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부도의 가옥 (1) 서민가옥
그림 1-2의 가옥은 남(南)4리 박태민 씨의 집이다. 완만한 비탈에 동향으로 세워진 이 집은 주인이 집을 버리고 떠난 뒤여서 벽의 일부가 헐고 내부 또한 어지럽혀진 상태였다.
이 집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에는 함석을 덮었는데, 서민가옥이라고는 해도 바다가 저만큼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비탈에 세워져 있어 집터만을 따진다면 ‘별장터’라 일컬을 만하다. 대문은 물론이고 집을 두른 울타리조차 없어 더욱 이러한 생각을 들게 한다.
집안으로 드나드는 문은 두짝열개의 널문(90×157cm)으로 안방 사이의 일부에는 마루를 깔았는데, 이 마루에서 방으로는 세살문외여닫이(65×126cm)로 드나들게 되어 있다. 안방 천장(높이 183cm)에는 종이반자를 붙였고, 부엌 쪽 벽에 낸 벽장(56×245cm)은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두짝문(90×74cm)을, 다른 한쪽에는 한짝문(60×54cm)을 달았다. 이것은 벽장을 더욱 유용하게 쓰기 위한 배려인 듯하다. 또한 부엌 쪽으로 외여닫이(66×93cm)를 붙여 사람이 직접 드나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밥상 따위를 옮길 수 있도록 한 점도 매우 돋보인다. 안방과 뒤란 사이에는 외여닫이(71×134cm) 세살문이다.
한편 안방과 윗방 사이가 개방되어 있고 웃방에 장들이 놓인 것을 보면 윗방은 안방의 부속공간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서벽에는 창(98×55cm)이 있으며, 앞방 사이에는 외짝여닫이(74×133cm)를 달았다. 또한 사랑방과 툇마루 사이에는 미닫이(77×132cm)로 드나들게 되어 있고, 남쪽 벽에는 문(93×137cm)을 내었고 동쪽 벽에는 창(104×52cm)을 붙였다. 특이한 것은 부엌에는 수도시설과 보일러 설비까지 마련되어 있었는데, 전통가옥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놀랄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도서지방(島嶼地方)의 서민가옥에 이런 시설이 들어설 줄은 20여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엌과 뒤란 사이에는 외여닫이(7×135cm)가 있는데 그 한 쪽을 내어 찬장을 들여놓았고, 부엌 남쪽 일부는 담을 치고 문을 달아(92×158cm) 광으로 썼는데, 바닥은 흙이고 전면에는 채광을 위한 밀창(104×52cm)을 마련하였다.
주인이 언제 이 집을 떠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1989년에 나온 시드니 셀던의 소설 「시간의 모래밭(김영사 번역판)」이 뒹구는 것을 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13 대부도 남4리 박태민씨 가옥. 주인이 떠나고 없어 매우 쓸쓸하다. |
그림1-2 대부도 남4리 박태민씨의 가옥 평면도. |
(2) 중류가옥
그림 1-3은 남(南)4리에 위치한 박승일 씨 집이다. 평면은 ㄱ자꼴 안채 외에 ㄴ자꼴 사랑채가 마주 세워져 전형적인 ‘기역니은자’형 집을 이루었다. 현재 안채에는 양기와가, 사랑채에는 함석이 덮혔으나 본디는 모두 초가였다. 이들의 지붕의 개량은 각기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 주인이 경제력이 부족해 밖에서 잘 보이는 사랑채를 먼저 바꾸고 안채는 이보다 훨씬 뒤에 개량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흔히 안채는 초가, 사랑채는 기와를 얹었는데 이를 흔히 ‘반기와집’이라고 불렀다. 두 건물 사이에는 널벽을 치고 두짝열개의 문을 달아 연결하였는데, 이 집 사람들은 대문보다는 서쪽의 널문을 더 많이 이용한다. 바지락이나 굴 채취가 이루어지는 갯벌로 드나들기 편할 뿐 아니라, 대문을 잠가 두면 중문과의 사이의 2칸을 수장공간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1-3 대부도 남4리 박승일 씨의 가옥 평면도 |
안채 부엌 서쪽에서는 4m 길이의 죽담(막돌을 흙과 섞어 쌓은 담)을 내어 쌓고 이를 북으로 꺾어 집 뒤 산기슭까지 이어 놓아 경계를 삼았다. 죽담도 가즈런히 보기좋게 쌓았거니와, 담 위에 이엉을 덮어 농가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죽담을 이렇게 내어 쌓은 것은 장독대가 들어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안채가 뒤에서 흘러내린 산자락 끝에 앉은 데다가 사랑채를 도로에 바짝 붙여 지은 까닭에 이곳이 아니면 장독대 터를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집의 장독대에는 거의 하루종일 해가 비치므로 안채 뒤에 마련되는 일반적인 장독대보다 좋은 위치를 차지한 셈이다
사진 1-14 대부도 남4리 박승일씨의 가옥. 전형적 '기역니은자' 형 집으로 안채는 양기와, 사랑채는 함석이다. |
사진 1-15 박승일 씨 집의 장독대. 이 집의 장독대는 하루종일 해가 비치게 설계되어 있다. |
박씨 집에서는 전통적으로 고추장이나 간장·된장이 담긴 독에는 버선본을 붙여놓는다고 한다. 까닭인즉 “그렇게 하면 장맛이 좋다.”는 것이었다. 대부도뿐만 아니라 경기도 내륙지방과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예부터 장독에 버선본을, 그것도 거꾸로 붙여 왔는데 열심인 집에서는 여러 개의 버선본을 끈에 달아 둘러놓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미신이요 비과학이다. 이렇게 하면 장맛이 더 난다니 말이나 되는가.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장독대는 집 뒤란에 있게 마련인 데다가, 냇돌 따위를 엉성하게 둘르고 바닥을 대강 골라놓은 까닭에 빗물 따위가 스며들어 언제나 음습하고 시퍼렇게 이끼가 낀다. 따라서 이곳에 다지류(多肢類)의 곤충이 끼어들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들 곤충은 되쏘는 빛을 싫어한다. 버선본은 바로 이 되쏘는 빛을 자아내는 바탕인 것이다. 다지류 곤충들이 되쏘는 빛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놀랍지만, 이것을 한 겹 감싸서 “버선본을 붙여놓으면 장맛이 좋아진다.”고 둘러댄 것은 얼마나 놀라운 슬기인가. 아마도 사실 그대로 일렀다면 열의 아홉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맛이 난다기에 설마 싶으면서도 누구나 따랐고, 이렇게 해서 옛분네들의 지혜는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한 칸 반 크기의 안방 서쪽에는 퇴를 붙였고, 이들 사이에는 두짝여닫이를 달았다. 그리고 남쪽(부엌쪽) 벽으로는 다락과 벽장을 시설하였으며 이들 사이에는 외짝문(60×120cm)과 여닫이(60×40cm)를 달았는데, 이 방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마루와는 외짝여닫이(60×160cm)와 미닫이(50×140cm)로 드나든다.
안방의 천장도 본디는 서까래가 들어나는 연등천장이었으나(이러한 점에서 보면 박씨 집은 내륙의 서민가옥에 해당하는 셈이다) 종이를 덧발라 놓아 방 안이 밝아졌다. 집에 대한 주부의 애착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방 윗목에는 구식 옷장이 있고 그 옆의 앉은뱅이 책상 위에 이부자리를 올려놓았다.
마루와 전면의 퇴 사이에는 4짝의 유리 분합문을 달아 겨울철 등에 바람이 많이 불면 닫아 둔다. 북벽 상부에서 바깥 쪽으로 이어 붙인 감실(龕室)도 눈에 띄는 공간(128×54)이다. 이곳에는 4대 선조까지의 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이 집뿐만 아니라 대부도의 중류 내지 상류 가옥에는 조상을 받들기 위한 감실을 갖춘 집이 적잖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이기는 해도 조상을 섬기는 일에관한 한 어느 곳보다 뒤지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증거이다.
마룻바닥에는 비닐 장판을 깔고 건넌방 쪽에는 자리까지 덧깔아 놓아 정결한 느낌을 준다. 마루 뒷벽에는 대형 냉장고와 현대식 찬장이 들어서 있고, 이곳에 놓였던 큰 뒤주(쌀뒤주라고도 한다)는 광으로 밀려나 있다. 본디 연등천장이었던 천장에 종이를 바른 점도 눈에 띈다. 집이 워낙 퇴락해서 안방의 퇴 전면처럼 마루 끝 서까래에 버팀목 두 개를 세워 놓았다.
사진 1-16 박승일 씨 집의 부뚜막. 가마솥과 옹솥, 그리고 양은솥이 걸려있다 |
사진 1-17 박승일 씨 집의 대문. 대문 옆의 사랑채에는 바깥으로 툇마루가 달려있다. |
두 칸 규모의 부엌 남쪽은 나무광으로 이용하였고 서쪽 한 구석을 밖으로 내고 찬장을 앉혔다. 뒤란으로는 함석의 외여닫이(75×129cm)로 드나든다. 부뚜막에는 가마솥과 옹솥, 그리고 양은솥을 걸어놓았다(사진 1-16). 옹솥으로는 밥을 짓고 양은솥으로는 국을 끓이며, 가마솥은 물을 끓이거나 큰 손님을 치를 때 국을 끓인다. 부뚜막 위에 걸어놓은 선반도 눈을 끄는 시설물이다. 작은 그릇 따위를 올려놓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러한 선반은 덕적도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를 경기 서해도서 지역의 일반적 시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대문간은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밖에서 들어온 사람은 왼쪽으로 꺾어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대문의 북벽을 차단한 것은 대문 밖에서 안채에 이르는 눈길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 집 대문 앞은 마을에서 갯벌로 나가는 도로가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른바 ‘내외관념(內外觀念)’의 실천을 위해서 이처럼 ‘내외벽’을 쳐 놓은 것이다. 이 같은 대문 구조는 대부도의 다른 집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앞에서 든 벽감과 내외벽은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표상이라 하겠다. 대문의 크기는 155×183cm, 중문은 140×180cm로서 중문이 조금 작다.
바깥사랑방 전면에는 툇마루를 붙이고 이 사이에 두짝열개의 널문(113×135cm)과 미닫이를 달았으며, 동벽 상부에는 창(80×62cm)도 있다. 대문간과는 외여닫이(77×143cm)로 드나든다. 안사랑방에는 안마당 쪽에 툇마루를 붙여서 길가로 같은 툇마루를 달아놓은 바깥사랑방과 대조를 보인다. 북쪽 벽에 창(68×60cm)과 툇마루 쪽에 문(60×135cm)이 있다. 이 방 서북쪽과 안채는 작은 널문(90×178cm)으로 이어진다.
외양간과 대문 사이에는 외짝문(93×132cm)이 있어 소가 드나들며, 안마당쪽으로는 작은 널창(78×82cm)만을 붙이고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대문간으로 통하는 문을 외짝으로 처리하고 전면 벽에 담을 친 것 등은 모두 겨울의 찬바람으로부터 소를 보호하기 위한 배려이다. 이 같은 점은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 서해도서 지방의 공통적 특징의 하나이다.
외양간의 널창 바깥쪽에 문둔테를 붙이고 빗장을 마련한 점도 눈에 띈다. 이것은 소에게 여물을 주는 시간 외에는 걸어잠그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시설은 소를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데뿐만 아니라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박씨는 현재 소를 키우고 있지 않아 외양간은 헛간처럼 이용한다. 널창에는 호미를 비롯한 기타 연장을 걸어놓았다.
광과 마당 사이에는 두짝열개의 널문(118×177cm)이 있다. 광 안에 항아리·독 등의 세간을 갈무리한 점은 다른 집들과 다를 것이 없으나, 제일 구석의 큰 독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벼 4가마가 들어가는 대형(깊이 107cm, 주둥이 지름 67cm)으로, 주인에 따르면 곡식이 바닥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는 손녀를 독 안으로 넣어 퍼냈다고 한다.
광과 안마당 사이에 두짝문(117×162cm)이 있는데, 이곳에는 젓갈이나 김치 따위의 식료품을 갈무리한다. 서쪽 끝의 광 자리는 본디 뒷간이있었으나 이것을 따로 세우면서 광으로 개조하였다. 바닷일에 필요한 지게, 소쿠리, 장화 따위를 넣어 둔다.
블록 벽돌로 쌓은 뒷간(315×227cm)의 내부는 반으로 나누어 한 쪽은 잿간으로 쓴다. 그리고 뒷간 바닥에 설치한 시멘트 확은 바깥쪽으로 돌출해 나갔는데, 이것은 바깥쪽에서 인분을 퍼내기 위한 것이다.
박씨 집터는 나즈막한 언덕이 흘러내려 비탈을 이룬 까닭에 사랑채는 높은 축대를 쌓고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서쪽으로는 평평한 대지가 비교적 길게 뻗어나가 대문을 서쪽에 두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주인은 이 터에 잔디를 정성껏 가꾸고 있어 농가 분위기가 한결 더 짙게 풍긴다.
(3) 상류가옥
그림 1-4는 남(南)5리에 있는 상류가옥인 백복현(78살) 씨의 집이다(사진 1-18). 상량문(龍 昭和拾壹年丙子陰三月二十四日○○ 子坐午向 宅主○子生成告 龜)에 따르면 이 집은 1936년에 세워졌으나 제 모습을 지닌 것은 바깥채뿐이며, 안채는 10여년 전에 크게 개수되었다.
백씨 집은 기역자형 안채와 같은 형의 바깥채를 대각으로 세운 전형적인 ‘기역니은자’집이다. 안채 뒤에서 앞으로 흘러내린 기슭이 비탈을 이룬 까닭에 바깥채는 높이 120cm의 축대를 쌓아 터를 마련하였다. 대문을 바깥채의 가운데에 두지 않고 한 쪽 끝으로 몰아붙인 것도 도로에서 드나들기 쉬운 장점 외에 축대가 이처럼 매우 높은 것이 한 원인이다. 바깥채에는 함석을, 안채에는 양기와를 얹었다.
사진 1-18 백보현씨 집의 전경. 이집은 상류가옥으로 1936년에 처음으로 지었다. |
그림1-4 백복현 씨 집의 평면도. 이집은 안채와 바깥채를 대각으로 세운 전형적인 기역니은자 집이다. |
바깥채는 한 칸 반의 안사랑, 두 칸의 대문채, 각 한 칸씩의 외양간·헛간·방, 그리고 두 칸의 광으로 구성되었다.
대문에서 안채로 들어갈 때에는 왼쪽으로 꺾어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여성의 공간인 안채가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이다. 대문(86×206cm)과 중문(206×81cm) 사이의 왼쪽에는 외양간문(120×170cm)이 있어서 소가 안마당을 통하지 않고서도 드나들 수 있다. 이 마을의 다른 집들처럼 백씨 집도 바지락 채취 따위의 어업도 겸하는 까닭에 대문채에는 그물을 비롯한 어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외양간의 문을 대문채 쪽에 내고 전면에는 벽을 치고 두 짝의 작은 널문(94×180cm)을 붙인 것은 겨울철의 찬바람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외양간의 이러한 구조는 대부도뿐만 아니라 영흥도·장봉도·자월도·덕적도 등지에서도 나타나는 전형이다. 또한 외양간 남쪽으로 작은 구멍을 내어 소의 똥오줌을 받아내기 쉽도록 하였는데, 이 오물들은 축대 아래에 파놓은 작은 웅덩이도 모여든다. 거름이 귀하던 예전 농가에서는(밥 한 사발을 줄지언정 거름 한 소쿠리는 아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외양간의 이 같은 구지렁물을 모아서 거름으로 썼으며, 이 액체를 짚더미에 뿌려 썩는 과정을 재촉하였다. 백씨 집에서는 현재 소를 먹이지 않는다.
두 칸 규모의 안사랑의 안마당 쪽 남벽에는 외여닫이(87×180cm)가, 북벽에는 미닫이(115×92cm)가 있으며 아궁이는 대문채에 달았다. 그리고 동벽에는 채광을 위한 창(216×93cm)을 내었다. 규모가 큰 백씨 집에서 바깥사랑방을 따로 갖추지 않은 것은 의외의 일이다. 방을 별도로 두지 않더라도 안사랑 바깥쪽에 툇마루를 달고 출입문을 내면 훌륭한 바깥사랑이 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안사랑으로만 쓸 생각을 한 것이다. 6남매의 자녀가 모두 출타한 지금에는 안사랑을 광처럼 이용할 뿐이다.
외양간과 광 사이는 본디 섶나무를 쌓아 두는 나무행랑이었으나 지금은 항아리·독 등의 세간살이들을 가득 들여놓았고 안마당 쪽 전면은 개방되었다. 안채에 보일러 시설을 한 까닭에 땔나무를 쟁여 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사진 1-19 백씨 집의 상량문과 성주. |
두짝열개의 널문(156×162cm)이 달린 광에는 쌀을 갈무리했으며, 본디 두 칸이던 것을 자녀 수가 많아 방이 필요해짐에 따라 20여년 전 방으로 개조하였다. 안마당 쪽에는 미닫이(86×146cm)가, 뒷벽에는 광창(65×45cm)이 있다.
이곳에 방을 들이게 되자 아궁이를 마련할 필요성 때문에 헛간의 반을 나누고 블록을 쳐 젓갈 따위를 갈무리한다. 남벽은 살창(75×45cm)을 달았다.
그 다음 공간은 현재 광으로 쓰지만 본디는 안뒷간이었다. 전면에 널문(95×140cm)이 있다. 뒷간을 없앤 것은 안채를 개수할 때 안방 구석에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바깥 변소는 바깥채 서쪽 끝에 세웠다.
평면도상으로는 안채의 안방이 두 칸이고 부엌과 마루 건넌방은 각 한 칸씩으로 나타났지만 개축을 할 때 각 공간을 반 칸식 늘려잡은 까닭에(이에 따라 동서 너비는 400cm, 남북은 460cm가 되었다.) 각 공간이 확장되었다. 따라서 종래의 간살로 셈하면 안방은 세 칸, 부엌은 칸반, 마루는 두 칸, 그리고 건넌방은 칸반의 넓이가 된다.
마루의 가구 형식을 보면 들보 위에 짧은 동자주를 세우고 이에 의지하여 종보를 건너지른 다음, 가운데에 사다리꼴의 대공을 얹어 마룻대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량에는 성주를 걸어놓았다(사진 1-19).
안채 개축 때 가장 큰 변혁이 일어난 공간은 안방과 부엌이다. 안방에는 보일러가 시설되었고 그 한쪽에 좌변기가 마련되었다. 주인 백씨는 자신이 고령인 데다가 거동이 불편해서 변기를 방 안에 두었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집은 대부도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한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러 고조된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것이다.
사진 1-20 백씨 집의 안채 |
사진 1-21 백씨 집의 대청 |
백씨 집에서는 현재 주인 내외 두 사람만이 거주하므로 안방과 부엌에만 보일러를 시설하였는데, 사실상 이 이상의 난방은 불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화장실과 부엌으로 드나드는 문은 현대식 여닫이이고, 부엌 앞뒤 문(71×164cm)의 재료는 알루미늄 새시이다.
마루 전면에는 네 짝의 유리 분합문을 달고 북벽 한 쪽에 창(120×92cm)을 내었다(사진 1-20). 안방으로 드나드는 문은 외여닫이(82×181cm)이다. 마루 뒷벽에는 예전의 뒤주가 놓여 있으나 비닐을 덮어둔 것을 보면 자주 쓰지는 않는 듯하다. 뒤주 옆에는 전자 레인지와 쌀통, 그리고 찬장이 놓여 있다. 건넌방 쪽 벽에 주인 내외를 비롯한 가족사진이 가득 걸린 것은 우리 나라의 다른 집들과 같다(사진 1-21). 이것은 오직 우리만 지닌 독특한 풍습으로 이것을 통해서 한 가족의 가족구성은 물론이고 간단한 역사, 그리고 통혼관계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건넌방 전면에는 본디 누마루가 달리고 그 아래에 아궁이가 있었으나 이들을 없애고 방을 늘렸으며, 아궁이는 오른쪽 측벽에 붙였다. 건넌방 전면에는 두 짝의 유리문이 있다.
안사랑 북쪽과 건넌방 북벽 사이에는 기역자형 담을 두르고 북쪽에 벽을 쳐서 문을 달아 헛간으로 쓴다. 이 담 동쪽에는 함석문(171×165cm)이 있어서 대문을 거치지 않고 밖으로 드나들 수 있으며, 뒤란 쪽에도 외짝함석문(100×175cm)을 붙였다.
안채 서쪽에는 닭장(205×450cm)과 광(250×207cm)이 있으며 광에서부터 안채 뒤쪽은 비탈로 이어진다.
안마당에 깔아놓은 전돌 가운데에는 ‘근면(勤勉)과 검소(儉素)’라 새겨 있는데, 이것은 주인의 솜씨라기보다는 전돌을 만든 이가 새긴 듯하다.
백씨 집에서는 앞에서 든 성주 외에 업과 터주, 그리고 대감신을 모시고 있다. 뒤란에 모신 업의 신체는 짚더미로서, 맨 위에는 큰 주저리를 엮어서 덮어 놓았다. 집안의 재운을 관장하는 업신의 크기는 곧 재산이 불어나는 것을 나타낸다고 여겨 해마다 덧쌓기만 할 뿐 썩은 것을 걷어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백씨 집의 업은 높이 160cm에 둘레 240cm에 이른다.
업 옆에 마련된 터줏신은 업신의 위용에 눌려서 초라한 느낌을 준다. 흔히 단지 안에 벼를 놓고 이것을 터줏신의 신체로 삼지만, 이 집은 물론이고 대부도 일대에서는 땅에 박은 밤나무를 터주로 여긴다. 이러한 점은 바로 이웃에 위치한 영흥도의 관습과도 달라서 주목된다.
대감신은 부엌의 싱크대 위 선반에 모셔두고 있는데, 신을 정성껏 받들기 위해 신체가 담긴 바구니를 비닐 주머니에 넣어 둔 것도 그렇거니와, 부엌을 개수하고 칠을 할 때에도 대감신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까닭에 칠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백씨네의 대감신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깊은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대감신에게 마른 어물을 바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것은 비닐 주머니에 넣어 선반에 올려놓았으며 이 위에 다시 신체가 담긴 소쿠리를 얹었다. 대감신에 대한 신앙은 대부도 지역의 한 특징이지만, 이 신에게 제물까지 바친 집은 이 집뿐이다.
대감신의 신체는 1992년 봄에 무당이 재수굿을 할 때 입었던 남철릭과 쾌자, 그리고 머리에 썼던 벙거지이다.
사진 1-22 백씨 집의 업과 터주 |
사진 1-23 백씨 집의 대감신이 담긴 바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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