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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거 잘 얻어 갑니다

 

 

2008년 12월 1일. 하늘이 흐리고 축축하다. 비라도 올 것 같은 궂은 날씨.

 

오늘도 어김없이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아침을 먹으로 하점면의 풍년식당으로 향했다. 정말 밥이 일품이다. 밥만 있어도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정도로 말이다. 이런 걸 사진으로 찍을 걸 그랬나? 그러면 밥에 집중하지 못한다. 먹을 땐 먹는 데 충실할 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9시 조사에 나섰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송해면 솔정리다.

솔정리에 들어서니 짐승들 밥을 챙겨 주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아침 마수걸이가 어떨라나. 차에서 내려 다가가 토종 씨앗이 있는지 할아버지께 물었다. 음... 없단다.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꼈는데 역시 남자는 헛방이다. 들떠 달아오르기만 잘할 뿐, 진득하니 받고 모으고 갈무리하는 건 여자의 몫이다. 

 

여러 짐승들을 키우시던 할아버지. 따로 성함을 적지 못했다. 그래도 기념으로 한 장.

 

 

솔정리에서는 별 수확이 없다. 다니다 보면 이런 마을도 있게 마련이다.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자. 아마 논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논농사에 힘을 기울여야 하니 밭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이지. 아무튼 솔정리는 참 들이 넓다. 강화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간척을 했다니 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런 것이 이곳은 강화읍의 고려성과 가깝지 않은가. 몽고에 쫓겨 도망온 귀족들이 먹고 살려고 이런저런 씨앗도 많이 가져오고 농사땅도 넓히고 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생각에 잠길 틈이 없다. 가장 빠른 길로 다음 목적지까지 넘어가야 한다. 차에 길도우미는 있지만 그년은 그저 위치나 확인하는 도구일 뿐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곳은 길도 없는 농토 한가운데라고 나오니... 솔정리의 너른 논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 바로 옆의 대산리로 넘어갔다.

 

대산리, 한자로는 大山이다. 주변에 큰 산도 없는데 대산이 된 걸 보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뭔가 변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난리에 숨어 살던 곳이라 '숨은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二十谷이라 한 예도 있다. 숨은골 -> 수믄골-> 스무골이 한자로 이십곡이 되었을 것이다. 이건 물론 일제강점기에 서둘러 전국에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생긴 일이다. 우리의 땅이름을 보면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만 빌린 이두식이나 한자의 뜻을 풀어서 다시 우리말의 원래 이름이 무엇일지 유추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산리도 솔정리와 마주하고 있어 대부분 논농사를 짓는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눈으로 확인하고 넘어간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그래도 한군데라도 들러야 하지 않을까 하여 어느 집을 들렀다.

 

 

 

 강화읍 대산리 720번지 노흥임 아주머니 댁 전경. 이곳을 줌박골이라 한다.

 

어제는 일요일이라 사람을 보기 어려웠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니 집에 계시겠지. 아니 일요일에 쉬었으니까 월요일에는 더욱 밖에 나가시려나? 일단 사람을 만나야 한다. 아무래 토종이 있어도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헛수고다.

문을 두드리며 누가 계신지 불렀다. 다행히 젊은 아주머니께서 나오신다. 올해 51세이신 노흥임 아주머니. 다들 아시다시피 시골에서 50대면 새파란 젊은이에 속한다. 아주머니께 사정을 설명하고 씨앗이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집 바로 옆에 있는 창고에서, 또 뒤란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여기저기에서 씨앗이 나온다. 씨앗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두 자기 자리가 있다. 

 

잘 갈무리해 놓은 상자에서 씨앗을 꺼내 보여주고 계신 노흥임 아주머니.

 

지리지 않고 달며 크게 자라지 않는다는 뿔시금치, 맛이 파삭하고 잘고 달며 껍질이 얇은 완두는 밑지지 않고 계속 내려 받아 심는다고 하신다. 오라됐다는 파랗고 빨간 갓, 특히 빨간 갓은 고추가루 색도 죽일 정도라니 그 김치를 한번 먹고 싶다. 자루가 긴 편인 검은찰옥수수, 키가 1.5~1.6m쯤 큰다는 찰수수와 빗자루 묶으려고 한쪽에 놔둔 댑싸리는 직접 부벼 씨를 받았다. 논농사를 크게 짓는다고 해서 토종 씨앗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었구나. 내 생각이 짧았음이 바로 여실히 드러났다. 역시나 결국은 사람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씨가 있고 없다.  

 

 

 노흥임 아주머니 댁 뒤란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만들어 놓은 무 움. 숨구멍 겸 무를 꺼내는 구멍에 짚을 박아 놓았다. 요즘은 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재수가 좋았다.

 

 노흥임 아주머니 댁 찰수수. 이삭자루가 짧지만 탱글탱글 알이 잘 달렸다.

 

 빗자루 매려고 놔둔 댑싸리. 국민학교 때 아이들끼리 댑싸리 빗자루를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댑싸리비는 잘 쓸리고 다루기도 좋았다. 그런데 요즘은 제초제 때문에 이마저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 흔한 댑싸리가!

 

 텃밭에 자라고 있는 갓.

 

다시 차에 올라 기약 없는 길에 나섰다. 날씨도 궂고, 사람도 만나기 어렵고, 사람을 만나도 별 신통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10시 반이 지나니 추적추적 이슬비까지 내린다. 아~ 하늘이시여, 날씨라도 좋아야 기운이 덜 빠지는데 어찌 이러십니까. 이슬비를 맞으며 이 집 저 집 동냥아치마냥 기웃거렸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본 돌절구. 다른 데와 달리 깔끔하게 걸려 있는 절굿공이며 아직도 쓰는 듯하여 한 장 찍었다.

 

그러다 마침내 대산리 1132번지 송학골에 사시는 이의분(84), 이기옥(85) 어르신 댁에서 고수를 얻었다. 원래 고수는 북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자시던 고수를 따라 먹다가 그 독특한 향에 빠져 아직도 씨를 받아 심는다고 한다. 그렇게만 따져도 최소 85년 이상 되었다. 할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강화도에는 전쟁 이전부터 고수가 있었다고 한다. 또 다섯 가지 종류가 섞여 있는 덩굴강낭콩을 얻었다. 맛이 좋아서 그냥 심는 것이라 하신다. 

살아오신 세월만큼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시겠다 싶어 더 듣고 싶었지만, 시간은 없고 갈 곳은 많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비가 오는 탓에 사진기를 꺼내지도 못해 아무 기록이 없어 아쉽다.

 

점심 때가 가까워지면서 비는 그쳤다. 덕분에 다니기도 훨씬 쉬워졌다.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 대산리 1226번지의 유경숙(67)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집 앞에 텃밭이 있어 여기라면 뭐가 있어도 있겠다는 감으로 무작정 들어간 집이다.

 

 광에서 나오시는 유경숙 할머니. 할아버지는 산에 낭구 하러 가시려던 참이다.

 

이 집에서는 뿔시금치는 손이 따가워 싫어 일부러 둥근 것만 골라서 씨를 받은 시금치와 붉은갓, 빨간 것만 골라 받고 있다는 순무, 두가지 종류의 강낭콩을 얻었다. 옛날 게 맛은 좋지만 손도 많이 가고 수확이 적어 안 한다는 말도 얻어 들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토종도 먹어본 사람이나 먹겠지. 그런 맥락에서 토종은 더욱더 설 자리가 없다. 요즘 사람이야 그냥 시장에서 어디서 온지도 모를 싼 값의 먹을거리나 사다 먹으니 말이다. 친환경이다 해서 새로운 농산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농약, 비료 좀 덜 했다뿐이지 맛과는 전혀 상관없지 않은가. 유기농에 맛과 환경까지 생각한다면 그 지역 지역에 맞는 토종을 발굴, 육성해서 고유한 것으로 만들어 가야겠다. 전국적으로 쏟아져 나오면 그건 아무 의미 없다. 오히려 다양성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전락한다.

 

이제 배가 고파서 안 되겠다. 일단 뭐라도 먹고 시작해야지. 그 전에 잠깐 식당 뒤편에 있는 감직골이란 동네 좀 돌아보았다. 한 고택이 있어 뭐라도 있을까 싶어 가보았지만, 주변에 있는 전원주택에 기가 팍 눌려 이제는 그 기세를 찾아볼 수 없는 집이었다. 집 주변에 널린 옛 생활도구들이 이 집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해 씁쓸했다.

 

 갈갈이 해체된 쟁기와 넉가래 같은 농기구가 집 주변에 널려 있다.

 

 

 

 널려 있는 생활도구들. 뒤로는 구들돌도 쌓여 있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연미정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을 뒤지고 다니다 옥림리 320번지 동화골에서 콩아줌마를 만났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셔서 그냥 콩아줌마라고만 적었다. 집이 야트막한 동산 꼭대기에 있는데, 이 분은 장에 다니며 농사지은 콩을 판다고 하신다. 지금 있는 건 내년에 내다팔 콩의 씨앗으로 쓸 것만 남겼다. 그걸 얻으려고 싫다는 걸 억지로 강탈하다시피 조금 얻었다. 어렵게 얻은 것은 파랑콩으로, 눈이 재색이고 콩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아 밥밑콩으로 쓴다고 한다. 씨를 얻은 건 좋지만 뭔가 찜찜해서 석연치 않다. 안완식 박사님이 수건을 마련하신다고 했는데, 그거라도 얼른 준비해서 하나씩이라도 드리면 좀 괜찮으려나.

 

콩아줌마. 날씨가 궂어 모자를 뒤집어 쓰고 마당에서 일하고 계셨다.

 

 옥림리의 한 농가에서 본 다양한 호박. 강화도에서는 멧짝호박보다 긴호박이 더 맛있다고 알아줬다.

 

 

이후 옥림리 쪽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 부근의 조사는 이걸로 마치고 선원면으로 향했다. 선원면은 이름은 도교의 근거지 같은데 불교가 융성했던 곳인가 보다. 지금은 터만 남은 선원사지의 불사 사업이 한창이었다. 그 앞쪽에 차를 세워 볼일을 보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옆에 있던 집에 들렀다.

지산리 688번지의 조장호(60) 아저씨는 아들이 농대를 나와 생물XX라는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며, 그 아들이 의뢰해 호밀을 키워 연구용으로 보낸다고 한다. 혹시 토종 호밀일까 싶어 확인하니 미국에서 수입한 호밀이었다. 옛날에는 호밀도 씨를 받았는데 이제는 사라졌다. 이 집에서도 파랑콩 두가지를 얻었다.

 

다음은 바닷가 쪽으로 가다가 선원면 신정리 도김말에 들렀다. 이곳에 사시는 문종숙(67) 할머니는 주무시다 나오셨는지 뒷머리가 살짝 눌려 있었다. 이런 날씨에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놈들이 이상한 거다. 나도 집에 있었으면 지금쯤 늘어지게 쉬고 있었을 텐데... 이게 웬 사서 고생일까 하는 생각이 할머니를 보며 잠시 스쳐지나갔다. 올해는 겨울잠 자기 틀려 먹었다. 할머니 댁에서는 빨간강낭콩과 검은나물콩 두가지를 얻었다.

 

 동글동글하신 문종숙 할머니. 뒤에서 보면 머리가 살짝 눌리셨다는...

 

바닷가로 나와 용진진 쪽으로 조금 가다가 다시 지산리로 들어섰다. 지산리 111번지에 사시는 고석준(80)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한창 일하고 계셨다. 날도 흐려 일찍 어둑어둑해지고 있을 무렵이다. 날이 어둑어둑하면 일단 집 생각이 먼저 난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오늘은 좀 덜하다. 처음 2~3일이 고비가 아닐까 한다. 어디 여행을 가도 웬만하면 그냥 오거나 하룻밤 정도만 자지 이렇게 오래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 아, 일본에 연수를 갔을 때가 있구나. 아무튼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지라 왜 이렇게 집을 좋아하냐며 아내에게 집돌이란 놀림도 받았다. 그래도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게 좋은 걸 어쩌란 말이냐. 

참, 고석준 할아버지 댁에는 할머니가 집을 비우신 관계로 마당에 있던 수세미오이만 몇 개 얻었다. 이건 1960~1970년대 정부에서 장려하던 것인데, 기차 바퀴에 썼다고 한다. 그 자세한 것은 듣지 못했다. 아마 어른들은 아시리라 믿는다.

 

맛있게 담배를 잡수시는 고석준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남이셨을 게다. 지금도 어디 굽은 데 하나 없으시고 주름도 그리 많지 않으시다. 더구나 웃는 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지산리 319번지의 구인숙(60) 아주머니 댁을 찾았다.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이제 농사는 많이 줄였다고 하신다. 연세도 그리 많지 않으신데 안타깝다. 씨앗도 아주머니가 아프신 탓에 묵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싱싱한 놈들로 마련해 놓으셨을 텐데 돌보지 않으니 자연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묵었다. 그래도 아직 콩은 밥밑콩으로 쓰려고 꾸준히 심으셨다. 몸도 좋지 않아 고생하며 지으셨을 텐데 사정을 설명하고 조금 얻었다. 이건 서리태로 10월 중순에 거둔다. 크기는 중간 정도이며 보통 서리태보다 열흘 먼저 거두는 것이다. 일찍 잘 여물지만, 그래도 맛은 늦게 거두는 서리태가 더 좋다고 한다. 그래도 농사짓기가 훨씬 수월해 그냥 이걸 심어 먹는다. 시집오기 전부터 심으셨다고 하니 최소 36년 이상된 씨앗이다.

 

 구인숙 아주머니. 불편한 몸이 확 씻은 듯 좋아지진 않겠지만 아프지 마시고 사셨으면 좋겠다.

 

이미 해는 서산마루에 걸렸다. 어둠이 찾아오기 일보직전이다. 서둘러 선원면 면소재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늘의 마지막 조사에 나섰다. 연리의 연동에 사시는 한동례(78) 할머니 댁이 포착되었다. 집이 아주 오래되고 멋졌는데, 날도 흐리고 어두워 사진에 담지 못했다. 멀리서 그 집만 보고 찾아갔을 만큼 아름답다. 집에 문이 잠겨 있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찰라, 장에 갔다 오셔서 짐을 바리바리 들고서 누구냐고 뛰어서 좇아오셨다. 그 덕에 집 구경도 하고 씨앗도 얻었다. 개골팥이라고 안완식 박사님께서 재팥이라고 하는 것과 밤콩, 넝쿨콩이 그것이다. 개골팥은 맛있어서 빨간팥보다 비싸다고 한다.

 

이제 5시가 다 되었다. 숙소를 강화읍으로 잡아 그쪽으로 가면서 금월리 379번지 큰말에 사시는 한채영(71) 할머니 댁에 마지막으로 들렀다. 집 건너편에는 순무김치 공장이 있다. 할머니는 옛날 사람 같지 않게 이름이 아주 예쁘시다. 요즘 유명한 탈렌트 이름하고 똑같으시니 말이다. 그걸 말씀드리니 쑥쓰러워하시며 웃음을 지으신다. 가이(개)밥을 끓이고 계시다가 우리를 맞아 좋은 것도 못 드리고 미안하다며 언제 또 오라고 하신다. 하지만 토종 씨앗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갓과 피마자, 라까보떼라는 남미의 호박을 얻었다. 이 호박은 몇 년이나 된 것이라는데 어디 하나 썩지도 않고 단단하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조사를 끝마쳤다. 4일을 함께 하신 박문웅 선생님께서도 오늘 돌아가셨다. 내일은 안완식 박사님과 둘이서만 길을 나서야 한다. 몇 가지 일을 해야 하니 바쁘겠구나. 하루를 마치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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