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15일. 다행히 날이 푹해 눈이 녹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더 편하게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아침은 저동항으로 넘어가서 먹었다. 도동항에는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이 그리 없다. 현지인도 도동보다는 저동이 아침을 먹기에는 낫다며 그곳을 소개하여 저동으로 넘어가서 먹었다. 무슨 공사가 있는지 몰라도 인부들도 함께 먹었는데 정말 괜찮았다. 어디 타지에 가면 아침 먹는 일이 걱정이다. 놀러갔다면 늦으막히 일어나니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일하는 사람은 다르다. 토종 수집을 나간 내내 걱정한 것은 어디서 아침을 먹느냐 하는 것이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계획한 태하 쪽으로 넘어갔다. 가면서 보니 어제처럼 낙석도 없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쌓여 있던 눈도 많이 사라졌다. 달팽이관 같은 일주도로를 지나 마침내 목표로 한 서면 태하에 도착했다.
서면 태하에 도착해 만난 울릉도의 자랑 반건조 오징어. 울릉도에서는 피때기(?)라고 한다. 나중에 보니 이렇게 직거래로 사면 더 싼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배가 뜨기 전 오징어를 사면서 그때 살 걸 많이 후회했다.
여기에서 볼 마을은 태하라는 곳이다. 그런데 막상 오니 그냥 평범한 어촌이다. 여기 농사짓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일단 가장 확실한 관공서에 들렀다. 여기는 보건소. 들어가니 누군가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고 계신다. 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이렇게 여기를 찾아가려고 한다 하니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그런데 말을 들으니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고 하신다. 어허... 생전 처음 케이블카를 여기서 타는 것인가?
그런데 이 아주머니 뭔가 다르다. 알고 보니 보건소장이시다. 원하셨든 원하지 않으셨든 동네 아주머니 같아 보이신다. 이렇게까지 동네 사람과 하나가 되셨나 생각하니,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뒤늦게 퍼뜩 들었다. 나중에 또 간다면 다시 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무튼 알려주신 대로 케이블카를 타러 정거장에 갔다. 헌데 불행하게도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울릉도는 정말 걷잡을 수 없구나. 강화도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었다. 강화도는 이제 섬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울릉도 만큼 뭍에서 떨어지지도 않았으니 그렇겠지. 자연환경이 어려운 곳일수록 사람보다는 신에게 기대게 마련이겠다. 울릉도에 와서 보니 그렇다. 바람만 불어도 배도 안 뜨고, 케이블카도 다니지 않으니 하늘만 쳐다봐야지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제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일은 포기하고 그냥 서달령이라는 곳에 가자고 했다. 그래도 예까지 왔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들를 수 있는 곳은 들르면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대로 언제 여기를 또 올지 모르고, 있든 없든 들렀다는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네를 뒤지다 첫 집에 들어섰다. 허나 아무도 없었다. 무슨 장날인가? 왜 사람이 없을까?
서면 태하에서 들른 첫 집.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에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옆집에나 들어가자. 그렇게 들른 옆집은 막 외출을 하려고 차에 타고 있었다. 이 집은 소를 많이 키우고 있었다. 종자는 별로 없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시커먼 소와 칡소가 함께 있어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이놈들이 카메라를 싫어하는지 계속 움직이고 어둡기까지 해서 이런 사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돌다 서면 태하1리 528버지 박경화(78) 할머니 댁에 들렀다. 마침 할머니도 어디 나가시려고 준비하고 계셨는데, 그 전에 들러 이것저것 물을 수 있었다. 좀 건성건성 말씀해 주셨지만, 그래도 일단 검은 수수 하나는 얻었다.
박경화 할머니 댁의 검은 수수. 종자로 달아 놓은 이것밖에 없었다.
이제 바닷가를 지나 중리라고 하는 마을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이보다 더 위로는 눈이 쌓여 있는 모습에 어떨지 조마조마.... 다행히 서달령까지도 괜찮았다. 거기를 지나 옛 길로 지나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는데, 서달령까진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겨우 태화리 694번지에 사시는 신계개(79) 할머니께 미역취 씨앗을 얻고 사진을 한 방 찍으려 하니, "귀신 같이 나오니 내 찍지 마소"라는 핀잔만 들었다.
그래도 눈이 많이 녹아 다행이다. 오늘도 저기 같았으면 그냥 놀아야겠지.
서달령을 돌고 다시 내려왔다. 예전에 일주도로가 뚫리지 않았을 때는 여기로 넘나들었다는데, 지금은 일주도로 덕에 편하게 왔다. 일주도로가 아니었다면 어제 같은 날이 지나 오늘은 여기에 오지도 못했을 거다. 이게 참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 슬픈 일이기도 하다. 어디까지 고마워하고 어디부터 싫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삶이 다 그런 걸까?
다시 태하터널이라는 곳을 지나 학포동이란 마을에 들어섰다. 말이 쉽지 꼬불꼬불 급경사의 길에 들어섰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운전을 하고 다니는지, 더군다나 안완식 박사님은 이런 길을 어떻게 그리 잘 다니시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돌고 돌아 내려가니 바닷가 절벽에 선 몇몇 집과 교회가 보인다. 그러나 토종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대로 다시 차를 돌려 나갔다.
대신 그렇게 나와 지도에도 없는 마을에 들렀다. 여기도 여전히 태하리였는데, 원래 살던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여기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계셨다.
태하2리 383번지의 김목호(83) 할아버지. 오래 간만에 온 손님에 참 반가워하셨다.
알고 보니 예전에는 농사 잘 짓는다고 표창까지 받은 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런 증표를 되게 중요시한 시절이 있었나 보다.
옆집에 몇 집이 있었는데 사람이 없기에 솔직히 별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계셔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하며 집을 둘러보았는데, 참나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오셨는지 모르겠다. 이건 농촌의 집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어촌의 집도 아니고, 정말 섬 마을의 외딴 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울릉도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강한 해풍을 막고자 겉은 다 둘러 막고, 속에 집을 지었지만 방도 두 칸뿐. 시부모님과 함께였다면 참말 답답했겠다. 가부장제가 굳건하던 시절에 이런 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면 밤이 새도록 들어도 시간이 모자르겠다. 요즘 사람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편하게 사는 것인지 모른다.
박연조(77) 할머니의 부엌. 부엌이라지만 따로 분리된 공간도 아니고 안방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그나마도 외벽이 둘러쳐진 곳이라 독립된 공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곳. 이런 곳에서 남자들 등살을 이기며 사셨을 생각을 하니, 벽에 들러붙은 그을음만큼 고단하셨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씨앗을 들고 나와 말씀해 주시는 박연조 할머니. 참말 이렇게 살아왔으니 살았지 요즘 사람들 누가 이렇게 살겠는가?
할머니를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많은 씨앗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예전만큼 힘이 없으셨다. 동물원의 기운 빠진 호랑이가 따로 없었다. 할머니의 까랑까랑한 기상에 비하면 할아버지는 예전 기세로 사시는 듯했다. 기세 등등한 할머니께 받은 씨앗은 이렇다. 빨간 걸 이웃 젊은 사람이 줬는데 그건 맛이 없어 자기의 담배잎파리 닮았다는 청상추와 아주 아주 오래됐다는 보통 12줄이 생기는 찰강냉이. 그리고 똠방하니 익으면 노랗게 되고 퍼뜩 크는 토종외(청오이), 이건 시장에 나온 오이를 사다 먹어봐도 이런 맛은 없다고 한다. 또 희고 검은 덩굴콩, 또 털이 없는 엉걱꾸(엉겅퀴)를 얻었다.
더 재밌고 더 맛깔난 말이 많았는데, 테이프에 녹음한 듯 기억이 따르지 못해 아쉽다. 대신 그 집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더 올리려고 한다. 그 어르신들의 집 앞에는 바다가 팍 트여 있다. 바다가 바라보이니 그것 땜에 우울하지 않냐고, 바다가 보이면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던지라 그런 질문을 했다.
김목호,박연조 할머니 댁에서 바라본 울릉도의 바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바다가 있어 속이 시원하다는 이야기. 여기 저기 다니면서 여러 어르신께 물었다. 바다가 보여서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바다가 있어서 속이 시원하고 뻥 뚫리며 먹을거리도 많고 좋다는 답. 그런데 왜? 난, 바다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을까? 바다를 접해 보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바다라는 걸 생각해 보지도 못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렸을 때 외가가 묵호인 덕에 그나마 바다를 자주 접했다고 생각하는데, 내 안에 있는 바다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은 극복하지 못한 것일까?
박연조 할머니 댁 옆에 늘씬하게 자란 나무. 무슨 나무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구 아시나요?
박연조 할머니 댁에 들어서는 길에 버려져 있는 말. 나 어릴 때 타던 말은 누런 말이었는데, 이제는 백마인가? 아이도, 사람도 없어지는 시골 마을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것도 박연조 할머니 댁 옆에 있던 떼배의 모습. 울릉도 사람은 이런 뗏목 같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미역도 따고 해산물을 채취하여 먹고 살았다. 지금은 울릉도에 가보니 나물을 많이 재배하거나 어업에 종사했는데, 예전에는 이런 배를 타고 식구의 입을 책임졌을 것이다.
다시 차를 타고 길을 나서 바로 윗비탈에 자리한 집까지 올라갔다. 집을 예쁘게 꾸미고 사셨지만, 씨앗은 없다고 하셨다. 이 집 빨랫줄을 보니 빨래집게가 재밌게 걸려 있다.
이제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 서면까지 나가야 식당이라도 있을 것 같아 가는 길에 지도에 표기된 마을에 들르며 나아갔다. 삼막, 말바위, 수충동.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버려진 집만 간신히 버티고 서 있고, 멀쩡해 보이는 집은 그냥 농막 식으로만 쓰이는 상태였다.
서면까지 나와 맛있게 점심을 먹고 서면 남서리 나발등이라는 곳으로 올라갔다. 지나는 길에 남서고분군이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들를 수 없을 것이다. 이 고분들은 옛날 옛적 삼국시대부터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아쉽지만 그냥 지나쳐 나발등에 오른다. 여기도 길이 만만치 않다. 꼬불꼬불 이리 돌고 저리 돌고 설설 기어서 올랐다.
나발등의 밭과 집. 밭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이 밭을 일구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을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행히 할머니가 사시는 집을 바로 찾았다. 그런데 나물 농사만 지어서 그런 건 없다고 하시니 헛걸음인가? 경치 하나는 끝내준다. 저쪽에 아까 우리 앞을 유유히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신 분이 계신다. 거기라도 가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설 수는 없지 않은가.
울릉도의 전형적인 민가. 집에 외벽으로 나무판을 덧대고, 둘레에는 밭에서 나왔음직한 돌로 담도 두르고 축대도 쌓았다. 인고의 세월을 쌓아놓은 모습에 사람의 삶과 끈기를 엿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분은 아주머니였다. 마침 잘 됐다. 서둘러 찾아가 넙죽 인사부터 드렸다. 먼저 낮추고 들어가면 경계심과 의심도 풀리는 법이다. 이곳은 서면 남서1리 196 오재식(56) 아주머니의 농막이었다. 옛날에는 여기서 살았지만 이제는 농사지으러 와서나 쓰고 살기는 아랫동네에 산다고 하신다. 지나면서 본 집들 가운데 그런 집이 꽤 있는 듯하다. 오늘은 마침 배추를 절여 김치를 담그려고 올라오셨다고 하신다.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 이어지나보다.
울릉도 나발등 오재식 아주머니 농막 앞의 나무전봇대. 국민학교 다닐 때 보고 처음이다. 아직도 이걸 쓰는 데가 있구나.
텃밭을 보니 채소가 많이 띈다. 먼저 채소 종류부터 여쭈어보니, 몇 가지가 있다며 찾으러 들어가신다. 가지고 오신 통에는 열무, 청상추, 삼나물 등이 들어 있었다. 상추는 같은 동네에 사는 분한테 얻어다 계속 씨를 받아서 심는다고 하신다. 잎이 크고 고르다고 하시는 걸로 보아서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간다. 열무는 7월 초에 심어 9월 초까지 키워 먹는다. 그런데 안 뽑아 먹고 몇 포기를 놔두면 가을 10월쯤에 씨를 받을 수 있단다. 그렇게 처음에는 사온 씨앗인데 몇 년 계속해서 씨를 받아 심어 먹는다고 하신다. 이건 여름에 물김치용으로 주로 먹는다. 마지막으로 삼나물은 봄에 빨간 게 올라와 한 뼘쯤 되면 그걸 잘라 삶아 말려서 나물이나 국으로 먹는다. 초즙(초장)에 무쳐 먹어도 맛있단다. 이밖에 호콩을 한 가지 더 얻었다. 날은 맑아도 좀 쌀쌀한 편인데 찬물을 만져야 하시니 얼마나 시려울까. 어머니들은 참 대단하셨다. 추우면 찬물로 세수도 하기 싫은데.
나발등의 한 밭. 사료용 수수를 걷어 낟가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하얀 곳이 바로 콘크리트로 포장한 길이다. 여기까지는 평평하지만 곧바로 45도 비탈로 곤두박질친다. 이 길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 깔려 있던 모래에 미끄러져 계곡으로 굴러떨어질 뻔한 아찔한 일이 벌어진 장소다.
이제 나발등과 작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 참고로 나발등이라는 이름은 나발처럼 동그랗게 하늘만 보이는 곳에 그래도 판판한 터가 있어서 나발등이란다. 울릉도는 비탈이 많지만 그래도 그 가파른 틈 사이에 이런 곳이 있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교통수단도 좋지 않았을 옛날에는 장에 나가는 일도 힘들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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