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업 (1) 굴 채취 굴은 바다에서 나오는 조개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굴을 채취하고 까는 작업은 대개 부녀자들이 한다. 굴은 주로 돌이나 바위에 붙어서 자라며, 더러는 굴껍데기에 붙기도 한다. 굴이 처음 붙었을 때는 콩알보다 작으나 1년이면 따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란다. 물론 굴은 한 해에 다 자라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은 여러 해 자라는 것도 있는데, 이렇게 크게 자라는 종자를 ‘각굴’이라고 하고, 작은 것은 그냥 ‘굴’이라고 한다. 굴은 갯벌 속에서는 살지 못하고 갯벌 위로 솟은 바위나 돌에 붙어서 사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산 굴이다. 이러한 굴의 생태를 이용해 사람들은 보다 많은 굴을 채취하기 위하여 갯벌에 돌을 갖다 펴서 굴이 붙도록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굴양식이며, 이렇게 하는 양식 방법을 투석식(投石式) 양식이라고 한다.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인공양식이 아닌 자연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갯벌에 돌을 펴기 위해서는 우선 주변의 돌산에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화약을 이용하여 돌을 폭파해야 하며, 폭파된 돌을 배로 운반해 벌밭에 일정한 간격으로 펴야 한다. 이처럼 돌을 펴는 작업은 대개 마을 어민들이 공동으로 하며, 굴을 채취할 때는 어촌계장의 지시에 따라 몇 줄씩 분배받는다. 굴을 따는 시기는 추석 이후부터 음력 정월까지가 제철이다. 굴은 5~6월경이 산란기이며 이때는 굴을 먹지 않는다. 즉 굴은 음력 2월 무렵만 되면 알이 차서 건드리면 터질 정도가 되고 또 터뜨리면 뿌연 물이 나오는데, 이때가 바로 산란기 직전으로 이 즈음부터 굴을 잘 먹지 않는다. 굴을 딸 때는 끝이 뾰족한 굴호미로 톡톡 쪼아 떼어 낸다. 굴을 담는 그릇으로는 ‘종태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바구니에 끈이 달려 있다. 종태기에 굴이 가득 차면 보다 큰 그릇인 굴망태기에 옮겨 담는다. 한 망태기에 서너 종태기를 넣을 수 있다. 옛날에는 종태기를 칡덩굴이나 볏짚으로 만들었으나 점차 전깃줄이나 철사를 이용했고, 요즘은 모두가 나일론줄로 만들어 쓴다.
사진 1-81 어선 수리.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은 날에도 다음의 출어 준비에 바쁘다. | 한편 굴을 까는 연장으로는 ‘죄’를 사용한다. 죄를 표준말로는 ‘조새’라고 하는데, 이곳 사리(사동)나 대부도에서는 ‘죄’라고 부른다. 형태는 나무로 된 손잡이(자루)에 위쪽(머리)을 국기봉처럼 굵게 만들며, 머리 양쪽에는 끝이 뽀족하고 4각이 진 쇠송곳을 박는다. 그리고 손잡이 밑쪽 끝에 갈퀴처럼 구부러진 보다 가는 쇠갈고리를 박는데 구부러진 바깥쪽으로 날을 세운다. 굴을 까는 방법은 우선 굴을 넓적한 돌이나 나무토막 위에 올려놓고 한 손으로 죄를 잡고 머리의 송곳으로 두 껍질의 합쳐진 부분을 쪼아 벌려서 한 쪽을 떼어 낸다. 그리고 자루 끝의 갈고리날로 껍질에 붙은 살 부분을 밀어서 자른 다음에 갈고리로 긁어서 파낸다. 이러한 죄는 굴을 까는 데만 쓰는 것이 아니라 굴호미와 같이 굴을 따는 데도 사용한다. 굴이 있는 장소는 가까운 곳도 있지만 먼 곳도 있다. 먼 곳은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이처럼 배를 타고 바다 멀리 나가는 것을 ‘해추 간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 굴을 따러 가는 것을 ‘굴 해추 간다’고 하고, 또 동죽을 채취하러 가는 경우에는 ‘동죽 해추 간다’고 한다. 배는 과거에는 돛배나 노를 젓는 배였지만 근래에는 모두 동력선을 이용한다. 그러나 배의 크기나 형태는 과거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부도 애향관에는 과거에 어민들이 쓰던 돛단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 어민들이 사용하는 동력선과 크기나 모양이 같고 다만 동력장치만 다를 뿐이다.
(2) 바지락 채취 바지락은 주로 여름에 많이 캔다. 기간으로는 3월부터 10월까지이다. 겨울에도 바지락을 먹지만 살이 적고 질긴 데 비하여 여름에는 살이 많고 연하며 맛이 좋다. 겨울에는 바지락이 여물지 않고 보리가 필 때가 한창 여무는 시기이다. 그래서 주로 여름에 캐는 것이다. 그러나 여름 중에서도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는 산란기이기 때문에 채취를 삼간다. 189) 바지락이 있는 곳은 갯벌 굴밭의 자갈 속이다. 굴은 뻘에 솟은 돌이나 바위에 붙어 있기 때문에 쉽게 보이지만 바지락은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자갈을 파헤쳐야 나타난다. 바지락을 캐는 방법은 호미로 자갈과 모래를 파헤쳐 캐는데, 처음 하는 사람은 바지락이 있는 위치를 잘 알지 못한다. 바지락이 들어 있는 곳을 식별하는 방법은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밀려 나가면 바지락이 있는 위치에 구멍이 나타나는데, 이렇게 구멍이 나타나는 것을 ‘바지락 눈 떴다’고 한다. 이것을 찾아서 호미로 캐면 된다. 바지락을 캐는 데 필요한 연장은 호미와 담는 그릇이다. 호미는 밭호미와 비슷하나 날이 보다 좁고 끝이 뾰족하다. 담는 그릇으로는 종태기와 바지락망태기를 주로 이용하는데, 종태기는 항상 들고 다니면서 캘 때마다 주워 담고 종태기에 가득 차면 보다 큰 그릇인 바지락망태기에 옮겨 담는다. 바지락망태기에는 3~4개의 종태기를 담을 수 있다. 망태기에 옮겨 담은 바지락은 망태기째 바닷물에 담궈 이리저리 대강 흙을 씻어낸 다음에 주둥이를 졸라 묶어 뭍으로 운반한다.
(3) 맛 채취 맛은 봄부터 여름까지 채취한다. 달로는 3월부터 7월까지이고, 찬바람이 불면 알을 낳기 때문에 채취하지 않는다. 맛은 뻘(갯벌) 속에 묻혀 있는데, 그 깊이가 1자 이상 되기 때문에 손을 넣으면 팔뚝이 다 들어간다. 맛을 채취하는 방법은 호미로 캐는 방법과 써개질을 하는 방법이 있다. 호미로 캐는 방법으로는 우선 맛호미를 가지고 뻘을 긁어서 걷어 낸다. 이때 사용하는 맛호미는 바지락호미와는 달리 나무자루에 갈퀴처럼 휘어진 쇠갈고리를 두 개 박는데, 이것으로 뻘을 긁어서 걷어낸다. 뻘은 묽은 흙으로만 되어 있지 않고 흙덩이·돌·자갈·조개껍질 등이 섞여 있는데, 이것을 긁어내면 맛이 보인다. 써개질이란 뻘을 걷어내지 않고 가는 쇠꼬챙이나 대작대기 같은 것으로 맛을 낚아 올리는 방법이다. 즉 바닷물이 밀려나가고 뻘이 드러나면 바지락 눈 뜨는 것처럼 맛 눈이 나타난다. 맛 눈이 나타나는 것은 뻘 속에서 맛이 껍질을 벌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맛 눈이 보일 때 가는 꼬챙이를 찔러 넣으면 맛이 껍질을 닫아 꼬챙이를 물게 되는데, 이때 끌어올린다.
(4) 동죽 채취 동죽은 뻘(갯벌)에서 채취하며, 봄부터 여름에 많이 난다. 동죽은 그리 깊지 않는 위치에, 즉 굴이나 조개 껍질 등에 섞여 있다. 사리(사동)의 경우 가까운 앞바다에서는 나지 않아 다른 곳에서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도 쪽의 어민들은 가끔 배를 타고 동죽을 캐러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동죽을 캐는 방법은 바지락을 캐는 것과 비슷하여 바지락을 캐는 호미를 사용한다. 대부도에서 굴을 파는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하루 배를 타고 나가 동죽을 캐면 큰다라이(함지)로 한 통 캐 왔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굴이나 바지락 같은 것을 채취하지 않을 때 배를 타고 나가서 하는 것으로, 이것을 ‘동죽 해추 간다’고 한다.
(5) 가무락 채취 가무락은 뻘(갯벌) 속에 살며 시기적으로는 봄에 잠깐 나오는데, 맛이 바지락보다 좋고 양이 적기 때문에 값이 비싸다. 그래서 아주머니들이 열심히 가무락을 채취하러 다닌다. 가무락을 채취하는 방법은 특별한 도구 없이 담는 그릇(종태기)만 가지고 다니면서 뻘 속에 손을 넣어 집어낸다. 즉 바닷물이 밀려나가고 뻘이 드러나면 가무락 눈이 나타난다. 이때 가무락 눈이 보이는 자리에 손을 넣어서 잡는데, 손목이 다 들어갈 정도로 깊다.
(6) 낙지잡이 낙지는 뻘(갯벌) 속에 있는 것을 잡기도 하지만, 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그물에 걸려서 잡히는 수도 많다. 특히 사리(사동)의 경우는 거의 모두가 새우잡이 그물에 부수적으로 걸려올려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리의 어업은 새우잡이 위주였기 때문이다. 사실 2~3년 전까지만 해도 사리포구에는 놀러 온 외지인들에게 산낙지를 파는 가게들이 많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새우잡이 그물에서 부수적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한편 뻘 속에 들어 있는 낙지를 잡을 때는 낙지 눈이 보이는 곳을 종가래로 파헤쳐 손으로 잡는다. 바닷물이 빠져 나가고 갯벌이 드러나면 낙지가 들어 있는 뻘 표면에 푸르스름한 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낙지의 눈이다.
사진 1-82 사리포구 어시장. 사리는 새우잡이로 유명하지만 게ㆍ낙지 등의 기타 어류도 풍성했다. |
(7) 연안안강망─새우잡이 사리(사동)의 어민들이 해 온 주된 어업은 새우잡이였다. 이곳 어민 모두가 새우잡이를 위주로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새우 이외에 나오는 게·낙지·고기류 등은 모두가 새우잡이를 위해 설치한 그물에 걸려서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주업으로 하는 어민은 없었다고 한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약 20년 전만 해도 이곳 사리포구에서 하루에 20드럼 정도의 젓새우가 잡혔다고 하며, 잡은 새우는 집에서 젓을 담가 팔거나 아니면 그냥 어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사실 필자가 2~3년 전 아직 시화방조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즉 사리 앞바다에 물이 차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등 포구가 살아 숨쉴 때 와서 본 바로는, 당시 물이 들어와 배가 바로 앞까지 들어오면 싱싱한 크고 작은 새우들이 여기저기 쌓여 부두 앞 어시장이 활기를 띠는 것을 보았다. 과거에 새우가 많이 잡혔다는 노인들의 말이 새삼 실감나는 정경이었다. 새우를 잡는 그물을 ‘연안 안강망’ 또는 ‘연안망’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먼 바다에서 쓰는 안강망을 가까운 연안에서 사용하기 적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라고 한다. 원래 안강망은 사리에서는 쓰이지 않고 주로 옹진반도나 기타 외지에서 쓰였는데, 이것이 전파되어 사리의 연안에 알맞게 개조된 것이라고 한다. 그물의 재질은 과거에는 면사였으나 지금은 모두 나일론이다. 그물의 크기는 과거에는 길이가 50~60m 높이가 2m 정도였으나, 현재는 길이가 70~ 80m나 된다. 즉 현재는 과거보다 20m 정도 길게 만들며, 중간에 고기들이 모이도록 하는 기술적인 보완이 추가된 것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연안망을 집집마다 20~30개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날 어업에 종사했던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물이 빠져나갈 때 그물을 설치하게 되는데, 바닷물이 들어오면 새우들이 함께 들어왔다가 물이 빠져나갈 때 새우를 비롯한 온갖 고기가 그물에 걸린다고 한다. 물론 물이 들어올 때 걸리기도 하지만 그물 설치 구조가 물이 나갈 때 많이 걸리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한 번 설치한 그물은 보름 또는 한 달, 아니면 두 달에 한 번씩 거두어 그물에 걸린 털(수초)을 제거하고 갈을 먹여 삶아야 그물이 오래 간다고 한다. 즉 그물을 쳐 놓으면 바닷물에 떠다니는 수초(水草)들이 그물에 걸려서 감기는데, 이것이 심하면 고기들이 잘 걸리지 않고 또 그물이 막혀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갈 때에 그물 자체가 손상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그물을 걷어 오면 햇볕에 말린 다음 손으로 털고 막대기로 두드렸으며, 심지어는 도리깨질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갈을 먹여서 삶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물의 실이 면사였기 때문에 보다 질겨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산에 있는 떡갈나무를 베어다 물을 채운 큰 드럼통에 넣고 삶다가 물이 끓으면 그물을 넣고 한참 동안 같이 끓인다. 이때 그물이 커서 한꺼번에 다 삶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한 쪽에서부터 조금씩 솥에 넣어 삶아 낸다. 이처럼 그물의 털을 제거하고 갈을 먹이는 것이 여러 날 걸리기 때문에 그물을 걷어 올 때는 다른 그물을 가지고 가서 설치해 놓는다. 즉 그물을 교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집집마다 20~30개의 그물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물이 면사가 아니고 나일론이기 때문에 과거처럼 갈을 먹여서 삶는 일은 없고 오직 털(수초)만 제거한다. 여름에는 열흘에 한 번씩, 겨울에는 두 달에 한 번씩 그물 청소를 한다. 청소하는 방법도 털거나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2~3일간 햇볕에 말리기만 하면 자연히 수초가 떨어진다. 그리고 곧바로 가져가 치기 때문에 전처럼 걷어 올 때 다른 그물을 대신 설치하는 일도 없다.
(8) 통발 그물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다가 자연스럽게 걸리게 하는 것인 데 비하여, 통발은 미끼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통 안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발은 그물에 비하여 제작이 간편하고 조업도 쉬운 편이다. 통발을 사용하는 시기는 봄부터 늦가을까지이며, 수온이 낮은 겨울철에는 물고기의 활동이 활발하지 못하여 조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는 어법으로 통발 조업을 금지하고 있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미 과거에 허가를 받은 자만이 통발 조업이 가능하다. 190) 이곳 사리 지역에 통발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84년으로, 이것이 점차 확산되어 1989년 이후로 전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모두 허가를 받은 사람들이다. 191) 현재 사리나 대부도 등지에서 사용하는 통발의 형태는 북과 비슷한 모양으로 철 파이프에 나일론실을 얽었는데, 통발 한 개의 무개는 대개 6kg 정도이다. 통발 속에 넣는 미끼로는 냉동한 고등어나 정어리를 사용한다. 통발의 제작은 재료를 구입해 자신이 직접 집에서 만들기도 하고, 아니면 완성품을 구입해 쓰는 경우도 있다. 통발은 긴 줄에 70~80개 정도를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아 바다에 치는데, 줄 양끝에 푯대를 세운다. 미끼가 든 통발이 물 밑바닥에 가라앉아 미끼가 냄새를 풍기면 이 냄새를 맡은 게·낙지·우럭·아나고(붕장어) 등등 온갓 고기들이 모여든다. 통발에 잡힌 고기를 거두러 가는 것을 ‘물 보러 간다’고 한다.
(9) 자망 직사각형 형태로 된 대형 그물로서 바닷물 속에 병풍처럼 치는 것이다. 자망의 종류는 표층어(表層魚)를 잡는 부자망(浮刺網), 바다 밑 고기를 잡는 저자망(底刺網), 고기떼를 포위해서 잡는 권자망(卷刺網)이 있다. 그물을 치는 방법은 어망 양쪽을 뜸줄과 그물 매는 줄로 연결하고 밑에는 닻으로 그물을 고정시킨 후에, 물 위로는 부표(浮漂)를 띄워 물 속에서 그물이 서게 한다. 이렇게 해 놓으면 조수가 들어왔다 나갈 때 고기가 그물에 걸리는 것이다. 그물의 크기는 20폭 또는 40폭인데, 한 폭은 40발 정도가 된다. 20폭을 사용할 때는 4명의 어부가 필요하고, 40폭을 사용할 때는 7명이 필요하다. 조업 시기는 7~8월 사이이며, 낮에는 고기 눈에 보이기 때문에 저녁(6~7시경)에 치고 새벽에 나가서 고기를 건져 온다. 192)
(10) 어선 어선은 어민들이 바다로 나가거나 돌아올 때 그물이나 기타 어로장비를 실어 나르고, 수확한 해산물을 실어 오는 유일한 해상운반수단이다. 현재 어민들이 많이 사용하는 배로서 연안에서 조업할 수 있는 어선은 4톤에서 7.93톤까지, 즉 8톤 이하의 배이다. 그리고 연안을 벗어나 근해로 나갈 경우에는 8톤 이상의 어선을 갖추어야 근해조업이 허가된다. 따라서 연안에서 조개를 채취하러 가거나 물 보러 가는 데 이용하는 배들은 대개가 8톤 이하의 어선들이다. 이러한 소형 어선들을 ‘풍선·범선·돛단배’라고 하는데, 어업을 하는 집이라면 한 척씩은 반드시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는 동력을 갖춘 동력선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과거에는 동력이 없어 바람이 불면 돛을 이용하고 바람이 없으면 노를 저어서 운항하였다. 풍선·범선 또는 돛단배라고 하는 명칭은 바로 이러한 어선 구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배를 만드는 재료도 과거에는 모두 나무였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안산 지역에는 산이 많아 동네 목수가 직접 나무를 베어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 특별히 타지에서 사 오는 경우는 인천이나 전라도 쪽에서 구입해 왔다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이처럼 나무로 만든 배에 돛이나 노를 이용해서 사용해 오다가 근래에 들어와 복지 농어촌 정책이 추진되어 목선에 동력장치를 부착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배의 구조 자체가 철선으로 바뀌었다가 1981년부터는 플라스틱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은 나무로 제작한 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나무로 만든 과거의 배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오늘날의 배나 형태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배의 무게에 있어서 플라스틱보다 나무가 더 무거운 편이라고 한다. 현재 사리에는 이러한 8톤 이하의 소형 배가 40여 척 있는데, 과거 많을 때는 14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 방조제로 인하여 사리 앞바다가 메꾸어져 어업이 위축된 결과이다. 선착장을 오이도로 옮기게 되면 서서히 다시 활기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어촌계장은 말한다.
사진 1-83 사리포구의 어선들. 과거에는 어업이 번성했으나 시화방조제 공사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 있다. |
지금까지 안산 지역의 농업과 어업에 관한 내용을 일반 서민들의 전통적인 재래식 방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안산 지역 모든 마을을 두루 조사할 수 없었고, 또한 생업 전반을 다룰 수 없어 농업과 어업의 대표적인 몇 가지를 조사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안산 지역의 전통적 생업기술의 한 단면만을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실 농업과 어업 어느 하나만이라도 두루 심도 깊은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앞으로 보다 더 깊이 있는 분야별 조사·정리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권진숙(경기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