다 높다. 이것은 이 가옥이 비교적 바람을 타지 않고 햇살이 잘 드는 위치에 자리잡은 때문이다.
신동한 씨의 가정신앙은 여러 가지로서 성주와 ‘목수대감’ 및 터주를 모시고 있다. 성주는 집을 지은 이래 지금까지 대대로 모셔 온 것으로 마루 한쪽 벽에 실타래를 묶고 창호지를 잘라 엮어 걸었는데, 대나무를 창호지로 싸고 양쪽 끝에 창호지 숱을 먼지털이 모양으로 달고 그 중앙에 세 가닥의 창호지를 길게 늘어뜨렸다. 보통 3년에 한 번 정도 교체해 주며 매년 단골 만신이 와서 고사를 지낸다. 집안에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만신이 와서 성주신께 고사를 지내 가정의 평안을 빈다.
목수대감은 그 유래가 유별나다. 그 속에는 신동한 씨 집안의 내력이 담겨 있다. 목수대감은 마루 입구 왼쪽 벽 선반에 하얀 대바구니 형태로 마련되어 있는데 대바구니 속에는 부친이 생전에 목수 일을 하면서 입었던 겉옷이 들어 있다. 명절 때 시루떡을 해 바치며 지극정성을 다한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집에 우환이 겹치자 만신을 불러 원인을 물어보니 아버님을 모시라고 해서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터주신께는 매년 가을마다 햇곡식을 바치고 떡을 해 고사를 지낸다. 집 뒤꼍에 터줏가리를 놓았다.

4) 대부남동의 주거 상황
자연환경에 적응된 전형적인 가옥 구조는 ㄱ자형·ㄷ자형·ㅁ자형, 그리고 일자형으로 분류된다. 대부도의 경우 ㄷ자형·튼입구자형이 일반적인 경우로 발견되고 있고 간혹 일자형도 찾아볼 수 있다. ㄷ자형과 튼입구자형이 비바람과 추위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한다면, 일자형은 협소한 토지공간을 이용하려는 한 형태로 보여진다. 그러나 일자형 가옥일지라도 기본적으로 안마당을 포함한 ㄷ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도는 포도농사 등으로 경제적 여건이 호전되자 집에 대한 투자가 많아져 증축·개축·이축이 늘어나 현대식 양옥이 가미된 가옥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는 양옥이 갖는 장점인 난방·청결(위생)·편의시설 및 집에 대한 미적 감각 등에 대한 선호도 때문이다.
결국 경제적 여유와 함께 자연스럽게 건축형태가 바뀌어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수도권지역으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의식구조가 도시화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바다 매립과 교통 사정이 좋아지면서 어업의 비중이 감소해 이러한 추세를 부추긴 측면도 있다.

(2) 풍도
1) 섬 개관
대부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은 1.84km², 해안선 길이 5.5km, 인구 110여 명(1996년 현재)으로 약 50가구가 살고 있다. 풍도 동쪽 6km 거리에는 말육도(末六島)·종육도(終六島)·육도(六島)·중육도(中六島)·미육도(尾六島) 등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남쪽으로는 충청남도 당진군 대난지도(大蘭芝島)와 마주하고 있다.
주민들의 생활은 어업이 주업으로서 수산자원으로서는 굴·바지락·소라·꽃게 등이 있는데, 그 중 굴은 풍도 주민의 주요 소득원이다.28)
행정적으로 대부동 풍도리에 속하는 풍도는 섬 주민 대부분이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전에는 밭농사와 함께 돛단배를 가지고 영세어업에 종사했으나 동력선의 출현과 함께 어업의 비중이 커져 주수입원이 되었다. 현재 밭농사는 자급자족 정도의 수준으로 그 규모가 줄었고 휴경지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발전기를 통한 전력이 공급되고 있으며, 동력선이 등장한 이후에는 밭농사에 이용되던 소가 없어졌고, 기름 보일러가 등장하면서 땔감 이용이 없어져 산림이 울창해지고 있다.
한편 1980년대 초 TV에서 섬 주민의 삶을 ‘인간철새’라고 방영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곳 주민들은 계절적인 이동을 되풀이한다. 풍도 주민의 80%가 매년 4~6월에는 바지락을 채취하기 위해, 그리고 매년 11~1월 사이에는 굴채취를 위해 인근 ‘도리도(桃李島)’로 이동해 생활한다. 나머지 달은 풍도에서 생활하지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인천 등지로 나가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풍도·도리도·인천이라는 3중구조를 보인다.
현재 도리도에는 1983년도에 정부에서 지어 준 방 하나에 부엌 하나인 벽돌 슬라브 연립주택 50채가 있어 섬 주민의 계절적 주거지로 이용되고 있다. 1980년 이전에는 토굴에서 매년 생활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계절적 이동을 위해 초등학교 건물과 경찰 초소가 각기 한 동씩 들어서 있다.

2) 김영수 씨 가옥
김영수(54세, 풍도 이장) 씨 가옥은 풍도의 일반적인 가옥과는 거리가 멀다. 섬으로서 갖는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한 보다 넓은 집터 활용과 집짓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진 임시가옥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조립식 집은 1993년에 공사장에서 자재를 구해 와 아들과 함께 직접 지은 집이다. 섬이 경사가 급하고 평지가 없을 뿐더러 골목길도 좁아 벽돌·시멘트 등 건축자재를 운반하기가 육지에서 섬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더 힘들어 조립식 가건물을 지어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건축자재를 육지로부터 가져오는 것은 운반비도 만만찮고 불편하다. 또한 일반 집을 돈을 주고 지을 경우 인건비가 비싸고 품이 많이 든다. 중장비를 사용할 수가 없어서 일일이 사람 힘으로 해야 하는데 터를 잡는 데만 꼬박 11일이 걸렸다. 현재의 집은 공사판에서 분해해 가져온 집이라 건물 자체가 약하고 수명이 짧은 게 흠이지만 짓기에 편하고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3) 최영학 씨 가옥
최영학(81세, 어업) 씨 가옥은 1백여 년 전에 지은 집으로 이 섬에서 가장 오래 된 집이라고 한다. ‘ㄱ자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논농사가 없는 곳이라 짚을 구하기가 어려워 처음에는 산죽(山竹) 등으로 지붕을 덮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현재의 기와로 지붕을 바꾸었다. 지대가 좋은 편이라 아직도 견고한 토담집이다.
‘건넌방-대청마루-안방-부엌’으로 된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지만 건넌방 앞으로 작은 방을 하나 더 내었고, 1972년 들어 개조하면서 나뭇간까지 지붕을 하나로 이어 지붕만 본다면 일자형 구조를 보인다. 또한 대청마루 뒤쪽으로 시렁을 빼 협소한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풍도는 작은 섬으로 평지가 거의 없어 대개 경사진 곳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넉넉한 공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돌이 많아 개간하기도 어렵다.




























그림 3-12 최영학 씨 가옥 평면도.
풍도에서 가장 오래 된 집(1백여년)으로, 당시 ㄱ자형으로 지은 원형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대청마루와 봉당 사이에 작은 마루를 하나 더 내었는데, 기존의 봉당을 없애고 대청을 확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연히 안마당의 일부를 다시 단을 낮게 쌓아 봉당을 새로 만들었다. 또한 부엌은 공간 분할만 되어 있지 특별히 경계를 짓는 구분이 없다. 문을 해 달지 않고 문지방만 있어 그 위를 넘나들게 하였다. 뒤꼍으로 통하는 문도 마찬가지이다. 부엌 한구석에 식상대를 마련해 식기 등을 놓아 두며 아궁이 부엌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부엌 앞쪽 대문 입구의 창고는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농기구 등을 보관한다.

4) 육도
본육도에는 당진 출신 2가구, 인천 출신 2가구, 서울 출신 4가구 등 총 9가구가 살고 있으나 2가구 정도에 적합한 식수만이 공급되고 있어 식수난이 심하다. 본육도의 역사는 오래 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대개 한시적인 거주만이 간간이 이루어지다 1981년부터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본육도의 주거는 풍도와 비슷한 구조와 형태를 갖는다.

5) 풍도의 주거 상황
풍도의 주거공간은 자연환경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데 가장 주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경사진 곳에 돌을 골라내 평평하게 다진 다음 집터를 다진다. 그리고 필요한 목재를 뒷산에서 구해 와 가구를 틀고 나무를 엮어 흙을 발라 벽을 대신한다. 그 위에 당진 쪽에서 구해 온 볏짚을 올리거나 산죽 등으로 지붕을 씌운다.
예전에 풍도에서는 겨울이 추워 집을 낮고 좁게 지어 추위를 막고 주변에 돌담을 쌓았다. 특히 돌담은 바람막이를 위해 높게 쌓았다. 가옥의 구조는 대부도와 비슷한 ㄱ자형이 대부분이며 집터 자체는 좁다. 그렇지만 건축자재를 쉽게 구할 수 없어 개축하거나 증축하는 것이 어렵다. 육지로부터 가져오는 운송비가 비싸 대부분의 가옥은 기존의 가옥에서 약간의 증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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