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지역의 주거
안산은 도시계획에 의해 1986년에 신흥공업도시로 조성되면서, 자연부락으로 취락을 이루던 마을들이 폐동되고 주택과 공단이 주요 이주단지로 선정되어 재편된 결과 생긴 도시이다. 공업도시로서의 변화 속도가 빨라 이 지역의 전통적인 주거 형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소멸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최소한 1986년 이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을 찾아 조사해야만 안산의 주거문화와 그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조사 대상으로는 안산시 전체 21개의 법정동 가운데 안산시 외곽지대에 자리잡은 마을들을 주요 대상으로 선정하였는데, 이는 최근에 안산으로 편입되거나 도시 중심지역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개발이 비교적 늦거나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 변화 속도가 느린 지역들이다.
(1) 양상동
1) 마을 개관
양상동은 법정명으로 1986년에 시흥시에서 안산시로 편입되었으나 행정적으로는 월피동 관할이다. 이 마을은 약 4백여년 전 진주 강씨가 들어와 산 이후 사천 목씨 등 46가구(양상 1동)가 촌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 개울인 하천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초’ 또는 ‘버대’라고 불려 왔는데, 여기서 유대(柳垈)란 마을 명칭이 생겨 훗날 양상리(楊上里)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이 버드나무가 거의 사라졌으나 당시만 해도 집을 짓는 목재나 땔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양상동은 양상 1동인 웃보대[上楊垈]와 양상 2동인 아랫보대[下楊垈] 두 개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마을 명칭이 유래한 웃보대는 매봉제가 있는 거모산을 배경으로 남동향으로 대대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아 왔으나 최근에 축산이 장려되고 있다. 진주 강씨 제각(조상 모시는 곳) 세 곳과 나주 정씨 제각이 하나 있다.
현재의 가옥은 대부분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었다가 그 이후 새로 지은 집들로, 개발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아 40여년 된 가옥들이 많다. 그러나 안산이 신흥공업도시로 발돋움함과 더불어 축산이 부업으로 성행하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증축·개축·이축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여기에 이 지역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면서 외지인들이 건축허가권(일명 ‘딱지’)을 가지고 들어와 양옥을 짓고 현지인들 또한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해 신축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양상 2리의 가옥은 원래 몇 채 안 되었으나 개발과 함께 규모가 커지면서 양상 1리에서 이주해 온 강씨·목씨를 비롯해 현재는 43가구가 살고 있다.
2) 목충균 씨 가옥
양상 1동 좌측 골에 위치한 목충균(45세, 농업) 씨 가옥은 지은 지가 약 15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 가옥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이 마을 대부분의 가옥이 파손되었을 때도 안전했던 가옥으로 안채의 원형이 비교적 그대로 남아 있다. 바깥채는 1950년경에 부친이 건축했다고 한다. 원래 안채의 경우는 방 둘, 부엌 하나, 마루가 중간에 놓인 ㄱ자형 집이었다.
현재의 전체적인 평면구조는 안채와 바깥채가 서로 배치된 ㄱ자형과 ㄴ자형이 맞물린 튼입구자형으로 남동향이다. 양상동에 거주하는 총 여섯 가구의 목씨 중 한 가구이다.
1995년 겨울, 추운 겨울이면 늘 세면·난방 등 생활에 불편을 느끼던 차에 돈을 마련하게 되어 덴조와 벽돌을 사서 부엌을 입식으로 개조하면서 기름 보일러를 설치하고 안방은 연탄구들장 위에 그대로 파이프를 깔아 방바닥이 높아졌다. 이때 부엌을 처마밑까지 공간을 넓히면서 한구석에 세면대를 따로 만들었고, 부엌에 있던 벽찬장을 헐고 씽크대를 놓아 찬장의 기둥 네 개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원래 집이 낮고 창문이 없어 어둡던 것을 처마밑까지 넓히면서 늘어난 지붕 쪽에 슬라브를 놓으면서 창을 내어 자연광이 그대로 들어오게 하였다. 안채와 바깥채가 흙집으로 되어 있어 일부만 편의에 따라 고쳤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안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동안 가족 수가 늘어남에 따라 집을 그때그때 증축해 오다가 새마을운동 당시 초가를 내리고 개량기와를 얹었으며 청색을 칠했다. 화장실은 흙벽을 헐고 시멘트 벽돌을 사용해 지었을 뿐 집앞 좌측에 재래식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바깥채는 부엌을 새로 만들고 사랑방을 새로 개조하였다. 이 집의 구조를 보면 안채는 정면 2칸에 측면 3칸이고, 바깥채는 측면 3칸에 정면 2칸이다. 바깥채에 속했던 외양간 공간은 없앴다. 특히 이 가옥은 마루와 안채 건넌방에 다락과 광을 각각 별도로 내었는데,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공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주로 허드레 물건이나 옷장 등을 넣어 두는 다목적으로 이용되던 공간이다.
외양간이 있던 곳의 천장에 보이는 가구(架構)는 중앙에 들보를 놓고 양쪽에서 노를 젓듯이 서까래를 나란히 배치했다. 이러한 가구 형태는 주로 민간에서 보이는 가구이다. 그리고 서까래 사이사이에 수수깡을 엮어 위에 놓은 다음 진흙을 발랐다. 보통 수수깡 위에 다시 진흙을 놓고 그 위에 기와를 얻는데 목충균 씨 가옥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대문은 여닫이빗장문이다.
원래 이 집에서는 ‘터주신’을 모셔 왔다. 항아리에 쌀을 넣고 창호지를 덮은 다음 짚을 삿갓 모양으로 해서 항아리를 덮었다고 한다. 1년에 한 번 떡을 해 놓고 쌀을 갈고 했으나 2년 전부터 항아리를 치우면서 안 했는데, 그후 별로 좋지 않아 1996년 12월에 굿을 했다 한다. 동튼 집터를 앉히고 조상을 위로하며 가내 평안을 기원하는 축원굿(동터굿)이었다.
그림 3-1 목충균 씨 가옥 평면도. ㄱ자형과 ㄴ자형이 서로 맞물린 튼입구자형 집으로 남동향이다. |
그림 3-2 강성원씨 가옥 평면도. 원래는 말굽형 ㄷ자형 집이었으나 원형을 살려 몇 번 개축을 하였다. |
또한 매년 11월 추수를 끝낸 후에는 농사 잘 된 것이 고맙다고 집집마다 떡을 해 고사를 지낸 뒤에 나누어 먹는다. 원주민 모두 좋은 날을 정해서 고사를 지내기 때문에 어떤 날은 하루에 서너 집이 동시에 하기도 한다. 이때 성주신께 떡을 바친 후에 자주 다니는 절에서 온 스님이 축원과 아울러 부적을 써 주면 이를 부엌 입구 문 위에 붙히고 그 밑에 염주를 걸어 놓아 부정을 막는다. 또한 안방 문 위에 부적을 붙여 놓기도 하고 액자를 해서 걸어 두기도 한다. 간혹 마루 입구 처마밑과 대문 위에 ‘엄나무’를 놓아 두어 잡귀를 쫓는데, 나무가 오래 되면 새로 갈지만 특별한 의식은 행하지 않는다.
3) 강성원 씨 가옥
1953년에 지은 강성원(71세, 농축업) 씨의 집은 원래 말굽형인 ㄷ자형 집이었다. 이 집 역시 처음의 초가에서 개량기와로, 한옥에서 반양옥으로 개축을 거듭해 왔다.
1989년 여름에 개축을 했는데 안방과 부엌 사이에 있는 벽장은 그대로 살렸다. 가능한 기본적인 구조를 살리면서 부엌을 입식으로 고치고 툇마루를 없애면서 이를 방에 편입시켜 방의 면적을 넓혔다. 부엌의 경우 기름 보일러를 깔면서 식탁을 배치했으며, 방으로서의 역할보다 식사 및 식사 준비 등 전용부엌의 역할을 하도록 배려했다. 또한 방한·방음을 위해 안채에 창을 하나 더 달아 이중창을 만들었다.
정남향에 가까운 가옥으로 햇빛이 잘 들고 집안이 밝아 포근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건축 당시의 원형을 살리면서 개축을 해서 집 자체가 깨끗하고 안정적이다. 또한 여자들만이 드나드는 문이 대문 우측에 있어 주로 화장실과 헛간에 갈 때 사용했으나, 화장실을 부엌 옆 나뭇광을 개조해서 만들면서 여자들만의 통로로의 기능은 상실하고 주로 창고에 갈 때 이용하는 문이 되었다. 과거 남녀간의 구별이 엄격하던 때의 남녀유별이 가옥구조에 반영되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집 안주인은 원래 터주신을 모셨으나 지금은 모시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올해부터 다시 모실 생각이라고 한다. 매년 10월에 떡을 시루에 담아 터주신께 바치고 나누어 먹었었는데 터주의 신체는 없다.
이농 현상이 심해지면서 농가(農家)의 공간은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강성원 씨의 가옥을 보면 오히려 공간 분할이 더욱 발달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큰아들 내외가 함께 살고 있어 기존의 공간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인지 새로운 곳간을 부엌 옆에 건축했다. 도면상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정확히 부엌과 세면장 및 사랑방 정면 좌측에 지어 놓았다. 곳간은 대개 가을에 추수를 한 후 거두어들인 벼 등 곡식을 간수하기 위하여 지은 창고로, 다른 창고보다는 규모가 크고 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통풍창구를 낸 건물이다. 기름 보일러로 개조하기 전부터 있던 벽장에는 일명 ‘눈꼽재기창’이 3단으로 나 있는데, 각각의 단에는 살림살이들이 나란히 층을 이룬다. 또한 창 무늬를 보면 아자창(亞字窓)인데 안방과 마루 사이의 미닫이문도 아자창이다.
안채는 ㄱ자형으로 개량기와에 빨간색을 칠했고, 사랑채 기와는 푸른색을 칠했다. 사랑채 벽에는 흙을 곱게 칠한 다음 흰색 회를 그 위에 발랐다(粉壁). 안채에서는 시멘트 위에 그대로 흰색 페인트를 칠한 것과 대조를 보인다. 원래 가옥의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부엌 옆에 있던 김칫광과 나뭇광을 세면장으로 개조했는데, 쌀독 광으로 쓰이는 작은 사랑방을 빼면 모든 공간이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의 가옥을 딱히 ‘ㄱ자형이다, ㅁ자형이다’라고 구분짓기는 힘들다. 원형은 ㄱ자형과 ㄴ자형이 맞물린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정남향에 가까워 채광 시간이 길고 넓다.
4) 강희창 씨 가옥
강희창(81세, 농업) 씨 집은 1930년대 말경에 초가로 지어졌다가 1970년대에 지금의 돌기와지붕을 하였는데, 돌기와는 충북 보은에서 사 왔다고 한다. 돌기와가 개량기와에 비해 오래 가고 당시에 가격도 괜찮아서 양산 2리의 다른 가옥 두 집과 함께 돌기와를 얹었다. 그렇지만 용마루는 개량기와로 했다. 돌기와를 보면 타원형으로 잘라 차례로 깔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놓여 있다.
부엌과 안방은 5년 전에 연탄 보일러에서 기름 보일러로 고치면서 안방의 경우 안방 옆 툇마루까지 방을 넓히면서 부엌 사이에 있던 다락을 없앴다. 안방에는 강희창 씨 내외가 거주하고 부엌에는 아들 내외가 산다. 부엌이 넓어 잠자리로 이용하기에는 불편이 없다. 건넌방은 여름에는 상주하지만 겨울에는 추워서 사용하지 않는다.
아랫채는 사랑방은 세를 주다가 지금은 비어 있고 작은사랑방은 광을 부엌으로 개조하면서 방을 크게 해서 현재 세를 주고 있다. 명절 때도 제사를 마루에서 지내는데 자녀들이 인근 안양 등지에 살아 보통 그날 저녁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현재의 방만으로도 충분해 빈방이 많은 편이다.
한국전쟁 당시 집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ㅁ자형의 구조에 부속건물과 공간 분할이 많이 이루어져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노출된 벽을 보면 싸리나무를 엮어 흙을 붙여 만든 다음 그 위에 시멘트를 덮고 칠했다. 집이 낡아 허물어진 부분이 많고 돌기와 밑의 처마가 노출되어 지붕을 이을 당시의 수수깡과 나무 엮음이 훤히 드러나 있다.
또한 사랑채의 경우 툇마루 부분에 돌담을 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흙벽을 한 다음 서까래를 놓았다. 처마밑 벽에는 백회를 갈아 수사를 넣어 물에 빨아서 발라 흰색 벽이 곱게 칠해져 있다.
그림 3-3 강희창 씨 가옥 평면도. ㅁ자형 구조에 부속건물과 공간 분할이 많아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
안채 상량문을 보면 ‘麟鳳 昭和拾貳年貳月初九日己時入住上樑 …… 龜龍’이라고 씌어 있다. 따라서 이 집은 정확히 1937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삼량집[三樑架] 구조를 보이는데, 대들보 위의 마루대공을 하트(♡) 모양으로 장식했고 앙토는 백토를 칠했다.
남서향 가옥으로 안채는 정면 3칸으로 안방-마루-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측면은 2칸이다. 따라서 안채는 ㄱ자형 구조이고, 사랑채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으로 ㄴ자형을 취하면서 서로 아울러 있다. 마루 쪽의 안방문은 띠살창을 한 여닫이문이고 나머지는 미닫이문으로 대체했다.
안채의 건넌방 문 위에 두 마리의 용 그림을 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네발과 뿔이 달린 머리에 흰 수염을 휘날리는 두 마리의 용이 좌우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집안에 용과 같은 신령한 동물을 그린 것은 벽사(僻邪)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른쪽은 청룡(靑龍)이고 왼쪽은 적룡(赤龍)으로, 흰 창호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테를 사각으로 둘렀다.
대문은 빗장걸이 나무대문 위에 나무창살을 설치해 처마와의 공간을 터놓았으며, 여기에 중앙 나무창살은 연꽃 모양을 해 미적인 감각과 함께 악귀를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았다. 대문은 집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로 온갖 잡신이 왕래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이를 미리 차단하려는 마음에서 엄나무를 걸기도 한다.
5) 목영준 씨 가옥
이 집(양상 2리)은 최근에 지은 집으로 생각되는데 곳간채 하나를 부속으로 갖춘 기와집이다. 집의 규모나 모양새로 보아 인근의 민가들과는 다른 상류가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장독대가 있는 ㄱ자형으로 서울과 중부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거의 표준형에 가까운 가옥이다.
집안의 공간구조를 보면 부엌-안방-마루-작은방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최근에 부엌을 다시 현대식 입식부엌으로 개량하였다. 지붕은 조선기와를 이었으며 겹처마로 지붕을 받치고 있다. 또한 기단마다 받침돌을 별도로 놓으면서 안마당에서 안채로 오르는 3단 계단으로 조성했다. 마루에는 앞뒤로 넓게 창을 내어 햇살이 마루 안쪽까지 들어오게 해 안채가 상당히 밝다.
규모가 반듯하고 단아한 가옥으로 지붕은 조선기와를 이은 팔작지붕이다. 팔작지붕은 마루 도리가 건물의 길이보다 짧고 지붕면도 같은 4면을 이루나 양 측면에 삼각형의 합각(合閣)이 생겨나고 추녀는 하늘을 향해 번쩍 치켜 올라가는 모습을 이룬다.23) 팔작지붕은 주로 상류가옥의 안채와 사랑채 등 주요건물에서 보이는데, 목영준 씨의 가옥도 인근의 가옥구조와는 달리 경제적인 여유가 있음을 보여 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붕의 가장자리를 이루는 각각의 작은 망와(望瓦)를 중심으로 처마의 곡선이 유연하게 휘어져 있고 그 아래의 추녀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또한 겹처마인 까닭에 아래처마는 원목을 그대로 둥글게 사용했고 윗처마는 원목을 사각으로 깎아 위용을 보여 주고 있다. 추녀 밑의 귀기둥과 도리는 서로 맞물리게 깎아 끼워 놓았는데 못을 사용한 것보다 더 튼튼하고 안정적이게 보인다. 이처럼 기둥머리에 보의 머리를 덮어씌운 기법을 ‘상투걸이 구조기법’이라 한다.
처마를 비롯한 가옥 외부의 모든 나무기둥에는 아무런 색칠을 하지 않고 나무 고유의 색상을 그대로 살려 놓아 고고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처마 물받이를 양철로써 용이 불을 뿜는 형상을 만들어 한껏 멋을 냄과 동시에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하도록 했다.
사진 3-5 목영준 씨 가옥 처마 부분. 곡선이 유연하고 나무 고유의 색상을 살려놔 고고한 느낌을 준다. |
귀기둥과 평주 사이에 있는 담벼락은 흙벽돌로 먼저 쌓고 그 위에 시멘트 가루를 얇게 발랐고, 처마밑 상인방 아래에 길게 넉살창을 달면서 아자형 창살을 했다. 목영준 씨 가옥의 문은 부엌문만 알루미늄 문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아자형 문살을 한 미닫이문이다.
그런데 가옥의 규모나 정성으로 보아 마루 위 상량에 입주 당시의 건축연월일시를 알리는 글이 있을 법도 한데 없다. 더욱이 상량 한쪽에 용(龍)자만 있다. 원래 사랑채와 함께 지을 예정이었으나 안채만 지어 입주 시기를 기록할 여유를 미루다가 놓친 것 같다. 가구의 구조는 삼량임을 보여 준다. 대들보를 비롯해 가구에 붉은색 니스를 칠하고 앙토에는 흰색토를 칠해 마루 분위기가 밝게 보인다. 그렇지만 마룻바닥은 ‘우물마루’ 형태를 취하면서 그 위에 가볍게 니스를 칠했다.
6) 양상동의 주거 상황
기와에는 주로 녹색·청색·적색을 많이 칠해 지붕의 이미지를 밝게 하였고, 내부구조는 생활편의 위주로 개조한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개조의 방향이 편의 추구였으므로 거의가 도시형 주거공간에 가깝게 변했으며, 아궁이는 형태만 남아 있을 뿐 거의 사용하는 경우가 없었다.
양상동 가옥의 기본 구조는 ‘부엌-안방-마루-작은방’ 순서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개가 여기서 변형된 ㅁ자형 구조를 지니고 있다. 생업과 가족수의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공간을 재활용하기 위해 분할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가옥들이 구조적으로 농업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러한 특징은 점차 농업의 비중이 약해지면서 가옥의 많은 공간이 공동화(空洞化)되기도 하였고, 반대로 농업의 비중이 커지는 경우에는 외부공간을 활용하는 쪽으로 변하였다.
부엌은 거의가 입식부엌으로 개조되면서 난방에 힘쓴 결과 방으로서의 공간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조의 경우 부엌이 가장 변화 속도가 빠르고 화장실이 가장 늦었는데, 특히 부엌은 주요 거주공간으로 잠자리뿐 아니라 식사라든가 이야기 장소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증·개축한 경우의 가옥은 부엌이 주부의 전통적 주요 활동공간으로 이용되지만, 신축한 경우에는 주로 가족 구성원의 식사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식탁과 의자가 비치된 경우 그 정도가 심하였다. 이러한 가옥 구조의 개조는 주부의 발언권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초가지붕에서 1970년대의 개량 기와지붕으로, 내부적으로는 입식부엌이 들어서면서 아궁이 온돌에서 연탄 보일러, 그리고 기름 보일러로 변하면서 방의 면적이 확대되어 왔다. 지붕의 형태도 가장 간단한 맞배지붕이 대부분이고 예외적으로 팔작지붕인 가옥도 있었다. 대문을 닫는 방향은 거의 일정하게 주로 안쪽에서 걸어잠그는 빗장걸이여닫이문이었는데, 그 위에 엄나무 등을 설치해 벽사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각 가구마다 터주를 비롯한 하나씩의 가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2) 신길동
1) 마을 개관
신길동은 19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안산에서 시화공단으로 진입하는 도로 주변에 위치해 있다. 신길동이란 이름은 샛뿔마을인 신각리(新角里;동네 모양이 소의 뿔을 닮아 새로난 뿔이라는 뜻에서 ‘샛뿔[新角]’이라고 불렀다)의 ‘신’자와 능길마을인 적길리(赤吉里)의 ‘길’자를 취한 것인데, 안산시의 법정동 중에서 자연부락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개발 이전의 민가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약 9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개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을 만큼 사방이 전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에 시화공단이 생기면서 취업해 나가는 주민들도 많고 전입해 들어오는 외지인들도 많은 편이다. 신길동 주민 중 많은 사람들이 인근 공단에 취업해 출퇴근을 하는데 거의가 젊은이들이다. 마을의 규모가 크고 돌기와를 한 집과 조선기와를 한 집이 6채나 된다.
2) 황승연 씨 가옥
안채는 2백 년 정도 되었다고 하며, 황승연(95세, 농업) 씨가 50여년 전에 현재의 집으로 이사와 30여년 전에 행랑채를 헐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행랑채의 조선기와는 인천 석바위라는 곳에서 맞추어 얹었다고 한다. 이 집도 기와집이 으레 그렇듯이 팔작지붕이다.
우리 나라에서 기와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개 삼국 시대부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와에는 수키와와 암키와가 있는데, 안채를 보면 수키와는 암키와끼리 서로 맞닿은 부분을 덮어 주듯이 놓았고, 역시 처마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덮었다. 또한 수키와를 놓을 때는 기와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기 위해 흙을 채웠는데, 이 흙을 ‘홍두깨흙’이라고 한다.24)
그리고 용마루 양쪽 가장자리에 있는 망와에는 무궁화 같은 꽃그림을 그려 넣었다. 망와는 암키와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주로 용마루나 추녀마루 등의 각 마루 끝에 설치한다. 이 망와에는 대부분 다양한 그림들을 그려 넣는데 도깨비 모양을 그려 벽사(僻邪)의 염원을 담기도 하고, 또는 불로초라든가 해와 달, 팔괘·박쥐(복을 가져다 준다) 등을 그려 넣든가 혹은 글을 써 넣는 등 망와마다 천차만별이다.
사진 3-6 황승연 씨 가옥 안채. ㄱ자형 가옥의 일반적인 유형으로 기둥마다 시구를 넣은 주련이 붙어 있다. |
안채와는 달리 행랑채는 기계로 구운 일종의 개량형 조선기와이다. 안채가 고풍스런 느낌을 준다면 행랑채의 지붕은 잘 정리되어 반듯하다. 안채에는 겹처마를 해 팔작지붕의 추녀 곡선을 유연하게 살린 상류층 가옥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서까래에는 고동색 니스를 칠하고 그 사이로 하얀 백토를 칠했으며, 서까래 바로 밑에 넉살창을 길게 달아 빛을 넓게 받도록 했다.
안채는 ㄱ자형 가옥의 일반적인 유형인 부엌-안방-마루-작은방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이로써 안채는 ㄱ자형이고 행랑채는 ㄴ자형으로 서로 안고 있는 모양이며 남동향이다. 안채는 부엌-안방-건넌방에 기름 보일러를 넣었고 행랑채의 경우 외양간과 광을 개조하여 세를 주고 있다.
안채에 있는 기둥마다 하얀 나무판 위에 검은 글씨를 써 달았다. 이를 주련(柱聯)이라고 하는데 알맞은 시구(詩句)를 적어 놓기도 한다. 대개 한 기둥에 한 구절씩 새긴 주련이 기둥마다 계속되는데, 그것을 연결하면 한 편의 시가 된다.25)
행랑채의 빗장걸이대문 위 처마밑의 공간에는 창살을 꽂았고 별과 달 모양의 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대문 위에 창은 주로 통풍을 위한 것이고 별무늬는 장식인 듯하다.
안마당에 물 맛이 좋다는 깊이 일곱 자인 우물이 있는데 친척이 퍼 갈 정도로 물이 좋다고 한다. 파이프로 물을 끌어올려 쓰며 뚜껑을 해서 덮었다.
뒤꼍에는 터주를 모시고 있는데 ‘어병까리(큰터주)’와 ‘터줏가리(작은터주)’라고 한다. 매년 10월에 떡을 갖다 놓고 짚을 갈지만 별다른 치성을 드리지는 않는다. 작년에는 짚을 갈지 않았는지 낡은 짚이 씌워져 있다.
3) 정규철 씨 가옥
정규철(60세, 농업) 씨 집은 1972년에 기존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전문목수에게 의뢰해서 겹으로 기와집을 새로 지었으며,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행랑채 구조를 한 중부형 가옥이다.
그림 3-4 정규철 씨 가옥 평면도.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행랑채 구조를 지닌 전형적인 중부형 가옥이다. |
서울에서 조선기와(오지기와;독 굽는 흙으로 구운 기와)를 사다가 조개껍질을 깔고 흙을 그 위에 한번 더 깐 다음 기와를 얹었는데, 가끔 쥐구멍 등에서 조개껍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벽은 나무를 엮은 흙벽과 수수깡 흙벽으로 되었는데, 안채를 개조할 때 이를 수리할 기술이 안 되어 모두 시멘트 벽돌로 교체하였다. 단지 마루는 그대로 두었다. 문짝·마루·기둥 등은 솜씨 있게 짰으며 봉당은 주춧돌과 같은 재질로 2단 계단을 놓았다.
정규철 씨 가옥은 기존의 ㄱ자형 구조를 유지하면서 개축을 거듭했으며 6년 전에 부엌 안쪽에 있던 나뭇광을 헐고 부엌을 넓히면서 기름 보일러를 깔았다. 이때 안방 쪽 쪽마루를 없애고 방의 공간을 넓혔다. 부엌에 식탁을 놓았으나 잠자리로 이용해 부엌에서 자기도 한다. 그렇지만 부엌은 주방일 뿐 주로 안방에서 생활한다. 이처럼 안채가 가족의 주 거주공간인 반면 행랑채는 개조해 세를 준 방이 4개나 된다. 외양간·나뭇간·창고·볏광을 개조한 것이다. 또한 행랑채 사랑방에 딸려 있던 툇마루를 사랑방으로 편입시켜 공간을 넓혀 사용하고 있다. 마루에는 뒤안쪽으로 들창을 2개 달았다.
안채는 찬광과 나뭇광을 헌 부엌이 있고, ㄱ자로 꺾여진 부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구조로 안방-마루-건넌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대청마루에서 건넌방까지 길게 나 있던 쪽마루를 건넌방으로 확장하고 볏광은 셋방으로 개조하였다. 겹처마에 귀기둥과 도리가 상투걸이 기법으로 가지런히 맞물려 있으며, 그 사이로 소로가 둥근 모양으로 나란히 나 있다. 또한 각각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놓여 있다.
기둥을 따로 세우는 집에서는 터를 고르고 지경을 다지고 방아질하여 견축(堅築)한 자리나 입사(立砂)로 기초한 자리에는 주추를 놓는데, 주추를 놓는 집은 살림집으로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본다. 보통 주추를 놓고 기둥을 세우는 일은 그만큼 발달된 건축기법에 속하기 때문이다.26)
정규철 씨 가옥의 안채는 주춧돌에서 보듯이 목수의 정성이 느껴지는 건물이다. 주춧돌을 놓는 방법은 먼저 땅을 고르거나 입사를 한 다음 굄돌을 깔고 사각형의 주춧돌을 놓는다. 이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박았던 옛날기법보다 발달된 기법이다. 또한 주춧돌 사이에 받침돌로 마루와 봉당의 높이를 적절히 조절한다.
4) 김태식 씨 가옥
김태식(65세, 농업) 씨 집은 대지(약 240평)가 넓고 뒤꼍 또한 넓은데, 건평을 늘려 와 외형과 내부에 많은 변화가 느껴진다.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초가를 개량기와로 바꾸었으며, 최근에는 안산시로부터 보조를 받아 안채의 부엌과 안방을 기름 보일러로 교체하면서 각각의 공간을 넓혔다. 행랑채는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방과 부엌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존의 방·광·외양간·볏광을 방과 부엌으로 개조해 세를 주고 있다. 안채 건넌방은 방이 작고 낡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림 3-5 김태식 씨 가옥 평면도. 기본 적으로 ㅁ자형 구조이나 ㄱ자형과 ㄴ자형이 결합된 변형 구조이다. |
원래 수수깡 흙집인 것을 시멘트 벽돌로 교체해 안채의 마루 주변을 제외하면 기둥만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따사롭다. 안채 건넌방 옆 뒤꼍으로 가는 길목에 아궁이가 있고 그 위에 선반이 있다. 농촌지역에서는 부엌이 현대식으로 바뀌면서 또 하나의 친밀한 가족공간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집도 그러한 경향이 짙다. 안방보다는 약간 낮은 천장을 가진 부엌에 텔레비전과 다른 조그마한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가족수에 비해 싱크대가 벽 한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넓다.
요즘 김태식 씨의 가옥처럼 놀고 있는 공간을 새로 개조해 세를 놓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신길동처럼 공단을 끼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기존의 가족 구성원 감소로 생긴 공백에 세입자를 들임으로써 경제적인 이익도 얻고 가옥의 활용률도 높이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대체로 집이 남동향에 가깝고 ㅁ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으나 ㄱ자형과 ㄴ자형이 결합된 변형 구조를 보여 준다. 안채는 청색 개량기와이고 행랑채는 적색 개량기와를 얹었다. 이처럼 농촌지역에서는 안채와 행랑채의 개량기와 색깔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대체로 집이 낮아 천장이 그리 높지 않으며, 마루의 대공은 삼량인데 대공이 아주 낮고 작다. 이러한 가구 구성은 아주 초보적인 삼량집으로 여겨진다. 건넌방의 미닫이창은 아자창(亞字窓)이며 창호지를 아자창 위에 발랐다.
사진 3-7 김태식 씨 가옥 우물마루. 전형적인 한옥의 마루 형태로서 매우 은은하고 고풍스럽다. |
마루는 전형적인 우물마루(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짠 마루)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물마루는 같은 수의 널로 구성하는데, 이 집에서도 칸에 따라 모두 같은 수를 이루고 있다. 가구의 구성이나 가옥의 전반적인 형태로 보아 이 마루는 집과는 별도로 건축된 것 같다.
니스가 깨끗이 칠해진 우물마루 가장자리 안방 입구에는 쌀이 들어 있는 커다란 ‘대감항아리’가 놓여 있다. 경기 지역에서는 보편적인 가신신앙의 한 형태로 대개 대청 구석이나 다락·광 등에 이를 모셔 둔다.
또한 김태식 씨 집안은 옛날부터 터주신을 섬겨 왔다고 하는데, 집 뒤꼍에 짚을 삿갓 모양으로 씌운 두 개의 터주가 마련되어 있어 매년 음력 10월에 좋은 날을 가려 짚을 새로 갈고 햇곡식으로 떡을 해 바치며 가내 평안을 기원한다고 한다.
5) 김흥수 씨 가옥
김흥수(60세, 농업) 씨 집은 약 120년 전에 지었다 한다. 안채는 붉은 오지기와인 조선기와 지붕을 한 반면, 아래채는 시부모가 1972년에 중고 조선기와를 사서 건축했다고 한다. 안채의 대들보는 샛뿔마을에서 제일 크다 한다.
안채 상량문은 일부가 뭉개져 글씨가 잘 보이지 않지만 ‘大正二年…… ’으로 된 것으로 보아 1913년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고, 사랑채 상량문은 ‘龍一九七三年二月三日三時入住上樑壬坐丙向家主癸午生孺人間之五○應 … 鳳’이라고 씌어 있어 최근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면담 내용과 상량문 기록이 서로 다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조부가 지은 이후 몇 번의 신축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3-6 김흥수 씨 가옥 평면도. 안채는 ㄱ자형, 아래채는 ㄴ자형으로 마주보는 튼입구자형 구조이다. |
7년 전에 안방·마루·건넌방·부엌, 그리고 아래채의 조부 방에 기름 보일러를 깔았다. 이 집 역시 처음에는 초가였음을 보여 주는 수수깡 흙벽을 헐고 시멘트 벽돌로 새로 개축하였는데, 건축 당시의 기둥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개축과 증축 결과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안채가 ㄱ자형이고 아래채는 ㄴ자형으로 서로 마주보는 튼입구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남동향집이다.
평면도에서 알 수 있듯이 안채의 경우 증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부엌 외벽에 맞추어 점선을 따라 그린 선이 기존의 안방 외벽이며, 이것은 안방을 처마밑까지 바짝 확장한 것임을 보여 준다. 또한 대청마루와 건넌방에도 공간을 뒤안쪽으로 확장했기 때문에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건넌방 앞의 쪽마루도 없애고 건넌방에 편입시켰다. 그렇지만 안방과 부엌 사이의 다락은 그대로 살려 활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남아 있는 기둥처럼 다락을 없애기에는 건물 자체의 견고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래채의 사랑방 다락은 필요하지 않고 규모도 작아서 없앤 듯하다.
김흥수 씨 가옥은 안마당이 봉당과 구별되도록 봉당의 단계를 한 단계 높여 대청마루의 꺾여진 부분을 대각선으로 연결해 봉당 쪽으로 내었다. 아래채의 대문은 안쪽으로 들이지 않고 기둥에 단 빗장걸이 형태이며, 삼량가구를 한 안채의 팔작지붕에는 귀마루를 타고 내려온 망와는 하늘 천(天)자를 품고 있다. 대청마루 오른쪽 모퉁이에는 ‘대감독’이 있는데 그 안에는 찹쌀을 넣어 둔다. 매년 가을이 되면 햇곡식으로 떡을 해서 고사를 지낸다.
6) 문연기 씨 가옥
문연기(79세, 농업) 씨는 수원에서 살다가 약 50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사랑방이 있고 앞쪽에 안방·마루·건넌방이 보이며, 왼쪽에는 광과 부엌이 있다. 안마당 위는 슬레트를 덮어 햇빛과 눈비를 차단하였다. 새마을운동 때 초가를 벗기고 적색기와로 개량했으나, 다른 가옥들이 부분적으로 개축과 증축을 거듭해 온 것에 비해 이 가옥은 기름 보일러를 놓은 것 외에는 거의 개축을 하지 않았다. 지은 지 약 2백 년 정도 되었다고 하나 확인하기는 어렵다.
사랑방과 건넌방은 5년 전에 기름 보일러로 고쳤고, 부엌에는 안방 아궁이가 두 개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20년 정도 된 연탄 보일러 아궁이이다. 부엌과 안방 옆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다. 집이 낡고 오래 되어 새로 지을 예정이지만 개발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고 보니 신축하기도 어려워 그냥 계속 살고 있다.
그림 3-7 문연기 씨 가옥 앞모습. 이런 형태의 집은 주로 경기 서해안 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 |
사진 3-8 문연기 씨 가옥 앞모습 이런 형태의 집은 주로 경기 서해안 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 |
ㅁ자형의 원형에 속하는 입구자형 지붕의 가옥으로 정남향이다. 이러한 구조의 가옥을 흔히 ‘똬리집’이라 하는데 주로 경기 서해안 지방에서 발견되는 가옥 유형이다. 이러한 똬리 형태의 집은 부엌-안방-대청마루-건넌방-사랑방이 ㄷ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지붕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 똬리 모양을 보여 준다. 현재의 사랑방은 기존의 외양간이나 광을 개조하여 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엌은 안방의 난방을 공급하기 위해 연탄 보일러를 사용하고 있지만 한켠에서는 아궁이 부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부엌 아궁이 위쪽에 다락을 놓아 안방과의 연결된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한편 안방문 입구 대청마루 모퉁이에는 대감항아리를 놓고 모시고 있으며, 터주는 지금은 절에 다니고 있으므로 모시다가 없앴다. 대감항아리에는 햅쌀을 서너 되씩 혹은 한 말씩 넣기도 하는데 매년 음력 10월이면 반드시 햅쌀로 갈아 준다. 이때 시루떡·막걸리·돼지고기를 차려 놓고 두세 번 절을 해 고사를 지낸다. 그리고 절에서 가져온 부적을 마루 입구와 방문 위에 붙여 놓는다.
7) 신길동의 주거 상황
집을 증축하여 세를 놓는 집이 많고 나이 든 사람만이 남아 있는 집들이 많다. 또한 빈 공간으로 방치되어 있는 곳도 적잖다. 이러한 현상은 신길동의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공단의 입구에 위치해 이동이 비교적 쉽고 새로운 전입자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옥 구조가 ㅁ자형이지만 그 기본은 ㄱ자형과 ㄴ자형이 맞물린 형태이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가옥을 서울·중부 지방의 가옥 유형으로 분류하여 ‘튼입구자형, 기역니은자형’ 집이라고 부른다. 농촌지역 개량기와의 색상은 대부분 안채와 행랑채(혹은 바깥채)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은데, 간혹 청색·적색·녹색을 사용해 안정감과 함께 따뜻한 이미지를 풍긴다. 신길동의 지붕과 색상도 이러한 경향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새로운 건축자재의 도입은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든다.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수수깡벽 혹은 나무흙벽은 현대화된 건설자재의 상징인 시멘트 벽돌에 의해 밀려났다. 수수깡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던 사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농업부산물로서, 농업공동체에서는 집을 건축할 때 이를 공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생활은 현대화와 함께 무너져 그 흔한 수수깡벽을 수리할 재료도 인력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시멘트 벽돌은 손쉬운 제작 과정과 세련미로 가옥 건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가옥은 안마당은 갖고 있어도 바깥마당은 없다. 생업인 농업의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팔곡 2동
1) 마을 개관
팔곡(八谷)은 골이 8개라는 의미이다. 팔곡 2동에는 담너머[澹園]와 샛골[間谷] 2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이 중 샛골을 조사 대상 지역으로 선정하였다. 문헌 조사와는 달리 이미 담너머는 많은 변화를 보여 주어 기존의 민가를 발견할 수 없었다. 반면 샛골은 아파트·다세대주택과 더불어 비교적 많은 민가들이 있었고, 원주민들 간의 친목도 돈독한 지역성을 갖고 있었다.
새고개라고도 불리는 샛골은 ‘골짜기 사이에 낀 마을’이란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평택 임씨, 해주 오씨 등이 세거 성씨로 자리잡고 있다.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으며 비닐하우스 재배를 많이 하는데, 40여 채의 민가 중 목조건축물이 16채나 된다. 7년 전부터 이주민들이 들어와 현재는 원주민들보다 이주민을 비롯한 외지인이 더 많이 살고 있다. 마을 좌측에는 수인산업도로가 있고 마을 앞으로는 수원간 국도가 있는데, 여기에서 마을을 보면 도로변의 아파트에 가려 민가들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 뒷산인 팔곡산에는 산신당이 있어 매년 음력 10월에 소를 잡아 제를 올린다. 이때는 주로 깨끗하고 정결한 남자만이 참여하며, 당제를 통해 마을 단합을 꾀하고 복을 기원한다. 이 당제는 주변 팔곡동 전체의 당제로서 음력 10월 1일에 지내지만 마을에 초상 등 부정한 일이 있으면 미루기도 한다.
당집은 원래 초가였으나 광복 직후 붉은 벽돌로 새로 짓고 조선기와를 얹었다. 현재 전체 평수가 5평 남짓한 당집 주변은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며 각종 체육시설들이 마련되어 있다.
원주민과 외지인이 함께 참여하는 당제는 집집마다 3천 원 정도 거두어 경비를 충당해 왔으나 외지인이 많이 들어오면서 희망 가구에 한해서 거둔다. 그래도 원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타지로 이주한 원주민들도 많이 참여한다.
2) 임철호 씨 가옥
약 150여년 전에 지어진 임철호(91세, 농업) 씨 집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하여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 처음에는 초가지붕이었으나 50여년 전에 충북 음성에서 돌기와를 구해 와 얹었다. 그 큰 이유는 일제 수탈기에 지붕을 엮을 볏짚이 없었다는 것과, 또 초가는 자주 지붕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이었다. 기계로 돌을 잘라 벽돌을 가지런히 쌓은 듯하다.
ㄱ자형 안채는 가운뎃마루를 중심으로 방이 2칸, 오른쪽 끝에 광, 그리고 반대쪽으로 부엌이 나 있다. 안채의 마루는 우물마루인데 끼워서 만드므로 뒤틀리지 않는다. 사랑채는 ㄴ자형으로 역시 광 2칸과 사랑방·사랑마루·외양간을 비롯해 별도의 방 1칸의 구조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튼입구자형을 이룬다. 정남향이므로 안마당까지 햇빛이 잘 든다. 광을 많이 설치한 이유는 볏가마·농기구·디딜방아 등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집은 30여년 전인 1967년경에 마을에서는 처음으로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서 부엌을 연탄 보일러로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부엌의 구조가 전통 민가형에서 도시형 부엌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이를 기름 보일러로 다시 바꾸어 완전히 현대식 부엌이 되었다. 화장실도 현대식으로 실내에 설치하였다.
그림 3-8 임철호 씨 가옥 평면도.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로 되어 있으며, 정남향이라 햇빛이 잘 든다. |
그림 3-9 오길영 씨 가옥 평면도. 안채는 ㄱ자형이고, 아래채는 변형된 ㄴ자형으로 튼입구자형 구조를 이룬다. |
1년 전에 안채의 흙벽을 모두 헐고 기둥만 남겨 둔 채 블록으로 담을 쌓았고 마루의 일부를 방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집 왼쪽으로 소방도로가 나는 바람에 기존의 안방 절반이 잘려 나가 건넌방이 안방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절반이 잘려 나간 안방은 매우 기다란 형태로 변해 광 또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농기구는 별도의 창고 없이 사랑채 안쪽 벽에 정리되어 있다.
대문에는 벽사(僻邪)의 기능으로 보이는 용(龍)자와 구(龜)자를 써 붙였는데 이는 악귀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이다. 또한 안채 기둥마다 글씨를 써 붙였는데, 이러한 주련(柱聯)은 옛날에 선비들이 집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나타낸 것이었다. 한편 이 집도 터주신을 모셔 왔으나 안 좋은 일이 생기자 그만두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랑채 대문 위에 액막이용 옻나무만 걸려 있다.
3) 오길영 씨 가옥
오길영(58세, 농업) 씨는 1986년에 아래채의 외양간과 나뭇간을 없애고 셋방으로 개조하였다. 안채가 원형으로 ㄱ자형이고 아래채는 변형된 ㄴ자형으로 튼입구자형 구조를 이룬다.
안채 마루 위 상량문을 보면 ‘龜昭和五年三月十二日入住上樑家主甲午年生…… 龍’이라고 씌어 있다. 흔히 상량문은 집의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건축 시기, 입주 시기, 집주인의 생년, 염원 등을 기록한다. 상량문을 통해 이집은 1930년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담집인 안채의 지붕은 돌기와를 새로 얹었지만 집이 낡아 벽과 처마가 노출되어 있다. 돌기와 지붕이지만 귀마루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망와에는 임금 왕(王)자를 새겨 넣었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남향에 가까운 오길영 씨 가옥은 1989년에 부엌·안방·건넌방을 기름 보일러로 개조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안방과 건넌방을 처마 끝까지 넓히고 부엌 아궁이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부엌과 안방 사이에 있던 다락 겸 광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락은 안방에서 문을 열어 사용할 수 있고 그 아래 아궁이터는 광으로 사용한다. 대문 오른쪽의 조모 거처하는 방에도 다락이 있고 그 아래에 아궁이터가 남아 있다.
아래채의 빗장걸이대문 위에는 삼지창 모양의 창살을 달아 부정을 막았고, 쪽마루를 달고 있는 조모가 거주하는 방 창살은 만(卍)자창이다.
4) 팔곡 2동의 주거 상황
팔곡 2동의 가옥 구조는 대부분이 ㄱ자형과 ㄴ자형이 맞물린 ‘튼입구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비교적 도심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 생업인 논농사보다는 비닐하우스로 채소 등을 재배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논농사 중심 생업에서 활용되던 공간의 공동화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것이 공간의 새로운 전용을 가져올 수 있으며, 또 전입자의 증가로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팔곡 2동은 매년 시월에 당제가 성황리에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신앙과는 달리 가신신앙(家神信仰)은 한 가정에서만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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