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서로 낭궈 심어요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밖부터 확인했다. 설마 어제 온 눈이 얼었을까? 다행히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 눈이 녹고 있었다. 하늘이 돕는 것이다. 8시에 만나 아침을 먹고 9시부터 조사에 나섰다.
오늘은 어제 잠을 잔 곳인 내가면 황청리부터 시작한다. 내가면이란 이름이 참 독특하다. 한자로는 內可인데, 음을 빌려다 쓴 것 같다. 지도에 내가면 황청리 샘말이라 표기된 곳으로 차를 몰았다.
다니고 다녀도 토종을 만나지 못했다. 아침부터 헛탕치는 일이 많은 것이, 땅도 질척거리고 좋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한 번 월척이 걸리는 법이다. 그렇게 헤매다가 황청2리 671번지에 사시는 박수자(68)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할머니에게 시할머니 때부터 심었다는 50X20cm의 긴호박을 얻었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풋호박일 때도 맛있고, 잘라 먹기도 좋으며, 속이 노랗다고 한다. 이거 말고 동그란 호박도 있는데 그건 금창 쇤다. 씨가 그렇게 많이 들지도 않는다. 또 모내고 나서 심궈 가을에 벼 수확할 때 거둔다는 작고 동그란 적팥을 얻었다.
박수자 할머니. 집도 오래되고, 옛 물건도 많았지만 이제 몸이 아파 농사도 잘 못 짓는다며 씨도 별로 없다고 하신다.
다음은 황청1리 양지말의 유난심(60) 아주머니 댁에 들어갔다. 날은 따뜻하지만 안개비가 슬쩍 내린다. 아주머니 댁의 안마당은 지방에 잇대어 막아 놓아서 비를 피하기 좋았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강화도 사투리에 많이 묻혔지만 얼핏 전라도 말을 쓰신다. 그래서 어디서 시집오셨는지 물으니 역시나 전라도에서 오셨단다. 성격이 아주 화끈하셔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밝고 떠들썩한 성격이 어디서나 사랑받는 건 당연하겠다.
긴박을 설명하시는 유난심 할머니.
몇 년 전 동남아시아에 놀러 갔다가 가지고 오셨다는 긴박을 하나 얻었다. 이건 늦게 심어야 하는데, 일찍 심으면 잎만 무성하고 안 좋단다. 씨가 안 생겼을 때는 따서 말렸다가 나물로도 볶아 먹는다. 또 소고기나 조개살 같은 걸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해, 마늘 양파 치고 국을 끓이면 아주 맛있단다. 향이 기가 막힌데, 처음 먹는 사람들은 싫어한다고 귀뜸하신다.
앞마당에는 조그맣게 화단을 꾸미셨다. 거기에서 닥풀의 씨앗을 채집했다. 이걸 보리차 마냥 볶아서 차로 마시고, 콩처럼 밥에도 앉혀 먹는단다. 전라도 분이라 그런가? 강화도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걸 먹을거리로 만들어 드신다. 안마당 대문 쪽에 화로에는 군고구마가 맛있게 익고 있다. 이거 먹을 사람도 없으니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하신다. 난 배가 불러 사양했지만, 안완식 박사님과 한영미 위원장님은 엄청 맛있게 드신다. 배만 안 부르면 먹겠구만, 아깝다.
동남아시아에서 물 건너온 박. 이렇게 몰래 몰래 가져다 심어도 되는구나. 현대판 문익점이 얼마나 많을까?
이 할머니 댁에서 조그만 낫을 보았다. 오래 써서 날이 닳고 달아 지금은 조막만하다. 날의 길이가 15cm밖에 안 되고, 자루는 30cm이다. 근검절약의 표상이랄까, 부지런함의 표상이랄까. 이런 농기구를 보면 가슴이 짠하다. 그리고 내가 잘 보는 건 손이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 보는 젊은 아가씨의 하얗고 실핏줄이 내비치는 가느다란 손에서는 관능미를 느끼지만, 농부의 거칠고 투박하며 갈라지고 터진 손에서는 노동의 숭고미를 느낀다. 내 호미는 몇 년째 쓰건만 아직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다. 뭐 워낙 일이 적고, 쓰는 일이 별로 없다보니 그렇겠지.
다음은 그 옆집으로 건너갔다. 황청리 371번지의 김옥순(77) 할머니 댁이다.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고, 엄청 고우신 할머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마음씨가 고우셔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남한테 뭘 나눠주길 좋아하신다.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신다는데 정말 믿음이 깊으신 어른이다. 종교의 힘이 제대로 발현되었을 때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시는 할머니이시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교회 십자가가 많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며 사는 교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겉모습에만 치중하지 말고 이제는 속마음도 잘 다스려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했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집은 완전히 보물창고였다. 우연히 방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전화기는 70~80년대에나 쓰던 녹색 다이얼 전화기이고, 시계는 태엽을 감아 밥을 주는 부랄시계, 여기저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들 투성이다. 씨앗보다 이 집의 물건들이 더 탐이 나는 건 왜일까? 씨앗도 이것저것 계속 나온다. 그 바람에 몇 번을 나가려다 돌아서고 했는지 모른다. 얼마나 꼼꼼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잘해 놓으셨는지 모른다.
그렇게 얻은 씨앗은 이렇다. 먼저 빨간팥, 작은 알이고, 맛이 좋아 아는 사람은 계속 찾는다. 아이 적부터 그냥 그 팥으로 계속 심으신단다. 이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의 아버님이 예전 교동군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집안도 좋으시네. 그럼 할머니의 기품은 그런 데에서 오는 여유로움일까? 다음은 맛있어서 사위만 준다는 사위동부, 대가리가 붉으스름하고 아래는 하얀 순무. 이건 할머니가 일부러 씨를 하얀 것만 받았단다. 농민이 훌륭한 육종가라는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할머니다. 하얀 것만 받은 건 그게 더 맛있고 단단해서 그렇단다. 그러면서 이것도 좀 섞였을 거라고, 왜 그런고 하니 나비가 왔다 갔다 하면서 그랬을 거라고 하신다. 안완식 박사님이 무릎을 치며 정말 대단한 할머니라고, 오늘 참 잘 만났다며 함께 사진을 한방 찍으셨다. 정말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대단하신 분이다. 옛날에 동네에서는 호랑이 할머니로 소문이 나셨을 만큼 꼬장꼬장한 할머니셨는데, 지금은 연세도 있으시고 그냥 맘씨 좋은 할머니가 되셨다.
다음은 완두와 황차조, 또 녹두를 얻었다. 녹두는 초복 한 열흘 앞두고 심어서, 가을이 늦게 오면 늦게까지 따먹고, 일찍 오면 한물 덜 먹는단다. 마늘 감자 캐고 심으면 딱 좋단다.
몇 번을 다시 들어가고 한 결과, 참 많이도 얻고 많이도 보고 들었다. 또 만나 뵙고 싶은데 할머니가 언제까지 사실런지는 모르겠다. 너무 안타깝다. 이런 어르신들이 이제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면 누구에게 옛것을 찾을 수 있을까?
김옥순 할머니가 직접 씨를 받아 육종한 순무. 오른쪽의 하얀 것이 그것이다.
김옥순 할머니 댁에는 아직도 제비가 찾아온다. 정말 제비는 맘씨 좋은 사람을 알아볼까? 동서를 막론하고 동화를 보면 제비는 늘 착한 사람을 돕는다는데...
이제는 어제 만나지 못한 유봉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차례다. 오늘은 만날 수 있으려나, 꼭 집에 계셔야 할 텐데... 바다를 막아 생긴 논둑길을 따라 논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망월3리로 달렸다. 지나는 길에 먹이를 먹고 있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새들이 바글거리면 그것도 장관이겠다. 왜 사진을 찍으러 힘들게 철새도래지까지 가는지 이 광경을 보니 이해가 간다.
논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기러기 떼.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는 이를 이용해 관광자원도 삼고, 거름도 삼는다는 뉴스를 보았다. 우리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망월3리에 도착했다. 어제는 눈 때문에 보지 못한 풍경이 이제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회 건물이다. 새들이 많이 찾아와서일까? 목사님의 감각이 남다르다. 종이학 모양으로 교회를 지어 놓았다. 교회에 들어가서 이 건물을 지은 까닭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유봉현 할아버지를 찾는 일이 급선무다. 다시 할아버지 댁을 찾아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집 앞에 놓인 콩 낟가리만 만지작거리다 돌아섰다.
망월3리의 종이학 교회. 이곳에 찾아오는 철새와 함께 충분히 명물이 될 수 있겠다.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이번에는 차를 몰고 어제 갑자기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다 돌아보지 못한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하점면 망월리 27번지 다운이라는 곳에 사시는 이장우(69)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할아버지께서 다운이와 관련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갈마산에서 신선들이 말을 타고 여기에 와서 말을 매고서 바둑을 두었는데, 다 두고 나서 바둑돌을 땅에다 묻었단다. 사람들이 그걸 찾으려고 했지만 못 찾았는데, 그걸 찾으면 돈이 된다는 이야기.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 어떤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이 어르신은 농사를 크게 전문적으로 짓는 분이셨다. 저장고도 크고 예쁘게 지어 놓고, 그 안에 호박고구마와 자색고구마, 야콘을 갈무리해 놓으셨다. 요즘은 자색고구마가 건강식으로 잘 팔린다고 한다. 그런데 자색고구마가 뉴질랜드인가에서 들어왔다고 하시는데, 나도 올해 자색고구마를 수확했다. 나는 지난해 호박고구마를 사다 심은 뒤 수확해서 먹다가 남은 고구마에서 나온 순을 따다가 밭에 심었다. 거기서 나온 놈 가운데 일부가 자색고구마였다. 안완식 박사님께 말씀을 드리니,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좀 더 따져봐야 한다고 하신다. 아무튼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게 돌연변이가 생겨 맛도 떨어지고 별로가 아닐까 생각해 대충 던져 놓았는데, 집에 가면 다시 찾아봐야겠다. 맛도 보고 또 심어도 봐야지.
이장우 할아버지.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너무 건강하시다. 50대라고 해도 믿겠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긴 늘어났다. 집 안은 농산물로 어지러웠다. 농사도 많이 지으시고 여러 가지를 하신다. 정미기도 사서 동네 사람들 것까지 찧어 주는 등 일이 정말 많으셨다. 이런 분이 성공하셔야 한다. 남의 등쳐 먹는 놈들 말고.
이장우 할아버지 댁을 나와 고갯길을 넘어 오상리 쪽으로 가려고 한다. 가는 길에 신삼2리 406번지의 김옥선(75)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머니는 여기에는 22살에 시집을 오셨는데, 그때부터 심는 강낭콩과 밤색의 둥근 칠월두, 강화마늘, 서리태를 얻었다. 전에는 농사를 꽤 지었지만 이제 할아버지가 안 계셔서 조금만 심는다고 하신다. 다니면서 보니 두 내외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안 계시면 참말 쓸쓸하고 적적한 것이, 살려면 둘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전에는 왜 이혼하고 그 싫은 결혼을 또 할까 했는데, 결혼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처음부터 독신이었으면 또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또 차수수를 얻었는데, 일찍 심으면 비둘기가 빼 먹지만, 늦게 심으면 벼 먹느라 괜찮다고 한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예전에는 콩밭에 섞어 심었는데, 이제는 빼기가 힘에 부쳐서 밭에 가장사리에 따로 심는단다.
신삼리를 뒤로하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니 다시 망월리 다운이이다. 언덕을 넘자마자 좋은 자리에 자리 잡은 큰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안완식 박사님이 그 집을 찍으셨다. 무엇이 있으려나, 문 앞에 다가가 사람을 불렀다. 마침 사람이 있었다. 나온 것은 젊은 아주머니. 토종 씨앗 이야기를 던지니 자신은 지금 나가야 하는데, 혹시 어머니께서 알고 계실지 모른다며 지금 경로당에 계시니 거기 가서 만나보라고 알려주신다.
알려준 대로 경로당에 도착하니 밥 냄새가 폴폴 콧속으로 들어온다. 이거 벌써 점심 때가 다 되었구나. 알려준 대로 고남수(76) 할머니를 찾으니, 걸걸한 목소리의 할머니 한 분이 당당히 걸어나오신다. 한 성격 하시는 분이란 감이 팍 온다. 이런 분이 또 화끈하셔서 뒤끝도 없는 법이지. 복지관에서 운동 가르쳐주러 나오기로 해서 오늘은 조금 일찍 밥을 해 먹었다고 하신다. 조금만 일찍 오면 뭐라도 같이 먹었을 텐데 아쉽다면서. 차로 댁으로 모시고 와 씨앗을 보여 달라고 했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 한 대를 꺼내시더니 입에 착 물고 불을 붙이신다. 황야의 무법자 같은 기운이 뭉게뭉게 담배연기와 함께 피어오른다. 할머니께서 이것저것 보여주셨는데, 그 가운데 넝쿨콩과 갓, 차수수만 얻었다. 나머지는 이전에 다 한 번씩 본 것이라 관두었다.
고남수 할머니. 담배를 줄이시고 건강히 사시길 바라며...
고남수 할머니 집 앞의 느티나무. 이 나무 아래에서 신선 둘이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그럼 할머니 네서 바둑돌을 찾아서 부자가 된 것일까? 살림살이에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고남수 할머니 댁을 나오며 안완식 박사님께서 이 근처에 오이를 심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신기하게도 저 아랫집에 가면 그런 사람이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 할머니를 다시 경로당에 모셔다 드리고 그 집으로 향했다. 이 집은 하점면 망월리 73번지 강순덕(67) 할머니 댁이다. 마침 할머니께서는 어디 안 가시고 집에 계셨다. 되는 날은 이렇게 일이 이루어진다.
할머니는 돼지오이라고 부르는 토종오이를 심고 있었다. 특징은 퉁퉁하고, 서리 내릴 때까지 따먹는다는 것이다. 가시는 없고, 익으면서 살이 트는 것처럼 껍질이 변하고, 단맛이 나며 아작아작하다. 48년 이상 된 씨앗으로 시어머니 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 메수수와 멧짝호박을 얻었다.
"아니 그런 건 가져다 뭐에 쓸려고 그러세요." 라고 물으시던 강순덕 할머니.
망월리에서 오상리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갯길에서 미꾸지라는 동네를 들렀다. 미꾸라지가 많아서 미꾸지인지, 아니면 미꾸라지처럼 생겨서 미꾸지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지도에서 미꾸지라고만 보고 이곳에 사시는 전옥순(72)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연기가 나오고 있어 사람이 있는 줄 알고 밀고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토종 오이를 볼 수 있었다. 이것도 옛날부터 심는 것으로서, 가지가 많이 치고 한참 오랫동안 열린다. 덩굴을 뻗어 타고 올라가지 않고, 오이가 20~30cm쯤 된다고 한다. 사다 심으면 몇 개 안 열리고, 외줄로 타고 올라가다 말아서 그냥 이걸로 심는단다. 그러면서 요즘 세상은 참 이상하다고, "맛 보고 먹지 않고, 빛 보고 먹는다"고 한마디하신다. 빛깔만 좋으면 좋은 건지 아는 세상이다. 오래되고 낡은 건 버려야 할 것이고, 새롭고 화려한 것만 좇는다. 골치 아픈 가치의 문제는 둘째 치고, 익숙하고 편한 것이란 개념으로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엌에서 일하다 나오셨다. 한창 저녁거리를 마련하시고 계셨는지 부엌에서 솔솔 좀 비릿한 내음와 함께 군침 돌게 만드는 음식 냄새 때문에 더 출출했다.
전옥순 할머니 댁 부엌의 살강과 부뚜막, 가마솥, 아궁이. 이것도 전통이고 토종이다. 대부분 부엌을 현대식으로 고치면서 살강 같은 것은 가장 먼저 없애는데, 아직도 살강을 쓰고 있다. 부엌 한켠에는 화분을 놓고 화초를 키우고 계셨다.
미꾸지를 지나면서는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는 시간만 보냈다. 사람이 없거나, 사람이 있어도 토종이 없거나 기운 빠지는 일들의 연속. 사람이 보이질 않아 할 수 없이 한 마을에서는 경로당을 찾아갔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서 민화투를 치며 놀고 계셨다. 이렇게 할머니들이 모여 계시면 뭐 하나를 얻기가 힘들다. 토종 씨앗 이야기를 하면서 있는 분 손을 드세요 하고 유도해 한 할머니만 집중 공략했다. 그 일은 한영미 위원장님이 맡았다. 그렇게 할머니 한 분을 끄집어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 꼭대기 부근에 있어 그곳까지 함께 올라갔다. 내가면 오상리 563번지에 사시는 조경애(73) 할머니 댁에서 토종 오이와 박을 얻었다. 토종 오이는 어릴 때부터 심던 것으로, 어릴 때 따면 달고 맛있단다. 아삭아삭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이지를 담기에 좋다고 하신다. 박은 수박나무를 사다 심었는데 거기에서 지가 알아서 달렸단다. 그렇게 3~4년 되었는데, 박국이 맛있어서 추석 무렵에 그걸 끓여 먹으려고 계속 심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따로 씨를 받아 놓으신 것이 없어 땡땡 언 박을 땅에 내리쳐서 깬 다음 씨를 긁어 모았다. 정말 별의별 짓을 다하고 돌아다닌다.
이후의 시간도 지루하디 지루한 방랑의 시간. 내가면 고려저수지 부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런 곳에는 이미 펜션 단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거나, 아니면 전원주택들뿐이다. 농사짓는 곳에 농가는 없고, 농가는 있어도 사람은 없고, 사람은 있어도 토종은 없고. 농촌은 정말 버림받은 곳인가? 돌아다니며 보는 농촌의 현실은 너무나 비참하다. 이런 곳에 내려와 살라고 하면, 솔직히 이제는 자신 없다. 예전에는 젊은 혈기라도 있어 미친 척 맨땅에 박치기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부비고 했을 텐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그만큼 머리가 굵은 것인지, 현실을 아는 것인지, 타협을 한 것인지, 약삭 빨라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어려운 일을 결심한 분, 그리고 실제로 맨땅에 박치기하고 있는 분들께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고려저수지 인근을 다 돌아 강화읍 쪽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연촌이란 마을에 들렀다. 이제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 어두컴컴해지기 일보직전이다. 오늘 하루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더 빨리 해가 넘어갔다. 고천4리 261번지 강신영(69) 할머니 댁을 마지막으로 들렀다. 아들과 함께 있었는데, 아들은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막둥이일까? 나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였는데, 토종 이야기를 하니 콧방귀를 뀐다. 이제 그런 거 해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무엇이 농촌을 이렇게 바꿔 놓았을까? 농촌은 왜 희생만 강요 당하고, 버림 받고, 눈치만 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을까? 먹어야 사는데,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뿌리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그 나무가 오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농업은 우리의 뿌리다.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추길 바란다. 아무튼 육모참깨 하나만 얻어서 씁쓸하게 그 집을 나섰다.
산비탈을 넘고 여러 마을을 지나며 몇몇 집을 더 찾아 들어갔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래도 낮에는 괜찮았는데, 해도 넘어가고 성과도 없고 보이는 건 영 마뜩잖고 가슴속이 헛헛하다. 더군다나 오늘은 한영미 위원장님이 돌아가신다고 한다. 그래도 셋이 다니는 게 딱 좋은데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강화읍 버스터미널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안완식 박사님과 둘이 강화읍의 하트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내일은 석모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의 아쉬움은 저 멀리 날려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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