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여느때 처럼 난 먼저 창을 열고 날씨를 확인했다. 어제만 해도 남쪽은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완전 초토화가 되었는데 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날이 쨍쨍할 것 같은 예감을 탁하고 받았다. 저번 주도 밭에 못 간지라 이번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바로 집을 나섰다. 역시나 약간 흐려있던 하늘은 쨍하니 개고 말간 파란 하늘에 햇볕이 쏟아졌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오랜만에 햇볕을 본다며 너무 좋으셨는지 뽕짝 메들리 테이프를 틀어놓고 신나게 운전하신다. 역시 사람이나 식물이나 모두 햇볕을 받아야 건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봤다.
버스에서 내려 텃밭으로 향하는 길에 눈여겨 보아두었던 해바라기는 씨앗을 맺고 무거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전부터 내년에는 해바라기를 심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중에서 가장 실한 놈을 챙겨서 가방에 담았다. 내년에는 텃밭 주변에 멋드러지게 피어 있는 해바라기를 볼 수 있을 거란 상상에 벌써부터 가슴이 행복했다.
그런데 오늘은 동네개들이 텃세를 부렸다. '어쭈 이것들 봐라'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돌멩이를 양 손에 하나씩 쥐고 위협하면서 개주인 집앞까지 슬금슬금 쫓아갔다. 헌데 이놈이 한두놈 있을때는 꼬리 내리고 슬슬 도망치더니 어느새 동네개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니 은근히 나를 위협한다. 소리를 그르렁 거리며 덤벼들 듯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삭 내 눈치를 보면서 어디 해볼테면 해보라는 듯이 전부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내가 좀 겁을 먹고 한 번 씩 웃어주고 슬슬 물러나 텃밭으로 향했다. 어릴 때 개한테 한 번 물린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나한테 개는 어렵고 무서운 존재이다.
추석이 지나니 텃밭은 가을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텃밭으로 향하는 길에 늘어선 밤나무와 참나무에서는 여문 밤과 도토리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다. 신기한 것은 밤은 송이가 떨어지는데 도토리는 가지채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새로 생긴 가지에서 도토리가 열려서 그런가? 자연의 섭리는 정말 신기할 뿐이다.
여름내내 기승을 부리던 환삼덩굴도 이제는 기세가 한풀 꺾였을 뿐만 아니라 슬슬 씨뿌릴 준비를 하는지 색도 많이 바래가고 있다. 이름 모를 풀들도 서둘러 씨를 맺고 있다. 그래서인지 밭의 분위기도 봄 여름과 달리 많이 변해 있었다. 싱그럽던 연두빛도 활기차던 푸른빛도 이제는 조금씩 가시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한 해가 갔는지 모르게 계절은 어김없이 변하고 있다.
밭에 도착하니 텃밭 작물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자란 옥수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저저번주에 육경영 형님께 따가라고 알려드린 옥수수는 형님이 바쁘셨는지 그대로 놔두셨다. 덕분에 새들과 벌레들만 잔뜩 포식을 했다. 잘 익은 옥수수를 귀신같이 알고 다 쪼아먹고 파먹어 버렸다. 그래도 남은 몇 개는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옥수수 귀신 옥금이가 제일 좋아할 거다.
여름에 마을 이씨 어르신에게 얻어 심은 콩나물 콩은 특별한 관리를 안 해주어도 엄청 잘 자라 있다. 특별히 거름을 준 것도 아니고 그냥 방치했을 뿐인데도 꼬투리를 주렁주렁 매달고 무거워서 땅바닥으로 축축 늘어져 있다. 뿌리혹박테리아가 질소성분을 알아서 고정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콩은 아무데나 심어도 잘 자란다.
들깨는 이제 씨를 맺을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비가 그렇게 자주 왔는데 어느 틈엔가 꽃을 피우고 이제 하나둘씩 지고 있다. 들기름 짤 정도로 수확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들깨가루 정도는 해 먹을 수 있을 거다. 아쉬운 거라면 깻잎 짱아치인가를 못 해먹었다는 것이 좀 아쉽다. 이번 태풍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꼴뚜기 뛴다고 망둥어가 덩달아 뛴다더니 골짜기 바람도 올해는 거센는지 크게 자란 놈들은 버티지 못하고 꺾인 놈들도 있다. 너무 튀지 않고 알맞게 자라고 볼 일이다. 요즘 아이들이 영양 과다로 웃자랐지만 체력은 형편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리라.
고추는 예상대로 이제 완전히 전멸했다. 올해 고추 농사는 너무 어려웠다. 특히 나같은 초보에게는 말이다. 숙련된 농부들도 올해는 고추농사 망해서 다 뽑아내는 판에 아무 것도 모르는 나같은 쑥맥에게는 정말 어려웠다. 그래도 병이 나기 전까지는 잘 자라주어서 너무 고마울 뿐이다. 맛있는 풋고추도 몇 번 따 먹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내년에 더 조건이 좋아지면 잘 할 수 있다. 암 잘해 볼거다.
수수는 이제 어른 키보다 더 크게 자라있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자라는 그 성장력에 놀랄 뿐이다. 이놈들은 그나마 바람에 잘 버텨서 몇 개만 넘어져 있다. 꺾이지만 않고 왠만큼 넘어져 있으면 다시 꼿꼿하게 일어선다는 것을 알기에 왠간히 넘어져 있는 놈들은 걱정없다. 힘내고 어서 열매를 맺길 바란다. 일찍 심은 다른 밭의 수수들은 벌써 발갛게 익어서 수확까지 했더라. 조금 늦었지만 별 탈 없겠지.
고구마는 이제 슬슬 수확할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도무지 그게 언제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래 보고 주변 밭에서 수확을 하면 나도 따라겠다. 초보에게는 눈치가 생명이다. 다행히 그런 눈치는 좀 있어서 처음 해보는 일도 왠만한건 척척 따라할 수 있다. 그건 둘째치고 밭이 축축해서 뿌리식물인 고구마가 다 썩어버리지나 않았는지 걱정이다.
배수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텃밭에 가는 날마다 깨닫고 있다. 논농사야 물이 적은 것이 걱정이겠지만 밭농사에서는 정말 배수가 생명이다. 그렇다고 너무 가물면 안 좋겠지만 말이다. 진짜 올해 겨울 봄에는 배수로를 확실하게 만들어야 겠다. 날마다 질퍽거리는 밭을 볼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내가 제대로만 해놓았으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텐데 너무 모르고 생각이 짧았다.
배수같은 농사일을 겪으면서 적당하게... 뭐든지 적당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적당하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 같다. 배수도 그렇고 거름도 적당히 줘야지 너무 많이 주면 웃자라거나 거름피해를 보게 된다고 한다. 그런 적당함은 농사만이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고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런 것 같다. 농사를 지으면서 적당함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인간 이란 한자도 보면 사람 간의 틈이 아니던가. 내가 어떤 맘으로 농사를 짓는지, 너무 내 위주로 생각하면 농사든 사람 관계든 힘들어지는 것 같다.
적당하게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고, 해줄 건 해주고 받을 건 받고...아무튼 뭐든지 적당하게 해야겠다.
호박은 주먹만한 것이 하나씩 달리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안 달리나 하고 걱정했었는데 그놈들을 보니 걱정이 싹 가신다. 늙은 호박을 만들어 먹을까나 어떻게 먹을까...생각만해도 흐뭇하다.
올 해 마지막 농사가 될 무 배추는 아직은 더디게 자라고 있다. 배추는 제대로 자라는 것들은 생생한데 벌레에 융단 폭격을 당한 놈들, 비실비실대며 자라지 않는 놈들이 꽤 보인다. 무는 아직 땅 속에서 고개를 내밀지 않은 것들이 많이 보인다. 다음주 다다음주가 되면 힘차게 자랄 것을 믿으며 기다릴 뿐이다.
기다림...기다림의 미학은 역시 토란이다. 언제 나오나 몇 달을 기다렸는데 하나 둘 나오더니 넓적한 잎을 한껏 펼치고 있는 요즘 모습을 보면 참 좋다. 전에 규백형님과 밭에 갔을때 토란 잎 위에 맺혀 있던 이슬 한 방울은 정말 예술이었다. 너무 예쁘다.
농사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재미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물론 사람이라서 어느 정도 생계는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에 너무 목 메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씨를 뿌리는 재미, 처음으로 땅을 뚫고 나오는 싹을 보는 재미, 무럭무럭 커가는 것을 보는 재미, 나중에 수확할 때 얻는 풍만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농사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라는 생명을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나와 주변 사람, 나와 환경, 우주까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미약하고 작은 존재인지 농사를 지으면서 다시 한 번 깨닫고 있다. 모든 것과 어울려 살 때 가장 풍족하고 아름다우며 또 그럴때만 나라는 존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하루에 몇 백 몇 천만원을 번다는 빠르고 바쁜 세상이지만, 느리지만 한 걸음씩 그렇지만 게으르지 않은 그들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반성하게 된다.
후기
옥수수는 역시 옥금이가 가장 반겼습니다. 집에 와서 쪄 먹으면서 아무 것도 안 넣고 찌기만 했는데 정말 맛있다면서 밥먹고 바로 아구아구 먹습니다. 그러면서 '나 왜 이렇게 많이 먹냐'고 걱정하는 모습이 재밌기만 합니다.
해바라기는 집에 가져와 잘 널어두었습니다. 진짜 제대로 되기만 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씨를 갈무리 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안철환 선생님께 물어봐야겠습니다.
고향이 남쪽인 분들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저의 룸메이트도 고향이 마산인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태풍에다 만조까지 겹쳐서 집안에 발목만큼 물이 찼다고 합니다. 그걸 보시면서 아버지가 자연의 힘에 인간이 당할 수는 없다고 읊조리셨다는 것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옵니다. 이렇게 기상이변이 오는 것이 모두 인간의 오만함 때문이겠지요. 앞으로 어떤 과학기술이 나와서 그런 피해를 없앨지 알 수 없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하지 않은채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대응이 과연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