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여성성
요즘 나의 화두는 단연 여성성의 문제이다.
학술계에서나 시민운동, 생명운동 판에서나 공통적으로 주목받는 것이 여성성인 듯 하다.
인간에게는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그가 어떤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서 부각되는 것이 달라진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남성성만이 힘을 얻고 부각되어왔다는 것이다.
부계사회, 남성을 상징하는 오른쪽, 힘, 경쟁 같은 것들이 득세를 해왔다.
경제학 수업을 들었을때 선생님이 재미있는 말씀을 해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모계사회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우스개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분배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여성이 남성보다 고르게 분배하는 능력이 있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집만 놓고 보면 음식 분배와 관련된 일을 여성이 더 잘하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결과라고 한다면 그럴수도 있지만, 이 경우도 그럴수도 있는 경우 아닐까.
아무튼 앞으로는 충분한 생산물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중점이 되는 사회가 될 것인데, 그때 중점적인 역할을 여성이 담당하는게 더 낫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분열, 성장은 이제 그 극에 달해 가고 있다고 보면 앞으로는 통일, 분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즉 남성성과 여성성, 양과 음의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이냐가 핵심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둘을 같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질을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이냐 이다.
같게 만든다는 것은 전체주의와 다름없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남성성이 다시 부각될 것은 뻔한 사실이다.
다른 것들을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닌 이해, 조정, 타협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가 핵심이다.
그러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와 관련하여 동양의 음양과 오행설, 율려라는 음악론, 생장염장이라는 우주법칙을 이야기하는 증산교, 시천주 궁궁을 말하는 동학, 정역을 세운 김일부, 남사고 등을 보면 음과 양의 조화가 강조되고 있다.
또 얼마 전에 재미있게 본 다빈치 코드에서 언급되는 막달레 마리아의 문제,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말법시대, 노스트라 다무스나 에드가 케이시인가 하는 사람들의 예언도 그런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자면, 인간이 가진 세 측면인 영성, 감성, 이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지, 천지인 삼재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지가 고민이 된다.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가 진행되면 영성이 가장 걸린다.
이것은 불교나 유교, 천주교, 선가와 같은 곳에서 이야기하는 수행이라는 측면을 통하지 않고는 이야기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요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학문이나 과학의 영역보다는 뭐랄까... 거시기 하다.
직접 체험해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 이것이다 라고 탁 내놓아 보이기 힘든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 체험하고자 해도 쉽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게 뭔지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고 말이다.
해결점은 내가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는데, 워낙 게을러 싸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가 농사를 좀 지어보니 느끼는 바가 있다.
농사는 남자들이 꼭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텃밭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가족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게 하기위해서 여성들은 열의를 갖고 농사를 열심히 짓는다.
그런데 남성들 같은 경우는 경쟁에서 벗어나 좀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많이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남성들이 농사를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물론 그런 이유로 짓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생명을 느끼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씨를 뿌려서 싹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싹이 무럭무럭 커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수확하고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 감사함 등을 느낀다.
물론 애를 낳고 길러본 경험이 있는 남성은 그런 것을 알겠지만, 그런 것들을 충분히 느끼기에 과정이 너무 길고 놓치기도 쉽다.
내가 낳는 것도 아닌데 솔직히 여성만큼 뭔가를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 돈 버느라 바빠서 아이 기르는 일에도 소홀히 할 수가 있다.
그러다 보면 나와 다른 생명, 다른 사람, 다른 존재를 대하는 방식을 배우기도 전에 훌쩍 세상을 떠날 때가 된다.
나와는 다른 생명을 대하고 겪으면서 배우는 것이 정말 많은데, 남자들은 경쟁이다 뭐다 하면서 살다보면 그 소중한 것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애완동물이나 화초, 분재를 통해서 그런 경험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태어나서 자라고 거두고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농사만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그 흐름이 다시 돌아가는 것에서 끊기는 것이 아니라 내년이 되면 다시 시작한다는 순환의 의미를 느껴보는 것은 농사만한 일이 없다.
이런 농사를 지을때 강조되는 덕목은 여성성이다.
단적으로 생명을 얼마나 소중하고 가깝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수확량이 달라진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언제 생명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할 기회가 있겠는가.
한때 증권회사 노조에서 일하면서 주말마다 밭에 갔을때 나는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내가 참 많이 변했다는, 뭔가 성숙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평생에 걸쳐서 정리해야할 숙제인데, 요즘의 화두는 그런 이유에서 잡힌 것 같다.
그런 삶을 선택하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고민이 된다.
이 좋은 걸 혼자만 할 수 있는가.
혼자만 하면 속 편하고 뭐라고 하는 소리도 듣지 않고 좋은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해 보았다.
먼저 내가 처한 상황을 따져보니, 난 도시 근교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럼 내가 사는 주변 사람들인 도시민들이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야 집 밖에만 나가면 만나는 것이 생명인데(농촌에 살지만 생존의 문제때문에 찌들려 있기에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주말에 차를 타고 놀러나가지 않으면 그런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
생명을 대할 기회가 없는 도시민들 같은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집 안의 화분에서부터, 아파트 화단으로, 주변 논밭으로 ...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작업을 먼저 실행한 나라가 쿠바였다.
그들은 도시농업이라는 형태로 현재 식량을 90% 이상 자급한다고 한다.
여러 사정과 조건이 우리와는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을 본받아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들어 내면 된다.
그런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 생태체험 보다 더 시급한 것이 어른들의 마음자리를 바꾸는 일이다.
애 앞에서 냉수도 못 마신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어른들이 바뀌면 자연히 따라온다.
세상 말세다. 젊은 것들이 문제라고 혀를 차기 전에 어른들이 먼저 자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그동안 살아온 습관 때문에 바꾸기는 무척 힘이 들테지만 그래도 해야한다.
안 그럼 타인에 대해, 세상에 대해 비난하지 말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은 요즘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많이 하고 있다.
나는 어른들을 주 대상으로 만나고 싶다.
졸리다.
말이 두서 없이 나오네.
이만 끊어야겠다.
아무튼 요즘 화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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