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열무
산은 온통 물들어 불이 나고 있는듯 하다. 미세한 바람에도 온몸을 털어버릴듯 나무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어제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하더니 밤새 비를 뿌리다가 지금은 뿌연 안개비만 내리고 있다. 비가 오면 가지 않으려 했으나, 일주일 넘게 비워둔 밭이 자꾸 눈에 밟혀서 배추들이 잘 있는지 도무지 궁금해서 그냥 누워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밭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배추들을 찾았다. 몸집은 그때에 비해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속은 튼실하게 차고 있는 것이 든든하다. 약도 치지 않고 거름도 진짜 부실했는데, 이 정도로 건강하게 커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자식, 사람 물큰하게 만든다. 내년에도 또 만나면 그때는 거름 듬뿍 줄거다. 진짜로 제대로 한 번 키워보겠다.
무들은 시장에서 파는 것처럼 팔뚝만한 크기면 좋겠지만, 그저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다. 그래도 속이 꽉꽉 차서 동그랗게 생긴 것이 정말 예쁘다. 얼굴에 부비며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귀여운 아이 같다. 옥금 어머니 말로는 이 무로는 동치미 담그면 정말 맛있겠다고 하신다.
참. 옥금이 어머니는 저번에 함께 오셨던 이후로 이것 저것 조금씩 가져다 먹는 재미때문인지 뭣때문인지, 이제는 먼저 언제 밭에 가냐고 묻곤 하신다. 집 안에만 계시다가 운동도 조금씩 할 수 있고 해먹는 재미도 있고, 그렇게 해먹으면 사다 먹는 것보다 맛도 있으니 나 같아도 슬슬 따라다닐 거다. 그렇게만 따지면 일석 몇조인지 모르겠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함께 오는 것이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이렇게 함께 다니면서 은근히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해서... 더 뭐랄까...하여간 그렇다.
이제 밭을 대충 둘러보고 하우스로 향했다. 10일도 넘게 널어놓은 팥인지라 적당히 말라 있었다. 허나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마르긴 말랐으되 눅눅해서 한번에 터트리기가 힘이 들었다. 지난 주에 지리산에 가서 도리깨질의 요령을 터득하고 왔는데 도리깨질을 할 수 없는 여건이 애석할 뿐이다. 도리깨질도 금방 배우는 걸 보면 나도 은근히 눈치 하나는 빠른 편인것 같다.
하여간 그래서 할 수 없이 옥금이 어머니랑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팥을 깠다. 옥금이 어머니가 결혼해서 살아오신 이야기, 힘들었던 시절, 그걸 이겨내고 지금에 이른 사연, 이야기가 한 번 터지자 술술술 나오신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팥이 맛있어도 그렇지. 콩은 안 그랬는데 팥은 죄 벌레먹은 것 투성이다. 심한 것은 깍지의 반절이나 먹어치웠네. 너무 오래 널어놔도 안 되는 것이 있나보다. 옥금 어머니도 좀 속이 상하신지 '팥은 조금만 놔둬도 벌레가 다 먹는다'면서 한소리 하신다.
그렇게 얼추 팥을 다 털자 안철환 선생님이 오신다. 난 인사만 드리고 팥줄기를 밭으로 날랐다. 옥금이 어머니는 서둘러서 키질을 하시고 혹 벌레먹은 팥이 있나 골라내신다. 털때는 많아 보였는데 막상 터니 두 됫박쯤 될려나 조금은 망실이지만 그래도 뿌듯해서 정말 좋다.
팥을 털어낸 줄기대는 내년 거름으로 써볼 요량으로 쌓아놓은 풀더미에 얹어주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쉬~~~ 매번 밭에 오면 이 퇴�더미에 오줌을 싸주고 잘 덮어놓는다. 그래야 내년에 만날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볼 수 있을거라 믿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어서 최후의 한방울까지 짜낸 다음 그렇게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열무들이 눈에 띄었다.
'참 키가 작네 이걸 도대체 먹을 수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를 쑥 뽑아 보았다. 그랬더니 왠걸 손가락 두세개만한 굵기의 열무가 달려나온다. '오호 이정도면 왠만큼 먹을 수 있겠는걸. 이거나 솎아줘야겠다' 고 마음먹은 후 주저앉아서 열무들이 적당한 간격을 확보하고 자랄 수 있도록,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나씩 하나씩 솎아주었다.
다 솎아주고 나니까 양이 생각보다 엄청났다. 그렇다고 한 트럭 채울 정도는 아니지만 김치를 담그면 두식구 정도는 충분히 한 두세달 먹을 양이다. 뜻밖의 수확을 거두고 다시 하우스로 올랐다.
안철환 선생님은 어제 귀농본부 모꼬지를 다녀와서 아직도 술이 안 깬다고 하시면서 솥뚜껑을 거꾸로 걸어놓고 파전을 할 준비를 하신다. 옥금이 어머니는 눈치보다 먼저 가신다고 집으로 가신다. 나도 안철환 선생님을 도와 파전을 부칠 준비를 하는데 대야미 형님께서 오신다. 알고보니 오늘 벼를 베기로 약속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비가 오니 무슨 벼는 벼냐고 하시면서 대야미 형님께서 그냥 앉아서 노가리나 까자고 하신다. 그러자 한 노가리 하시는 안철환 선생님은 어제도 밤새도록 이야기했는데 또 해야한다면서 물 만난 고기마냥 신나게 풀어놓으신다. 참 이야기 재밌게 많이 하신다.
막걸리를 한 잔 두잔 기울이면서 두런 두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밤에 보는 밭은 또 다른 느낌이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뭐랄까 죽음과도 같은 고요랄까?
다들 불콰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들뜬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나눈 후 집으로 향했다. 지리산에서 정화해온 나의 정신과 육체가 이렇게 하루만에 다시 술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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