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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씨앗-작물

토종 조사 후기 2일째 - 교동도 사람들은 역사와 함께 산다

by 石基 2009.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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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사람들은 역사와 함께 산다

 

 

 

2008년 11월 29일. 오늘은 교동도로 넘어가 토종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날씨는 맑지만 바람이 세게 분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 40분 출발.

가는 길에 하점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풍년 순대국이란 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끼바리로 밥을 지었다는데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것이 밥만 먹어도 맛있다. 이후 별일이 없으면 이곳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더 자세히 소개하면 창후리 방향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에 가게가 있다. 강화도를 가시면 꼭 한 번 들러보시라. 

 

아침을 먹고 창후 선착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이미 차들이 줄을 서고 있다.

잠깐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을 겸 내리는데, 강한 바람에 자동차 문이 훽 하고 날린다. 그 바람에 옆차의 문짝을 살~짝 구겨놓았다. 젠장 이를 어쩐다. 난감하다.

다행히 주인이 너그러이 넘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거 돈을 물어줘야 하는 건가 생각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지난 봄,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열린 차문에 그대로 박으면서 차문을 아주 박살낸 적이 있다. 그때도 별일 없이 넘어갔는데, 아무튼 그 이후 또 차 때문에 깜짝 놀랐다.

 

해운회사 관계자에게 잠시 교동에 대해 물었다.

"교동이 저기 보이는 섬인가요?"

아니란다. 그것은 석모도로, 석모도는 길쭉하고 좁은데 비해 교동은 땅이 넓어 벼농사를 많이 짓기에 부자가 많다고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섬은 교동이 아닌 석모도이다. 교동도를 찍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이걸로 만족하고 얼른 차에 탔다.

 

9시 35분 드디어 배가 움직인다. 강화와 교동 사이의 빠른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길 15분. 싱겁게 벌써 도착했다.

섬 사이가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기술이 좋아진 덕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인지.

아침을 먹으며 첫 목적지로 삼은 교동면 상룡리로 향했다. 선착장에서 금방이다.

상룡리 650번지에 사시는 전흥제(72), 신월희(73) 어르신을 찾았다. 지나가며 보다가 이 집에는 토종이 있을 만하다고 느끼면 무작정 찾아가 문부터 두드리고 본다. 집을 고르는 데에는 안완식 박사님의 살아있는 경험과 독특한 방법 큰 역할을 한다.

전흥제 어르신은 교동 전씨인데, 교동 전씨는 이 섬에서 52대째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자신의 집안은 이 집에서만 3대째 산다고 하신다. 교동 전씨는 고려 말 정용산원을 지낸 전성무라는 분이 시조다. 하지만 그 유래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교동도가 고려 때부터 중요한 큰 섬이었으며,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다. 이 분의 말을 들으니, 교동도는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있던 곳이다.

 

전흥제, 신월희 어르신 댁. 상룡리로 들어가는 길에서 처음 보이는 첫 집. 처마 밑에는 강남 간 제비가 떠난 제비집이 남아 있다.

 

오랜 역사만큼 토종도 함께 살아 있을까? 역시 몇 가지 토종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겉보리와 뿔시금치가 그것이다.

 

엿기름을 하려고 집 앞 텃밭에 조금씩 심는 겉보리. 80cm 정도의 키에, 육모보리라고 한다.  

 

뿔시금치. 뿔 때문에 손이 아프지만, 맛이 좋아 밑지지 않고 계속 씨를 받고 있다고 하신다. 장에서 사다 먹는 건 아무 맛도 없다니, 궁금해서 한 잎 뜯어 먹어 보았다. 말이 필요 없다. 뿔시금치 먹어 봤어요? 못 먹어 봤으면 말을 말어. 

 

좋은 씨를 주려고 키질하신 뒤 뿔시금치 씨를 얻는 모습

 

이제 어디로 갈까? 바로 옆집을 보니 이 집도 뭔가 심상치 않다. 발길을 바로 그리로 돌렸다.

 

상룡리 631번지 조시환(71) 어르신 댁. 멀리서 보고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문 앞에 다가가 크게 외쳤다. "계세요~"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때, 저쪽에서 짐승들 밥을 주고 오시는 조시환 어르신을 만났다.

집사람이 집에 없어서 무슨 씨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신다던 조시환 어르신. 그래도 몇 가지 씨를 찾아 나눠주셨다. 많은 짐승을 키우시는 잘생긴 할아버지.

 

여기까지 찾아온 사정을 설명하며 토종 씨앗이 집에 있으신지 물었다. 그러자 남자들은 씨를 어디다 두는지 잘 모른다며 살림을 뒤지기 시작하신다. 그렇게 나온 나물콩과 적팥. 나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남자는 씨나 뿌리지 기르고 거두는 일에는 이렇게 무심한 것일까? 토종 조사를 다닌 내내 만나는 남자들 대부분이 그랬다. 우리집은 그 반대인데 말이다.

군대밖에는 섬 밖에 다녀온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옛날 건 맛있는데 배가 불러서 그런지 지금 것들은 맛이 없다고 하신다.

 

조시환 할아버지가 키우는 닭 가운데 한마리. 털이 너무 멋있어서 한 장 찍어 주었다. 어찌 도화서의 화공의 솜씨라도 이를 따라갈 수 있으랴! 먹으로 찍어 그린 닭이 그나마 이와 비슷하리.

 

이후 상룡리를 더 뒤졌다. 하지만 집에 사람이 없거나 토종은 없다는 말만 듣고 나왔다. 무슨 바람이 이리도 심하게 부는지. 섬이라 그런 것인가? 아님 날씨가 그런 것인가? 별 성과도 없는데다 바람까지 세게 부니 더 춥다.

바람이 심한 섬임을 보여주는 덧문. 육지와는 다른 창문 구조다. 

 

 

가마니를 짜는 기계. 옛날에는 윤이 번쩍번쩍하며 값지게 쓰였겠지. 토종도 전통농법도 별볼일없는 시대와 함께 이런 농기구도 그 빛을 잃었다.

 

상룡리를 떠나 농로 같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가도 가도 사람이 없는 빈 집이거나 토종이 없는 집뿐.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루하고 힘들기만 하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갔다. 먹음직스럽게 곶감을 달아 놓아 하나 빼먹고 기운을 차려 본다. 이런 건 도둑질이 아니겠지?

 

옆집으로 가 사람을 찾았다. 드르륵 거리며 열리는 문. 한창 김장을 담그고 계셨다. 무슨 일이냐며 딱딱한 얼굴로 물으시는 아저씨. 뭔가 잘못 찾아온 것일까? 차분히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아저씨의 태도가 바뀌셨다.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며 아주머니를 불러 씨앗을 꺼내 보여드리라며 우리를 친절히 대하신다.

이곳은 알고 보니 아직도 상룡리였다. 진작 벗어난 줄 알았는데 상룡리가 참 넓기도 하다. 상룡리 371번지의 전재순(68), 한정순(68) 씨가 사는 동네다. 아저씨는 예전에 교동에 있는 한전에서 근무하시다 이제 퇴직하여 농사를 짓는다고 하신다. 어제까지만 해도 딸 집에 가서 아이를 봐주다가 오늘 아침 배로 들어왔다고 하신다.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보다.

 

 100년도 넘었다는 전재순 씨 댁. 교동도의 집은 ㅁ자 구조다. 그래서인지 밖에서 볼 때는 커 보이는데, 막상 안마당에 들어서면 무지하게 좁아 보인다. 이것도 섬이라는 조건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특히 방에 불 때는 곳이 대부분 외부로 노출되어 있다. 一자나 ㄱ이나 ㄴ자 구조의 집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다. 

 

 새로 고치면서 제비집 때문에 남겨 놓았다는 부분. 우리는 제비와도 어울려 살았다.

 

 멧짝호박(좌)과 둥근호박(우). 멧짝은 멧돌이라는 말이다. 형태는 물론 속의 색깔과 맛, 씨앗의 모양까지도 다르다. 빨간 것이 당도가 더 높았다.

 

 전재순, 한정순 씨와 이야기하고 있는 안완식 박사님. 그러고 보니 세 분은 모두 동갑이시다.

 

이 집에는 이것저것 아기자기하게 많은 토종이 살고 있었다. 녹두, 피마자와 잎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피마자콩, 속이 퍼런 까만콩, 등티기콩, 밥하면 오가피 향이 난다는 오가피콩, 육모깨, 보리, 봄시금치, 멧짝호박, 둥근호박 ......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종만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토종을 만난 집이다. 하루만 늦었어도 또 인천에 있는 딸 집에 가셔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손이 많이 가고 힘들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걸 심냐고 물었다. 시골은 다 일을 하는데, 나 혼자 산에 올라가 가만히 앉아 있을 거냐며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하신다. 헤어지기 전 이 씨들을 밑지지 말고 잘 심고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드리며 집을 나섰다.

 

이제 확실히 상룡리를 벗어났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봉소리라는 곳이다. 봉황의 둥지라는 뜻인가? 이 뒷산이 봉황을 닮거나 풍수지리로 보면 봉황의 둥지 같은 곳이겠거니 하며 들어섰다. 깔끔한 한 집을 보고서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길 건너편에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누구신가 하며 보니 집주인이 아닌가. 무슨 일로 왔냐고 화통하게 물으시는 모습이 뭔가 나오려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아래서 김장하다가 괜히 뛰어왔네 라는 소리를 입에 다시며 이것도 꺼내 보여주고, 저것도 꺼내 보여주고, 나중에는 커피 끓여줄 테니 그거 마시고 가라며 자꾸 붙드신다. 얼마나 마음이 넓고 고마운지 두 번 세 번 인사를 드렸다.

 

 봉소리 595번지 김춘자(69) 아주머니.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경계는 무엇일까? 예전 같으면 할머니라고 불러야 맞을 거다. 일찍 사별하셨다는데 구김도 없이 밝고 명랑하며 부지런히 사시는 어르신이다. 

 

그렇게 꺼내서 보여주신 것 가운데 순무, 뿔시금치, 들깨, 참깨, 고수, 강낭콩 씨앗을 조금씩 얻었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꽤 오래전 안완식 박사님이 이곳 교동도에서 분홍감자를 찾았는데, 잘못해서 그 씨를 잃었다며 어디 분홍감자가 없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봉소리 신골이란 곳에 사는 신형식 씨가 그런 감자를 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셨다. 자연스럽게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이제 봉소리 신골로 넘어간다.

 

봉소리 신골에 도착하여 또 무턱대고 신형식 씨를 찾았다. 다행히 몇 집 있지 않아서 집은 찾았지만 또 사람이 없었다. 이건 씨앗 찾으려면 사람을 먼저 만나야 하는데, 사람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위쪽에 한 할머니께서 하우스에서 끝물로 딴 고추를 닦고 계셨다. 바쁘게 일하고 계셔 미안했지만 끈덕지게 붙어 앉아 씨앗을 찾았다. 그런데 어떤 우연인지 이 집은 신골 220번지로 신원식 씨 댁인데, 두 분이 친척 관계셨다. 허리가 바쯤 굽은 할머니께서 땅에 어렵사리 걸음을 떼어 광으로 쓰는 방으로 이끄셨다. 자식들이 오면 싹 치워서 무엇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셨지만, 여기저기 뒤지시더니 조선오이와 큰박, 상추, 시금치 씨를 찾아서 주셨다.

  

 신원식 할아버지 댁의 무너진 굴뚝에 앉은 그을음 자국. 이 집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여 사진에 담았다. 할머니께서 끝까지 이름 밝히기를 꺼리셔서 문패에 적힌 할아버지 이름만 적었다.

 

아랫집을 마저 돌고 오전 조사를 끝마치기로 했다. 신골 222번지 신봉균(70) 씨 댁에 들어가 건너 마을 사람한테 얻었다는 긴호박 씨를 얻고 교동읍으로 나갔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보이는 농가에도 있을 만하면 하나하나 들러 사람을 찾고 토종을 찾았다. 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큰길 주변에서는 웬만하면 토종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작로가 뚫리면 새로운 문물과 문화, 사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영향이 클 것이다.

 교동읍으로 가는 길에 만난 고구저수지. 바람이 세게 불어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쳤다. 하긴 저 둑 너머가 바로 바다다.

13시 30분 점심을 먹기 시작해, 14시 30분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잠깐의 짬도 없이 강행군이다.

이번에는 삼선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처음 만난 집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편찮으시다. 그래서일까? 집 안도 어수선하고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저런 씨를 보여주셨는데, 다 구한 것이라서 화초호박만 하나 얻어 왔다. 이건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되는 남미산 호박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삼선1리 241번지의 한유현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옛날에는 소도 풀어 먹이고 농사도 많이 지었는데, 이제는 늙어서 농사도 못 짓고 자신과 자식들 먹을거리나 좀 짓고 만단다. 왠지 그 말에서 쓸쓸함에 배어 나온다. 다른 건 없고 뒤웅박과 갓 씨를 좀 얻었다.

 

 

 

 

 인사리 447번지 한영순(66) 아주머니 댁. 겨울채비로 창문에 방풍막을 대느라 바쁘셨다.

 

삼선리는 논이 넓다. 게다가 반듯반듯 정리도 잘 되었다. 해운회사 아저씨의 말처럼 논농사에 전념하느라 그런지 씨앗이 다양하지 못하다. 별로 얻을 것이 없었다.

다음으로 인사리로 넘어갔다. 이곳도 들이 넓지만 뒤로는 조그만 뒷산이 버티고 있어 그래도 있음직해 보였다. 그리고 찍은 인사리 447번지. 과연 이곳에는 무언가 있었다. 키가 큰 찰수수와 작은 찰수수, 메주콩, 무이 씨를 얻을 수 있었다.

 

 알이 굵은 것이 키 작은 찰수수, 알이 없어 보이는 것이 키 큰 찰수수. 한영순 아주머니께서는 어디 가시려는 것도 아닌데 곱게 화장을 하시고 옷도 예쁘게 입으셨다.

 

그 밑으로 내려오니 벽에다 커다란 수수를 달아 놓았다. 자연히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인사리 451번지 나규환(68) 아저씨는 김장 무를 다듬다 나오셨다. 수수의 내력을 묻고 조금 얻었다. 마침 옆으로 소먹이로 검은콩 비지를 나르던 할아버지께 분홍감자를 물으니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옛날에는 그런 감자를 갈아서 먹었는데 지금은 소나 먹인다. 그래서 아직도 그걸 심는 곳이 있냐고 물으니 없단다. 도대체 분홍감자는 어디에 숨은 걸까? 찾을 수나 있나? 남아 있기나 한 것일까? 

 

 나규환 아저씨 댁의 수수. 이삭이 엄청나가 길다.

 

인사리를 한바퀴 돌아 더욱 구석으로 구석으로 찾아 들어갔다. 더 구석에 자리한 곳은 지석리. 이름에서 지석묘가 떠오르는 걸 보아 옛날에 사람 꽤나 살았던 곳일까?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해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기온은 한층 더 쌀쌀하다. 이제 그만 끝내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때 허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안완식 박사님이 성큼성큼 앞장 서신다. 한 할머니가 입구에 앉아 계시는데, 대뜸 이렇게 물으신다.

"할머니, 감자 있어요?"

"감자? 있지. 따라와."

이 무슨 조화인가? 할머니를 따라가니 분홍감자와 자주감자가 있었다. 애들이 좋아해서 심어 먹고, 남은 걸로는 개한테 먹인다고 하신다. 상자에는 내년에 심으려고 놔둔 감자가 들어 있었다. 분홍감자는 요즘 감자와 달리 삶으면 퍼석퍼석하고 분이 나며 맛있다고 한다. 먹어보지 않아 그저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뿐이다.

 

 지석리 서낭골에 사시는 조옥희(75) 할머니. 동네에서는 개 할머니, 돼지 할머니라고도 부른단다. 걸쭉한 입담과 맑은 웃음이 인상적인 우리의 이웃 할머니.

 조옥희 할머니가 옛날부터 밑지지 않고 계속 심고 있는 분홍감자. 싹부터 분홍빛이 도는 것이 일반 수미니 뭐니 하는 감자와 확연하게 다르다.

 

이제 교동도에서 가장 찾고자 했던 분홍감자를 찾았다. 큰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 찾아야 할 것이 하나 남았다. 이건 씨앗이 아니다. 바로 사람이다. 안완식 박사님께 처음 분홍감자를 제공한 강한옥 할머니라고 하는 분이다. 단서는 할머니 성함 하나뿐. 자세하게 기록을 해놓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신다. 그래도 촌에서는 이름만 알면 다 아는 것,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먼저 오미라는 곳에 들러 길을 물으며 강한옥 할머니에 대해서 물었다. 여기서는 잘 모르겠고 저기 인사리 교회 쪽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신다. 이 말을 전하니, 안완식 박사님께서 그 할머니가 교회 옆에 살았다며 기억을 떠올리셨다. 다시 인사리 교회 쪽으로 이동하여 마침 길을 나선 할머니에게 강한옥 할머니를 물었다. 다행히 처녀 때 옆집에 살던 분이라며 저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셨다. 할머니께서 올해 치매가 와서 안산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셨단다. 이 소식에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정말 안타까워하시며 진작 찾아볼 걸 하신다. 옆에서 보고 듣기에도 참 안타깝다. 역시 생각날 때 잊지 말고 잘해야 한다. 시간은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산천초목은 그에 따라 흐른다. 사진으로나마 붙잡아 놓을 뿐.

 

교동도, 특히 여기 인사리는 북한이 지척에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교동도에 들어올 때는 주민번호도 적어야 했나 보다. 여기서 보니 북한이 이렇게도 가까운 곳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심리적인 거리와 실제 거리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간극은 점점 더 커지겠지. 서로 자주 자꾸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않을수록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보다 더 멀리 있는 나라가 되겠지. 북한은 왜 그리 문을 꼭꼭 걸어 닫기만 하는지. 북한도 이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아직도 내전을 치르고 있는 나라가 많은 줄 안다. 하지만 분단된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지 않은가. 어서 서로 만나 어우러지는 그날이 왔으면 한다. 하지만 그런 날은 점점 늦춰지고 시대와 역사의 아픔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아물어야 흉터가 되든 뭐가 되든 할 텐데, 아물지조차 않으니 자꾸 덧나고 아프다. 

 

 저 멀리 철책 너머 보이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이곳의 지천에 나무가 널려 있는 것과 달리 북한의 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 물자가 부족하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한 교동도는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방문했던 곳의 하나다. 그가 바로 상룡리의 농가를 방문해 조사를 벌였다. 나도 그곳을 지나왔다. 자세히 뒤질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에 방문점을 찍고 다음에 다시 찾을 것을 기약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니는데 너른 들판을 앞에 놓고 우뚝 서 있는 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벌교 답사를 갔을 때 보았던 일본인 지주의 집과 같은 구조. 앞에는 간척한 너른 논을 굽어보며 다른 집들 위에 군림하듯 서 있는 일본식이 가미된 집. 순간 여기라는 직감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토종을 조사하려고 왔으니 돌아볼 짬이 없다. 이곳도 마음속에 꾹 눌러놓고 떠났다. 아쉽지만 급한 대로 사진 한 장 남겼다.

 

 인사리 너른 들. 일본인 지주의 집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집은 이 논을 굽어보며 다른 집들 위에 우뚝 서 있다.

 

 벌교 현 부자 집과 같은 구조의 일본식 집. 멀리서 그것도 잠시도 지체할 틈 없이 셔터를 누르느라 흐릿하다. 꼭 다시 찾아가야 하는 곳이 숙제로 남았다. 이번은 사전 답사로 여기자.

 

17시 20분 모든 조사를 마치고 교동면의 교동파크란 여관에 짐을 부렸다. 짐과 함께 바람에 지친 몸과 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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