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마늘심기)
어제 가을한마당 행사를 무사히 성대하게 마친 후라 하루의 꿀맛같은 휴일이 주어졌다. 일요일에 행사를 하면 월요일에 하루 쉬는 인드라망이 너무 좋다.
노곤한 몸을 방바닥에 뉘이고 내일은 텃밭에 가서 무엇을 해야하나 궁리를 했다. '콩도 털어야겠고, 팥도 털어야겠고, 마늘도 심어야하는데...' 이건 도저히 혼자서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그냥 무식하게 소처럼 일할까 하다가 안철환 선생님 곁에서 텃밭을 하면서 배운 잡기 중에 한가지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놀러오라고 한 후 일 도움받기!" 내일 모일 수 있는 사람을 손꼽아 보기 시작했다. '누가 있을까...문정이 형님, 학교 선배 형수, 수옥누나...' 대충 이 세명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그래서 전화를 돌렸다. 예상했던 것처럼 다들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이제 한시름 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Wake up~ Wake up~!!!"
시계가 울기 시작한다. 왠만한 소음에도 잠에서 좀처럼 깨지 않는 나를 깨울 수 있는 유일한 시계이다. 실상사에서 새벽에 울려대는 종소리 보다 더 시끄러운 놈이지. 그래도 가끔은 그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알람시간을 훨씬 넘겨버리는 적도 있다.
자면 아직도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어 버리니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다. 눈 비비고 일어나 거울을 보니 또 베토벤이 되었다. 머리를 4 ~5달에 한 번 자르다 보니 3달 정도 지나면 자고나면 베토벤이 된다. 어쩔땐 전인권... 그런 내 모습을 거울로 보면서 혼자 낄낄대기도 하니 나쁘지만은 않다.
10시에 신도림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적어도 9시 반에는 집에서 나와야했다.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옥금이는 옆에서 굼뜨다고 자기 먼저 출발하겠다고 난리다. 다 시간계산해서 알맞게 움직이는 건데 왜 그리 바쁘다고 성화인지...
역시 예상대로 10시 정각에 신도림에 도착했다. 신도림역에는 문정형님이 아들 민규를 데리고 와 있고, 선배 형수도 빨간 등산복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다. 듬직한 원숭이, 아니 수옥누나는 가리봉역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1호선으로 이동. 가리봉역에서 이상없이 모두가 모였다. 이제 안양으로 향한다.
안양에서는 재래시장에 들려서 종자용 마늘을 사야했다. 내 것 한 접과 안철환 선생님 것 한 접, 총 두 접이 필요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찾아온 재래시장, 멀리서부터 재래시장 냄새가 팍팍 풍겨온다. 어릴 때는 엄마를 따라 재래시장에 자주 가곤 했다. 그렇게 따라가면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어머니가 시장갈 일만 생기면 꼭 따라붙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재래시장을 보면 그 아련한 기억들이 솟아난다.
별로 헤메지 않고 마늘을 전문으로 파는 아주머니를 찾아냈다. 한 접에 만팔천원이라기에 두 접을 사니 천원빼서 삼만오천원에 하자고 은근슬쩍 다리를 놓아보았다. 그랬더니 올해는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미안하다며 삼만육천원 그대로 받으시는 것이 아닌가. 좀 서운하긴 했지만 어쩌랴 그냥 계산을 하고 안산텃밭으로 향했다.
안산으로 가는 길은 고운 단풍길이었다. 이번 주가 단풍의 절정인듯 터질듯 부풀어오른 단풍들이 색을 뽐내고 있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곱고 곱기만 하다. 형수는 수리산 밑자락 수암이라는 동네가 마음에 드는지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다.
내가 봐도 그 동네는 참 보기가 좋다. 텃밭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알록달록 물이 들어 너무 예쁘다. 긴 터널을 지나 텃밭에 딱 도달하니 별천지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다. 알록달록은 물론 허연 억새들이 군데군데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 거기에 텃밭의 푸르름이 더해지니 평화로움 그 자체이다.
사람들에게 콩을 터는 작업에 대해서 알려주고 나는 팥을 베러 밭으로 향했다. 팥은 이제 잎은 다 말라 간신히 붙어있는 상태이고, 어떤 깍지들은 곧 터질 듯이 위태로워 보인다. 조심 또 조심하며 팥을 베어 차곡차곡 갑바 위에 얹고 등에 둘러메고 나서려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성숙 누님이 도착하셨다. 성숙 누님과 함께 나누어 들고 가벼이 원두막으로 올라와보니 사람들은 이제 얼추 콩을 다 털어간다.
조금 남아 있는 콩을 함께 털고 키질을 하려는데 안철환 선생님도 도착하셨다. 선생님은 오늘 사람들이 온다는 말에 막걸리와 두부, 김치, 오징어 같은 안주거리를 함께 들고 오셨다. 일은 무슨 일, 이제 일은 뒷전이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안철환 선생님의 유쾌함과 해박함은 이 자리에서도 만개를 했다. 다른 분들도 모두들 유쾌하게 한잔씩 걸치며 술술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옥금 어머니도 어느새인가 도착하셔서 싸오신 과일이며 오징어, 막걸리를 풀어놓으신다. 다들 옥금 어머니의 젊음에 놀라는 눈치. 참 문정형님과 안철환 선생님은 서로 동갑이란다. 같은 나이인데 참 다르네.
술판을 접는 일이 아쉬워 꼼지락 거리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네시가 가까워졌다. 이제 해가 짧아져서 더 꾸물거리다가는 마늘을 심기는 커녕 그냥 짐싸고 집에 가게 생겼다. 안철환 선생님도 해야할 일이 있으신지라 서로 아쉬운 마음을 접은채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늘을 심는다. 심는 깊이는 마늘만큼. 한 5cm 간격으로, 줄간격은 10cm. 처음엔 심는 방법에 대해서 그냥 이야기만 듣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꼬챙이를 들고 대충 쑥쑥 찔러서 마늘을 그 구멍에 쏙 집어넣고 흙으로 덮기...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뭔가 미식쩍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중간에 안철환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심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니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올라가서 직접 눈으로 어떻게 심으시는지 보고 가는 김에 퇴비도 가져와야 겠다. '허 세상에 그렇게 하는 것이였구나!' 아직 초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뭐 이러면서 배우는 것이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이거 내년에 안 자라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도 떠오른다. 하지만 곧이어 '안 되면 그만이지, 다른 거 심자' 라는 마음으로 다시 편안해진다. 그리고선 마늘에게 두통 가득 퍼온 퇴비를 듬뿍 나누어주었다. 겨울잠 자는 동물들이 가을에 엄청 먹어대듯이 마늘도 겨울을 나려면 듬뿍 먹어야 한다고 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사람이나 계절의 흐름에 맞춰서 사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다.
일을 마치니 해가 뉘엿뉘엿 서산 마루에 걸려있다. 시간 배분을 이렇게 딱 맞춰서 하다니, 참 다행이다. 오늘 일을 다 마치지 못했으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음주는 거의 일주일동안 실상사에 내려가 있어야하니 말이다. 농사는 진짜 하늘이 짓기에 때를 놓치면 반은 실패한 거라고 봐야한다.
옥금 어머니는 와서 일 안하겠다고 하셔놓고 또 막상 와보니 그렇지 않으셨나보다. 배추도 손수 묶어주고 마늘 심는 것도 거들고 콩도 키질로 싹 골라내시고 혼자 제일 바쁘게 일하셨다. 젊은 나이인데 벌써 관절 쪽이 안 좋다고 하시는데 조금씩이나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완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인데...
마음 속에 담긴 짐을 다 부려놓아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가볍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