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맞닿은, 생명을 잇는 본능, 농사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오늘은 석모도로 건너가는 날이다. 안완식 박사님과 둘이 아침 일찍 일어나 8시 배로 석모도로 건너가 8시 10분 도착했다. 교동도보다 더 가까운 곳이다.
강화에서 석모로 건너가면서 ... 해돋이와 함께
선착장에 도착하니, 마침 강화로 나가는 분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 저 분들 가운데 오늘 우리가 찾을 곳에 사는 분이 계시면 어쩌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본격적으로 석모도 조사를 시작하려고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공사가 한창이다. 도로를 넓히고 있었다. 당장은 어떤 이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이렇게 큰 도로를 뚫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왜 경기 남부 지역에 연쇄살이이 잦은 것도 그런 요인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고개를 넘자마자 왼쪽으로 논과 집 몇 채가 보인다. 일단 시작은 여기부터이다. 도착한 곳은 삼산면 석포리 공개마을 558번지이다. 집 앞에는 반어반농을 하시는지 어구가 잔뜩이고, 집 안에 들어서니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바닷가에서 살지 않아 그런지 비린내는 언제 맡아도 거부감이 든다. 오죽하면 집에서 생선 굽는 것도 싫어한다. 물론 먹을 땐 맛있지만 굽고 나서 그 냄새가 빠지길 기다리려면 그 시간이 더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조림, 그것도 아주 가끔 먹고 만다.
공개마을 문순옥(67) 할머니 댁. 할아버지는 작은 고기잡이 배를 가지고 계시단다.
너무 아침 일찍이라 실례인지 알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창 아침을 먹고 치우고 있으셨는데, 방문 목적을 설명드리고 협조를 부탁하니 선뜻 이런저런 씨앗을 보여주신다. 그 가운데 20년 이상 재배했다는 마늘을 얻었다. 그래도 첫 집인데 무언가를 얻었으니 시작이 좋다. 그동안 공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좋은 기분을 안고 이웃집으로 차를 돌렸다. 말이 이웃집이지 걸어서는 3~4분 걸리는 길이다. 그렇게 찾은 곳은 공개마을 석포리 555 고영자(66) 할머니 댁이다. 할머니에게 공개마을의 유래를 들었다. 마늘을 심으면 마늘이 공처럼 동그랗다고 공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참 재미있는 설명이다. 이 할머니는 농사에 더 전념하시는지 씨앗 종류도 훨씬 많고, 꼼꼼하게 잘 갈무리해 놓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잘 갈무리해 놓은 씨앗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시는 고영자 할머니. 뒤에 보이는 찬장과 씽크대에 씨앗을 모아 두셨다.
이르고 다닥다닥하지 않으며 느리게 달리고 네모에 가지를 좀 친다는 늘참깨, 이건 시어머니 적부터 물려 내려온단다. 진액이 많고 가운데는 좀 푸르고 빨가며 꽃이 그다지 빨리 피지 않는다는 적치마상추. 3가지가 섞인 덩굴콩, 머리는 동그랗고 꼭지는 길쭉하고 잘록하며 작다는 조선오이, 집 안 한쪽에 던져 놓은 멧짝호박을 얻었다.
고영자 할머니의 보물창고 찬장 서랍. 혹시 뒤섞일까 봐 씨앗을 담은 봉지에는 하나하나 이름을 적어 놓으셨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두 번 세 번 참 씨앗을 잘 정리해 놓으셨다며 칭찬이시다. 함께 다니면서 뵈니 이렇게 칭찬하는 집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이 집은 정말 잘하는 집인 것이다. 역시나 아침부터 출발이 좋다. 석모도에서는 기분 좋게 일하다 갈 수 있겠다. 하긴 나도 기대를 하고 왔다.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의 발길이 닿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을지 궁금하다.
공개를 한 바퀴 돌아나오니 다시 석포 선착장이다. 다시 고갯길을 넘어 이번에는 앞으로 쭉 내달렸다. 한 번씩 세게 밟으시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쭉쭉 나간다. 아직 운전면허도 없지만, 내가 보기에 운전 실력도 수준급이지 않으실까?
한참 달리다 바닷가 옆으로 한 집이 보여 찾아 들어갔다. 사람을 찾아 소리쳐 불렀지만 묵묵부답. 그런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더듬더듬 찾아 들어가니 할아버지 한 분이 일하고 계셨다. 이곳은 안나루뿌리라는 곳인데, 유재익(87) 할아버지는 이제 귀가 어두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어르신의 말도 우리가 알아 듣지 못하겠다. 귀가 들리지 않으면 말도 잃어버리는 법, 더군다나 새로운 말을 배우지 못하셨는지 엄청 사투리가 심해서 더더욱 알아 듣기 힘들었다. 아무튼 할머니께서는 배 타고 강화에 나가셨다는 건 알아 들었다. 뭔가 있어 보였지만 지체할 수 없어 옥수수 하나만 얻어서 그대로 나와 차에 올랐다.
무슨 수련원을 지나 왼쪽으로 움푹하게 들어간 논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지께서 지팡이에 의지해 어렵게 어렵게 한걸음씩 떼고 계셨다. 그 집에 따라 들어가 토종이 있는지 여쭈었다. 안에는 마침 할머니가 계셔서 어렵지 않았다. 손순덕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비해 훨씬 건강하고 정신이 또렷하셨다. 기억력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직도 자식들에게 농사지어 먹을거리를 보내주신다고 한다. 자식은 늙어도 자식이다. 아직 자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왜 그럴까? 다른 생각할 틈도 없다. 이것저것 보여주셨는데 그 가운데 피마자, 땅콩, 늦들깨를 얻고 이렇게 찾아온 것도 기념인데 두 분의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고 하여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는 100살이 가까워 자식들한테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훔치신다. 그나마 할머니가 있어서 먹고 산다며 또 눈물을 훔치신다. 마음이 많이 약해지셨는지 자꾸 미안하다는 말씀만 되뇌이신다. 남자는 나이 들면 비참해지는가?
인사를 건네고 다시 차에 올라타 강행군의 시작이다. 오늘 하루 안에 석모도를 다 돌아봐야 하기에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동촌이란 곳을 지날 무렵 김준식(72) 할아버지가 길가에 나와 계셨다. 몸도 정신도 건강하시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중요하니 차에서 내려 얼른 다가가 토종을 물었다. 그런 건 저 건너편에 할머니한테 물어보라고 하셔 그 집에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찾아가니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할머니가 어디 나갔다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수수, 찰옥수수만 일러주신다. 안완식 박사님이 신발장 안에서 꽁꽁 싸 놓은 씨앗들을 찾았지만, 유래도 알 수 없고 그에 대한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어 아쉽지만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긴 있는 집인데, 아침에 할머니들이 우루루 강화로 나가는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삼산면사무소 앞을 지나 간척이라도 했는지 널찍한 논 사이로 난 곧은 길을 따라 달렸다. 이런 곳에는 뭐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안완식 박사님의 중얼거림. 역시나 이 근처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하도 아무것도 없어 농기구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흙덩이를 깨부수는 곰방메에 이를 달아 써레처럼 만들어 놓은 농기구이다.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는데, 이곳의 흙은 이걸로 툭툭 치면 잘 부수어진단다. 그곳의 환경은 사람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도록 한다. 필요에 따라 다양한 농기구가 지역마다 특색 있게 쓰인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음식도 지역의 특색이 담긴 것이 거의 사라졌지 않은가. 이제는 어딜 가나 똑같은 상차림에 똑같은 맛이다. 그만큼 표준화되고 계량화되었다는, 곧 문명화되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난 씁쓸하다.
농기구는 만들어 쓰셨지만, 토종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다. 논농사를 크게 짓고 밭은 먹을 것만 조금 사다가 심는 게 다이다. 여느 집도 대부분 이와 마찬가지였다.
자, 오전 안에 이 일대는 다 둘러보고 가자. 다시 저 끝까지 가보자며 차에 올랐다. 다행히 상리 1구 302번지에서 많은 토종을 발견했다. 여기 사시는 김정순(77) 할머니는 그 맛이 좋아 집에서 먹으려고 토종으로 농사짓고 계셨다. 조선시금치라고 부르는 동그란 시금치. 이건 색시 때부터 심던 것인데, 봄에 심는다. 가을에는 여기 논농사가 바빠서 못 심었는데, 그럼 겨울을 난다며 자랑하신다. 다음 완두, 또 콩나물이 잘 되고 잘 무른다는 나물대콩, 키가 작은 건 맛이 없는데 이건 키가 크고 맛있다는 수수, 적팥, 녹두, 흰밥밑콩, 들깨를 얻었다.
흰밥밑콩을 두 손 가득 퍼 담아 주시는 김정순 할머니. 메주콩과 같은 모습인데 밥밑콩으로 쓴단다. 비리지 않고 맛있다니 그 맛이 궁금할 뿐이다.
빛깔이 참 예쁜 나물대콩. 농사를 깔끔하게 잘 지으신단 느낌이 집 안 구석구석에서 풍겨온다. 마당에는 어디서 잔디를 떠다가 심어 놓으셨다. 역시 정갈한 느낌의 집에서 뭐가 나와도 나온다.
키가 크다는 수수. 껍질이 검은색이었다. 까치수수가 아닌가 몰라?
이 집을 나와 조금 더 가니 길이 끝난다. 석모도의 한쪽 끝까지 다 돌았다. 지도를 확인하니 여기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마을이 하나 더 있다고 나온다. 거기까지 다 돌아보고 점심을 먹어도 먹자.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는 차 한 대만 오를 수 있는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고 오른다. 그렇게 힘겹게 오르다 한마디 툭 던지신다. "이거 안철환이 차로 왔으면 오지도 못할 뻔했다." 그만큼 길은 험했다. 이렇게 험하게 들어가니 꼭 뭐 하나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지도의 마을 표시가 있는 곳까지 가니 과연 집이 몇 채 있다. 아니,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전에 교동도 갔을 때 저 바다 건너 보이던 집이 아닌가. 집의 입구에는 야생동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철망으로 문을 달아 놓았다.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했을까 하며 문을 열고 집에 다가갔다.
에이, 헛거다. 사람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냥 농막으로나 이용하는 걸까? 저쪽에도 이런 집이 하나 있었지만 그곳도 헛거가 분명하다며 그냥 나가자고 하신다. 헛걸음했다. 아니, 헛걸음은 아니다. 안완식 박사님은 틈틈이 이렇게 하나하나 내 발로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라고 힘주어 강조하셨다. 그 말씀이 옳다. 확인 안 하고 갔다간 똥 누고 밑 안 닦은 것마냥 얼마나 찜찜할지, 자다가도 생각나 벌떡 일어나겠다.
점심을 먹으러 이제 삼산면 소재지로 나갔다. 여기 말고는 별달리 먹을 만한 곳이 없다. 하지만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식당이라곤 다섯 개쯤. 별로 먹을 것도 없고 할 수 없이 국밥집에 들어가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난 서둘러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아까 눈여겨 보았던 집에 가보려고 어디즘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얼른 나와 뛰듯이 찾아간 곳, 일본식 가옥의 구조를 하고 있는 식당이다.
이곳 삼산면은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았던 곳. 그래서 이 근처를 한 번 둘러보고 싶었다. 이렇게 기회가 생겼으니 충분한 시간은 없어도 대충이라도 파악이나마 하고 돌아가고 싶다.
꼭 일본식 건물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뛰듯이 한걸음에 달려간 곳.
식당에 들어서니 할머니가 주인이시다. 인사를 드리고 이 건물의 유래를 여쭈었다. "건물이 예쁜데 이게 혹시 언제 지은 건가요?" "이거 70 몇 년에 지은 건데 왜 그러슈?" 아, 실망... 일정 때 지은 거라고 말씀해주셨으면 정말 좋을 텐데, 해방이 되고 지었다니 잘 모르겠다. 그럼 다른 건 없을까 하고 동네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경찰이 뭐 하는 놈인지 슬쩍 묻는다.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이 근처에 일정 때 지은 건물이 없는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잘 모르겠다는 말. 우리는 자기가 사는 곳에 참 무심하다. 이건 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잘 관심을 주지 않는다. 저 먼 유럽이나 미국을 동경하기 전에 나와 내 주변을 먼저 돌아보는 일이 먼저가 아닐까? 물론 큰 나라 다른 나라에 다녀오면서 느끼는 점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동네를 도는데 한 돈가스 집이 나왔다. 이 집도 아까 그 집처럼 일본식이다. 일본식 건물에 일본식 음식을 파니 혹시 여기가? 얼른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여기도 아니란다. 여기도 해방되고 지었단다. 그래서 나름 추리를 해 보았다. 여기도 일본사람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곳이니, 해방이 되고 나서도 일본사람들이 남기고 간 일본식이 좋은 거라는 인식이 남지 않았을까? 그래서 건물을 이렇게 지은 건 아닐까?
터덜터덜 나와 동네를 더 살피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잘 됐다. 얼른 다가가서 할아버지께 이런저런 걸 여쭈었다. 할아버지의 성함은 임채윤인데, 올해 87세라고 하신다. 해방되고 개성에서 피난을 나와 여기에 정착하셨다. 먹을 게 없어서 지츠래기(찌끄러기)를 가져다 먹으며 참 고생을 많이 했다고 회상하신다. 자신이 여기 정착할 때쯤 있던 건물은 저기 학교 건물이라고 일러주셨다. 두 번 세 번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얼른 다가가서 살폈다.
임채윤 할아버지. 나중에 석모도에 다시 가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할아버지 한 인물 하신다.
과연 학교 건물은 오래되어 보였다. 예전 익산대학교에 찾아가 보았던 이리농림의 건물이 떠올랐다. 그것과 똑같은 양식은 아니지만, 보통 이런 건물은 60년대에나 지었을 법하다. 그럼 할 수 없지만, 그저 속으로 이 건물이 일정 때부터 있던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만 남겼다. 나중에 찾아가 학교에 들어가서 관계자와 이야기해 봐야겠다.
언젠가 꼭 찾아가 봐야 할 곳. 삼산면의 초등학교 건물.
밥을 먹고 났더니 피곤이 몰려온다. 둘이 다녀서 더 그렇다. 안완식 박사님도 피곤하신지 차에서 잠시 쉬며 일정을 조정하고, 회계 처리를 하시느라 바쁘시다. 신경 쓰랴 운전하시랴 정말 피곤하실 거다. 더구나 연세도 적지 않으시니 더 걱정이다. 무리하시다가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이번 프로젝트는 거기서 멈춰야 하니 별 탈이 없으셔야 한다. 젊은 사람도 힘든 일을 정말 지치지도 않고 하신다. 안철환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Sun Power! 이시다.
오후는 삼산면 옆동네부터 살피면서 시작했다. 석모 3리 구리안마을의 최주숙(60) 아주머니 댁에서 까만동부를 발견했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걸 대단하다며 쳐다보고 사진 찍고 조금 얻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신다. 너무 가까이 있어 그 가치를 생각할 이유도 없으셨을 거다.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다 그렇다. 가까운 것에서부터 의미 부여와 가치 찾기, 그 작업이 끝나야 남의 것, 멀리 있는 것도 잘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까만동부가 담겨 있던 통. 허리에 차고 비료 등을 주는 데 쓰는 농기구이다. 예전 같으면 짚으로 짰을 텐데 이제는 프라스틱으로 나온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발전인지.
다시 차를 타고 좀 더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곳도 한창 공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왜 이리 추울 때, 특히 연말에 공사를 하느라 애쓸까? 그런 눈 먼 돈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만큼만 쓸 수 없는 체계가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지금은 하나의 관습처럼 굳었으니, 이에 걸맞는 용어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연말공사 ; 남는 예산을 소모해 내년도 예산 배정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공사.' 식으로 말이다.
구리안마을 석모3리 744번지의 양곡례(81)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머니는 이제 다리가 많이 불편하다고 하신다. 농사는 그저 습관처럼, 집에서 먹을 거라도 좀 하려고 하신다는 할머니.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였다. 농민에게 농사는 습관,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인 움직임. 봄이 오면 씨 뿌리고 가꿔서 거둬 먹는 행위이다. 생명을 이어가려는 본능이 농민을 움직이게 한다.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생명과 맞닿은 행위인 만큼 귀하디 귀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본능이다.
양곡례 할머니 댁의 대문에는 가시나무를 해다가 달아 놓으셨다. 이 의미를 자세히 묻지 못했다. 그저 잡귀나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이 아닐까 추축해 본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다 외지에 나가 있어 이 큰 집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홀로 사신다. 가슴이 짠하다. 가족 관계를 자꾸 깨부수는 이 사회가 걱정이다. 가족의 파괴, 파괴까지는 아니어도 핵가족사회로 가면 갈수록 인간은 고독하고 외로워 그 허전함을 무언가로 대신하려 한다. 든든한 관계망 안에 있을 때 인간은 편안함을 느끼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법인데, 자꾸 핵가족으로 쪼갠 뒤 그 허전함을 사회복지나 그런 걸로 메꾸려고 하니 왜 그렇게 쓸데없이 노력하는지 모르겠다. 양곡례 할머니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진을 찍을 틈도 없이 생각이 막 샘솟아 오른다. 아픈 몸으로 농사지어 갈무리해 놓으신 검정동부, 검은팥, 적상추, 완두를 얻고 건강하시라는 말을 건네고 나왔다.
이후 석모도의 서쪽은 모두 펜션 단지가 차지하고 있었다. 강화도의 서남부가 그런 것처럼 석모도도 다르지 않았다. 동해안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 관광단지인 것처럼, 서해안에서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 그런가 보다. my car 시대는 관광의 일상화를 가져왔다. 이제 차만 있으면, 차만 있으면 언제나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렇게 찾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업자들이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찾아 들어온다. 그럼 그 결과는? 입 아프게 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보문사나 보고 가자며 차를 세우신다. 보문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토종을 연구하는 사람인데 보문사에 꼭 보고 가야 하는 나무가 있으니 예외적으로 차를 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매표원은 끝끝내 거부했다. 원칙에 충실한 자세이니 그걸 뭐라고 탓할 수 없다. 대통령이 와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보문사까지 가려면 먼 줄 아시고 차를 타고 가고자 하셨던 것인데, 걸어서 몇 분이면 간다는 말에 그럼 얼른 다녀오자고 재촉하신다.
낙가산 보문사. 내심 보문사에 들렀으면 했다.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가 방문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보문사 뒷산을 넘어서 왔다. 길이 뚫리지 않았을 당시에는 보문사까지 그렇게 오는 길이 가장 빨랐다고 한다.
보문사의 멧돌. 이건 다카하시 노보루가 직접 그림까지 그려 남겨 놓은 그것과 똑같다. 70년의 시공을 넘어 그의 발자취를 느낀다.
산에 가면 돌탑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걸 쌓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소원을 비는 건가? 여러 사람의 행위가 쌓이고 쌓이면 사회적 관습이 되고, 관습은 하나의 문화로 정착한다. 신이 많은 곳일수록, 소원을 많이 빈 곳일수록 그만큼 살기 팍팍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보문사를 나와 일주문 앞에 장사진을 이룬 할머니들의 좌판을 둘러보았다. 별로 새로운 것이 없어 그냥 둘러보기만 하고 말았다. 장사로 잔뼈가 굵은 할머니들의 잇셈을 뿌리치느라 혼났다.
나머지 마을을 돌아보려고 차에 다시 올랐다. 오늘 안에 석모도를 다 돌 수 있겠다. 별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한 마을에 들어섰다. 삼산면 매음2리 519번지, 웃물이라고 하는 곳이다. 한자로는 상동이니 윗마을을 사투리로 웃물이라 하는 것이겠지. 내가 키우는 개와 비슷하게 생긴 개가 있는 집, 바로 박상덕(80) 할아버지 댁이다. 텃밭에 황차조가 보여 그 유래를 여쭈었다. 그랬더니 이건 본인이 심은 게 아니라 이 마을에 귀농한 젊은 사람이 지난해부터 심은 것이라고 일러주셨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백경식인데 저쪽 집에 사니 가보라신다. 그 말씀대로 갔지만 아무도 없어 발길을 돌렸다.
마을에서 나오다가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마침 잘 되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할머니께 토종이 있는지 물었다. 고순영(80) 할머니는 나이대답지 않게 키가 훤칠하게 크시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돌아나오시며 저 할머니가 젊었을 때는 잘생겼겠다는 말을 하신다. 키가 크시다고 말씀드리니, 크면 뭐 하냐고 젊었을 때는 키가 커서 구박을 많이 당했다고 하신다. 녹록치 않은 인생을 살아오셨나 보다. 이 어르신 나이대의 분 가운데 살아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자면 사나흘 밤새야 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할머니 집에서 퍼런콩과 텃밭에 서 있던 옥수수대에서 메옥수수를 챙겨서 나왔다.
차를 타고 가다가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다~! 할머니한테 가면 뭐라도 떡고물이 떨어진다. 가까이 다가가니 호박 껍질을 벗기고 계셨다. 할머니는 아까 보문사 앞에서 보았던 좌판 할머니들처럼 그곳에 나가 장사를 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토종을 찾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좀 보자고 했는데 자꾸 사갈 거냐고 몇 번을 되물으신다. 연구하려고 그러니 조금만 얻자고 해도 장사셈을 먼저 하셔서 혼났다. 그렇게 할머니께 약콩과 선비콩을 얻어 나왔다.
호박꼬지를 만들어 내다 팔려고 준비하시던 유분남(79) 할머니. 장사로 잔뼈가 굵으셔서 그런지 혼났다.
이제 해가 간당간당 거린다. 아직 두세 마을쯤 남았는데 큰일이네. 해가 지면 문도 닫히고, 덩달아 사람의 마음도 닫힌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다. 서둘러 매음리 인내라는 곳을 둘러보았다. 이곳 101번지에서 노영조(67) 아저씨와 이옥련(61) 아주머니를 만났다. 두 분은 원래 이곳이 고향인데, 나가서 생활하다가 다시 돌아온 지 몇 년 되었다고 하신다. 외지에서 살다 오셔서 그런지 그냥 농사만 지으며 산 분들과 확실히 다르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올까?
아주머니께서는 한창 농사에 재미를 붙이고 계신지, 농사 자랑이며 씨앗 자랑이 대단하시다. 이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알콩달콩 재밌게 농사지으시는 분을 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많았으면 좋겠다. 부엌 찬장에 얼마나 씨앗을 잘 보관하고 계신지, 안완식 박사님의 칭찬이 이어진다. 이렇게 안완식 박사님의 칭찬을 받은 집만 골라서 나중에 다시 찾아가 봐도 재밌겠다. 씨앗 전문가에게 칭창까지 받을 정도니 더 말이 필요 없겠다. 안완식 박사님은 칭창만이 아니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그동안 다니면서 하나둘씩 챙겨 놓았던 씨를 챙겨서, 여기 없는 것 가운데 심고 싶은 걸로 골라서 가지라며 씨를 퍼뜨리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이제 그 씨들은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겠지. 이옥련 아주머니께서는 시어머니에게 대물림했다는 완두를 내주셨다. 신품종은 비릿내가 나지만 이건 그렇지 않고 고소하고 맛있단다. 말려도 쭈글거리지 않고, 이른 품종이다. 완두는 벌레가 잘 생긴다면서 일부러 페티병에 넣고 마개를 아주 꽉 막아 놓았다고 한다. 참 괜찮은 보관법이다. 완두, 녹두, 팥은 보관할 때 벌레 때문에 걱정인데 이 방법을 한 번 써 봐야겠다. 또 무주에서 사왔다는 홍화를 조금 얻고, 강낭콩을 좀 얻었다.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마지막 장식했다.
이옥련 아주머니의 보물창고. 아주머니에겐 더없이 예쁘고 소중한 씨앗들일 터이다.
이옥련 아주머니 댁의 앞 들. 해가 넘어가고 논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다. 이제 석모도를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이제 선착장으로 다시 나가 강화로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차에 올라 좋은 기분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두 군데에 마을이 더 있었는데, 한 군데는 들렀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다른 한 군데는 이미 어두컴컴해져서 보지 못했다. 사실 먼저 들른 곳에도 뭔가 캐면 나올 법했지만, 어둠이 깔리고 있던 만큼 할머니께서 맘을 딱 닫아 걸으셔서 더 머뭇거리면 폐가 되겠다 싶어 눈치봐서 나왔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완전한 어둠이다. 그래도 석모도에서 꽤 성과가 있었다. 시작과 끝이 좋으니 중간에 허탈하고 힘들었던 순간은 싹 잊혀진다. 내일 하루도 오늘만 같아라. 특히나 내일은 강화도 조사를 끝내는 마지막 날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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