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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이라도 일요인은 쉬나?

 

 

 

2008년 11월 30일 일요일. 새 아침이 밝았다. 밤새 강한 바람이 전선을 윙윙 돌리더니 아침에도 여전히 춥다.

그래도 해는 또다시 떠올랐고, 토종 유전자원 수집 조사는 계속 이어진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7시 30분이 첫 배라고 하는데, 그 배는 놓치고 8시 배를 타고 다시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교동 선착장에서 본 강화도. 배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마침 해돋이를 만나...

 

8시 15분, 어김없이 15분만에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해 바로 앞에 있는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바로 인화리를 향해 출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안을 따라 인화리로 바로 가는 길은 비포장인데다가 군사작전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 않은가. 할 수 없이 에둘러 가는 길인 별립산을 돌아가기로 했다.

 

이 길에도 곳곳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하나하나 들리면서 나아가느라 시간이 꽤 거렸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집은 하점면 창후리 753번지의 문연자(65) 아주머니 댁이다. 이 댁에서는 한우를 15마리나 키우는데, 마침 소들에게 아침을 주러 나오셨다가 우리의 눈에 띄셨다. 토종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집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60~70대의 할머니가 계셔야 한다. 남자만 있으면 십중팔구는 빈손으로 돌아서기 일수다.

문연자 아주머니께 아침 일찍 찾아온 연유를 설명하고 씨앗을 볼 수 없겠냐고 했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현관의 신발장으로 이끄시더니 거기에서 주섬주섬 갈무리해 놓은 씨앗을 꺼내셨다. 6~7년 길렀다는 고수, 팥, 녹두, 찰옥수수, 땅콩을 얻고 고마움을 전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신발장에 갈무리해 놓은 씨앗을 꺼내주시는 문연자 아주머니. 사실 인상이 이렇지 않으신데 순간포착이 잘못되었다. 더군다나 심하게 흔들리기까지... 인물 사진은 역시나 어렵다. 동의를 구하든지 아니면 몰래 한 방에 해결해야 하고, 게다가 어두운 곳에서 번쩍임도 쓰지 않고 적당한 자세를 취하실 때 찍어야 한다. 

 

차를 타고 조금 이동하니 곧바로 다른 마을이 이어졌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이 마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어디를 가셨는지 도무지 사람을 만날 수 없다. 간신히 창후리 634번지의 유덕희(76)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몸이 불편하셔서 이제 농사는 많이 짓지 않고 그냥 집에서 먹을 거나 몇 가지 하고 만단다. 다른 건 새로운 것이 없어 밥밑콩인 청콩을 얻었다. 10월 중순에 거두는데, 밥에 넣어도 좋고 두부를 해도 많이 난다고 하신다. 이 콩은 눈이 검고 속까지 퍼렇다.

 

유덕희 할머니. 농진청에서 조사를 나왔다고 하면 가끔씩 이 할머니처럼 취조받는 사람처럼 되시는 분들이 있다. 일하기에는 편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을까? 옳고 그름을 따지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다시 차에 올라 창후리 간재라는 곳에 사시는 안효철(79) 할아버지 댁에 들렀다. 마당에서 엿기름을 말리고 계셨는데, 이 집은 잠시 젊었을 때 객지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곳이란다. 성격이 깔끔하고 부지런하시다는 것이 집의 곳곳에서 풍겨나온다. 이런 분이라면 남자라도 씨를 가지고 계신다. 역시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봐야 할 일이다. 나물대콩과 메주콩을 얻었다. 이곳에서는 콩나물콩을 보통 나물대콩이라 한다. 그런데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물대콩은 나물태를 잘못 부르는 것이라고 하신다. 박사님 말씀이 맞을 거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학문 체계를 세우려면 정확한 특징을 잡아 이름을 붙여 분류하고 정리해야겠지만, 그래도 농민이 부르는 현실의 이름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좀 이름에 민감해서 그럴 수도 있다. 

 

안효철 할아버지. 집 안 곳곳이 깔끔하다. 내가 지저분해서 그런지 깔끔한 집에 가면 참 부럽고 좋다.

 

낮이 되면서 날은 많이 풀렸다. 햇살도 좋아 차안에서 햇살을 받으면 따뜻하다. 햇살이 약해지면 엄청 춥겠지. 며칠 전에 본"선샤인"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미래의 어느 날, 태양의 활동이 저하되어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온다. 특수 임무를 맡은 대원들이 우주선을 타고 폭탄을 하나 끌고서 태양에 투하하러 길을 나선다. 그 길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고뇌, 갈등이 영화의 주요 소재다. 미래를 그린 작품에는 어두운 전망이 소재로 자주 쓰인다. 그만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인간에게 잠재해 있기 때문이리라. 옛날부터 점집이나 무당이 하는 역할은, 다른 게 아니라 공포를 두려움으로 치환해 현재에 충실하며 몸과 마음을 닦도록 함으로써 삶을 편안히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오늘은 일요일. 사람들이 모두 공포를 덜고자 교회로 모여든다. 신봉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니 해병대 검문소가 버티고 서 있다. 어제 교동도에서도 느꼈지만, 북한과 정말 지척에서 살고 있구나.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 도착한 송산 마을에는 성공회 소속의 교회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주차된 차와 하나둘 모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오늘이 일요일임을, 그리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많음을 새삼 깨달았다. 강화에는 유별나게 성공회 교회가 많다. 감리교와 함께 성공회는 그 뿌리가 영국이다. 영국의 종교 전통은 어떻길래 현실에 참여하여 실천하는 성격이 강한 걸까?

  

송산 마을의 한 폐가. 초가지붕을 덮은 곳은 창고였을 것이다. 마을에는 소나무가 많은데, 그 때문에 송산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우리말로 하면 솔뫼겠지.

 

송산 마을에서는 이 집 저 짚 쑤시고 다녀도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딱 한 집. 양산면 인화리 송산의 서옥례(71) 할머니만 만날 수 있었다. 손주들이 놀러오면 주려고 강원도에서 찰옥수수를 가져다 심는다는 할머니는, 시어머니가 하던 팥과 녹두를 주셨다. 특히 할머니는 민통선 검문하는 걸 아주 불만스러워하셨다. 미친 짓하는 거리라며 간첩 하나 못 잡으면 그런다고 막 뭐라 하셨다. 민통선 안에 사는 사람의 심리는 어떨까?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여기는 내 고향이 아니라는 부평초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검문소로 나와 신분증을 찾았다. 해병대 아이들도 고생이 많다. 젊은 나이에 군대에 끌려와 고생한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가기 싫은 곳 학교와 군대. 군대의 기억은 몸서리가 난다. 눈 하나 바친 대신 딱 중간까지만 하다가 나왔으니 다행이다. 검문소를 나오면 바로 근처에 새말이란 동네가 있다. 안완식 박사님은 '새로운', '신新' 이런 게 붙는 동네는 가볼 것도 없다고 하신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씀이다. 새롭게 바꾸고 변하면 예전에 있던 걸 싹 다 갖다 버린단다. 그래도 오늘은 사람도 없고, 그래서 별 성과도 없으니 그냥 들렀다.

한 집에 들어가니 이 동네로 귀농을 한 분이란다. 그래서 자기는 없지만 옆 집 할머니는 오래 사셨으니 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친절히 알려주신다. 정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여유로운 집에서는 반응부터 다르다. 여유로워서 맘씨가 좋은 건지, 맘씨가 좋아서 여유로운 건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란 질문과 같은 오류다.

하점면 신봉리의 윤상례(75) 할머니는 참 고우시다. 할머니의 모습만큼 집도 단아하다. 말씀도 어찌나 조근조근 하시는지 모른다. 나도 저리 곱게 늙어야 할 텐데... 텃밭도 예쁘게 잘하시며 사신다. 여기서 10년 이상 되었다는 흰강낭콩, 덩굴강낭콩, 양사면의 친구에게 얻었다는 속이 빨간 청호박을 얻었다. 그러고 나오는 길에 몇 십 년 되었다는 순무를 보고 이 씨마저 얻었다.

 

 윤상례 할머니의 집.

 

윤상례 할머니. 곱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용모셨다. 옷도 너무 튀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칙칙하지도 않게 잘 갖춰 입으셨다.

 

슬슬 점심 때가 다가오니 배도 고픈데 마땅한 식당 하나 없다. 양사면 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으려나 하는 심정으로 일단 차를 양사면으로 돌렸다. 양사면 입구에는 또 검문소가 있다. 여기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북한과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다. 양사면의 북한과의 최단 거리는 2km밖에 되지 않는다. 헤엄에 자신 있다면 총만 안 맞으면 맘 먹고 건너올 거리다. 이런 곳을 아이들에게 자주 보여줘야 한다. 통일 교육은 몸으로 느껴야지. 어릴 때 철마는 달리고 싶다와 용산 전쟁박물관에 간 기억이 떠오른다. 아이는 하얀 도화지와 같다. 어른이 어떻게 세상을 보도록 이끄냐에 따라 그 아이가 보는 세상이 달라진다. 직접 이런 곳까지 와서 북한이 이렇게 가깝구나. 그런데도 서로 만나지도 못하며 사는 현실을 몸소 느끼도록 해주면 좋겠다.

 

이번 검문소에서는 돌아서 다른 곳으로 나가려고 하니 신분증은 맡기지 않겠다고 했다. 그 정도 융통성은 있어서 간단한 신상명세만 적고 다른 곳으로 나갈 때 말만 하면 된다고 한다. 조금 달리니 교산리 응곡이란 마을이 나타났다. 잠시 차를 멈추고 내려서 어느 집이 좋을지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은행을 줍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692번지 사시는 구유순(71) 할머니다.

우리 일행을 어찌나 반갑게 맞으시는지 원래 아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말씀하시는데 시어머니 신조가 손님이 마당에 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대접해서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조하셨단다. 그걸 평생 실천하고 계신 것이었다. 요즘은 현관문만 닫으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이 되니 손님 접대고 뭐고 없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다니긴 한다. 종교를 전파하려는 사람, 물건 파는 사람, 전단지 돌리는 사람... 그만큼 범죄도 잦고, 그러니 믿을 수 없어 꼭꼭 문을 걸어 잠근다. 이런 것만 보면 이거 세상이 발전하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를 기어코 마루에 앉히시더니 얼른 커피를 내오신다.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국수가 나온다. 잠깐 앉아 있는 사이 얼른 물을 끓여 국수를 만들어 오신 것이다. 어찌나 몸이 재시던지 모른다. 말도 빠르시고, 그래서인지 집안 살림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여기저기 막 쌓여 있다. 사람을 생각하고 챙기시는 마음만큼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으신데. 이 집에서만 4대째 사신다는 말처럼 집 안 곳곳에 오래된 것들이 쌓여 있다. 팥은 시집올 때부터 심어 한 50년 됐고, 참깨는 육모인데 흰색이고, 순무도 빨간 것과 흰 것이 섞여 있다. 순무는 예전에 아들이 수원에 무슨 대회에 내서 상까지 타온 적이 있다고 하신다. 단호박도 있었는데, 요즘 것이 아니라 이것도 시집올 때부터 오라된 것이란다. 오라는 오래의 강화도 사투리다. 여기는 말씨가 특히 북한과도 비슷했다. 할머니 입에서 문득 "기다려 보시라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릴 적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을 때는 이런 말을 들으면 경찰에 신고했을 거다.

 

몇 십 년 전 수원의 어떤 대회에 출품해서 상까지 받았다는 순무의 후손들.

 

구유순 할머니. 집안 살림을 정신 없이 늘어놓으셔서 여기서 어떻게 사시나 했는데, 마음씀만큼은 바다와 같이 넓다. 안마당에는 작은아들이 쓴다는 민간요법 약재도 많았다.

 

생각지도 않은 국수 대접에 배가 부르니 날도 따땃하고 졸음이 스르르 오려고 한다. 하지만 돌아볼 곳은 많고 시간은 없다. 늘어지는 몸뚱이에 채찍을 가해 무거워진 배를 안고 일어섰다. 다음 목적지인 북성리로 향했다.

어느 집엔가 골풀을 세워 놓았다. 자리라도 새로 짜려고 하시나? 중고등학교 때 귀가 닳도록 들은 내용이, 바로 강화도는 화문석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강화도에 온 지 3일이 지나도록 화문석의 화자도 듣지 못했다. 어디 한군데서만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화문석은 값싼 중국산에 밀려 돈이 되지 않아 포기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연세가 많으셔서 관두셨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자고 수첩에만 기록해 놓았다.

 

강화도에서 유일하게 본 골풀 다발. 주인 아주머니는 돈을 벌러 나가셔서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비운 집에는 조금 모자란 아들만 남아 있었다. 시골에 남은 젊은 사람은 이 집과 같아 마음이 쓰렸다.

 

다시 차에 올라 동네를 도는데 바쁘게 어딘가 가시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놓치면 안 된다. 얼른 내려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리고 집까지 가는 데 성공. 하지만 워낙 마음이 바쁘셔서 아저씨께 우리를 넘기고 바로 일을 보러 가셨다. 그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눈 분이 주남재(71) 할아버지다. 물론 이 마을에서 오라 사셨다. 집 입구에 호박 하나가 썩어가고 있어 먼저 호박의 내력부터 물었다. 10여 년 전부터 심는데 맛이 좋다고 한다. 그밖에 찰옥수수와 찰수수를 얻었다. 다니면서 보니 메 곡식은 거의 없었다. 다들 하시는 말씀이 메ㅇㅇ는 맛이 없다고 하신다. 4년 전인가 강원도 평창에 이기철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 말씀은 메 곡식이 약이 된다는 것이었다. 찰 곡식은 금방 소화가 되어 약발이 떨어진다며. 그렇지만 맛은 덜하기에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있다.

 

씨를 채취하고 있는 주남재 할아버지 댁의 호박. 나중에 한 개 얻어온 호박을 베어 맛을 보니 무척 달았다.

 

주남재 할아버지. 칼을 들고와 직접 호박을 해부해 주셨다. 

 

북성리를 한바퀴 돌아서 나가는 길에 하우스에 홀로 앉아 계신 할머니를 보았다. 다가가 말을 건네니 치매에 걸려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었다. 나이듦은 이런 것인가? 이번 조사를 다니며 나이든 분을 많이 보는데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모습이 될 거라는 예감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석가는 이런 기분에 출가했겠지.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뒤로 마당에 놓인 호박 가운데 특이한 걸로 2개만 집어 왔다.

 

북성리 요곡이란 마을에 잠깐 들렀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무슨 별장 같은 집이 많았다. 이런 곳까지 들어와 그렇게들 사는구나. 한 50대 아저씨와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 바로 동네를 벗어났다. 그리고는 강화도의 최북단인 철산리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얼마전 새로 지은 전망대가 있었다.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 땅이 훤히 보인단다. 하지만 그렇게 놀고 있을 시간이 없기에 그냥 통과. 철산리에 있는 마을은 마치 북한의 선전 마을처럼 그렇게 생겼다. 지나면서 보았기에 미처 사진까지 찍을 여유는 없었다.

 

검문소를 하나 지나 덕하리에 들어섰다. 가다가 보니 이름만 많이 들은 마리 학교가 여기에 있었다. 강화도에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있었구나. 아이들 맡기고 여기까지 오가는 부모님들의 열성이 참 대단하시다. 나도 자식을 낳으면 그렇게 될까? 알 수 없다.

덕하리 194번지의 김대형(72)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 분은 농부발명가시다. 마침 안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계셨는데, 자동으로 고추의 배를 따는 기계를 만들고 계셨다. 이걸 이십 얼마에 판다고 하신다. 손매가 재주 많게 생기셨다.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너무 멀리서 찾는다. 멀리 가야 대단한 것이 있고, 그래야 그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겠지. 하지만 파랑새 이야기처럼 내가 보고 싶고 필요한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내 주변에 있거나 바로 나에게 있다.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할 일이다.

 

가지런히 정리된 김대형 할아버지의 농기구. 말이 할아버지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시지 않는다. 마리 학교 아이들이 가까우니 이 할아버지의 강의도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는 그 유명한 장단백목을 조금 얻었다. 요즘 장단에서 콩 축제를 하는데, 실제로 장단백목이 나오지는 않고 거의 개량종이라고 한다. 그냥 과거에 콩이 유명했다는 후광으로 콩 축제를 하는 팥소 없는 진빵 같은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파주시는 장단백목을 찾고 보급해서 제대로 된 장단 콩 측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 집에서는 그 유명한 장단백목을 조금 얻었다. 요즘 장단에서 콩 축제를 하는데, 실제로 장단백목이 나오지는 않고 거의 개량종이라고 한다. 그냥 과거에 콩이 유명했다는 후광으로 콩 축제를 하는 팥소 없는 진빵 같은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파주시는 장단백목을 찾고 보급해서 제대로 된 장단 콩 측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 그대로 내달려 또 덕고개를 넘어 신봉리에 도착했다. 오늘 이 동네 정말 자주 온다. 신봉리 740번지 김범수(70), 최인강(69) 어르신 댁에 무작정 들어가 기별을 넣었다. 바로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런 것도 가져가냐며 하나둘 꺼내 오셨다. 20년 되었다는 껍질이 까만 수수, 알이 굵고 눈이 황백색인 메주콩, 팥, 들깨를 얻었다. 요즘 중국사람들이 아주 한국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했는지 이상한 먹을거리가 자꾸 들어온다고 걱정하시며, 이걸 가져가 잘 교미해서 배 이상 수확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최인강 아주머니. 중국사람들 때문에 걱정하시며 한 말씀하시는 모습.

 

이제 하루가 다 저물어가고 있다. 슬슬 몸에서 반응이 온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마지막 기운을 짜내 해가 저물 때까지는 길을 나선다. 장정2리를 잠시 들렀다. 여기는 귀농해서 잘 꾸미고 사는 집이 꽤 눈에 띈다. 젊은 아줌마 둘이 아이 둘을 데리고 집으로 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토종은 별로 살 것 같지 않다. 첫째, 길이 잘 뚫려 여차하면 사다가 심지 계속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동네 분위기가 새로 바뀌어서 오래된 건 그리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안완식 박사님의 견해였고, 진짜 그러했다. 그냥 미처 따지 않고 버려놓은 까만 덩굴강낭콩만 채집해 왔다.

 

장정리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 송해면 양오리에 들어섰다. 토종이 있을 만한 집을 발견해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서울에 나가고 계시지 않았다. 그 옆집에 산다는 젊은 친척이 나와 무슨 도둑놈처럼 취급을 하기에 기분이 언짢았다. 그렇지만 어쩌랴, 꼭 도둑놈으로 오인받기 쉬운 걸. 뭘 조사할 것이 있다고 누가 이 촌구석까지 들어와 이렇게 기웃거리랴. 그리고 사실 앞마당에 놔둔 황차조를 몇 개 주인 허락없이 따온 것도 사실이다.

 

송해면 양오리 421번지 한채덕 어르신 댁의 네모참깨. 주소와 이름은 문패에 써 있었다. 이것에 대해선 물어보지 못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참깨에는 육모와 네모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긴 그동안 참깨 농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채덕 어르신 댁에서 따온 황차조. 무척 탐스러웠다. 내가 심었을 때는 아주 빈약했는데, 역시 땅이 걸어야 하나 보다. 

 

언짢음은 툴툴 털고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불 요량으로 논둑길 한가운데를 달려 송해면 상도리로 향했다. 마침 길에서 아주머니 세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한 분은 작은 손도끼를 들고 낭구 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명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 나온다. 한 명만 찍어서 그분을 집중 공략해야 한다. 그럼 집까지 따라오라 하시는데 그럼 끝. 따라가면 이것저것 나오기 시작한다. 이번 조사를 겪으며 배운 방법이다. 

그렇게 따라간 상도리 287번지 박승옥(71) 할머니 댁. 왜콩이라 부르는 강낭콩, 연하고 가지를 많이 치며 맛이 좋다는 조선파, 나물대콩, 팥 등을 얻었다. 하루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해 뿌듯하다.

 

박승옥 할머니. 자꾸 물어보고 또 없냐고 꺼내 달라고 조르니 나중에는 귀찮다며 얼른 가라고 쫓으신다. 이제 보니 표정도 많이 굳으셨구나.

 

이 마을의 딱 한 집만 더 들러 긴호박을 얻고 5시 조금 넘어 조사를 마쳤다. 바로 강화읍으로 나가 5시 25분 남산뜰이란 집에서 영양탕으로 몸보신하다. 이럴 때일수록 이런 걸 먹어야 한다시기에 한그릇 먹었다. 안철환 선생님은 사정이 있어 잠시 집으로 돌아가셨다.

6시 하트모텔에 들어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결산도 끝냈다. 내일은 월곶, 대산, 신당리로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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